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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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한 시위가 이루어낸 혁명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으며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가족과 함께 자살하였다. 일본의 민중운동인 안보투쟁에도 영향을 준 혁명이다. 4·19 민주혁명 혹은 4·19 학생운동으로도 일컫는다.

목차

[편집] 4월 19일 이전의 상황

1950년대 후반 이승만 대통령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쇠약해지면서 지도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자유당의 실력자인 이기붕의 건강은 더 나빴다. 그는 운동신경실조증이란 희귀병에 걸려 있었다. 이 때문에 자유당 강경파와 경무대(오늘날의 청와대) 비서가 정치를 좌우하게 되었다. 이 대통령은 ‘인의 장막’에 가려졌고 장관들도 대통령을 만나기 어렵게 되었다. 1959년 8월 중순 월터 다울링(Walter C. Dowling) 주한 미국대사는 허터(Christian A. Herter) 미 국무장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영부인은 비서 박찬일과 협력하여 대통령을 불쾌하게 할 만한 정보를 되도록 차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간혹 대통령이 확실히 알지 못하는 건에 대해 그녀가 이 대통령 이름으로 직접 정책결정을 내리기도 했다는 사실은 오랜 관행으로 되어 왔다. 최근 이 대통령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쇠약해지고 그가 숙지하지 못한 외부의 통제 불가능한 정보들이 증가하면서 이 같은 관행이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높아졌다. 아마도 박찬일이 프란체스카 여사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보다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1959년 12월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어 1960년 실시될 정․부통령 선거에 대비했다. 구파인 조병옥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고 신파인 장면은 부통령 후보에다 당 대표 자리를 맡아 민주당 신파와 구파는 균형을 유지했다.

당시 한국사회는 물가 상승과 조세부담 증가, 농촌 경제 파탄 등으로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팽배했다. 대학을 나온 고등실업자가 늘어나고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어 사회 불안이 가중되었다. 한국경제는 미국 원조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는데 1957년부터 원조가 대폭 줄자 어렵던 국민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렇듯 민생고가 극심해지자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높아졌다.

또한 이승만 정권과 미국 정부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1958년 12월 24일 보안법이 무술경관들이 야당의원을 연금한 상황에서 국회에서 통과되어 파동이 나자 미국정부는 1959년 1월 불만의 표시로 다울링 대사를 소환하기까지 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승만 정권이 한일 국교정상화에 소극적이자 불만이 커져가고 있었다.

1960년 1월 19일 조병옥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암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출국, 미국 월터 리드(Walter Reed) 종합병원에 입원하였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2월 1일부터 선거유세기간으로 정하고 3월 15일을 선거일로 공고했다. 조기 선거 실시 이유로는 농번기 피하기, 정국 안정 등을 들었다.

2월 16일 조병옥 후보가 미국에서 사망했다. 정․부통령 선거 약 1개월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민주당은 1956년에 이어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대통령 후보가 선거기간 중 사망한 것이다. 이미 대통령 후보 등록은 마감되었기 때문에 다른 후보를 내세울 수도 없었다. 조병옥 후보의 사망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4선은 사실상 결정되었으나 부통령 선거는 장면 후보가 다시 승리할 것이 확실시되었다. 이에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인 국회의장 이기붕의 추종세력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그러니까 부정선거는 대통령 자리가 아닌 부통령 자리를 놓고 벌어진 것이다. 내무장관 최인규는 전국의 시장, 군수와 경찰 간부들을 불러 부정투표 계획을 지시했다. 전 유권자의 40%에 해당하는 투표용지를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미리 투표함에 넣도록 하였다.

선거 유세 기간인 2월 28일 일요일 대구에서 그동안 관제 시위에 동원되어 오던 고교생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 이날 오후 2시에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가 예정되어 있었다. 자유당 경북도당은 며칠 전부터 각급 기관장들과 학교장을 소집하여 시민과 학생들이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각종 행사를 개최하거나 학생들을 등교시키라고 지시하였다. 일요일인데도 등교하게 된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를 벌였다. 경찰과 충돌하여 20여 명이 부상당하고 200여 명이 연행되었다.

3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민주당 유세가 열렸는데, 유세가 끝나자 학생 시민 등 약 1천 명이 ‘학생은 궐기하라’ 외치며 종로에서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8일 대전에서도 시위 학생과 경찰이 충돌하여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3월 15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학원자유화와 공명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3월 15일 선거가 실시되었는데 투개표 부정으로 자유당의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당선되었다. 이날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나 경찰이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오후 3시 40분 무렵부터 약 1천의 학생 시민이 부정선거 무효를 외치며 시내 중심가를 시위 행진하였는데 저녁 7시 경에는 1만 명으로 늘어났다. 8시 경 경찰이 발포하였다. 7명이 사망하고 870명이 부상을 당했다. 민주당은 이날 오후 4시 30분 성명을 발표하여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강도행위”라고 규정하였다.

3월 18일 마산 사건의 책임을 지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와 치안 국장 이강학이 사임하였다. 3월 24일 부산에서 고교생이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이자 부산시내 중고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다음날 폭우 속에서도 부산 동성중고, 테레사 여고, 경남공고, 혜화여고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4월 1일 대학이 개학하였다. 서울 시내 주요 대학생들은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11일 오전 11시 20분 경 마산 사건 때 행방불명되었던 고교생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에 떠올라 발견되었다.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사건은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경찰의 잔혹한 시위 진압으로 김주열이 살해된 것이 드러나자 이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 2만여 명이 규탄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하오 9시 30분 경 발포하기 시작, 2명이 숨졌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경무대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귀교하는 도중 종로5가에서 유지광이 이끄는 정치 깡패들로부터 기습을 받아 수십 명의 부상자를 냈다.

[편집] 4월 19일

4월 19일 오전부터 10만이 넘는 중고생, 대학생들이 재선거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오전 8시 30분 경 대광 고교생 1천여 명이 신설동 로터리를 돌아 서울 시내 중심가로 행진하였고 9시를 조금 넘어 서울대 문리대생을 선두로 법대, 약대, 수의대, 치대생 등 3천 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

9시 30분에는 서울대 사범대생 1천 명과 상대 2천여 명이, 10시에는 고려대생 4천 명이, 10시 20분에는 건국대생 2천여 명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11시에는 동국대생 2천여 명, 성균관대생 3천여 명이 교문을 나섰고 12시 경에는 연세대생 5천 명, 홍익대생 1천 명이 시내로 진입했다. 정오를 넘어설 무렵 광화문 일대에는 10만이 넘는 시위대가 몰렸다.

경찰은 시위대에 밀려 효자동 종점에서 시위대와 대치하였다. 경무대 입구 정문과 시위대의 거리는 100여 미터였다. 경찰은 시위대가 더 전진하지 못하도록 소방차를 바리케이드 삼아 배치하였다. 오후 1시 40분 경 시위대가 소방차 3, 4대를 탈취하여 경찰 저지선을 뚫고 경무대 정문으로 향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하여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날의 발포로 전국에서 186명이 사망하였고 6천 명 정도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희생자는 대학생 22명, 고교생 36명, 노동자 61명, 무직자 33명, 국민학생과 중학생 19명, 화이트컬러 10명, 기타 5명이었다.

오후 5시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5대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날까지도 이 대통령은 3․15 부정선거를 모르고 있었다. 오후 8시 월터 매카나기(Walter P. McConaughy) 미국 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하여 사태 수습을 논의하였다. 밤 10시 경 15사단이 계엄군으로 서울로 들어오자 시위가 수그러들었다.

[편집] 4월 19일 이후

4월 20일 송요찬(宋堯讚) 계엄사령관은 기자회견에서 학생에 대한 보복행위를 금지시켰다. 오후부터 KBS는 정규방송을 중단하였고 오후 7시에 이승만 대통령은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4월 21일 전국의 소요 사태에 책임을 지고 내각이 총사직했다. 장면은 내외신기자회견에서 사태수습방안은 재선거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날 서울대 등 5개 대학 총장이 송요찬 계엄사령관과 검찰총장을 방문하여 구속 학생을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매카나기 미국 대사가 방문하여 사태 수습에 대한 미국정부의 견해를 담은 허터 국무장관의 각서를 전했다.

4월 22일 송요찬 계엄사령관은 서울대, 고대 등 9개 대학 학생 대표와 회담하고 4․19 사망 학생들의 합동장례식을 허가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역임한 허정(許政)과 변영태(卞榮泰)를 경무대로 불러 요담하였다.

4월 23일 시국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동족살해에 통곡하며 계엄해제를 위해 노력하자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국회의장인 이기붕도 내각책임제를 지향하며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4월 24일 정부는 상오 5시를 기해 서울을 제외한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해제한다고 발표하였다. 이날 이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했다. 또한 이기붕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하였다. 이 수습 방안에 만족하는 국민은 적었다.

4월 25일 계엄사령부는 대통령 특명으로 모든 구속학생을 석방했다고 발표하였다. 이 대통령은 허정을 국무위원 가운데 서열 1위인 외무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이기붕이 부통령 직을 사퇴했으므로 대통령 궐위 시에는 외무장관이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될 것이었다. 이 대통령이 허정을 외무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하야를 고려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민주당은 대통령 사임과 선거 재실시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날 서울 시내 27개 대학 259명의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시위를 벌이면서 계엄령으로 위축되었던 시민들이 다시 합류하였다. 교수들은 ‘이 대통령은 하야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서울대를 출발, 종로 5가, 미국 대사관을 거쳐 태평로에 위치한 국회의사당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대학교수들은 사전에 미 대사관과 협의하였다). 미국 정부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한국 방문 취소를 발표하였고 원조 중지를 경고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압박하였다.

4월 26일 이른 아침 제1군 사령부에서 군단장급 지휘관 회의가 열렸다. 이 대통령의 하야만이 유일한 사태 해결책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 결의 내용은 오전 8시 경 김종오 참모차장과 미국 수석고문관에게 통고되었다. 서울 중심가에 시위 군중들이 모여 대통령 사임을 요구하며 광화문으로 나아갔다. 계엄군으로 출동한 15사단은 1군 사령부 참모들로부터 “어떠한 경우라도 총을 쏘아서는 안 된다”는 훈시를 받았다. 15사단장 조재미(趙在美) 준장은 장병들에게 일체 강경진압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시위대에 위협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다. 계엄군은 시위대를 방관하였고 탱크에 올라가 환호하는 것마저 허용했다. 11시 경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직 사퇴와 선거 재실시 등을 발표하였다.

4월 26일 0시 경 이기붕 일가가 모두 피살되었다.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 소위는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 있었는데,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고 알려졌으나 자유당 내부의 이기붕 반대파가 저지른 일이라는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다.]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서가 수리되었고 허정 외무부장관이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었다.

허정(1896~1988)은 부산 출생으로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3․1운동에 참가한 뒤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가하였다.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재불한인거류민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22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한인유학생회장, 1923년 미국에서 발행된 교포신문인 삼일신보(三一新報) 사장 등을 지냈다. 1945년 한민당 총무를 거쳐 1948년 부산 을구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교통부장관이 되었다. 1950년 사회부장관, 51~52년 국무총리 서리, 57~59년 서울특별시장, 59년 한일회담 수석대표 등을 지냈다.

4월 28일 허정 과도정부 내각 수반은 “혁명적 정치 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달성하겠다”고 천명하면서 1차로 과도내각의 각료 명단을 발표하였다. 내무부장관에 이호, 법무부장관에 권승렬, 재무부장관에 윤호병, 문교부장관에 이병도, 부흥부장관에 전례용, 보사부장관에 김성진 등이 임명되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이화장으로 거처를 옮겼다(미국 정부의 권유에 따라 5월 28일 하와이로 떠났다. 1965년 7월 19일 90세를 일기로 별세. 장례는 많은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5월 1일 과도정부는 3․15 선거를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편집] 사망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의 경찰의 발포등으로 당일 18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편집] 평가

"부정선거 다시 하라!"를 목표로 출발한 이 혁명은 이승만의 퇴진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학생들과 시민들이 흘린 피의 수혜자가 된 민주당 정권은 혁명의 계승자이기보다는 이승만 정권 수립 당시 권력의 배분에서 배제된, 어떤 의미에서 자유당 정권보다 더 보수적인 집단이었다. [1]

[편집] 같이 보기

[편집] 바깥 고리

[편집] 주석

  1. 한홍구 (2001년 2월 14일). 단 한번도 왕의 목을 치지 못한…. 《한겨레21》 (제346호). 2007년 12월 22일에 읽어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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