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빈 박씨 (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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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빈 박씨(敬嬪 朴氏, 1492년? ~ 1533년)는 조선 왕조 제11대 임금 중종빈어(嬪御)[1]로, 중종의 장자인 복성군을 낳아 중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작서의 변에 연루되어 누명을 쓴 채 유배되었고, 결국에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생애[편집]

입궁[편집]

본관은 밀양. 중종반정을 주도한 정국공신 박원종의 수양딸로, 친아버지는 경상도 상주 지방의 사족 출신인 박수림(朴秀林)이다. 연산군 재위 시절에 흥청으로 선발되어 궁에서 지내다가 진성대군(훗날의 중종)의 눈에 들었고, 중종반정 이후 박원종의 수양딸이 되어 왕으로 즉위한 중종의 정식 후궁이 되었다.

한편 경빈 박씨가 박원종의 수양딸이라는 것은 박종화의 역사 소설에서 경빈을 박원종의 친척으로 그리고 있어서이다. 그러나 경빈은 밀양 박씨이고, 박원종은 순천 박씨로 본관이 다르며, 밀양 박씨 측에서는 이를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책을 발간하였다. 경복궁에 보관되어 있다.[출처 필요]

중종과의 만남[편집]

1509년, 숙의(淑儀) 시절에 중종의 장자 서성군(瑞城君, 후에 복성군이 됨)을 낳았고, 이은 1512년혜순옹주를, 1514년혜정옹주를 출산하며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1515년,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원자 호를 낳고 훙서하자 중종의 맏아들을 낳은 생모이자 가장 총애를 받는 후궁으로서 다음 중전의 재목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과거 흥청 출신이라는 것과 장차 원자와 복성군 간의 왕위 쟁탈을 염려한 일부 신하들에 의해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종은 대신 그녀를 정1품 빈(嬪)으로 승격시켜 경빈(敬嬪)에 봉했다.

억울한 죽음[편집]

1527년, 동궁전 후원에 불에 태워 마치 돼지와 같은 형상을 하게 된 쥐와 방서를 매달아 세자를 저주한,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變)'에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이는 경빈이 세자를 밀어내고 복성군을 저위(儲位)에 앉히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경빈 자신과 아들인 복성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당한 채 고향인 상주로 유배되었으며 경빈의 아버지 박수림 및 박인형(朴仁亨), 박인정(朴仁貞) 또한 파직되었다. 계속해서 복귀의 날만을 소망하였으나 결국 1533년, '목패의 변' 혹은 '가작인두의 변' 이라고 하는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며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2] 아들 복성군 역시 사사되었으며, 두 옹주도 옹주 작호를 박탈당해 폐서인되었고 맏사위 당천위 김인경은 유배되었다.[3] 이후, 작서의 변괴와 목패의 변이 김안로와, 그 아들이며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의 남편인 연성위(延城尉) 김희가 한 짓이 밝혀지며 복권되었다.

평가[편집]

실록에서는 경빈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경빈은 성품이 공손하지도 않고 만족할 줄도 몰라서 사랑을 얻으려는 술책만 힘썼다. 은총을 믿고 멋대로 방자하게 구는가하면 분수에 넘친 마음을 품고 뇌물을 널리 긁어들였으므로 간청(干請)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그러고도 전혀 경계할 줄을 모르다가 이런 화를 저지른 것이다. 그러나 시론(時論)은 박씨만의 죄가 아니라 역시 임금이 지나치게 총애한 소치라고 했다. — 중종 58권, 22년(1527 정해 / 명 가정(嘉靖) 6년) 4월 26일(임신) 1번째기사

가족관계[편집]

경빈 박씨가 등장하는 작품[편집]


소설[편집]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경빈 박씨 - 한국학중앙연구원
  2. 《조선왕조실록》 중종 74권, 28년 1533년 6월 15일 (음력 5월 23일) 2번째기사
  3. 《조선왕조실록》 중종 74권, 28년(1533년) 5월 26일 5번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