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비 무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보비 무어
Bobby Moore statue.jpg
개인 정보
전체 이름 Robert Frederick Chelsea Moore
국적 잉글랜드 잉글랜드
출생 1941년 4월 12일

잉글랜드 잉글랜드 런던 바킹

사망 1993년 2월 24일 (51세)

잉글랜드 잉글랜드 런던 원즈워스

178cm
포지션 감독(과거 수비수)
클럽1
연도 클럽 출장수 (골)
1958-1974
1974-1977
1976
1978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풀럼 FC
샌안토니오 선더
시애틀 사운더스
544 (24)
124 0(1)
024 0(1)
007 0(0)
국가대표팀2
1962-1973 잉글랜드 잉글랜드 108 0(2)
팀 감독/코치
1980
1981-1982
1984-1986
옥스퍼드 시티 FC
이스턴 AA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 FC

1성인 클럽 출장수와 골은 정규 리그 기록만 세며,
2003년 1월 1일 기준입니다.
2국가대표팀의 출장수와 골은
2003년 1월 1일 기준입니다.

로버트 프레더릭 첼시 "보비" 무어(영어: Robert Frederick Chelsea "Bobby" Moore, OBE, 1941년 4월 12일~1993년 2월 24일)는 영국 잉글랜드축구선수이자 감독이다.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의 주장으로 10여년간 있었으며,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 당시의 주장이었다. 은퇴 당시 그의 국가대표팀 출장 기록인 108경기는 잉글랜드 최고 기록이었으며, 2009년 3월 28일 데이비드 베컴이 109경기를 출장하지 전까지 아웃필드 선수 중 제일 많은 출장 횟수를 기록했었다.

선수 경력[편집]

초기 시절[편집]

보비 무어는 1956년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에 들어갔고, 1958년 9월 8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전을 상대로 등번호 6번을 달고 첫 경기를 뛰었다. 경기를 읽는 능력과 상대 선수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났었고, 헤딩 능력과 공 속도를 살려 나가는 능력도 좋았었다.

무어는 또한 크리켓 선수이기도 했다. 그는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팀 동료 제프 허스트와 함께 에식스 유스팀에서 크리켓 선수로 활약했었다.

1960년대[편집]

보비 무어의 동상

1960년에 무어는 잉글랜드 U-23팀에 선발됐다.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와 U-23팀에서 보여준 그의 영향력은 1962년에 그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에 뽑히는데 영향을 끼쳤다. 1962년 5월 20일 페루와의 원정 경기에서 데뷔전을 가졌고, 좋은 인상을 남겨 1962년 FIFA 월드컵에 출전하게 됐다. 월드컵에서는 8강전 경기인 브라질전에서 후에 득점왕을 차지하게 되는 가린샤바바에게 각각 두골과 한골을 먹혀 3-1로 패하였다. 브라질은 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1963년 5월 29일 지미 암필드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자, 무어는 12번째 출장 경기에서 22세의 나이로 첫 주장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당시 최연소 주장이었다. 암필드가 부상에서 돌아왔을때도 새로운 감독 알프 램지는 계속 그에게 주장직을 맡겼다. 1964년 FA컵 결승전에서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를 3-2로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고, 고환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받았으며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축구 선수 상을 수상하였다. 1965년에는 TSV 1860 뮌헨을 2-0으로 이겨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을 차지했고, 국가대표팀에서도 30경기 이상을 소화해냈다.

1966년 시작은 무어에게 좋기도 했고 나쁘기도 했다. 그는 1966년 6월 29일 폴란드와 1-1로 비긴 경기에서 국가대표 첫 골을 넣었으나, 풋볼 리그 컵 결승전인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 FC와의 경기에서 도합 5-3으로 패배했다. FIFA 월드컵을 2주 앞둔 1966년 6월 29일에 열린 노르웨이와의 경기에서 팀의 두 번째 득점을 올리기도 했다.

1966년 FIFA 월드컵[편집]

월드컵 이전에, 무어가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를 떠나 토트넘 홋스퍼로 이적하고 싶어한다는 내용이 언론에 돌았다. 무어는 그의 계약을 끝내려 했으나, 알프 램지의 중재와 그가 기술적으로 뛸 수 없다는 인식 때문에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과 재계약을 맺고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의 주장으로 나설 수 있게됐다. 알프 램지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감독 론 그린우드를 호텔로 호출해내 그들의 의견차를 구분했고 재계약을 이끌어냈다.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우루과이, 멕시코, 프랑스와 1조에 편성됐다. 모든 경기는 웸블리 경기장에서 열렸고, 별다른 문제 없이 조별 리그를 통과하였다.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를 꺾고, 준결승전에서 에우제비우포르투갈마저 2-1로 이기고 결승전까지 진출하였다.

결승전에서, 잉글랜드서독과 맞서게 되었다. 서독은 전반 12분만에 헬무트 할러의 골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어의 의식과 재빠른 생각이 평형을 이루어냈다. 무어가 볼프강 오베라트로부터 반칙을 당해 프리킥을 얻어냈고, 제프 허스트의 머리로 즉시 공을 띄어주었다. 그리고 제프 허스트가 득점을 만들어냈다.

잉글랜드의 승리는 마틴 피터스가 역전골을 넣었을 때 확실해지는 듯 했으나, 다시 볼프강 베버가 89분에 골을 넣어 연장전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알프 램지서독 선수들이 지쳤을거라고 확신했고, 제프 허스트가 3-2를 만드는 결정적인 골을 넣자, 경기는 쉽게 풀렸다. 뒤이어 제프 허스트가 승리를 결정짓는 한골을 더 넣어 4-2승리를 장식하였다. 제프 허스트는 유일하게 월드컵 결승전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그 날의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보비 무어가 엘리자베스 2세를 맞이할 때 나왔다. 그는 엘리자베스 2세FIFA 월드컵 트로피를 전달하려 하자, 악수하기 전 손에서 진흙과 땀을 벨벳 식탁보에 닦았다.

우상으로서의 무어[편집]

업튼 파크에 있는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챔피언 동상. 제프 허스트, 마틴 피터스, 보비 무어, 레이 윌슨(왼쪽부터)

무어는 월드컵이 끝난 후 국가적 우상이 되었다. 그는 1966년 말에 축구 선수로는 처음으로 BBC 올해의 운동 선수상을 수상했고, 대영 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았다.

무어의 인기는 올라갔고, 그는 여러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는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의 홈구장 옆에 스포츠 용품점을 차렸고, 마틴 피터스와 그의 아내 캐시 피터스, 그리고 무어의 아내인 티나 무어와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계속해서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에서 뛰었고, 1966년웨일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50번째 국가대표 출장을 기록했다. 그는 UEFA 유로 1968에 출전했으나, 첫 경기이자 4강전(네나라만 출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인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 1-0으로 져 3위를 기록했다.

잉글랜드전 대회 우승팀이었기 때문에, 지역 예선을 치룰 필요가 없었고, 무어는 계속 1군에 이름을 올렸다.

1970년대[편집]

1970년은 무어에게 씁쓸하면서도 달콤했다. 무어는 1970년 FIFA 월드컵에서 잉글랜드의 주장을 맡게 됐는데, 멕시코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 콜롬비아보고타에서 전지훈련을 하던 무어는 팔찌를 훔쳤다는 보석 상인의 제보에 연류되었다. 한 젊은 점원이 무어가 호텔 샵에서 돈을 내지 않고 팔찌를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무어는 확실히 보비 찰턴과 함께 선물을 사기 위해 호텔 샵에 있었다. 무어는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그는 후에 키토에서 열린 에콰도르와의 친선 경기에서 80번째 대표팀 출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대표팀이 탄 비행기가 멕시코에 도착하자, 무어는 바로 붙잡혔고 나흘동안 가택 연금됐다. 외교적 압력이 작용했고, 증거가 불충분해서 무죄로 입증됐고, 무어는 바로 대표팀에 합류했고 월드컵을 준비했다.

잉글랜드브라질에 이어 조 2위로 16강전에 진출해 서독과 재회했으나, 이번에는 패했다.

정상에서의 마지막 시기[편집]

1970년 8월 10일, 무어는 아내 티나 무어가 납치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납치범은 10,000파운드(한화 약 2천만 원)를 몸값으로 요구했다. 이것은 그가 프리시즌에 브리스틀 시티 FC, AFC 본머스와 친선 경기를 놓치는 계기가 되었다. 1971년 1월 7일, 무어와 다른 웨스트 햄 선수 3명(지미 그리브스, 브라이언 디어, 클라이드 베스트)은 블랙풀 FC와의 FA컵 경기 전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신 죄로 론 그린우드에게 벌금을 물었다. 당시 풋볼 리그 1부 바닥을 맴돌던 블랙풀 FC와의 경기 결과는 4-0 참패였다. 우연히, 무어는 전날 TV에 방영되었다. 무어가 과음하는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는데, 그는 보통 웨스트 햄의 체육관이나 경기장에 있었다.

무어는 1973년 509경기를 소화하며 웨스트 햄 최다 출전 기록을 세웠다. 3일 전인 발렌타인 데이에는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100번째 경기를 뛰며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다. 당시 대표팀에서 1966년 FIFA 월드컵에 출전했던 선수는 무어를 포함해 3명이 전부였다. 다른 이들은 모두 은퇴했거나 대표팀 선발에서 제외되었다.

1974년 FIFA 월드컵 지역 예선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무어는 실수를 하며 골을 내주었다. 잉글랜드는 1-1로 비겼고, 알프 램지는 6개월 후 해임당했다. 무어는 1973년 11월 14일 1-0으로 진 이탈리아와의 친선경기를 끝으로 다시 대표팀에 선발되지 않았다.

무어는 1974년 1월 헤러포드 유나이티드 FC와의 FA컵 경기를 끝으로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과 결별했다. 그는 그 후 풋볼 리그 챔피언십풀럼 FC와 계약을 맺었다. 그는 FA컵 결승까지 도달해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과 재회했으나 2-0으로 패했다. 그 후 무어는 웸블리 경기장에 다시 서지 못했다.

무어는 1977년 5월 14일 블랙번 로버스 FC전을 마지막으로 잉글랜드에서 축구 경력을 마치고, 북미 축구 리그샌안토니오 선더시애틀 사운더스에서 뛰었다.

은퇴 후[편집]

1978년 현역 은퇴 후 무어는 감독으로 변신해 옥스퍼드 시티 FC홍콩이스턴 AA,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 FC를 감독했다.

그의 은퇴 후의 삶은 좋지 못했다. 그의 사업 능력은 안좋았고 결혼생활은 끝났다. 1990년 라디오 방송국인 캐피탈 라디오에 들어가 축구분석가, 논평가로 활동했다. 1991년 12월 4일 42세의 스테파니 패를린무어와 결혼했다.

사망[편집]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 선수들과 울버햄프턴 원더러스 FC 선수들이 경기 전 묵념을 취하고 있다. 1993년 3월 6일 촬영

1991년 4월, 무어는 때문에 응급 수술을 받았다. 1993년 2월 14일에도 역시 암으로 투병 중이라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3일 후 산마리노전을 해설 중계한 후, 7일 뒤인 2월 24일 오전 6시 36분,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93년 3월 2일 장례가 치뤄졌다.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편집]

날짜 장소 상대 결과 대회 득점
1966년 1월 5일 구디슨 파크, 리버풀 폴란드 폴란드 1–1 친선 경기 1 (1)
1966년 6월 22일 울레볼 스타디온, 오슬로 노르웨이 노르웨이 6–1 친선 경기 1 (2)

영화에 등장하는 무어[편집]

1981년 그는 영화 《승리의 탈출》에 테리 브레디 역으로 출연했다.

1969년 영화 《이탈리안 잡》에서는 폴크스바겐 버스에 쓰여진 보비 무어의 이름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