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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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安市城)은 삼국시대고구려당나라의 경계에 있던 산성으로 고구려의 토성(土城)이며, 안시성 전투가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안시성(安市城)의 원이름을 ‘안촌홀(安寸忽)’이라고 하였다. 소재지에 대해서는 종래 의견이 분분하지만 중국랴오닝 성 하이청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에 위치해 있었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1] [2][3]

위치[편집]

안시성은 고구려가 요하(遼河)유역에 설치하였던 방어성들인 신성(新城, 지금의 만주 무순(撫順) 부근)·요동성(遼東城, 지금의 만주 요양(遼陽) 지역)·건안성(建安城, 지금의 만주 개평(蓋平) 지역)·개모성(蓋牟城, 지금의 만주 무순(撫順) 부근)·백암성(白巖城, 지금의 만주 요양(遼陽) 동남)·비사성(卑沙城, 지금의 대연만(大連灣) 북안) 등 중에서 전략적 비중이 요동성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었다.

특히, 안시성은 신성과 건안성의 중간에 위치하였으므로, 개모성·요동성·백암성·비사성 등이 일시에 적의 수중에 함락된다면 안시성의 방어는 요동지방의 여러 성들의 방어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압록강 북쪽의 오골성(烏骨城, 지금의 만주 봉황(鳳凰) 남쪽에 있는 고려산성)·국내성(國內城, 지금의 만주 집안현(集安縣) 지역)을 비롯한 전국의 성들 수호에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645년(보장왕 4) 고구려의 개모성을 함락시킨 당나라 군대는 지형이 험하고 정예 병력이 배치된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고구려는 북부욕살(北部褥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욕살 고혜진(高惠眞)이 15만의 병력을 동원해 출병했으나, 안시성 8리(里) 되는 지점에서 당나라 군대에 패배하였다. 그러나 고립된 안시성은 함락되지 않았으므로 당군 진영에서는 안시성 공격을 포기하고, 건안성을 공격하자는 건의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당나라 장수 이세적(李世勣)은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므로, 자칫 안시성을 통과해 건안성을 공격하다가는 보급로가 차단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안시성을 먼저 함락시켜야 한다”고 집요하게 주장하였다. 결국, 이세적의 건의대로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 동남 모서리에 흙으로 산을 쌓고 공격했으나, 성 안의 고구려 군대도 성의 높이를 더하여 막았다.

당나라군대는 공성(攻城)기구를 모두 동원해 성벽을 파괴시켰으나, 일부 파괴된 성벽에는 목책(木柵)을 세웠으므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이는 당시 고구려 산성들의 방어력이 강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 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이곳은 요동지역에서의 고구려 부흥운동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671년 7월에 안시성은 당나라 군대에게 함락되고 고구려부흥운동도 크게 약화되었다. [1][2][3]

안시성 전투[편집]

수나라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는 숙적(宿敵)인 고구려의 정벌에 나섰다. 이세적(李世勣)·장량(張亮) 등이 지휘하는 당의 대군은 보장왕 4년(645년) 봄 요수(遼水)를 건너 현도성에 이르렀다. 고구려는 이 일대의 성을 굳게 지키며 대항했으나, 당은 개모성(蓋牟城)·비사성·요동성·백암성 등을 점령하고 안시성을 공격하여 왔다. 양쪽은 온갖 전략으로 공방전을 계속했다. 고구려 군대의 사기는 날로 올라가고 용감무쌍해졌으나, 당나라 군대는 군량이 떨어지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군대를 돌려 돌아갔다.

한편 안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안시성주의 이름은 정사에 나와있지 않다. 따라서 안시성주가 양만춘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조선시대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안시성 성주의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이라고 밝히고 있다. [1][2][3]

전해오는 이야기[편집]

만주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쪽에 있는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안시성(安市城)의 원이름을 ‘안촌홀(安寸忽)’이라고 하였다. 소재지에 대해서는 종래 의견이 분분하였다.『금사(金史)』지리지에 따라 만주 개평(蓋平) 동북의 탕지보(湯池堡)에 비정하기도 한다.

또한 『이계집(耳溪集)』이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는 만주의 봉황성(鳳凰城)에 비정하기도 한다.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본 것은 17세기 이후 연행사(燕行使)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의 전쟁에 관한 민간전승을 다룬 문학작품들이 명나라에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책들이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조선에 유입되었다. 이 작품들에 설인귀(薛仁貴) 영웅담의 무대인 봉황산과 역사연의(歷史演義)의 무대인 안시성 및 안시성주로서 양만춘(楊萬春)의 활약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17세기 연행로상에 봉황산성이 있었고, 이러한 작품들을 접했던 연행사들이 자연스럽게 안시성을 떠올리게 되면서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보는 견해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가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민족의식의 확대와 함께 크게 유행하면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중엽부터 남구만(南九萬), 김창업(金昌業) 등에 의해 이미 봉황성설을 부정하는 견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등에 나타나는 지리적인 문제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후 18세기에 들어오면서 박지원(朴趾源)이나 안정복(安鼎福) 역시『당서(唐書)』및『한서(漢書)』지리지 기록 등을 인용하여 봉황성설의 오류를 지적하였으며, 안시성은 개주(蓋州) 일대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1][2][3]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

  1. 『삼국사기(三國史記)』,『이계집(耳溪集)』,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당서(唐書)』,『금사(金史)』,「연행로상(燕行路上)의 공간 탐색, 봉황산성(鳳凰山城)」(이승수, 『정신문화연구』103, 2006),「漢代安市縣與高句麗安市城非一地考」(閻方章, 『地名學硏究』1, 1984) 참조
  2. 문영일 (2007). 《바로잡아 쓴 동아시아 종주민족국가 한국의 역사와 한국국가안보전략사상사 중 고대편》. 21세기군사연구소. ISBN 9788987647401
  3. 한석정, 노기식 (2008). 《만주 동아시아 융합의 공간》. 소명출판. ISBN 97889562630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