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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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군부인 신씨
세자빈
재위 1488년 ~ 1494년
전임자 빈궁 한씨(장순왕후)
후임자 빈궁 박씨(인성왕후)
왕비(폐비)
재위 1494년 ~ 1506년
전임자 정현왕후
후임자 단경왕후
별칭
별호 왕세자빈, 왕비, 폐비, 거창군부인,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

신상정보
출생일 성종 6년(1476) 11월 29일
사망일 중종 32년(1537) 4월 8일
능묘 연산군묘
부친 신승선(愼承善)
모친 중모현주 이씨(中牟縣主 李氏)
배우자 연산군
자녀 원자
휘신공주
폐세자 이황
공주
창녕대군
대군 총수
대군 영수
대군 인수
대군 인수

폐비 신씨(廢妃 愼氏, 1476년 12월 15일(음력 11월 29일)~1537년 5월 16일(음력 4월 8일))[1]조선 연산군(燕山君)의 왕비(王妃)이다. 폐위되었으므로 시호가 없으며,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이라고도 불린다.

거창부원군 장성공 신승선(居昌府院君 章成公 愼承善)과 중모현주 이씨(中牟縣主 李氏)[2]의 딸로, 본관은 거창(居昌)이다. 남편 연산군과 함께 조선에서 반정으로 인해 퇴위한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

무덤은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한 연산군묘(燕山君墓)이며, 남편 연산군과 쌍릉을 이루고 있다.

생애[편집]

외할아버지 임영대군세종소헌왕후의 아들로, 남편 연산군은 그녀의 칠촌 조카뻘이 되기도 한다. 또 이복 시동생인 중종에게는 형수이자 처고모가 된다.

아버지 신승선(愼承善)은 임영대군의 딸과 혼인을 하는데 그의 생모가 된다.

아버지는 두번에 걸쳐 장원 급제하고 현임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낸 신승선(愼承善)이며, 그녀는 왕실 유례상 간택 없이 세자빈으로 직접 뽑힌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세자빈 간택을 통해 1488년(성종 19년) 왕세자(王世子)로 있던 연산군과 가례를 치르고 세자빈(世子嬪) 신분으로 입궁하였으며, 1494년 연산군 즉위와 함께 왕비(王妃)에 봉해지면서 경복궁 자선당(資善堂)에서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으로 처소를 옮겼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라는 존호를 받았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폐비(廢妃)가 되어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등된다. 신씨는 연산군과는 달리 덕이 있었다.

1495년에는 적통공주인 휘신공주(徽愼公主)를, 1498년 1월 10일(음력 12월 18일) 왕실의 적통장자인 원자(元子)를 낳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연산군은 그녀의 덕을 높이 사고 황금으로 쓴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그녀는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중종반종 당시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연산군)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1505년(연산군 11년)에는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의 존호를 받았으나[3], 바로 이듬해인 1506년 연산군이 폐출당하면서 그녀도 군부인(郡夫人)의 신분으로 강등되었다.

그녀는 폐위되고 죽음을 당할 처지임에도 그녀를 죽이라는 사람들이 없었고 신하와 중종은 그녀에게 후하게 대우해주었다. 그녀는 중종의 배려로 1521년(중종 16) 11월에 속공(屬公)한 죄인 안처겸(安處謙)의 집을 받았다. 또 중종반정 이후 신씨 집안의 노비들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착하고 선한 인품이였기 때문이다.

폐비(廢妃)된 후 중종은 그녀에게 빈(嬪)의 예를 사용하게 했다고 한다.

연산군은 죽음을 앞두고 '부인 신씨를 보고싶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그녀는 사후 연산군 묘 옆에 배장되었고, 무덤 앞에 서있는 비석명은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이다. 연산군과의 사이에서는 5남 2녀라는 말도 있으나 그것보다 연산군과 신씨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더 많았다. 7남 2녀 혹은 7남 3녀를 낳았으나 두 아들과 공주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요절하였고, 그나마 두 아들은 연산군이 폐위된 후 사사되었다[4].

가족 관계[편집]

친정 거창 신씨(居昌 愼氏)
  • 조부 : 황해도감사 증 영의정 거창부원군 양간공 신전(黃海道監司 贈 居昌府院君 領議政 襄簡公 愼詮)
  • 조모 : 증 정경부인 순흥 안씨(贈 貞敬夫人 順興 安氏)[5]
    • 아버지 : 의정부 영의정 거창부원군 장성공 신승선(議政府 領議政 居昌府院君 章成公 愼承善, 1436~1502)
  • 외조부 : 정간공 임영대군 구(貞簡公 臨瀛大君 璆, 1420~1469)
  • 외조모 : 제안부부인 전주 최씨(濟安府夫人 全州 崔氏, 생몰년 미상)
    • 어머니 : 정경부인 중모현주 증 흥안부부인 전주 이씨(貞敬夫人 中牟縣主 贈 興安府夫人 全州 李氏)
      • 오빠 : 영의정 익창부원군 신도공 신수근(領議政 益昌府院君 信度公 愼守勤, 1450~1506)
      • 올케 : 정경부인 청원부부인 청주 한씨(貞敬夫人 贈 淸原府夫人 淸州 韓氏)[6]
        • 조카이자 동서 : 단경왕후(端敬王后, 1487~1557)
      • 오빠 : 형조판서 신수겸(刑曹判書 愼守謙, ?∼1506)
      • 올케 : 정부인 진산 강씨(貞夫人 晋山 姜氏)[7]
      • 올케 : 정부인 담양 전씨(貞夫人 潭陽 田氏)
      • 오빠 : 형조판서 신수영(刑曹判書 愼守英, ?∼1506)
      • 올케 : 정부인 청주 한씨(貞夫人 淸州 韓氏)[8]
왕가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시조부 : 추존 덕종(德宗, 1438~1457)
  • 시조모 : 소혜왕후 청주 한씨(昭惠王后 淸州 韓氏, 1437~1504)
    • 시아버지 : 제9대 성종(成宗大王, 1457~1494, 재위 1469~1495)
    • 시어머니 : 폐비 함안 윤씨(廢妃 咸安 尹氏, 1455?~1482)
      • 남편 :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 1506, 재위 1494~1506)
        • 장남 : 원자 (元子, 1494~1494)
        • 장녀 : 폐 휘신공주(廢 徽愼公主, 1495~?)
        • 차녀 : 공주 (公主, ?~?) - 조졸
        • 차남 : 폐세자 황(廢王世子 𩔇, 1498~1506)
        • 삼남 : 폐 창녕대군 성(廢 昌寧大君 誠, 1501~1506)
        • 사남 : 대군 총수 (大君 聰壽, ?~?) - 조졸
        • 오남 : 대군 영수 (大君 榮壽, ?~1503) - 조졸
        • 육남 : 대군 인수 (大君 人壽, 1500~?) - 조졸
        • 칠남 : 대군 인수 (大君 仁壽, 1501~?) - 조졸
    • 시어머니 : 정현왕후 파평 윤씨(貞顯王后 坡平 尹氏 , 1462~1530)
      • 시동생이자 조카사위 :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재위 1506~1544)

폐비 신씨가 등장하는 작품[편집]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신씨의 생몰년도는 그의 묘갈(연산군부인신씨묘지명, 燕山君夫人愼氏墓誌銘)에 기록되어 있다.
  2. 현주(縣主)는 원칙적으로 세자의 서녀에게 부여하는 정3품의 호칭이지만, 조선 전기에는 대군의 적녀를 현주에 봉하는 일도 빈번했다. 신씨의 어머니 중모현주는 세종의 4남 임영대군의 장녀이다.
  3. 《조선왕조실록》연산군 11년(1505) 8월 26일 1번째 기사
  4. 《조선왕조실록》중종 1년(1506) 9월 24일 3번째 기사
  5. 지고주군사 안강(知高州郡事 安剛)의 딸.
  6. 첨지중추부사 한충인(僉知中樞府事 韓忠仁)의 딸.
  7. 감사 강자평(姜子平)의 딸.
  8. 청천부원군 한백륜(右議政 淸川府院君 韓伯倫)의 딸.


전임
정현왕후
조선 역대 왕후
1494년 ~ 1506년
후임
단경왕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