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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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찬(金仁贊. ? ~ 1392년)은 조선 전기 중추원사,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1] 본관은 양근(楊根)이다. 자는 의지(義之)이고, 호는 의암(毅菴)이며, 양근 김씨(楊根金氏)의 시조이다. 김녕 김씨(金寧金氏)에서 분적하였다고 한다.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이라 전하나, 시조는 상고할 수 없다.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 김문제(金文齊)의 현손으로, 목사(牧使) 김감성(金鑑成)의 증손이자, 도승지(都承旨) 개령군(開寧君) 김천익(金天益)(祖父)의 손자이다. 아버지 안변 목사(安辺 牧使) 김존일(김存一)과 어머니 해주 오씨(海州吳氏)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생애[편집]

경순왕의 후예라 하나, 시조는 상고할 수 없다. 다만 1376년(우왕 2)에 북청천호(北靑千戶) 이었던 점으로 보아 북청 지방의 토호이었던 것 같다.

1383년(우왕 9) 이성계(李成桂)가 동북면에서 안변으로 오던 중 밭 한가운데 뽕나무 위의 비둘기 두 마리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자, 길가 밭에서 김을 매고 있던 김인찬(金仁贊)과 한충(韓忠)이 이를 보고 감탄하여 이성계의 부하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한 뒤, 1390년(공양왕 2)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1392년(공양왕 4)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다.

조선 개국의 공으로 보조공신(補祚功臣) 중추원사(中樞院使) 의흥친군위 동지절제사(義興親軍衛 同知節制使) 익화군(益和君)에 봉(封)해져 태조 이성계의 친병을 통솔하는 책임을 맡았으나 곧 죽었다. 죽은 뒤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책록되고,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 贊成事)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졸기[편집]

중추원사(中樞院使) 김인찬(金仁贊)이 졸(卒)하니, 임금이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 贊成事)를 증직(贈職)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인찬(仁贊)은 본관(本貫)이 양근(楊根)인데, 무재(武才)가 있었다. 임금을 잠저(潛邸) 때부터 따라 시위(侍衛)의 공로가 있었으며, 개국(開國)할 때에 당하여 임금을 추대하는 데 참예하였다.

가족관계[편집]

  • 고조 : 김문제(金文齊), 충숙왕 때 문과 급제, 전라도(全羅道) 관찰사(觀察使)
  • 증조 : 김감성(金鑑成), 고려 충목왕 때 개성부윤(開城府尹), 목사(牧使)
  • 조부 : 김천익(金天益), 고려 충정왕 때 도승지(都承旨), 화령도(和寜道) 상원수(上元帥), 개령군(開寧君)
    • 부 : 김존일(金存一), 공민왕 때 문과전서(文科典書), 안변목사(安辺牧使), 증(贈)숭정대부(崇政大夫) 문하시랑(門下侍郞) 찬성사(贊成使)
    • 모 : 해주오씨(海州吳氏)

본관[편집]

양근(楊根)은 경기도 양평군 일원의 옛 지명으로 삼국시대에는 거사참현(去斯站縣) 또는 항양현(恒陽縣)‧양근현(楊斤縣)이라 불렸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빈양현(濱陽縣)으로 개칭하여 기천군(沂川郡:驪州) 속현(屬縣)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양근현(楊根縣)으로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 광주(廣州)의 속현으로 병합하였다가, 1175년(명종 5)에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257년(고종 44)에 다시 영화(永化)라 개칭했고, 1269년(원종 10)에 익화현(益和縣)으로 개칭되었다, 1356년(공민왕 5) 익화군으로 승격하였다가 다시 양근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가, 1658년(효종 9)에는 지평군과 통합하였으나 이후 곧 복구하였다. 1895년(고종 32) 춘천부 양근군, 1896년에 경기도 양근군이 되었다. 1908년 지평군(砥平郡)과 합쳐 양평군(楊平郡)이 되었다. 1979년에는 양평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