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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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義親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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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친왕 이강 | |
사동궁 이화문 | |
| 의화군(義和君) | |
| 재임 | 1892년 1월 28일 ~ 1900년 8월 17일 |
| 의친왕(義親王) | |
| 재임 | 1900년 8월 17일 ~ 1910년 8월 29일 |
| 이강 공(李堈 公) | |
| 재임 | 1910년 8월 29일 ~ 1930년 6월 12일 |
| 후임 | 이건(李鍵) |
| 이강 전하(李堈 殿下) | |
| 재임 | 1930년 6월 12일 ~ 1947년 5월 2일 |
| 후임 | 왕공족 폐지 |
| 이름 | |
| 휘 | 이강(李堈) |
| 이칭 | 궁가: 사동궁(寺洞宮) |
| 별호 | 아명: 이평길(李平吉) 이명: 이천광(李天光)[1] |
| 자 | 사강(士岡) |
| 호 | 춘암(春菴)[2] |
| 세례명 | 비오(Pius)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1877년 3월 30일 |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순화방 숙의 범씨 제택 |
| 사망일 | 1955년 8월 16일(78세) |
| 사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부 안국동별궁 |
| 학력 | 필운 학당 게이오 의숙 로노크 대학교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
| 왕조 | |
| 가문 | 전주 이씨 |
| 부친 | 고종 |
| 모친 | 모후: 명성황후 사친: 귀인 덕수 장씨 |
| 형제자매 | 적형: 순종 서형: 완친왕 서제: 의민황태자[3] 서매: 덕혜옹주 |
| 배우자 | 친왕비: 의친왕비
측실·전측실: 24명[주석 1] |
| 자녀 | 12자 9녀[주석 2] |
| 기타 친인척 | 처부모: 김사준·창원 황씨
외종·사돈: 민영익[주석 3] 이우·이찬의 본생가[주석 4] 사돈: 영혜옹주·금릉위 |
| 종교 | 유교(성리학) → 천주교 |
| 묘소 | 의친왕묘(義親王墓)[주석 5] |
| 웹사이트 | 의친왕기념사업회 - 블로그 - 인스타그램 - 유튜브 - 페이스북 |
| 군사 경력 | |
의화군 이강 | |
| 복무기간 | 1906년 4월 8일 ~ 1910년 8월 29일 1911년 1월 18일 ~ 1930년 6월 12일 |
| 최종계급 | 대한제국 육군 부장 일본제국 육군 중장 |
| 서훈 | 1905년 대한제국 대훈위 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 1912년 일본제국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勳一等 旭日桐花大綬章) 1913년 일본제국 훈1등 한국병합기념장(勳一等 韓國倂合紀念章)[4] 1924년 일본제국 대훈위 국화대수장(大勳位菊花大綬章) |
의친왕(義親王,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은 대한제국의 친왕이다. 부황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 모후는 명성황후, 사친은 귀인 장씨, 친왕비는 의친왕비이다. 독립신문의 독립성명문 보도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망명 시도가 기록으로 전해지나, 본인은 신문조서에서 이를 부정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광복 후에 애국협회 회장에 추대되었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간한 《민족정기의 심판》에 이름이 수록되었다.
개요
[편집]어린 시절 궁중 법도로 인하여 경복궁 밖에서 자랐다. 1895년(고종 32)부터 1905년(고종 42)까지 일본·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국내상황에 한탄하고 매국관료에 분개하였다. 인품·학업·교류 인물·사치·탕진·부채·여색 문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관료에 의해 여러 번 역모에 연루되었다. 고종 의중·일제·매국관료 정치가 얽혀서 1907년(순종 원년) 황태자에 책봉되지 못하였다.
궁가(宮家) 사동궁(寺洞宮)의 종주이나 개인 채무로 인하여 경술국치 전까지 대한제국 정부가 소유자였다. 후일 "스스로 괴로운 심정을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술을 마시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핀잔을 받는 행동을 하고, 경제관념이 없어서 빚을 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을 빼앗긴다."라고 하였다.
1910년 국권피탈 이후 매일신보에 일제로부터 은사공채 83만 원을 받았다고 보도되었다. 1911년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 "양국은 칠에 아교를 넣은 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친필을 게재하였다. 1919년 독립신문에 친필 독립성명문이 보도되었다. 조선민족대동단 제2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상해로 망명을 시도하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서울로 강제 송환되었다. 신문조서에서 "기억에 없는 일이다. 조선민족대동단 제2 독립선언서 서명은 도용되었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46년 애국협회(愛國協會) 회장에 추대되었다. 1947년 사동궁(寺洞宮)이 적산(敵産) 취급을 당한다는 허위사실을 믿고 당시 천수백만 원하는 사동궁을 백오십만 원에 매각하였다. 사동궁을 되찾기 위해 고소하였으나, 사동궁 매각을 권유한 사람들 및 의친왕이 선임한 변호사 등에게 공갈 협박을 받은 이후에 고소를 취소하였다고 한성일보·대한일보 등에 보도되었다.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발간한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심판(審判)》에 이름이 수록되었다. 1950년 6·25 전쟁을 겪었다.
생애
[편집]출생
[편집]의친왕은 1877년(고종 14) 3월 30일 철종의 후궁으로 영혜옹주의 사친되는 숙의 범씨의 제택에서 태어났다. 성은 이(李),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강(堈), 아명은 평길(平吉), 호는 춘암(春菴), 이명(異名·다른 이름)은 이천광(李天光), 세례명은 비오, 궁가(宮家)는 사동궁(寺洞宮)이다. 부황은 고종, 모후는 명성황후, 사친은 귀인 장씨이다.
《덕수장씨족보 갑인보(德水張氏族譜 甲寅譜)》에 따르면 사친 귀인 장씨는 신풍부원군 장유 5대손 장석정(張錫鼎)의 딸이다. 장석정은 1795년(정조 19), 장석정의 처 경주 정씨와 밀양 박씨는 각각 1797년(정조 21)과 1805년(순조 5)에 사망하였다.[주석 6] 생몰년이 비슷한 경주 정씨와 밀양 박씨가 모두 처(妻)로 기록된 이유는 알 수 없다.[5] 그러므로 1838년(헌종 4)에 태어난 귀인 장씨의 친생부모가 될 수 없다. 귀인 장씨는 어릴 적 궁중에 들어왔고 1877년(고종 14) 의친왕을 낳은 후에 명성황후로부터 축출되었다. 1887년(고종 24) 사망하였고 1900년(고종 37) 숙원(淑媛), 1906년(고종 43) 귀인(貴人)으로 증직되었다. 고종으로부터 당호(堂號)는 받지 못하였다. 의친왕은 사친 외가 덕수 장씨와 왕래하였다.[6]
성장
[편집]군(君) 봉작 지연
[편집]1880년(고종 19) 궁중에서 한문을 배우고[7] 유년기에 이종훈, 권동진, 윤치소(친일반민족행위자) 등과 필운 학당에서 수학하였다.[8][주석 7] 일찍이 군(君) 책봉을 받지 못하고 경복궁 밖에서 금릉위 박영효(친일반민족행위자)의 양자 자격으로 양육되었다. 이는 "궁중에서 왕세자(순종) 탄생 후 왕자군이 태어나면 왕세자가 만 10세가 되기 전까지 왕자군이 궁중에 문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법도 때문이었다. 순종이 만 10세가 되는 1884년(고종 22) 명성황후는 의친왕을 군(君)으로 봉하고 궁중을 출입할 수 있도록 추진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신정왕후(고종의 모후)에게 종용하여 명성황후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이 때문에 의친왕은 흥선대원군에 대한 원망이 깊어졌다고 한다. 황현은 의친왕이 오랫동안 군(君)으로 봉작되지 못한 채 사친 귀인 장씨의 집에서 지내면서 시중의 무뢰한과 어울리게 되었고, 이로 인해 어려서부터 행실이 단정하지 못하고 명성과 인망이 없었다고 하였다.[9]
의화군(義和君) 봉작
[편집]1892년(고종 29) 의화군(義和君)으로 봉해졌다. 1893년(고종 30) 인목왕후(선조의 왕비)의 후손 김사준의 딸 김덕수(김숙)와 길례(혼인)를 올렸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의친왕은 후일 자신이 왕위에 오를 것이니, 김사준(처부·妻父)의 집에 많은 손님이 찾아올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그리하여 의친왕을 따르는 수십 명이 길거리를 막고 소란을 피웠고 여흥 민씨의 노복들은 그들을 피하였다."라고 하였다.[10] 이후 이하영(친일반민족행위자)[11]과 서재필[12][주석 8]은 의친왕에게 부덕·사치·탕진·주색(酒色)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1895년(고종 32) 윤치호는 "의친왕은 행동이 조심스럽고 주변 상황에 대해 신경을 쓰는 성품이다."라고 하였으나[13] 후일 인품이 좋지 못하다고 하였다.[14] 부황 고종은 이를 우려하며 의친왕이 보통 사람과 같은 성품이 되기를 원하였다.[15]
1894년(고종 31) 내의원 및 사옹원 제조,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임명되었다.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임명되어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를 축하하고 조선과 지속적으로 우호 관계를 증진할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1895년(고종 32) 이탈리아 움베르토 1세의 조카 아부리(阿夫里·아브루치 공작)를 전송하였다.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되었고 두 달 뒤 의원면직 하였다.[16]
일본 유학
[편집]을미사변 복수 계획 발각
[편집]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발생 당일 의친왕은 고종의 명을 받고 경복궁(景福宮) 밖 동태를 살폈다. 일본 군인들은 영추문(迎秋門)으로, 조선군(朝鮮軍) 훈련대는 건춘문(建春門)과 춘생문(春生門)으로 가는 것을 목격하였고 곧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그날 의친왕은 윤치호에게 참상을 전하였다.
| “ | …(중략)… 오후 1시 의화군이 와서 이렇게 전해 주었다. 그가 궁을 떠난 직후 칼 찬 일군의 일본인이 전하(고종)와 세자(순종)가 거처하던 침소를 공격했다. 그들은 왕후(명성황후)를 찾아다녔다. 그들을 시녀(궁녀) 두세 명을 왕후가 틀림없다고 여겨 아주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들은 세자비(순명효황후)의 머리를 잡아채어 발로 차고 구타하고 질질 끌면서 왕후가 어디 있는지를 말하도록 강요했다. 대답하기를 거부하자 그들은 세자비를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은 군인들 사이로 던져버렸다. 한 일본인이 세자의 머리를 잡아채고 발로 걷어찼다. 그 사이에 100명에 이르는 궁녀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 때 왕후가 나타났다. 일본인 하나가 왕후를 붙잡아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왕후는 자신이 왕후가 아니라 먹을 것을 찾으러 들어왔을 뿐이라고 외쳤다. 자객들이 왕후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걷어찼다. 그러고 나서 암살자들은 그녀를 한 방으로 끌고 가서 홑이불로 그녀를 덮었다. 그러고 나서 왕후인지를 확인하고자 일본인 통역 스즈키(鈴木·영목)가 궁(건청궁)을 가리키면서 한 상궁에게 말하기를 왕후가 “그 방”에 누워있다고 말했다. 그 상궁은 방으로 들어갔고 유혈이 낭자한 광경에 충격을 받아 공포에 질려 달려 나오면서, “오, 왕후께서 승하하셨다!”고 울부짖었다. 이 소리를 들은 암살자들은 달려 들어와 왕후의 시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꽃밭(건청궁 녹산)으로 끌고 갔다. 거기서 그들은 왕후의 시신을 내려놓고 불을 질렀다. …(중략)…[17] | ” |
의친왕은 을미사변으로 흥선대원군이 두려워서 나흘 동안 언더우드와 함께 있었다.[18] 이후 을미사변의 배후에는 운현궁의 흥친왕(친일반민족행위자)과 영선군(친일반민족행위자)이 있다고 추정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검객·일본 낭인·청나라 세력인들을 모아서 복수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일본으로 망명·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게이오 의숙 재학·미국 방문
[편집]1896년(고종 33) 윤치호의 사람 김홍수(金弘秀)가 일본에서 친일파들에 의해 추방 당할 위기에 놓이자 의친왕이 지켜주었다.[19]
| “ | …(중략)… 아버지(윤웅렬)가 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김홍수(金弘秀)를 일본에 보내 조선의 소식을 좀 듣고자 했다. 김이 도쿄에 도착하자 친일 조선인들로부터 감시를 당했는데, 그들은 그를 추방하려고 했단다. 그러나 의화군이 그를 지켜 주었다. 그 젊은 왕자는 속삭이는 목소리가 아니라 당당한 목소리와 자세로 그 무리에게 그들이 김을 어떻게 생각하든 자신은 내 아버지와 김이 11월 28일 사건(춘생문 사건)에서 은인과 같은 일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모든 필요한 것을 김에게 제공해 주면서 그를 도왔다. 그 왕자는 일본에 인질로 잡혀있다. 유길준과 그 일파가 후쿠자와 유키치와 비밀협상을 해 왕자를 일본에 머물게 했다. 왕자는 매우 분노했지만 아무도 그를 일본에서 빠져나오게 도울 수 없다. 신응희(친일반민족행위자)와 이규완(친일반민족행위자)이 도쿄에서 왕자를 동정하고 있는 유일한 두 조선인이다. | ” |
1896년(고종 33) 게이오 의숙을 다녔다. 동경(東京)에서 3,000원의 부채를 졌는데 1895년(고종 32) 총리대신 연봉이 5,000원이었다.[20] 동년 동경(東京)에서 신호(神戶) 근처로 피서를 다녀왔다.[21] 1897년(고종 34) 횡빈(橫濱)에서 미국으로 향했다. 갑신정변 관련자 서광범과 교류하였고[22] 9월 서광범의 장례식에 민영환, 박승봉(친일반민족행위자)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범진(李範晋)을 비롯한 대한제국 공사관 관원은 참석하지 않았다.[23] 1898년(고종 35) 일본을[24] 경유해서 귀국하였다.[25]
박영효의 의화군 옹립 1차 음모 사건
[편집]1898년(고종 38) 금릉위 박영효(친일반민족행위자)·안경수(安駉壽)·김재풍(金在豊)·이충구(李忠求)·이한용(李龍漢)·이종림(李鍾林)·김기황(金基璜)·이조현(李祖鉉) 등은 고종에게 의친왕을 황위에 올리라고 협박하고 허위조서를 반포하려 하였으나 이남희(李南熙)의 밀고로 실패하였다.[26]
| “ | …(중략)… 안경수 등은 고종에게 선위(禪位)를 하라고 협박하면서 허위조서를 반포하려다가 이남희(李南熙)의 밀고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이때 여론이 자자하여 박영효(朴泳孝)가 일본에서 의화군 이강(義和君 李堈)을 추대하려고 하였지만 본국에 손을 쓸 기회가 없으므로 안경수 등을 시켜 선위(禪位)를 음모하게 한 후에, 왕자의 복귀를 구실로 이강을 데리고 나와 시국을 바꾸려고 하고 안경수가 그의 부탁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박영효를 두려워하여 그를 이 옥사에 연루하지 못하고 대충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이때 안경수는 일본공관으로 도주하였고, 이 사건에 박정양(朴定陽)과 민영준(민영휘)(친일반민족행위자)도 관련이 있다는 말이 있었으나 그들은 모두 불문에 부쳤다. | ” |
고종의 의화군 미국 유학 결정
[편집]고종은 의친왕이 일본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첫째, 의친왕이 금릉위 박영효(친일반민족행위자)·유길준·민상호(친일반민족행위자) 등과 교류하는 것을 싫어하였다.[27] 금릉위 박영효와 유길준은 갑신정변 관련자이고 민상호는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을 단행한 정동파 주요 관료였다.
| “ | …(중략)… 일본 외무대신(서덕이랑·西德二郞)이 대한에 주차한 일본 공사에게 훈령 하기를 한국 황족 의화군께서 명치 二十八년(1895·고종 32)부터 본방에 유학 한지 四년이 되었으나 학업의 성취함을 못 봄은 본 대신이 깊이 유감 하기로 본 대신이 동궁 同宮(의화군)을 친히 뵈옵고 말씀 하기를 일찍 본국에서 떠나신 후로 지금 까지 본방과 혹 미국에 유학 하신지 四년이 오래이되 학업이 성취지 못 하니 동궁은 물론 하고 한정(韓廷·한국 조정)을 위하여 개탄 하온즉 장래는 일칭 분려 하여 열심 수업 할 뜻으로 권면 한즉 동궁(의화군)께서 깊이 깨달아 이 다음은 본 대신의 권고 함을 좇아 학업을 격려 하겠으니 청컨대 도우라고 대답 하시기에 …(중략)…[28] | ” |
둘째, 의친왕이 학업을 게을리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셋째, 아직 젊어서 사려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어떤 사고를 일으킬지 헤아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29] 그리하여 고종은 의친왕의 학업·인품·안전·장래를 위해 미국 유학을 결정하였다.[30]
미국 유학
[편집]의왕(義王) 책봉
[편집]1899년(고종 38)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00년(고종 39) 미국 각지를 순행하였고 8월 대한제국 전례가 개편되어서 '의왕(義王)'으로 책봉되었고 금책(金冊)ㆍ금인(金印)ㆍ칠장복(七章服)을 하사 받았다.[31] 칭호는 의왕(義王) 또는 의친왕(義親王)이라 하였다.
박영효의 의친왕 옹립 2차 음모 사건
[편집]금릉위 박영효(친일반민족행위자)·이겸제(친일반민족행위자)·김창한(친일반민족행위자)·이승린(李承麟)·이조현(李祖鉉)·윤석준(尹錫準) 등은 활빈당(活貧黨)을 조직하고 경상도 지역에서 금 50만 원을 모아 일본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의친왕을 황위에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00년(고종 39) 발각되었고[32][33] 박영효 세력은 죽거나 분열되었다. 1907년(고종 46) 이승린·이조현·박영효·김창한·이겸제·윤석준 등은 사면받았다.[34]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 사건
[편집]조택현(趙宅顯)·장호익(張浩翼)·김홍진(金鴻鎭)·권호선(權浩善) 등은 고종과 순종을 폐위하고 의친왕을 옹립하여 새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중략)… 권호선(權浩善)이 논의를 꺼내기를, 『우리나라가 망할 날이 조석(朝夕) 간에 달려 있건만 전혀 막아낼 대책이 없으니 우리가 어찌 편안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마땅히 맹약(盟約)을 정하여 나라를 붙들어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제목을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라고 달았는데, 그 중의 조건은, 첫째, 대황제 폐하(고종)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둘째, 황태자(순종) 전하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셋째, 의친왕(義親王)을 그 자리에 대신 올려 앉힌다는 것이고, 넷째, 국사범(國事犯)들로 정부를 조직한다는 것이고, 다섯째, 이 일을 누설하는 경우에는 서슬 퍼런 칼날을 안긴다는 것입니다. 광무(光武) 4년 월일을 밝힌 아래에 맨 먼저 조택현(趙宅顯)을 쓰고 그 다음에는 장호익(張浩翼)·김홍진(金鴻鎭)·권호선(權浩善)·강용구(姜容九)·방영주(方泳柱)·장인근(張寅根)·이기옥(李基鈺)·권승록(權承祿)·김희선(金羲善)·김형섭(金亨燮)·김교선(金敎先)·김봉석(金鳳錫)·김홍남(金鴻南)·김관현(金寬鉉)을 써서 15인의 이름을 같이 열거하였으며 도장을 찍었습니다. …(중략)….[35]
권호선은 감옥에서 병사하였다. 1904년(고종 43) 평리원 재판 결과 장호익(張浩翼)·조택현(趙宅顯)·김형섭(金亨燮)·김희선(金羲善)·김교선(金敎先)·방영주(方泳柱)·김홍진(金鴻鎭)·김영소(金永韶)는 참형되었다.[36]
로노크 대학교·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재학
[편집]1901년(고종 40) 로노크 대학교에서 수학하면서 김규식을 동창으로 만났다. 6월 김규식, 수행원 등과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 대회에 참여하였다.[37] 로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 재학 중 김란사(金蘭史)와 교류하였다.[38] 하와이·샌프란시스코 등을 돌아다니며 학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학업 부진·실덕 ·염문설·부채 등의 문제가 있었고 뉴욕과 코니아일랜드를 오가면서 미국 은행에 금액을 차용한 뒤 상환하지 못해 피소되었다.
3만 달러 부채
[편집]| “ | 왕자(의친왕)가 부채를 자인함. 한국(韓國) 왕자는 울프 형제상회에 3만 달러의 부채가 있다고 말함. 그의 아버지(고종)가 소송을 통보받음. 원고의 청구금액에 대한 지불 명령을 받을 것임. …(중략)… 한국 왕의 둘째 아들인 의화군(의친왕)은 어젯밤 이 도시의 한국 공사인 조민희(친일반민족행위자)의 초대손님이었음.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울프 형제상회는 왕자에서 3만 달러를 회수하기 위해 약속어음에 대한 지불을 요구하는 법률소송을 토요일 지방 최고재판소에 제기했음. …(중략)…[39] | ” |
기록에 따르면 의친왕은 미국 유학 중 빚을 지다가 대한제국 정부와 사업을 하고 있는 미국회사를 통해 수당을 받았다. 수당은 250달러로 늘어났고 증권에 손을 대게 되었다. 1902년(고종 41) 고종 앞으로 3만 달러 어음이 발급되었고 부채상환 소송을 통보받았다. 의친왕은 울프 형제상회에 3만 달러의 부채가 있다고 하였다.[40]
고종의 의친왕 귀국 만류
[편집]1905년(고종 42) 고종은 의친왕이 일본과 미국에서 학업에 매진하지 않고 품행이 단정치 못한 것을 상당히 우려하였다. 그렇다하더라도 보통 사람과 같은 성품을 갖추기를 원하였다.[41] 다만 귀국 후에 흥친왕(친일반민족행위자), 영선군(친일반민족행위자) 등 운현궁 일가와 어떤 충돌이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만약의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몇 년 더 일본 또는 미국 유학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42] 반면 의친왕은 귀국하고자 하였다. 1월 궁내부로 귀국 희망 전보를 보냈고[43] 2월 동경에 도착하였다.[44] 3월 고종은 의친왕에게 5만 원을 전하며 미국에서 계속 유학하라고 하였다.[45] 의친왕은 다시 미국으로 도미하였다.[46] 8월 다시 일본 동경으로 갔고[47] 10월 신호(神戶)로 향했다.[48] 서모(庶母) 순헌황귀비는 이근상(친일반민족행위자)을 일본으로 보내 의친왕에게 은전 300만 원을 전하며 귀국을 만류하였다.[49] 하지만 의친왕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고자 하는 뜻이 완강하였다.
대한제국 귀국 전 일본 체재
[편집]국내 상황 한탄·매국관료 비난
[편집]1905년(고종 42) 의친왕은 윤치호를 만나서 대한제국의 불행한 상황을 한탄하고 매국노들을 비난하였다.[50]
| “ | …(중략)… 최근 일본에 저항했던 이용익의 태도를 칭찬했다. 의화군은 조선 정부가 파리 공사관에 이용익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전보를 보냈다는 소식을 전했다. 왕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본이 조선의 보호국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서울에 있는 외국 공사관들을 유지하라고 왕실에 전보를 보냈소.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는 여론을 얻기 위해 훌륭한 인사들을 미국과 유럽으로 보내야 하오. 이런 일을 하려면 내게 돈이 있어야 하오. 그러나 폐하는 그 일을 위해 1센트도 주려고 하지 않으신다오. 내 계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는 이렇게 답변했다. “저하께서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지내셨기 때문에 미국의 의중을 아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할 때 올바른 국내의 정부 없이 독립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청일 전쟁부터 최근 러일 전쟁까지 지난 10년 동안 조선은 영국만큼이나 독립적이었습니다. …(중략)… 미국 대통령(시어도어 루스벨트)이 조선이 지금부터 철저한 내정 개혁을 위해 충실히 노력할 것임을 보증하라고 저하께 요구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저하께서는 이를 보증하시겠습니까?” 왕자는 웃으면서 답했다. “아니, 나는 보증할 수 없소.” 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
” |
갑산 구리 광산 계약 관련 기록
[편집]1905년(고종 42) 4월 동경에서 주차일본공사관 참서관 한치유(韓致愈)[51]가 윤치호에게 "의친왕이 갑산 구리 광산 300만 평을 일본인에게 100만 엔에 팔려고 한다."라고 하며 계약서 사본을 보여주었다. 의친왕은 선금 10만 엔을 받았고 잔금 90만 엔은 30만 엔씩 3차례 나눠 받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계약을 파기할 시 의친왕은 100만 엔을 보상해야하며 대한제국 정부와 영업권 소유자 사이의 모든 소송 비용도 지급해야 된다고 하였다. 갑산 구리 광산 300만 평을 매수하기로 한 일본인은 영국 회사에 매각 할 시도를 하였다. 커비(Kirby)가 한치유에게 갑산 구리 광산 매매가 적법한 지 알아보면서 윤치호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52]
| “ | 어젯밤 한치유 씨가 의화군(의친왕)이 체결하려는 양도 계약을 도와주고 있는 일본인 아라이(荒井·황정)가 영국 회사 직원인 야마모토에게 쓴 편지들을 보여줬다. 다음과 같은 고려사항을 토대로 아라이는 야마모토에게 그 거래가 완전히 합법적이고 안전하다는 확신을 주고 있다. 1. 조선 정부나 왕실 모두 의화군의 행동과 권리를 통제하거나 간섭할 수 있는 힘이 조금도 없지만, 의화군은 자신의 뜻에 적합하게 조선의 법을 제정하거나 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의화군이 서명한 그 양도 계약은 조선 정부나 왕실이 어떻게 말하거나 행동하는가에 관계없이 유효하고 합법적일 것이다. 2. 자녀의 빚은 아버지가 책임을 지는 것이 조선의 관습이자 법이다. 그러므로 그 권리를 거저주다시피 했다는 이유로 의화군이 참수된다고 할지라도, 조선의 황제(고종)는 일본인과 외국인이 보유하고 있는 그 계약의 합법성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3. 어떤 일본 과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언급된 그 구리 광산은 동부 전역의 광산 중에서 가장 광물이 풍부한 광산이라고 한다. 몇 년 전 안남 연합체가 그 광산을 사려고 800만 엔을 제안했으나, 일본 정부의 개입으로 거부당했다. 따라서 100만 엔은 이 엄청난 부의 원천이 갖고 있는 가치에 견주면, 완전히 헐값이다. …(중략)…[53] |
” |
한치유(韓致愈)는 윤치호에게 "의친왕은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조민희(친일반민족행위자)[54]에게 제일은행에서 1만 엔을 빌릴 수 있도록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했다. 조민희(친일반민족행위자)는 수락했지만 차후 제일은행에 가서 자신(조민희)을 보증인으로 세우는 것을 거절해달라고 비밀리에 요구했다."라고 하였다.
10월 동경(東京)에서 무희(舞姬)들에게 돈을 탕진하였다.[55] 11월 의친왕은 윤치호에게 "고종에게 금광사업권을 달라고 요청했는데 거절당했다."라고 하였다.[56]
대한제국 귀국
[편집]1906년 행적
[편집]1906년(고종 43) 4월 의친왕이 귀국하였다.[57] 고종은 이근명(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의친왕이 무사히 돌아와 기쁘고 다행스럽다."라고 하였다.[58] 육군 부장(陸軍 副將)에 임용되고 대훈위 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勳章)을 수여받고[59] 홍릉(당시 명성황후의 능)을 다녀왔다.[60] 동년 의친왕은 고문(顧問) 좌등관(佐藤寬·사토히로시)과 함께 6만 원의 빚이 있다고 하였다. 과거 의친왕은 고리대업자에게 2만여 원을 빌렸다. 당시 황성신문 논설 위원 월급이 30원 ~ 40원이었다.[61] 고종은 궁내부를 통해 의친왕에기 돈을 전달하였다.[62] 7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고[63] 흥인지문 밖으로 유람을 다녀오고[64] 유연(遊宴·자연 속을 유람하는 연회)을 다녀오고[65] 사친 귀인 장씨의 묘(墓)를 다녀왔다.[66] 9월 고종의 명을 받고 일본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하였다.[67] 10월 고종에게 순종이 가례를 올리기 전 먼저 황후를 정립하는 것이 예법에 알맞다고 하였다.[68] 이에 대해 황현은 "의친왕이 처지가 위태로워서 순헌황귀비에게 의탁하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69] 12월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가례를 올렸다.
사동궁 소유자 대한제국 정부
[편집]1906년(고종 43) 의친왕의 궁가 사동궁(寺洞宮)이 설립되었다. 당시 사동궁의 주인은 대한제국 정부였다. 사동궁 소유자가 의친왕이 되면 채권자로부터 사동궁을 차압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중략)…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
同宮(의친왕)이 일본 체재 중에 여러 곳에서 거액의 부채를 지게 되어 마침내 우리나라 법정에 제소되기에 이를지도 모를 상태에 있다고 하오. …(중략)… 지금 거주하시는 가옥과 같은 것도 이대로 정부에서 의화궁(義和宮)에게 대여해 두는 편이 좋을 것이오. 왜냐하면 이를 의친왕(義親王)의 명의로 바꾼다면 즉시 채권자로부터 차압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오.민영기(친일반민족행위자):
앞서 의친왕(義親王)이 폐하(고종)를 알현하셨을 때 그 집은 정부 소유로 그는 소위 집을 임대하고 있는 신분이므로 매우 거북한 신세라고 말한 적이 있소. 그 때 나도 때마침 어전에 있었으므로 정부의 집이라고 해서 결코 정부에서 전하가 거주하시는 것을 끌어낼 일은 없으므로 안심하셔도 좋을 것이고, 이에 더하여 고례(古例)에 의거하건대 친왕(親王)의 집은 호조(戶曹)에서 이를 지은 선례도 있다고 변해(辯解)한 적이 있소. 지난날에도 同邸(사동궁)에 비로 새는 곳이 있었는데 전하는 사람을 나에게 보내시어 정부의 집이므로 즉시 정부에서 이를 수선하라고 명령하셨소. …(중략)…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
지난날에도 義和宮(의친왕)에게 500圓(원)의 채권이 있는 일본인이 있어 이곳으로 와서 同宮(의친왕)에게 상환을 청구했지만 빚을 갚지 않으므로 우리 이사청(理事廳)에 제소하여 이사청(理事廳)에서 이를 나에게 품신(稟申)하였소. 그 차용증서라는 것을 보건대 분명히 변제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의화궁(義和宮) 저택(사동궁)을 인도할 것이라는 조건이 기재되어 있었소. …(중략)…[70]
이토히로부미의 의친왕·영선군 옹립 계획설
[편집]1907년(고종 44) 3월 일본에서 돌아온 뒤 대한적십자사 총재에서 해임되었다.[71] 6월 순헌황귀비의 오빠 엄준원(친일반민족행위자)이 고종에게 통감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은 의친왕과 영선군(친일반민족행위자)을 옹립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중략)… 지난달 초순 순헌황귀비의 친오라버니 엄준원(嚴俊源)이 한국 황제를 알현하고 ‘통감은 폐하를 폐하고 의화궁(義和宮·의친왕)과 영선군(李埈鎔) 양 황족을 옹립할 계획이며 일본 정부 당국자도 이미 찬동을 표하여 폐위와 옹립을 불원간 결행할 것이라고 보고했다’는 내용을 상주했다고 합니다. 한국 황제는 이를 듣고 크게 공포심이 일어나 엄준원과 기타 일파 무리에게 그 선후책을 하문했더니, 엄준원의 의견으로서 그 사위인 민원식(친일반민족행위자)이 오랫동안 일본에 유랑하면서 지사(志士)와 교제하였으니 그를 일본에 파견하여 진상을 탐색하게 하고, 통감부 기타의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 궁내제도 조사원을 더하며, 비용을 경성의 호상(豪商)인 김시현(金時鉉)에게 사실을 밝히고 헌금하도록 하라고 답변했습니다. …(중략)… 민원식이 일본을 방문한 유일한 목적은 영선군 이준용이 과연 통감의 추천에 따라 한국 황제가 될 결심을 품고 있는가 여부를 탐지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72]
7월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위에서 물러나 태황제(太皇帝)가 되고 순종이 황위에 올랐다. 동월 의친왕은 일본으로 피서를 떠났다.[73]
대리청정 논란: 순종실록에 나타난 기록
[편집]| “ | 1907년 7월 27일부터 8월 7일까지 의친왕은 형 순종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맡았지만, 8월 7일 일본은 황제의 대리청정이었던 의친왕을 끌어내리고 …(중략)…[74] | ” |
1907년 7월 27일
-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국 외무 대신 하야시 다다스를 접견하다.
- 일본 외무 대신 하야시 다다스에게 훈장을 수여하다.
- 이윤용(친일반민족행위자)이 민태호, 윤택영(친일반민족행위자)을 부원군으로 봉하도록 아뢰다.
- 법률 제2호 보안법을 반포하다.
- 경무청 관제, 지방관 관제를 모두 개정하다.
1907년 7월 28일
1907년 7월 30일
- 성벽 처리 위원회에 대한 것을 공포하다.
1907년 8월 2일
- 조서를 내려 군대를 해산하다.
- 조민희(친일반민족행위자), 김홍락, 정인흥(친일반민족행위자) 등을 가자하도록 하다.
- 이근호(친일반민족행위자), 김윤식 등을 관직에 임명하다.
- 존봉 도감에서 옥책문 제술관 등의 임명에 대하여 아뢰다.
1907년 8월 3일
- 이범구, 김각현 등을 관직에 임명하다.
1907년 8월 5일
1907년 8월 6일
- 이병무(친일반민족행위자), 임선준(친일반민족행위자), 조중응(친일반민족행위자) 등의 관직을 올려주다.
- 장례원 경 신기선이 관례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
- 광업법과 사광 채취법을 모두 개정하다.
- 궁내부 소속 광산을 폐지하다.
1907년 8월 7일
황태자 책봉 실패
[편집]…(중략)… 황제(순종)의 춘추(春秋)가 40이 가까운데도 사자(嗣子·대를 이을 아들)가 없으므로 2명 중(의친왕·영친왕)에서 후사(後嗣)를 결정할 뜻을 의논(議論)한 바 이완용(李完用) 등이 태황제(고종)가 간택(簡擇)할 것을 청하므로 태황제(고종)가 영친왕 은(垠)을 지명하여 황태자(皇太子)로 결정하다. 이는 의친왕 파(義親王派)와 영선군 이준용 파(李埈鎔派)의 음모(陰謀)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완용(친일반민족행위자) 등이 추진한 것이다.[77]
8월 서제(庶弟) 영친왕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고종시대사(高宗時代史)》[주석 9]에 의친왕 파·영선군 파의 음모를 방지하기 위해 매국관료 이완용 등이 추진하여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봉했다고 기록되었다.
의친왕은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의 배후에 흥친왕(친일반민족행위자)과 영선군(친일반민족행위자)이 있다고 추정하고 복수를 계획하다가 흥선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 1898년(고종 35) 및 1900년(고종 37) 안경수(安駉壽)·이한용(李龍漢)·금릉위 박영효(친일반민족행위자)·이겸제(친일반민족행위자)·김창한(친일반민족행위자) 등이 의친왕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다. 1900년(고종 37)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 사건이 발생하였다. 1907년(고종 44)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의 의친왕·영선군 옹립 계획설이 있었다. 이러하듯 의친왕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관료들 및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에 의해 여러 번 역모에 연루되었다.
고종·황현·윤치호·서재필·이하영(친일반민족행위자)·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임권조(하야시 곤스케)·일본 외무대신 등은 의친왕에게 부덕·학업·사치·탕진·부채·여색 문제가 우려된다고 하였다. 의친왕의 사친 귀인 장씨는 1887년(고종 24) 사망하였고 사친 외가는 힘이 되어주지 못하였다. 반면 영친왕은 본성이 총명하고 근면하여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성품이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78] 영친왕의 사친 순헌황귀비는 후궁이지만 황후가 없는 내명부에서 황후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조정은 일제가 깊숙이 내정 간섭을 하고 매국 관료는 일제 편이었다.[79] 영친왕이 황태자에 책봉 된 후 12월 의친왕은 남문 밖 정거장에서 도박하였다.[80]
1908년 행적
[편집]의친왕은 1908년(순종 1) 1월 일본으로 가서 3월에 돌아왔다.[81] 4월 이지용(친일반민족행위자·흥인군의 양손자)의 정자[82], 7월 탑동 승방(僧房)에서 소창하였다.[83] 8월 공립신보에 의친왕과 김성기(의친왕비의 오빠)는 당시 의학생이었던 안상호(安商浩)에게 자선병원(慈善病院) 설립비용 3천 원, 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에 3천 원을 지원했다고 보도되었다.[84] 이후 자선병원이 개원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9월 안암동 정자에서 소창하였다.[85]
이토히로부미 조문 특사 임명 취소
[편집]1909년(순종 3) 9월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 장례식 조문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되었다.[86] 10월 일본은 돌연 조문 특파대사를 민병석(친일반민족행위자)으로 변경하였다. 의친왕은 신용이 없고 인격이 실추되었으며, 이등박문(이토히로부미)이 생전에 특히 싫어한 사람이라는 이유였다.[87]
의병 양성 논란: 신문에 나타난 기록
[편집]| “ | 1909년(순종 3) 10월 의친왕은 경상남도 거창군 정태균(친일반민족행위자)의 집에서 40일 간 머물며 사선대 일대에서 의병을 양성하다가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한양으로 강제 호송되었다.[88] | ” |
1909년(순종 3) 날짜표기 방식 기준은 태양력이지만 양력과 음력을 함께 사용하였다. 1909년(순종 3) 음력 10월은 양력으로 11월 13일 ~ 12월 12일이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양력 10월 ~ 12월까지 의친왕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09년(순종 3) 일본군 수비대가 의병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에 파견되자 정태균은 자신의 집을 임시 막사로 제공하였다.[99] 1935년 '의병을 토벌하는 일본군에게 군량미와 군영을 제공한 공로'로 총독부 표창을 받았다.[100] 당시 도로 및 교통상황으로는 단 시간에 서울과 거창을 여러 번 왕복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1910년 행적
[편집]1월 탑골승방(현 보문사·미타사)에서 소창(消暢·답답한 마음을 풀다)하였다.[101] 4월 두모포와[102] 신흥사[103]에서 소창하고 사냥을 다녀오고[104] 을사오적 이지용(흥인군의 양손자)과 기생들을 데리고 풍류를 즐겼다.[105] 5월 상사동 측실 집에서 창부(唱夫) 김창룡(金昌龍) 등과 밤새 풍류를 즐겼다.[106] 며칠 후 부산항을 유람하고 신흥사에서 소창하였다.[107] 6월 신흥사와[108] 이지용(친일반민족행위자)의 정자에서 소창하였다.[109] 7월 기첩(妓妾) 농주(弄珠)와 신흥사에서 소창하고[110] 통감부 통감 사내정의(데라우치 사마타케)가 주최한 만찬회에 참석하였다.[111] 8월 기첩 김금주(金錦珠)와 신흥사에서 소창하였다.[112] 경술국치 직전 신한민보는 의친왕의 놀음에 대해 보도하였다.[113]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의친왕은 나라가 망해도 친왕으로 대우한다는 바람에 아무 걱정 없이 기생을 데리고 놀러 다닌다.
국권 피탈(일제강점기)
[편집]왕공족 편입
[편집]1910년 국권 피탈 이후 매일신보에 의친왕은 일본 왕공족에 편입되어 공(公) 직위와 은사공채 83만 원을 받았다고 보도되었다.[114] 대한제국 황실 가족·친척·인척 중 흥친왕(친일반민족행위자·고종의 친형) 83만 원, 영선군(친일반민족행위자·흥친왕의 아들) 16만 3,000원, 이지용(친일반민족행위자·흥인군의 양손자) 10만 원, 금릉위 박영효(친일반민족행위자·철종의 부마) 28만 원, 해풍부원군 윤택영(친일반민족행위자·순정효황후의 부친) 50만 4,000원을 받았다. 완순군 이재완(친일반민족행위자·흥완군의 양자), 이재극(친일반민족행위자·고종의 생가 8촌), 민영린(친일반민족행위자·여은부원군 민태호의 양자) 등도 은사공채를 받았다고 보도되었다.[115] 1911년 일제 육군 중장에 임명되었다.[116]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 「양국은 칠에 아교를 넣은 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친필을 게재하였다.[117]

1912년 일제로부터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勳一等 旭日桐花大綬章)을 받았다. 일왕(日王)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자 순종의 명을 받고 장례식에 참석하였다.[118] 1913년 훈1등 한국병합 기념장(勳一等 韓國倂合 紀念章)을 받았다. 1919년 김란사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의친왕의 밀칙을 받았다. 김란사는 북경(北京)으로 건너갔으나 유행병에 감염되어 북경에서 사망하였다.[119] 동년 고종이 붕어하자 상제(喪制)로 슬픔이 극에 달하여 족부에 종기와 혈증이 생겼다.[120]
독립성명문 보도
[편집]一. 일본은 몇몇 매국노 간신과 결탁하여 나의 부황과 모후를 시해하였다. 부모(고종·명성황후)를 잃은 원한을 열국에 호소하기 위함이다.
二. 3월 1일 이래 우리 인민은 모두가 하나 되어 맨손으로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쳤다. 적들은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적수공권의 인민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무장한 우리 인민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피는 식지 않았다. 강건한 민족정신을 가진 우리는 결코 일본에 동화되지 않을 것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기 위함이다.
三. 10년 전 맺어진 합병조약은 무력과 위협을 앞세워 체결된 것이다. 부황께서는 결코 합병조약을 승인한 사실이 없다. 한일합병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이다.
四. 나 역시 한국민의 한 사람이다. 독립된 한국의 일개 서민으로 살망정, 합병된 나라의 황족으로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우리 임시정부가 소재하고 있는 곳에 가 정부의 여러 책임자들과 손잡고 생사를 같이하며 협력하여, 동포들이 겪는 고통의 만분의 일이라도 덜어주고 싶다. 나의 결심은 집안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조국독립과 세계평화를 위한 것이다.[121]
상해 망명 시도
[편집]1919년 3월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은 조선민족대동단(대동단)을 결성하였다. 대동단은 의친왕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한다면 독립운동의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하고 의친왕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대동단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특파원 강석룡(姜錫龍)으로 하여금 대동단과 연락하여 의친왕의 망명 계획을 추진토록 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추진할 때 의친왕과 접촉하는 것은 의친왕비의 동생 김춘기(金春基)가 맡았고 마침내 의친왕도 동의하기에 이르렀다.[123] 10월 대동단 총재 김가진의 상해망명을 단행하였다.[124] 11월 의친왕 일행은 일본 경비들의 감시를 뚫고 미복 차림으로 상해망명을 시도하였다. 9일 의친왕은 "수인당(修仁堂) 김흥인(金興仁)과 간호사 최효신(崔孝信)에게 중대한 비밀서류와 고종이 외국인에게 150만 원을 맡긴 증서가 있으므로 동반해야 된다."라고 하였다. 의친왕은 1911년 혹은 1912년 고종이 "이용익(李容翊)에게 기탁하여 각 은행에 예금한 돈이 상해 덕화은행(德華銀行)에 있을 것이니 찾아서 돈을 받으라."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증서를 건넸다고 하였다.[125] 다만 이는 사전 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김흥인과 최효신의 여행증명서는 준비되지 않았다. 10일 오전 수색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고 이어서 평양에서 안동현으로 향했다. 11일 안동현역에서 상해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었다.[126] 고종의 아들을 상해로 망명하게 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고자 한 대동단(大同團)의 전협(全協) 등과 탈출을 모의하여 대내외적인 화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만주 안동에서 발각되어 서울로 강제 송환되었다.
조선민족대동단 독립선언서
[편집]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2천만 민중의 성충(誠衷)을 의지하여 우리 국가의 독립국됨과 우리 민족의 자유민됨을 천하 만국에 선언하며 또 증언하노라.
근역청구(槿域靑邱·우리나라)는 타인의 식민지가 아니며, 단군의 자손 고려의 민족은 남의 노예가 될 인종이 아닌 것이다. 나라인즉 동방 군자(君子)의 나라요, 민족인즉 선진한 선인(善人)의 민족인 것이다.
험란하여 나아갈 수 없는 운수를 당하여 정치가 오래 되고 삶이 어지러워질 때에, 밖에는 고래같이 삼키는 강한 이웃이 있고, 안에는 나라를 병들게 하는 간사한 도적이 있어, 5천 년의 신성한 역사와 2천만 예의의 민족과 5백 년 내려온 종사의 황족(皇族)이 하루 아침에 인멸되니 조정에는 순국하는 신하가 있고, 초야에는 절개를 지켜 죽는 백성이 있으나, 황천(皇天)이 돌보지 아니하고 국민이 녹(祿)을 받을 복이 없어 황제가 성명(聲明)에 갑자기 폐천(廢遷)당하는 욕을 만나고, 사민(士民)이 거의(擧義)에 문득 발이 섬멸되는 화를 당하니 세상에 범람하는 가혹한 법과 잔학한 대우와 노예로운 사역에 백성이 편안히 살 수가 없게 되었도다.
불평이 울면 법률이 강도와 같이 이를 찍으니 무릇 지아비의 충의의 혼이 잔인한 칼날 아래 소멸된 자가 그 몇 천 몇 만인가. 한을 머금고 고통을 씹으며 섶에 누워 쓴 쓸개를 맛봄이 10개 성상을 겪었더니라.
음(陰)이 극(極)하면 양(陽)이 돌아오고 음양이 조화되어 사물이 이치에 통하는 것이 소멸될 수 없는 것은 하늘의 이치의 좋은 운수이며, 죽음에 처하여 사랑을 바라고, 오래 굽히고 있으면 일어날 것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에 있어서 지극한 감정인 것이니, 세계 개조와 민족 자결의 의논이 천하에 높이 오르고 우리 나라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자유의 소리가 우내(宇內)에 가득 넘치는지라, 드디어 3월 1일에 독립을 선언(3·1 운동)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건설(대한민국 임시의정원)하였도다.
저 미련하여 도덕을 모르는 일본이 시세(時勢)의 추이를 돌보지 아니하고, 다만 표범이나 이리의 야만성을 구사하여 압박과 억제를 크게 마음대로 행하니 백수(白手)의 도중(徒衆)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성읍과 촌락을 불질러 태우니 이것이 인류의 양심으로 감당해 참을 바일까. 우리 민족의 단충(丹衷)과 열혈은 결코 이 비정리적(非正理的)인 압박에 감축될 바가 아니요, 더욱더욱 정의와 인도로써 용감히 나아가고 매진(邁進)할 뿐이로다. 만일 일본이 끝내 과오를 뉘우침이 없다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의하여 최후의 1인까지 최대의 성의와 최대의 노력으로 혈전(血戰)을 불사코자 이에 선언하노라.
대한민국 원년 11월
조선 민족 대표
이강(李堈)·김가진(金嘉鎭)·전협(全協)·양정(楊楨)·이정(李政)·김상열(金商說)·정상무(鄭相武)·백초월(白初月)·최전구(崔銓九)·조형구(趙炯九)·김익하(金益夏)·정설교(鄭卨敎)·이종춘(李種春)·김세응(金世應)·정의남(鄭義南)·나창헌(羅昌憲)·한기동(韓基東)·신도안(申道安)·이신애(李信愛)·한일호(韓逸浩)·박정선(朴貞善)·노홍제(魯弘濟)·이직현(李直鉉)·이내수(李來修)·김병기(金炳起)·이겸용(李謙容)·이설후(李雪吼)·신태련(申泰鍊)·신형철(申瑩徹)·오세덕(吳世德)·정규식(鄭奎植)·김홍진(金宖鎭)·염광록(廉光祿)[127]
11월 28일 조선민족대동단은 이강(李堈·의친왕)과 33인의 민족대표 명의로 제2 독립선언서(조선민족대동단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상해 망명 실패 여론
[편집]1919년 독립신문에 의친왕의 망명 실패 기사가 보도되었다.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128]
윤치호는 의친왕의 상해 망명 시도 자체로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하였다.
| “ | 의친왕이 이 나라를 떠나려고 시도하다가 의주에서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근에 조금 나아졌다면 몰라도, 의친왕은 인격적으로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독립운동의 대의명분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친왕이 선동가들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선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 것이다. | ” |
상해 망명 시도·대동단 독립선언서 서명 부정 기록
[편집]1919년 11월 24일 일제는 의친왕의 상해 망명 시도 실패와 관련하여 기록하였다.
이강 공은 평소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였고, 또 누차 외유(外遊·외국에 나가려고 함) 뜻을 측근에게 누설한 일이 있었다. 이에 불령(不逞)의 무리들은 공을 옹립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게 하면 양반 유생은 물론 조선 내외 인민의 신용을 크게 얻을 수 있음을 보고, 은밀히 공을 유인하여 데려낼 계획이 있었다. 공은 평소 주색을 가까이하고 행동이 자주 상궤를 벗어났으며, 또 즐겨 시정의 잡배들과 왕래하였다. 특히 금년 봄(1919년 3·1운동) 독립 소요의 수괴인 손병희와는 은밀히 회합하여 모의하였고, 손(손병희)이 체포되자 공은 자못 낭패한 기색이 있었다고 한다.
최근 불령의 무리가 공을 유인하여 상해로 달아나려 한다는 풍설이 있으므로, 경기도 제3부는 엄중히 공저(사동궁) 부근을 경계하였다. 그런데 공은 11월 9일 오후 10시경 종자 김삼복을 데리고 은밀히 그 저택을 빠져나가 소재가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경보를 사방에 발하고 극력 수사한 끝에 마침내 11일 오전 11시 30분경 중국 안동 정차장 구내 밖에서 공 및 동행자 정남용을 발견하여 경성으로 보호 연행하였다. 동시에 이재호 외 수명이 경성 초음정에 잠복해 있음을 알고, 12일 미명 초음정 192번지 이관수의 집에서 이재호를 체포하였다. 또 불령자들이 경성 창의문 밖 산복의 민가에 있음을 탐지하여 같은 날 오후 4시 반 동창률, 정운복(친일반민족행위자), 김삼복 3인을 체포하였다. 아울러 동창률의 소지 권총 및 가택을 수색하여 불온문서와 그 원고 및 인쇄기 1대를 발견 압수하였다. 이어 19일에 이르기까지 거괴 전협 이하 공범자 수명을 체포하였다. …(중략)…[129]
1919년 12월 조선민족대동단 신문조서에 의친왕은 상해 망명 시도와 조선민족대동단 선언서(제2 독립선언서)를 부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략)…
위를 읽어 들려주었던 바, 이를 승인하고 자서하다.[130]
의친왕:
북문(北門) 밖의 민가에 도착한 것은 오전 3시경의 일이었는데, 나는 정운복(鄭雲復)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날이 밝았고, 그 사이 전협(全協)등은 무엇인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곳을 출발하여 안동현(安東縣)으로 가 그곳에서 9일 가량 기다렸다가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든가, 상해(上海)로 사람을 보내 내가 상해(上海)에 도착했다는 취지의 전보를 이곳을 향해 띄워 당국의 주의를 다른 방면으로 집중시켜 두고 그 후에 가기로 하는 것이 좋겠다든가, 김가진(金嘉鎭)을 보낼 때에도 배에 태워 보냈다든가, 김가진(金嘉鎭)에게는 李시종이 권하여 3천 원을 주었다든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협(全協)등은 정운복(鄭雲復)과 나를 동행시키지 않도록 하면이라고 하는 것 같았으므로 그들이 없을 때에 나는 정운복(鄭雲復)에게 「꼭 나와 동행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사정이 좋지 않다」고 말했던 것이다.
경장삼랑(境長三郞):
그 민가를 나와 수색(水色) 정거장에서 승차하여 안동현(安東縣)으로 가는 것은 어떠한 이야기가 있어 정한 것인가.
의친왕:
아무리 내가 귀가하려고 하여도 들어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디까지엔가 가서 기회를 보아 돌아가기로 할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정운복(鄭雲復)은 동행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튼 우선 그곳을 나와 안동현(安東縣) 쪽으로 가기로 하였던 것이다. …(중략)…
경장삼랑(境長三郞):
제2회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니 증인에게 이름을 내도록 하라는 교섭이 있었던 일은 없는가.
의친왕:
없었으나, 내 승낙없이 내 이름을 늘어놓은 선언서를 낼 계획을 하는 자가 있다는 것으로, 내가 이곳을 출발하기 전 발표할 계획으로 되어 있던 것을 출발 전에 발표하면 떠들어댈 우려가 있다 하여 내가 출발하기까지 강석룡(姜錫龍·본명 강태동)이 제지했다는 것을 김춘기(金春基·의친왕비의 동생)로부터 들어 안 일이 있다. 그때 나는 자신이 이름을 내는 것을 승낙하지 않은 것이니 그러한 것은 아무리 발표해도 상관없으므로 「내려면 내라고 하라」고 말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그렇게 내 이름을 낸다고 하면 내가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나를 위협할 작정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경장삼랑(境長三郞):
그때 그 선언서의 문의(文意) 및 기안자에 대한 것은 듣지 못했는가.
의친왕:
듣지 못하였다.
(이때 大正 8년 형刑 제4429호의 증거품 령領 제1404호의 3을 보이다)
경장삼랑(境長三郞):
증인은 이 선언서를 본 일이 없는가.
의친왕:
지금 처음 본 것으로, 전에는 본 일이 없다.
증인 이강(李堈)
…(중략)… 그것은 기억에 없는 일이다. 김춘기(金春基)로부터 들은 일이 있는 강석룡(姜錫龍)의 이야기에 제2회 독립선언서인가에 나의 명의를 실었다고 하는 것이기에 나는 「그것은 괘씸하다. 내가 적어도 서명한다고 하면 당당하게 할 것인데 승낙하지 않은 것을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못된 짓이라」고 책했더니 그 후 배부를 중지했다는 것이었으나, 나는 본 일이 없다.[131]
조사관 천엽료(千葉了)가 조선민족대동단 사건에 대해 달리 진술할 말은 없느냐고 하자 의친왕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32]
참으로 일신 상의 일을 말해 불평 같기는 하나, 내가 술을 마시거나 빚을 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핀잔을 받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것도 모두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괴로운 심정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대개는 술 때문에 전후를 기억하지 못하며, 차용금에 관해서는 경제 관념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이익을 빼앗기고 나의 얻는 바가 없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난폭하게도 뒤에 정리를 해 달래고 있다. 물론 경제 상에 관해서는 예산 상 허용되지 않는 것도 안다. 그래도 너무 그 방법이 냉정하여 나로서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쪼록 적당한 보호의 방도를 세워 유쾌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바란다. 나는 어려서 어머니(귀인 장씨)와 헤어져 모후(명성황후)에게 괴로움을 받았고 다음에는 똑같이 서모(순헌황귀비)에게 억압 당했으며, 이어서 지금은 또한 이왕직(李王職) 중의 간사한 놈 때문에 사람이 모르는 고통을 맛보고 있다. 나를 어리석다고 하겠으나 선악의 차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의 불평의 연유 하는 바를 통찰 하여 잘 중재(仲裁)해 주기 바란다. 또 본 건의 처벌에 있어서도 아무쪼록 관대한 처분을 절망(切望·간절히 바람)한다.
조선민족대동단 사건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전협(全協)은 대동단(大同團)의 주동자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복역 7년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27년 사망하였다.[133] 김가진(金嘉鎭)은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 고문을 역임했고 1922년 사망하였다.[134] 의친왕은 대한제국 황족들에게 허용되었던 한반도 내 여행 자유를 박탈당했다.[135] 1920년부터 1925년까지 매일신보, 부산일보 등이 의친왕에 대해 보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0년 홍릉과 유릉을 다녀왔다. 1922년 의민황태자 영왕과 자행황태자비를 조선호텔에 초대하여 오찬회를 주최하였다. 창덕궁 후원에서 열린 원유회(園遊會)에 참석하였고, 조선총독부 관료들과 인천에서 함대를 봤다. 일제 육군 중장(中將) 자격으로 사국지방(四國地方) 육군대연습(陸軍大演習)에 참여하였다.[136] 1924년 일제로부터 대훈위 국화대수장(大勳位 菊花大綬章)을 받았다. 1925년 대정(大正·다이쇼) 일왕(日王) 결혼 25주년 행사 참석 차 동경으로 가서 제국호텔에서 숙박하였고 이후 부산 동래에서 여러 달 지냈다.[137]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서한
[편집]1920년 의친왕이 조선총독부 총독 재등실(齋藤實·사이토 마코토)에게 서한을 보낸 기록이 나타나 있다.
수상 각하
본인은 귀하께서 본인이 중국에 갈 당시 귀하의 경찰에 의해 어떻게 제지되었는지를 알려 드렸던 본인의 앞서의 서한들을 잘 받아보셨는지 모르겠읍니다. 수일 전에 경관들이 본인에게 와서 즉각적으로 동경으로 갈 것을 명령했읍니다. 그들은 또한 본인이 자의에 의해 동경에 간다는 것을 공표하도록 엄명했읍니다. 본인은 이 모든 행동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읍니다.
수상 각하, 본인은 본인의 왕자의 지위를 거부하며 본인의 유일한 희망은 일개의 시민으로서 간주되길 원하면서 여생을 그렇게 보내고 싶다는 것을 이 기회에 폐하(다이쇼(대정·大正))께 알려 드리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고자 합니다.[138]
본인은 한국의 한 왕이며, 그보다 일본의 황족이라는 것을 귀하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귀하의 경찰에 의해서 불량자처럼 취급받았읍니다. 본인은 아직도 귀하의 경관들이 본인에게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동경에 가도록 강요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읍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이 경관들의 행동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본인에게 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의친왕부 어업권
[편집]고종은 의친왕에게 가덕도부터 거제도에 이르는 연안 대구 어업장을 하사하였다. 1906년(고종 43) 의친왕부(義親王府)는 소유하고 있는 어업장을 일본인 향추원태랑(香椎源太郞·카이시 겐타로)에게 20년 간 임대하는 계약을 체결하였다.[139]
- 임대 기간은 20년으로 한다.
- 매년 1만 5,000원을 연 세금으로 하여 매년 3월 30일에 상납 한다.
- 현재 어획량을 평균 계산하면, 대략 8만 원의 가치가 된다.
- 어획량이 증가할 경우, 증가한 수익의 10분의 2를 정액 외에 추가로 상납 한다.
- 매년 의친왕궁에서 파견하여 어획을 조사한다.
- 어구 및 어법을 개선하고 어장을 정리한다.
- 임차인은 어구·어법 및 어장을 개선할 의무를 가지며, 만약 이를 태만히 하여 어획량이 감소할 경우, 이 계약을 무효로 하고 의친왕궁에서 철회하여 타인에게 임대할 수 있다.
- 20년 임대 계약 종료 시, 어장 시설 및 어구는 모두 헌납한다.
- 임차인은 어떠한 이유로든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으며, 단 의친왕궁의 허가를 받을 경우 이 한계에 해당하지 않는다.[140]
1910년 어업법에 의거하여 의친왕부는 72개 어장에 대한 면허를 받았고, 어업령 시행 이후에도 면허의 효력은 존속되었다. 의친왕부의 어장은 향추원태랑(香椎源太郞·카이시 겐타로)이 계속 임차하였다. 1920년 어업권 존속기간이 만료되자 71개 어장의 어업 면허가 갱신되었다. 이로 인하여 어업인 이영재, 옥치기, 이주목, 김종혁, 황치종 등 3,268명이 향추원태랑의 어장 독점을 반대하는 탄원운동을 하였다.[141] 향추원태랑은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71개 어장 중 44개 어장을 의친왕부에 반환하고 27개 어장에 대해 10년 동안 임차하기로 하였다. 향추원태랑은 임차한 어장에서 일본식 대규모 정치어업을 경영하였고, 상당 부분은 한국인에게 높은 임대료를 받고 다시 빌려주었다. 이에 대해 의친왕부 사무관 흑기(黒崎·구로자키)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향추원태랑의 계속적인 어장임차를 보장하기 위하여 의친왕부의 어업 면허를 갱신해 주었다. 1930년 어업권 존속기간이 만료되자 이건(李鍵) 명의로 어업면허를 갱신하였다. 동년 의친왕의 공(公) 직위를 이건(李鍵)이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이건공 가(李鍵公家)에게 부당한 압력을 가하였고, 향추원태랑은 어장을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싼 값에 매수하였다. 이건(李鍵) 측은 조선총독부 주선으로 체결된 불공정 계약의 부당함을 총독에게 제출하였으나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이러하듯 향추원태랑이 대성한 기반은 의친왕부 어장의 정치 어업 경영에서 구축되었다.[142]
한성은행 대주주
[편집]한성은행(漢城銀行) 기록에 따르면 의친왕은 1921년, 1923년, 1925년, 1927년 대주주 중 한 명이었다. 이왕직 장관과 일본인을 제외하고 대주주는 영선군·고희경·민영휘·박정양·이달용, 이완용·이윤용·이항구·한창수 등 절대다수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143]
동의기념비(同義紀念碑)
[편집]동의기념비(同義紀念碑)는 1906년(고종 43)부터 1909년(순종 3)까지, 1910년부터 1914년까지의 의병 명단을 기록한 비석으로 1929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에 세웠다. 비석 전면에는 하청사(河淸祠)를 건립하고 비석을 세우는데 동의한 맹주 참판 최익현(盟主 參判 崔益鉉)을 비롯하여 유림 264명의 이름을 새기고 뒷면에는 비석을 건립한 뜻을 새겼다. 비문(碑文)은 의친왕이 썼다. 하청사(河淸祠)는 1928년 이희봉·권영모 등 유림 34인이 발의하여 일본에 항거한 애국지사 최익현·임병찬·오계업·박재규·박재구 등 5인을 향사하기 위하여 하청사를 건립하였다. 하청사는 1950년 6·25전쟁 때 소실되었고 현재 동의기념비만 남아 있다.[144]
공(公) 직위 사직 청원 통과
[편집]1930년 의친왕은 지병을 이유로 소화(昭和·쇼와) 일왕(日王)에게 은거(공 직위 반환)를 청원하였고, 왕황족회의 결의를 통하여 은거를 허가받았다. 6월 공(公) 직위를 서장자 이건에게 물려주었다. 의친왕은 왕공족 및 공(公)의 의무가 면제되었고 일제 군사령부를 면직하였다.[145] 칭호는 이강 공(李堈 公)에서 '이강 전하(李堈 殿下)'가 되었다.[146]
공(公) 강제 퇴위 논란: 신문에 나타난 기록
[편집]| “ | …(중략)… 일제는 의친왕에게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이강 공(公)'이라는 직위를 박탈하였고 평민으로 강등했으며, 일본 왕공족 전통에 따라 '공'위는 장남 이건이 습공되었고 의친왕의 한반도 내 여행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1930년 6월 12일 결국 일본 큐슈 지역으로 강제 압송되어가게 되고 나중에 도쿄로 옮겨졌다.…(중략)…[147] | ” |
1930년 6월 3일부터 1943년 7월까지 조선신문, 매일신보, 경성일보, 조선일보, 조선총독부 관보, 부산일보가 의친왕에 대해 보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친왕은 왕공족회의로부터 공(公) 은거를 허가받기 직전 1930년 6월 3일 일본 포드 공장을 방문하였다.[148] 8월 동경(東京)에서 귀국하였다.[149] 1931년 서장자 이건의 결혼식으로 동경(東京)을 다녀왔고 별부시(別府市)에서 지내기도 하였다.[150] 1933년 5월 일본에서 서울 영등포역으로 귀국하여[151] 조선호텔에서 머물렀다.[152] 5월[153], 9월 서울로 돌아왔고[154] 백천 온천을 다녀왔다.[155] 1934년 서장녀 이영(李玲)의 결혼식으로 귀국하였다. 5월 동경(東京)으로 가서[156] 6월 서울로 돌 왔고[157] 이어서 부산을 다녀왔다.[158] 1935년[159], 1936년[160], 1940년[161], 1943년[162] 일본을 다녀왔다.
이관구에게 성락원 거주 제공
[편집]1945년 광복 전 독립운동가 이관구(李觀求)에게 별장 성락원(현 서울 성북동 별서)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관구는 사학연구회를 조직하여 학술활동을 하고, 항일투쟁 인물의 행적을 기록한 《의용실기》를 저술하였다.[163]
광복 이후
[편집]이승만·김구 예방
[편집]1945년 10월 의친왕은 이승만에게 "광복을 위한 노력에 감사하고 앞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계속 활동해달라."라고 하였다. 이어서 "자신은 일평민(一平民)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하였다.[164] 12월 경교장에 가서 김구를 20여 분 만나고 돌아갔다고 보도되었다.[165]
임시정부 귀국 당일 의친왕 예방 논란: 신문에 나타난 기록
[편집]| “ | 1945년 …(중략)… 11월 23일 김구와 김규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이 상해 임시정부 각료들과 사동궁에 의친왕을 방문하였다. …(중략)…[166] | ” |
1945년 11월 23일 김구, 김규식, 이시영, 김상덕, 유동열, 엄항섭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은 오후 4시 경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고 곧장 숙소(최창학의 집)로 향하였다. 이때 숙소에 미리 방문한 이승만과 잠시 이야기를 했을 뿐 모든 면회를 사절하였다.[167]
의친왕의 딸 이공(이해경)은 세종대왕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광복 후에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이 찾아온 것을 본 적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이후의 일화로 보인다.[168]
운현궁 양관 제공 논란: 신문에 나타난 기록
[편집]| “ | (의친왕은) 운현궁 양관을 …(중략)… 백범 김구 선생의 숙소로 사용하게끔 배려하였다.[169] | ” |
1945년 11월 임시정부 영접위원회가 구황실재산사무총국과 교섭하였다. 김구의 숙소는 당초 운현궁으로 정했지만 죽첨정 최창학의 집으로 확정되었다.[170] 이외에 당시 운현궁 종주는 이청이었다. 이청의 아버지 이우는 의친왕과 수인당 김흥인 사이에서 태어난 서차자로, 1917년 영선군의 양자로 출계 하였다. 어린 이청의 위로 어머니 박찬주, 양조모 영선군부인 광산 김씨, 양증조모 흥친왕비 여주 이씨가 있었다.
애국협회 활동
[편집]1946년 애국협회(愛國協會)가 결성되었다. 시급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단체였다.[171] 의친왕은 회장에 추대되었다.[172]
한국독립당 활동 논란: 기록의 부재
[편집]| “ | 1947년 3월 ~ 1949년 8월까지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전임고문을 역임하였다.[173] | ” |
한국독립당은 1949년 김구가 암살 당한 후 세력이 약화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때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김의한, 안재홍, 명제세, 유동열 등 한국독립당 주요 인사들이 납북된 뒤 해체되었다. 1980년대 초 조소앙의 종손 조인래가 《한국독립당 당원 명부》를 유품으로 받았다. 당시 함안 조씨 문중 어른이 "자칫 큰 사화(士禍)를 일으킬 수 있으니 절대 열어보지 말라."라고 당부하였다. 2023년 《한국독립당 당원 명부》를 공개하였다.[174]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947년 《한국독립당 당원 명부》에서 의친왕 이강(李堈)이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겸 전임고문을 역임하였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사동궁 매각
[편집]1947년 왕공족(王公族)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해 박응래(朴鷹來), 김선태(金善泰), 최시화(崔時化) 등이 의친왕에게 "사동궁(寺洞宮)이 적산(敵産) 취급을 당한다."라고 하였다. 의친왕은 당시 천수백만 원하는 사동궁을 백오십만 원에 매각하였다.[175] 곧이어 들어온 미군정이 사동궁은 국가 재산이라 매각이 부당하다고 하였으나 대법원은 묵살하였다. 의친왕은 사동궁을 되찾기 위해 고소하였다. 하지만 박응래와 최시화가 결탁하고 의친왕이 선임한 변호사를 내세워서 도리어 의친왕에게 고소를 취소하라고 공갈 협박하였다. 1948년 의친왕은 고소를 취소하였다.[176] 이후 안국동별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민족정기의 심판》
[편집]민족정기(民族正氣)의 심판(審判) 서문
서(序)
6천만의 눈동자가 주시(注視)하고 있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약(活躍)이 점차 활발화하여 가고 있는 이때에 있어 친일파 민족반역자(親日派 民族叛逆者)들의 과거죄악사(過去罪惡史)를 더듬어 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無意味)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책자(小冊子)를 발간(發刊)하게 된 동기(動機)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소책자가 민족정기(民族正氣)를 양양(昻揚)하는 데 있어 또한 매국(賣國)의 무리들의 정기(正體)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면 이에 더한 기쁨이 없으며 앞으로 더욱 세밀(綿密)한 조사(調査)를 진행시켜 2집 3집 계속하여 출판(出刊)하려 한다.
단기(檀紀) 4282年 2月
편집자 일동(編輯者 一同)[177]
왕족급공족(王族及公族)
…(중략)…
이건 공가
李鍵公家
이건 공 : 이강(의친왕) 제1남 대훈위 육군 중좌
李鍵公 : 李堈 第1男 大勳位 陸軍中佐
성자 : 이건 공비 백작 광교진광 가족(송평반 제1녀)
誠 子 : 李鍵公妃 伯爵 廣橋眞光 家族(松平氏 第1女)
…(중략)…
이강 : 고 이태왕(고종 제5남 대훈위
李 堈 : 故 李太王 第5男 大勳位
김 씨 : 이강 비 고 남작[주석 10] 김사준 제1녀
金 氏 : 李堈妃 故 男爵 金思濬 第1女
이우 공가
李鍝公家
이우 공 : 이강 제2남 대훈위 육군 소좌
李鍝公 : 李堈 第2男 大勳位 陸軍少佐
찬주 : 이우 공비 후작 박영효 손(고 박일서 제1녀)
贊 珠 : 李鍝公妃 故 侯爵 朴泳孝 孫(故 朴日緖 第1女)
…(중략)…
이중에서도 고종황제의 매부되는 조정구(趙鼎九)씨는 퇴작할 뿐 아니라 한일합병의 조서와 유고문을 찢어 버리고 자살까지 계획하였으나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중략)…[178]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심판(審判)》을 발간하였다. 제2부 왕족급공족에 의친왕, 의친왕비, 이건(의친왕의 서장자), 마쓰다이라 요시코(의친왕 서자부)이우(의친왕의 서차자·영선군의 양자), 박찬주(박영효의 서손녀·의친왕의 서자부·영선군의 양자부), 이건 및 이우의 자녀들이 수록되었다. 순정효황후(순종의 계후), 의민황태자 영왕, 자행황태자비, 회은황세손, 흥친왕비 여주 이씨(흥친왕의 계비), 영선군부인 광산 김씨(영선군의 계배)도 수록되었다. 1949년 반민자(친일파·반민족 범죄자) 김극일이 체포된 후에[179] 의친왕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로부터 증인 소환장을 받았다고 보도되었다. 후속 보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극일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활동 무산으로 처벌받지 않았다.
측실
[편집]| “ | (윤치호의) 사촌은 의화군에게 첩을 돌려보내라고 진언 했는데 그 첩은 의화군이 가기 몇 달 전 사촌의 아내와 함께 먼저 일본에 가 있었다. | ” |
윤치호의 《영문일기》에 의친왕은 1896년(고종 33) 측실을 두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180]
| “ | …(중략)… 이 왕가 왕족들은 어떠한지 좀 말하고 그만 두자. 이 씨 중에 이강공(李堈公)은 다 아는 일이니까 강론할 필요도 없거니와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지용(흥인군의 양손자), 이재각(은전군의 현손), 이해승(누동궁·전계대원군 봉사손), 이재극(대궁 종주) 등 여러 사람들이 다 남 부럽지 않게 한참 첩 놀이를 잘하였다. …(중략)…[181] | ” |
1924년 7월 천도교 잡지 개벽(開闢)에 세태비평 기사형태로 보도되었다.
- 수화당(修和堂)
성은 등전(藤田·후지타·ふじた), 국적은 일본, 생몰년은 미상이다. 어머니가 동경(東京)에 거주하였다. 1906년(고종 42) 서자 이심세를 낳았다. 1908년(순종 2) 조졸하였다. 1919년까지 사동궁(寺洞宮)에서 지냈고 이후 행적은 미상이다.
- 수관당(修觀堂)
성은 정(鄭), 생년은 미상이다. 어릴 적 궁녀로 선발되어 사동궁(寺洞宮) 나인이 되었다. 1909년(순종 3) 서장자 이건(李鍵)을 낳았다.[182] 1912년 사망하였다. 서장자 이건은 사동궁을 이어받았지만 1955년 일본으로 귀화하였고 1982년 이전에 다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의친왕비가 "내가 친히 기른 사람이고 내 좋은 동무이다."라고 하였다. 묘(墓)는 홍유릉 권역 내 수관당묘(修觀堂墓)이다.
- 수인당(修仁堂)
이름은 김흥인(金興仁), 이명(異名·다른 이름)은 김은현(金隱現)이다. 1884년(고종 21) 한성 동대문 밖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일선(金一善), 어머니는 이 씨(李氏), 오빠는 김영욱(金永旭)이다. 1894년(고종 31) 의화궁(사동궁) 궁녀로 선발되었고 1909년(순종 3) 측실이 되었다.[183] 1912년 서2자 이우(李鍝), 1917년 서5자 이주(李鑄), 1919년 서6자 이곤(李錕)을 낳았다. 1917년 서2자 이우가 영선군 이준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1919년 의친왕이 상해로 망명 시도를 할 때 함께 하였다. 1945년 이우(李鍝)가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하였다. 이곤(李錕)이 의친왕 가(家)를 이었다. 1961년 칠궁(七宮)에서 지내며 의친왕비를 보좌하였다. 1961년 7월 이후 사망하였다.[184] 의친왕비가 "내가 친히 기른 사람이고 내 좋은 동무이다."라고 하였다. 묘(墓)는 홍유릉 권역 내 수인당묘(修仁堂墓)이다.
- 수현당(修賢堂)
이름은 정운석(鄭雲石), 생몰년은 미상이다. 어릴 적 궁중에 들어왔고 시녀상궁이 되었다. 1914년 서3자 이방(李鎊)을 낳았다.
- 조병숙(曺秉淑)
생몰년은 미상이다. 1915년 서4자 이창(李鎗)을 낳았다.
- 수덕당(修德堂)
이름은 이희춘(李喜春), 생몰년은 미상이다. 1918년 서1녀 이영(李玲), 1920년 서2녀 이진(李珍)을 낳았다. 의친왕비가 "내가 친히 기른 사람이고 내 좋은 동무이다."라고 하였다. 재동(현 가회동)에 거주하였고 1950년 이후 사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85]
- 수완당(修完堂)
이름은 김정완(金貞完), 1894년(고종 31)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성환(金聖煥), 어머니는 주세창(朱世昌)이다. 1904년(고종 42) 덕수궁 지밀나인으로 입궁하였고 시녀상궁이 되었다. 1914년 이전 측실이 되었고 1920년 서3녀 이찬(李瓚)을 낳았다. 몰년은 미상이다.
- 수길당(修吉堂)
이름은 박영희(朴英喜), 1891년(고종 28)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영록(朴永祿), 어머니는 강 씨(姜氏)이다. 어릴 적 궁중에 들어왔고 시녀상궁이 되었다. 1920년 서4녀 이숙(李琡)을 낳았다. 몰년은 미상이다.
- 수경당(修慶堂)
이름은 김창희(金昌熙), 생몰년은 미상이다. 어릴 적 궁중에 들어왔고 시녀상궁이 되었다. 1922년 서8자 이현(李鉉)을 낳았다.
- 함개봉(咸開鳳)
생몰년은 미상이다. 1938년 서9자 이갑(李鉀)을 낳았다. 이갑(李鉀)의 아들 이원(李源)은 회은황세손의 명목상 사후양자로 출계하여 황사손(皇嗣孫)이 되었다.
- 김혜수(金蕙洙)
생몰년은 미상이다. 1940년 서6녀 이장(李璋), 1944년 서11자 이환(李鐶), 1950년 서9녀 이민(李玟)을 낳았다.
- 홍정순(洪貞順)
성은 홍(洪), 본관은 남양, 이름은 정순(貞順)이다. 1920년에 태어나 창덕궁 전화교환원이 되었고 1938년에 의친왕을 만났다. 1941년 서10자 이석(李錫), 1944년 서7녀 이용(李瑢), 1947년 서12자 이정(李鉦), 1950년 서8녀 이현(李現)을 낳았다. 1971년 신경성 위암으로 사망하였다.[186]
- 수은당(修恩堂)
이름은 송은점(宋恩点), 생몰년은 미상이다. 간호사로 활동하였다. 1920년 서7자 이광(李鎤)을 낳았다. 1922년 사동궁(寺洞宮)을 떠났다.[187]
- 김금덕(金今德)
1909년(순종 3)에 태어나 경성보육학교를 졸업하였다. 사동궁 보육교사로 활동하던 중 1930년 성락원(현 서울 성북동 별서)에서 서5녀 이공(李玜)을 낳고 사동궁(寺洞宮) 별채에서 지냈다. 1932년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는 의친왕을 찾아가서 대들었다는 이유로 축출되었다. 이후 윤(尹) 씨와 혼인하였다.[188] 1948년 제1대 국회의원 총선거,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의 대전 제1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75년 고려병원에서 사망하였다.[189]
- 기첩(妓妾)
1908년(순종 2) 향란(香蘭)이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09년(순종 3) 이연연(李姸娟)[190], 1910년 김금주(金錦珠)[191]와 농주(弄珠)를 측실로 들였다. 1920년대 강선옥(姜善玉)·오소홍(吳小紅)[192]·장학선(張鶴仙)·이유색(李柳色)·이유앵(李柳鶯)을 측실로 들였다. 이유색과 이유앵은 사촌지간으로 이유앵이 동생이었다. 1910년대 이연연(李姸娟)이 의친왕을 떠났고[193] 후일 이유색(李柳色)과 이유앵(李柳鶯)은 장택상(張澤相)의 측실이 되었다.[194] 강선옥(姜善玉)·오소홍(吳小紅)·장학선(張鶴仙)도 의친왕을 떠났다.[195] 김금주(金錦珠)와 농주(弄珠)의 행적은 미상이다.
사망
[편집]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 동래 포교당(현 법륜사)으로 피난을 떠났다. 정부 지원금이 끊겨서 피죽으로 겨우 연명하였다. 1953년 휴전 협정 이후 안국동별궁으로 돌아왔다. 1955년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세례명은 '비오'이고 병석에서 부통령 장면(세례명 요한)을 대부로 하여 영세하였다.[196] 8월 16일 영양실조 후유증, 스트레스, 화병 등 합병증으로 인해 향년 78세를 일기로 안국동별궁에서 타계하였다.
의친왕묘(義親王墓)
[편집]1955년 처음 의친왕묘(義親王墓)가 조성된 곳은 양주 화양리(현 서울 광진구 화양동)이다. 1965년 의친왕묘는 사친 귀인 덕수 장씨 묘와 함께 서삼릉 경내로 옮겨졌다. 1996년 의친왕묘와 의친왕비묘를 홍릉과 유릉 권역 내로 옮기고 합장하였다. 묘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배치하였다.[197]
가족 관계
[편집]| 출생 | 사망 | ||
|---|---|---|---|
| 친왕 | 의친왕 義親王 |
1877년 3월 30일 (음력 2월 16일) |
1955년 8월 16일 (음력 6월 29일)(78세) |
부모
[편집]| 본관 | 성명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
| 부 |
고종 |
전주 | 희 㷩 |
1852 - 1919 | 문조 文祖 신정왕후 神貞王后 사친 헌의대원왕 獻懿大院王 |
조선 제26대 국왕 대한제국 초대 황제 |
| 모 | 명성황후 明成皇后 |
여흥 | 1851 - 1895 | 여성부원군 민치록 驪城府院君 閔致祿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 韓昌府夫人 韓山 李氏 |
아명: 자영(玆暎)[198] | |
| 사친 | 귀인 장씨 貴人 張氏 |
덕수 | 1838 - 1887 | |||
친왕비
[편집]| 시호 | 본관 | 성명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
| 친왕비 親王妃 |
의친왕비 義親王妃 |
연안 | 김덕수 金德修 김숙 金淑 |
1880 - 1964 | 김사준 金思濬 창원 황씨 昌原 黃氏 |
연원군부인 延原郡夫人 |
측실
[편집]| 당호 | 성명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
| 1 | 수화당 修和堂 |
등전(후지타)씨 藤田氏 (ふじた) |
일본인[199] | ||
| 2 | 수관당 修觀堂 |
정씨 鄭氏 |
? - 1912[200] | 귀비 정씨(貴妃 鄭氏)[201] | |
| 3 | 수인당 修仁堂 |
김흥인 金興仁 |
1884 - ? | 김일선 金一善 이씨 李氏 |
|
| 4 | 수현당 修賢堂 |
정운석 鄭雲石 |
|||
| 5 | 조병숙 曺秉淑 |
||||
| 6 | 수덕당 修德堂 |
이희춘 李喜春 |
|||
| 7 | 수완당 修完堂 |
김정완 金貞完 |
1894 - ? | 김성환 金聖煥 주세창 朱世昌 [202] |
|
| 8 | 수길당 修吉堂 |
박영희 朴英喜 |
1891 - ? | 박영록 朴永祿 강씨 姜氏 [203] |
|
| 9 | 수경당 修慶堂 |
김창희 金昌熙 |
|||
| 10 | 함개봉 咸開鳳 |
||||
| 11 | 김혜수 金蕙洙 |
||||
| 12 | 홍정순 洪貞順 |
1920 - 1971 | |||
| 13 | 김금주 金錦珠 |
1894 - ? | 기생 화가 김능해(金凌海)[204] | ||
| 14 | 농주 弄珠 |
||||
전측실(前側室)
| 당호 | 성명 | 생몰년 | 비고 | |
|---|---|---|---|---|
| 1 | 향란 香蘭 |
|||
| 2 | 이연연 李姸娟 |
|||
| 3 | 강선옥 姜善玉 |
|||
| 4 | 오소홍 吳小紅 |
1892 - ? | ||
| 5 | 장학선 張鶴仙 |
1906 - 1970 |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 소리 예능 보유자 | |
| 6 | 이유색 李柳色 |
1900 - ? | ||
| 7 | 이유앵 李柳鶯 |
1905 - ? | ||
| 8 | 수은당 修恩堂 |
송은점 宋恩点 |
||
| 9 | 김금덕 金今德 |
1909 - 1975 | ||
자녀
[편집]의친왕과 의친왕비 사이에는 친적자녀가 없다. 서5녀 이공(李玜)은 의친왕비에게 입적되었다. 서자녀는 20명(12자 8녀)이다.
| “ | …(중략)… 해청(이광·李鎤)은 이미 죽었으니 그 남은 26인은 남녀를 물론하고 다들 잘 되길 바라는 바이다.[205] | ” |
의친왕비의 친필에는 의친왕의 자녀가 29명으로 기록되어 있다.[206] 1906년(고종 43) 수화당(修和堂) 등전(藤田·후지타·ふじた) 씨가 낳은 이심세를 포함하면 30명이다.
딸
[편집]| 황실명 | 아명 | 항렬명 | 생몰년 | 사친 | 출계 비고 | |
|---|---|---|---|---|---|---|
| 5 | 이공 李玜 |
길상 吉相 |
해경 海瓊 |
1930 - 생존 | 김금덕 | 의친왕비 입적(入籍) |
| 1 | 이영 李玲 |
길순 吉順 |
해완 海琓 |
1918 - 1981 | 수덕당 이희춘 | 계동궁 이기용 |
| 2 | 이진 李珍 |
길운 吉雲 |
해원 海瑗 |
1919 - 2020 | 수덕당 이희춘 | 계동궁 이기용 |
| 3 | 이찬 李瓚 |
길련 吉蓮 |
해춘 海瑃 |
1920 - 2009 | 수완당 김정완 | 계동궁 이기용 |
| 4 | 이숙 李琡 |
길영 吉英 |
해숙 海琡 |
1920 - ? | 수길당 박영희 | 계동궁 이기용 |
| 6 | 이장 李璋 |
희자 禧子 |
1940 - 2015 | 김혜수 | ||
| 7 | 이용 李瑢 |
해란 海蘭 |
1944 - 생존 | 홍정순 | ||
| 8 | 이현 李現 |
해련 海蓮 |
1950 - 생존 | 홍정순 | ||
| 9 | 이민 李玟 |
1950 - 생존 | 김혜수 | |||
아들
[편집]| 황실명 | 아명 | 항렬명 | 생몰년 | 사친 | 출계 비고 | |
|---|---|---|---|---|---|---|
| (1) | 이심세 | 1906 - 1908 | 수화당 등전(후지타)씨 | [207] | ||
| 1 | 이건 李鍵 |
용길 勇吉 |
1909 - 1990 | 수관당 정씨 |
| |
| 2 | 이우 李鍝 |
성길 成吉 |
1912 - 1945 | 수인당 김흥인 | 영선군 | |
| 3 | 이방 李鎊 |
흥길 興吉 |
해진 海鎭 |
1914 - 1951 | 수현당 정운석 | 자식 없음 |
| 4 | 이창 李鎗 |
창길 昌吉 |
해직 海直 |
1915 -? | 조병숙 | 은전군 파 이헌용 |
| 5 | 이주 李鑄 |
수길 壽吉 |
1917 - 1982 | 수인당 김흥인 | 대궁 이인용 | |
| 6 | 이곤 李錕 |
명길 明吉 |
1919 - 1984 | 수인당 김흥인 | 의친왕 가 계승 | |
| 7 | 이광 李鎤 |
형길 亨吉 |
해청 海淸 |
1920 - 1952 | 수은당 송은점 | 계동궁 이기용 |
| 8 | 이현 李鉉 |
경길 敬吉 |
1922 - 1996 | 수경당 김창희 | ||
| 9 | 이갑 李鉀 |
충길 忠吉 |
해룡 海龍 |
1938 - 2014 | 함개봉 | |
| 10 | 이석 李錫 |
영길 英吉 |
해석 海錫 |
1941 - 생존 | 홍정순 | |
| 11 | 이환 李鐶 |
문길 文吉 |
해선 海瑄 |
1944 - 생존 | 김혜수 | |
| 12 | 이정 李鉦 |
정길 定吉 |
해준 海俊 |
1947 - 생존 | 홍정순 | |
손자
[편집]조선은 국왕의 적자 대군은 4대손, 서자 군은 3대손까지 종친이라고 하였다. 1912년에 태어난 덕혜옹주가 옹주 봉작을 받았으므로 적서 구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을 토대로 하여 의친왕의 3대손까지 황손이 된다. 1956년 의친왕비가 쓴 「사동궁 21남매 자녀 명단표」에는 고종 태황제 자손(子孫)만 황족이 되고 그 이외는 친척(親戚)이라고 하였다.
| 출생 | 부모 | 배우자 | 비고 | ||
|---|---|---|---|---|---|
| 1 | 이준 李準 |
1961 | 이곤 李錕 황경생 黃庚生 |
김성자 金成子 |
|
| 2 | 황사손 이원 皇嗣孫 李源 |
1962 | 친부모 이갑 李鉀 이경숙 李慶淑 양부모(명목) 회은황세손 懷隱皇世孫 회은황세손비 懷隱皇世孫妃[208] |
최희정 |
|
친척
[편집]왕실 친·인척
[편집]| 생몰년 | 비고 | ||
|---|---|---|---|
| 종조부 | 철종 哲宗 |
1831 - 1864 | |
| 종조모 | 철인왕후 哲仁王后 |
1837 - 1878 | |
| 서종조모 | 숙의 범씨 淑儀 范氏 |
1838 - 1883 |
|
| 종고모 | 영혜옹주 永惠翁主 |
1858 - 1872 | |
| 종고모부 | 금릉위 박영효 錦陵尉 朴泳孝 |
1861 - 1939 | |
| 백부 | 헌종 憲宗 |
1827 - 1849 | |
| 백모 | 효현왕후 孝顯王后 |
1828 - 1843 | |
| 효정왕후 孝定王后 |
1831 - 1903 | ||
| 서백모 | 경빈 김씨 慶嬪 金氏 |
1832 - 1907 | |
| 외종 | 민영익 閔泳翊 |
1860 - 1914 | |
고종의 본생가
[편집]| 생몰년 | 비고 | ||
|---|---|---|---|
| 백부 | 흥친왕 이희 興親王 李熹 |
1845 - 1912 | |
| 고숙 | 조경호 趙慶鎬 |
1839 - 1914 | |
| 조정구 趙鼎九 |
1860 - 1926 | ||
| 서백부 | 완은군 이재선 完恩君 李載先 |
1842 - 1881 | |
| 종형제 | 영선군 이준 永宣君 李埈 |
1870 - 1912 | |
| 이문용 李鎔 |
1882 - 1901 | ||
| 서종제 | 이관용 李灌鎔 |
1891 - ? | 부친 완은군 |
| 당숙 | 완순군 이재완 完順君 李載完 |
1855 - 1922 | |
| 재종 형제 |
이지용 李址鎔 |
1870 - 1928 | |
| 이달용 李達鎔 |
1883 - ? | ||
| 이기용 李埼鎔 |
1889 - 1961 | ||
의친왕기념사업회
[편집]- 흥친왕 이희(興親王 李熹)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운현궁의 제2대 종주로 부친은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 친형은 문조의 양자로 출계한 고종, 아들은 영선군 이준이다.
- 영선군 이준(永宣君 李埈)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운현궁의 제3대 종주로 조부는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 부친은 흥친왕 이희이다.
- 완순군 이재완(完順君 李載完)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완순군 이재완의 집안은 맹현가(孟峴家)로 양부는 흥완군, 아들은 이달용, 친형은 경창군 파 후손 이재곤이다.
- 이달용(李達鎔)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완순군 이재완의 집안은 맹현가(孟峴家)로 부친은 완순군 이재완이다.
- 의양군 이재각(義陽君 李載覺)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부친은 은전궁(은전군)의 종주 완평군, 아들은 이덕용이다.
- 이덕용(李德鎔)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조부는 은전궁(은전군)의 종주 완평군, 부친은 의양군 이재각이다.
- 창산군 이해창(李海昌)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도정궁의 제15대 종주로 아들은 이덕주이다.
- 이덕주(李德柱)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수록되었다. 도정궁 제16대 종주로 부친은 이해창이다.
- 청풍군 이해승(淸豐君 李海昇)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누동궁의 제4대 종주로 아들은 이택주이다.
- 이택주(李宅柱)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은언궁(은언군)의 제7대 종주로 양조부는 이완용이다. 친부는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의 후손으로 출계한 청풍군 이해승이다.
- 이완용(李完鎔)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은언궁(은언군)의 제5대 종주로 양부는 덕안군, 양손자는 이택주이다.
- 이지용(李址鎔)
을사오적의 일원이다.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양증조부는 흥인군, 양부는 이재긍, 양손자는 이영주이다.
- 이영주(李永柱)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양조부는 이지용이다.
- 이재극(李載克)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대궁의 제10대 종주로 아들은 이인용이다.
- 이인용(李寅鎔)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대궁의 제11대 종주로 부친은 이재극이다.
- 이기용(李埼鎔)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계동궁의 제7대 종주로 조부는 흥녕군, 부친은 완림군이다.
- 이재곤(李載崑)
정미칠적의 일원이다.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선조와 정빈 홍씨의 아들 경창군 파 후손이다. 친형은 흥완군의 양자로 출계한 완순군 이재완, 아들은 이원용, 손자는 이해국이다.
- 이원용(李源鎔)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다. 선조와 정빈 홍씨의 아들 경창군 파 후손으로 부친은 이재곤, 아들은 이해국이다.
- 이해국(李海菊)
친일파 708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수록되었다. 선조와 정빈 홍씨의 아들 경창군 파 후손으로 조부는 이재곤, 부친은 이원용이다.
- 금릉위 박영효(錦陵尉 朴泳孝)
친일파 708인 명단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철종의 부마이다. 손자는 박찬범으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 해풍부원군 윤택영(海豊府院君 尹澤榮)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형은 윤덕영, 딸은 순정효황후, 사위는 순종, 아들은 윤의섭이다. 윤덕영은 경술국적 중 한 명으로 친일파 708인 명단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윤의섭은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의친왕의 독립운동사 규정, 황실 궁중문화 전통 보존, 문화예술 및 학술 후원을 위하여 대한제국 황실 후손들과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모여서 2022년 의친왕기념사업회(義親王記念事業會)를 설립하였다.
의친왕기념사업회 창립총회 겸 <의친왕과 황실독립운동> 전시 개막식에 황실 후손들(사동궁·운현궁·계동궁·맹현가·대궁·누동궁 등), 독립운동가의 후손들(김가진·김규식·김구·안창호 등), 김영란 경운회장(경기여자고등학교 총동창회), 전 문화재청장(현 국가유산청), 국립고궁박물관 관장, 덕수궁(경운궁) 관리소장 등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참석하였다. 명예회장은 의친왕의 다섯째 딸 이해경, 초대 이사장은 의친왕의 장손자[주석 13] 이준이 추대되었다.
의친왕 유물 박물관 전시,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 학술대회, 의친왕 선양사업, 문화예술계 후원을 개최하였다. 의친왕의 궁가 사동궁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매년 흥선대원왕, 의친왕, 덕혜옹주의 기신제향을 봉행하고 있다.[209] 그러나 2025년 세종특별자치시 학술 행사에서 의친왕의 업적을 과장하거나 다른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의친왕의 공적이라고 주장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210]
의친왕이 등장한 작품
[편집]TV 시리즈
[편집]참고 자료
[편집]관련 서적
[편집]- 《나의 아버지 의친왕》(1997년 06월 01일), 이해경 저, 진.
- 《조선의 왕실과 외척》(2003년 04월 27일) 박영규 저, 김영사.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2004년 08월 20일), 이덕일 저, 김영사.
- 《제국의 후예들》(2006년 05월 25일) 정범준 저, 황소자리.
- 《대한제국 황실 비사》(2007년 08월 06일) 곤도 시로스케 지음, 이연숙 옮김, 이마고 펴냄.
- 《의친왕 전하》(2008년 08월 15일), 이효재 저, 의친왕숭모회.
- 《의친왕 이강》(2009년 07월 23일), 박종윤 저, 하이비전.
- 《황제 1,2,3 - 제국의 부활》(2009년 12월 15일) 문영 지음, 평민사 펴냄.
-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기록과 기억》(2022년 10월 14일) 경운박물관·의친왕기념사업회 지음.
같이 보기
[편집]각주
[편집]- ↑ 수은당 송은점·김금덕·이연연·강선옥·오소홍·장학선·이유색·이유앵·향란 등 9명은 의친왕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화당 등전(후지타) 씨·김금주·농주·수길당 박영희(출처: 이해경 《마지막 조선 황실의 추억》 "길영 언니는 수길당의 따님으로 …(중략)… 내가 궁에 들어갈 무렵 길영 언니도 생모를 떠나 궁에서 살고 있었다.")·늦어도 1896년(고종 33)에는 측실이 되었다는 모(某) 씨 등 5명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 ↑ 의친왕비의 친필에 따르면 의친왕의 자녀는 29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화당 등전(후지타) 씨가 낳은 아들을 포함하면 30명이다.
- ↑ 양부는 민승호, 양고모는 명성황후, 생부는 여은부원군 민태호, 동생은 순명효황후, 매부는 순종이다. 의친왕에게 민영익은 모후 명성황후 기준으로 외종형이고 민영익의 본생가 기준으로는 사돈이다.
- ↑ 의친왕의 종고모는 영혜옹주이고 종고모부는 금릉위 박영효(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의친왕의 서차자 이우는 영선군(친일반민족행위자), 서3녀 이찬은 이기용(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출계하였다. 이우와 이찬의 본생가 사동궁을 기준으로 의친왕은 영혜옹주·금릉위 박영효와 사돈이다. 이우의 처조부모이자 서3녀 이찬의 시조부모가 영혜옹주·금릉위 박영효이다.
- ↑ 1912년 사망 한 흥친왕(고종의 친형)의 무덤이 흥친왕묘(興親王墓)였다.(출처: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 1920년 10월 09일 > 故李熹公殿下, 御墓所, 緬奉儀式 順序, 팔일에 김포를 떠나신다,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에서 면례식을 거행함)
- ↑ 장석정(1736 ~ 1795), 경주 정씨(1740 ~ 1797), 밀양 박씨(1745 ~ 1805)
- ↑ 박관우는 자료라고 했을 뿐 명확한 출처를 밝히지 않았다.
- ↑ 미국과의 사적인 교류를 통해 의친왕이 처신을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재필 박사는 의화군의 성적 갈망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ʻʻ주여 감사합니다. 더 이상 의화군의 후손은 없겠군요!ʼʼ
- ↑ 출처: 국사편찬 위원회
1967~1972년, 국판, 14.8×21.0, 각 900쪽, 6책 고종시대사는 1863년 고종 즉위년부터 1910년 일제에 강점될 때까지의 편년체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비변사등록·승정원일기·일성록 등의 연대기와 각 관아 기록, 외교 문서 및 개인 저술 등을 자료로 편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고종실록, 순종실록에 오류가 많아 조선왕조실록을 계승한다는 의도로 편찬된 자료집으로 1967 ~ 1972년에 6책으로 간행되었다. 날짜별로 중요한 사건을 선별하여 기사를 만들고 이를 요약한 제목을 붙였다. 각종 사진 자료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 ↑ 1915년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남작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 ↑ 흥친왕(친일반민족행위자)은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의 적장자이다. 초배 흥친왕비 풍산 홍씨와 사별 이후 흥친왕비 여주 이씨를 계배로 맞이하였다. 1920년 흥친왕비 여주 이씨·의친왕·수인당 김흥인(이우·이주·이곤의 사친)이 경주에 방문하였다.(출처: 의친왕기념사업회 공식블로그 > 2025년 11월 14일 "경주APEC 그리고 의친왕, 최부잣집, 동계정온고택")
- ↑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헌의대원왕)의 둘째 사위이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일제의 조선귀족 남작 수작을 거부하였다.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조정구의 아들 조남승(趙南升)은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딸 조계진(趙季珍)은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과 혼인하였다. 1962년 이회영은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1990년 이규학은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조정구 본인·아들(조남승)·사위(이규학)·사돈(이회영)이 모두 독립운동가이다.
- ↑ 의친왕의 서1자 이건은 일본으로 귀화했다. 서2자 이우, 서3자 이방, 서4자 이창, 서5자 이주는 양자로 출계하였다. 서6자 이곤이 사동궁(의친왕 가)을 이었다. 이곤의 장자 이수는 조졸하였다. 차자 이준이 실질적으로 장자가 되었다.
- ↑ 국가유산청 > 국가유산청 소식지 > 국가유산사랑 "일제강점기 선승 만공월면과 의친왕 이강의 인연"
- ↑ “[광복 70주년] 선친 의친왕 독립운동 행적 찾아나선 황손 이석 씨 "일제가 왜곡한 황실 역사 바로 잡아야"”. 2015년 8월 13일. 2021년 11월 29일에 확인함.
-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 종묘 > 종묘 이야기 > 영녕전 "영녕전 신주 봉안도 신실 16실 신주 의민황태자 의민황태자비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 1913년 04월 12일 "일한병합 기념장의 도착"
- ↑ 《덕수장씨족보 갑인보(德水張氏族譜 甲寅譜)》 548 ~ 550쪽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4권 一一. 保護條約 一∼三 > (27)[宮中·政界 및 한국사회의 동정 보고 件] "궁중에 있어서는 이번에 드디어 義和宮 전하를 귀국시키는 것으로 내정하고 同 전하의 외척 張 某 외 1명이 밀지를 띠고 出迎者로서 지난 13일 일본으로 향하여 출발했다고 한다."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근현대인물자료 > 이강(李堈) "5세에 宮內에서 漢文 修學"
- ↑ 박관우 (2013년 10월 27일). “비운의 황족 의친왕의 파란만장한 생애(3)”. 《BreakNews》. 2020년 9월 15일에 확인함.{{|url=http://m.breaknews.com/291797}}
- ↑ 한국사료총서 >『梅泉野錄』 제5권 > 光武 10년 丙午(1906년) ① > 18. 李堈의 환국
- ↑ 한국사료총서 > 『梅泉野錄』 제1권 > 下(1894년 이전) ④ > 6. 이강의 부인 김씨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4 > 1899년(광무 3·기해) 1월 25일 수요일 화창한 날씨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4 > 1898년(개국 507년·광무 2·무술) 5월 2일(음력 12일)《월요일》 더움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3 > 1895년(조선 개국 504·고종 32·을미) 8월 17일(음력 27일) 토요일 어제처럼 더운 날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5 > 1905년(조선 개국 514·광무 9·을사) 10월 16일 월요일
- ↑ 한국사료총서 > 『梅泉野錄』 제5권 > 隆熙 元年 丁未(1907년) > 2. 英親王 李垠 황태자 책봉
- ↑ 《고종실록》 고종 32년 10월 2일 1/1 기사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3 > 1895년(조선 개국 504·고종 32·을미) > 10월 > 8일(음력 20일) 《화요일》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3 > 1895년(조선 개국 504·고종 32·을미) 10월 9일(음력 21일) 《수요일》
-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3 > 1896년(조선 개국 505·고종 33·병신) > 3월 > 15일 《일요일》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0권 > 一. 本省來機密公信 > (49) [義和宮·朴泳孝 등의 動靜報告]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독립신문(서재필) 1896년 07월 09일 "의화군 젼하 동경셔 신호 근쳐로 피셔 러 가셧다더라"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독립신문(서재필) 1897년 08월 31일 "의화군 뎐하 미국셔"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독립신문(서재필) 1897년 09월 28일 "와싱돈 신문에 셔광범씨 쟝 지낸 일을"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독립신문(서재필) 1898년 05월 16일 "의화군 뎐화셔 미국셔 나 불구에 일본 동경으로 오신다"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독립신문(서재필) 1898년 05월 28일 "근일에 궐와 의화궁에 젼보가"
- ↑ 한국사료총서 > 국역 梅泉野錄 > 『梅泉野錄』 제2권 > 光武 2년 戊戌(1898) ① > 18. 金在豊 등의 유배와 安駉壽의 망명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4 > 1897년(개국 506·광무 1·정유) 8월 17일《목요일》 날씨 변화무쌍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독립신문(서재필) 1899년 03월 07일 > 지셩 권학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사료 고종시대사 21 > 1897년(고종 34) 5월 9일, 5월 25일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0권 > 二. 和文電信往復控 > (225) [日本에서 義和君 召還 件]
- ↑ 고종 37년 경자(1900·광무) 23일(임술·양력 8월 17일) 맑음 2번째 기사
-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15권 > 三. 各領事館電報往來 > (121) [체포된 活貧黨 頭目들의 陳述 內容에 관한 件]
- ↑ 《조선왕조실록》 > 고종 37년 12월 31일 양력 2번째 기사
- ↑ 조선왕조실록 > 고종실록 48권 > 고종 44년 7월 11일 양력 3/3 기사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사료 고종시대사 > 1904년(고종 41) 3월 11일 법부 대신 이지용, 황제 폐위를 모의한 일본 유학생 출신 장호익 등의 공술 내용을 보고함
- ↑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3월 11일 양력 3번째기사 "피고 장호익, 김형섭, 김희선, 김교선, 방영주 등의 공술을 보고하다"
- ↑ 한국사 인물 열전 3(한영우 지음|돌베개|2007) 260쪽
-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 김란사(金蘭史)
-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8권 > 二. 機密本省來 > (1) [義和君의 負債에 관한 건]
- ↑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 근대 전환기 알렌 문서 > 알렌이 조지아에게 델라웨어에 체류 중인 의화군의 재정문제 등에 대해 알리는 건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6권 > 一. 本省往電 一∼四 > (50) 義和宮 유학문제에 관한 건
- ↑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5권 > 九. 本省往機密 一·二 > (14) 義和宮의 진퇴에 관한 한국 황제의 의향 보고의 건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 1905년 01월 24일 > 義親王歸國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 1905년 02월 10일 > 義王到日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역 『梅泉野錄』 제4권 > 光武 9년 乙巳(1905) ① > 27. 의친왕 이강의 미국유학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 1905년 03월 27일 > 親王渡美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05년 08월 31일 > 義王到日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 1905년 10월 18일 > 義王將歸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역 『梅泉野錄』 제4권 > 光武 9년 乙巳(1905) ② > 50. 義親王李堈의 일본 체류
-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5 > 1905년(조선 개국 514·광무 9·을사) > 10월 > 21일
- ↑ 《승정원일기》 고종 41년 갑진(1904, 광무) 28일(정축, 양력 4월 13일) 8번째 기시
-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5 > 1905년(조선 개국 514·광무 9·을사) > 10월 29일 《일요일》
-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5 > 1905년(조선 개국 514·광무 9·을사) > 11월 1일(음력10월5일) 《수요일》 비 오고 쌀쌀함
- ↑ 《승정원일기》 고종 42년 을사(1905, 광무) 14일(정사, 양력 3월 19일) 맑음 3번째 기사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로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일기5 > 1905년(조선 개국 514·광무 9·을사) 10월 16일 수요일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5 > 1905년(조선 개국 514·광무 9·을사) > 11월 2일 《목요일》
- ↑ 고종시대사 > 고종시대사 6집 > 光武 10年 4月 6日 > 日本에 多年間 머물러 있던 義親王 堈이
- ↑ 《승정원일기》 고종 43년 병오(1906, 광무) 3월 13일(경진, 양력 4월 6일) 맑음 13번째 기사
- ↑ 조선왕조실록 > 고종 43년 > 4월 8일 양력 1/1 기사, 4월 9일 양력 1/1 기사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 1906년 04월 16일 > 拜謁洪陵
- ↑ 오마이뉴스 2023년 04월 16일 "매일 신선한 생선 갖다바쳤던 기회주의 처세술의 화신 [김종성의 '히, 스토리']"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統監府文書 6권 > 一. 憲兵隊機密報告 > (483) 義和宮에 관한 件
- ↑ 조선왕조실록 > 고종실록47권, 고종 43년 7월 12일 양력 1/2 기사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06년 07월 10일 > 義王遊覽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06년 07월 14일 > 義王遊宴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만세보 > 1906년 07월 29일 > 義親王拜墓
- ↑ 조선왕조실록 > 고종 43년 9월 2일 양력 1/3 기사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06년 10월 12일 > 義王電達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梅泉野錄』 제5권 > 光武 10년 丙午(1906년) > ③ 35. 李堈의 坤宮冊封 권유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統監府文書 1권 > 六. 韓國施政改善에 관한 協議會 一·二·三 > (8) 한국의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 제8회 會議錄(1906년 07월 12일)
- ↑ 승정원일기 > 고종 44년 정미(1907·광무) 3월 12일 3번째 기사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사료 고종시대사 29 > 1907년(고종 44) 06월 14일 "경시총감, 통감부 설치 후 고종이 내정 간섭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내용 등을 외무성에 보고함"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 1907년 07월 31일 "의친왕 전별"
- ↑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기록》 20쪽
- ↑ 조선왕조실록 > 순종실록 > 1907년 07월 27일 ~ 1907년 08월 07일
- ↑ 한국고전종합DB > 승정원일기 > 고종 44년 정미(1907, 광무 ) 6월 18일(정축, 양력 7월 27일 토요일) 6월 24일(계미, 양력 8월 2일 금요일), 순종 1년 정미(1907, 융희) 6월 25일(갑신, 양력 8월 3일 토요일) ~ 6월 29일(무자, 양력 8월 7일 수요일)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고종시대사 6집 隆熙 元年, 丁未 隆熙 元年 8月 隆熙 元年 8月 7日 "皇帝가 太皇帝를 陪奉하고 重明殿에"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근현대인물자료 > 이은(李垠)
- ↑ 한국사료총서 > 국역 『梅泉野錄』 제5권 > 隆熙 元年 丁未(1907) > 2. 英親王李垠 황태자 책봉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 > 1907년 12월 10일 > 의친왕입성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08년 03월 01일 > 義王陛見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 > 1908년 04월 15일 > 의친왕행계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 > 1908년 07월 14일 > 의친왕소창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공립신보 > 1908년 08월 05일 > 의친왕 삼천원 연금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 > 1908년 09월 13일 > 의친왕소창
- ↑ 승정원일기 > 순종 3년 기유(1909·융희) 9월 16일 2번째 기사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 統監府文書 7권 > 一. 安重根關聯一件書類 (哈爾賓事件書類 一∼六, 伊藤 公遭難事件書類 一~四, 安重根及合邦關係事類 一~三, 하얼빈事件憲兵隊報告一~三) > (81) 일본 파견 特使 변경에 관한 件
- ↑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기록》 19쪽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 1909년 10월 05일 > 親王消暢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 1909년 10월 15일 > 親王觀楓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09년 10월 08일 > 義王臨葬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 1909년 10월 29일 > 義王吊慰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09년 11월 23일 > 義王有欠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09년 11월 28일 > 義王問安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 1909년 11월 30일 > 親王과 皇族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09년 12월 02일 > 親王問安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09년 12월 08일 > 義王陛見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09년 12월 23일 > 義王陛見
- ↑ 디지털거창문화대전 > 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정태균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근현대인물자료 > 정태균(鄭泰均)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 > 1910년 01월 08일 > 의친왕소창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 1910년 04월 22일 > 樂而忘返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 > 1910년 05월 03일 > 의친왕소창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10년 04월 05일 > 義王山獵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 1910년 4월 9일 "親王宴樂", "잘노렸군"
-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정보시스템 > 신한국보 1910년 05월 10일 "의친왕 전하는 일전에 상사동 그 첩의 집에서 창부 김창룡 등을 불러 밤새도록 진탕히 놀았답니다."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10년 05월 20일 > 義王遊歷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10년 06월 04일, 06월 19일 > 義王消暢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10년 06월 08일 > 消暢江亭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10년 07월 15일 > 義王消暢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국한문) > 1910년 07월 26일 "統邸晩餐"
-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정보시스템 > 신한국보 1910년 08월 02일 "의친왕 전하는 기생 금주를 데리고 신흥사에 나가 소창하신다더라."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근대사료DB > 신한민보 "부끄러운 줄 모르는" 1910년 08월 03일 면수 3 단수 6
- ↑ 민족문제연구소 > [오마이뉴스] 2023년 12월 19일 "나라 팔아먹은 임금의 형… 이완용보다 5배 더 받았다"
- ↑ 경향신문 2010년 07월 15일 "한일병합 대가 친일파가 받은 은사금 얼마?"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 1911년 01월 18일 > 李王大將任命
- ↑ 《日本之朝鮮》. 有樂社. 1911.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 1912년 08월 18일 > 사진: 李王殿下의 名代로 御大葬에 參列할 李堈公殿下
- ↑ 공훈전시사료관 >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김란사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 1919년 02월 06일 > 집상, 족부종기와 혈증이 계셔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 관련단체 Ⅱ > Ⅵ. 신한청년당 > 8) 新韓靑年黨의 부흥에 관한 건 "皇子의 복수주의"
- ↑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 독립신문 1919년 11월 20일 "義親王의 親書"
- ↑ 공훈전자사료관 >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 제4권 : 임시정부사 > 제2장 국내외 동포의 지원 활동 445쪽, 446쪽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민족독립운동사 > 3·1 운동이후의 민족운동 1 > Ⅰ. 국내 민족운동(1) > 1. 독립운동단체의 조직과 활동 > 2) 조선민족대동단의 구성원과 활동상의 특징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민족 독립운동사 자료집 > 大同團事件Ⅰ > 李堈公 신문조서(제1회)
- ↑ 중앙일보 2012.01.07 "상해 임정 향하던 의친왕, 안동현서 잡혀 망명 실패"|https://www.joongang.co.kr/article/7082192
- ↑ 공훈전자사료관 > 독립운동사자료집 6 : 삼일운동사자료집 > 제14장 내외 인사들의 독립 정신이 갈수록 분발하다. >의친왕(義親王)의 피체(被逮) 244쪽, 245쪽
- ↑ 서중석 지음 (2006).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역사비평사. 327쪽.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국외 항일운동 자료 : 일본 외무성기록 >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 九 > 李堈公事件. 문서번호 高警第33431號;秘受13691號. "大正八年十一月二十四日 高警第三三四三一號 李堈公事件 李堈公ハ居常心平ナラズ又屢屢外遊ノ意ヲ側近ニ洩セル事アリ而シテ不逞ノ徒ハ公ヲ擁シテ國權恢復運動ニ從ヘハ兩班儒生ハ勿論朝鮮內外ノ人民ノ信用ヲ博スルコト大ナルモノアルヲ見密ニ公ヲ誘出スルノ計畫アリ公ハ平素酒色ニ親ミ行動兎角常軌ヲ逸シ又好ンデ市井ノ雜輩ト往來シ殊ニ今春ノ獨立騷擾ノ首魁孫秉凞トハ密ニ會合謀議シ孫ノ逮捕セラルルヤ公ハ頗ル狼狽ノ色アリシト云フ……"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 大同團事件 Ⅰ > 檢察調書(國漢文) > 李堈 조서
- ↑ 국사편찬위원회. “李堈公 신문조서(제2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25년 5월 17일에 확인함.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 大同團事件Ⅰ > 警務總監部·警察署 調書(國漢文) > 李堈公 신문조서(제1회)
- ↑ 공훈전자사료관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이덕일 외. 《우리역사의 수수께끼3권》. 김영사.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1922년 10월 27일 "오래간만에 육군대연습을 배관하시고저 동경가시는 이강공 전하"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부산일보 1925년 08월 01일 "이강[李堈]공 전하 8월 1일까지 체제(동래)"
- ↑ 공훈전자사료관 > 독립운동사자료집7 : 임시정부사자료집 > 자유 한국 제1권 제3호(1920년 7월호) > 이왕자(李王子)[의친왕] 570쪽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황성신문 > 1906년 08월 29일 "義王府漁基"
- ↑ 거제신문 2024년 07월 15일 "[옛날 신문으로 보는 거제 이야기 5] 의왕부 어업 기지 허가 계약"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1920년 02월 22일 "李堈公殿下 소유 어장문제, 개방케 해 달라는 어민 3천여 명은 이강공저와 총독부에 청원, 암만 그리하더라도 문제는 안된다."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민족독립운동사 > 일제의 식민통치 > IV 일제 식민정책의 분석(3) -사회·경제- > 3. 수산업정책 > 3)일본자본의 침투와 한국인의 저항.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근현대회사조합자료 > 한성은행(漢城銀行)
- ↑ 디지털정읍문화대전 > 동의기념비(同義紀念碑)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조선일보 1930년 06월 17일 "李堈公殿下軍司令部附をも免ぜられた"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조선일보 1930년 06월 14일 "이강공전하 어은거칙허"
- ↑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 28쪽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경성일보 1930년 06월 03일 "李堈公殿下フオード工塲へ御微行"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조선신문 1930년 08월19일 "李堈公殿下今朝御歸城"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1931년 12월 27일 "李鍝公殿下 三十日御歸省 오시는길에 별부들리시어 李堈殿下問候"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경성일보 1933년 5월 01일 "李堈公殿下明一日御入城"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1933년 05월 03일 "李堈殿下 三年만에 御歸城 朝鮮호텔에 御投宿"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경성일보 1933년 05월 02일 "李堈公殿下昨夕御歸城遊ばす"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조선일보 1933년 9월 3일 "李堈殿下, 五日御歸城"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조선일보 1933년 09월 05일 "이강전하 백천온천 어행"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조선신문 1934년 05월 06일 "李堈殿下今夜東上"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경성일보 1934년 6월 15일 "李堈殿下十七日御歸城"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1934년 06월 18일 "李堈殿下 釜山에 御上陸"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조선신문 1935년05월31일 "李堈殿下三日御歸城"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부산일보 1936년 07월 29일 "이강[李堈] 전하 조선으로 돌아와"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부산일보 1940년 04월 03일 "〈동경전화〉이강[李堈]공 전하 ; 7년만에 경성을 출발하여 동경으로 오다"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조선총독부 관보 1943년 07월 15일 제4935호
- ↑ 성북문화원 > 문화유산 > 성북동 별저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자유일보 1945년 10월 28일 "舊韓 義親王 李박사에 메시지"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동아일보 > 1945월 12월 06일 "이강공 임시 정부 내방"
- ↑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 29쪽
- ↑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 > 신조선보 > 1945년 11월 24일 > 臨時政府要人昨日凱旋!!, 九先生以下十五人, 昨日午金浦飛行場에 到着
- ↑ 세종대왕신문 > 2022년 10월 29일 이상주 기자 > 대한제국의 황녀 이해경, “아버지 의친왕은 항일 독립운동가였다!”
- ↑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 29쪽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자유신문 > 1945년 11월 08일 > 金九 주석 숙소 雲峴宮으로 결정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독립신문 > 1946년 10월 04일 "啓蒙과 民生을 主劑 愛國協會新發足"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한성일보 > 1946년 10월 20일 "愛國協會를 結成 ; 李堈(舊義親王)會長을 推戴"
- ↑ 《세종시와 대한황실의 독립운동 기록과 시대의 증언》 29쪽
- ↑ 조선일보 2023년 08월 15일 유석재·노석조 기자 "[단독] 한독당 명부에 이승만·안재홍도… 1947년엔 범우파 뭉쳤다"
- ↑ “사기에 걸린 이강공”. 《한성일보》. 1947년 4월 2일.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일보 1948년 09월 14일 "義親王宮은 어대로, 謀利輩의 私有?國有?, 無慘!建築地로 伐採된 王宮古木"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친일파관련문헌 > 民族正氣의 審判 > 民族正氣의 審判 서문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친일파관련문헌 民族正氣의 審判 > 第2部 > 王族及公族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자료대한민국사 제10권 > 1949년 02월 08일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친일경찰 金克一 체포"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국사료총서 >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3 > 1896년(조선 개국 505·고종 33·병신) 2월 5일 《수요일》 포근하고 맑음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근현대잡지자료 > 개벽 제49호 > 色色形形의 京城 妾魔窟 可驚可憎할 有産級의 行態(필자 觀相者)
- ↑ 한국사료총서 > 국역 『梅泉野錄』 제6권 > 隆熙 3년 己酉(1909년) ④ > 10. 皇孫 誕生
- ↑ 한국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 大同團事件(대동단사건) Ⅰ > 金興仁 訊問調書(第1回)(김흥인 신문조서 제1회) "성명은 김흥인. 연령은 36세. 신분은 상민", "호주 김영욱의 동생. 출생지는 경성부 동대문 밖.", "나는 11세 때 여관女官으로 의화궁義和宮에 들어가 전하를 모셨고, 관계가 된 것은 10년 전부터이다.". 디지털 장서각 > 양공가공족보자료(兩公家公族譜資料) 162/258 "金興仁 明治十七年 八月五日生(陰曆 五月十四日) 父 金一善 母 李氏 身分 平民"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조선일보 1961.08.11 "망각의 옛 황족 이왕가"
- ↑ 이해경 《마지막 조선 황실의 추억》 "어머니는 재동에 있는 수덕당 언니 집으로 갔다."
- ↑ 문화일보 > 수정 2012년 04월 13일 <오랜만입니다>“皇孫 12남 9녀 대부분 비참한 삶… 난 ‘상징적 황실’ 의무감으로 살아”
- ↑ 천지일보 2021.06.18 [문화칼럼] 독립운동가 김응집을 알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1)
- ↑ 한국일보 2011년 04월 28일 "차 한잔의 초대 / 조선왕조 마지막 공주 이해경 씨"{{|url=http://www.koreatimes.com/article/658519}}
- ↑ 이해경 《마지막 조선 황실의 추억》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 > 1909년 08월 22일 > 의친왕 풍류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 > 1910년 06월 30일 > 의친왕 소창
- ↑ 1918년 조선미인보감
-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 국내보도기사 > 1920년대 > 262. 梁大鉉 鄭永源 2명 가정부와 연락하여 군자금모집, 李堈公 애첩 이연연을 협박하고 50원을 강탈(『동아일보』, 1921. 3. 8)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경향신문 1974년 9월 25일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경향신문 1974년 9월 25일
- ↑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장면박사 회고록》 (가톨릭출판사, 1967) 558쪽
-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의친왕묘
- ↑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18 ~ 20쪽
-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 大同團事件 Ⅰ > 警務總監部·警察署 調書(國漢文) > 金春基 신문조서(제2회) "修和堂은 전부터 東京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
- ↑ 디지털 장서각 > 王家忌辰 및(王家忌辰 및) > "李鍵公邸 尊號 鄭氏 陽曆忌辰日 明治四十五年一月十一日"
- ↑ 다음 카페 「우리황실사랑회」 > 2014년 01월 25일 > [의견] 의친왕비 서거 50주년을 추모하며... '二十一男妹子女名單表'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 大同團事件 > 警務總監部·警察署 調書(國漢文) > 金貞完 신문조서, "아버지는 김성환(金聖煥)이고 어머니는 주세창(朱世昌)이다. 신분은 상민이고 11세에 덕수궁 지밀나인으로 입궁했다. 1914년에는 이미 의친왕의 측실이었다."
- ↑ 장서각 기록유산DB - 1916년 7월 7일《가현록(加現錄)》 "朴英喜 開國五百年 十月五日生, 父 薪炭商 朴永祿 開國四百六十四年 四月十八日生, 母 姜氏 開國四百六十七年 七月十二日生"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매일신보 > 1914년 05월 15일 "사진: 기생 錦珠"
- ↑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 > 황실계보 > 의친왕비
-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조선일보 > 1961년 08월 11일 > 망각의 옛 황족 이왕가
-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대한매일신보 > 1908년 03월 10일 "황손 이심세", 1908년 07월 17일 "王子慘景"
- ↑ 의친왕기념사업회 블로그 > 조선왕실 > 대한제국 고종황제 세계문화유산 홍릉 기신제향 매년 1월21일 이준 황손(의친왕가 종손)과 이원 황사손(영친왕가 종손)
- ↑ 의친왕기념사업회 공식 블로그 > [공지] 대한제국 황실후손단체-의친왕기념사업회 소개
- ↑ 박종인 (2025년 5월 12일). “의친왕을 띄우기 위해 독립운동가들 공적을 가로채다니! [박종인 기자의 '흔적']”. 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