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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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강헌대왕
太祖康獻大王
전주 경기전의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 청룡포본
전주 경기전의 조선 태조 이성계 어진 청룡포본
지위
제1대 조선 국왕
재위 1392년 8월 5일-1398년 10월 14일
전임 조선 건국 (고려 공양왕)
후임 정종
섭정 문하정승 조준 (1395.02.01.~1395.08.21.)
재상
고려 국왕
재위 1392년 7월 17일-1393년 3월 9일
즉위식 1392년 7월 28일
전임 공양왕
후임 (고려 왕정 폐지)
권지고려국사
재위 1392년-1398년
전임 공양왕
후임 정종
이름
이성계(李成桂) → 이단(李旦)
별호 자는 중결(仲潔) 또는 군진(君晋)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
묘호 태조(太祖)
존호 지인계운 응천조통 광훈영명 (康獻至仁啓運應天肇通光勳永命)
시호 강헌 성문신무 정의광덕 태상왕 (康獻 聖文神武 正義光德 太上王)
능호 건원릉
신상정보
출생일 1335년 10월 11일(1335-10-11)
출생지 고려 동북면 화령군 영흥 흑석리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금야군 순녕면 흑석리)
사망일 1408년 5월 24일(1408-05-24) (72세)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광연루 별전
매장지 대한민국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왕조 조선의 기 조선
가문 전주 이씨
부친 환조
모친 의혜왕후
배우자 신의왕후
신덕왕후
자녀 총 13명 중
대군(大君) 8명, 공주(公主) 3명, 옹주(翁主) 2명,
"§가족 관계" 참조.
종교 불교유교(성리학) → 불교
군사 경력
복무 고려 군사
복무기간 1356년 ~ 1392년
최종계급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
지휘 고려 삼군도총제부
근무 고려 도평의사사
참전

태조(太祖, 1335년 10월 27일(음력 10월 11일) ~ 1408년 6월 18일(음력 5월 24일)[1])는 고려 말의 무신이며 정치가이자,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재위: 1392년 8월 5일(음력 7월 17일)[2] ~ 1398년 10월 14일(음력 9월 5일)[3])이다. 또한 대한제국추존 황제이다. (姓)은 (李), 본관전주(全州), (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晉), 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이다.

개요[편집]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후4년) 고려 동북면 화령에서 출생하였다.

고려의 장수이며 공민왕우왕 시대에 홍건적왜구토벌에서 영웅적 공로를 쌓아 입지를 다졌다. 1388년(우왕 14년) 철령 이북의 영토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명나라의 요동을 정벌할 것을 우왕으로부터 명을 받았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을 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공양왕으로부터 선위의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을 개국한 후에 '단(旦)'으로 개명하였다.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들과 전제개혁을 단행하였고, 신진세력의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였으며,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조선을 개국하고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묘호는 태조(太祖)이며, 시호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4]이다. 이후 존호가 더해져 대한제국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삭제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5]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퇴위 후 태상왕이 되었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에 안장되었다.

가계[편집]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하여 간도 지방에서 기반을 마련하였고, 몽고군이 쳐들어왔을 때 조씨와 함께 항복하여 다루가치가 되었다. 이후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를 세습하였고,[6] 실록에는 풍속을 바로잡고 개혁을 추진하여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복위 3년(1335년) 음력 10월 11일 동북면 화령에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의 쌍성총관부 만호였다. 어느 날 당시 쌍성총관부 만호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바느질에 사용하는 자)을 꺼내 바쳤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하였고, 13개월 만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성계 또한 어릴 때 꿈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 즉 금척(金尺)을 주면서 "이 금척(金尺)으로 삼한 강토를 헤아려 보아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훗날 장성하여 진안 마이산에 들르게 된 이성계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산의 풍광이 어릴적 꿈 속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나 금척(金尺)을 주었던 곳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주었던 내용과 마이산의 풍광을 읊은 내용이 태조 2년(1393년) '몽금척(夢金尺)'이라는 악장과 '금척무(金尺舞)'라는 춤으로 만들어진다.

[편집]

유년기[편집]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어날 때 부터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로서, 신체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월등하게 뛰어났다고 한다.[7]

어린 시절 고향인 화령에서 살았다. 북방 민족들이 를 구하러 주로 내려왔는데, 흔히 말하길 "이성계와 같이 걸출한 매를 얻고 싶다"라고 하였다.

고려의 무신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여 수많은 전쟁터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궁술과 전장에서의 그의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8] 이성계는 30여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다만 군왕과 군인역에서 은퇴후 자신의 아들인 이방원과의 싸움인 '조사의의 난'에서는 크게 패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성계의 군대가 전장에 나아갈 때는 대라(大螺)를 부는 특유의 의식이 있었는데, 적들이 멀리서 그 소리만 듣고도 바로 이성계가 왔다는걸 알았다고 한다.

원나라와 홍건적 격퇴[편집]

고려 공민왕 5년(1356년) 유인우가 이끄는 고려군이 원의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공민왕은 원나라에 부역하던 조씨와 이씨에게 조상의 죄를 씻을 기회를 준다고 하여 공민왕에 투항하였고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공을 세웠고, 5년 뒤에 이자춘이 죽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년) 음력 10월에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樸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기병이였다. 개인 병력으로만 수많은 전장에서 단련된 수천의 기병을 거느린 이성계의 군사력은 위협적이였다. 이성계는 팔준(八駿)이라 불리는 여덟 마리 애마[9]를 타고 다녔다.

1362년(공민왕 11년) 심양행성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고려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기황후최유를 시켜 원의 군사를 이끌고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최영 등과 함께 이를 막았고, 이 직후 함주를 침공한 여진족 김삼선·김삼개(金三介)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으며, 1370년(공민왕 19년) 평양의 원의 동녕부를 원정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다.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사흘에 걸쳐 도강한 후, 진군하여 요동성을 점령한다.

왜구 격퇴[편집]

고려 충정왕 시기부터 우왕 시기까지 왜구의 침입이 각지에서 빈번하였다. 특히 우왕 시기의 왜구는 규모도 커지고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우왕 6년(1380년) 진포 해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왜구는 육지에 있던 왜구들과 합세하여 큰 세력을 이루게 되니,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의 대규모 군단이 내륙으로 들어와 옥천, 금산, 상주, 선산, 성주, 함양 등을 미친듯이 휘젓고 다니며 노략질하다가 마침내 지리산 운봉에서 진을 치고 북상을 준비하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임명하고, 변안열은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드디어 이성계와 변안열이 출전하게 되었다. 운봉에 도착한 이성계는 운봉을 넘다가 길 오른쪽의 험한 길을 보고 "적이 반드시 이 길로 우리를 갑자기 습격하려 올 것이니, 우리도 이 길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하고는 험한 곳에 들어갔는데, 과연 이성계의 예측대로 왜구가 습격해 왔다.

아지발도는 고려군이 토벌에 나선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힘만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와 그의 의형제 이지란이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에 왜구의 기세는 크게 꺾여져서 물러났다. 당시 이성계는 이지란과 논의해 먼저 이성계가 아지발도의 투구끈을 2차례 활로 쏘아 맞히어 벗긴 뒤, 이후 이지란이 아지발도의 이마를 향해 활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이에 왜구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고려군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져서 왜구의 정예부대가 모두 죽었다. 기록에 따르면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마치 만 마리의 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라고 한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때 이색, 김구용, 권근이 시를 지어 승리를 하례하였다.[10]

신진사대부와 연대[편집]

눈부신 전공에 비해 중앙 정치에서 영향력이 부족했던 이성계는[11] 성리학을 수용하여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정치 권력을 가질 수 없었던 신진사대부와 연대하여 손을 잡게 되었다. 이성계는 정몽주의 능력을 인정해 모든 전쟁터마다 반드시 그를 데려갔고 기록되어 있어서 이성계의 장자방이나 제갈량 같은 역할을 맡았음을 볼 수 있으며, 정몽주를 통해 뒷날 조선 왕조의 설계자로 불리는 정도전이 함주 막사의 그를 수시로 방문하여 그와 정사와 현안을 논했으며, 개국 과정에서 모든 일을 함께 하였다.[12]. 이성계는 정몽주와 정도전을 통해 이색, 우현보, 권근, 성석린, 설장수, 이숭인 등의 인사들과 친분을 형성해 나갔다.[13]또한 친명 세력이자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에 대한 압력과 위협에서 이들을 지켜주고 보호함으로써 신진사대부와 결속력을 다져나가게 되었다. 한편 최영, 조민수와도 깊은 친분 관계를 유지하였고, 최영이 임견미, 염흥방 등의 부패권문세족 세력들을 숙청할 때는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안변책[편집]

1383년 8월, 이성계는 동북면에 침입한 호발도에게 승리한 이후 우왕에게 변경을 편안하게 할 책(安邊之策)을 제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는 새 왕조를 개창한 인물이 개국 이전에 가졌던 정치적견해를 보여 주는 자료이다.[14]

  1. 왜구와의 싸움에 대비해 상시 군사 훈련을 시행할 것
  2. 사적으로 백성을 착취하는 군벌과 호족을 엄단해 군량을 확보할 것
  3. 토지 제도 붕괴로 무너진 군제와 유랑하는 백성을 보호할 것
  4. 유능하고 공정한 인물을 수령으로 선발해 지방을 통치할 것

요동 정벌 반대와 위화도 회군[편집]

1388년(우왕 14년) 2월 명나라철령 이북의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15] 본래는 원나라쌍성총관부가 있던 지역이니, 이제는 원을 계승한 명나라의 땅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했다.[15]

1388년 4월, 최영우왕은 이 기회에 요동을 공격해서 명나라의 야심을 꺾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정벌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

  1. 소(小)로서 대(大)를 거역하는 것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
  2. 농번기인 여름철에 군대를 동원하는 것.
  3. 온 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북쪽으로 원정하러 간 사이 왜구가 그 틈을 노릴 소지가 있는 것.
  4. 곧 여름철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교가 녹아 활이 녹고 군사들은 질병을 앓게 될 것.[15]

이것이 이른바 '4불가론'이다. 현대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성계의 반대를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16] 이러한 견해는 이성계 개인의 뜻이라기보다, 그와 정치적으로 결합한 신진 사대부들을 비롯한 여러 요동 출정 반대 세력의 뜻이기도 했다.[17]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학술도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왕과 최영이 반대하자 이성계는 전열 정비 이후 가을 재출정을 제안했으나[18] 그것을 무시하고 요동 정벌이 단행되었다. 공요군은 병력 5만, 최영이 8도 도통사로 총지휘관이 되고, 이성계는 우군도통사, 조민수는 좌군도통사로 임명되었다.[19]

5월에 고려군은 압록강 어귀의 작은 섬 위화도에 이르렀다. 이후 위화도에서 14일을 체류했다. 장맛비가 계속 내렸으므로 회군을 청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하였다. 여기서 그는 평양부터 위화도까지 19일의 진군 기간을 거쳤고, 이후 위화도에서 14일을 체류한 반면, 정작 회군 때는 개성까지 9일밖에 걸리지 않은 점을 들어 장마와 군량 문제는 구실에 불과하고, 이성계 자신이 권력을 잡기 위한 철저한 계획적인 일이라는 말이 있다.

회군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과의 두 차례의 혈전 끝에 개경을 점령했고, 이후 회군 장수들의 요구였던 최영의 딸인 영비 최씨 폐위의 끝까지 거부한 우왕을 폐위하고, 이후 이색과 조민수에 의해 옹립된 9세의 창왕을 잠시 받들다가, 1년후 조준, 정몽주, 정도전, 심덕부 등과 함께 흥국사에 모여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 손자라는 조작된 논리를 이용해 창왕을 폐위했고 공양왕을 옹립한 이후 전제개혁을 단행했다. 최영을 제거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고 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때 길가의 어린 아이들이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 이(李)를 파자(破字)하면 十八子가 되니 즉 "이씨(李)성을 가진 자가 왕(王)이 된다."라는 동요(참요)를 부르자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따라 불렀고, 그리고 훨씬 이전부터 이씨(李)성을 가진 자가 왕(王)이 된다는 도참이 전해져서 고려 왕실에서는 오얏나무(李)를 심고 베기를 반복하며 이씨(李氏)의 기를 누른다는 의식을 행했다고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실록 등의 조선왕조측의 기록들과 연려실기술 같은 조선 시대의 야사들에서 나온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신흥 무인세력과 신진사대부가 결탁하여 구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자, 조선왕조가 개창되는 단초를 이룬 사건이다. 그의 위화도 회군에는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종 등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내부 반발을 억제할 수 있었다. 개경을 손에 넣은 이성계 일파는 구 세력의 대표 최영을 유배보냈다가 이 해 12월 개경으로 압송해 처형시켰다.

과전법 시행[편집]

포은 정몽주(후에 역성 혁명과 온건 개혁의 방법 차이로 정적이 된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조준, 정도전 등과 함께 전면적인 사전(私田) 개혁에 나섰으며 [20] 특권층의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신흥세력의 기반을 굳게 하였다. 원 간섭기 권문 세족과 불교 사원은 대토지를 점유하고 불법 겸병을 이용해 사전으로 농장을 경영하여 국가 경제를 파괴했다. 고려의 조세 수입을 지탱했던 공전 수조지는 감소하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전제 개혁은 불가피했다.[21]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 때에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었던 신진 사대부도 속속 정계에 복귀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정몽주 등은 회군 이후 정치적 활동이 활발해진 인물 중 하나였다.[22]

하지만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분열과 대립이 발생했다. 이색, 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실을 보존하여 그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고 왕조 교체를 주장했다.

역성혁명파의 유배와 정몽주의 최후[편집]

1392년(공양왕 4년) 정몽주는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하기 위해 황주로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중에 낙마하여 큰 부상을 당하자, 정몽주와 공양왕은 이성계가 없는 틈에 대간을 움직여 역성혁명파의 핵심 인물 정도전, 남은, 조준 등과 그들의 측근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을 탄핵하여 유배를 보냈다. 황주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이성계는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개경으로 향했다. 공양왕 즉위 이후로 고려의 군권은 이성계를 비롯하여 조준과 정도전 등에게 집중되었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군권을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3]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을 불러 정몽주에게 찾아가 자기 자신들과 함께 새로운 왕조를 주창할 것을 권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래서 이방원은 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정몽주를 만나 정자에 둘러 앉아 시조를 한 수 지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 시조가 그 유명한 '하여가'와 '단심가'다. '하여가'는 이방원이 지은 시조로, 내용은 이렇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엵혀진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 같이 얽혀 천년만년 살고지고

라는 시조 한 수를 남겨 같이 새 나라, 왕조를 세우는 데에 같이 이루어 보자는 이방원의 뜻이었고, 그리고 '단심가'는 정몽주가 지은 시조로 내용은 이렇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라는 시조를 내어 정몽주 자신은 자신의 몸이 백번 천번 죽어도 고려의 왕만을 섬긴다는 것이 정몽주의 뜻이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정몽주가 있는 한 역성혁명(새 나라 새 왕조를 세우는 것)을 이룰 수가 없다고 판단이 되자 자신의 수하 조영규와 고여 등을 시켜 밤중에 집에 돌아가는 정몽주을 쫓아가 선죽교에서 제거하였다.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 조정은 다시 이성계 일파가 득세하였다. 정몽주의 측근들인 온건 개혁파들을 대거 축출하여 유배를 보냈고, 정몽주에 의해 탄핵되었던 이성계 일파의 급진개혁파들이 정계에 속속 복직하여 세력을 결집하였다. 이후 나머지 온건개혁파들에 대한 척결이 이루어졌고, 정도전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사실상 역성혁명이 구체화되어 1392년 7월에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왕위에서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한다.

선양 형식으로 조선 개국[편집]

그들은 이를 위해 정비 안씨를 찾아가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옹위를 명령하는 교지를 요청하였고, 정비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공양왕이 비로소 정식으로 폐위되고 이성계가 신하들의 계속된 추대와 간청으로 이성계는 마침내 1392년 7월 17일, 수창궁에 나아가 왕위를 계승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왕건이 개국한 지 475년 만에 제34대 공양왕을 끝으로 하여 멸망하였다.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 조선(朝鮮)이라 고쳤다.[24] 한편 명나라에 책봉을 청하는 사신을 보냈지만 명나라 홍무제는 그를 정식 국왕으로 봉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라는 직책을 내린다.

포용 정책과 고려 구신들의 출사[편집]

태조는 개국 이후에 개국공신 52명에 이어 재위 2년부터 재위 6년까지 모두 22차례에 걸쳐 도합 1,400여명의 개국원종공신을 포상하였고[25][26], 이는 새 왕조의 안정에 크게 공헌했다고 인정받고 있다[27][28].

또한 태조 즉위 교서에서 조선 개국에 반대했다고 지목된 56명 중 사망한 8명을 제외한 48명 중 32명이 태조, 정종, 태종 대에 다시 출사하였다. 개국 이후 태조는 고려 구신들을 원종공신으로 포상하거나 적절한 관직에 임명해 회유했으며, 특히 권근, 하륜 등 이색 문하 온건개혁파는 새로운 왕조에 적응해 다양한 직임에서 각종 문물 정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9]

아래 표는 태조의 즉위 교서에 명시된 개국 반대 세력 56명 중 태조, 정종, 태종 대 다시 출사한 사례를 일부분만 제시한 것이다.

성명 시기 활동 내용
설장수 태조 3년 사역원 제조[30]
강회백 태조 2년 참판승추부사[31]
조호 태조 26년 노비변정도감에 소송[32]
이내 정종 2년 2차 왕자의 난 좌명 공신[33]
김묘 태종 6년 지사간[34]
김첨 태조 6년 친종호군[35]
유향 태종 1년 경기우도 안렴사[36]
이작 태종 14년 대간[37]
안노생 정종 1년 좌 간의[38]
권홍 태종 2년 딸이 태종 후궁으로 간택[39]
유정현 태종 3년 승녕부 윤
안원 태종 1년 우군 동지총제[40]
성석용 태조 6년 개성 유후[41]
정희 미출사 아들 정초가 세종 대 출사

한양 천도와 조선 선포[편집]

새 왕조를 연 태조는 즉위 한 달 만에 수도를 옮길 결심을 했다.[42] 처음에는 나라 이름도 고치지 않고 수도도 그대로 개경으로 할 생각이었으나 이는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고 곧 천도를 결심하여 후보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재위 3년(1394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 천도를 명령했다.[43]

처음 후보지로 지목된 곳은 계룡산이었으나[43] 하륜이 계룡산은 땅이 좁고 토지가 비옥하지 않으며 금강과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를 들어 천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44][43] 계룡산 대신 하륜이 거론한 무악(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 일대)은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정도전의 반대로 중지되었다.[43][44] 다음날, 태조는 왕사 무학, 정도전, 하륜 등과 함께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다.

《연려실기술》에는 한양을 새로운 왕조의 수도로 추천한 것은 승려 무학으로, 삼각산에 이어 목멱산(木覓山)을 거쳐 백악산 아래의 땅(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 도착한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산남산으로 좌우 용호를 삼는 이곳을 궁궐터로 정하고 태조에게 아뢰었다.[43] 무학은 이곳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지만,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이 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과 꼭 같구나.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아가다니, 이럇!"라고 소리 질렀다고 한다. 무학은 노인을 쫓아가 길지를 알려달라고 간청했고, 노인은 "여기서 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면 알 일이다." 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뒤늦게 그 노인의 정체가 도선 대사라는 것을 안 무학은 노인이 사라진 방향으로 절을 올렸다고 한다.[43] 무학은 그대로 태조에게 길지를 보고하였고 정도전 등이 찬성하자, 태조는 그곳으로 도읍지를 정했다. 그곳이 북악산 밑 경복궁 자리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왕조태조실록에는 태조 본인이 한양으로의 천도를 결정한 주체였다고 되어 있다. 새 도읍지 한양이 '조운이 잘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사람들에게 편리하다.'는 이유였다.[43]

고려 수도에 관청마다 2명씩 잔류[편집]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45]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43] 이는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으로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재위 4년(1395년)에는 도성축조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 성을 쌓기 위한 기초측량을 하게 했다.[46] 총책임자는 정도전을 임명했다. 태조 5년(1396년) 쌓기 시작한 한양 성곽은 1년여 만에 완성되었다.[46]

제도 정비와 법전 편찬 등 국가 기틀 수립[편집]

태조는 관제(官制)를 비롯한 국가 전반 시설을 정비하고 조선의 설계자로 불리는 정도전과 좌시중 조준 등으로 하여금 《조선경국전》,《경제육전》 등을 찬집(纂輯)하게 하여 반포하는 등 경국대전체제의 첫발을 뗴었다.[47] 태조 대 정치는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국왕의 권력이 우위에 있으면서 재상들과 논의하여 정책을 시행하는 체제로, 이는 고려 말 7~80여명에 이르는 인원으로 운영하던 도평의사사를 공신들 및 관료들의 합좌 기구로 정리하여, 의정부와 육조 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의 정치 방식이었으며 태조의 왕권은 도평의사사에 직접 국왕의 명령을 하달하는 등 강력한 것이었다.[48] 또한 기존 도평의사사에서 막대한 권한을 가진 채로 국왕과의 정치적 의사 소통 및 권력을 독점한 내재추[49]를 혁파했다.[50][51]

사병 혁파와 왕자의 난 이후 퇴위[편집]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신덕왕후 소생 두 왕자 중 장남 이방번은 고려 공양왕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에[52] 차남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53] 한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신의왕후 소생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불만이 컸다. 태조는 즉위 이후 군권분장정책에 따라 왕자들과 종친을 절제사로 임명하고 군권을 분할했는데,[54] 태조는 정도전을 내세워 이들이 가진 사병을 혁파하고자 했다.[55]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세자를 조종하여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조작된 명분을 내세워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비롯한 관료들과 신덕왕후 소생 왕자들, 공주의 남편 흥안군을 살해하였다.

태조는 이 사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또 이미 실권도 모두 잃어,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방과가 정종으로 즉위하고 아우 방원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00년에는 왕위계승을 두고 넷째 아들인 방간과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대립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였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였다.

태종은 즉위하자 성석린을 보내 태조를 서울로 모셔 왔다. 그러나 이성계는 자신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이고, 자신을 사실상 폐위한 이방원을 매우 증오해 1402년(태종 2년)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활에 화살을 넣고 족족 오는 차사마다 죽였다는 야사가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그곳에서 이성계는 '조사의의 난'을 부추겨 아들 이방원을 쳤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뒤에 태종 이방원의 아내인 '원경왕후 민씨'의 천거로 무학대사가 차사로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는데 오면서도 두 차례에 걸쳐 이방원을 살해할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체념해 이방원을 인정하고 용서했다는 야사가 있다.[56]

1401년 한성부로 돌아온 태조는 태상왕으로 7년을 더 살며 염불삼매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음력 5월 24일에 지병으로 있던 중풍이 악화되어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묘호 및 시호[편집]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로서 묘호태조(太祖), 존시(尊諡)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다.

광무 원년(1898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에 의해 개국시조로서 고황제(高皇帝)로 추존되었다. 동시에 명에서 내린 시호인 '강헌'을 삭제하고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라 하였다.

능원[편집]

태조의 건원릉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建元陵)이다.

생전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곁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아들 태종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터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다. 태종은 부왕이 수시로 찾기 위해 마련한 신덕왕후의 능을 바로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능의 석물과 문인, 무인석은 청계천 광통교 교량의 난간과 받침돌로 훼철해버렸으며,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무덤이 태종에 의해 훼철된 뒤, 태종에게 자신을 선산이 있는 함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태종은 왕조의 개창자이기도 한 아버지의 무덤을 한양과 멀리 떨어진 함흥에 묻는 대신 한양 근교의 양주에 모시고,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무덤을 덮었다고 한다.

가족 관계[편집]

조선의 초대 국왕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출생



1335년 10월 27일(음력 10월 11일)
고려 고려 동북면 화령부 사제

사망 1408년 6월 18일(음력 5월 24일) (72세)
조선 조선 한성부 창덕궁 광연루
태조 고황제
太祖 高皇帝

태조의 직계조상[편집]

 
 
 
 
 
 
 
 
 
 
 
 
 
 
 
 
 
 
목조 이안사
 
 
 
 
 
 
 
익조 이행리
 
 
 
 
 
 
 
 
 
 
 
효공왕후 이씨
 
 
 
 
 
 
 
도조 이춘
 
 
 
 
 
 
 
 
 
 
 
 
 
 
최기열
 
 
 
 
 
 
 
정숙왕후 최씨
 
 
 
 
 
 
 
 
 
 
 
환조 이자춘
 
 
 
 
 
 
 
 
 
 
 
 
 
 
 
 
 
안변부원군 박광
 
 
 
 
 
 
 
 
 
 
 
경순왕후 박씨
 
 
 
 
 
 
 
 
 
 
 
 
 
 
  태조 이성계  
 
 
 
 
 
 
 
 
 
 
 
 
 
 
 
 
 
 
 
 
영흥백 최천보
 
 
 
 
 
 
 
영흥백 최종대
 
 
 
 
 
 
 
 
 
 
 
조선국대부인 김씨
 
 
 
 
 
 
 
영흥부원군 최한기
 
 
 
 
 
 
 
 
 
 
 
 
 
 
조선국대부인 김씨
 
 
 
 
 
 
 
 
 
 
 
의혜왕후 최씨
 
 
 
 
 
 
 
 
 
 
 
 
 
 
 
 
 
조선국대부인 이씨
 
 
 
 
 
 
 
 
 
 
 
 
 


부모[편집]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환조대왕 이자춘 桓祖大王 李子春 전주 1315년 - 1361년   도조대왕 이춘 度祖大王 李椿
  경순왕후 박씨 敬順王后 朴氏
태종 11년(1411년) 추존
 의혜왕후 최씨 懿惠王后 崔氏 영흥  생몰년 미상 영흥부원군 최한기 永興府院君 崔閑奇
조선국대부인 이씨 朝鮮國大夫人 李氏

형제[편집]

작호 이름 생몰년 생모 비고
이복 형 완풍대군 完豊大君 원계 元桂 1330년 - 1388년 한산 이씨 韓山 李氏
영성대군 永城大君 천계 天桂 1333년 - 1392년
이복 누이  이씨 李氏[57]   생몰년 미상 
동복 누나 정화공주 貞和公主  의혜왕후 최씨
이복 동생 의안대군 義安大君  화 和 1348년 - 1408년[58] 정빈 김씨 定嬪 金氏
  정윤 正尹  영 英   ?   - 1394년[59]    미상

왕비[편집]

시호 본관 생몰년 부모 비고
정비 신의고황후 한씨 神懿高皇后 韓氏
    신의왕후 神懿王后
안변 1337년 ~ 1391년     안천부원군 한경 安川府院君 韓卿
삼한국대부인 삭녕 신씨 三韓國大夫人 朔寧 申氏
광무 3년 (1899년) 황후로 추존
계비 신덕고황후 강씨 神德高皇后 康氏
    신덕왕후 神德王后
곡산 1356년 ~ 1396년    상산부원군 강윤성 象山府院君 康允成
 진산부부인 진주 강씨 晉山府夫人 晉州 姜氏
현종 10년(1669년) 복권
광무 3년 (1899년) 황후로 추존

후궁[편집]

작호 본관 이름 생몰년도 비고
  성비 원씨 誠妃 元氏 원주   ?   ~ 1449년
정경궁주 유씨 貞慶宮主 柳氏 고흥  생몰년 미상 태조 7년(1398년) 정경옹주로 책봉[60]
화의옹주 김씨 和義翁主 金氏 미상 칠점선 七點仙[60]   ?   ~ 1428년 태조 7년(1398년) 화의옹주로 책봉[60]
  찬덕 주씨 贊德 周氏   ?   ~ 1436년
  궁인 김씨 宮人 金氏  생몰년 미상
무협아 巫俠兒[61] 기생 출신

왕자[편집]

군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배우자 비고
1 진안대군 鎭安大君 방우 芳雨 1354년 - 1393년 신의왕후 한씨 삼한국대부인 충주 지씨 三韓國大夫人 忠州 池氏
2 정종대왕 定宗大王
영안대군 永安大君
방과 芳果 1357년 - 1419년     정안왕후 김씨 定安王后 金氏 제2대 국왕
3 익안대군 益安大君 방의 芳毅 1360년 - 1404년 삼한국대부인 동주 최씨 三韓國大夫人 東州 崔氏
4 회안대군 懷安大君 방간 芳幹 1364년 - 1421년 삼한국대부인 여흥 민씨 三韓國大夫人 驪興 閔氏
삼한국대부인 밀양 황씨 三韓國大夫人 密陽 黃氏
 금릉부부인 김포 금씨 金陵府夫人 金浦 琴氏
5 태종대왕 太宗大王
정안대군 靖安大君
방원 芳遠 1367년 - 1422년     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 閔氏 제3대 국왕
6 덕안대군 德安大君 방연 芳衍  생몰년 미상     군부인 여흥 민씨 驪興 閔氏[62]
7 무안대군 撫安大君 방번 芳蕃 1381년 - 1398년 신덕왕후 강씨  개성부부인 개성 왕씨 開城府夫人 開城 王氏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망
8 의안대군 宜安大君
  폐세자 廢世子
방석 芳碩 1382년 - 1398년     폐세자빈 현빈 유씨 賢嬪 柳氏[63]
삼한국대부인 부유 심씨 三韓國大夫人 富有 沈氏

왕녀[편집]

작호 이름 생몰년도 생모 배우자 비고
1 경신공주 慶愼公主   ?   ~ 1426년 신의왕후 한씨 상당부원군 上黨府院君 이애 李薆
2 경선공주 慶善公主  생몰년 미상   청원군 靑原君 심종 沈悰
3 경순공주 慶順公主   ?   ~ 1407년 신덕왕후 강씨   흥안군 興安君 이제 李濟[64]
4 의령옹주 義寧翁主   ?   ~ 1466년  찬덕 주씨   계천위 啓川尉 이등 李䔲
5 숙신옹주 淑愼翁主 며치 旀致[65]   ?   ~ 1453년 화의옹주 김씨   당성위 唐城尉 홍해 洪海


대중 문화속에 나타난 태조[편집]

드라마[편집]

연도 방송사 제목 배우
1967년 TBC 이성계 김성원
1976년 MBC 예성강 이대근
1983년 KBS 개국 임동진
1983년 MBC 추동궁 마마 김무생
1996년~1998년 KBS 용의 눈물 김무생
2005년~2006년 MBC 신돈 이진우
2012년 SBS 신의 오재무
2012년~2013년 SBS 대풍수 지진희
2014년 KBS 정도전 유동근
2014년~2015년 JTBC 하녀들 이도경
2015년 SBS 육룡이 나르샤 천호진
2016년 KBS 장영실 김기현
2019년 JTBC 나의 나라 김영철

영화[편집]

연도 제목 배우
1965년 태조 이성계 신영균
2014년 해적 이대연
2015년 순수의 시대 손병호
2016년 봉이 김선달 임종윤

외모[편집]

태조어진.jpg 조선 태조.JPG
즉위 초기의 태조 퇴위 후 노년의 태조

태조 이성계는 조선 왕조의 개창자로서 조선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내내 존숭과 추앙의 대상이었다. 태조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은 다른 국왕들의 어진이 한곳에 봉안되었던 것과 달리, 고향인 함경도 영흥의 준원전(濬源殿) 및 전주의 경기전(慶基殿),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등에 분산되어 소장되었다. 1832년(순조 32년) 도둑이 들어 어진이 훼손되어 여러 개의 모사본이 그려졌는데 1872년(고종 10년) 제작된 전주 경기전에 남은 것만이 전해져왔다. 그후 2006년 5월, 모사본 초상화가 발견되었는데 1832년작으로 영흥 준원전에 봉안한 모사본 초상화이다.[66] 남아 있는 어진을 보면 태조는 검은 수염에 귀가 크고 광대뼈가 도드라진 모습을 하고 있다.

기타[편집]

태조 이성계에 대한 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와 관련한 설화는 『조선왕조실록』과 『대동야승』·『동사강목』·『연려실기술』·『성호사설』·『용비어천가』 등의 자료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회룡사 전설[편집]

1401년(태종 1년) 함흥에 은거한 태조를 모시고자 태종무학대사를 시켜 태조를 회유하여 양주까지 내려오게 했다. 이때 태종은 아버지를 뵙고자 찾아갔지만 태조는 만나주지 않았는데, 이때 태조와 태종이 머물던 곳을 회룡(回龍)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한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1398년(태조 7년)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의 궁성으로 되돌아오던 길에 왕사인 무학대사를 방문했는데, 무학대사1394년, 정도전에게 미움을 받아 이곳 토굴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중 태조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태조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렀고, 이에 절을 짓고는 임금이 환궁한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회룡(回龍)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후자의 전설은 후일 1881년(고종 18년) 구한 말의 승려 우송(友松)이 쓴 '회룡사중창기'(回龍寺重倉記)에도 실려 있다.

이연계와 이원계[편집]

그의 이복 형 이원계조선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부정적이었고, 고려에 충성을 바칠 것을 애써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이원계1388년 죽으면서 아들들에게 자신과는 다르니 숙부를 따를 것을 유언하며 죽었다. 그의 6촌 형 대흥군(大興君) 이연계(李連桂)는 고려말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이연계 역시 사람을 보내 그의 새 왕조 수립을 만류하였으나, 조선 태조는 듣지 않았다. 실망한 이연계는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으로 낙향하였고, 이후 이연계의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여 대흥 이씨로 분관하였다.[67]

최영과의 비교[편집]

이성계는 당시 신흥 무인의 대표이자 신진사대부의 일원이었다. 이성계의 조상은 본래 전주에서 살다가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 지방으로 옮겨가 그 지역의 유력자로 성장했다. 원나라가 그 자리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면서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원나라의 다루가치를 지냈다. 그러나 공민왕쌍성총관부를 공격 할 때 이에 동조, 왕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출정하여 여진족 토벌과 고려군을 지원함으로써 이성계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최영은 권문세족의 후예였다. 이성계와 비교되던 최영은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그 딸은 무진피화 이후 우왕의 왕비가 되었다. 이성계가 신흥 무인 세력의 대표라면 최영은 구 세력의 대표라고 할 수 있었으며, 이성계가 새 시대의 주역들과 결합했다면 최영은 우왕의 파행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68] 태조는 개국 이후 최영을 추시하여 복권하였고[69], 그의 손녀사위 맹사성을 등용했다.[70] 또한 요동정벌 실패 후 최영의 당당한 최후에 뭇 사람들이 감동한 나머지 그의 시체가 버려진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최영의 의연한 죽음은 국왕이 된 이성계와 대조를 이루며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71]

두문불출[편집]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건국에 반대하거나 걸림돌이 될만한 반대 세력들을 숙청하였고 새로운 왕조 개창에 협조하지 않는 고려의 충신들이 벼슬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였다.[72]

이때 두문동의 72현을 비롯하여 고려의 유신들은 낙향하거나 산으로 숨어버린다. 두문동(경기도 개풍군)에 모여 있던 고려의 옛 신하들이 마을에 불을 질렀는데도 한 사람도 나오지 않고 모두 타죽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새 왕조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로 심했는가를 알게 해주는 일화이기도 했다.[72]

태조는 즉위 초,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나라 이름을 그대로 고려라고 했으며, 모든 법제를 고려의 예에 따르게 했다.[72] 권근, 하륜, 심덕부, 설장수 등은 그의 요청에 협력하여 새 조정에 참여하였지만[73] 신진사대부의 스승격인 이색 역시 조선 조정 참여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색은 한양의 왕궁에 온 뒤에도 그를 임금이라 하지 않고 '그대, 송헌'이라 불러서 남은, 정도전, 조준 등이 반발하기도 했다. 개국공신인 남은의 숙부 남을진 역시 태조의 협력 요청을 거부하고 은둔 생활을 한다.[74][75]

함흥차사[편집]

태종은 자주 차사(差使)를 함흥으로 보내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불화를 풀고 태조를 환궁시켜 옥새를 얻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족족 활을 쏘아 맞추어 죽였고, 그로 말미암아 보낸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평가[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고려말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이성계는 100여차례의 전투를 벌이며 적들을 격파해 백성과 고려를 구하며 조정과 민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었다.[76] 고려말 전설적인 전쟁 영웅이었던 이성계를 중심으로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급진개화파 사대부들이 견인한 조선왕조 개창은 단순한 왕조 교체 역성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닌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사상 등 여러 방면에서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대사건이었다.[77] 태조는 새 왕조 개창 이후 국왕으로서 국가 기틀 정비에 충실했고 정도전, 조준, 하륜, 권근, 성석린, 성석용, 유관, 맹사성, 황희, 허조, 허주 등 관학파 주요 인재들을 등용했으며, 창업 군주로서 법률 정립에 강력한 의지를 보여 성종 대까지 통치규범체제 확립으로 이어지는 첫걸음을 떼었다.[78][79]

부정적 평가[편집]

왕씨 몰살[편집]

왕건이 세운 고려1392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이때부터 왕씨들에게 대대적인 수난이 시작되었다. 이성계는 당초 고려조의 왕씨의 후예에 대해 구세력의 유화(宥和)하는 뜻에서도 비교적 온건책을 썼으나 왕손인 왕씨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면 고려왕조의 복위를 기도할 수 있으므로 후환을 없애려고 했던 개국공신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왕씨 일족을 몰살시켰다. 왕씨들이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는 태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효온의 한문 수필집인 《추강냉화(秋江冷話)》 별지에도 "조선조 태조 3년 갑술(1394년) 여름에 모든 왕씨를 바다 가운데 빠뜨려 죽이고 밖으로 명령하여 크게 왕씨의 남은 겨레를 찾아서 다 죽이다."라고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살아 남은 왕씨도 물론 있었다.[80] 전국에 방이 나붙었으나 은둔하여 보지 못한 사람이 있고, 조선 조정의 왕씨 멸족계획을 눈치 채고 피신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살아 남은 왕씨들은 이때부터 변성명(變姓名)을 하며 근근이 목숨을 부지했다. 왕씨들은 '임금 왕(王)'자에서 모양을 변형하여 전씨(田, 全), 옥씨(玉), 차씨(車), 신씨(申) 등으로 바꾸어 살았다.[81] 태종 시대에 이르러 왕씨 멸족령은 해제되었다.[82]

재위 중인 본인의 실록을 열람[편집]

태조는 자신이 고려 왕조 당시 활동했던 기록들을 담은 고려왕조실록과 즉위한 이후에 기록된 모든 사초(史草)를 가지고 오라고 명한다. 이 분부에 사관(史官) 신개(申槪)가 강력히 반발하였지만 사관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다.[83]

정권의 안위만을 위한 화약 무기 개발 중단[편집]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 권신이던 시절, 조준의 건의를 받아들여 화약무기 제조기관인 화통도감을 폐지하고 화약무기 개발을 중단한 관계로 조선 초기의 화약보유량은 겨우 6근(3.6kg.)정도밖에 없었다고 서애 유성룡이 그의 문집인 '서애집'에서 지적했듯이[84]자신과 정권의 안위만 위하는 이기적인 면모도 보였다.[85]

왕권 강화를 위해 '서경' 제도 대폭 후퇴[편집]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임금이 신하를 관직에 새로 임명할때 '대간'들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는 인사청문회 제도인 '서경' 제도를 크게 후퇴시켜, 고려 왕조에서는 정 1품부터 종 9품까지의 18등급 모두를 임금이 대간들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게 한 것을 고위직인 정1품부터 종4품까지는 대간들의 동의 없이 국왕이 임명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쳤다. 정종때 대간들이 이에 반발해 다시 고려조의 '서경'으로 돌아갔다가 태종때 다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태조때의 '서경' 제도로 바꾸어 이후 조선왕조 기간 내내 이어져 오게 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편집]

각주[편집]

  1. 《太宗實錄》《태종실록》 15권
  2. 《太祖實錄》《태조실록》 1권
  3. 《太祖實錄》《태조실록》 15권
  4. 조선왕조실록》〈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총서〉첫 번째 기사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의 성(姓)은 이씨(李氏), 휘(諱)는 단(旦), 자(字)는 군진(君晉)이다."
  5. 조선왕조실록 고종 36년 12월 23일(양력) 첫 번째기사[하례를 받고 사령을 반포하다.]
  6. “울루스부카의 아들 이성계, 조선을 개국하다”. 신동아. 2018년 2월 11일. 
  7.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8. 다만, 최근의 학계에서는 그의 영웅담들을 조선왕조건국정당화를 위한 조작,과장이 많은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9. 유린청(遊麟靑), 횡운골(橫雲鶻), 추풍오(追風烏), 발전자(發電赭), 용등자(龍騰紫), 응상백(凝霜白), 사자황(獅子黃), 현표(玄豹)
  10. 그러나 최근의 학계에서는 이성계의 황산대첩이 변안열과의 공동 전공이라는 이야기가 크다. 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의 기록들에 따르면 변안열은 '황산대첩'이 끝난 후 이성계와 똑같이 금 50냥의 상금을 우왕에게 받았다고 기록에 나오기 때문이다. 지식산업사 '대은 변안열의 생애와 업적' 39p,790p. 또 최근에는 변안열이 당시 최고지휘자였다는 이야기가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도체찰사는 정 1품의 벼슬이고 도순찰사는 정 2품의 벼슬이기 때문이다.
  11. 태조실록 총서에서 태조의 정치적 활동은 우왕 6년(1380년) 이전까지 매우 적은 편이다. 개국 이전 태조에 대한 모든 기록을 수집했을 태조실록이 이 상태라는 것은 당시까지 그의 전공에 비해 중앙 정치에서 영향력이 매우 부족했음을 시사한다. <朝鮮 初基 正治 支配 勢力 硏究>(1983, 정두희)
  12.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306005_004
  13. 이중에서 특히 이색의 경우,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신도비를 지었고, 이성계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의 이름을 지어줬으며, 그의 손자와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의 딸이 혼인할 정도로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
  14. 다만, 이 안변책은 조선왕조실록,고려사,고려사절요,동국통감에 나와 있지만 정작 태조 당시의 기록인 태조 묘지문과 신도비에는 나오지 않는다.
  15.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53페이지
  16. 실제로 여름철 전쟁은 군량 조달과 농업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을 뿐더러 궁노의 아교 등은 더위에 녹을 수 있었다. <한국사 22>(2003, 국사편찬위원회)
  17.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c/main.do?levelId=kc_n203200
  18. http://db.history.go.kr/id/kr_137r_0010_0040_0020
  19. http://db.history.go.kr/id/kr_137r_0010_0040_0040
  20. “[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8)] 피로 쓴 이성계 시대의 전제·군정 개혁”. 중앙시사매거진. 2018년 8월 17일. 
  21. <한국사 22>(2003, 국사편찬위원회)
  22. 유경아, 1995,「鄭夢周의 政治活動 硏究」
  23. <고려사> 공양왕 2년 정월 마지막 기사. 공양왕 3년 정월 을미일 첫번째 기사
  24. 태조실록 (1413) 3권, 태조 2년 2월 15일 경인 1번째기사
  25.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207029_003
  26. 태조 2년 595명 책봉이 대표적 사례다
  27. http://www.riss.kr/search/detail/DetailView.do?p_mat_type=be54d9b8bc7cdb09&control_no=0b5b4e139162a17dffe0bdc3ef48d419
  28. <조선 초기 정치 지배 세력 연구>(1983, 정두희)
  29. 하륜이 한양 천도에 관여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으며, 권근은 정도전의 경제문감 저술에 기여했다. <조선 전기 정치 사상사>(2013, 도현철)
  30.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11019_003) 태조 3년 사역원 제
  31.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07022_001
  32.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607024_001
  33. http://sillok.history.go.kr/id/kba_10211013_017
  34.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008021_004)
  35.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606002_001
  36.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101024_002
  37.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407008_002
  38. http://sillok.history.go.kr/id/kba_10105001_001
  39.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03007_003
  40.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106019_00
  41.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601022_001
  42.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60페이지
  43.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61페이지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chung161"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44. 박시백,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휴머니스트, 2005) 2권 2장
  45. 태조실록 (1413) 6권, 태조 3년 10월 25일 신묘 1번째기사
  46.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62페이지
  47. <한국사 22>(2003, 국사편찬위원회)
  48. <조선 초기 정치 문화의 이해>(2005, 최승희)
  49. [1]
  50. [2]
  51.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07010_003
  52. <정종의 즉위 과정과 명분>(2013, 윤정)
  53.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108020_001
  54.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108007_002
  55. <동아시아 군신공치체제의 이론과 현실>(2008, 김영수)
  56. '함흥차사'사건과 무학대사의 인도로 돌아온 태조 이성계가 이 과정에서 이방원을 두 차례에 걸쳐 살해할려다가 실패해 체념하고 이방원을 용서했다는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야사모음집 연려실기술과 다른 야사들에서 나오는데, 이미 앞서 보았듯이 당시 정사의 기록에 없다면 무조건 야사는 오류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함흥차사와 이 이야기가 거짓이라면 왜 이런 거짓 야사가 널리 민간에 퍼졌는데도 조선 조정에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다. 사실이기 때문에 그냥 두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너무나 참담한 일이기 때문이였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싸우고, 특히 아버지는 세 차례에 걸쳐 아들인 태종 이방원을 죽일려고 했다는 사실은 태종 이방원의 집권 정통성에 크나큰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57. 태조실록》 1권, 총서 59번째기사
  58. 태종실록》 16권, 태종 8년(1408년 명 영락(永樂) 6년) 10월 6일 경진 7번째기사
    의안대군 이화의 졸기
  59. 태조실록》 5권, 태조 3년(1394년 명 홍무(洪武) 27년) 4월 28일 정유 3번째기사
    정윤(正尹) 영(英)이 졸(卒)하니, 3일 동안 조회와 저자[市]를 정지하였다. 영(英)은 임금의 서제(庶弟)이다. 여러 신하들이 모여서 조문하였다.
  60. 태조실록》 13권, 태조 7년(1398년 명 홍무(洪武) 31년) 1월 7일 을묘 1번째기사
    손흥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빈 유씨를 정경 옹주로, 김씨를 화의 옹주로 삼다
  61. 정종실록 5권, 정종 2년 8월 21일 계축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ba_10208021_003
  62. 원경왕후의 여동생
  63.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1393년 명 홍무(洪武) 26년) 6월 19일 계사 1번째기사
    내시 이만을 죽이고, 세자의 현빈 유씨를 내치다
  64.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망
  65. 《선원록》
  66. 태조 이성계는 광대뼈 도드라진 무골상 한겨레 2006년 03월 13일자
  67. 시조 이연계, 태조 이성계와 6촌지간 디트뉴스
  68. <건국의 정치>(김영수, 2006)
  69.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10018_002
  70.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08029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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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박은봉, 《한국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8) 155페이지
  73. 길재는 일개 주서에 불과했으며 태종이 발굴한 인물이다. 태조가 그에게 면담을 요청할 이유가 없으며, 무엇보다 이 서술에는 출처 표기가 없다.
  74. 남은의 형제 남재는 태조 1년 이미 대사헌 직임을 수행하고 있었다.
  75.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108019_001
  76. 이성계가 100여차례의 전투에서 적을 모두 격파했다는 이야기는 이성계 당시의 묘지문과 이성계의 신도비에 나오는 내용이다.
  77. <한국사 22>(2003, 국사편찬위원회)
  78. <경국대전> 편찬의 사적 의의 (2003, 국사편찬위원회)
  79. 경국대전 편찬까지 과정은 태조와 태종의 조종성헌[祖宗聖憲]이라는 명분으로 추진되었다.
  80. 추강냉화(秋江冷話ㆍ남효온의 한문 수필집)
  81. 개성 왕씨,고려조 500년 간 왕족으로 군림 충청타임스
  82. "금후로는 왕씨의 후손이 혹은 스스로 나타나거나, 혹은 남에게 고발을 당하는 자는 아울러 자원(自願)하여 거처(居處)하는 것을 들어주어서 그 삶을 평안하게 하라."(今後王氏之裔, 或自現, 或爲人見告者, 竝聽自願居處, 以安其生.)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11월 26일 임인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311026_003
  83.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4권, 7년 6월 12일(병진) 1번째기사 / 조준 등이 사초를 올리려 하자 사관 신개가 불가함을 말하며 올린 상소
  84. 서애선생문집 제16권 잡저(雜著) 화포(火砲)의 시원을 적음
  85. 화약무기가 자신의 정적들에게 쓰일 것을 우려한 것. 지식산업사 '대은 변안열의 생애와 업적' 79p

참고 문헌[편집]

외부 링크[편집]

전임
최영
고려의 수문하시중
1388년 ~ 1390년
후임
이성계
정몽주
전임
이성계
고려의 수문하시중
(정몽주와 공동)
1390년 ~ 1392년 7월
후임
(조선 건국)
조선 영의정 이서
전임
고려 공양왕
권지고려국사
1392년 ~ 1398년
후임
이방과
전임
공양왕
명목상의
고려의 군주
1392년 ~ 1393년
후임
(국호를 조선으로 고쳐 왕국 멸망)
전임
공양왕
한반도의 국가 원수
1392년 ~ 1393년
후임
정종
Heckert GNU white.svgCc.logo.circle.svg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조선 양반사회의 성립"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