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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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辛酉迫害)는 1801년(순조 1년)에 발생한 조선가톨릭 박해 사건이다. 시파·벽파의 정치 투쟁에서 시파의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원인[편집]

신해박해(1791년, 정조(正祖) 15년) 이래 “정도(正道)인 유학은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소멸시킬 것”이라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온화한 정책을 써 오던 정조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 승하하였다.[1] 1800년 8월 23일(음력 7월 4일)에 이어서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55세의 나이로 수렴청정을 시작하였으므로[2] 정순왕후의 친오라버니 김귀주(그는 이미 1786년에 사망하였다)가 주축을 이루었던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벽파가 정순왕후를 움직이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박해의 진짜 이유는 벽파와 대립하였던 남인·시파의 숙청이었다. 야당인 남인 중에서 천주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801년 2월 22일(음력 1월 10일) 정순왕후는 천주교 엄금에 관해 하교를 내렸다. 그 내용은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니, 인륜을 위협하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것이다. [3] 정순왕후는 이 하교에서 오가작통법을 언급하였는 바, 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가혹한 연좌제를 예고한 것이었다.

전개[편집]

이 사건으로 중국인 천주교 신부이자 한국교회 최초의 선교사주문모를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종(다산 정약용의 형), 여성 평신도 지도자인 강완숙 등이 사형당했고, 한때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념의 차이로 멀리한[4] 정약용 등은 귀양보내져 박해 피해자는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 옥사로 만 1년 내외에 박해 받아 죽은 신도만도 300명이 넘었다. 오가작통법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애꿎은 피해를 보았다.

여파[편집]

정약종의 조카 사위였던 천주교 신자 황사영(黃嗣永)이 신유박해의 실상과 대응 방안을 적어 청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려던 밀서(密書)가 발각되었다. (1801년 10월 29일(음력 9월 22일) 직후) 이 밀서에는 조선의 천주교가 박해를 받은 사실과 청나라의 힘에 기대어 무력으로라도 조선에 천주교를 허용토록 해달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이 밀서를 지은 황사영은 11월 5일(음력 9월 29일)에 잡혀 한양으로 끌려올라와 12월 10일(음력 11월 5일)에 처형되었다.(황사영 백서 사건)[6] 당시 황사영은 청나라의 무력을 빌어 조선의 종교적 자유를 얻고자 했기 때문에, 조선 천주교회는 박해를 받게 되었다.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정조실록 (1805) 54권, 정조 24년 6월 28일 기묘 11번째기사
  2. 순조실록 (1838) 1권, 순조 즉위년 7월 4일 갑신 1번째기사
  3. 순조실록 (1838) 2권, 순조 1년 1월 10일 정해 1번째기사
  4. 정약용을 비롯한 조선의 양반 계층 지식인들은 한때 가톨릭교회에 관심을 가졌으나, 교황청이 17세기 이후 100여 년간의 신학 논쟁 끝에 조상 제사는 로마 가톨릭 교리에 어긋난다면서 인정하지 않자, 천주교를 멀리하였다./《생활성서》2007년 8월호 기사.
  5.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약종
  6. 순조실록 (1838) 3권, 순조 1년 10월 5일 무신 2번째기사

참고 문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