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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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to infobox prétendant à un trône.png
태종
太宗
지위
조선 제3대 국왕
재위 1400년 11월 28일 ~ 1418년 9월 9일
전임 정종
후임 세종
섭정 왕세자 이제(1412.02.29.~1413.01.31.)
영의정 성석린(1413.01.31~1413.02.15.)
왕세자 이도(1418.07.01.~1418.07.08.)
영의정 한상경(1418.07.08.~1418.07.20.)
재상
이름
이방원
李芳遠
묘호 태종(太宗)
존호 건천체극대정계우예철성렬(建天體極大正啓佑睿哲成烈)
시호 공정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능호 헌릉
신상정보
출생일 1367년 6월 13일(1367-06-13)
출생지 고려 동계 함흥부 귀주(歸州)
사망일 1422년 5월 30일(1422-05-30) (54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연화방 신궁
왕조 조선의 기 조선
가문 전주 이씨
부친 태조
모친 신의왕후
배우자 원경왕후 민씨
자녀 적자녀 8명:
정순공주 (1385년 출생),
경정공주 (1387년 출생),
경안공주 (1393년 출생),
양녕대군 (1394년 출생),
효령대군 (1396년 출생),
세종 (1397년 출생),
정선공주 (1404년 출생),
성녕대군 (1405년 출생)
Sign of Taejong of Joseon.png

태종(太宗, 1367년 6월 13일(음력 5월 16일) ~ 1422년 5월 30일(음력 5월 10일), 재위 : 1400년 11월 28일 ~ 1418년 9월 9일)은 조선의 제3대 임금이다.

개요[편집]

이(李), 는 방원(芳遠), 본관전주(全州), 는 유덕(遺德)이다. 왕자 때 받은 작호는 정안군(靖安君), 정안공(靖安公)이고, 묘호태종이며, 시호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므로 존시를 합치면 태종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이다. 에서 받은 시호는 공정(恭定)이고, 나중에 숙종고종 때 존호를 더하여 시호를 모두 합치면 태종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太宗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이다.

태조 이성계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이며, 왕비는 민제의 딸 원경왕후이다.

고려 말, 과거 급제 후 명나라의 사신으로 이색을 수행하였으며, 이성계를 제거하려던 정몽주를 암살하였고, 반대파들을 숙청하여 조선 창업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조선 개국 이후, 개국에 기여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아들들을 외면하고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 아들을 세자를 정한 부왕과 정도전에 반발하여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여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왕위에 오른 뒤, 공신들을 축출하고 자신의 처남과 사돈 등을 비롯한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시키며 태조를 뒤이어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닦았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태종 이방원은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음력 5월 16일) 신묘일 고려 함흥부 귀주(歸州)에서 태조 이성계와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조의 아들들이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어릴 때부터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1] 운곡 원천석이 태종의 왕자 시절 스승 중 한명이였다.

과거 급제[편집]

1382년(우왕 9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383년(우왕 10년)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급제하였을 당시,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한씨 부인이 매우 기뻐하였다. [주 1]

위화도 회군 당시 가솔들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신했으며,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이색을 따라 북경에 다녀온 이후,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하였다. 특히 부하인 조영무와 함께 정몽주 제거 계획을 세운다.

1390년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에 임명되었고, 1391년 모후 한씨가 사망하자 개성군 상도리에 장사하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정몽주 일파가 이성계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자 신덕왕후 강씨는 여묘살이를 중단시키고 해주로 건너가 이방원을 개경으로 불러내었다.

역성 혁명 활동[편집]

정몽주, 온건개혁파 숙청[편집]

정적 정몽주

1392년(공양왕 4년) 3월 아버지 이성계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굴러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은신했는데,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의 상으로 경기도 영평에서 시묘살이 중이던 이방원은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급한 부름으로 개경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정몽주 등은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고 그간의 개혁 법령을 폐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문안을 빌미로 이성계의 가택을 방문하는 등 치밀함을 보인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성계는 신의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반대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이왕이면 정몽주를 설득하여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당부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로 방문했다. 이후 이방원은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택으로 불러들여 마주앉아 시조 한 수를 읊었다. 이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청구영언』과 『가곡원류』,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해동가요』, 『시가』(詩歌) 등에 실려 있는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此亦何如彼亦何如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하여가》라는 제목의 이 시조는 망하기 일보 직전인 고려 왕실을 붙들려 하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정몽주는 이에 《단심가》로 그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결국 정몽주는 결코 회유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방원은 무사를 보내 제거할 것을 지시하였고, 결국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하였다. 정몽주가 죽은 후에 이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하여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3] 이어 그는 이색과 그의 두 아들 및 그의 제자인 이숭인, 길재 등을 축출하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그러나 훗날 방원은 1398년 정도전을 숙청한 뒤에 정몽주를 충절(忠節)의 상징으로 현창시켜 익양부원군에 추증하고 영의정부사를 추서했다.[4] 이는 삼봉 정도전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기도 했다는 일부 평가도 있다.

조선 개국[편집]

정몽주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5]

원래 장자로 왕세자를 세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개국의 중요한 논리 중 하나였던 우창비왕설에 연관된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 방우를 제치고, 신하들은 나이와 공로를 감안해 신의왕후 소생 실질적 장남 영안군 이방과 또는 이방원을 세자로 세우라고 주청을 올렸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국정이 안정된다"라는 신권을 주창하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신권을 주장하는 자기들을 제거할까 봐 두려워 결국 왕세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의안대군 방석을 선택하였다.[6]

1394년 그는 전직 몽골 관료였으며 조선의 외교관이었던 조반 등을 따라 연경과 남경을 방문하여 주원장을 대면하였고, 후의 영락제와도 만났다.[7]

왕자의 난[편집]

사촌이자 그를 지지했던 이천우
제1차 왕자의 난[편집]

세자 자리를 두고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의안대군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크게 불만을 나타냈으며 그것은 누구보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도 마찬가지였다. 태조는 개국 이후 군권분장정책을 통해 영안군 이방과, 정안군 이방원, 무안군 이방번, 세자의 매제 흥안군 등에게 절제사 직임을 수여해 군권을 분할했으며, 이것은 종친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원칙에 위배되고 군권을 국왕의 통제 아래에 놓는 일원적 지배 체제에 위배되었으므로, 개국 초부터 태조의 지시 아래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이방원은 1398년에 부왕 태조가 와병 중임을 틈타 아내 민씨의 후원과 이숙번·하륜·조영무 등 사병 혁파 반대 세력, 이화·사촌 이천우·처남 민무구·민무질 등 종친, 외척과 결탁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의 개국공신들과 이복 동생인 무안대군 방번·세자 방석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안 가 태조는 권력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영안군 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가 바로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이다.[5] 이때 아버지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아들들이 그를 지지하고 정안군 이방원이 국정을 장악한다.

제2차 왕자의 난[편집]

하지만 형제들 간에 다시 한번 분란이 발생하는데, 이방원의 넷째 형인 회안대군 방간이 박포의 꼬드김에 넘어가 왕위에 오를 목적으로 1400년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에도 이화·이천우 등이 그를 도왔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장수들과 병사들을 가지고 있던 이방원은 쉽게 이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이후 박포 등을 처형하고 회안대군 부자를 황해도 토산으로 귀양보냈다. 이때에도 회안대군을 죽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왔으나 그를 유배시키는 선에서 불문에 부쳤다.

그해 음력 2월에 정종으로부터 왕세자[8] 로 책봉되었고, 책봉된 지 9개월 만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9] 이후 1401년 음력 6월 12일, 명나라로부터 권지고려국사가 아닌 조선 국왕으로 책봉받았다.[10]

치세[편집]

사병 혁파와 법령 개정[편집]

태종의 어필[6]

태종은 조선 초기의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관제 개혁을 통한 왕권 강화와 유교 정치에 온 힘을 쏟았다. 사병을 혁파하여 병권을 일원화하고, 중앙 제도와 지방 제도를 새로히 정비하여 고려의 잔재를 완전히 없애고, 의흥부(義興府)를 폐지하여 병조의 지휘권을 확정하는 등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국방력을 강화했다. 토지 제도와 조세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켜 나갔다. 척불숭유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사찰을 정리하고 사원전을 몰수하였다. 또한 호패법·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을 실시했으며, 국방에도 힘써 야인을 다스리는 등 국가 기강을 안정시켰다.[11] 사병 혁파로 고려 이래 각 지역의 실권자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리는 사병 조직은 사라졌으며, 이들은 농부가 되거나 군역에 편입되었다.

관제 개정과 신문고 설치[편집]

태종 대에는 모두 4차례에 걸쳐 관제 개혁이 시행되었다. 태조 대 정도전이 설정한 제도 방향성을 권근과 하륜 등이 수정하여 국왕-의정부-육조-언관 체제가 이 시기 자리잡았다. 태종 14년 6조 직계제를 통해 의정부와 6조의 관료들이 왕에게 직속되어 정무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가 이렇게 관료들을 잘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려 말기에 10년간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로 지냈던 적이 있었기에, 관료들이 어떤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12]

태종은 1402년(태종 2년)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또 정적을 색출하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다시 옮기는 등 국가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주자소를 세워 동활자를 제작했고, 호포(戶布)를 폐지하고 저화(楮貨)를 발행했다.

공신 숙청[편집]

태종은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자신을 등극하게 만들어준 공신들을 유배보내거나 처형했다. 이러한 태종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 당대와 다음인 세종 때에는 조선이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군사적 발전을 이루게 될 수 있었다.[6] 태종은 먼저 개국공신이자 자신의 옹립에 공을 세운 이거이 부자를 유배보내고, 공신이자 오른팔이었던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 이숙번(李叔蕃)을 유배보낸 뒤 '사후 백여년간 도성출입을 금지'하라는 금족령을 내렸다.

원경왕후의 아버지이며 태종의 장인 민제는 개국 공신이었고, 그의 네명의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 민무휼민무회 등은 모두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태종을 도와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었다. 장인 민제의 가문이 외척으로 성장하면서 이들이 세자인 양녕대군을 지지하고, 그들 주변에 인물들이 결집하자 장인과 처남들을 과감하게 제거한다. 장인 민제는 곧 병사했고, 장인의 죽음과 동시에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유배했다가 사사케 하고, 이후 민무휼과 민무회도 사형에 처했다. 그의 처가는 몰락하게 되었다. 1405년 태종은 권근의 주청을 받아들여 정몽주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추증했다.[13] 본인이 제거한 사람을 영의정에 추증함으로써 자신의 포용력을 대외에 과시하려는 의도였다.[13]

서적 간행[편집]

1403년 태종은 주자소의 설치를 명하여 계미자(癸未字) 활판을 제작하게 했으며 직접 이를 감독했다. 1404년 2월에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으나 이 사실을 사관에게 기록하지 말것을 명령한 사실까지 실록에 기록되었다.[14]

1413년에는 즉위 이후에 추진한 일을 총괄하여 '경제육전'으로 재편찬하였고, 원집상절(元集詳節)과 속집상절 (續集詳節) 2권을 간행하였다. 1414년에는 정도전이 편찬하려다가 중단한 《고려사》의 편찬 작업을 조준, 권근, 하륜 등에게 명하여 계속 하게 하였으며, 권근과 하륜에게는 삼국사도 새로이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집권 후반[편집]

둘째 아들 효령대군

1417년부터 퇴위 직전까지 그는 서운관(書雲觀)에 소장된 각종 예언 서적과 무속, 비기도참서를 혹세무민의 이유로 소각하도록 지시한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은 왕세자인데도 학문 연마를 게을리하고, 자유분방한 활동을 좋아했다. 양녕의 스승 계성군은 태종을 찾아와 수업의 불가함을 알렸다. 양녕대군은 각지에 기생들을 궁궐로 데려오기도 했는데, 태종은 양녕이 데려온 기생들을 곤장을 쳐서 궁궐 밖으로 내쫓기도 했다. 양녕은 그럴 때마다 부왕 태종이 후궁을 많이 거느린 것을 언급하며 항변했다. 양녕대군의 폐위가 유력시되자 효령대군은 더 글공부를 열심히 한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가 충녕대군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효령대군에게 넌지시 일러주자, 실망한 효령대군은 불가에 관심을 갖다가 후일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15]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은 눈병이 나고, 질환에 시달려 병석에 누우면서도 책을 옆에 끼고 있었다. 태종은 명하여 충녕이 책을 못보게 엄명을 내렸으나 충녕은 몰래 책을 숨겨놓고 병석에서도 책을 읽었다. 또한 병석에 누운 동생 성녕대군을 간호하는 모습이 태종에 눈에 들기도 했다.

1418년 태종은 양녕대군이 하루 종일 방탕한 생활만 일삼는다는 이유를 들어 왕세자에서 폐위할 것을 결심한다. 아내인 원경왕후와 상의 끝에 양녕을 폐세자 하기로 하자 신하들은 찬성하였고, 황희 등 소수만이 반대하였다. 6월, 태종은 양녕을 왕세자에서 폐위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양녕대군 폐위에 반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되는 그의 장인 김한로 역시 외지로 유배보냈다.


퇴위와 죽음[편집]

심온 제거[편집]

태종은 1418년 8월 10일, 옥새를 충녕에게 넘긴 뒤 수강궁으로 물러났다. 양위를 거두어달라는 청을 거절함으로써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상왕이 된 후에도 그는 4년간 줄곧 국정을 감독하였고, 병권과 인사권을 장악하였다. 1418년 11월 8일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419년에는 둘째형 정종이 사망했는데, 《정종실록》은 태종 생전에 간행되지 못하고 태종이 죽은 뒤에 편찬, 간행되었다.

태종은 며느리 소헌왕후의 아버지 심온을 숙청할 계획을 세웠다. 병조참판 강상인이 정무를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사위인 세종에게 보고한 것을 빌미삼아 그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고, 심온을 영의정부사에 임명한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는 국문을 친히 주관하며 강상인에게서 심온의 이름이 거론되게 하였고, 심온이 돌아오기 전 강상인과 심정, 박습, 이관 등을 처형한다. 대질심문할 용의자나 증인도 없는 상태에서 심온은 사사되었다. 이후 왕비 소헌왕후가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출해야 된다는 주장이 나타났으나 아들 충녕대군 이도의 간청과 애원으로 소헌왕후에 관한 폐출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최후[편집]

1421년 9월 7일 의정부에서 이미 상왕이었던 태종의 휘호(徽號)를 올릴 것을 청하여, 개국의 공을 인정받아 태상왕으로 진봉되어 9월 12일 '성덕신공태상왕(盛德神功太上王)'으로 존숭되었다. 7개월 후인 1422년 4월, 날씨가 화창하여 세종과 함께 철원의 고석정(高石亭) 근처에서 사냥을 하며 노루와 멧돼지를 한 마리씩 잡았고, 또 22일에는 다시 세종과 동교(東郊)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낙천정(樂天亭)에서 쉬기도 하였는데 이날 태종은 환궁하였다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보름이 넘게 병석에 있다가 1422년 5월 10일, 천달방(泉達坊) 신궁(新宮)[주 2]에서 세종, 양녕대군, 효령대군 등 아들들과 후궁 및 그 자식들, 그리고 신하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56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일찍이 왕권을 물려준 태종은 줄곧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하다가 승하한 것이다. 재위한 지 17년 10개월 만의 일이었다.

태종 우[편집]

연려실기술》에는 태종의 최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태종 말년에 큰 가뭄이 닥쳤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논은 갈라졌고 밭은 타들어 갔으며 백성들은 풀뿌리로 먹을 것을 대신했다. 오랜 가뭄으로 민심은 날로 더욱 흉흉해져 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태종도 각 고을 관찰사들을 불러 민심을 수습하지 못하는 것을 꾸짖었으나 오랜 가뭄으로 곡식이 없고 설상가상으로 괴질까지 번지고 있다는 말을 듣자 태종은 가뭄 속 땡볕 아래 종일토록 앉아 하늘에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태종은 죽기 전까지도 기우를 위하여 노력하다가 승하하기 직전에 "내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반드시 이 날만이라도 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후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에는 어김없이 비가 내렸는데, 사람들은 이 비를 태종 우(太宗 雨)라고 불렀다.[17]

가계[편집]

 조선 제3대 국왕   태종 太宗  출생 사망
1367년 6월 13일 (음력 5월 16일)
고려 고려 동북면 함흥부 귀주 사제
1422년 5월 30일 (음력 5월 10일) (54세)
조선 조선 한성부 연화방 수강궁 별전

태종의 직계조상[편집]

 
 
 
 
 
 
 
 
 
 
 
 
 
 
 
 
 
 
도조 이춘
 
 
 
 
 
 
 
 
 
 
 
환조 이자춘
 
 
 
 
 
 
 
 
 
 
 
 
 
 
경순왕후 박씨
 
 
 
 
 
 
 
 
 
 
 
아버지 태조 이성계
 
 
 
 
 
 
 
 
 
 
 
 
 
 
 
 
 
영흥부원군 최한기
 
 
 
 
 
 
 
 
 
 
 
의혜왕후 최씨
 
 
 
 
 
 
 
 
 
 
 
 
 
 
조선국대부인 이씨
 
 
 
 
 
 
 
 
 
 
 
  태종 이방원  
 
 
 
 
 
 
 
 
 
 
 
 
 
 
 
 
 
 
 
 
안천부원군 한규인
 
 
 
 
 
 
 
 
 
 
 
안천부원군 한경
 
 
 
 
 
 
 
 
 
 
 
 
 
 
증 정경부인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
 
 
 
 
 
 
 
 
 
 
 
 
 
 
 
 
 
신원려
 
 
 
 
 
 
 
 
 
 
 
삼한국대부인 삭녕 신씨
 
 
 
 
 
 
 
 
 
 
 
 
 

부모[편집]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태조대왕 太祖大王 전주 1335년 - 1408년 환조대왕 이자춘 桓祖大王 李子春
의혜왕후 최씨 懿惠王后 崔氏
  조선의 초대 국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신의왕후 한씨 神懿王后 韓氏 안변 1337년 - 1391년 안천부원군 한경 安川府院君 韓卿
삼한국대부인 삭녕 신씨 三韓國大夫人 朔寧 申氏

왕비[편집]

정비 시호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 閔氏 
후덕왕대비 厚德王大妃
  원경왕태후 元敬王太后
[18]
여흥 1365년 - 1420년 여흥부원군 민제 驪興府院君 閔霽
삼한국대부인 여산 송씨 三韓國大夫人 礪山 宋氏

후궁[편집]

구분 시호 본관 생몰년 부모 별칭 비고
의빈 권씨 懿嬪 權氏 안동 생몰년 미상 권홍 權弘 정의궁주 貞懿宮主
효빈 김씨 孝嬪 金氏   ?   - 1454년 효순궁주 孝順宮主 고종 9년(1872년) 빈으로 추증[19]
신빈 신씨 信嬪 辛氏 영월   ?   - 1435년 신영귀 辛永貴 신녕옹주 信寧翁主
신녕궁주 信寧宮主
선빈 안씨 善嬪 安氏 순흥   ?   - 1468년 안의 安義 숙선옹주 淑善翁主
소빈 노씨 昭嬪 盧氏 장연   ?   - 1479년 노구산 盧龜山
충주 최씨 忠州 崔氏
소혜옹주 昭惠翁主
소혜궁주 昭惠宮主
명빈 김씨 明嬪 金氏 안동   ?   - 1479년 김구덕 金九德
영월 신씨 寧越 辛氏
문종폐세자빈 김씨의 고모
정빈 고씨 貞嬪 高氏   ?   - 1426년
숙의 숙의 이씨 淑儀 李氏  생몰년 미상 덕숙옹주 德淑翁主
숙의 최씨 淑儀 崔氏
궁주 숙공궁주 김씨 淑恭宮主 金氏 청도 김점 金漸
권씨 權氏
세종 3년(1421년) 폐출[20]
의정궁주 조씨 義貞宮主 趙氏 한양   ?   - 1454년 조뇌 趙賚
혜순궁주 이씨 惠順宮主 李氏 고성   ?   - 1438년 이운로 李云老
신순궁주 이씨 信順宮主 李氏 성주 1390년 -   ?   이직 李稷 정민 正敏[21]
옹주 혜선옹주 홍씨 惠善翁主 洪氏 생몰년 미상 가이옹주 加伊翁主
가희아 加喜兒
순혜옹주 장씨 順惠翁主 張氏 안동   ?   - 1423년 장사길 張思吉
복덕 福德
서경옹주 西京翁主 생몰년 미상
궁인 후궁 김씨 後宮 金氏


왕자[편집]

군호 이름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양녕대군 讓寧大君
폐세자 廢世子
제 禔 1394년 - 1462년 원경왕후 민씨 수성부부인 김씨 隨城府夫人 金氏
숙빈 김씨 淑嬪 金氏
태종 18년(1418년) 폐세자[22]
2 효령대군 孝寧大君 보 𥙷 1396년 - 1486년 예성부부인 정씨 蘂城府夫人 鄭氏
3 세종대왕 世宗大王
충녕대군 忠寧大君
도 祹 1397년 - 1450년 소헌왕후 심씨 昭憲王后 沈氏    제4대 국왕   
4 경녕군 敬寧君 비 裶 1402년 - 1458년 효빈 김씨 청원부부인 김씨 淸原府夫人 金氏
5 함녕군 諴寧君 인 䄄 1402년 - 1467년 신빈 신씨 군부인 전주 최씨 郡夫人 全州 崔氏
6 성녕대군 誠寧大君 종 褈 1405년 - 1418년 원경왕후 민씨 삼한국대부인 성씨 三韓國大夫人 成氏
7 온녕군 溫寧君 정 䄇 1407년 - 1454년 신빈 신씨 익산군부인 박씨 益山郡夫人 朴氏
8 혜령군 惠寧君 지 祉 1407년 - 1440년 선빈 안씨 낙안군부인 윤씨 樂安郡夫人 尹氏
9 근녕군 謹寧君 농 禯 1411년 - 1461년 정빈 고씨 태안군부인 허씨 泰安郡夫人 許氏
10 희령군 熙寧君 타 𥙇 1412년 - 1465년 숙의 최씨 군부인 순창 신씨 郡夫人 淳昌 申氏
군부인 평산 신씨 郡夫人 平山 申氏
11 후령군 厚寧君 간 𥘏 1419년 - 1450년 숙의 이씨 군부인 평산 신씨 郡夫人 平山 申氏
12 익녕군 益寧君 치 袳 1422년 - 1464년 선빈 안씨 군부인 운봉 박씨 郡夫人 雲峰 朴氏
-   왕자[23] 1400년 - 1401년   미상
-   왕자[24][25] 1403년 - 1404년
- 대군[26] 미상[주 3] 원경왕후 민씨
- 대군[26]
- 대군[26]
- 대군[27] 1412년 - 1412년

왕녀[편집]

작호 생몰년 생모 배우자 비고
1 정순공주 貞順公主 1385년 - 1460년 원경왕후 민씨 청평부원군 淸平府院君 이백강 李伯剛
2 경정공주 慶貞公主 1387년 - 1455년 평양부원군 平壤府院君 조대림 趙大臨
3 경안공주 慶安公主 1393년 - 1415년 길창군 吉昌君 권규 權跬
4 정선공주 貞善公主 1404년 - 1424년 의산군 宜山君 남휘 南暉 남이의 할머니
5 정혜옹주 貞惠翁主   ?   - 1424년 의빈 권씨 운성군 雲城君 박종우 朴從愚
6 정신옹주 貞信翁主   ?   - 1452년 신빈 신씨 영평군 鈴平君 윤계동 尹季童
7 정정옹주 貞靜翁主 1410년 - 1456년 한원군 漢原君 조선 趙璿
8 숙정옹주 淑貞翁主 ? - 1489년 이후 일성군 日城君 정효전 鄭孝全
9 소신옹주 昭信翁主   ?  - 1437년 유천군 柔川君 변효순 邊孝順
10 숙혜옹주 淑惠翁主   ?  - 1464년 소빈 노씨 성원위 星原尉 이정녕 李正寧
11 숙녕옹주 淑寧翁主  생몰년 미상 신빈 신씨 파성군 坡城君 윤우 尹愚
12 소숙옹주 昭淑翁主   ?  - 1456년 선빈 안씨 해평군 海平君 윤연명 尹延命
13 숙경옹주 淑慶翁主   ?  - 1494년 신빈 신씨 파평위 坡平尉 윤암 尹巖
14 경신옹주 敬愼翁主 ? - 1480년 이후 선빈 안씨 전의군 全義君 이완 李梡
15 숙안옹주 淑安翁主   ?  - 1464년 후궁 김씨 회천군 懷川君 황유黃裕
16 숙근옹주 淑謹翁主   ?  - 1450년 신빈 신씨 화천군 花川君 권공 權恭
17 숙순옹주 淑順翁主 ? - 1481년 이후 이씨 파원위 坡原尉 윤평 尹泙
-   왕녀[28] 1400년 - 1402년 미상
-   왕녀[29] 1412년 - 1414년


능묘[편집]

태종이 묻힌 헌릉 앞 문무(文武) 석상

태종은 1422년 9월 6일 광주(廣州) 서대모산(西大母山) 즉 할미산의 양지 바른 곳에 이미 묻혀있던 부인 원경왕후와 합장되었다가 후에 천장(遷葬)하였다. 능의 이름을 헌릉(獻陵)이라 명명(命名)하였는데 헌릉은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獻陵)이며, 원경왕후의 능과 함께 쌍릉으로 조성되어 있다. 인근에는 순조순원왕후의 능인 인릉(仁陵)이 위치해 있다. 헌릉은 인릉과 함께 대한민국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었다.[9]

태종이 등장하는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연도 방송사 제목 배우
1973년 KBS 세종대왕 남성우[30]
1976년 KBS 황희 정승 남성우
1978년 MBC 연지 정욱[31]
1983년 KBS 개국 임혁주
1983년 MBC 추동궁 마마 이정길
1983년 MBC 뿌리깊은 나무 이정길
1996년~1998년 KBS 용의 눈물 유동근
2008년 KBS 대왕 세종 김영철
2011년 SBS 뿌리깊은 나무 백윤식
2012년~2013년 SBS 대풍수 최태준
2014년 KBS 정도전 안재모
2014년~2015년 JTBC 하녀들 안내상
2015년~2016년 SBS 육룡이 나르샤 유아인
2016년 KBS1 장영실 김영철
2019년 JTBC 나의 나라 장혁

영화[편집]

연도 제목 배우
2012년 나는 왕이로소이다 박영규
2015년 순수의 시대 장혁

서적[편집]

  •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저자 이한우. 2005.11.1. 해냄출판사
  • 이방원전》 이정근. 가람기획, 2008.5.5. ISBN 978-89-8435-283-4(04810)

평가[편집]

이성계의 아들 중 가장 영민하고 대범하고 냉철하였다.[32] 이는 빛나는 다음 시대를 열기 위한 일이라면 어떠한 악업(惡業)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으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조선을 탄탄한 기반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리고 손자인 세조와 놀랍도록 유사한 점이 많다. 군왕의 권력이 신하의 권력보다 우위여야 한다고 평생을 믿었던 인물이다. 훗날 세조와 비교해 볼 때, 쿠데타로 즉위한 인물로서의 공통점은 있지만, 사후 처리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즉, 세조는 왕위 등극 후에 공신을 우대해 줘서 이들에게 공을 치하했지만, 태종은 반대로 공신을 비롯하여 왕실의 종친들마저 처형하는 등, 후계자의 후환을 미리 제거하였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이 덕분에 강력한 왕권을 지닌 왕이 된다.[33]

기타[편집]

숭유억불 정책[편집]

태종은 집권 직후 종교문제에도 개입하였다. 그 자신이 성리학을 수학한 인물이었지만, 새 왕조 체제에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을 한층 강화한다. 1406년 사원혁파를 단행하고, 사찰에 소속된 노비와 전답을 압수하였으며, 승려들 역시 천인으로 취급하였다. 이로써 얻어진 노비와 전토를 국고에 강제 환속시켰다.

도교에도 부정적이었던 그는 1417년부터는 서운관(書雲觀)에 소장된 각종 비기도참서와 예언서들, 무속 관련 서적들을 소각하도록 한다.

정종과 유사한 시호[편집]

태종의 시호는 공정(恭定)으로 형인 정종의 시호 공정(恭靖)과 유사하여 혼선을 빚기도 했다. 또한 형 정종은 그에게 양위를 했음에도 정식 군주로 인정받지도 못하다가 숙종 때인 1681년(숙종 7년)에 가서 정종의 묘호를 받는다.

정릉 수난[편집]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왕이 된 신의왕후 소생의 다섯째 왕자인 태종 이방원은, 정릉 파괴와 이전을 지시했다. 자신의 소생인 어린 막내를 왕세자로 내세운 신덕왕후를 태조 사후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 초 자신이나 동복 형제를 제치고 이복 동생인 의안대군 등을 세자로 세운 것에 불만을 품은 태종은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능에 분풀이를 한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죽자 자신의 신후지지도 미리 옆에 마련하고 한성부의 중심에 안장하고 정릉(貞陵)이라 하였다.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몹시 애통해하며 그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향차를 바치게 하다가 다시 1년 간의 공사를 거쳐 흥천사(興天寺)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부왕의 능을 경기도 양주군 구리에 안장하고,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貞陵)은 도성 밖으로 이장을 명한다. 이장하면서 흥천사(興天寺)를 폐쇄했고, 신덕왕후의 능에 있던 석상과 석물을 철거하고 1409년(태종 9) 당시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이장한다.[34]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貞陵)을 1409년(태종 9) 당시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이장했고, 묘에는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또한 신덕왕후 능의 석상과 석물을 다리 교각으로 만들었다. 능침 앞에 세워진 정자각은 헐어버린 뒤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정자각 석물을 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34] 제례에서도 신덕왕후에게 올리는 제례도 왕비로서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다. 그녀의 묘소가 훼철되는 날 많은 비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는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태종은 부왕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정릉을 도성 밖 양주군 성북면 사한리(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천장하라 명했다.[35]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와 가까우니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라는 의정부의 주청을 가납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는 태종의 의지였다.[35]

태종은 삼사와 언관들에게 비밀리에 신덕왕후의 왕릉이 도성 밖에 있는 것이 옳은가를 묻기도 했다. 파헤쳐진 정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 복구[35] 에 쓰였으며 목재는 태평관 건축에 사용되었다.[36] 신덕왕후의 능 앞에 세워진 원찰 역시 붕괴되어 재목으로 쓰인다.

이러한 곡절은 기록으로 전해져오다가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병풍석이 발견되면서 그 사실이 밝혀졌다.[36] 사한리 골짜기에 있는 정릉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것은 172년만인 1581년(선조 14년)이었다. 덕원에 사는 강순일이 임금이 행차하는 수레 앞에 나아가 격쟁한 것이다.

저는 판삼사사 강윤성의 후손입니다. 지금 군역에 배정되어 있으니 국묘를 봉사하는 사람들은 군역을 면제하는 전례에 따라주소서
 
— 《연려실기술

당시 태조의 부모를 비롯한 4대 조상의 묘가 함흥에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람을 정해 묘를 돌보게 하고, 그 사람의 신분을 국묘봉사자(國墓奉祠者)라 하여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즉 조선 최초의 왕비 묘를 돌보고 있으니 군역을 면제해달라는 조심스러운 복위 제청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불거진 신덕왕후 복위 문제는 왕대를 이어가며 논의를 거듭한 끝에 1669년(현종 10년) 우암 송시열에 의해 마침표가 찍혔다.[36][37]

신덕왕후 강등[편집]

태종은 계모인 신덕왕후를 왕후가 아닌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종묘의 제례에서도 신덕왕후에게 올리는 제례도 왕비로서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다. 동시에 태종은 적서 차별법을 발표하여 서자들의 관직 기회를 차단한다. 신덕왕후는 사후 250여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년) 음력 8월 5일에야 송시열의 주도로 지위가 왕비로 복위된다.

태종대왕께서는 성대한 덕과 순일한 효성이 천고에 탁월하시니 요임금이 전하듯, 순임금이 이어받듯 질서가 정연하다고 사변에 대처할 방법이 없었으나 유독 신덕왕후에 대해서만 능침의 의절에 손상이 있고 배향하는 예가 오래도록 결손되었습니다. 이는 당시의 예관이 예의 참뜻을 몰라 이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37]

형식은 송시열의 상소를 현종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태종의 잘못된 조치를 바로잡는다고 할 수 없으니 모든 죄는 당시 태종을 보필했던 신하가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다.[37] 이로써 신덕왕후는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지고 정릉은 왕릉으로서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37] 88년간 이어져온 논쟁이었다.[37] 신덕왕후가 왕비로 복귀되는 날에도 엄청난 비가 왔는데, 백성들은 그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하였다.

서얼 차별 규정[편집]

부왕 태조신덕왕후 강씨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을 불쾌히 여긴 그는 서자(庶子) 및 서얼(庶孼)들의 관직임용 제한 규정을 만든다. 태조 이성계조선초 창업에 막대한 공을 세운 방원을 비롯한 본 부인 한씨의 자식들을 배제하고 계비 강씨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38]

이에 방원은 불만을 품고 세자인 방석과 그 옹호 세력인 서얼 출신의 정도전 등을 힘으로 몰아냈다. 그리고는 방원은 “적서의 구분을 분명히 하였다”라고 공언하였고, 방석 형제를 서얼이라고 불렀다.[38][39]

방원은 둘째 형 영안군 방과를 왕으로 앉히면서, 그 교지에 ‘간신 정도전 등이 서얼을 세워 후사를 삼아 어른과 아이의 차례를 뒤엎고 적서의 구분을 어지럽히려 하였다.’(태조실록 15년 9월 정해 조)라고 쓰게 하였다.[38] 이것이 적, 서를 구분지은 최초의 기록이다.[38] 그 뒤 태종은 서자들의 관직 임용 자체를 제한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서자 차별 규정은 1894년까지 지속된다.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자 적서, 구분의 문제는 여러 신하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하륜의 주장이다.[38] 하륜이자춘의 첩의 자손은 현직에 등용치 말라고 주장하였다.[38]

그 후 서선(徐選)은 1415년(태종 15년) 종친과 각 품관의 서얼은 현직에 두지 말라고 공의를 내세워 이의 채택을 보았다. 서얼 금고를 주장하던 태종은 서선 등의 공의를 빌미로 서자들의 관직 진출 금지령을 내린다. 그 뒤 서얼 금고령적서 차별제도는 성종 때 가서 세부조항을 성종이 직접 지어 반포함으로써, 재가녀(재혼 여성) 자손 금고령과 함께 하나의 규정으로 정착된다.

코끼리 일화[편집]

재위 11년인 1411년 2월 22일, 일본왕 원의지(源義持, 실제로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가 코끼리를 바쳤다. 이는 기록 상으로 한반도에 처음으로 들어온 코끼리였다. 태종은 이를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했다.[40] 이듬해 12월 10일, 전 공조전서 이우(李瑀)가 코끼리를 보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이우를 밟아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41] 1413년 병조판서 유정현(柳廷顯)이 진언을 올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를 전라도 해도(海島)에 두길 청하니, 태종이 이를 받아들였다.[42] 귀양 간 코끼리가 풀을 먹지 않고 날로 수척해진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1414년 5월 3일 태종은 코끼리를 다시 육지로 불러오게 했다.[43]

이 코끼리는 세종 때까지 살았는데, 상왕이었던 태종은 1420년 12월 28일 전라도 관찰사가 코끼리를 기르는 것이 어렵다는 계를 올리자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이를 돌아가며 키우도록 했다.[44] 이듬해인 1421년에는 충청도 공주에 가 있던 코끼리가 기르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또 발생했는데, 이후에는 이 코끼리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45]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주해[편집]

  1.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의 기록에는 이방원은 아버지(이성계)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날마다 부지런히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날마다 학문의 성취가 진일보하게 되자 "내 뜻을 성취할 사람은 반드시 너일 것이다."라고 칭찬하였다고 전해온다. 전장에서 일생을 마쳐야 하는 무인의 삶 속에서 뜻을 받들어 학문에 정진하였으니 기쁨이 컸다고 한다. 1382년, 나이 열여섯의 동안(童顔) 소년으로서 고려(高麗) 진사시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병과(丙科)로 제7등으로 급제하였는데 당시의 고려에서는 과거제도의 시험 성적을 갑과(甲科) · 을과(乙科) · 병과(丙科) · 정과(丁科)…… 등으로 나누어 1등에서 3등까지 ‘갑과’, 4등에서 6등까지 ‘을과’, 7등에서 9등까지 ‘병과’…… 등으로 구별했다고 전한다. (고려 시대 후기에는 갑과가 없어지고, 을과가 1~3등, 병과가 4~10등으로 변경된다. 갑과에 대한 정보는 잘 못 된 자료 수집일 수 있음)이같은 우수한 성적을 거둬 이성계의 기쁨은 방이 붙던 날 대궐 뜰에 절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후광도 아니고 스스로 학문을 닦아 성취한 것이었고 무인 집안에서 문인이 나왔으니 아버지(이성계)와 어머니(신의왕후 한씨)의 기쁨이 대단하였다고 전해온다.[2]
  2. 신궁(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수강궁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그 후 성종 14년(1483년) 세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다.[16]
  3. 양녕대군(1394년생)의 형들이므로 경안공주(1393년생) 보다 이전에 출생함

각주[편집]

  1. 《백과사전》 태종 참조
  2. “선원세계”. 전주이씨대동종약원. 2003년 4월 23일. 2006년 4월 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2월 10일에 확인함. 
  3. 선죽교에는 1945년 이후 백범 김구가 방문할 무렵까지도 포은 정몽주의 혈흔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4. 둘째 형인 방과의 서자들 중 한명이 정몽주의 손녀와 결혼하여 인척관계가 되기도 하는 등 복권이 이루어졌다.
  5.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 "태종 (太宗)"
  6. 네이버캐스트 - "인물과 역사: 태종 이방원"
  7. 미야 노리코, 조선이 그린 세계지도, 286쪽
  8. http://sillok.history.go.kr/id/kba_000
  9. 두산 백과사전 "태종 太宗"[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0. 태종실록 (1431) 1권, 태종 1년 6월 12일 기사 1번째기사 Archived 2016년 1월 29일 - 웨이백 머신
  11. “한비자의 냉정한 정치로 승부수 띄운 '태종'. 한국경제. 2008년 7월 4일. 2010년 5월 10일에 확인함. 
  12. 1405년에 관제개정을 하면서 인사이동이 있었는데 영의정조준, 좌의정하륜, 우의정조영무를 임명했고 이직이조판서로, 이지호조판서로, 이문화예조판서로, 남재병조판서로, 유양형조판서로, 최이공조판서로 임명하면서 조각을 단행했다.
  13.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석필, 1998) 101
  14. “[열려라 공부] 사냥 중 낙마한 태종 “이 일을 사관이 모르게 하라” … 실록엔 감추라는 어명까지 적었다”. 중앙일보. 2017년 4월 17일. 
  15. 태종 자신이 억불정책을 편 것에 반대되는 것이다.
  16. “창경궁(昌慶宮), 문화재정보”. 위키트리IT/과학. 1963년 1월 18일. 2012년 2월 10일에 확인함. 
  17. 박찬희, 조선왕조 오백년 야사, 꿈과희망, 2009, 74쪽.
  18. 세종실록》 9권, 세종 2년(1420년 명 영락(永樂) 18년) 8월 24일 경신 2번째기사
  19. 승정원일기》 고종 9년 임신(1872년) 12월 1일(신해) 맑음
  20. 세종실록》 13권, 세종 3년(1421년 명 영락(永樂) 19년) 10월 19일 무신 3번째기사
    태상왕이 김점을 공정하게 국문하기 위해 숙공궁주 김씨를 친정으로 돌려 보내다
  21. 상교정본자비도량참법 권9~10》 발원문 (보물 제1252호)
  22.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6월 3일 임오 1번째기사
    세자 이제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를 삼다
    세자 이제(李禔)를 폐하여 광주(廣州)로 추방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왕세자를 삼았다. (중략)
  23. 태종실록》 2권, 태종 1년(1401년 명 건문(建文) 3년) 7월 1일 무자 1번째기사
    상왕의 탄일에 2살된 왕자가 죽다
  24. 태종실록》 5권, 태종 3년(1403년 명 영락(永樂) 1년) 2월 1일 무신 1번째기사
    왕자가 탄생하니 개복신 초례를 궐내에서 행하게 하다
  25.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1404년 명 영락(永樂) 2년) 4월 30일 경자 1번째기사
    두 살 난 왕자가 죽자 도감을 설치하여 장사지내다
  26.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2월 3일 무인 3번째기사
    상왕이 양녕에게 간곡히 심회를 말하고 매 사냥이나 하며 하고 싶은 대로 살게 하다
    (중략)

    "양녕의 하는 짓이 광태하여 가르쳐도 고치지 못하고 드디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반역을 도모한 죄는 전혀 없기 때문에 서울 근방에 두고 목숨이나 보존케 하려고 하였는데, 또 다시 오늘 같은 일이 있게 되니,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이어 여의고 갑술년에 양녕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서 본방댁(本房宅)에 두게 했고, 병자년에 효령을 낳았는데, 열흘이 채 못되어 병을 얻었으므로, 홍영리(洪永理)의 집에 두게 했고, 정축년에 주상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말마암아 형세가 용납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지 않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중략)

    또 말하기를,

    "이제 양녕에게 매[鷹子] 2연(連)과 말 3필을 주어 매사냥이나 하며 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겠다."

    하고, 따라서 광주 목사나 판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하여금 수행하게 하였다. 양녕이 다시 매를 길들이는 자 장립(張立) 등 3명을 청하니, 상왕은 돌이켜보며 이르기를,

    "무릇 천인이 귀인을 따르는 것은, 귀인이 잘 비호해 주기 때문인데, 너는 불초하여, 네 몸도 잘 보전치 못하면서 하물며 딴 남이랴. 사람치고 누가 너를 즐겨 따르겠느냐. 또 너는 비록 다른 기술은 없으나 매를 길들이는 것은 네 자신이 능하니, 다른 사람이 필요치 않다."

    고 하였다.

  27.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1412년 명 영락(永樂) 10년) 6월 23일 병자 1번째기사
    중궁이 해산을 하자 문성군 유양과 좌대언 이관 등에게 내구마를 하사하다
  28. 태종실록》 4권, 태종 2년(1402년 명 건문(建文) 4년) 8월 8일 己未 1번째기사
    세살 난 왕녀가 죽다
  29.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1414년 명 영락(永樂) 12년) 6월 8일 기유 1번째기사
    요절한 왕녀의 졸기
  30. “세종대왕”.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0년 3월 7일에 확인함. 
  31.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112100209208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11-21&officeId=00020&pageNo=8&printNo=17578&publishType=00020
  32. 선원세계 태종대왕(太宗大王) 생애(2) Archived 2006년 4월 3일 - 웨이백 머신 를 살펴보면 태종에 대한 어릴 적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33. 태종 사망 이후에 세종은 한글창제와 건강문제로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하여 신하들의 거의 대부분의 정사를 처리하도록 6조직계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전환시킨다. 하지만 이 점이 훗날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찬탈을 당하게 되는 단초가 된다.
  34.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찾다] 조선 태조의 무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세계일보
  35. 이정근,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26
  36. 이정근,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27
  37. 이정근,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28
  38. 이이화, 한국의 파벌 (어문각, 1983) 225페이지
  39.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는 후궁이나 첩이 아니라 고려시대의 경처와 향처를 별도로 두는 규정에 의해 얻은 정실 부인이었다.
  40. 태종실록 내용 참조
  41. 태종실록 내용 참조
  42. 태종실록 내용 참조
  43. 태종실록 내용 참조
  44. 태종실록 내용 참조
  45. 태종실록 내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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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

전임
-
조선대리청정
1400년 ~ 1401년
후임
양녕대군
전임
성석린
조선섭정
1418년 ~ 1422년
후임
류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