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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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시아 CF
전체 이름 Valencia Club de Fútbol, S.A.D.
별칭 Los Che (동지)
Els taronja (오렌지)
Valencianistas (발렌시아인)
설립 연도 1919년 3월 18일
홈 구장 메스타야 경기장
수용 인원 55,000명
구단주 싱가포르 피터 림
회장 스페인 아마데오 살보
감독 포르투갈 누누 에스피리투 산투
리그 라 리가
2013-14 8위
홈경기
원정경기

발렌시아 클루브 데 푸트볼(스페인어: Valencia Club de Fútbol, 카탈루냐어: València Club de Futbol),[1] 혹은 발렌시아 C.F., 발렌시아, 로스 체 (Los Che) 는 스페인발렌시아를 연고지로 하는 축구 클럽이다. 이 클럽은 라 리가에 속해 있으며, 스페인유럽 내에서 가장 성공적인 클럽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발렌시아는 6번의 라 리가, 7번의 코파 델 레이, 2번의 인터-시티 페어스컵 (UEFA 유로파리그, UEFA 컵 전신), 1번의 UEFA 컵 위너스 컵, 그리고 UEFA 슈퍼컵 우승을 거두었다. 이 클럽은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2번 연속 진출하였으나, 2000년에 라 리가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 CF에 패하였고, 이듬 해에는 독일 분데스리가FC 바이에른 뮌헨에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패하였다. 위 결승전을 포함하여 발렌시아는 7번의 유럽대항전 결승에 진출하여, 4번 우승을 거두었다. 또한 발렌시아는 2002년 G-14의 회원으로 가입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라 리가에서, 발렌시아는 레알 마드리드 CFFC 바르셀로나를 이어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대륙 타이틀 수도 3위이며, 이 또한 레알 마드리드 CFFC 바르셀로나 다음으로 많은 수이다. 또한 이 두 클럽과 발렌시아만이 유럽대항전 타이틀을 5개 이상 보유하고 있다.[2]

발렌시아는 1919년에 창단되었으며, 1923년부터 현재까지 메스타야 경기장을 연고로 하였다. 이 클럽은 2016년에 도시 북서부에 위치한 75,000석의 누에보 메스타야(Nuevo Mestalla)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발렌시아는 같은 연고지의 레반테 UD와 오랫동안 라이벌이었으며, 발렌시아 지방의 다른 클럽들인 에르쿨레스 CF비야레알 CF와도 라이벌 관계에 있다.

발렌시아는 스페인 내에서 레알 마드리드 CFFC 바르셀로나에 이어서 3번째로 많은 서포터를 보유하고 있다.[3] 또한 소시오 (유료 서포터) 수를 지표로도 가장 큰 클럽중에 하나로 손꼽히며, 50,000명이 시즌권을 보유하고 있고, 20,000명이 시즌권 대기 명단에 등록되어 있다.

역사[편집]

창단[편집]

이 클럽은 1919년 3월 5일에 창단되었으며 같은 해 3월 18일에 공식 승인되었다. 초대 회장은 옥타비오 아우구스토 밀레고 디아스였다. 초대 회장은 동전 던지기를 통하여 선출되었다. 1919년 5월 21일에 처음으로 공식 경기를 발렌시아 힘나스티코를 상대로 치루었고, 0-1로 패하였다.

1923년 발렌시아는 메스타야 경기장으로 홈 구장을 옮겼고, 이전에는 1919년 12월 7일부터 알지로스 운동장에서 홈 경기를 하였다. 첫 홈경기 상대는 카스테욘 카스탈리아였고 0-0으로 비겼다. 다음날 경기에서는 같은 팀을 상대로 1-0으로 승리하였다. 발렌시아 CF는 1923년에 지역 챔피언쉽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코파 델 레이에 처음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스페인 축구의 거함으로 성장하다[편집]

스페인 내전1941년까지 발렌시아 팀의 성장을 막았다. 1941년에 코파 델 레이 타이틀을 RCD 에스파뇰을 결승에서 꺾고 획득하였다. 1941-42 시즌, 발렌시아는 처음으로 라 리가 타이틀을 획득하지만, 당시에는 코파 델 레이가 더 명성이 높은 대회였다. 발렌시아는 리그 타이틀을 더 얻기 위해 꾸준한 모습을 보였고, 1943-44 시즌과 1946-47 시즌에 다시 우승을 거두었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클럽은 1940년대의 성공을 반복하는데 실패하였지만, 클럽은 크게 성장하였다. 메스타야의 보수 공사는 45,000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클럽은 자국과 외국인 스타를 다수 보유하였는데, 안토니오 푸차데스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일원이었고, 파스 빌커스네덜란드의 스타 공격수메스타야 경기장을 누볐다. 1952-53 시즌, 발렌시아는 2위로 라 리가를 마감하였고, 이듬 해에는, 코파 델 레이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당시 컵대회 이름은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였다.

유럽 대항전에서의 성공[편집]

1960년대 초, 발렌시아는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1961-62 시즌, 발렌시아는 FC 바르셀로나를 결승전에서 꺾었다. 1962-63 시즌의 인터-시티 페이스 컵 결승전에서는, 크로아티아NK 디나모 자그레브를 상대하였고, 이 경기에서도 승리하였다. 발렌시아는 1963-64 시즌에도 결승까지 올라왔지만 레알 사라고사에 1-2로 패하였다.

이전에 발롱도르 2회 수상 경험이 있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1970년에 감독으로 취임하였고, 네 번째 라 리가 타이틀로 이끌었다. 이 결과, 유럽 리그 우승 팀간의 대회인 유러피언 컵에 사상 최초로 진출하였다. 발렌시아는 1971-72 시즌에 3라운드까지 진출하였지만, 헝가리 챔피언 우이페슈트에 패하였다. 1970년대의 유명 선수로는 오스트리아미드필더 쿠르트 야라, 네덜란드공격수 요니 레프, 아르헨티나공격수 마리오 켐페스가 있었다. 이 중 켐페스는 2시즌 연속 피치치 트로피를 획득하였다. (1976-77, 1977-78 시즌) 발렌시아는 1978-79 시즌에도 코파 델 레이를 우승하였고, 이듬해 UEFA 컵 위너스 컵 결승전에서 마리오 켐페스의 활약으로 아스널 FC를 꺾고 우승을 하였다.

부진[편집]

1982년, 클럽은 밀얀 밀야니치를 감독으로 내정하였다. 실망스러운 시즌 후, 발렌시아는 7경기를 남겨두고 17위를 기록하여 강등 위기에 처하였다. 콜도 아기레 감독은 밀야니치 감독을 대신하였고, 발렌시아는 시즌 말에 양호한 성적을 거두며, 그 해 간신히 강등을 피하였다. 1983-84 시즌과 1984-85 시즌에는 비센테 토르모 회장 하에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다. 클럽은 최악의 성적을 거두었고 1985-86 시즌 끝에 강등당하였다. 선수와, 코칭스태프 주급 연체와 더불어, 윤리적 문제가 대두되었다. 발렌시아는 55년간 스페인 1부리그에 머무른 뒤 강등당하였다.

아르투로 투손은 새 회장으로 취임하였고, 발렌시아를 다시 라 리가로 복귀시켰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1986년에 감독으로 돌아왔고 14위로 마감한 1987-88 시즌까지 감독직을 맡았다. 1989년, 불가리아공격수, 루보슬라프 페네프가 영입되었고, 라 리가 정상권을 향하여 정조준 하였다. 휘스 히딩크가 1991-92 시즌에 취임하였고, 클럽은 리그 4위로 마감하고 코파 델 레이 8강에 올랐다. 1992년, 발렌시아는 스포츠 유한 회사로 등록되었고, 히딩크는 1993년까지 감독을 맡았다.

브라질인 감독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파헤이라1994년 FIFA 월드컵 우승 직후, 새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파헤이라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골키퍼 안도니 수비사레타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격수 올레크 살렌코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프레드락 미야토비치를 영입하였으나, 기대에 미치는 성적을 얻어내는데 실패하였다. 그는 호세 마누엘 리엘로 감독으로 대체되었다. 루이스 아라고네스호르헤 발다노 같은 최고의 코칭스태프와, 호마리우, 클라우디오 로페스, 아리엘 오르테가 등의 슈퍼스타를 가지고 클럽의 초창기때의 성공을 반복하였다.

2000년대: 스페인과 유럽의 최고 구단으로 복귀[편집]

발렌시아는 1999-2000 시즌을 또다시 타이틀 획득으로 시작하였다: FC 바르셀로나를 꺾고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을 거두었다. 발렌시아는 그 시즌 챔피언인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 4점 뒤진 3위로 마감하였고, 준우승 팀 FC 바르셀로나와 동률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발렌시아는 유러피언 컵 사상 최초로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2000년 5월 24일, 스타드 드 프랑스의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 CF에 3-0으로 패하였다.

UEFA 챔피언스리그 1999-2000시즌 결승전 선발 라인업.

이 시즌은 클라우디오 로페스의 마지막 시즌으로, 다음 시즌 이탈리아SS 라치오로 이적하였으며, 하비에르 파리노스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헤라르드 로페스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였다. 그 시즌 주요 신입생은, 노르웨이욘 카레브, 루벤 바라하, 아르헨티나로베르토 아얄라, 비센테 로드리게스, 그리고 브라질 풀백 파비우 아우렐리우였다. 이 시즌의 1월에는 파블로 아이마르를 영입하였다. 바라하, 아이마르, 비센테, 그리고 아얄라는 발렌시아의 2000년대 초 전성기를 이끈 주축 멤버였다.

발렌시아는 리그를 10경기 치룬 시점에 선두로 나갔으며, 크리스마스 휴식기에 챔피언스리그와 같은 최고의 욕망을 채우기 시작하였다. 2번의 미니 리그 경기 이후, 헥토르 쿠페르 호는 8강에서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아스널 FC를, 4강에서 리즈 유나이티드 AFC를 꺾고, 결승전에 FC 바이에른 뮌헨과 맡붙게 되었으며, 유러피언 컵 결승에 2회 연속 진출하였다. 이 해의 결승전은 밀라노주세페 메아차 경기장에서 5월 23일에 열렸고, 가이스카 멘디에타페널티 킥을 성공 시켜 초반 우위를 점하였다. 카니사레스는 메멧 숄의 페널티를 선방하였지만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동점 페널티 골을 넣었고, 연장전까지 승부가 나지 않았다. 승부차기에서 마우리시오 페예그리노가 실축함에 따라 FC 바이에른 뮌헨이 우승하고 발렌시아는 2년 연속 준우승으로 분루를 삼켰다. 밀라노에서의 패배 후 반전에 실패한 발렌시아는 리그 5위로 마감하였고, UEFA 챔피언스리그 2001-02 진출권 획득에 실패하였다. 그 해 리그 38라운드 경기 상대는 FC 바르셀로나로 비기기만 하여도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성공할 수 있었으나, 2-3으로 패하였고, 히바우두의 마지막 1분을 남기고 터진 골은, 발렌시아를 상대전적에서 밀리게 하여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날려버렸다.

D. 페드로 코르테스 회장은, 사적인 이유와 코파 델 레이 우승, UEFA 챔피언스리그 2회 연속 준우승의 만족감으로 7월에 사임하였다. D. 하이메 오르티 회장이 새로 취임하였고, 유럽에서 다시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 위해 노력할 것임을 약속하였다. 팀과 스태프에 변화가 있었는데, 라파엘 베니테스CD 테네리페의 승격에 성공시킨 뒤,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떠난 헥토르 쿠페르 감독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멘디에타, 데샹, 밀라, 자호비치가 팀을 떠났고, 마르체나, 미스타, 쿠로 토레스, 루페테, 데 로스 산토스, 그리고 살바가 영입되었다.

UEFA 챔피언스리그 2000-01시즌 결승전 선발 라인업.

1999년에서 2004년의 시즌까지, 발렌시아는 클럽 역사상 황금기였다. 두 번의 라 리가 우승, 한번의 UEFA 컵 우승, 한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과, 한번의 UEFA 슈퍼컵 우승을 6년간 하였고,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두 번 진출하였다.

발렌시아의 국내 및 유럽내의 2000년대 전성기에, 아르헨티나로베르토 아얄라는 팀의 주축 수비수였다.

2001-02 시즌, 발렌시아는 31년 만에 라 리가 정상에 등극하였다. 이 시기에 신임감독 라파엘 베니테스와 신입생 마르체나, 미스타, 쿠로 토레스, 루페테, 데 로스 산토스, 그리고 살바는 큰 공을 세웠다.

첫 상대는, 최대 타이틀 경쟁자 레알 마드리드 CF였고, 이 경기에서 값진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후로 11경기 연승을 하여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1970-71 시즌에 기록하였던 연승기록을 경신하였다.

2001년 12월 9일 라 코루냐전 패배 이후, 에스타디 올림픽 루이스 콤파니스에서의 RCD 에스파뇰 경기에서 리그 선두자리를 빼앗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승리가 필요하였다. 발렌시아는 전반을 0-2로 뒤지며 마쳤지만, 후반전에 3골을 넣어 3-2 역전승을 거두었다.

시즌 후반기에, 베니테스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에서의 레알 마드리드 CF 원정경기에서 0-1로 패하였지만, 이후에 CD 테네리페, 아틀레틱 빌바오, 데포르티보 알라베스, 레알 사라고사, FC 바르셀로나와의 경기에서 4승 2무를 기록하였다.

이 시즌 중 가장 중요한 경기는 RCD 에스파뇰 홈경기였고, 0-1로 전반에 끌려가고 카르보니의 퇴장으로 10명이 뛰었지만 루벤 바라하의 2골로 2-1 역전승을 기록하였다. 더 나아가서 레알 마드리드 CF아노에타 원정에서 레알 소시에다드에 패하여 발렌시아는 승점 3점의 우위를 가져갔다.

시즌의 38라운드 경기는 2002년 5월 5일 말라가 CF와의 라 로살레다 원정이었고, 발렌시아의 역사적인 날이었다. 로베르토 아얄라의 이른 선제골과 파비우 아우렐리우의 쐐기골은 5번째 리그 우승을 확정지었고, 31년 만에 스페인 정상에 등극하였다.

2002-03 시즌 또한 실망스러운 시즌으로, 라 리가 타이틀 획득 실패는 물론 셀타 비고에 밀려 리그 5위로 마감하여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획득에도 실패하였다. 또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탈락하였다. 2003-04 시즌은 레알 마드리드 CF에 대개 밀리며 지냈다. 2004년 2월 26라운드 이후, 레알 마드리드는 8점이나 앞서 있었다.[4] 하지만 시즌 막판에 레알 마드리드는 페이스를 잃었고 시즌 33라운드 이후의 5경기를 모두 패함에 따라, 발렌시아가 리그 선두를 탈환하여 막판에 우승하였다. 발렌시아는 또한 UEFA 컵을 획득하였다. 이로써 발렌시아는 3년동안 2번의 라 리가 우승을 하였다.

2004년 여름, 3년간 팀을 맡아온 라파엘 베니테스는 클럽 회장과의 문제로 떠나기로 결심하였고, 이후 리버풀 FC의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그의 자리는 발렌시아의 전 코치이자 첼시 FC에서 경질되었던 클라우디오 라니에리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그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라 리가의 타이틀 수성을 실패함은 물론이며, 2월에 7위까지 하락하기도 하였다. 이 시즌의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별리그전에서 탈락하였고, 라니에리는 경질되었다. 2004-05 시즌 후 발렌시아는 UEFA 컵 진출조차 하지 못하였다.

2005: 메스타야의 발렌시아 팬들

2005년 여름, 헤타페 CF의 감독 키케 산체스 플로레스 감독이 새로 내정되었고 2005-06 시즌을 3위로 마감하고, 다시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획득에 성공하였다. 2006-07 시즌은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다수의 부상 선수들로 라 리가 우승의 꿈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플로레스 감독은 새 스포르팅 디렉터 아메데오 카르보니와 갈등을 빚었다. 발렌시아는 시즌을 4위로 마감하였고,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를 꺾었지만, 8강에서 첼시 FC에 합계 2-3으로 패하였다. 2007년 여름, 플로레스와 카르보니와의 갈등은 카르보니가 앙헬 루이스로 대체되면서 끝났다.

2007년 10월 29일, 발렌시아 보드진은 플로레스를 해고하고 오스카르 루벤 페르난데스에 감독 대행을 맡겼다. 마르첼로 리피조제 모리뉴가 감독이 될 것이라는 루머가 있었으나, 며칠 후 네덜란드로날드 쿠만PSV 아인트호벤을 떠나 발렌시아 감독으로 계약하였다. 하지만,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못하였고, 설상가상으로 리그 15위까지 내려앉아 강등권까지 2점 차이를 내고 있었다. 2008년 4월 16일, 발렌시아는 비센테 칼데론 경기장에서 헤타페 CF를 상대로 3-1 승리를 거두고 코파 델 레이를 들어올렸지만, 5일 후, 아틀레틱 빌바오에 1-5 대패를 당하였다. 쿠만은 경질되었고, 보로가 잔여 시즌동안 감독대행을 맡았다. 보로는 발렌시아를 강등권에서 벗어나 안정된 중위권 경쟁 끝에 실망스러운 시즌을 10위로 마무리하였다.

높은 평가를 받던 우나이 에메리2008년 5월 22일에 발렌시아의 새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이 젊은 감독의 시작은 첫 5경기중 4경기를 승리로 이끌었고, 팀이 다시 라 리가의 선두권을 달리도록 하였다. 유럽에서의 좋은 모습에도 불구하고, 시즌 중반으로 들어가며,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리그 7위까지 순위가 내려갔다. 슬럼프의 원인이 €400M의 부채로 확인되었고, 주급이 지불되지 못한데에 있었다. 팀의 문제는 UEFA 컵에서 FC 디나모 키예프에 원정 다득점으로 패함으로써 가중되었다. 발렌시아가 10경기에서 승점 5점밖에 획득하지 못하자, 클럽은 선수를 임대로 처리하고 연말까지 선수 비용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발표는 팀이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하였고, 클럽은 8번의 경기중 6번을 이겼다.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할 수 있는 4위로 복귀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비야레알 CF에 밀려 실패하였고, 리그를 6위로 마무리하였다. 결국, 2년 연속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획득에 실패하였다. 현재까지 발렌시아의 부채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못하였고, 다비드 비야, 후안 마타, 다비드 실바,호르디 알바와 같은 팀의 주축 선수들이 팀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떠날 수 있다는 루머가 나왔다. 2010년 여름, 다비드 비야FC 바르셀로나로, 다비드 실바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하였고, 이듬해 여름에는 후안 마타첼시 FC2012년 여름에는 호르디 알바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였다.

역대 성적[편집]

  • 라 리가
    • 우승 6회 (1941-42, 1943-44, 1946-47, 1970-71, 2001-02, 2003-04.)
    • 준우승 6회 (1947-48, 1948-49, 1952-53, 1971-72, 1989-90, 1995-96.)
  • 코파 델 레이
    • 우승 7회 (1940-41, 1948–49, 1953–54, 1966–67, 1978–79, 1998-99, 2007-08.)
    • 준우승 10회 (1933-34, 1936–37, 1943–44, 1944–45, 1945–46, 1951–52, 1969–70, 1970–71, 1971–72, 1994-95.)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 우승 1회 (1999)
    • 준우승 3회 (2002, 2004, 2008)
  • UEFA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2회 (1999-00, 2000-01)
  •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 1회 (1979-80)
  • UEFA 컵
    • 우승 3회 (전신인 페어스 컵 포함)(1961-62, 1962-63, 2003-04)
    • 준우승 1회 (1963-64)
  • UEFA 인터토토컵 우승 1회 (1998)
  • UEFA 슈퍼컵 우승 2회 (1980, 2004)

홈 구장[편집]

메스타야

발렌시아는 초창기 홈 경기를 알지로스 운동장에서 치루었으나 1923년메스타야 경기장으로 이전하였다. 1950년대, 메스타야는 45,000석 경기장으로 리모델링 되었다. 현재 55,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2013년, 도시 북서부에 위치한 새 경기장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75,000석의 누 메스타야 경기장의 건설은 재정난으로 정지되었지만, 미래의 완공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홈 구장인 메스타야는 스페인 내에서 5번째로 큰 경기장이다. 이 경기장은 가파른 관중석을 갖추고 있어 유럽 내에서 가장 열정적인 경기장으로 손꼽힌다.

1923년 5월 20일 메스타야 경기장이 개장되었고, 발렌시아와 레반테 UD와의 친선전을 치렀다. 이 뜻은 구 홈구장인 알지로스와의 작별로, 발렌시아 팬들에게 구단 역사의 첫 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기나긴 역사는 메스타야와 얽혀 있고, 라 리가가 출범하기 이전부터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초창기 메스타야는 17,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당시 클럽은 지역 챔피언쉽에서 빼어난 모습을 보였고, 1927년스페인 내전으로 피해를 입기 전까지 25,000명으로 수용인원을 늘렸다.

메스타야는 수용소와 폐기물 창고로 사용되었다. 발렌시아의 구장이 리모델링 된 이후, 메스타야는 1941년에 첫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발렌시아 세기의 팀이 당시 이 구장에서 활약하였고, 3번의 리그 타이틀과 2번의 컵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당시 전설적인 멤버들은 '전기적 공격수' 에피, 아마데오, 문도, 아센시, 그리고 기예르모 고로스티사였다. 당시의 성공은 전쟁으로 폐허가된 메스타야를 조금씩 회복시켰다.

50년대로 접어들어, 발렌시아 구장은 역사상 가장 큰 난관에 부딪혔다. 프로젝트는 45,500명으로 수용인원을 증가시키는 것이었으나, 1957년 10월, 투리아 강의 홍수로 무너졌다. 그러나, 메스타야는 정상적으로 회복하였고, 1959년 파야스 축제당시 선보인 인공조명을 비롯하여 개량된 시설을 갖추었다.

메스타야의 파노라마

60년대에 경기장은 50년대와 비슷하였으나, 인근 도시의 모습이 변경되었다. 더 나아가서, 발렌시아 지역은 유럽의 요주 지역이 되었다. 노팅엄 포레스트 FC는 발렌시아를 메스타야에서 상대한 최초의 외국팀이다. 이 경기는 1961년 9월 15일에 열렸고, 당시 첫 대륙성공세대가 등장한 시기였다. 1962년1963년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메스타야는 유럽대항전 경기를 주최하기 시작하였고, 기타 주요 행사 또한 주최하였다.

1969년, "아넴 아 메스타야" (Anem a Mestalla, 메스타야로 가자), 라는 표현이 서포터 사이에 쓰였으나, 잊혀져 갔다. 그 이유는 상징적인 회장이 거의 25년간 구단을 맡아왔었기 때문이다. 루이스 카사노바 히너 회장은 1994년까지 팀은 맡았고, 그 해까지 메스타야라는 이름을 대체하였다. 70년대 초, 루이스 카사노바 경기장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왔었고, 리그 우승으로 그 시대를 빛냈으며, 한번의 준우승 기록을 더 하고, 2번의 컵 대회 준우승을 하였다.더 나아가서 발렌시아는 유러피언 컵에 처음으로 참여하였고, UEFA 컵에도 데뷔하였다. 이 70년대에 일어난 사건은 수에시아 가 (街)에 위치한 구단을 더 큰 단체로 성장시켰다.

1972년, 클럽의 사무실을, 테라스 아래에 위치시켰다. 이 사무실은 트로피 홀과, 클럽의 기 등을 보관하고 있다. 1973년 여름, 14번째열의 입석 테라스가 철거되었다. 이 시기부터 발렌시아의 보드진은 메스타야에서 도시 외곽으로 홈 구장을 옮기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몇년 후 백지화되었다.

당시 마리오 켐페스펠레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선수로 손꼽혔으며,[5] 발렌시아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이 "도살자" (Matador)를 갖춘 발렌시아는, 코파 델 레이, UEFA 컵 위너스 컵, 그리고 UEFA 슈퍼컵을 잇달아 획득하였다. 발렌시아는 메스타야에서의 마지막 유럽 결승전에서 진정한 대륙 챔피언으로 거듭났다.


1980년 메스타야에서 최초로 맞붙었던 외국팀 노팅엄 포레스트 FC와 다시 대결하였다.

1925년, 최초의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경기를 주최하였고, 1982년 FIFA 월드컵의 스페인 국가대표 첫 경기를 주최하였다. 스페인 국가대표는 기대에 비해 그다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였으나, 10년 후 올림픽 국가 대표가 발렌시아 구장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보였다. 1992년 올림픽에서 스페인 대표는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메스타야는 국가대항전 경기에 있어, 주요 경기장으로 손꼽히며, 몇차례 컵 결승전을 주최하였고, 레반테 UD와의 경기,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 그리고 CD 카스테욘레알 마드리드 CF의 경기를 주최하였다.

본래 2008-09 시즌은 메스타야에서의 마지막 시즌으로, 75,000석의 누 메스타야 경기장으로 옮기기로 2009-10 시즌 계획되었으나, 재정난이 덮침에 따라, 신구장 건설이 중지되었다.[6]

유니폼[편집]

본래 유니폼은 흰색 상의, 검정색 하의와 흰색 혹은 검은색 양말로 구성되어 있다. 몇년간을 간격으로 양말의 색을 변경한다.

스폰서[편집]

시즌 유니폼 제작사 스폰서
1980–1982 아디다스 없음
1982–1985 레시
1985–1990 라산 카하 아호로스 발렌시아
1990–1992 푸마
1992–1993 메디테라니아
1993–1994 루안비
1994–1995 시프
1995–1998 포드
1998–2000 테라 미티카 테마파크
2000–2001 나이키
2001–2002 메트로레드
2002–2003 테라 미티카 테마파크
2003–2008 도요타
2008–2009 발렌시아 익스피리언스
2009–2011 카파 우니벳
2011–2014 호마 Jinko Solar
2014 – 아디다스 없음

응원가[편집]

D. 파블로 산체스 토레야에 의해 구단 응원가가 작곡되었다. 가사는 라몬 히메노 힐에 의해, 발렌시아어로 작사되었다. 응원가는 1993년 9월 21일, 75주년 기념식에 처음으로 선보였다.

가사[편집]

És un equip de primera
nostre València Club de Futbol
que lluita per a defendre en totes bandes nostres colors
En el Camp de l´Algirós ja començàrem a demostrar
que era una bona manera per a València representar
Amunt València, Visca el València, és el millor
Amunt València, Visca el València del nostre cor
Units com sempre els valencianistes et seguirem
en cada estadi per a què triomfes t´animarem
En la capital del Túria és el València qui vist de blanc
i defén la camiseta ple de coratge per a guanyar
En Mestalla continuarem sempre esforçant-se per a triomfar
i les glòries arribaren i en competència continuaran
Amunt València, Visca el València, és el millor
Amunt València, Visca el València, del nostre cor
Units com sempre els valencianistes et seguirem,
en cada estadi perquè triomfes t´animarem
Amunt València, Visca el València és el millooooooooor
[7]

번역[편집]

박쥐의 유래[편집]

13세기 초, 발렌시아와 발레아레스 제도는 아라곤 왕국의 하이메 1세의 통치를 받았다. 왕의 정복활동 이후 왕은 왕국의 독립을 인정였다. (그러나 법은 아라곤 왕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발렌시아 휘장은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왕관이 씌워진 L은 하이메 왕으로부터 하사한 방패 옆에 배치되었다. 이 L이 배치된 이유는 도시가 국왕에 충성하였고, 그에 따라 왕의 왕관을 중심으로 두개의 L자가 있다.

이 문장의 박쥐에 대하여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이 중 하나는 박쥐가 지역에 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설은 1238년 10월 9일에 있던 일을 토대로 한다. 하이메 1세가 이 도시에 진입하여, 무어의 영토를 수복하려 할 때, 박쥐 한마리가 그의 깃발 위에 내려앉았다. 왕은 이를 좋은 징조로 받아들였다. 그는 도시를 정벌한 후, 휘장에 박쥐를 추가하였다.

선수[편집]

현재 선수 명단[편집]

2014년 9월 28일 기준

임대 선수 명단[편집]

2014년 9월 28일 기준

유명 선수[편집]

스페인 스페인


 
이탈리아 이탈리아
독일 독일
포르투갈 포르투갈
프랑스 프랑스
네덜란드 네덜란드
스웨덴 스웨덴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세르비아
노르웨이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불가리아
몬테네그로 몬테네그로
브라질 브라질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우루과이
파라과이 파라과이
말리 말리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