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빈 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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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빈 안씨
善嬪 安氏
조선 태종의 후궁
이름
별호 숙선옹주(淑善翁主)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사망일 1468년 7월 15일 (양력)
부친 안의(安義)
배우자 태종
자녀 1남 2녀
익녕군
경신옹주
소숙옹주

선빈 안씨(善嬪 安氏, ? ~ 1468년 7월 15일(음력 6월 17일)) 또는 숙선옹주(淑善翁主)는 조선 태종의 후궁이다.

생애[편집]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검교 한성윤(檢校 漢城尹) 안의(安義)의 딸로 궁인으로 입궁하였다가 태종의 후궁이 되었으며, 1421년(세종 3년)에 숙선옹주(淑善翁主)에 봉해지고 그 아버지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직을 제수받았다.[1]

1430년(세종 12년)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과 집터 문제를 가지고 다투어 송사하였다.[2]

1468년(세조 14년) 5월, 딸인 경신옹주와 노비와 전답의 재산 분배를 둘러싸고 갈등을 벌여, 선빈 안씨는 상서를 올려 온갖 거짓말을 꾸며대어 악의적으로 딸의 녹봉과 재물을 탐냈던 나머지 전재산과 녹을 빼앗으려 하였다.[3] 의금부에서 관련 있는 자들을 국문하였는데, 이 송사로 경신옹주는 녹봉을 억울하게 빼앗기고 노비와 전답의 일부를 어머니 숙선옹주에게 강제로 뺏겼으며, 경신옹주의 아들 이효충은 직첩을 거두고 외방으로 쫓겨났다.[4]

선빈 안씨는 돌려받은 노비와 토지의 일부를 며느리인 익녕군의 아내 박씨와, 본인의 외손자이자 소숙옹주의 아들인 황호, 황징 형제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선빈 안씨와 경신옹주 모녀의 다툼에 익녕군의 처 박씨와 황호, 황징 형제가 의기 투합하여 임종이 가까운 선빈 안씨를 조종하였으나, 후에 황호, 황징 형제가 이를 뉘우쳤다고 기록하고 있다.[4] 이들 모녀의 송사는 예종, 성종 대에도 회자되었으며 예종은 경신옹주에게 올바르게 녹봉을 되돌려 주었다.

1468년 6월 17일 사망하였다. 1872년(고종 9년), 정1품 선빈(善嬪)으로 추증되었다.

사후[편집]

숙선옹주(선빈)안씨 묘서울특별시 중랑구 봉화산 기슭에 있다. 『경국대전』 반포 이전 후궁에게도 '옹주'의 용어가 사용된 사실을 알려주는 실물 자료로 역사적 가치가 있고, 조선 세조때 예장된 묘제 석물(묘비, 상석, 장명등, 문석인 1쌍, 산신제석)이 잘 남아있어 2019년 6월 7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다. 숙선옹주로가 숙선옹주(선빈)안씨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안의(생몰년 미상)
  • 어머니 : 미상
  • 남편 : 태종(太宗, 1367 ~ 1422)
    • 남 : 익녕군 이치(益寧君 李袳, 1422 ~ 1464)
      • 며느리 : 군부인 운봉 박씨(郡夫人 雲峰 朴氏, 생몰년 미상)[5]
      • 며느리 : 군부인 평양 조씨(郡夫人 平壤 趙氏, 생몰년 미상)
        • 손자 : 의천군 이승은(義泉君 李承恩, 생몰년 미상)
      • 손자 : 수천군 이정은(秀泉君 李貞恩), 이원익은 수천군 정은의 증손
    • 장녀 : 경신옹주(敬愼翁主, 생몰년 미상)
      • 사위 : 전의위 이완(全義尉 李梡, ? ~ 1455)
    • 차녀 : 소숙옹주(昭淑翁主, ? ~ 1464)
      • 사위 : 회천군 황유(懷川君 黃裕, 1421 ~ 1450)

관련 작품[편집]

드라마[편집]

각주[편집]

  1. 세종실록》 12권, 세종 3년(1421년) 5월 11일(임신)
  2. 세종실록》 50권, 세종 12년(1430년) 10월 10일(정축)
  3. 세조실록》 46권, 세조 14년(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5월 16일(을해)
    숙선옹주가 노비 분배 문제로 인한 경신옹주와의 송사의 빠른 해결을 요구하다
  4. 세조실록》 46권, 세조 14년(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6월 14일(임인)
    경신옹주의 녹봉을 빼앗고 이효충의 고신을 거두어 외방으로 보내다
  5. 절제사 증 찬성 박종지(節制使 贈 贊成 朴從智)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