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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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화승총

조총(鳥銃)은 전근대 한국과 중국에서 화승총을 부른 이름이다.

초창기 받아들인 조총은 수렵용으로 쓰인 조잡한 성능의 것이었기에 전투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그러나 일본은 조총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곧 화력과 연사력을 대폭 향상시켰고, 1560년대에는 교차사격 전술을 도입하면서 연사력의 문제점을 보완하기에 이르렀다. 16세기 당시 일본의 총포 기술은 유럽보다 앞서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조총이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사무라이의 중요성이 퇴색되게 되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사무라이층의 반발로 전국시대가 종결된 이후 총포류는 점차 폐기되어, 19세기 근대화 시기 직전까지 일본은 칼 중심의 구식 군사체제를 유지하게 되었다.

어원[편집]

하늘을 나는 새를 쏘아 맞혀서 떨어뜨릴 수 있다(能中飛鳥)는 의미에서 조총(鳥銃)이라고 부른다.

철포(일본 발음으로 뎃포) 없이 전쟁에 나간다는 뜻의 무데뽀(無鐵砲:무철포)라는 말이 생겨났다.

성능[편집]

초창기 조총을 수용했을 당시의 성능은 매우 조잡해서, 한 발을 쏘고 난 후 다시 쏘려면 10~15분 정도의 장전 시간이 요구되었다. 게다가 그 화력도 형편없어서, 당시 장수들이 주로 입던 갑옷으로 충분히 유효 사거리에서 발사되는 조총의 탄환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개량이 이루어진 이후 전투에 도입되기 시작한 조총의 성능은 다음과 같이 개선되었다.

  • 약 47미터 이내에서는 새의 몸통이나 깃털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고, 약 78미터 거리에서는 몸통은 남아나며, 약 155미터 거리에서는 위력이 없어진다. - 천공 개물
  • 목표물이 기병인 경우, 50미터 거리 이내에서 치명적
  • 사거리: 100미터 (화승총통 30미터)
  • 발사 속도: 분당 2회 3최 (화승총통 1회)
  • 가늠자 가늠쇠: 있음 (화승총통 없음)
  • 격발 방식: 화승식 (화승총통 지화식)

역사[편집]

포르투갈로부터의 전래[편집]

조총이 일본에 전래된 것은 16세기로 당시 중국무역에 종사하다 일본 해안에 표류한 포르투갈 선원들에 의해서였다. 포르투갈 선원에게 받은 단 1자루의 조총을 일본 영주가 그것을 얻자마자 바로 분해하여 그 설계도를 그려 수만 자루를 찍어냈다.

일본 전국시대[편집]

일본 전국시대(1467~1573)는 조총으로 전투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국시대 당시 일본은 세계 최대의 조총 생산국이었다. 1573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무로마치 막부를 완전히 멸망시켜서 전국이 통일되고 난 후, 임진왜란(1592~1598)에는 그 전국시대 때 사용되었던 조총을 사용하였다. 노부나가는 조총 전술에 가장 뛰어난 명장으로, 단발식이었던 조총의 단점을 3교대 사격(3열 횡대로 1열씩 교대하면서 사격하고 장전하는 방식)이라는 전술로써 연발 사격의 효과가 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부나가의 3교대 조총사격 전술로, 당대 일본 최강이었던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의 기마군단을 궤멸시긴 1575년 나가시노 전투는 매우 유명하다. 노부나가는 일본의 사무라이식 창검 위주 전투방식을 조총위주의 전투방식으로 바꾼 인물이다.

임진왜란[편집]

선조실록》(권 39)에, 선조는 일본군이 지상전투에서 연승한 이유가 조총(火器) 때문이며, 조선군의 약점은 화기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점이라고 보았다.

조선군의 승자총통과 일본군의 조총의 대결로 유명한 전투는 1593년의 행주산성 전투이다. 전라도관찰사 권율(權慄)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추가로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같은 무능한 지휘관이 일본군을 지휘한 것도 행주대첩에서의 일본군의 패배의 큰 원인이었다. 특히 우키타 히데이에는 승자총통에 가슴을 맞고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왜병들이 업고 도망쳐서 간신히 살았을 정도였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이다.

  • 1575년 나카시노(長篠)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3천 명 규모의 소규모 조총부대가 일본 최강 기마부대에 승리함
  • 1583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통일
  • 1589년 황윤길(黃允吉) 일행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쓰시마도주로부터 조총 몇 자루를 받아옴. 일본 조총 최초 입수.
  • 1592년 임진왜란 발발
  • 1593년 2월 전리품인 조총을 모방하여 제조하는 과정에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선조실록》)
  • 1593년 12월 조총의 제조법이 교묘하여 세심하고 정교한 기술 없이는 제조가 불가능하다 - 비변사 (《선조실록》)
  • 1594년 3월 포수 훈련용 총이 부족하다 - 비변사 (《선조실록》)

17세기[편집]

  • 1654년(효종 5년) 청나라의 요청으로 조선군 조총부대 파병(나선정벌), 조선군 조총부대, 러시아 코사크기병대 격파
  • 1656년(효종 7년) 귀화 네덜란드인 박연(벨테브레)이 부싯돌식 화승총을 제작. 청나라에서 100자루를 요구

구한말[편집]

1900년대 초반, 조선을 식민화한 일본에 대해 대일항쟁운동을 하던 의병들이 화승총을 사용하였다.

기술 발전[편집]

화승식 발화장치를 갖춘 화승총은 이후에 바퀴식 방아쇠 화승총을 거쳐 부싯돌식 화승총으로 발전했다. 부싯돌식 화승총의 경우, 화승(불심지)가 필요없이 격발하면 부싯돌의 스파크를 통해서 바로 화약이 폭발, 탄환이 발사된다. 조선은 1656년에 귀화 네덜란드인 박연부싯돌식 화승총을 제작하였다. 이후 19세기 중엽에 공이식 화승총이 개발된 이후 실탄만 넣고서 쏘면 되는 소총이 개발되었고, 19세기 말에 한 번에 수백 발씩 쏠 수 있는 기관총이 개발되었다.

영화[편집]

  • 카게무샤 (Kagemusha : The Shadow Warrior)

주석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