윌리엄 월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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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월리스(William Wallace, 1272/6년 ~ 1305년 8월 23일)는 스코틀랜드의 기사이자 독립영웅으로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 활약하였다. 영화 《브레이브하트》의 실존 모델이기도 하다.
앤드류 머레이와 함께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을 패퇴시킨 공으로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임명되어, 폴커크 전투때까지 이 직을 유지하였다. 폴커크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게 패배한 후, 7년간 숨어지내다가 스코틀랜드 귀족의 배신에 의해 발각되어 글래스고의 부근에서 포박당하고, 잉글랜드의 런던으로 넘겨져 처형되었다.
월리암은 시인이었던 눈먼 해리(Blind Harry)가 쓴 15세기 소설 'The Acts and Deeds of Sir William Wallace, Knight of Elderslie'로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전기라기보다는 소설에 가까우며, 역사 자체보다는 전설에 기반한 것이었다. 1995년 영화 '브레이브하트(Braveheart)'는 이 소설에 기초한 것이다.
[편집] 배경
월레스의 출생지나 출생일은 확실치 않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1272년에 태어났다고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1276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전해지기를 그는 렌프루샤이어(Renfrewshire)의 페이즐리(Paisley) 근방 엘더슬리(Elderslie)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아이샤이어(Ayrshire)의 킬마녹(Kilmarnock) 근처에 있는 더웬트 파크(Derwent Park)의 다른 이름인 로랜즈 길(Rowlands Gill)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엘더슬리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월리암의 아버지인 로우 펠(Low Fell)의 데이빗 새빌(David Saville, 말콤 새빌(Malcolm Saville)로 알려졌지만 데이빗 새빌의 인장이 발견된 이후 데이빗 새빌로 정정됨)이 청지기 제임스(James the Steward)의 봉신이자 기사였다는 것을 근거로 말하지만 확실치 않다. 이에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그의 젊은시절 행보가 아이샤이어 근방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들기도 한다.
전설에서는 월레스가 평민이었다고 하지만 그의 동향인이었다는 로버트 더 브루스(Robert the Bruce)는 상류 귀족계층이었다. 월레스의 혈통에 대한 정확한 단서는 없지만 그는 웨일즈인 리처드 월레스의 자손으로(월레스는 웨일즈인이라는 의미) 훗날 스코틀랜드의 왕족이 된 스튜어트(Stuart) 가문의 봉신이자 하급 귀족에 속한 가문 출신이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1999년 재발견된 윌리암 월레스의 인장은 그의 어린시절을 더욱 아리송하게 만든다. 전해내려오는 바는 말콤 월레스 경의 세 아들 말콤, 존(John), 그리고 윌리암의 셋 중 그가 바로 막내 아들이라고 하지만 인장에 새겨진 바를 따르면 윌리암은 아이샤이어의 알란 월레스(Alan Wallace)의 아들로, 알란은 1296년 '넝마주이 이야기(Ragman Roll)'에 '아이샤이어의 왕관 점유인(crown tenant of Ayrshire)' 자격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피오나 왓슨 박사(Dr. Fiona Watson)는 1999년 3월 출판된 '윌리암 월레스 경과 아이샤이어의 연관성에 대한 보고(A Report into Sir William Wallace's connections with Ayrshire)'에서 마찬가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2002년 '윌리암 월레스'를 저술한 역사가 앤드류 피셔(Andrew Fisher)는 만일 애국자의 아버지 알란이 '넝마주이 이야기'의 알란과 동일인이라면 렌프루샤이어보다는 아이샤이어 쪽에 비중을 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했다.
월레스는 사제가 된 두 삼촌으로부터 라틴어를 배웠다. 눈먼 해리의 소설에는 월레스가 언제 스코틀랜드를 떠났는지, 1297년 전에 그가 전투에 참여했었는지의 여부를 언급하지 않았다.
월레스가 테어난 시기에 왕 알렉산더 3세(King Alexander III)는 20년 이상 통치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의 치하에는 평화롭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시기였으며 계속되는 잉글랜드인들의 침공도 잘 막아냈었다고 한다. 1286년 알렉산더는 낙마 사고로 사망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영주들은 알렉산더의 4살난 손녀 마가렛(Margaret, "노르웨이의 소녀(the Maid of Norway)")을 여왕으로 선포했다. 여왕의 나이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영주들은 그녀의 나이가 다 찰때까지 임시정부를 세워 스코틀랜드를 관리하였다. 잉글랜드의 왕 에드워드(King Edward I)는 불안정한 스코틀랜드의 상태를 이용하여 영주들과 협정(Treaty of Birgham)을 맺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2세와 마가렛을 약혼시켰다. 그러나 1290년 마가렛은 고향인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여행하는 동안 병에 걸려 8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왕위계승자라 주장하는 자들이 잔뜩 나타났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스코틀랜드가 왕위계승 전쟁 상태로 떨어질 것은 자명하였고, 지도자들은 에드워드 왕의 중재를 청했다. 중재에 앞서서 에드워드는 자신을 스코틀랜드의 최고영주(Lord Paramount of Scotland)로 대우해줄것을 요구하였고, 이는 유력한 계승후보자 존 발리올(John Balliol)이나 로버트 브루스 등의 반발을 불러왔지만 결국에는 모두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국 1292년 11월 초 버윅-어폰-트위드(Berwick-upon-Tweed)의 봉건법원은 존 발리올에게 왕위를 계승할 권리를 결정하였다. 이는 17일 에드워드에 의해 공포되었다.
왕위 계승 과정은 겉보기엔 공정하고 정당하였지만, 에드워드는 중재 과정에서 얻은 정치적 특권을 이용하여 존 왕의 입지를 자꾸만 어렵게 하였다. 발리올은 1296년 3월 에드워드와의 약조를 깨고 더이상 그를 최고영주로 대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이에 분노한 에드워드는 곧바로 스코틀랜드 국경지대의 버윅-어폰-트위드를 공격했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반대세력을 학살했고, 4월에는 로디언(Lothian)의 던바 전투(Battle of Dunbar)에서 스코틀랜드인에게 크게 이겼다. 에드워드는 7월 킨카딘 성(Kincardine Castle)에서 발리올을 퇴위시키고 8월 버윅으로 돌아가 2천여 명의 스코틀랜드 귀족들을 모아놓고 다시금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상징하는 운명석(Stone of Destiny)을 스콘 궁에서 들고 나와 런던(London)으로 가져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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