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빈 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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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빈 윤씨
별칭
별호 화빈(和嬪, 1780~사후)

경수궁(慶壽宮, 1780~사후)

신상정보
출생일 1765년 음력 4월 11일
사망일 1824년 음력 1월 14일
능묘 화빈남원윤씨지묘[1]
왕조 조선 왕조
부친 판관 윤창윤(尹昌胤)
모친 벽진 이씨
배우자 정조
자녀 없음

화빈 윤씨(和嬪 尹氏, 1765년 ~ 1824년)는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의 두 번째 간택후궁이다. 삼간택을 거쳐 입궁하여 빈으로 책봉된 뒤에 가례를 행하였다.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생애[편집]

판관 윤창윤(尹昌胤)의 딸이다.[2]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 김씨에게서 소생이 없고, 첫 번째 간택후궁 원빈 홍씨마저 간택된 지 1년이 안 되어 소생 없이 갑자기 졸하였다. 그래서 왕실의 후사를 잇기 위해 후궁 간택되었다. 1780년(정조 4년) 3월 10일 16세의 나이에 후궁 책봉되어 화빈(和嬪)의 빈호와 경수(慶壽)의 궁호를 받았다.[3] 1780년(정조 4년) 3월 12일 예조가 화빈의 관례의 길일을 택하였는데, 3월 15일 오시(午時)였다.[4]

상상임신[편집]

1781년(정조 5년) 음력 1월 17일 임신하여 산실청(産室廳)이 설치되었다.[5] 이로부터 10개월 뒤인 1781년(정조 5년) 음력 11월 2일 화빈의 해산을 기다리는 기록이 있다.[6] 그러나 출산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화빈은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

尹嬪 過三十餘朔 産事無實
윤빈(화빈 윤씨)의 산실청은 30개월이 넘도록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7]

1782년(정조 6년) 음력 9월 7일, 정조가 문효세자(의빈 성씨 소생)의 출생 당시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문효세자가 정조의 첫아이임을 알 수 있다.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8]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죽고 선왕의 춘추도 많으셨는데, 효의 왕후(孝懿王后)와 화빈(和嬪) 및 여러 후궁들에게 모두 소생이 없었다. — 김조순, 《순조실록》
선왕께서는 2남 2녀를 두셨는데, 의빈(宜嬪) 성씨(成氏)는 문효 세자(文孝世子)를 낳고 한 따님은 1년이 못되어 죽었다. 지금의 상전하(上殿下)와 숙선 옹주(叔善翁主)는 모두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낳았다.[9]

이와 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보건대 화빈은 상상임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787년(정조 11년), 효의왕후가 상상임신했을 때도 1년 넘게 산실청이 유지되다가 철수된 바 있다. 정조는 화빈의 산실청과 관련해 조시위(화빈의 인척)와 이문덕을 귀양보냈다.[10]

산실청[편집]

왕비가 임신하면 산실청을, 후궁이 임신하면 호산청을 설치한다. 화빈 윤씨는 후사를 잇기 위해 명문가에서 간택해 입궁하였으므로 특별히 산실청을 설치하였다. 보통 산실청이 해산 6일 뒤에 철수되는데 반해, 화빈 윤씨의 산실청은 아이를 낳지 못한 채 30여개월이나 지속되었다. 화빈 윤씨가 임신하자마자 산실청을 설치했음에도 해산을 하지 못한 실망감 때문인지, 정조는 화빈 이후 비빈들이 임신했을 때는 해산달이나 해산 당일에야 호산청과 산실청을 설치한다.

원빈 홍씨의 경우[편집]

정조의 간택후궁인 원빈 홍씨는 임신한 적이 없어 산실청을 설치하지 않았다.

의빈 성씨의 경우 (1782년, 1784년, 1786년)[편집]

정조의 유일한 궁녀 출신 승은후궁인 의빈 성씨문효세자옹주를 낳을 때는 두 번 모두 해산 당일에야 호산청을 설치하였다.[11][12] 두 번 모두 해산 6일 뒤에 호산청을 철수되었다.[13][14] 의빈 성씨가 셋째를 임신했을 때에 정조는 호산청을 설치하자는 신하의 청을 거절하고 해산달에 호산청을 설치하자고 하였다.[15]

효의왕후 김씨의 경우 (상상임신)[편집]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1787년(정조 11년)에 상상임신하였을 때도 정조는 산실청을 설치하자는 신하의 청을 두 번이나 거절하고[16][17] 해산달에야 산실청을 설치하였다.[18] 이후 상상임신임이 드러나 1년 뒤인 1788년 음력 12월 30일 산실청이 철수되었다. 화빈 윤씨의 경우처럼 효의왕후도 상상임신이었지만 화빈과 다른 점이 화빈은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는데 반해 효의왕후의 경우에는 상상임신이었지만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이 실록에 있다.

수빈 박씨의 경우 (1790년, 1793년)[편집]

정조의 마지막 간택후궁인 수빈 박씨조선 순조를 낳을 때도 해산 당일에야 산실청을 설치하였다.[19] 숙선옹주를 낳을 때도 미리 설치하자는 신하의 청을 기다리도록 하라는 말로서 사실상 거절하며, 해산 당일에야 산실청을 설치하였다.[20] 두 번 모두 해산 6일 뒤에 산실청이 철수되었다.

이재난고[편집]

조선 정조 대의 문신 이재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 화빈 윤씨의 산실청과 관련된 기록 및 일화가 있다.

今番新揀擇 卽寧陵令尹昌胤女子也 再昨年洪嬪 則依大明集禮皇貴妃禮典 今則只依本朝內命婦之一品嬪例擧行
이번 새 간택에 영릉의 영으로 있는 윤창윤의 딸이 나갔다. 재작년에는 원빈 홍씨의 의대를 명나라의 예에 따라 황귀비의 예를 따랐다. 다만 이번에는 조선의 예법을 따라 내명부 정1품 빈의 예법으로 거행했다.[21]
尹嬪 過三十餘朔 産事無實 而元子生 則産廳都提調徐命善等 猶請姑待尹氏産期 而不請元子定號 奉朝賀金尙喆 亟上疏 引春秋立庶以長之義 請元子定號 上意亦然
윤빈(화빈 윤씨)의 산실청은 30개월이 넘도록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다. 원자(문효세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윤씨의 산실청 때문에 원자 정호를 청하지 못하였다. 원자 정호를 청하자 임금(정조) 역시 그러했다.[22]
和嬪尹氏 僭妬於中宮 喑詛於成嬪 因此得罪 自內嚴囚 方有降宮爲房之議
화빈 윤씨는 중궁(효의왕후)을 분수에 지나치게 질투했고 성빈(의빈 성씨)을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저주했다. 이로 인하여 죄를 얻었고 대궐 안에 엄히 가뒀다. 의논하여 대궐에 방을 내렸다.[23]

《경수궁배위의절》[편집]

경수궁(慶壽宮) 화빈 윤씨(和嬪尹氏)의 행차 때 시중들거나 따르는 예절을 정하여 기록한 책.[24]

죽음[편집]

정조의 아들인 순조 재위 중인 1824년(순조 24년) 음력 1월 14일에 60세의 나이로 졸하였다.[25] 현재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의 후궁 묘역에 묻혀있다.

가계[편집]

친정 (남원 윤씨)[편집]

  • 친척 : 윤창렴(尹昌濂)
  • 친척 : 윤창순(尹昌淳) - 용원부원군 윤자신 6대 족손.[26]
  • 아버지 : 판관 윤창윤(尹昌胤)
  • 어머니 : 벽진 이씨(碧珍 李氏) - 이훈보의 딸.
  • 친척 : 남원 윤씨(1768~1801) - 가사 《명도자탄사》의 저자.[27]
  • 인척 : 서명선(徐命善, 1728~1791) - 윤창윤의 고모할머니가 서명선의 숙모.
  • 인척 : 조시위(趙時偉) - 아내가 남원 윤씨이다.[28]

왕가 (전주 이씨)[편집]

화빈 윤씨가 등장한 작품[편집]

관련 문화재[편집]

각주[편집]

  1. <서삼릉>
  2. “정조실록”. 
  3. “정조실록”. 
  4. “일성록”. 
  5. “정조실록”. 
  6. “일성록”. 
  7. “이재난고”. 
  8. “정조실록”. 
  9. “순조실록”. 
  10. “정조실록”. 
  11. <일성록> <승정원일기> (1782년 9월 7일)
  12. “정조실록”. 
  13. <승정원일기> (1782년 9월 13일)
  14. <승정원일기> (1784년 윤3월 26일)
  15. <정조실록>
  16. <정조실록>
  17. <정조실록>
  18. <정조실록>
  19. <정조실록>
  20. <일성록><정조실록>
  21. “이재난고”. 
  22. “이재난고”. 
  23. “이재난고”. 
  24. “두피디아”. 
  25. “순조실록”. 
  26. 화빈 윤씨의 아버지 윤창윤과 형제들 윤창렴 윤창순 세 사람이 관련된 사건이 형조를 통해 전해지자, 조사하고 보고해서 엄히 처리할 수 있도록 하라는 정조의 전교가 <일성록>에 기록되어 있다.
  2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8. “한국학자료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