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이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전주 이씨 (全州 李氏)
전주 이씨의 종문, 이화문, 대한제국의 국장
전주 이씨의 종문, 이화문, 대한제국의 국장
관향 전라북도 전주시
시조 이한 (李翰)
주요 중시조 선성군, 덕천군, 무림군, 양녕대군, 효령대군, 광평대군, 밀성군, 덕흥대원군
주요 집성촌 전라북도 부안군
전라남도 나주시
함경북도 길주군
함경남도 북청군
평안북도 정주시
경기도 연천군
주요 인물 이의방, 사평왕후, 이자춘, 이원계, 조선의 왕, 대한제국 황실, 이몽학, 이원익, 이억기, 이수광, 이성구, 이광사, 이긍익, 이헌길, 이최응, 이하응, 이제마, 이재원, 이재선, 이재면, 이재완, 이재긍, 이재곤, 이건창, 이준, 이용익, 이강년, 이근호, 이근택, 이근상, 이병무, 이지용, 이승만, 이은찬, 이광수, 이기붕, 이범석, 이재형, 이재준, 이희호, 이승윤, 이회창, 이강석, 이홍구, 이준용, 이헌재, 이인제, 이해찬, 이낙연, 이승기
인구(2015년) 2,631,643명 (3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전라북도 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이한(李翰)이며,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한의 22세손이다.

역사[편집]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시조 이한(李翰)은 전주(全州)에 토착해 온 집안 태생으로, 호는 견성(甄城)이다. 1681년 편찬된 족보 《선원록(璿源錄)》에 의하면 이한은 신라 태종무열왕 10세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고, 통일신라 문성왕(文聖王 : 재위: 839년 ~ 857년) 때 사공(司空)을 지냈다고 한다.[1]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이한의 22세손이라고 한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李安社) 이전의 사적(事蹟)은 역사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전주 이씨의 분파는 이안사(李安社) 선계에서 갈라진 파와 그 이후 갈라진 파를 합해 모두 123파이다.

이성계의 가계가 역사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1170년(의종 24) 경부터이다.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이 1174년(명종 4) 피살되자 동생 이린(李隣)이 고향인 전주로 낙향했다. 이린의 손자 이안사(李安社)가 전주에서 지주(知州)의 비위에 거슬리자 처벌을 받을 것을 피해 가솔을 거느리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지주가 그곳 안렴사(按廉使)로 부임하자 1253년(고종 40) 경 다시 일행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덕원부(德源府)로 옮겼고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되었다.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손자 이춘(李椿)도 두만강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서 벼슬했고, 이춘의 아들 이자춘(李子春)도 원나라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천호를 지냈다. 이자춘몽골 이름울루스부카다. 이자춘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운동에 응하여 쌍성 함락에 결정적인 공을 세워 이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가 고려에서 벼슬을 지내고, 조선을 개국하였다.

기원[편집]

전주 이씨는 시조 이한 이후로 전주에 살아온 토착 성씨(土姓)이다. 시조 이한의 선대에 대해서는 밝혀지고 있진 않으나, 대부분의 성씨와 본관들이 신라 말기이나 고려 초기에 들어와 성씨를 쓰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과정을 볼 때 이한에서부터 이(李)씨 성을 쓰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2]

기원에 관한 두가지 설[편집]

  1. 야사(野史)에 연대 작가 미상의 《완산실록(完山實錄)》에 의하면 '우리 시조 사공공의 휘는 한이요, 자는 견성이다. 공은 원래 중국에 살았었는데 하늘이 낸 성스런 인물로 남보다 총명하시고 재질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는데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나웠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략을 받아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들어오시니 그 때가 18세였다. 이렇게 어리셨는데도 문장이 비범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기품이 널리 떨쳤다. 우리 나라로 오신 지 얼마 안되어 명성이 조정에까지 떨쳐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신 지 1년 만에 나라가 태평하여 온갖 벼슬아치들이 다 화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즐겼다. 그래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중국전래설은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야사적(野史的) 기록이라 성씨 득성 과정을 보면, 인물을 신격화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사대주의적 모화사상에 기초하여, 어떻게든 황실과 연관지어 위상을 높이기위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빙성을 부여받기 힘든 것 같다. 즉 중국전래설을 주장하는 성씨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한림원" 학사, 또는 "황실" 성씨 등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2. 또한 경주 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 이씨(陜川 李氏) 족보에 의하면, '이알평(李謁平)의 34세손 이진두(李辰斗)의 둘째 손자 한(翰)이 지금의 전주인 완산 이씨(完山 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사공(司空)으로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배위는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 이씨의 시조인 이거명(李居明)도 이알평의 36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둘은 항렬이 같은 셈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말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알평에서부터 이거명까지의 계보가 갑자기 발견된 점이나, 이희두(李禧斗)의 동생으로 진두를 거명하며 두(斗)라는 동일 항렬자를 쓰고 있는 점, 그리고 동일 항렬자를 쓰는 것은 당시 족보제작이 유행하면서 정착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주장에 대한 신뢰성은 애매한 것이 많아 합당하지 않다.[1] [3] 결국, 두 가지 설 모두 근거가 없고 믿을 수 없으며, 전주의 토성(土姓)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중국 기원설의 문제점[편집]

1. 출전 문헌이 공식 왕실 족보나 조선 성원록 등에는 이성계의 조상인 이한을 중국인이라고 언급하는 문헌이 하나도 없다.

2. 관련 내용을 언급하는 내용이 신뢰성이 떨어지는 야사집인 완산실록 하나뿐이다. 완산실록은 조선 왕실 족보보다 출간년도가 늦은 조선 중기 때의 저작으로 추정된다.

단, 전주 이씨 왕실 세계에도 부친인 이자춘의 부인인 의혜왕후 최씨(고려에 귀화하기 이전의 본래 성은 조씨)가 중국 등주 출신이라 나오기 때문에 모계쪽이 중국인과 혈연적 연관이 있을 수 있다.

신라 경주 이씨 기원설의 문제점[편집]

1. 이 역시 조선왕조실록에는 공식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이 하나도 없고 경주 이씨 족보에 나오는 내용이다.

2. 하지만 이 내용에서 조선 후기까지 밝혀지지 않은 경주 이씨의 이알평에서주터 이거명까지의 계보가 갑자기 나타난 점이나 이희두의 동생으로 진두가 나오는데 조선인의 성씨에서 형제끼리 동일 항렬을 쓰는 것은 조선 후기에 족보 제작이 유행하면서 정착하게 된 것을 감안할 때 이성계 집안이 경주 이씨의 분파라는 주장이 담긴 계보 내용은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고 후대에 창작된 내용일 가능성이 높다.

즉, 전주 이씨를 신라 경주 이씨와 연관시키는 건 후세의 날조일 가능성이 높다.

황현의 매천야록[편집]

황현이 저술한 야사집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따르면 전주 이씨가 많아진 이유로, 흥선대원군이 전주 이씨를 원하는 자들을 대동보에 올려주어 전주 이씨를 의도적으로 늘렸다고 쓰여 있다. 병인년(1866년, 고종 3년) 이후 성씨가 없던 천민들 중에서 전주 이씨를 자처하는 자들을 모두 대동보에 이름을 올려주어 대동보에 오른 자가 잇달았다고 한다. 종친부에서 화수회를 연 적이 있었는데 참가한 자만 7만이라 했다. 전주 이씨의 인구를 늘린 흥선대원군이 "내가 나라를 위해 십만 정병을 얻었다."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을 겪으며 보고 들었던 정보를 토대로 기술한 비사(祕史)라는 점에서 기록의 특성상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조선 후기 300년 동안 효종 이후의 왕들이 어릴 때 죽어 후사를 남기지 못하거나 외동 아들만 남겼음에도 조선 후기 전주 이씨의 인구가 급증한 것은, 민적법 시행 전후 성씨가 없던 천민들이 전주 이씨가 왕족이라는 이유로 족보를 위조하거나 성씨를 차용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본관[편집]

전주(全州)는 전라북도 중앙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마한(馬韓)의 원산성(圓山成)이고, 백제의 완산(完山)이었는데, 555년(위덕왕 2)에 완산주(完山州)로 하였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완(完)을 의역(意譯)하여 전주(全州)로 고쳤고, 900년(효공왕 4)에 견훤(甄萱)이 이곳으로 후백제의 도읍을 옮겼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후백제가 망하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었다가 940년에 다시 전주로 회복되었다.

983년(성종 2)에 12목 가운데의 하나인 전주목이 설치되었으며, 993년에 승화(承化)로 개칭하고 절도안무사(節度安撫使)를 두었다. 995년에는 강남도(江南道) 관하의 전주순의군절도사(全州順義軍節度使)가 되었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안남대도호부로 승격되고, 1022년에 전주목으로 개칭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전주로 강등되고, 1355년(공민왕 4)에는 부곡으로 강등되었다가 이듬해에 완산부(完山府)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전주이씨의 시조의 발상지라 하여 완산부유수(完山府留守)로 승격되었으며, 1403년(태종 3)에 전주부(全州府)로 개칭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완산 이씨와의 관계[편집]

완산(完山)은 전주의 백제시대 지명으로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전주 이씨의 이칭이다. 파별(派別) 또는 개인의 기호(嗜好)에 따라 '전주 이씨' 또는 '완산 이씨'를 선택하며, 두음법칙(頭音法則)을 따르지 않고 본음에 따라 '리씨'라 선택하기도 한다. 한 때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도 다른 이씨와 차별성을 두기 위하여 '리씨' 사용을 권장한 적도 있다. 북한에서는 두음법칙을 따르지 않고 '리씨'라고 사용하고 있다.

분파[편집]

  • 궁진(宮進)
    • 시중공파(侍中公派) 이단신(李端信)
  • 용부(勇夫)
    •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이거(李琚)
  • 양무(陽茂)
    • 주부공파(主簿公派) 이영습(李英襲)
  • 목조
    • 안천대군파(安川大君派) 이어선(李於仙)
    • 안원대군파(安原大君派) 이진(李珍)
    • 안풍대군파(安豊大君派) 이정(李精)
    • 안흥대군파(安興大君派) 이구수(李球壽)
  • 익조
    • 함녕대군파(咸寧大君派) 이안(李安)
    • 함창대군파(咸昌大君派) 이장(李長)
    • 함원대군파(咸原大君派) 이송(李松)
    • 함천대군파(咸川大君派) 이원(李源)
    • 함릉대군파(咸陵大君派) 이고태(李古泰)
    • 함양대군파(咸陽大君派) 이전(李腆)
    • 함성대군파(咸城大君派) 이응거(李應巨)
  • 도조
    • 완창대군파(完昌大君派) 이자흥(李子興)
    • 완원대군파(完原大君派) 이자선(李子宣)
    • 완천대군파(完川大君派) 이평(李平)
    • 완성대군파(完城大君派) 이종(李宗)
  • 환조
    • 완풍대군파(完豊大君派) 이원계(李元桂)
    •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이화(李和)
  • 태조
    • 진안대군파(鎭安大君派) 이방우(李芳雨)
    • 익안대군파(益安大君派) 이방의(李芳毅)
    • 회안대군파(懷安大君派) 이방간(李芳幹)
    • 의안대군파(宜安大君派) 이방석(李芳碩)
  • 정종
    • 의평군파(義平君派) 이원생(李元生)
    • 순평군파(順平君派) 이군생(李群生)
    • 선성군파(宣城君派) 이무생(李茂生)
    • 종의군파(從義君派) 이귀생(李貴生)
    • 진남군파(鎭南君派) 이종생(李終生)
    • 수도군파(守道君派) 이덕생(李德生)
    • 임언군파(林堰君派) 이녹생(李祿生)
    • 석보군파(石保君派) 이복생(李福生)
    • 덕천군파(德泉君派) 이후생(李厚生)
    • 임성군파(任城君派) 이호생(李好生)
    • 도평군파(桃平君派) 이말생(李末生)
    • 장천군파(長川君派) 이보생(李普生)
    • 정석군파(貞石君派) 이융생(李隆生)
    • 무림군파(茂林君派) 이선생(李善生)
  • 태종
    •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이제(李禔)
    •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이보(李補)
    • 성녕대군파(誠寧大君派) 이종(李褈)
    • 경녕군파(敬寧君派) 이비(李裶)
    • 함녕군파(咸寧君派) 이인(李裀)
    • 온녕군파(溫寧君派) 이정(李裎)
    • 근녕군파(謹寧君派) 이농(李襛)
    • 혜녕군파(惠寧君派) 이지(李祉)
    • 희녕군파(熙寧君派) 이타(李袉)
    • 후녕군파(厚寧君派) 이간(李衦)
    • 익녕군파(益寧君派) 이치(李袳)
  • 세종
    • 임영대군파(臨瀛大君派) 이구(李璆)
    •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이여(李璵)
    • 금성대군파(錦城大君派) 이유(李瑜)
    • 영응대군파(永膺大君派) 이염(李琰)
    • 화의군파(和義君派) 이영(李瓔)
    • 계양군파(桂陽君派) 이증(李璔)
    • 의창군파(義昌君派) 이공(李玒)
    • 한남군파(漢南君派) 이어(李𤥽)
    • 밀성군파(密城君派) 이침(李琛)
    • 수춘군파(壽春君派) 이현(李玹)
    • 익현군파(翼峴君派) 이곤(李璭)
    • 영풍군파(永豊君派) 이전(李瑔)
    • 영해군파(寧海君派) 이당(李瑭)
    • 담양군파(潭陽君派) 이거(李璖)
  • 세조
    • 덕원군파(德源君派) 이서(李曙)
    • 창원군파(昌原君派) 이성(李晟)
  • 덕종
    • 월산대군파(月山大君派) 이정(李婷)
  • 예종
    • 인성대군파(仁城大君派) 이분(李糞)
    • 제안대군파(齊安大君派) 이현(李琄)
  • 성종
    • 계성군파(桂城君派) 이순(李恂)
    • 안양군파(安陽君派) 이항(李㤚)
    • 완원군파(完原君派) 이수(李𢢝)
    • 회산군파(檜山君派) 이념(李恬)
    • 봉안군파(鳳安君派) 이봉(李逢)
    • 견성군파(甄城君派) 이돈(李惇)
    • 익양군파(益陽君派) 이회(李懷)
    • 이성군파(利城君派) 이관(李慣)
    • 경명군파(景明君派) 이침(李忱)
    • 전성군파(全城君派) 이변(李忭)
    • 무산군파(茂山君派) 이종(李悰)
    • 영산군파(寧山君派) 이전(李恮)
    • 운천군파(雲川君派) 이인(李𪬦)
    • 양원군파(楊原君派) 이희(李憘)
  • 중종
    • 복성군파(福城君派) 이미(李嵋)
    • 해안군파(海安君派) 이희(李㟓)
    • 금원군파(錦原君派) 이영(李岭)
    • 영양군파(永陽君派) 이거(李岠)
    • 덕양군파(德陽君派) 이기(李岐)
    • 봉성군파(鳳城君派) 이완(李岏)
    • 덕흥대원군파(德興大院君派) 이초(李岹)
  • 선조
    • 영창대군파(永昌大君派) 이의(李㼁)
    • 임해군파(臨海君派) 이진(李珒)
    • 신성군파(信城君派) 이후(李珝)
    • 순화군파(順和君派) 이보(李𤣰)
    • 인성군파(仁城君派) 이공(李珙)
    • 경창군파(慶昌君派) 이주(李珘)
    • 흥안군파(興安君派) 이제(李瑅)
    • 경평군파(慶平君派) 이늑(李玏)
    • 인흥군파(仁興君派) 이영(李瑛)
    • 영성군파(寧城君派) 이계(李㻑)
  • 원종
    • 능원대군파(綾原大君派) 이보(李俌)
  • 인조
    • 소현세자파(昭顯世子派) 이왕(李𣳫)
    • 인평대군파(麟坪大君派) 이요(李㴭)
    • 용성대군파(龍城大君派) 이곤(李滾)
    • 숭선군파(崇善君派) 이징(李澂)
    • 낙선군파(樂善君派) 이숙(李潚)
  • 숙종
    • 연령군파(延齡君派) 이훤(李昍)
  • 장조
    • 은언군파(恩彦君派) 이인(李裀)
    • 은전군파(恩全君派) 이찬(李禶)
  • 고종
    • 의친왕파(義親王派) 이강(李堈)

분적된 본관[편집]

전주 이씨에서 갈라진 대흥 이씨영해 이씨가 있다. 대흥 이씨(大興 李氏)의 시조는 전주 이씨 22세에서 분관한 대흥군(大興君) 이연계(李連桂)이다. 대흥군은 고려 말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대흥군은 태조 이성계와 재종간 임에도 불구하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굽히지 않고 끝까지 조선 개국을 반대하였다. 영해 이씨 시조 이연동(李延東)은 완산 이씨(完山 李氏) 이립전(李立全)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

항렬자[편집]

  • 양녕대군파(중시조로 1세, 시조로 24세) - 태종의 장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