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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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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仁宗
서삼릉 중 효릉의 2020년 모습 (문화재청)
서삼릉 중 효릉의 2020년 모습 (문화재청)
제12대 조선 국왕
재위 1544년 11월 20일 ~ 1545년 7월 1일 (음력)
즉위식 창경궁 명정전
전임 중종
후임 명종
조선국 왕세자
재위 1520년 4월 22일 ~ 1544년 11월 20일 (음력)
전임 폐세자 황
후임 순회세자
이름
이호(李峼)
묘호 인종(仁宗)
시호 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능호 효릉(孝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신동
신상정보
출생일 1515년 2월 25일(1515-02-25) (음력)
출생지 조선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사망일 1545년 7월 1일(1545-07-01) (30세) (음력)
사망지 조선 한성부 경복궁 청연루
부친 중종
모친 장경왕후 윤씨
배우자 인성왕후 박씨
자녀 없음

인종(仁宗, 1515년 3월 20일(음력 2월 25일) ~ 1545년 8월 17일(음력 7월 1일))은 조선의 제12대 국왕(재위 : 1544년 12월 14일(음력 11월 20일) ~ 1545년 8월 17일(음력 7월 1일))이다.

(李), 는 호(峼), 아명은 억명(億命)이다. 본관전주(全州), 는 천윤(天胤)이며 묘호인종(仁宗), 시호는 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다.

중종의 적장남이자 넷째아들로 어머니는 파원부원군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이며, 왕비는 금성부원군 박용(朴墉)의 딸인 인성왕후(仁聖王后)이다.

기묘사화 때 숙청된 조광조를 신원하고 현량과를 부활하는 등의 도학정치를 추구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당대의 대신들에게 인본의 바탕을 둔 유교의 이상적 군왕으로 일컬어졌으나 재위 7개월만에 승하하였다.[1]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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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과 세자 책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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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5년(중종 10년) 2월 25일, 중종(中宗)의 넷째아들이자 적장남으로 태어났다.[2] 아명은 '억명(億命)'이다. 어머니 장경왕후가 인종을 임신했을 때 꿈을 꾸었는데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억명으로 지으라'고 하자 잠에서 깬 장경왕후가 벽에 '억명'이라는 글자를 써놓아 두었다가 지은 이름이다.[3] 어머니는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인데, 인종을 낳고 1주일 후인 3월 2일 산후병으로 사망하였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 친할머니인 정현왕후가 돌보았으며, 외숙부인 윤임을 위시한 대윤(大尹)의 정치적 지지를 받았다.

1520년(중종 15년) 4월 22일, 왕세자로 책봉되었다.[4][주해 1] 세자로 책봉되기 전 3월 5일에 '억(億)'을 '호(岵)'로 개명한다.[5]

1522년(중종 17년) 관례를 치르고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2년 뒤인 1524년(중종 19년), 박용의 딸 박씨(인성왕후)를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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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7년(중종 22년), 세자의 생일 무렵에 죽은 쥐의 사지를 찢어 불에 지진 다음 동궁전 창가에 매달아놓고 세자인 인종을 저주하는 일이 발생하였다.[6] 사건의 배후로 중종의 서장자이자 인종의 이복형인 복성군과 복성군의 어머니인 경빈 박씨가 지목되어 폐서인 되었으며, 경빈의 딸들이자 인종의 이복 누나들인 혜순옹주혜정옹주 또한 폐서인 되었다.[7]

1533년(중종 28년), 동궁(東宮)의 빈청 남쪽 바자(把子) 위에 사람의 머리 모양을 한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 형상에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붙이고 이목구비등을 새겨 목패에 단 다음, 목패에 '세자의 몸을 능지할 것', '세자 부주(父主)의 몸을 교살할 것', '중궁(中宮)을 참(斬)할 것' 과 같은 내용을 적어놓았는데[8], 이 저주 사건으로 인해 6년전 폐출된 복성군 모자와 혜정옹주의 남편인 당성위(唐城尉) 홍려(洪礪)가 연루되었다.

대간의 탄핵을 받은 복성군경빈 박씨는 마침내 사사되었는데, 나중에서야 이 사건의 배후가 인종의 누나인 효혜공주의 남편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와 김희의 아버지인 김안로가 꾸민 일임이 드러났다. 이후 인종은 중종에게 복성군 모자의 신원 회복과 폐출된 두 옹주의 작호를 회복시켜줄 것을 청하였다.[9][주해 2]

1538년(중종 33년) 10월, 중종은 본인의 재위년수와 나이가 세종의 재위년수와 세종이 승하했을 때의 나이와 비슷해지자 태종과 세종의 고사를 들며 세자에게 선위하려 하였는데[10], 세자가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극구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11][12]

즉위와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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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년(중종 39년) 11월 14일, 중종이 전위의 뜻을 밝히고 다음날 승하하자 1주일 후인 11월 20일 창경궁 명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이후 기묘사화때 숙청된 조광조를 신원해 달라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다.

1545년(인종 1년) 6월 26일, 인종은 고열에 시달리며 혼절하는 등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6월 29일, 대역죄인과 강상죄 등 중대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제외한 잡범들의 죄를 용서한다고 교서를 내렸다.[주해 3] 그날 밤 병세가 악화되어 위독해지자 이복 동생인 경원대군(명종)에게 전위한다는 뜻을 밝혔다.[13]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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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서에 임박하여 붓을 잡고 유서를 쓰려 하였으나 쓰지 못하고 탄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생각을 문자가 아니면 여러 신하들에게 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제 이와 같으니 슬픔을 어찌할 수가 없다.

부왕이 돌아가신 지 오래지 않아 내가 또 이에 이르러 마침내 효도를 마치지 못하니,
내 마음이 망극하다.

내가 죽거든 반드시 부모의 능 곁에 장사 지내서 내 뜻을 이루게 하라.
또 겨우 국상을 지냈기에 백성의 힘이 다했으니
나의 초상과 장사에는 되도록 검소함을 좇아서 백성들의 폐해를 덜게 하라.

병이 이와 같으니 효도를 마치지 못하겠고, 또 경들과 더불어 다시 서로 보지 못하겠다.

 
— 〈인종대왕 묘지문

1545년(인종 1년) 7월 1일, 경복궁 청연루 소침에서 승하하였다.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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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와 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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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인종(仁宗)이며, '(仁)'은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함'을 말한다. 시호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다.[14]

처음엔 시호를 예문철무장숙흠효(睿文哲武章肅欽孝)라고 했다가 '예' 자를 '헌' 자로 고치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홍언필태조의 시호 강헌(康獻)과 겹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중의도 찬성하여 고치기로 했으며 허자가 체화거중(體和居中)의 뜻이 선왕과 합치한다 하여 '철' 자를 '의' 자로 고쳤다.[15]

능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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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은 효릉(孝陵)이며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다. 서삼릉을 구성하는 왕릉 가운데 하나이다. 왕비 인성왕후와 나란히 묻혀 쌍릉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일반에 비공개되어있다.

을사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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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임윤원형정희왕후의 아버지 윤번의 후손들로, 각각 인종과 명종의 외숙부들인데, 이들은 중종 말엽부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인종의 외가인 윤여필, 윤임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대윤(大尹)과, 경원대군(명종)을 지지하는 문정왕후윤원형 일파인 소윤(小尹)이 파를 나누어 갈등하였다.[16]

인종이 즉위한지 1년도 못되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수렴청정하고 윤원형 등이 권력을 잡았는데, 인종의 외숙부이자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 및 대윤 일당을 역모로 몰아 사사하였다. 윤여필의 외손자인 종친 계림군[17]을 비롯하여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봉성군 등 왕실 종친 및 윤임과 당여를 이루거나 왕권에 위협적으로 여겨졌던 자들이 대대적으로 숙청되었다.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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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복 누나인 효혜공주와 우애가 도타웠는데, 1531년(중종 26년) 효혜공주가 죽자, 병이 날 정도로 매우 슬퍼하였다.[18]
  • 동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모두 놀라 허둥지둥하고 궁녀들이 각각 제방을 구하는데, 귀인 정씨(貴人 鄭氏, 정철의 누이)만이 급히 세자가 거처하는 방으로 들어와 서책과 옷을 모두 밖으로 내어놓고 세자를 모시고 대전에 문안드리니, 임금이 크게 칭찬하였다.[19]
  • 인종이 즉위한 뒤, 명나라 사신이 접견하고 돌아갈 때 자신을 접대했던 관원에게, "당신의 임금은 성인(聖人)이지만, 당신의 나라는 조그만 나라입니다. 당신들은 실로 복이 없다." 라고 하였다.[20]
  • 인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을 두고 문정왕후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야사로 전해진다. 《명종실록》에서는 인종이 병을 얻게 된 이유 중 하나로 문정왕후의 원망을 언급한다.[21][22][2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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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좋아하고 우애와 효심이 깊어 유교의 이상적 군주로 일컬어졌다. 당대의 기록을 비롯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세종, 문종, 성종, 정조와 더불어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왕의 학문을 예찬하고 인품과 성품을 칭송한 기록이 남아있는 몇 안되는 군주 중 하나이다.[주해 4][주해 5][주해 6]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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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사망
조선 제12대 국왕 인종대왕
仁宗大王
1515년 3월 20일 (음력 2월 25일)
조선 조선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1545년 8월 17일 (음력 7월 1일) (30세)
조선 조선 한성부 경복궁 청연루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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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중종대왕
中宗大王
전주 1488년 - 1544년 성종대왕
成宗大王
정현왕후 윤씨
貞顯王后 尹氏
제11대 국왕
장경왕후 윤씨
章敬王后 尹氏
파평 1491년 - 1515년 파원부원군 윤여필
坡原府院君 尹汝弼
순천부부인 박씨
順天府夫人 朴氏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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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왕비 인성왕후 박씨
仁聖王后 朴氏
공의왕대비
恭懿王大妃
반남 1514년 - 1578년 금성부원군 박용
錦城府院君 朴墉
문소부부인 김씨
聞韶府夫人 金氏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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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호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숙빈 윤씨
淑嬪 尹氏
파평 미상
[24]
윤원량
尹元亮
순천 장씨
順天 張氏
문정왕후의 조카
혜빈 정씨
惠嬪 鄭氏
경주 미상 정온
鄭溫
남원 양씨 南原 梁氏
귀인 귀인 정씨
貴人 鄭氏
연일 1520년 - 1566년 정유침
鄭惟沈
죽산 안씨
竹山 安氏
정철의 누이
양제 양제 윤씨
良娣 尹氏
파평 미상 윤개
尹漑
전주 이씨
全州 李氏
영해군의 증손녀
[25]


인종이 등장하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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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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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편집]
내용주
  1. 세자를 세우는 것은 참으로 큰 근본을 위함이며,
    조종(祖宗)을 봉사(奉祀)하며, 제기(祭器)를 맡는 것은 원량(元良)에게 맡겨야 마땅하므로,
    이제 너 이호(李峼)를 책봉하여 왕세자로 삼으니,
    너는 도(道)를 즐거워하고 스승을 높이며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하여,
    삼선(三善)의 가르침에 잘 따라서 일국(一國)의 평안을 길게 하라.
     
    — 《중종실록》 39권,
    중종 15년(1520년) 4월 22일 (기묘)
  2. 삼가 생각하건대, 형제간이란 것은 같은 기(氣)를 나누어 받아서 태어나기에
    숨쉬는 것도 서로 통하여 우애로운 정을 자연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다 비상(非常)한 변(變)이 있었더라도 본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옛사람 중엔 오히려 은혜로 감추어 준 자도 있었습니다.

    지난번 미(복성군)의 일을, 신은 어려서 그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화의 참혹함은 차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요망한 일을 비록 박씨(朴氏, 경빈 박씨)가 했다고는 하지만 미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먼 지방으로 귀양보낸 것도 지나친 일인데, 그 뒤에 또 다시 큰 옥사가 일어나 모자가 연이어 죽고,
    홍려(洪礪)도 형장 아래서 죽었으니 이토록 극심한 변고는 전고에 드문 일입니다.

    형제간이 된 사람의 정리로서 어떠하겠습니까.

    죽은 자는 이미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미(복성군)의 딸 하나가 민간에 버려져 서인과 다름 없이 되었으니,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는 더욱 가슴 아픈 일입니다.

    두 옹주(혜순옹주 · 혜정옹주)도 나이 어린 딸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속적(屬籍)에서 제적되었으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신(臣) 하나로 인하여 형제간의 변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신이 항상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3. 왕은 이른다.
    하늘이 이미 재앙을 내려 선왕께서 승하하신 지 1주년이 못되었는데,
    신(神)이 또한 돕지 아니하여 내 몸에 병이 나서 이미 수순(數旬)이 지났다.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스스로 매우 꾸짖을 뿐이다.

    그러나 병이 오래 위중함이 이토록 극도에 이르니
    종사는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인(仁)을 베풀려면 먼저 용서하는 마음을 미루어 행하는 것이 급한 일인데,
    생각하면 형옥(刑獄)의 결단에 억울한 일이 많이 있을 것이니,
    은택을 베풀어서 씻어 주어 내 죄를 빌어야 하겠다.

  4.  

    전교하였다.

    "제물(祭物) 중에 쓰지 않게 되어서 새끼 노루가 아직 살아 있다 하니,
    사신이 사제하려고 은(銀)으로 개성부(開城府)에서 사 왔으나
     마침 쓰지 않았으므로 오래도록 살 수 있었다.
    이것은 산으로 돌려보내어 다시 살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빨리 놓아 주라."

    사신은 논한다.

    이 마음이 임금이 되기에 넉넉하거니와,
    이 마음을 능히 확충한다면 사해(四海)를 보전하는 데에 있어서도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이렇게 생물(生物)을 사랑하니, 백성을 인애(仁愛)하는 것을 알 만하다.
    — 《인종실록》 2권,
    인종 1년(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5월 2일 (계해)
  5.  

    상(인종)은 자질이 매우 아름다우며 침착하고 온후(溫厚)하며
    학문은 순정(純正)하고 효우(孝友)는 타고난 것이었다.
    동궁에 있을 때부터 늘 종일 바로 앉아 언동은 때에 맞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그 한계를 헤아릴 수 없었다.
    즉위한 뒤로는 정사할 즈음에 처결하고 보답하는 데에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고,
    때때로 어필(御筆)로 소차(疏箚)에 비답하되 말과 뜻이 다 극진하므로
    보는 사람이 누구나 탄복하였다.
    외척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지 않고 시어(侍御)에게 가까이하지 않으므로 궁위가 엄숙하였다.
    중종(中宗)이 편찮을 때에는 관대를 벗지 않고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으며
    친히 약을 달이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어선(御膳)을 전혀 드시지 않았다.
    (중략)
    (인종의) 병이 위독하던 밤에는 도성 사람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자지 않고
    궐문에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상의 증세가 어떠한가 물었으며,
    승하하던 날에는 길에서 누구나 다 곡하여 울며 슬펴하는 것이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
    — 《인종실록》 2권,
    인종 1년(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7월 1일 (신유)
  6.  

    승하하시던 날에 도하의 유생이 각각 소식을 듣고 선후하여 궐하(闕下)에 달려와서
    통곡하는 것이 밤이 되어도 끊이지 않고,
    미천한 지아비와 지어미까지도 거리를 메우고 길을 메워 누구나 다 가슴을 치고 슬퍼하였다.
    대행왕이 훙서에 임박하여 기절하였다가 되살아난 것이 두어 번인데,
    민간에게 듣고는 궐하에서 골목까지 어른 아이 없이 모두 손을 모아 하늘에 빌었다.
    이날에 이르러 유생이 또 궐외에서 곡하여 다들 그 슬픔을 다하였다.
    아, 허다한 유생이 어찌 죄다 군자다운 사람이었겠으며,
    미천한 지아비와 지어미도 누가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즉위한 지 한 해가 못되었는데 인심이 이러하니,
    덕이 사람을 감동시키기 쉽고 사람에게 깊이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인종실록》 2권,
    인종 1년(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7월 6일 (병인)
참조주
  1. 인종실록》 1권, 총서
    성품이 매우 고요하고 욕심이 적으며 인자하고 공손하며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실천이 독실하였으므로 동궁(東宮)에 있은 지 25년 동안에 어진 덕이 널리 알려졌다.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게 되어서는 중외가 지치(至治)를 기대했었는데, 상중(喪中)에 너무 슬퍼한 탓으로 갑자기 승하하게 되었고 또 뒤를 이을 아들도 없었으니, 애석하다.

  2. 중종실록》 21권, 중종 10년(1515년 명 정덕(正德) 10년) 2월 25일 (계축)
    밤 초고(初鼓, 저녁 7시~9시)에 원자(元子)가 탄생하였다.
  3. 중종실록》 21권, 중종 10년(1515년 명 정덕(正德) 10년) 3월 23일 (경진)
  4. 중종실록》 39권, 중종 15년(1520년 명 정덕(正德) 15년) 4월 22일 (기묘)
    왕세자를 책봉하다
  5. 《중종실록》 38권, 중종 15년 3월 5일 癸巳 1번째 기사
  6. 중종실록》 58권, 중종 22년(1527년 명 가정(嘉靖) 6년) 3월 22일 (기해)
    대신들이 면대를 청하여 세자의 침실에 쥐를 매달아 양법한 사람을 죄줄 것을 청하다
  7. 중종실록》 58권, 중종 22년(1527년 명 가정(嘉靖) 6년) 4월 21일 (정묘)
    대신의 의논에 따라 박빈을 폐하고 복성군의 작호를 삭탈하다
  8.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5월 17일 (기미)
    동궁의 빈청 바자에서 인형과 익명서가 발견되다
  9. 중종실록》 96권, 중종 36년(1541년 명 가정(嘉靖) 20년) 11월 9일 (신묘)
    속적에서 제외된 이미를 불쌍히 여겨 달라는 동궁의 상소
  10. 중종실록》 88권, 중종 33년(1538년 명 가정(嘉靖) 17년) 10월 2일 (임인)
  11. 중종실록》 88권, 중종 33년(1538년 명 가정(嘉靖) 17년) 10월 4일 (갑진)

    (중략)

    신들이 삼가 살펴보니, 요즈음 내선(內禪)을 밖으로 조정의 의논을 받아들이지 않고 갑자기 궁궐 안에서 결정하는 바람에 인정이 어수선해지고 상하가 당황해 했습니다만 이 어찌 세자가 어질고 장성하지 아니해서였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춘추가 한창이신 이 때에 막중한 책임을 지시고 나라를 유신(維新)으로 다스리기를 시도하시는 것이 신민들의 바람인데 뜻밖의 갑작스런 명을 하루 사이에 깊은 궁중에서 나온 부시(婦寺)가 전하였습니다.

    전하의 심정은 지극히 공정하고 정성스런 데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조정과 상의하지 않은 채 시기와 시세를 헤아려 살피지 아니하고 불치(不治)의 실마리를 세자에게 급하게 전하려 하셨으니,

    이것은 나라를 위한 장구한 계책이 아니요 후세에 본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중략)

    삼가 하교를 보니, 동궁(인종)께서 괴로운 심정으로 울부짖고 곡기를 끊기에 이르러 전하께서 도리어 크게 놀랐다고 하셨습니다.

    동궁의 순수한 효성과 지극한 정성이 성심을 감동시킬 수 있어서 천청(天聽)을 즉시 돌리시어 회복하시니 자애롭고 효성스런 마음에 감동됨은 지극한 천성이라 모든 사람이 서로 기뻐하고 상하가 다 안심하였으니 이는 실로 종묘와 사직 및 모든 사람의 복입니다.

    전하께서 가까이 조종(祖宗)을 본받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세종을 본받으시고, 옛 성인을 본받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문왕(文王)을 본받으실 뿐입니다

    (중략)

  12. 중종실록》 92권, 중종 34년(1539년 명 가정(嘉靖) 18년) 10월 20일 (갑신)

    (중략)

    "삼가 보건대 춘궁(春宮, 인종)께서는 천품이 고금에 없이 뛰어나게 순수하여 덕의 진취가 빠르므로 가르치기에 번거롭지 않으며 일덕(一德)에는 티가 없고 삼선(三善)이 모두 융성합니다.

    저번에 양위하시겠다는 명을 받았을 적에, 지성으로 사양하며 울면서 음식도 들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성상의 뜻을 돌리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조야(朝野)가 듣고 감읍(感泣)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순수한 효도와 성대한 덕이 지극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였겠습니까."

  13. 인종실록》 2권, 인종 1년(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6월 29일 (경신)
    영상 등에게 경원대군에게 전위한다고 전교하다
  14. 명종실록》 1권, 명종 즉위년(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7월 12일 (임신)
    윤인경 등이 대행왕의 묘호 · 시호 · 능호 · 전호를 정하여 아뢰다
  15. 명종실록》 1권, 명종 즉위년(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7월 12일 (임신) 1번째기사
  16. 중종실록》 100권, 중종 38년(1543년 명 가정(嘉靖) 22년) 2월 24일 (무술)
    조강에서 윤임을 대윤, 윤원형을 소윤이라 함을 구수담이 아뢰다

    (중략)

    윤임(尹任)을 대윤(大尹)이라 하고 윤원형(尹元衡)을 소윤(小尹)이라 하는데 각각 당여(黨與)를 세웠다.’ 합니다.

    그 실정을 따져보니, 윤임은 부귀가 이미 극에 달했고 원형은 청년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좋은 벼슬을 역임하였으므로 이미 부족한 것이 없는데 무슨 일을 일으키려고 다시 당여를 세운단 말입니까?

    가령 저들이 당여를 세우려 한다 해도 식견 있는 사람이 어찌 그들에게 붙겠으며 또 어찌 다시 그들의 말을 들을 리가 있겠습니까.

    (중략)

    상(중종)이 이르기를,

    "이것은 매우 해괴하고 경악스런 말이다. 저들은 모두 외척인데 당여를 세운다고 지적하는 의논이 있으니, 이는 반드시 소인들이 틈을 타서 화평한 조정을 어지럽게 하려는 것이다. 처음으로 간사한 의논을 조성한 자를 추문한 다음에야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중략)

  17.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손자이며, 성종의 차남인 계성군의 양자로 입적됨.
  18. 〈인종대왕 묘지문(仁宗大王誌文)
  19. 연려실기술》 제9권 - 중종조 고사본말
    대ㆍ소윤(大小尹)의 권력 다툼 동궁의 화재
  20. 《아성잡기(鵝城雜記)
  21. 《괘일록(掛一錄), 이조민(李肇敏, 윤원형의 사위) 지음
    인종은 효성이 타고난 분이었으나 계모인 문정왕후가 조금도 보호해 주는 마음이 없고,

    작서(灼鼠)의 옥사에 박 숙의(朴淑儀)에게 죄를 씌워 그 아들(복성군)까지 죽음을 주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히 여겼다.

    괘일록(掛一錄)》에는 '원통히 여긴다' 아래에 정해년 2월이라고 써 있다. 《당적보》에도 같다.

  22. 유분록
    어느 날 자전 대비(문정왕후)가 홀로된 첩(妾, 문정왕후 본인)과 약한 아들(명종)이 보전하기 어렵다는 말로 미안한 전교를 내리니,

    임금(인종)이 그 말을 듣고 미안함을 견디지 못하여 아침 처마에 더운 햇빛이 쪼이는데 땅에 오랫동안 엎드려서 대비를 위안케 하여 성의로 감동시킨 연후에야 대비가 약간 안색을 풀었다.

    이런 뒤로 임금이 많이 근심하여 이로써 점점 병을 이루어 조정이 다급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이에 정희등(鄭希登)이, “대군(명종)을 세제(世弟)로 봉하는 것은 위로는 대비의 의심을 풀어 드리고 아래로는 모략하는 말들을 진정시키는 것이니 급히 거행할 것을 청하자.” 하니 조정의 의논이 쏠렸으나 미처 아뢰어 청하기 전에 임금이 승하하였다.

  23.  

    이때 사람들이 모두 인종의 외롭고 위태한 처지를 근심하였는데
    중종이 승하하자 인종은 효도를 극진히 하여 윤씨(문정왕후)를 섬겼다.
    그러나 인종이 대비(문정왕후)에게 문안할 때,
    (대비는 인종에게) 빈번히 원망하는 말을 하고
    심지어 ‘원컨대 관가(官家, 인종)는 우리 가문을 살려달라’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인종이 이 말을 듣고 답답해 하고 또 상중에 과도히 슬퍼한 나머지
    근심하고 괴로워하다 승하하게 되었다.
    — 《명종실록》 31권,
    명종 20년(1565년 4월 6일) (임신)
  24. 1595년 이후 사망
  25. 영해군 → 영춘군 이인 → 이천 → 윤씨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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