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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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 劉)씨는 중국과 한국의 성씨이다.

버들 류 柳[편집]

한국[편집]

류(柳)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603,084명으로 조사되어, 대한민국 성씨 인구 순위 19위이다. 본관은 문화, 전주(全州), 고흥, 풍산, 진주(晉州), 서산, 선산(善山), 영광(靈光) 등 55본이 있다.[1] 문화 류씨 측에 의하면, 한국의 류(柳)씨는 고려 태조 왕건의 경우와 같이 신라말 고려초에 성씨를 창성한 것이라고 한다. 황해도 토착인 "차달"이 본래 성씨가 없다가 신라-고려 전환기에 류(柳)씨로 창성하였다고 한다. 한편 조선 초기 기록인 <世宗實錄地理志 文化縣> 편에는 문화 류(柳)씨는 내성(來姓)이라고 되어 있어, 문화 류씨가 중국이나 다른 지역에서 왔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2] 문화 류씨가 문화를 본관(本貫)으로 삼게 된 것은 류차달의 8대손이며 고려 고종 최씨무인정권기(崔氏武人政權期) 때 류경(柳璥)이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이 되고 그 공으로 유주(儒州)를 문화현(縣)으로 승격시킴으로써 비롯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견해로는 이미 이들을 고려 초부터 문화 지역의 토착 세력으로 본다.

문화 류씨 측에서는 고흥(高興), 본진주(本晉州), 영광 류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류차달의 9세손으로부터 분관(分貫)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문화 류씨의 7세손이었던 류공권의 큰 아들 류언침(柳彦沈)의 후손들을 갑파(甲派), 둘째 아들 류택(柳澤)의 후손들을 을파(乙派)라고 하여, 이 갑파와 을파로부터 15개파가 분파(分派)됨과 동시에 갑파로부터 몇 개의 분파가 이관(移貫)되었다고 한다. 10세인 류자성(柳資成)의 후손 중 14세 류절(柳節)의 후손이 풍산 류씨, 10세인 류성간(柳成澗)의 후손이 서산 류씨, 10세인 류원비(柳元庇)의 후손 중 13세 류해(柳邂)의 후손이 선산 류씨, 10세인 류양재(柳良梓)의 후손이 전주 류씨, 10세인 류인비(柳仁庇)의 후손이 진주 류씨로 분관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문중에서는 후대에 서로 다른 본관의 계대를 짜맞춘 것이라 하여 이러한 주장을 부정한다.

  • 문화 류씨(文化 柳氏)의 시조 류차달(柳車達)은 고려 개국공신으로 후삼국 통일 당시 유주(儒州 :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 일대)의 호족이었다. 2000년 인구는 284,083명이다.
  • 서산 류씨(瑞山 柳氏)의 시조 류성윤(柳成澗)은 고려시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참지정사(參知政事)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서녕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해졌다. 서녕 유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9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는 14,827명이다.
  • 진주 류씨(晉州 柳氏)는 류정(柳挺)을 시조로 하는 토류계(土柳系)와 류차달(柳車達)의 9대손 류인비(柳仁庇)를 시조로 하는 이류계(移柳系)의 서로 다른 두 계통이 있다. 2000년 인구는 60,104명이다.
  • 풍산 류씨(豊山 柳氏)의 시조 류절(柳節)은 고려 초에 호장(戶長)을 지낸 인물이다. 풍산류씨세보(豊山柳氏世譜)에 따르면 류절의 증손 류백(柳伯)이 고려 충렬왕 때 은사(恩賜)로 급제하여 가문의 기틀을 세웠고, 7세 류종혜(柳從惠)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고 낙향해 하회동(河回洞)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풍산 류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2명을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류성룡이 있다. 2000년 인구는 13,341명이다.
  • 고흥 류씨(高興 柳氏)의 시조 류영(柳英)은 고려 문종 때 호장(戶長)을 지냈다고 추정될 뿐 상계는 전하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다. 류영의 7세손 유청신(柳淸臣)이 고려 충선왕 때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오른 후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에 봉해졌다. 2000년 인구는 53,981명이다.
  • 전주 류씨(全州 柳氏)는 시조가 다른 세 계통이 있다. 각 계파는 류혼(柳渾), 류습(柳濕), 류지(柳池)를 각각 시조로 하나 문적(文蹟)이 부실(不實)하여 시조의 상계는 알 수 없다. 2000년 인구는 61,650명이다.
  • 영광 류씨(靈光 柳氏) 시조 류언(柳漹)의 손자 류규(柳規)가 1426년(세종 8) 무과에 급제하여 예종 때 행첨지중추부사(行僉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류자환(柳子煥)은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정난공신 3등에 오르고 도승지·대사헌·전라도관찰사를 지냈다. 류규의 서자인 류자광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주도하며 공신의 지위에 올랐다. 2000년 인구는 1,475명이다.

중국[편집]

중국의 류(柳, Liu)씨는 크게 4가지 부류가 있다. 주(周)나라 제후국이자 주나라 왕족이 세운 노(魯)나라 계열과 초한쟁패기의 서초(西楚) 계열의 류(柳)씨, 중국 후한시기 고대 운남 애뢰국(哀牢國)의 유(柳)씨들, 그리고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陳)나라 군주 중 한명인 회공(懷公) 류(柳)의 자손들 등이다. 그 중 주요 원류 두가지를 먼저 설명하자면, 첫 번째는 노나라 공족(公族)인 유하혜(柳下惠)가 유하에 살면서 후손들이 유(柳)씨로 창성하였고, 두 번째는 서초 황제 의제(義帝)가 유(柳; 현재의 후난 성 창더) 땅에 거주하여 후손들이 유(柳)씨로 창성하였다.[3] 이 중 두 번째인 의제 계열 류(柳)씨에 대해 설명하자면, 사마천의 <史記 項雨本紀>에 의하면 본래 의제(義帝)는 살아생전 우이(盱台), 팽성(彭城)에 도읍하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항우에 의해 침(郴: 현재 후난 친저우)으로 쫓겨가는 중에 항우의 명을 받은 영포의 장수 등에 의해 시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류(柳:현재 후난 창더)에 거주하였다는 기록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류우석(劉禹錫)이 인용한 <義陵紀>에 의하면 류(柳)땅 사람들이 의제가 침현에 이르러 시해되자, 유(柳)땅 사람들이 어찌 '우리 왕(吾王)'을 죽였는가 하며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한고조 류방이 이를 듣고 옳게 여겨 류(柳)땅을 의릉현(義陵縣)으로 하였고 훗날 서한(西漢) 초에 다시 무릉현(武陵縣)으로 고쳐진다고 하였다.(劉禹錫《武陵書懷五十韻》序稱:“常林《義陵記》雲:初,項籍殺義帝于郴,武陵人曰:‘天下憐楚而興,今吾王何罪乃見殺?’郡民缟素哭于招屈亭。高祖聞而義之,故亦曰義陵。”)[4] 이런 측면에서 봤을때, 류성(柳城) 곧, 의릉, 무릉은 의제와 직, 간접적으로 깊은 관련이 있음이 확실하고 의제가 최소한 침현으로 가기 위해 이 류(柳)땅에 꽤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당시는 선조의 거주지나 선조와 관련이 있는 지명을 씨(氏)로 하는 것이 자명한 바,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의제의 후손들이 류(柳)씨로 칭했다는 것은 상당히 근거가 있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오대에서 송대에 걸쳐 만들어진 <百家姓>에 현재 원류를 밝혀 나오는 거의 모든 중국 서적에서 이 의제 계열 류(柳)씨도 주요 류씨 근원으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송대(宋代) 장정(章定)이 편찬한 《名賢氏族言行類稿》에도 이 의제 계열 류(柳)씨에 대한 설명이 기술되어 있다. 참고로 서초(西楚)는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와는 다르게 오, 월이 기반을 두었던 저장성에서 기원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류(柳)씨는 이 두 부류 이외에 소수민족의 성씨로도 존재한다. 곧, 중국 후한(後漢)시기, 운남성에 위치한 애뢰국(哀牢國) 말기의 황제들인 유승(柳承), 유모(柳貌) 부자는 모두 유(柳)씨였다.[5] [6] [7] 네 번째는 <姓纂>이라는 책에 보면 춘추전국시대 진(陳)나라 군주인 회공(懷公) 류(柳)의 자손들이 선조의 이름을 성으로 삼아 이어졌다고도 되어 있다.

묘금도 류(유) 劉[편집]

한국[편집]

유(劉)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조사에서 242,889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32위이다. 본관은 강릉, 거창, 배천, 충주 등이 있으며, 가장 인구가 많은 본관은 강릉 유씨이다. 그리고 이 劉씨도 본음이 柳와 같이 '류'이다. 곧, 두음법칙 때문에 모두 '유'로 쓰는 것이다.

  • 충주 유씨(忠州劉氏) 시조 유긍달(劉兢達)은 통일신라 말기 충주 지방의 호족이다. 그의 딸은 고려 태조의 셋째 부인인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이다. 사후 태사내사령(太師內史令)에 증직(贈職)되었다. 2000년 인구는 1,597명이다.
  • 거창 유씨(居昌劉氏) 시조 유전(劉荃)은 송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다고 한다. 『을묘보(乙卯譜)』 서문에는 유전이 한태조(漢太祖) 고황제(高皇帝)의 40세손으로 왕안석(王安石)에게 간언하다가 고려 문종 때에 고려로 들어와 영일군(迎日郡)에 터를 잡은 후로 경상도에서 세거하였다고 한다. 유전(劉筌)의 첫째 아들 유견규(劉堅規)가 거창군(居昌君)에 봉해져서 본관을 거창으로 했다. 2000년 인구는 19,419명이다.
  • 배천 유씨(白川劉氏) 중시조 유국추(劉國樞)는 유전(劉筌)의 8세손으로 고려에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지냈다고 하며,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어 배천군(白川君)에 추봉되었다고 한다. 2000년 인구는 2,252명이다.
  • 강릉 유씨(江陵劉氏) 중시조 유창(劉敞)은 유전의 12세손이다. 그는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옥성은 강원도 옥계면 일대 옛 이름이므로 후손들이 그를 중시조로 삼아 강릉을 본관으로 하고 있음이 『거창구보(居昌舊譜)』 서문에 실려 있다. 『씨족원류(氏族源流)』에 의하면 유창(劉敞)은 초명이 유경(劉敬)으로 1371년(공민왕 20) 신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강릉 유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8명을 배출하였다.[8] 2000년 인구는 178,913명이다.
  • 연안 유씨(延安劉氏) 시조 유극량(劉克良)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노비 출신이었으나, 홍섬의 배려로 노비 신분을 면제받고,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1년(선조 24) 전라좌수사가 되었고, 곧 조방장(助防將)으로 전임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다.

중국[편집]

중국의 '류'(劉, 刘 : Liu, Lau, Lao)씨는 6~7가지 계통이 있다. 주나라 이후 정(鄭)나라에서 류(劉)씨가 파생되었다. 한고조 유방과 어머니 류오(劉媼)도 류씨로, 남부 초나라 영토였던 저장성 출신이다. 그리고 요족들이 Liu, Lao 라는 성을 쓰고 있다. 또한 강소성 호족 항전이 유방에게 투항하고 류(劉)씨로 개칭하였다. 삼국시대 유봉은 본래 구(寇)씨였다. 흉노 어부라의 자손이 류(劉)씨로 변경하였다. 북위 선비족 출신의 독고(獨孤)씨가 류씨로 변경하였다. 몽골족들도 비교적 간단한 성씨인 류(Liu, Yu)씨를 성으로 많이 사용한다. 현재 중국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은 성씨이다.

서기 120년경 류헌(劉憲)은 낙랑태수였는데 왕조에게 피살된 기록이 전한다. 류인원(劉仁願)와 류인궤(劉仁軌)는 당나라 나당연합군의 무장으로 참가했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