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장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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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장조
朝鮮 莊祖
왕세자(王世子)
추존왕(追尊王)
추존황제(追尊皇帝)
별명 사도세자, 장헌세자,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
배우자 헌경왕후(왕비)
숙빈 임씨(후궁)
경빈 박씨(후궁)
자녀 의소세자, 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 은신군, 은언군, 청근옹주, 은전군
부모 영조(부), 영빈 이씨(모)
친척 이복형 진종(효장세자), 형수 효순왕후, 장인 홍봉한, 처삼촌 홍인한, 인척 홍국영, 사촌 낙천군, 백부 경종, 숙부 연령군
출생 1735년 음력 1월 21일
조선 한성부 창경궁 집복헌
사망 1762년 음력 5월 21일 (28세)
조선 한성부 창경궁 문정전
사인 사형(아사)
거주지 조선 한성부
직업 왕세자, 정치인, 무술가
학력 성균관 수학
종교 유교(성리학)

장조(莊祖, 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 1762년 7월 12일(음력 5월 21일))는 조선왕세자이자 추존왕이다. 영조의 둘째 서자로, 효장세자의 이복 동생이며 정조의 생부이다. 흔히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李), 이름은 선(愃), 본관전주(全州),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생후 1년만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49년 왕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나 노론, 부왕과의 마찰과 정치적 갈등을 빚다가 1762년(영조 38년) 왕명으로 뒤주에 갇혀 아사하였다. 사후 지위만 복권되었고, 양주 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수원 화성 근처 현륭원(융릉)에 안장되었다. 정조 즉위 후 장헌의 존호를 받았다. 정조는 재위 중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노론계열의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한편 부인 헌경왕후는 후일 저서 《한중록》에서 그가 의대증과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진술했고, 실록에도 그의 병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우울증이나 화병 같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1] 시호와 존호는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2]였다가 후에 고종 때 왕으로 추존되면서 장종(莊宗)의 묘호를 더하여 장종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莊宗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이라고 하였다. 대한제국 때 황제로 격상되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3] 비교적 근래의 무속 신으로, 무속 신앙에서 모시는 신의 한 사람으로 숭배되었는데, 이때의 호칭은 뒤주대감이었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출생과 세자 책봉[편집]

부왕 영조

사도세자 이선은 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영빈 이씨의 소생으로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이복 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사망하였으므로 그는 생후 1년만에 원자 정호를 받았다. 그가 태어날 때 부왕 영조는 친히 모친 영빈 이씨의 출산 장면을 지켜보았다.

영조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그는 후궁 출신 서자였다.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가 되고, 모친인 영빈 이씨의 곁을 떠나 내시와 나인들 손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거처는 부왕 영조를 적대시하던 선의왕후 어씨가 거처하던 저승전 이었고, 저승전 옆에는 지난 희빈장씨가 거주하던 취선당이 있었다. 세자는 그들로부터 경종 독살설과 노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접하게 된다. 이때 저승전의 나인들 중 한상궁과 이상궁이 주로 세자를 대하였는데, 이들은 각각 자신들의 역할을 분담하여 세자를 훈육하였다.[출처 필요]

부인은 후에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그는 영조의 맏아들이며 이복 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었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었으므로 태어난 지 1년 만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세자 시절[편집]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여 3세 때 〈효경〉을 읽고, 〈소학〉의 예를 실천했다. 또한 일찍이 높은 정치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4] 10세 때참봉 홍봉한의 딸 홍씨를 간택하여 혼인하였다. 딸이 세자와 가례를 올린 뒤 홍봉한은 과거에 급제하고, 홍봉한은 과거 급제 후 10년도 안돼 종2품으로 승진하여 광주부윤이 되는 등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부왕 영조는 자신이 무수리의 자식이라 갖게 된 한이 있어 아들 사도세자에게서는 무수리의 자식스러운 모습을 결코 보기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어렸을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는게 세자의 도리라고 해서 소학과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이상궁과 한상궁이 칼과 칼집을 가지고와 전쟁놀이도 하였다. 나이 어린 세자가 노는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사도세자는 자기 어머니인 영빈 이씨한테 전쟁놀이를 하였음에도 소학과 학문을 하였다고 거짓을 고하는등 날이가면 갈수록 거짓이 심해졌다. 이를 안 영조는 매우 분노하였으며 몸소 저승전까지 가서 사도세자에게 꾸중을 냈다고 한다. 영조는 이상궁과 한상궁을 추궁하는것을 마치지 않고 호된 형벌을 하여 궐 밖으로 내치라는 어명이 떨어졌고 결국 이상궁과 한상궁은 형벌을 받다 죽었다. 이일로 인해 그는 어렸을 때부터 부왕 영조로부터 극심한 불신과 가혹한 꾸중을 들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고 하고 영조를 두려움과 무서워했으며 영조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못했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청심환을 먹지 않고서는 영조 앞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였으며, 그 상태에서 영조가 무슨 말을 하려고만 해도 곧바로 기절해버릴 정도 였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의하면 이는 공포증과 광증(狂症)으로 표출되었다고 한다.

15세가 되는 1749년(영조 25년) 승명대리(承命代理)로 대리청정(廳政)을 시작했다. 영조는 세자를 심히 못마땅히 여기면서도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까닭으로 세자에게서 대리청정을 거두지 않았다. 영조로부터 칭찬이나 격려는 커녕 호통과 때로는 폭설을 들으면서도 세자는 세자된 책임으로서 대리청정을 수행하였다.

1750년 혜경궁 홍씨로부터 첫 아들인 세손 정(琔)이 태어난다. 세손 정의 출생으로 갈등이 일시적으로 완화되었다. 영조는 남자가 귀해진 왕실에서 그것도 늘그막에 본 귀한 손자라 퍽 이뻐하였고 사도세자는 아들인 세손을 방패 삼아 영조의 불호령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라 전해진다. 그러나 세손이 유아임에도 앓았고 영조는 세자가 세손을 제대로 보양하지 못 함이라며 다시 세자에게 칼날을 세웠고 둘 사이는 다시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국 세손 정은 생후 3년만에 요절하였고, 세자는 부왕과 갈등으로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1752년 둘째 아들 을 출산한다. 영조가 귀애하던 화평 옹주의 상 중에 태어난 터라 영조는 한동안 아기를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의 출산을 도운 영빈이씨에게도 책망 할 정도. 이에 세자는 나 하나도 버거운데 아이는 어찌하냐 한탄했다고 한다. 이 아이가 후일의 정조가 된다.

대리 청정 기간[편집]

대리 청정[편집]

대리청정 시절 내린 영서(교지)

1752년(영조 28년) 훗날 정조가 될 세손이 태어난 해 영조가 병석에 눕자 15세가 된 사도세자는 대리 청정을 하게 되었다. 영조가 약내를 맡고는 이런 저런 흠을 잡아 면박을 주며 물리치자 세자는 밖에 우두커니 서서 미동도 하지 아니했다. 이에 신하들이 병석의 영조에게 약을 권할 것을 종용하자 이를 거절하고 이것으로 둘째 세손의 탄생으로 인한 화해의 기미는 날라가고 만다.[4] 세자는 영조가 약을 물리치는 것이 자신의 허물 때문이므로 약을 권할 면목조차 없다고 했으나, 영조는 그런 꾸짖음 하나 못 받느냐며 몹시 기분이 상했다.[4][출처 필요]

영조와의 심각한 갈등[편집]

장조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1750년)
장조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장조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장조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한 편지 사도세자는“내 나이가 금년 15살 봄을 넘긴 지가 오래 됐으나 아직 한 번도 명릉(숙종의 능)에 나아가서 참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어 아버지 영조와의 갈등을 표현하기도 했다.[5] 그는 자신의 후견세력이자 신뢰할 곳으로 처가인 홍봉한가문을 선택하였다.

나는 원래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 데다, 지금 또 더위를 먹은 가운데 임금을 모시고 나오니, (긴장돼)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로 달해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함께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우울증을 씻어 내는 약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니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 주면 어떻겠습니까.

(1753년 또는 1754년 어느 날) [6]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

(1749년에 보낸 편지)[6]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

(1752년 보낸 편지)[6]
이번 알약을 복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

(1754년 10월 또는 11월 추정)[6]

1754년 10월 또는 11월에 홍봉한에게 보냈을 편지에서는 자신의 병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도 드러난다. 특히 “나는 겨우 자고 먹을 뿐, 허황되고 미친 듯합니다”라는 내용은 조금씩 다른 표현으로 네 번 정도 반복됐다[6]

사도세자는 장인에게 국가의 제도와 규칙이 설명된 서적과 지도를 구해 줄 것을 부탁하는 등 나라살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도 했다.[6]

(보내 주신) 지도를 자세히 펴 보니 팔도의 산하가 눈앞에 와 있습니다. 이는 진실로 고인이 말한 바 ‘서너 걸음 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강남 수천리가 다하였네’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기쁘고 고마운 마음을 표할 길이 없어 삼가 표피 1영을 보내니 웃으며 거둬 주시기 바랍니다

(1755년 11월 그믐날)[6]

그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냈던 편지들 중에는 우울증을 호소하는 대목도 나온다. 1756년 2월 29일, 사도세자는 “나는 한 가지 병이 깊어서 나을 기약이 없으니,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민망해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 고백이다. 편지에는 아버지 영조에 대한 불만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사도세자는 만 14세인 1749년 장인에게 쓴 편지에서 “내 나이 올해로 이미 15세의 봄을 넘긴 지 오래되었습니다만 아직 한번도 숙종대왕의 능에 나아가 참배하지 못했습니다”라고 적었다.[6] 여기에 대해서는'사도세자는 숙종대왕의 능에 참배하지 못하니 자신이 세자인지 자격지심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가 있다. 아버지의 갈등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대목이라는 게 학계의 설명이다.[6]

난폭한 행동 문제[편집]

한편 1760년 이후로 그는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된다. 혜경궁은 '경진년(1760) 이후로 세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다고 했다. ‘세자를 폐위시키는 반교’에 따르면, 생모인 선희궁이 영조에게 세자의 비행을 말하면서 내관과 나인 100여 명을 죽였고 불에 달궈 지지는 악형을 가했다고 했다. 세자는 주로 만만한 아랫사람들만 죽였다[7]고 한다.

그런데 가학증의 대상이 점차 확대됐다. 후궁은 물론 아내인 혜경궁 홍씨까지 공격했을 뿐만 아니라 시강원에서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을 쫓아가 공격하려고 했다. 영조가 술을 마셨다고 의심했을 때였다. 아마 시강원 스승들이 일러바쳤다고 생각한 듯하다. 죽기 직전에는 생모 선희궁까지 죽이려고 했다.[7] 이런 와중에 그는 창덕궁 낙선재 우물에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평양으로 탈출하기도 했다.[7] 일반불안장애, 강박장애, 충동조절장애를 겪던 세자는 1760년부터 정신분열증까지 겪게 된다. 헛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욕하기 시작했다. 세손(정조) 등이 생일을 축하하러 왔을 때는 “부모도 모르는 내가 자식을 어찌 알랴”라며 쫓아냈다. 자기는 부모도 자식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자포자기였다.

1761년 1월 세자는 자신이 사랑하던 빙애(경빈 박씨)를 죽였다. 옷을 갈아입다가 의대증이 발병해 죽였는데, 얻어맞은 빙애는 세자가 나간 뒤 신음하다가 절명했다.[7] 수칙 박씨는 원래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나인으로, 그 이름은 빙애였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는, 1757년(영조 33년) 음력 11월 11일 사도세자가 빙애를 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기준에서 윗사람이 부리는 나인을 건드리는 것은 곧 윗사람의 물건을 취한 것으로 간주하여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여겼기 때문에, 영조는 자신의 아들이 법통상 할머니가 되는 인원왕후의 나인을 건드린 것에 대해 매우 분개하였다고 한다[8]. 한편 이 날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밤에 대신들이 입시한 상태에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양위를 발표하였다가 사도세자가 기절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9] 한편 빙애를 구타할 때 세자는 빙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돌이 갓 지난 왕자 은전군(恩全君)도 칼로 쳤다. 그리고 그는 칼 맞은 은전군을 문밖 연못에 던졌다.[7] 평소 사도세자를 경계하고 미워했던 정순왕후의 측근들 중에 세자의 주변에서 세자의 비행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이를 알고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은전군을 구하여 이름을 하엽생(荷葉生), 곧 '연잎이'라고 불렀다. 영조는 자신의 서손자 은전군의 자(字)를 연재(憐哉), '가련하도다!'로 지어주었다.[7]

생애 후반[편집]

나경언 사건과 의문의 관서행[편집]

영조 37년 4월 세자는 평안도를 다녀오게 된다. 서명응이나 윤재겸등의 비판상소가 있었으나 장인인 홍봉한과 평안감사이자 화완옹주의 시숙인 정휘량의 도움으로 이일은 영조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약관의 나이이던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세자가 평양에 가도록 이를 막지 못하고 영조에게도 알리지 않은 홍봉한과 정휘량을 비판하는 밀봉상소를 영조에게 올렸다가 영조로 부터 질책을 듣는다. 이일로 사건발생 5개월후에야 영조는 세자가 평양에 놀러간걸 알게된다.

1762년 6월 14일(음력 5월 22일) 영조 38년 나경언(羅景彦)이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열거하였다. 이를 본 영조는 크게 화를 내며 이런 사실들을 자기에게 알리지 않은 신하들을 질책한다. 나경언은 처형되었지만 영조는 세자에 대한 의혹을 거두지 않았다.

1762년 음력 윤 5월 13일 영조 38년 생모 영빈이씨가 영조에게 세자를 처분하여 세손을 보호하라며 세자의 비행을 고변한다. 당시 세자를 폐하며 영조가 반포한 폐세자 반교문에는 생모 영빈이씨가 영조에게 고변한 내용이 나온다

"세자가 내관,내인,하인을 죽인것이 거의 백여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등 차마 볼수 없는 일을 행한것은 이루 말로 다 할수 없습니다. 그 형구는 모두 내수사 등에 있는것으로 한도없이 가져다 썼습니다. 또 장번내관을 내쫒고 다만 어린 내관 별감 들과 밤낮으로 함께 있으면서 가져온 재화를 그놈들에게 나눠주고, 기생,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제 하인을 불러 가두기까지 했습니다. 근일은 잘못이 더욱 심하여 한번 아뢰고자 하나 모자의 은정 때문에 차마 아뢰지 못했습니다. 근일 궁궐 후원에다가 무덤을 만들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묻고자 했으며 하인에게 머리를 풀게하고 날카로운 칼을 곁에두고 불측한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때 몇번이나 저를 죽이려고 했는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제 몸이야 돌아보지 않더라도 임금의 몸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이 사실을 아뢰지 않겠습니까"

죽음[편집]

1762년 7월 4일(윤 5월 13일) 결국 아버지 영조는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쌀 담는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었다(임오화변). 그 뒤 누군가가 세자가 갇힌 뒤주의 틈으로 미음(죽)과 물을 넣어준다는 것을 안 영조는 내관을 시켜 뒤주에 유약을 발라서 통풍을 막는다. 그로부터 3,4일 만에 세자는 뒤주에서 굶어죽고 만다. 8일 뒤인 7월 12일(윤5월 21일) 아사한 사도 세자의 부음(죽음)이 확인되자 세자의 위호(位號)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정조는 1777년(정조 1년)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아버지의 시호를 상시하였다. 당시 세자의 나이 향년 27세였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아들 정조가 즉위하면서 현위치(경기도 화성시)로 옮겨진다.

금기와 복권[편집]

사도세자의 사당과 제사를 묘사한 의궤인 경모궁의궤향사반차도설

사도세자가 살인을 수시로 한 것은 자신이 직접 반성한 기록이나 죽은 사람들의 이름, 영조의 말 등을 볼 때 일부 사실로 추정된다.

(사도세자는) 정축년·무인년(영조33~34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영조실록》, 영조38년 윤5월13일자 기사 중

죽은 지 보름만에 복권되었다. 이때 영조가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 것은 종사를 위해 결단을 내린 후 은정을 베푼 것이라고 영조가 말한 바 있다. 사도라는 시호의 뜻은 追悔前過曰思 , 年中早夭曰悼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일찍 죽었다는 의미이다)

1764년(영조 40년) 봄 경복궁 서쪽 순화방에 사당인 사도묘(思悼廟)를 지었다가 홍봉한등이 너무 화려하게 지었다는 이유로 허물고 동년 여름, 창경궁 홍화문 밖으로 옮겨서 수은묘(垂恩廟)라 하였다.

영조 40년 음력 2월 20일 세손은 사후 세자의 처분을 뒤집어 추숭할것을 우려한 영조의 명에 의해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며 영조에게 다시한번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것을 다짐받는다.

사후[편집]

즉위 후 정조는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올리고 수은묘(垂恩)[10]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수은묘(垂恩)[11]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려 국왕의 생부로서 존대했다. 정조는 경모궁안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두고 항상 부친의 사당을 바라보게 하였다[12] 한다. 그 후 정조는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국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었다. 정조는 생전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노론의 반대와 반발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결국 고종 때 가서야 그는 왕으로 추존된다.

1899년(광무 3년) 고종 황제는 임금으로 추대하여 장종(莊宗)이라고 하였다가, 1901년 10월 17일 광무 5년 다시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라고 하였다. [13] 능호는 융릉(隆陵)이다. 무속에서도 장조를 왕자신(뒤주대감)으로 모신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깊었던 정조는 사후 생부의 곁에 묻히게 되어 융건릉이 조성된다. 부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저서 한중록뿐만아니라 실록,사도세자묘지문등 수많은 사료에 의하면 그는 우울증과 의대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았고 꽤 많은 인명을 살상했던걸로 알려져 있어 그 당시의 대부분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있었다.

저서[편집]

  • 《어제장헌대왕지문》

논란과 의혹[편집]

의대증 논란[편집]

부인 혜경궁 홍씨한중록에서 그가 옷 입기를 꺼리거나 특정 옷감을 꺼리는 의대증이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9살에 간택되어 궁에 들어와 평생을 산 정신의학적 상식이 전혀 없는 여자가 지어냈다기엔 너무 상세하고 구체적이여서 지어냈다고 볼수는 없다.

정신질환 여부 논란[편집]

혜경궁 홍씨한중록에서 그가 정신이상 증세와 조울증 증세와 비슷한 증세(광증)를 앓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세자가 18~19살이던 1753~1754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에는 ‘나는 본디 남모르는 울화의 증세가 있는데다가, 지금 또 더위 먹은 가운데 대궐에서 임금(영조)을 뵙고 나오니 열은 높고 울증은 극도에 달하여 답답하기가 미칠 듯합니다. 이런 증세는 의관과 더불어 말할 수 없습니다. 경이 약을 지어 남몰래 보내주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썼다.[5]


조선왕조실록에 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해) 2번째기사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15394) ·무인년15395)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ref> 정조 본인도 아버지의 병을 스스로 인정하였던 기록[14]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사도세자의 광증을 병으로 보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정조가 직접 지은 여귀를 달래는 제문에서도 "모년(某年 1762년(영조38)을 말함) 이전의 의지할 곳 없는 귀신을 제사하여, 환후(患候)가 침독(沈篤)했음을 알게 하노니," 라며 사도세자에게 죽은 억울한 원혼들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병이 심했음을 알아달라고 하고 있다.

반역 기도 의혹[편집]

역사가 이덕일은 그가 1762년(영조 38년) 의문의 평안도왕환길 무렵 동궁 근처 전각의 지하에 광중을 파고 군기붙이를 숨겼던 것이 영조에게 발각된 일을 두고 그가 미구에 쿠데타를 일으켜 영조를 은퇴시키려 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붕당 당쟁설과 관련한 의혹[편집]

사도세자가 노론의 반발로 인해 당쟁에 휘말려 죽었다는 당쟁설은 현재 임오화변의 유력한 정설이다. 하지만, 실록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임오화변의 당쟁설에 반하는 기록들이 있었다. 박시백은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 경종, 영조편>에서 당쟁설에 관한 몇 가지의 한계점을 제시하였다.

대리청정의 과정에서 사도세자가 소론을 옹호했다는 기록의 한계점[편집]

대리청정의 과정에서 사도세자가 소론을 옹호하여, 노론의 반발을 샀고, 이는 임오화변의 원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실록에 기록되어 있던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어느 당에 기울이지 않은 매우 소극적인 모습이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 영조는 대리청정을 시작한 날부터 세자가 처리한 일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서는 자신이 처리했다.[15] 본래 대리청정은 왕의 건강이 위독할 때 세자가 대신 정무를 맡는 형식이었는데, 대리청정을 맡길 당시 영조는 비교적 건강한 때였으니 본래의 목적을 위한 대리청정이 아니었다. 대리를 맡길 당시 영조는 세 가지의 이유를 내걸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저궁에게 정사를 밝게 익히도록 하는 것’이었다.[16] 이는 세자에게 현실의 정치를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대리 초기에 왕은 상서에 대한 과정을 지켜보면서 세자에게 현실정치에 대해 가르치기 위해 정성을 쏟았다.

또한 정통성에 관한 콤플렉스에 시달린 영조가 대리청정을 한 이유는 형식적이었지만 대리를 통해 자신이 왕위에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때문에 사도세자의 대리는 형식적으로 하였던 것이지 중요한 정무까지 세자에게 맡기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이므로 세자의 대리영역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자는 부왕의 결정에 반대하지 못하여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 '알겠소.', '그럴 수 없소.', ‘대조께 아뢰어 결정하겠소.’라고 하는 등 소론에게 편중된 모습은커녕 사소한 사안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17] 이에 한번은 조현명이 세자의 대리에 대한 소극적인 모습을 지적하였었다.[18] 그러다 왕의 의중을 알게 된 조헌명은 한 달 보름 남짓 후에 세자에게 ‘매사에 부왕의 뜻을 따라야 한다.’라고 하며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했다.[19]

당쟁론에서 세자가 소론을 적극 옹호했다는 주장은 여러 역모사건 이후 잔여 소론 세력들의 처벌을 거절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하는데, 이는 영조가소론이 노론에 의해 완전히 와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대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세자를 이에 대해 “대조께서 반대하시므로 허락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노론의 처벌 요청에 대해 거절하였던 것이다.[20] 소론 처벌에 대해 "허락할 수 없다"는 말을 했지만, 독단적인 결정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또한, 세자의 보고를 받은 영조는 이들의 상서에 대해 볼 필요도 없을 정도라고 하면서, 세자가 관대하게 대한 것에 대해 가볍게 지적하고서는 상서를 올린 이들을 귀양 보냈다. 이 후에 영조는 이들을 풀어줄 것을 상소한 자들까지도 당파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면서 귀양 보냈다.[21] 이 후에도 사도세자는 소론 세력들의 처벌에 대해 거절하였던 일 대부분은 ‘대조의 뜻이므로 따를 수 없다.’라고 답하였었다. 이외에 다른 대신들의 처벌과 관련한 논의나 상서에 대해서도 세자는 대조의 뜻이라 하며 거절하였다.[22] 이러한 기록들은 세자가 부왕의 뜻을 따랐고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자제했다고 하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도세자는 탕평을 지향하였는데, 격한 상서를 올린 이에게 당습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영조가 지향한 탕평의 뜻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었다.[23]

대리청정에서 대부분의 사안들은 영조의 결정에 따랐고, 영조가 소론세력의 처벌을 저지하여 세자가 이를 지지했다는 기록들은 영조가 친노론이었고, 사도세자가 친소론이었다는 당쟁설의 주장에 한계점을 가져다 주는 셈이다.

영조가 친노론이었다는 점의 한계점[편집]

또한, 당쟁설에 대한 한계점으로는 영조가 당쟁으로 인해 아들을 없앴을 만큼 친 노론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노론세력이 아무리 세자를 모함했다고 해도 영조는 노론의 모함에 휘말려 자신의 아들을 죽일 만큼 판단력이 부족했던 임금은 아니었다.

영조는 매우 냉정하고, 치밀했던 성격으로 자신의 다혈질적인 성격을 이용하여, 신하들을 압박하고는 하였다. 영조는 숙종 이후 떨어진 왕권을 강화시켜 대부분의 기득권층이 손대지 않던 민생의 안정에 힘써 조선 후기의 부흥을 불러왔다. 판단을 하는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날카로웠고, 정국을 주도하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던 임금이었다.

또한, 영조는 탕평정치를 지향했던 임금이었다. 물론 후기에는 노론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으나, 이는 단지 영조가 친 노론이었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었다. 경종을 죽인 것은 노론과 영조의 음모라고 주장하며, 소론(그중 준론이 가장 심하였다.) 세력들은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고, 각종 역모계획을 꾸몄다가 전부 실패하면서 대부분의 소론 준론들은 와해하게 된다. 이후의 소론은 최소한의 완론 세력들만 살아남게 되었기 때문에 영조의 탕평 정치는 노론 위주의 정치로 귀결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역모사건 이후에도 영조는 소론에 대한 강경한 처벌이나 노론 중심의 정치를 저지하였다.[24] 자신과 노론을 신원하는 책인 <천의소감>을 편찬할 때 영조는 서론에서 소론이 지나치게 폄하되는 기록에 대해 “이 책이 당론에 대해 지어졌는가?”라고 하며, 분개하여 노론의 신하들로부터 당론을 하지 않겠다는 소를 받아내고, 붕당정치에 대해 강한 경고를 날리기도 했었다.[25] 다만, 노론 위주의 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외척세력을 끌어들인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그 외척 중 대표적인 인물이 홍봉한으로 홍봉한은 노론이기도 했지만, 영조에 의해 실세로 떠오른 인물이었고[26], 때문에 홍봉한은 영조의 뜻을 앞세웠다. 영조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이들을 바탕으로 왕권 중심의 정치를 확립한다. 강력한 영조의 왕권은 죽기 몇 년 전까지 계속되었고, 영조는 탕평정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사도세자가 죽고 난 후에는 한유라는 자가 홍봉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그 중에서 ‘일물(뒤주를 일컫는 표현)을 바친 죄’를 다스리라는 부분에서 영조는 ‘비록 홍봉한이 바쳤다고 해도 그 물건을 쓴 사람은 내가 아니더냐?’라고 하였다.[27]

결론[편집]

사도세자가 친소론으로 친노론이었던 영조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고, 노론이 세자를 탄핵하거나 모함하여 영조를 분노케 하였으며, 때문에 세자는 당쟁에 휘말리게 되어 죽게 되었다는 당쟁설에 대해 사도세자와 관련한 실록의 기록들을 살펴봤을 때 당쟁설과는 반대되는 기록들이 더 많았다. 영조의 뜻에 따를 뿐이었던 대리청정 과정에서 사도세자는 소론을 옹호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노론이 대부분이었던 조정의 신하들은 세자를 모함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관서행이나 각종 잘못, 비행들을 영조가 직접 알게 되기 전까지 상소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사도세자가 죽게 된 이유로 유력하다는 당쟁설은 그 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

가족 관계[편집]

왕가(王家 : 전주 이씨)

  • 조부(할아버지) : 제19대 숙종(肅宗大王, 1661~1720)
  • 친조모(할머니) : 화경숙빈 최씨(和敬淑嬪 崔氏, 1670~1718)
    • 부(아버지) : 제21대 영조(英祖大王, 1694~1776)
    • 법모 :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3년 1월 12일 (1692년 음력 12월 7일) ~ 1757년 4월 3일 (음력 2월 15일)
    • 생모 : 소유영빈 이씨(暎嬪 李氏, 1696년 7월 18일 - 1764년 7월 26일)
      • 누이 : 화평옹주(和平翁主, 1727년 4월 27일 - 1748년 6월 24일) -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에게 하가
      • 누이 : 옹주(翁主, 1728년 8월 3일 - 1731년 2월 18일) - 조졸
      • 누이 : 옹주(翁主, 1729년 12월 12일 - 1731년 3월 21일) - 조졸
      • 누이 : 옹주(翁主, 1732년 1월 1일 - 1736년 4월 12일) - 조졸
      • 누이 :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년 3월 7일 - 1752년 11월 27일) - 영성위(永城尉) 신광수(申光綏)에게 하가
      • 동생 : 화완옹주(和緩翁主, 1738년 1월 19일 - 1808년 5월 17일) -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에게 하가18일)


장조

  • 후궁 : 양제(良娣) 가선 (평안도에서 데려온 여승 출신 후궁으로 사도세자 사망 당시 참형)
  • 후궁 : 수칙 이씨(守則 李氏) ([정조]때 사실이 알려져 정렬(貞烈)의 칭호를 받음)

기타[편집]

아들 정조는 부왕 영조의 명에 따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는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고 청나라에 상주하여 시호까지 받았으나 못내 못마땅해 했다 한다. 그는 사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였는데, 1800년 정조 사후 그의 묘소 아래에 매장되었다가, 현재의 건릉의 위치로 옮겨졌다.

그는 한국 민간과 무속에서 신으로도 숭배되어 군왕신(君王神)의 하나로도 모셔진다. 무속신으로서의 호칭은 뒤주대감이다. 그가 뒤주에 갇혀 죽은 것에서 연원하는 호칭이다.

관련 항목[편집]

장조 이선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TV 드라마
영화

각주[편집]

  1. 영조 99권, 38년(1762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13일(을해) 2번째기사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15394) ·무인년15395)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2. 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範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莊獻世子
  3. 황제로서의 시호는 장조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신문환무장헌광효의황제(莊祖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范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神文桓武莊獻廣孝懿皇帝)이다.
  4. 장헌세자 - Daum 백과사전
  5. “울화증 약 몰래 보내주세요…” 조선일보 2007.06.15
  6. `사도세자 심경 토로' 편지 발견 조선일보 2007년 06월 15일자
  7. 권력은 나눌 수 없다? ‘영조의 비극’ 외면한 편견
  8. 김종성 (2011년 10월 28일). “세종과 소이의 러브라인, 사실상 '패륜'?”. 오마이뉴스. 2012년 7월 21일에 확인함. 
  9. 《조선왕조실록》영조 90권, 33년(1757 정축 / 청 건륭(乾隆) 22년) 11월 11일(기해) 4번째기사
  10. 무덤 이름
  11. 사당 이름
  12. 경모궁의궤향사반차도설
  13. 고종실록, 1901년, 10월 17일 45책 41권 67장 A면
  14. 정조 1권, 즉위년(1776 병신 / 청 건륭(乾隆) 41년) 5월 13일(계미) 2번째기사 윤음을 내려 문녀의 죄악을 포고하다 "~대행 대왕께서 인자하게 덮어 주시는 덕이 그처럼 진지하고도 간절하셨기 때문에 선친(先親)의 지난날의 질병이 어쩌면 이로 말미암아 정상으로 회복될 수도 있었는데, 흉계를 빚어 온 지가 이미 오래이고 의구심이 쌓여 온 것이 점차 고치기가 어려웠으니, 그 때에는 단지 문침만 제때에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시선도 제때에 하지 못하였다. 우리 대행 대왕께서는 또한 일찍이 자주 좌우 사람을 보내어 기거(起居)의 안부를 묻게 하고 음식의 다소를 살피게 하셨으니, 이는 곧 양궁(兩宮)께서 자애하시고 효도하시게 될 수 있는 하나의 크고 좋은 기회였는데, 환후가 갈수록 더욱 깊어져서 평복(平復)하게 될 수 없었으니, 어찌하겠는가? ~"
  15. 영조 69권, 25년(1749년) 2월 16일 1번째기사
  16. 영조 69권, 25년(1749년) 1월 27일 1번째기사
  17. 영조 70권, 25년(1749년) 10월 5일 1번째기사 // 영조 70권, 25년(1749년) 11월 29일 1번째기사 // 영조 71권, 26년(1750년) 7월 23일 1번째기사 // 영조 76권, 28년(1752년) 4월 13일 1번째기사
  18. 영조 69권, 25년(1749년) 2월 20일 1번째 기사
  19. 영조 69권, 25년(1749년) 4월 5일 3번째기사
  20. 영조 78권, 28년(1752년) 10월 29일 1번째 기사
  21. 영조 78권, 28년(1752년) 10월 29일 2, 4, 5, 7번째기사
  22. 영조 72권, 26년(1750년) 12월 26일 1번째기사 // 영조 74권, 27년(1751년) 12월 22일 1번째기사 // 영조 77권, 28년(1752년) 6월 9일 1번째기사 // 영조 78권, 28년(1752년) 12월 23일 3번째기사 // 영조 86권, 31년(1755년) 10월 29일 1번째기사 // 영조 91권, 34년(1758년) 1월 10일 3번째기사
  23. 영조 74권, 27년(1751년) 12월 24일 2번째기사
  24. 영조 76권, 28년(1752년) 5월 27일 2번째기사 (오찬은 정언에 제수된 이후 소론의 징토를 강력하게 주장하여 영조의 미움을 사 쫓겨났었다.)
  25. 영조 85권, 31년(1755년) 9월 21일 3, 4, 5, 6번째 기사 및 22일 1번째 기사 // 이 무렵에는 소론 이종성을 탄핵하는 상서를 쓴 홍준해를 귀양 보냈다.
  26. 홍봉한의 딸이 세자빈에 책봉될 때까지만 해도 홍봉한은 정 9품의 벼슬인 세마에 불과했었다. / 영조 59권, 20년(1744년) 1월 9일 1번째기사
  27. 영조 117권, 47년(1771년) 8월 7일 4번째기사

참고 자료[편집]

  •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제도의 변화"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
  •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1998)
  •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1998)
  • 이덕일 《조선왕 독살사건》(2005)
  • 정병설 《권력과 인간》

바깥 고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