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트넘 홋스퍼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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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트넘 핫스퍼 FC
전체 이름 Tottenham Hotspur Football Club
별칭 The Spurs, The Lilywhites, The Chickens
설립 연도 1882년 9월 5일
홈 구장 화이트 하트 레인
수용 인원 36,214 명
구단주 영국 ENIC 그룹(조 루이스)
회장 영국 다니엘 레비
감독 아르헨티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리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013-14 시즌 리그 6위
홈경기
원정경기
서드킷

토트넘 핫스퍼 풋볼 클럽(영어: Tottenham Hotspur Football Club)은 잉글랜드 런던 북부의 토트넘을 연고로 하는 축구 클럽이다. 홈구장은 화이트 하트 레인이다. 줄여서 토트넘 또는 핫스퍼라고 부르기도 한다. 라틴어에서 유래된 클럽의 신조는 "Audere est Facere"로 "실천이 곧 도전이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엠블럼은 축구공 위에 서있는 수평아리의 형상이다.

토트넘 핫스퍼는 1882년에 창단되었다. 1901년FA컵에서 첫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이 결과로 풋볼 리그 창립 당시 12개 클럽 중 유일하게 논-리그 클럽으로서 참여하였다. 토트넘 홋스퍼은 1960-61 시즌 리그 우승과 FA컵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20세기에 더블을 기록한 최초의 클럽이되었다. 토트넘 핫스퍼는 또한, 1963년에 대영제국 축구 클럽 최초로 UEFA 컵 위너스컵을 들어올렸다. 1980년대에는 FA컵 두 번, 커뮤니티 실드UEFA컵을 각각 한 번씩 우승하였다.

토트넘 핫스퍼는 현재 프리미어리그에 속해 있으며, 1992년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하고 나서 한번도 강등이 되지 않은 팀 중 하나이다. 프리미어리그에 함께 소속되어 있는 같은 도시의 팀인 아스널 FC, 첼시 FC와 라이벌이며 특히 아스널과의 경기는 '북런던 더비'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현재 100년이 넘은 홈구장의 노후화 때문에 새로운 6만석규모의 홈구장인 뉴 화이트 하트 레인 구장 신축 계획을 발표하였다. 빠르면 2018년에 완공될 것으로 보인다. 팀의 별명에는 스퍼스 등이 있다.

역사[편집]

창단과 클럽명의 유래[편집]

1882년 9월 5일 화요일에 Mr. Cameron's School, 지역의 중등학교 학생, 그리고 당시 4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던 핫스퍼 크리켓 클럽(Hotspur Cricket Club)의 멤버들에 의해서 핫스퍼 FC(Hotspur Football Club; Hotspur FC)가 창단되었다. 1883년부터 존 립셔(John Ripsher)가 초대 회장직을 역임했으며 1884년 현재의 클럽명인 토트넘 핫스퍼 FC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된다.

클럽명의 핫스퍼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품의 극중 인물로도 등장했던 해리 핫스퍼(헨리 '핫스퍼' 퍼시로도 불리운다.)에서 유래하였다. 해리 핫스퍼는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아들로 1402년 험블턴 언덕 전투(Battle of Humbleton Hill)에서 용맹함을 과시하며 스코틀랜드를 격파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기도 했지만 국왕 헨리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1408년 슈루즈버리 전투(Battle of Shrewsbury)에서 전사했다. 퍼시 가의 직계 혈통은 1670년에 맥이 끊겼다.

아스날과의 라이벌 구도[편집]

토트넘은 창단시기부터 현재까지 대영제국 런던 북부 토트넘 지역에서 쭉 자리 잡고 있는 클럽이다. 아스널 FC는 원래 연고지인 남부지역의 울위치가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탓에 관중들이 다른 구단들보다 비교적 적었고, 이는 구단이 다른 클럽과 재정적 경쟁에서 뒤쳐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1910년, 헨리 노리스가 당시 파산위기에 빠져있던 아스널을 인수했다. 노리스는 아스널의 연고지를 옮겨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고, 1913년, 2부 리그로 강등된 뒤 북런던에 있는 하이버리의 아스널 스타디움으로 이전했다. 아스널 스타디움과 토트넘의 화이트 하트 레인과의 거리는 매우 가까워졌고, 아스널은 그 전까지 북런던의 유일한 팀이였던 토트넘과 자연스레 대치하게 되었다.

아스널은 1919년, 2부 리그에서 5위를 차지해 승격에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부 리그 팀 참가를 20팀에서 22팀으로 늘리는 과정에서 원래 1부리그 19위로 2부 리그로 강등 예정이었던 첼시는 남게 되었고 2부 리그 1위와 2위가 1부 리그로 승격 되고 3위 반슬리나 4위 울버햄튼 중 한 팀이 승격할 예정이었으나 아스널의 구단주 노리스는 아스널이 처음으로 풋볼 리그에 가입한 남부 클럽임을 강조해 풋볼 리그 역사에 기여한 점을 들어 풋볼 리그측을 설득하였고, 풋볼 리그측은 이에 동의해 투표방식으로 1부 리그 최하위 팀과 아스널 중 한 팀을 1부리그에 승격시키기로 결정했다. 결국 아스널이 선거에서 승리해 아스널이 1부 리그로 승격되었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토트넘과 아스날의 악연이 시작된다.

1950~60년대의 전성시대[편집]

토트넘은 50년대 초부터 60년대 후반까지가 전성시대로 알려져 있다. 리그 2번 우승이 다 이 때의 기록이며, 나머지 대부분의 FA컵 우승이나 커뮤니티 실드 우승, 위너스컵 등 우승도 전부 마찬가지다. 현재도 토트넘은 FA컵 최다 우승 기록 보유팀이며, 이때 런던 시장의 부인이 컵에 푸른 리본과 흰 리본을 달아준 일화는 유명하다. 이 때의 기록은 대부분 리그 1~5위 에 들었던 때였을 정도로 토트넘은 강하였다. 이 때 토트넘에는 지미 그리브스라는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를 필두로 레스 알렌, 테리 다이슨, 바비 스미스로 이어지는 포워드진이 있었으며, 잉글랜드 최고의 공격 라인으로 손꼽혔다. 토트넘의 전설적인 캡틴 대니 블란치플라워와 그의 짝 데이브 맥카이, 존 화이트(축구선수) 그리고 정상급 레프트 윙어 클리프 존스 등이 중심이 된 미드필드진과 피터 베이커, 론 헨리, 모리스 노만 등 수비진까지 전 포지션에서 리그 정상급 선수들을 갖추고 있었다. 1962년은 '더블'을 유럽 최초로 기록한 해로 의미가 더욱 깊다.

1970년대~80년대 초반의 토트넘[편집]

토트넘은 71년, 73년 리그컵을 우승하고 81년, 82년에는 연달아 FA컵 우승컵을 들었다. 이 시기에 토트넘은 유럽대회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는데 당시 인터 시티 페어스컵이 71-72시즌에 UEFA컵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고 토트넘이 72년도 초대 UEFA컵 우승클럽이 된다. 74년도에는 준우승을 차지했고. 그리고 84년에 다시 UEFA컵 트로피를 손에 쥐며 유럽에 이름을 알렸다.

1980년대 중반~90년대 초반의 결실없던 성과[편집]

토트넘은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빅4가 시작되기전) 1984-85시즌 리그 3위, 1986-87시즌 리그 3위, 1989-90시즌 리그 3위를 기록하여 국제 대회(UEFA컵)를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나, 리버풀 FC의 훌리건들이 저질렀던 헤이젤 참사에 의해 잉글랜드 클럽은 국제 대회를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박탈되었으므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빅4'에 대항하던 유일한 팀[편집]

프리미어 리그가 시작된 90년대엔 '빅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리버풀 FC, 아스널 FC )체제였다. 거기에 2003년 러시아의 석유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인수한 첼시 FC가 추가 되면서 '빅4'가 되었고 프리미어 리그에서 이들의 행보는 아주 뛰어났다. 2004년 마르틴 욜 감독이 토트넘에 부임 후 토트넘은 이들에 맞서 UEFA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특히 2005/2006시즌 마지막 1경기 식중독 때문에 패배한것은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한 것은 2010/2011 시즌이 처음이다.

'가레스 베일'과 빅6의 등장[편집]

토트넘 홋스퍼 FC의 가레스 베일

2008-09시즌 언어 장벽을 극복하지 못하고 경질된 후안데 라모스 감독의 후임으로 포츠머스 FC해리 레드냅 감독을 임명했다. 이적시장에서는 PSV 에인트호번의 골키퍼 에우렐류 고메스, 블랙번의 미드필더데이비드 벤틀리, 포츠머스의 스트라이커 저메인 데포, NK 디나모 자그레브의 유망주 루카 모드리치, 크리스탈 팰리스의 유망주 존 보스톡, FC바르셀로나의 유망주 히오바니 도스 산토스등을 영입했다. 이후 토트넘은 2008-09시즌을 8위로 마감했다.

2009-10시즌에는 빅4 중 한 팀인 리버풀 FC과, 아랍에미리트의 정치가 만수르의 인수 후 강력해진 맨체스터 시티 FC를 제치고 리그 4위를 차지하며 UEFA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얻었다. 이 때부터 기존의 빅4에 맨시티와 토트넘이 가세하여 '빅6'라고 불리게 되었다.

2010-11 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는 챔피언스 리그 출전을 대비해 레알 마드리드의 미드필더 라파엘 판 데르 파르트, 인테르나시오나우의 유망주 산드루 라니에리등을 영입했다.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에서는 강호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FC 트벤터, SV 베르더 브레멘과 함께 A조에 속하게 되었다. 인테르와의 원정경기에서는 전반 초반에 골키퍼 고메스의 퇴장(동시에 페널티 킥 허용)으로 어쩔 수 없이 모드리치 대신 카를로 쿠디치니 골키퍼를 투입, 10명으로 경기하다 4-0으로 전반을 마감했다. 그러나 후반에 가레스 베일이 해트트릭을 달성, 팀은 결국 4-3으로 패배했지만 베일은 평점 10점을 받고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인테르의 세계적인 수비수 마이콘이 '베일을 막기가 어려웠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후 홈 경기에서 인테르를 3-1로 꺾었다. 이 경기에서도 베일은 평점 10점을 기록, 인테르를 상대로 두 번 연속으로 평점 10점을 받는 진기록을 세우게 된다. 3승 2무 1패, 승점 11점 A조 1위로 16강전에 진출했다. 16강전 AC밀란과의 경기에서는 원정 1-0, 홈0-0, 합계 1-0으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전 마드리드에게 합계 5-0으로 대패하였다. 리그에서는 후반의 부진으로 5위로 밀려나는 바람에 2011-12시즌 유로파 리그에 진출하게 되었다.

2011-12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는 맨시티에서 공격수 엠마뉘엘 아데바요르를 임대하고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의 미드필더 스콧 파커, 아스톤 빌라의 골키퍼 브래드 프리델 등을 영입하며 전력을 상승시켰다. 토트넘은 초반의 부진을 딛고 시즌 중반 3위까지 올랐으나, 레드냅 감독의 탈세 혐의가 벗겨지는 동시에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이었던 파비오 카펠로가 사임(같은 날 거의 같은 시간의 일이었다) 그 후 레드냅 감독의 잉글랜드 감독설이 퍼지며 분위기가 흔들리게 되었다. 겨울 이적시장에서는 루이 사하라이언 넬슨을 영입하며 몰락을 자초했다. 힘든 3월 후 다시 분발했으나 시즌 후반 지켜오던 3위는 아쉽게 놓치고 4위로 시즌을 마감하였지만, 리그 6위로 마감한 첼시가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 자동 출전권을 얻어 유로파 리그로 밀려났다. 레드냅 감독은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직과 관련하여 다니엘 레비 회장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챔피언스 리그 재진입에 실패하자 결국 2012년 6월 14일 사임했다. 하지만 구단주의 압박이 심했기에 경질이나 마찬가지로 보는 것이 중론이다.

2012년 7월 3일 토트넘은 레드냅 감독의 후임으로 첼시에서 경질된 안드레 빌라스-보아스를 임명하였다.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던 모드리치와 판 데르 파르트가 각각 마드리드, 함부르크 SV로 떠나고 얀 페르통언, 무사 뎀벨레, 위고 요리스, 클린트 뎀프시, 길피 시구르드손등을 영입하며 주축 선수들의 변화가 있던 상태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되었다. 토트넘은 개막 3연전에서 비교적 약체팀을 상대로 승리하지 못하면서 일부 팬들은 감독 경질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이후 6라운드 올드 트래포드에서 23년동안 이기지 못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3-2승리를 거두는 등 연승행진을 기록하며 논란을 잠재웠다. 빌라스-보아스 감독은 시즌 초반 주로 기용하였던 시구르드손과 뎀프시가 만족스러운 활약을 펼치지 못하자 이내 아데바요르와 데포를 투톱으로 두는 전술 변화를 주었으나 아데바요르가 네이션스 컵에 차출되고, 데포가 부상으로 결장하게 되자 윙어였던 베일을 공격수로 배치했다. 자유로운 역할을 부여받은 베일은 30골 16도움으로 팀을 혼자 이끌다시피하며 세계 최고 선수의 반열에 올랐고, 토트넘은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다 승점인 72점을 기록하나 아스널에 한 점차로 밀려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 획득에는 실패했다.

13-14시즌에는 AS 로마에서 뛰어난 스카우트 능력으로 이름을 알린 프랑코 발디니 단장을 영입하고 이적 시장에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13-14시즌 챔스 티켓 확보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2013년 컨퍼더레이션스컵에서 멋진 활약을 보여주며 브론즈볼을 수상한 코린치안스의 미드필더 파울리뉴와 트벤테의 윙어 나세르 샤들리를 영입하여 스쿼드를 더욱 단단하게 구축했으며, '라리가 인간계 최고의 스트라이커'라고 불리는 로베르토 솔다도를 영입하여 12-13시즌 팀의 약점이었던 공격진을 완벽하게 보강했다는 평을 받았다. 툴루즈 FC의 미드필더 에티엔 카푸슈테아우아에서의 블라드 키리케슈의 영입은 팀의 수비를 강화해 줄 것이라고 평가받았다. 그리고 이적시장 막판에 AFC 아약스에서 크리스티안 에릭센을 영입했다. 반면, 핵심 선수였던 베일은 마드리드의 전/현직 선수인 지네딘 지단, 루카 모드리치 등의 인터뷰로 흔들리고 훈련참가에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 후 결국 85.3m 파운드에 마드리드로 이적했다.[1] 그리고 그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로마의 신성 에릭 라멜라를 영입했다. 이 시즌에 토트넘은 파울리뉴, 솔다도, 라멜라를 각각 1700만 파운드(약 300억), 2800만 파운드(약 470억), 3000만 파운드(약 500억)에 영입하며 팀의 최고 이적료를 3번 갱신했고, 그 전까지 보여주던 '짠돌이'이미지를 탈피했다. 막상 리그가 시작하자 라멜라나 솔다도 등 새로 영입된 선수들이 팀워크와 전술 문제로 인해 부진한 모습을 보였으며, 특히 2013년 11월 15일 리그 경기에서 맨시티와의 원정 경기에서 0-6 대패, 이어서 같은 해 12월 16일 리버풀과의 홈에서 열린 리그 경기에서도 0-5 대패를 당하자 레비 회장은 빌라스-보아스 감독의 경질을 발표했다.[2] 그 후 남은 시즌은 1군 코치 출신인 팀 셔우드가 감독대행에 선임되었고, 몇 경기 지나지 않아 2년 계약을 맺고 정식 감독이 되었다. 그는 나빌 벤탈렙해리 케인같이 유소년 팀 출신 선수들을 적극 기용하며 1군 진입의 발판을 만들어 주었으나, 산드루·페르통언 등 주전 선수들과 불화설 의혹이 있었고, 시즌 종료 후 사우샘프턴 FC의 돌풍을 이끈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의 선임을 위해 경질되었다.

새로운 시대와 유스 출신 선수들의 활약[편집]

토트넘 홋스퍼 FC의 해리 케인

14-15시즌 개막 한참 전인 2014년 5월 27일, 5년의 장기계약을 맺으며 사우샘프턴 FC에서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을 선임했다. 레비 회장은 '감독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지원하겠다'며 서포터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포체티노 감독은 수비수 출신답게 여름 이적시장에서 팀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던 수비를 안정시키기 위해 스완지의 왼쪽 풀백 유망주 벤 데이비스와 주전 골키퍼였던 미헐 포름, 스포르팅 리스본의 중앙 수비수 유망주 에릭 다이어,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미국 대표로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여준 시애틀 사운더스디안드레 예들린을 영입했다. 이후 비야레알 CF의 중앙 수비수 마테오 무사키오를 영입하려 했으나 비야레알의 강력한 반대로 대신 세비야 FC의 유로파 리그 우승을 이끈 페데리코 파치오를 영입했고, 포체티노 감독의 전 팀 사우샘프턴에서 중용하던 미드필더 모르강 슈네데를랑과 스트라이커 제이 로드리게스의 영입을 성사했으나 무분별한 방출로 서포터들의 신임을 잃어가던 사우샘프턴이 시즌권 불매 운동이 시작되자 이적 금지에 못박아 할 수 없이 몽펠리에 FC의 수비형 미드필더 벤야민 스탕불리를 막판에 영입했다. 방출로는 기량이 하락한 산드루와 마이클 도슨, 잉여자원을 평가받던 시구르드손과 제이크 리버모어,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유망주 술레이만 쿨리발리, 이아고 팔케, 에제키엘 프라이어스, 시즌중이었던 시애틀로의 예들린 임대등이 있었다. 그러나 파울리뉴와 샤들리·아수-에코토 등 지난 시즌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거나 아예 보이지 않았던 선수들을 처분하지 못했고, 앙투안 그리즈만다니엘 웰벡, 무사키오와 슈네데를랑 등 1순위 영입대상들을 모두 놓치며 레비 회장의 약속은 무색해졌다. 시즌이 시작하고 토트넘은 초반 웨스트 햄, AEL 리마솔, QPR과의 경기에서 다이어, 샤들리, 라멜라 등의 활약으로 4연승을 달리다가 리그 3라운드 리버풀 원정경기에서 0-3으로 대패하고 선덜랜드 AFC와 2-2 무승부,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 FC에게 0-1 패배 등 4경기 연속 무승에 그치며 팬들의 비판을 받았다. 다행히도 프랑스 국가대표 주전 골키퍼인 요리스와 전 시즌 영입되어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에릭센, 유스 출신 선수로 팀의 주전 공격수였던 아데바요르와 솔다도를 제치고 잉글랜드 국가대표를 노리는 케인 등 제몫을 해주는 선수들 덕분에 꾸역승을 거두고 있다. 앞에서 열거한 선수들 외에 현재 팀에서는 부상에서 복귀한 카일 워커와 라멜라, 케인과 같이 유스출신인 라이언 메이슨과 벤탈렙·대니 로즈, 전 시즌의 잉여선수에서 탈피한 샤들리, 12-13시즌부터 팀의 주전 수비수였던 페르통언 등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라운드 해리케인이가 첼시를 상대로 사고를쳤다. 베일의 10-11시즌 인터밀란전 헤트트릭급 활약인 2골 1도움 1패널유도 효과는 5-3 대승 효과를 불러내는데 충분 하였다.

유니폼[편집]

전통적으로, 토트넘은 남색셔츠를 입고 플레이 했으나, 다양한 컬러를 사용하기도 했다. 클럽 창단 초기 즈음엔 하늘색과 흰색로 이뤄진 반팔셔츠나 빨간색셔츠와 파란색 반바지를 입었고, 초콜렛빛 갈색과 황금색 유니폼을 거쳐, 1899-00시즌에 이르러서야 그당시 높은 주가를 달리고있던 프리스턴 노스 엔드팀의 영향을 받고 마침내 흰색셔츠에 남색 반바지를 입게 되었다. 2011-12 시즌까지는 푸마가 유니폼을 제조하였다가 2012-13 시즌 부터는 언더아머가 제조 하게되었다.

엠블럼[편집]

1910년 FA컵 우승 이후로 토트넘 홋스퍼의 엠블럼은 싸움닭이 그려진 문장이었다. 해리 홋스퍼는 그의 싸움닭 발목에 박차를 달곤 했는데, 이것이 클럽 문장에 반영된 것이다. 토트넘의 상징인 닭은 일명 게임콕(싸움닭) 또는 코크럴(싸우기를 좋아하는 젊은이)이라 불리는 닭이다. 1909년 이전 토트넘 선수인 윌리엄 제임스 스콧은 축구공 위에서 서쪽을 바라보는 박차를 단 어린 수탉을 형상화한 청동 뱃지를 만들었는데, 그 후 부터, 수탉과 축구공이 그려진 문양이 클럽의 주요한 상징이 되었다. 초기에는 방패안에 닭을 그려 넣었으며 1966년 부터 축구공 위에 서있는 닭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서포터[편집]

서포터는 '이드아미(Yidarmy)' 라고 하는데 줄여서 '이드(Yid)' 라고 한다. 구단이 자리 잡고 있는 토트넘이라는 지역이 예전부터 유태인들의 밀집지역이라 토트넘의 팬중에는 유태인의 피가 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태인을 뜻하는 말인 이드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토트넘홋스퍼의 경기를 보다보면 얼핏 들어보면 이!이!이! 하는 소리가 자주 들리는데 그게 바로 이드이다. 아무래도 유태인들은 나치에게 당한 아픈 과거가 있어서 라이벌팀인아스널 FC, 첼시 FC등은 항상 토트넘 핫스퍼의 서포터들 에게 "너희들은 아우슈비츠로가라" "저놈들을 가스실로 보내버려" 이런 응원구호를 상당히 많이 한다. 현재 런던에 속해있는 팀들 중 가장 런던에서 서포터 수가 많으며 웨일스지역과 미국, 덴마크 벨기에, 아이슬란드에 많은 서포터들이 있다.


응원가[편집]

https://www.youtube.com/watch?v=Vx-Lp3J-W2Q&feature=player_embedded

가사 Glory glory Tottenham Hotspur/ Glory glory Tottenham Hotspur/ Glory glory Tottenham Hotspur/ And the Spurs go marching on/ Tottenham are the greatest team the world has ever seen/ Tottenham are the greatest team the world has ever seen/ Tottenham are the greatest team the world has ever seen/ And the Spurs go marching on/ The pride of North of London were the kings of White Hart Lane/ The pride of North of London were the kings of White Hart Lane/ The pride of North of London were the kings of White Hart Lane/ And the Spurs go marching on/ Loyal Spurs supporters and they come to every game/ Loyal Spurs supporters and they come to every game/ Loyal Spurs supporters and they come to every game/ To watch the Spurs go marching on/ Glory glory Tottenham Hotspur/ Glory glory Tottenham Hotspur/ Glory glory Tottenham Hotspur/ And the Spurs go marching on/


Glory Glory tottenham hotspur 잉글랜드의 록밴드 chas & Dave가 연주하고 80/81 FA컵 우승멤버들이 불렀다.

홈구장[편집]

토트넘 습지 (Tottenham Marshes)[편집]

토트넘은 그들의 첫 공식 경기를 토트넘 습지(Tottenham Marshes)에서 치뤘고 6년동안 이곳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정기적으로 늘어나는 관중을 수용하고 더 좋은 환경의 경기장을 사용하기 위해 새로운 경기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노섬벌랜드 공원 (Northumberland Park)[편집]

1888년 클럽은 좀더 많은 인원을 수용하고자 토트넘 습지에서 노섬벌랜드 공원으로 홈구장을 옮겼다. 클럽은 이곳에서 울위치 아스날을 상대로한 경기에서 14,000명의 폭발적인 관중수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토트넘은 훨씬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899년 4월 현재의 화이트 하트 레인이 있는 곳으로 홈구장을 이전했다.

화이트 하트 레인 (White Hart Lane)[편집]

토트넘의 홈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

화이트 하트 레인(White Hart Lane)은 1899년 9월 4일 개장한 이래 토트넘의 홈구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초기에는 길핀 파크(Gilpin Park)라고 불뤼었으나 점차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1905년부터 토트넘은 부지를 완전히 사들여 영구적으로 홈구장을 소유하게 되었다. 토트넘 최고의 레전드로 일컬어지는 빌 니콜슨의 이름을 딴 거리인 빌 니콜슨 웨이(Bill Nicholson way)에 위치해 있으며 총 수용인원은 한 때 7만여 명에 육박하였으나 축구장 전 지역을 좌석으로 바꾼 이후에는 36,310명으로 줄었다.

요즈음 셀카봉으로 인한 민원이 늘어나자 셀카봉이 금지되기도 하였다.

노섬벌랜드 개발 프로젝트 (Northumberland Development Project)[편집]

2007년 클럽은 홈구장의 수용인원을 늘리기 위한 경기장 신축안을 공개했다. 신축 경기장 뉴 화이트 하트 레인의 수용인원은 56,250명 규모로 계획되어 있으며 기존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 옆에 건설될 예정이다. 경기장 신축을 포함해 지역의 전반적인 재개발 사업을 뜻하는 프로젝트로 2018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토트넘의 구단주[편집]

토트넘은 2001년부터 대체투자시장(AIM)에 지분을 상장시켰고, 주로 스포츠나 미디어 분야에 투자를 해온 ENIC International Ltd에서 2001년부터 조금씩 지분을 사들여 2013년 현재 토트넘의 지분을 85% 소유하고 있다. 현재 조 루이스Tavistock Group을 통해서 이 투자회사의 지분을 70.6%, 다니엘 레비가 29.4%를 소유하고 있고, 토트넘은 바로 ENIC그룹의 상무이사 자리에 있는 다니엘 레비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역대 감독[편집]

팀을 사상 첫 챔피언스 리그로 진출시켰던 해리 레드냅 전 감독.

역대 우승기록[편집]

리그

우승 (2): 1950-51, 1960-61
우승 (4): 1921-22, 1951-52, 1956-57, 1962-63
우승 (2): 1919-20, 1949-50
우승 (2): 1908-09, 1932-33
우승 (1): 1899-1900
우승 (1): 1903-04

우승 (8): 1901, 1921, 1961, 1962, 1967, 1981, 1982, 1991
우승 (1): 1987
우승 (4): 1970-71, 1972-73, 1998-99, 2007-08
우승 (2): 1981-82, 2001-02
우승 (7): 1920-21, 1951-52, 1961-62, 1962-63, 1967-68*, 1981-82*, 1991-92* (* 공동)

국제 대회

우승 (2): 1971-72, 1983-84
우승 (1): 1973-74
우승 (1): 1962-63
우승 (4강): 1961-62

선수[편집]

현재 선수 명단[편집]

2015년 1월 15일 기준

임대 선수 명단[편집]

2014-15시즌 2014.01.15 기준

클럽 레전드[편집]

토트넘의 60년대 전설적인 공격수인 지미 그리브스 선수. 토트넘의 60년대 전설적인 공격수인 지미 그리브스 선수.

토트넘의 60년대 전설적인 팀의 주장이자 미드필더인 대니 블란치플라워 선수. 사진 설명:(좌) 대니 블란치플라워 (우) 조지 베스트 1979년. 토트넘의 60년대 전설적인 팀의 주장이자 미드필더인 대니 블란치플라워 선수.

토트넘의 90년대 팀의 간판 공격수인 위르겐 클린스만 선수. 토트넘의 90년대 팀의 간판 공격수인 위르겐 클린스만 선수. (현재는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이다.)

토트넘의 2000년대 팀의 주장이자 간판 수비수인 레들리 킹 선수. 토트넘의 2000년대 팀의 주장이자 간판 수비수인 레들리 킹 선수.

잉글랜드 잉글랜드
웨일스 웨일스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북아일랜드
독일 독일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벨기에 벨기에

주요 선수[편집]

잉글랜드 잉글랜드
웨일스 웨일스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북아일랜드
미국 미국
 
노르웨이 노르웨이
코트디부아르 코트디부아르
온두라스 온두라스
말리 말리
아일랜드 아일랜드
러시아 러시아
불가리아 불가리아
포르투갈 포르투갈
네덜란드 네덜란드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토고 토고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
독일 독일
브라질 브라질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덴마크 덴마크
프랑스 프랑스
벨기에 벨기에
알제리 알제리
대한민국 대한민국
슬로베니아 슬로베니아
오스트레일리아 호주
이집트 이집트
  • 미도 (2005-2006/2006-2007)
스페인 스페인
멕시코 멕시코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역대 선수 기록[편집]

최다 출장 기록[편집]

최다 득점 기록[편집]

역대 주장[편집]

관련 항목[편집]

주석[편집]

  1. 베일의 이적료는 85m
  2. 토트넘, 비야스 보아스 감독 전격 경질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