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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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국
Монгол улс
Flag of Mongolia.svg Coat of Arms of Mongolia.svg
국기 국장
국가몽골 국가
Mongolia on the globe (Asia centered).svg
수도울란바토르 북위 47° 55′ 12″ 동경 106° 55′ 12″ / 북위 47.9200° 동경 106.9200°  / 47.9200; 106.9200
정치
정치체제공화제, 단원제, 이원집정부제, 단일 국가
입법부국가대회의
집권여당몽골 인민당
대통령
총리
오흐나깅 후렐수흐
롭상남스랭 어용에르덴
역사
독립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
 • 독립1924년 11월 24일
 • 현행 체제 수립1992년 2월 13일
지리
면적1,564,116 km2 (19 위)
내수면 비율0.6%
시간대(UTC+7 - +8)
DST+8 - +9
인문
공용어몽골어
인구
2016년 어림3,062,825명 (135위)
인구 밀도1.92명/km2 (193위)
경제
GDP(PPP)2012년 어림값
 • 전체$154억 (137위)
 • 일인당$5,403 (121위)
GDP(명목)2012년 어림값
HDI0.675 (108위, 2012년 조사)
통화투그릭 (MNT)
기타
ISO 3166-1496, MN, MNG
도메인.mn
국제 전화+976

몽골국(몽골어: Монгол Улс 멍걸 올스 이 소리의 정보듣기 )은 동아시아내륙국이다.[1] 북쪽에는 러시아와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내몽골 자치구가 있지만 카자흐스탄과는 국경을 접하고 있지 않다.

몽골의 국토 면적은 1,564,116 km2이며, 인구는 약 330만 명 정도로 세계에서 18번째로 거대한 국토를 가지고 있으나 인구 밀도는 세계 최저 수준이다.[2] 또한 카자흐스탄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거대한 내륙국이며, 내해마저도 접하고 있지 못한 국가들 중에서는 가장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다. 몽골의 경작 가능 면적은 매우 협소하며, 대부분의 지역들은 풀로 덮인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험준한 산맥이, 남쪽에는 고비 사막이 버티고 있다. 수도이자 최대 도시인 울란바토르에는 전체 인구의 45% 정도가 몰려 살고 있으며, 모스크바오타와, 누르술탄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추운 수도 도시이기도 하다.[3]

몽골 인구의 30% 정도가 유목 생활을 하고 있으며, 승마 문화가 아직도 일상에 녹아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주요 종교는 불교이며, 무종교인들도 굉장히 많다. 2번째로 거대한 종교는 이슬람교로, 카자흐인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몽골인들이며, 4% 정도만이 카자흐인, 투바인, 그 외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어 특히 서쪽 지방에 몰려 살고 있다.

현재 몽골 지역에는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유목 민족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져갔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흉노족, 선비족, 유연, 돌궐 등이 몽골 지방에서 번성과 쇠망을 반복했다. 1206년에는 칭기즈 칸몽골 제국을 세웠으며,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치며 역사상 최대의 육상 제국을 이룩하기도 했다. 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중국을 정복하고 원나라를 세웠으며, 원나라는 약 100여 년을 지속하며 중국을 한시나마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족의 반발이 거세지고 원 황실의 내분이 심해지자, 결국 몽골인들은 한족명나라에게 밀려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이들은 이후 중국과 지속적인 군사적 충돌을 겪으며 중국 북부 지방을 약탈하는 등 국지적 충돌을 계속 일으켰다. 다만 다얀 칸 때나 투먼 자삭투 칸 때에는 활발한 정복 사업을 펼치며 중국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16세기에는 티베트 불교가 몽골에 전래하였으며, 17세기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몽골을 흡수한 이후에는 불교가 더욱 고착화하였다. 20세기 초에는 전체 몽골 성인 남성의 3분의 1이 승려였을 정도였다.[4] 1911년에 청나라가 무너지자, 몽골은 독립을 선언하고 1921년에 중화민국으로부터도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하는 데에 도움을 준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으며, 1924년에는 사회주의 국가인 몽골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몇 십년이 흐르고 점차 공산권이 붕괴되자, 1991년에 몽골에서 혁명이 일어나 1990년대 초에 평화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져 몽골인민공화국이 무너지고 현재의 몽골이 수립되었으며, 다당제가 도입되었고 1992년에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혼합 경제 체제로 전환이 일어났다.

몽골은 UN, G77,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비동맹운동, NATO 글로벌파트너의 일원이다. 1997년에는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였으며, 2000년대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세계 경제에 참여하며 경제 발전을 꾀하고 있다.[5]

명칭[편집]

몽골의 정식 명칭은 몽골 올스(Монгол Улс) 즉, 몽골국이다. "몽골 올스"에서 "몽골"(Монгол)은 "용감한"이라는 뜻을 가진 부족 이름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민족 이름을 뜻하고 "올스"(Улс)는 몽골어로 "나라" 또는 "국가"를 의미한다. 직역하면 "몽골 민족의 나라"라는 뜻이 된다.

간혹 몽골을 몽고(蒙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몽고라는 표현은 오랫동안 몽골족에게 시달려왔던 중국인들이 '몽골'이라는 단어를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할 적에 고의적으로 우매할 몽(蒙)과 옛 고(古)를 조합하여 몽골족을 비하하기 위해 만든 단어다. 다만 원나라의 승상 메르키트 토크토아가 편찬을 주도한 요사에는 1차례, 금사에는 36차례, 송사에는 6차례 몽고(蒙古)의 용례가 확인된다.

역사[편집]

선사 - 고대[편집]

몽골의 역사
Монголын түүх
Stupas de Karakorum.jpg

현재 몽골 지역에서는 대략 85만 년에 호모 에렉투스가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생 인류는 후기 구석기 시대인 약 4만 년 전에 몽골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6] 이 시기에 만들어진 동굴 벽화들과 유적들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몇몇 유적들은 몇 만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여 높은 고고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몽골의 신석기식 농경 거주지는 기원전 5500년에서 3500년 사이에 활발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 유목 생활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농경 생활이 도입되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농경에 적합하지 않은 몽골의 기후와, 상대적으로 척박한 환경 탓에 청동기 시대에 말을 주 가축으로 하는 유목 생활이 전래되자 점차 농경 문화에서 유목 문화로 바뀌어 나갔는데, 가장 대표적인 문화권이 기원전 3500년에서 2500년까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에 걸쳐 번영을 누렸던 아파나시에보 문화이다. 아파나시에보 문화는 기원전 2200년 전 즈음에 이미 바퀴가 달린 장치들을 고안해 사용하였으며, 이후 오쿠네프 문화, 안드로노보 문화, 카라수크 문화 등으로 발전하였다.[7] 나중에 철기 시대에 들어서자 기원전 209년에 이런 문화권들을 바탕으로 흉노 제국이 들어섰다.

한편 유목 문화가 몽골에서 점차 주된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반해, 농경 문화는 더 일찍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에서 주류로 자리잡지 못했다. 한편 더 남쪽에 자리하여 기후가 상대적으로 따뜻하고 토양도 풍요로웠던 중원 지방에서는 상나라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농경 문화가 발전하여 몽골보다도 더 이른 시기에 국가가 세워졌는데, 이에도 불구하고 몽골은 중국 문화권에 흡수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중국 북쪽에 굳건히 자리잡고 버티면서 독립적인 집단을 유지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당시 중국인들이 몽골인들을 독립된 정치 세력으로 여겼다는 사실은 아래에 한나라 문제노상선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8]

중화의 천자가 흉노의 선우에게 예를 표하노라... 선제께서 장성(長城)을 세우셨을 적에, 장성 북부에 있는 유목인들의 국가는 선우의 것이었으며, 장성 안에 있는 민족들은 우리의 것이었노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공존을 통하여 베를 짜고 사냥을 하며 풍족히 자족할 수 있었음이라.... 선우가 보낸 국서에 ‘두 국가가 태평을 이룩하였으니, 두 명의 왕자들이 조화로이 어울려 살고 있으며 군행이 멈추었고, 병졸들은 말에게 풀을 뜯기고 있으니 번창과 풍요가 세대를 넘어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 것이라’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는 짐에게도 환영할만한 일이라... 짐은 선우와 함께 천명을 받들어 자손만대까지 이 뜻을 유지할 것이며, 하늘이 이를 보우하심이며 천지의 나라들이 이를 따를 것이노라. 흉노족이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 북부 지방에 살고 있으니, 짐이 관리를 시켜 선우에게 매년 일정한 양의 곡식과 금, 비단을 보내게 할 것이다. 이제 평화가 만천하에 도래하였으며, 만인이 자족하고 있고 짐과 그대는 모든 사람들의 어버이이니.... 이 평화 조약이 맺어진 후에 한나라가 먼저 조약을 깨지 않을 것을 맹약함이라.
— 한나라 문제가 노상선우에게 보낸 국서의 일부

몽골은 선사 시대 이래로 끊임없이 다른 유목 부족들이 발흥하고 쇠퇴함을 반복하였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몽골 특유의 정치 체제가 성립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이라고 하는 왕의 직함, 최고 정치회의인 쿠릴타이, 왕의 친위대인 케식, 그리고 기병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 시스템 등이 있었다. 한편 몽골에 등장한 가장 초기의 유목 제국들 중 하나는 흉노 제국으로, 기원전 209년 즈음에 묵돌선우의 주도로 인하여 하나로 통합되어 거대한 연맹 체제를 이루고 그 힘을 널리 떨쳤다. 흉노의 힘이 갈수록 거세지자, 나중에는 중국의 진나라에게까지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이 때문에 흉노를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건설하기도 하였다. 진나라는 대략 30만 명의 대군을 파병하여 장성을 지키게 하였고, 중국 북부 지방에 대한 흉노의 약탈을 막아내는 데에 전력을 다했을 정도로 당시 흉노의 세력은 막강했다. 흉노 이후에는 기원후 93년에서 234년 사이에 선비족들이 세를 얻었으며, 현재 몽골 영토를 넘어서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다. 선비족 이후에는 유연이 등장하였고, 중원의 ‘황제’와 동격을 자처하였으며 돌궐에 의하여 멸망당하기 이전에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였다. 한편 유연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몽골의 통치자가 된 돌궐은 심지어 유연보다도 더 영토를 확장하여 그 이름을 날렸다.

돌궐족은 740년 즈음에 위구르 칸국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이후 선비족의 후예인 거란족이 등장하여 몽골을 정복하였으며, 세력이 강성해지자 907년 즈음에 요나라를 세웠고, 요나라가 쇠하자 1100년 즈음에 카묵몽골이 점차 몽골의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

중세 - 20세기[편집]

몽골 제국의 건국자인 칭기즈 칸

12세기 동안 카묵몽골 내에서 수많은 칸들이 난립하며 혼란이 가중되던 와중에, 테무친이라는 이름의 족장이 마침내 몽골을 하나로 통일하는 데에 성공하며 만주알타이 산맥 사이의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는 통치자로 떠올랐다. 1206년에 그는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를 획득하였으며, 여러 군사 원정을 펼쳐 아시아 대륙을 휩쓸며 그 명성을 널리 알렸다. 이후 그는 몽골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몽골 제국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육상 제국을 이룩하게 된다. 몽골 제국은 서쪽으로는 중앙유럽의 폴란드, 동쪽으로는 한반도, 북부로는 시베리아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오만 만베트남까지 이르러 거의 33,000,000km2의 영토를 다스려 지구 전체 육상 면적의 22%를 점령했으며 1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거느려 당대 지구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사람들을 신민으로 거느렸다.[9] 또한 몽골군의 강력한 통제 덕분에 일시적으로나마 몽골 주도 하의 평화, 즉 ‘팍스 몽골리카’가 세워지며 동서양의 사람들이 서로 자유롭게 왕래하며 활발히 문물을 주고받기도 했다.[10]

칭기즈 칸이 사망한 이후, 몽골 제국은 4개의 칸국으로 나누어졌고, 1259년에 몽케 칸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후계자들이 제위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내전인 툴루이 남북 전쟁 이후로는 이 4개의 칸국들이 완전히 독립적인 국가로 쪼개어져 버린다. 이후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이 몽골과 중국을 다스리는 가장 강력한 칸국이었던 원나라를 다스리게 되었고, 쿠빌라이 칸은 베이징에 수도를 잡고 여러 국가들과 교류하며 원나라의 힘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 칸 사후, 빈약한 행정 체계와 한족들의 반란, 원나라 황실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점차 나라에 망조가 들어갔고, 결국 100여 년이 지나자 한족의 주원장이 1368년에 원나라를 쫓아내고 명나라를 개국하게 된다. 원나라 황실은 북쪽으로 도피하여 북원을 세웠으나, 명나라 군대가 끈질기게 쫓아 들어와 몽골의 수도인 카라코룸마저 점령하고 약탈하며 치욕을 입게 된다. 다만 당시 북원의 칸이었던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과 그의 장군인 코케 테무르의 활약으로 명나라의 침입 중 일부는 겨우 막아낼 수 있었다.[11] 덕분에 몽골은 중국에 정복당하지 않고 독립적인 세력으로 남을 수 있었는데, 이들을 눈엣가시로 여긴 중국과 군사적 마찰을 지속하면서 여러 차례 대규모 전쟁을 벌였으며, 항시에 국지전을 계속하였다. 특히 팽창주의 정책을 편 명나라 영락제 시절에는 5차례나 원정을 벌여 몽골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16세기 초에 다얀 칸은 칭기즈 칸의 후예라는 칭호를 등에 업고 모든 몽골 부족들을 통일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16세기 중반에는 다얀 칸의 손자인 알탄 칸이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 그는 1557년에 후허하오터를 세웠으며, 그 다음 해에는 달라이 라마를 만나 몽골에 티베트 불교를 들여왔다. 알탄 칸이 죽은 이후에도 그의 후계자들은 티베트 불교를 적극적으로 몽골 내에 퍼뜨렸으며, 대규모 사찰을 세웠으며 1640년에는 몽골 최고지도자들 중 한 명이 라마교의 거두가 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몽골인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독실한 불교 신자로 변했으며, 그들의 게르 북쪽에 조그만 제단을 세우고 불경과 불상들을 세워놓을 정도였다. 몽골 귀족들은 사찰에 토지와 땅, 노비들을 기부하였으며 특히 권력이 높을수록 사찰에 기부하는 양도 많았다.

몽골 최후의 칸은 17세기 초의 링단 칸이었다. 그는 중국 도시들을 약탈하는 문제를 두고 만주족과 갈등을 빚었으며, 실정을 연발하며 대부분의 몽골 부족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링단 칸은 1634년에 사망했으며, 1636년에 이르자 대부분의 내몽골 부족들은 만주족에게 복속되었다. 만주족은 곧 청나라를 세웠으며, 1691년 즈음에는 외몽골 부족들도 모두 청나라에 정복되면서 몽골 전체가 만주족의 통치 하에 들어갔다. 또한 1700년대 중반에는 준가르인들도 청나라와의 여러 차례 전쟁 끝에 결국 복속되었다. 학자들은 이때 대략 60만 명에 이르는 준가르인들, 거의 80%에 달하는 준가르 인구가 이때 질병과 전쟁으로 사망했다고 전한다.[12]

청나라는 외몽골 지방에 자치권을 부여하였으며, 청 황제를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는 대신에 칭기즈 칸의 후예들이 칸을 자칭하고 몽골을 대리 통치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또한 티베트 불교도 그대로 인정하여 여전히 몽골의 최고 종교로 남았으며, 중국인들이 대량으로 몽골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금지하여 몽골인들의 반발을 줄이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러시아의 볼가 지역으로 이주한 몽골인들을 칼미크인들이라고 부른다.

청나라는 1911년까지 정략결혼, 동맹 등을 통하여 몽골을 효과적으로 장악하였다. 청나라 관리들은 울란바토르, 울리아스타이, 허브드 등에만 머물렀으며, 나머지 지역들은 수십수백개에 달하는 봉건 칸국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망해가는 19세기 말에 이르자 점차 몽골 족장들 내에서도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반대급부로 청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도는 날로 낮아졌다. 한편 몽골 귀족들은 점차 중국화에 물들어가며 전통적인 세금인 동물 가죽 대신 은을 즐겨 사용하고 중국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 문물과 접촉하며 사치스런 생활을 누렸고, 이에 따라 몽골 평민들의 생활은 갈수록 가난해져만 갔다. 1911년 즈음에 이르자 외몽골에는 700여 개의 사원들이 있었으며, 전체 인구의 21%가 승려였다.

현대[편집]

신해혁명으로 1911년에 청나라가 멸망하자, 당시 복드 칸이 다스리고 있던 몽골 지방도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대신 들어선 중화민국은 몽골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당시 총통이었던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이 청나라의 계승국이라는 점을 선언하며 몽골을 다시 합병하려 들었다. 복드 칸은 중국과 몽골 모두가 만주족의 통치 하에 한 국가로 잠시 묶였을 뿐이며, 이제 만주족의 청나라가 무너졌으니 같은 국가로 묶여야 할 이유가 없다고 반발하였다.[13]

당시 복드 칸이 다스리고 있던 영토는 청나라 시절의 외몽골 지역과 거의 유사하였다. 한편 1919년에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난 이후에는 중국 군벌인 서수쟁이 몽골을 점령하여 통치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러시아 내전으로 인하여 러시아 백군 출신의 로만 폰 웅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소비에트 군대를 피하여 1920년 10월에 몽골로 들어왔고, 1921년 2월에 중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몽골인들의 지원을 받아 울란바토르에서 중국 군대를 꺾으며 몽골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웅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은 몽골을 점령한 이후 독립 세력을 형성하면서 외몽골을 다스리는 군벌 세력으로 떠올랐는데, 아무래도 그가 제정을 지지하던 백군 출신이다보니 이를 눈엣가시로 여긴 소비에트 러시아는 남작을 타도하고 대신 사회주의 정부를 몽골에 세우기 위한 계획에 착수하였다. 소비에트의 지원을 받은 몽골인 사회주의자들은 1921년 3월에 캬흐타 지방을 중국에게서 빼앗아내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7월 6일에는 소비에트와 몽골 군대가 울란바토르를 함락시켰다. 이후 1921년 7월 11일에 몽골은 중화민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포하였으며,[14] 결과적으로 향후 몇 십년 동안 소련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몽골인민공화국[편집]

1924년에 복드 칸이 인후두암으로 사망하였는데, 일부 자료에서는 러시아 스파이들이 죽였다는 소문도 있었다.[15] 복드 칸 사후, 몽골의 정치 체제에는 대격변이 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28년에는 허를러깅 처이발상이 권력을 잡았으며 범몽골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인들이 대거 떠올랐다. 그러나 소련이 몽골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고 국제 정치가 복잡하게 돌아가자 범몽골주의도 얼마 지나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처이발상 총리는 재산의 집단화를 시작하였으며, 불교 사찰들을 파괴하였고 스탈린주의를 몽골에 이식하여 수많은 승려들을 학살하고 정치적 반대파들을 탄압하였다. 1920년대 중반에는 전체 남성 인구의 3분의 1이 승려였고,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대략 750여개의 사찰들이 있었다. 1930년에는 소련이 몽골계 민족들의 단결을 방해하기 위하여 부랴트인들이 몽골로 이주하는 것을 차단하였으며, 스탈린이 주도한 적색 테러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은 몽골 지도자들은 모두 숙청되었다. 스탈린은 몽골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목적으로 대대적인 정치적 피바람을 일으켰고, 1937년에 시작한 이 피바람에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처이발상 총리마저도 1952년에 소련에서 의문사하였다. 당시 코민테른의 지도자는 ’몽골인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몽골 땅이 중요하다. 몽골의 영토는 영국, 프랑스, 독일보다도 훨씬 더 크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16]

1931년에 일본 제국만주를 침공하자, 몽골도 일본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1939년에 소련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졌을 적에, 소련은 성공적으로 몽골을 지켜내는 데에 성공하였으며 소련-일본 국경분쟁에서 몽골은 소련의 편에 서서 일본과 전쟁을 벌였다. 한편 2차 세계대전소련-일본 전쟁에서도 몽골이 참전하였고, 1945년 8월에 내몽골과 몽강연합자치정부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일본과 전쟁을 벌였다.

허를러깅 처이발상 몽골인민공화국 총리

냉전[편집]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으로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할 적에, 소련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외몽골이 독립을 유지할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1945년 10월 20일에 몽골인들을 대상으로 국민투표를 한 결과, 100%의 유권자들이 몽골의 독립을 지지하였다.[17]

한편 중국에서 중화민국이 패퇴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몽골과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10월 6일에 서로 상호인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아직까지도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던 중화민국은 1955년에 거부권을 행사하여 몽골인민공화국이 UN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는데, 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중화민국은 여전히 몽골의 독립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자국 영토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이는 중화민국이 유일하게 거부권을 행사한 사례였다. 그러다가 1961년에 소련이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인 모리타니가 UN에 가입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중화민국도 몽골의 가입에 대하여 거부권 행사를 하지 말라는 국제사회의 압박이 거세지자 결국 1961년 10월 27일에 모리타니와 몽골이 함께 UN에 가입하게 되었다.

1952년 1월 26일에 처이발상 총리가 사망하자, 윰자깅 체덴발 총리가 새롭게 취임하였다. 이후 체덴발 총리는 약 30여 년 동안 몽골을 통치하였다. 그러던 중 1984년에 체덴발 총리가 모스크바를 국빈 방문하던 도중에 지나치게 건강이 악화되자,[18] 결국 의회에서 체덴발 총리를 물러나게 하였으며 그 자리에는 대신 잠빙 바트뭉흐 총리가 취임하였다.

민주화 이후[편집]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하자 몽골에도 엄청난 대격변이 일었다. 공산주의에 실망한 국민들은 1991년 1월에 평화적인 민주화 혁명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다당제와 혼합경제체제가 몽골에 도입되었다. 그와 동시에 몽골의 유일집권당이었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이었던 몽골인민혁명당이 현재의 사회민주주의 성향인 몽골인민당으로 개편하여 몽골 정치계에도 큰 파장이 일었다.

1992년에는 새로운 헌법이 도입되었고, 국명에서도 ‘인민’이라는 명칭이 삭제되었다. 다만 공산주의의 계획경제체제에서 민주주의 혼합경제체제로 향하는 과정에서 다사다난한 사건들이 많이 일었는데, 1990년대 초 몽골은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식량 부족을 겪기도 했다.[19] 1993년의 대선과 1996년의 총선에서 민주화 정당들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몽골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에 참가하자 중화인민공화국이 동의 의사를 표하였으며, 상하이협력기구에 옵서버 지위를 부여하기도 했다.[20]

자연 환경[편집]

몽골의 국토면적은 1,564,116 km2 정도로, 이란에 이어 세계에서 18번째로 거대한 면적의 영토를 자랑하고 있으며,[21] 19위인 페루에 비해서는 훨씬 거대한 크기의 영토를 가지고 있다. 몽골의 영토는 위도 41도에서 52도 사이이며, 경도는 동경 87도에서 120도 사이 정도가 된다. 또한 몽골의 북쪽 끝 위도는 독일의 베를린과 거의 유사하며, 가장 남쪽 끝의 위도는 이탈리아의 로마와 미국의 시카고와 위도가 유사하다. 또한 몽골의 최서단 지역은 경도가 인도의 콜카타와 거의 유사하며, 최동단 지역은 중국의 항저우타이완과 경도가 유사할 정도로 그 국토과 굉장히 방대하다. 다만 몽골은 카자흐스탄과는 중국과 러시아에게 가로막혀 있어 국경을 접하고 있지는 않은데, 몽골과 카자흐스탄 사이의 거리는 고작 36.76km 밖에 되지 않는다.

몽골의 기후는 굉장히 다양한데, 남쪽에는 고비 사막이 자리하고 있어 더운 편이며 북쪽과 서쪽에는 산악 지대가 있어 추운 편에 속한다. 또한 국토의 대부분이 초원으로 덮여 있으며, 산림은 초원 지대에 비하여 굉장히 적어서 고작 전체 국토면적의 11.2%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몽골은 국토 전체가 몽골 고원의 일부이며, 가장 높은 산은 알타이 산맥의 타반보그드 산이며, 그 높이가 무려 4,374m에 이른다. 또한 러시아의 투바 공화국과 접하고 있는 우브스 호수(Uvs Lake)는 세계자연유산이기도 하다.

칭기즈 칸의 출생지와 가까운 켄티 산맥의 정경

기후[편집]

몽골은 종종 ‘영원한 푸른 하늘의 땅’, 혹은 ‘푸른 하늘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1년에 약 250일 이상 굉장히 쾌청한 날씨를 자랑한다.[22] 여름에는 대부분 더운 편이며, 겨울에는 극도로 추워 1월의 평균 기온이 영하 30도를 오르내린다. 또한 시베리아에서 차가운 기단이 불어와 몽골 계곡들과 분지에 극도로 추운 날씨를 만들며, 반면에 산악 지방에서는 기온역전으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은 편이다.

몽골의 겨울에는 시베리아 기단이 온 국토를 뒤덮으며, 특히 북쪽으로 갈수록 한파에 의한 피해를 많이 입는 편이다. 수도인 울란바토르조차 북쪽에 있는 편이라 꽤나 한파가 강한 편에 속하나, 최북단 지역에 비해서는 피해가 덜하다. 남쪽으로 갈수록 한기가 덜해지며, 중국과 접경하고 있는 지역에는 북부 지방에 비하여 훨씬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또한 항가이 산맥으로 인하여 남쪽에 수많은 국소생태계들이 생겨나있으며, 어떤 마을은 몽골의 겨울치고는 굉장히 따뜻한 기후를 보이며 1월달에도 최저 기온이 영하 30도 밑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극히 드물며 해가 떠있을 때에는 영상 0도에서 5도 사이를 오르내리기도 한다.[23]

몽골에서는 ‘주드’라고 불리는 독특한 자연재해가 있는데, ‘주드’란 겨울철에 방목한 가축들이 초원에서 먹이를 찾지 못하고 굶주림이나 추위로 인하여 대량으로 폐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목업에 종사하고 있는 몽골인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재난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울란바토르의 연평균 기온은 약 영하 1.3도 정도 되는데, 세계에서 가장 추운 수도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몽골이 바람이 많이 불며, 높은 지대에 자리한 탓이 크다. 또한 강우량은 북쪽에서는 매년 200에서 350mm정도로 가장 높은 편이며, 남쪽에서는 매년 100에서 200mm 정도로 굉장히 낮은 편이다.[24] 지방으로 따지면 러시아 국경지대의 산림 지대에서 622.297mm의 연 강우량이 내린 적이 있으며, 고비 사막에서는 1년 동안 41.735mm 밖에 비가 내리지 않은 적도 있다. 특히 러시아와 접경한 불간 지방에서는 매년 거의 600mm에 달하는 강우량이 내리는데, 이는 571mm의 베이징이나 베를린보다도 많은 수치이다.

정치[편집]

몽골의 현 대통령 오흐나깅 후렐수흐

몽골은 대통령제와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한 민주 공화국으로, 대통령은 직접 선거로 선출한다. 또한 국회에 해당하는 국가대회의의 의원들도 국민들의 직접 선거로 선출한다. 대통령이 총리를 임명하며, 총리가 내각 구성원들을 제청하면 이를 재가하여 내각을 구성할 수 있다. 몽골 헌법에는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이 명시되어 있다. 현재 몽골에는 다양한 정당들이 존재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몽골 인민당몽골 민주당이다. 프리덤 하우스에 의하면 몽골은 ‘자유 국가’라고 한다.[25]

현재 몽골 인민당의 전신은 몽골인민혁명당으로, 1924년부터 2010년까지는 몽골인민혁명당이라는 당명을 쓰다가 2010년에 명칭을 바꾸었다. 몽골인민혁명당은 몽골인민공화국의 유일 집권 정당으로서, 1921년부터 1996년까지 집권하였으며 1990년까지는 아예 일당제의 유일 정당이기도 했다. 또한 2000년부터 2004년에도 집권한 바 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민주당과 타 2개의 정당들과 연립하여 연정을 세웠으며, 2006년 이후에는 단독 정당으로 떠올랐다. 한편 민주당은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집권하였으며, 2004년부터 2006년 사이의 연립 정부 시절에는 몽골 인민당과 거의 맞먹는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2012년 6월 총선에서 그 어떠한 정당들도 압도적 다수를 점하지는 못했으나,[26] 민주당이 그나마 최대 의석을 확보하였으며 민주당 당수였던 노로빈 알탕후야그가 2012년 10월에 새 총리로 지명되었다. 2014년에는 치메딩 사이항발렉이 새로운 몽골 총리로 집권하였다. 한편 2016년 총선에서는 몽골 인민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고, 사이항벨렉 총리를 이어 몽골 인민당 출신의 오흐나깅 후렐수흐가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2020년 6월에는 또다시 몽골 인민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으며, 전체 76석 가운데에 62석을 차지하며 거의 의회를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한편 주요 호적수였던 민주당은 76석 가운데에 11석을 차지하며 패배를 거두고 말았다. 2021년 1월에는 후렐수흐 총리가 코로나 확산 관련 대책 미비를 이유로 사람들이 대규모 항의를 벌이자 결국 사퇴하였다. 2021년 1월 27일에 몽골 인민당 출신의 롭상남스랭 어용에르덴이 새로운 총리로 임명되었다. 어용에르덴 총리는 해외 유학파 출신의 소장파 정치인으로,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면모를 보여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다.[27]

몽골 대통령은 의회가 만든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판사들을 임명하고 대사들에게 신임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의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원들이 찬성한다면 거부권을 무시하고 법안을 강행할 수 있다. 몽골 헌법에 의하면 몽골 대통령은 몽골에서 태어난 몽골인 출신이어야만 하며, 중임을 불가능한 6년 단임제로 채택되어있다. 또한 대통령에 취임하는 순간 당적을 보유할 수도 없다. 한편 2차례 총리를 지냈고 민주당 출신의 차히아깅 엘벡도르지가 당시 대통령이었던 남바링 엥흐바야르 후보를 꺾고 2009년 6월 18일에 새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2013년 6월 26일에 재선에 성공하였으며 2013년 7월 10일에 2번째 임기를 시작하였다. 2017년에는 민주당 출신의 할트마깅 바톨가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였으며, 2017년 7월 10일에 임기를 시작하였다.

2021년 6월 25일 몽골 인민당의 오흐나깅 후렐수흐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몽골은 단원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의회에 해당하는 국가대회의의 의석은 76석이 정원이다. 의원들은 매 4년마다 직접 선거로 선출한다.

군대[편집]

18세~25세까지의 남자들은 1년간 복무해야 하지만 생업에 종사하거나 학생, 질병이 있는 자 등은 징병이 면제되는데다가 현역복무와 병역세 납부 중 양자택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 복무율은 낮다. 몽골에서 병역세는 159만 투그릭(한화 70만원 상당)이며 이 돈을 병역세로 납부하면 병역의 의무가 사라진다. 몽골군은 몽골 국군(육군과 육군항공대가 통합)과 국경수비대, 전투경찰(군소속)으로 이루어져 있다(내륙국이라 해군이 없다.). 국방예산은 전체 GDP의 약 2.2%정도로 세계평균보다 약간 낮다.

몽골은 2003년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였으며, 이후 이라크에 103명에서 180여 명 정도의 군대를 파병하기도 했다. 현재는 130여 명의 군인들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하고 있다. 또한 UN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시에라레온에서 200여 명의 몽골군인들이 UN 사무소를 지키기 위하여 복무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2009년 7월에는 몽골이 차드에 대대를 보내 평화유지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2005년부터 2006년까지 몽골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와 함께 코소보에 40여 명의 군인들을 파병해왔다. 2005년 11월 21일에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몽골을 국빈방문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몽골을 방문한 현직 대통령으로 이름이 남기도 했다.[28] 2004년에는 불가리아가 의장국으로 주최한 유럽안보협력기구가 몽골을 새로운 아시아 군사 동맹 파트너로 초청하기도 했다.

  1. 몽골 국군(통합군): 12,000여 명
  2. 국경수비대: 8,500여 명
  3. 전투경찰(경찰): 20,000여 명

과거 몽골군에는 해군이 있었으며 해군사령관 대위 이하 총병력이 7명에 불과해서 페지되었다.

행정 구역[편집]

몽골의 행정 구역

몽골은 21개 주로 구성되어 있다. 이 21개의 주들은 또다시 331개의 구들로 나누어지며,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특별히 자치시의 자격을 가지고 있어 주와 동등한 행정구역으로 대접받는다.

울란바토르와 몽골 최고층 빌딩인 블루스카이타워의 전경

경제[편집]

몽골 경제는 오랜 기간 동안 목축업과 농업에 의존해왔으나, 최근에 들어서는 구리, 석탄, 텅스텐, 금, 주석 등 광산업이 새로운 국가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다. 광산업이 전체 GDP의 21.8%를 차지하고 있으며, 농업이 전체 GDP의 16%를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도 도매업, 소매업, 서비스업들이 나머지 분야들을 차지하고 있으며, 교통업과 운수업, 부동산업 등도 그나마 활발하다. 몽골의 비공식 부문 경제는 거의 공식 부문의 경제의 3분의 1 이상 될 것으로 추정된다.[29] 2006년 기준으로 몽골의 수출품의 68.4%가 중화인민공화국으로 향했으며, 한편 몽골의 수입품들 중 29.8%가 중국에서 들어왔다.

세계은행은 몽골을 경제적 개발도상국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1인당 GDP도 세계적으로 낮은 편에 속한다고 진단했다.[30] 전체 인구의 22.4% 정도가 매일 1.25달러 미만의 금액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2020 기준으로 1인당 GDP는 3,600여 달러에 그쳤다. 또한 경제가 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극빈선 아래의 인구가 굉장히 많아서, 2006년에 32.2%가 빈곤인구라고 전했다.

몽골은 광산업 붐에 힘입어 2007년에 성장률 9.9%, 2008년에 8.9%를 보이며 최대 성장률을 찍었다. 그러나 2009년에 세계 금융위기가 몰아닥치며 원자재들의 가격이 추락하자 몽골의 성장도 멈췄으며, 환율은 거의 40% 가까이 떨어졌다. 또한 16개의 민간 은행들 중 2개가 파산하였다. 2011년에는 GDP 성장률이 거의 16.4%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계속해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결국 2011년 말에는 인플레이션 비율이 12.6%에 달했다. GDP는 2002년 이래 7.5% 정도로 꾸준한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나, 무역 적자도 굉장히 심각하다. 이코노미스트는 2013년에 이르러야 몽골의 무역이 흑자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몽골은 2011년 전까지는 한 번도 신흥시장으로 분류된 적이 없다가, 2011년에야 씨티그룹에서 신흥시장으로 분류한 이후에 ‘2010-2050년대에 가장 발전 가능성이 높은 국가’들 중 하나로 인정받기 시작했다.[31] 한편 1991년에 울란바토르에서 개장한 몽골 증권거래소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주식거래소들 중 하나이다. 2011년 기준으로 336개의 회사들이 상장해있으며, 그 자본은 약 20억 달러 정도로 추산된다. 몽골은 2012년에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서 76위를 기록했다.

광산업[편집]

몽골의 수출품들 가운데에서 약 80%가 넘는 양이 모두 광물이며, 이같은 심한 광산업 의존도는 미래에도 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근미래에 최고 95%까지 상승할 가능성도 보이고 있다. 2010년 기준으로 정부의 전체 세입 가운데 21%가 광물업에서부터 들어왔으며, 2018년에는 24%로 증가하기도 했다. 몽골에는 현재 3,000여 개가 넘는 광산이 성업 중이며, 중국, 러시아, 캐나다 국적의 광산기업들이 대거 몽골로 진출하기 시작함에 따라 몽골의 가장 핵심적인 산업으로 떠오르는 중이다.

2009년에 몽골 정부는 구리 광산과 금 광산을 개발하기 위하여 리오 틴토와 터쿼이즈 사와 투자협약을 맺었고, 이는 몽골 역사상 최대의 외국 기업 투자 프로젝트이기도 하며 2020년 경 몽골 전체 GDP의 3분의 1에 달할 것으로 추측된다.[32] 2011년 3월에는 6개의 거대한 광산 기업들이 타반 톨고이 지방에 있는 세계 최대의 처녀 석탄광을 노리며 몽골에 잇달아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여러 일본, 대한민국, 러시아 기업들이 몽골의 풍부한 자연자원들을 캐내기 위하여 몽골과 협력을 지속하고 있다고 전한다.

몽골의 초원

교통[편집]

몽골 횡단 철도(The Trans-Mongolian Railway)가 시베리아의 울란우데(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연결)에서 울란바토르를 거쳐 중국의 얼롄하오터 시를 잇고 있다. 얼롄하오터에서는 선로가 바뀌며 베이징까지 잇는다. 이 철도의 몽골 내 노선은 1,110km다.[33] 그 지선 하나는 다르항에서 구리 광산이 있는 에르데네트까지 잇고, 또 다른 지선 하나는 울란바토르에서 구리 광산이 있는 바가누르(몽골어: Багануур)를 잇는다. 그 외에 처이발상 철도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연결되어 있다. 몽골 정부는 이 두 철도를 연결하는 노선을 건설하려고 하고 있다.[34] 또한 초이발산과 중국 대륙을 연결하는 노선도 추진되고 있다.[35] 몽골 철도의 총 길이는 1,810km이고, 철도 밀도는 11.5km/10,000km2로, 이웃한 중국에 비하여 0.12배에 불과하다. 자동차 도로는 잘 발달되어 국내 항공로와 마찬가지로 각 주에 통해 있다. 국내 항공로는 중국, 러시아와 연결되어 있다.[36] 몽골의 차량은 약 21만 대다.

몽골의 주된 철도는 몽골은 여러 개의 국내 공항들을 가지고 있으며, 개 중 몇몇 개는 국제선도 운영한다. 다만 몽골 자체의 국제선 수요가 많지 않기에, 대부분의 국제선은 울란바토르에서 약 20km 정도 떨어져 있는 칭기즈 칸 국제공항으로 통한다. 가장 대표적인 국제 노선들에서는 한국, 중국, 태국,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터키 등이 있다. 또한 플래그 캐리어MIAT 몽골 항공이며, 국제선을 중심으로 운영한다. 그 외에 에어로 몽골리아훈누 에어 등도 있으나, 국제선은 거의 취급하지 않고 국내선을 중심으로 운영한다.

몽골의 대부분의 도로는 자갈길이거나 단순한 국토 종단용 도로로, 제대로 된 도로 인프라가 깔려 있지 못하다. 다만 수도인 울란바타르는 사정이 그나마 나아서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까지 향하는 제대로 된 도로가 깔려 있다. 몽골 정부도 자국의 도로 인프라를 개선시키기 위하여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몽골의 포장 도로의 길이는 약 4,800km이며, 이 중 1,800km가 2013년 한 해에 깔린 것이라고 한다.

인구[편집]

몽골의 인구는 2016년 기준 3,080,000명[37]이다. 넓은 영토에 비해 적은 인구를 가지고 있어 전세계의 공식 독립국 중 가장 낮은 인구밀도를 가지고 있다. 몽골의 인구는 2015년 1월 기준으로 미 통계국이 조사한 결과 약 3,000,251명으로 세계에서 121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미 국무부는 미 통계국의 통계를 사용하지 않으며 UN의 통계를 대신 사용한다. UN의 경우, 몽골의 전체 인구를 2007년 중반 기준으로 약 2,629,0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미 통계국의 조사 결과보다 11% 적은 수치이다. 한편 몽골 정부에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2007년 6월 기준으로 2,612,900여 명 정도가 된다. 몽골의 인구 성장률은 2007년 기준으로 1.2% 정도이며, 전체 인구의 59%가 넘는 사람들이 30세 이하로 굉장히 젊은 편이고 이들 중 또 27%는 14세 아래로 전세계적인 기준에서도 굉장히 평균 연령이 낮은 편에 속한다. 이같이 낮은 평균 연령은 현재 몽골의 미래 성장률을 촉진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몽골의 첫 인구조사는 20세기인 1918년에 이루어졌고, 이때만 해도 몽골에는 약 647,500여 명이 살고 있었다.[38] 이후 산업화와 근대화의 바람이 몽골에도 불어오며 점진적인 인구 성장을 기록하였으나, 20세기 말에 사회주의가 붕괴되자 사회혼란이 가중되었고 이때 그 어떠한 나라들보다도 여성 1인당 출산하는 아이의 수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몽골 여성 1인당 평균 7.33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2000년대에는 2.1명 정도로 급격하게 떨어진 것이다. 이같은 하락세는 2005년에서 2010년 사이에 돼서야 멈추었으며, 2010년대에는 2.5명으로 증가하였고 지금은 약 2.2명에서 2.3명 정도선을 유지하고 있다.

몽골의 인구 가운데 민족적으로는 몽골인들이 약 95%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에 몽골인들과 조금씩 다른 소수민족들이 조금씩 있다. 그러나 이 소수민족들도 몽골인들과 그 혈통이 굉장히 유사하며, 몽골어의 방언들을 주로 쓴다. 한편 몽골인들 중 대부분은 할하인(Khalkha)으로, 전체 몽골인의 86%를 차지한다. 나머지 14%들에는 오이라트족, 부랴트인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카자흐인, 투반인 등 투르크계 민족들이 몽골 인구의 4.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39] 또한 요즘에는 세계화의 영향으로 러시아, 중국, 한국, 미국 국적의 외국인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언어[편집]

몽골어공용어다. 러시아어공산주의 시절에 제2국어 수준으로 널리 가르쳤던 언어였다. 소련 해체 이후에 러시아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줄었지만, 2007년블라디미르 푸틴이 몽골을 방문한 이후, 다시 중요한 언어로 각광받고 있다. 서쪽에는 소수의 카자흐족들이 카자흐어를 사용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과의 활발한 외교관계의 영향으로 한국어, 일본어를 배우는 몽골인들도 존재해 있으나, 지리적으로는 중국과 가까우므로 중국어도 필수 과목으로서 가르치기도 했다. 몽골어알타이제어의 하나로 넓은 뜻으로는 몽골민족이 과거에 사용했고 또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몽골계 언어 전반을 가리킨다. 좁은 뜻으로는 위구르계 몽골문자로 쓰인 몽골어 문어를 뜻한다. 현재 몽골어는 키릴 문자를 주로 사용한다.

몽골의 공용어는 몽골어이며, 인구의 95%가 사용한다. 그 외에도 오이라트인들과 부랴트인들이 비슷한 몽골계 방언들을 사용한다. 한편 국토 서부 지방에 있는 카자흐인들과 투바인들은 투르크계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한 몽골 수화가 따로 존재한다.

현재 몽골은 소련과 사회주의 시절의 영향으로 러시아의 주 문자인 키릴 문자를 사용하고 있으나, 소련의 위성국이 되기 전의 옛날에는 몽골 문자를 사용했다. 1994년에는 이스라엘처럼 옛 몽골 문자를 다시 되살리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워낙 예전에 사용했던 것을 기억하는 인구가 적고 현실의 한계에 부딪혀 실패하였다.[40] 다만 학교에서는 옛 몽골 문자를 점진적으로 재도입하고 있으며, 2020년 3월에는 몽골 정부 차원에서 2025년까지 모든 공문서에 키릴 문자와 전통 몽골문자를 동시 사용하여 표기하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몽골에서 가장 주로 쓰이는 외국어는 옛 소련의 영향으로 러시아어이며, 그 다음이 세계 공용어와 유사한 영어이다. 또한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며 영어가 점차 러시아어를 대체하고 제1의 외국어 지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또한 몇 만명에 달하는 몽골인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영향으로 점차 한국어도 그 지위가 커지고 있다.[41]

사용 지역[편집]

사용지역은 몽골을 중심으로 중국 변경지구, 아프가니스탄, 볼가강(江) 유역 등 광대한 지역에 미친다.

현대 몽골어는 동서의 대방언군(大方言群)으로 나뉘고 그 밖에 약간 고립된 방언이 있으나, 지역적 언어차는 별로 심하지 않다. 그러나 2, 3개의 고립된 방언은 어형(語形) 변화가 심하여 다른 방언과의 차이가 크다.

몽골어를 대표하는 방언은 동(東)몽골방언군에 속하는 할하어 계(系)의 언어로 현재 몽골 전지역의 공통어 구실을 한다. 할하는 옛부터 몽골제국, 원나라의 지배 계층이였다. 차하르는 몽골 제국이 남하하여 중국을 정복할 때 내몽골에 살던 몽골계 부족으로 하층 계급이다. 그래서 몽골어를 대표하는 방언은 할하어이며, 차하르어는 거의 잘 사용하지 않는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몽골어는 13세기부터 16세기 말에 이르는 중세 몽골어 시대, 17세기부터 현대까지의 근대 몽골어 시대 등 두 시기로 나뉜다.

종교[편집]

몽골의 불상

2010년의 몽골 정부 조사에 의하면 15세 이상의 몽골인들 가운데에서 약 53%가 불교를 믿으며, 나머지 중 39%가 무종교라고 답했다. 또한 몽골인들 사이에서는 역사적으로 샤머니즘이 크게 유행하였으며, 특히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계열을 중심으로 많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이 샤머니즘 신앙은 점차 티베트 불교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하였으며, 나중에는 티베트 불교가 몽골의 중심 신앙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에는 아직까지도 옛 샤머니즘 신앙의 요소가 많이 남아있으며,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잦다. 또한 서몽골 지역의 카자흐인, 투르크계 민족들은 이슬람교를 믿는다.

20세기 동안 사회주의 정부는 종교를 억압하고 사찰들을 폐쇄하는 등 종교 활동에 제약을 가했다. 대부분 티베트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박해가 가해졌으며, 한때 칸이 티베트 불교의 최고 수장이었던 탓에 불교도 봉건 잔재의 일환으로 보고 심하게 탄압을 가했던 것이다. 1930년대 말에는 처이발상 총리가 700여 개에 달하는 불교 사찰들을 폐쇄시켰으며 최소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하기도 했고, 이들 중 18,000여 명이 승려들이었다. 이러한 탄압으로 의하여 1924년에 10만 명이 넘었던 몽골의 승려 수는 1990년대에 110명으로 급격히 줄었다.[42]

1991년에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자 몽골에도 다시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티베트 불교가 다시 떠올라 국가 최대 종교로 발전하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티베트 불교 이외에도 다른 종교들도 힘을 얻어 활발한 포교에 나섰는데, 1989년에 4명에 불과했던 몽골의 기독교 신자는 2008년 기준으로 8만 명까지 증가하였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는 2013년 5월에 몽골 선교 20주년을 기념하여 대규모 축제를 몽골에서 열었으며, 이때 약 10,900여 명의 신자들과 16개의 교회를 각지에 거느리고 있었다.[43] 가톨릭의 경우 몽골에 약 1,000여 명이 있으며, 2003년에는 필리핀에서 온 선교사가 몽골의 첫 가톨릭 주교로 서품되기도 했다.

문화[편집]

몽골 국기의 왼쪽에 그려져 있는 것은 소욤보라고 하며, 태양, 달, 별, 하늘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몽골 문자에서 비롯된 몽골의 전통적 상징물이다.

건축[편집]

몽골 전통 가옥은 게르라고 하며,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옛날에는 러시아어인 ‘유르트’라고 불렀으나, 현대에 들어서는 점차 영어권 국가들 사이에서 ‘게르’라는 명칭이 더 널리 쓰이고 있다. 전통 가옥인 게르는 몽골인들의 건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16세기와 17세기에 지어진 사찰들도 기본적으로 게르를 그 건축의 기본으로 하였다. 초기의 사찰은 단순한 게르였으나, 점차 불자들이 많아지자 게르의 구조를 그대로 확장하여 사찰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몽골 건축가들은 6개에서 12개에 달하는 기둥들을 세우고 원만한 지붕을 가진 사찰을 짓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규모가 커지자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사각형 모양의 사찰들을 짓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를 모방한 몽골 전통 건축식은 사라지지 않아서 이런 사찰들에도 지붕은 기와가 아닌 게르식 천으로 덮었다고 한다.[44] 나중에 사찰이 커지자 천, 가죽 등으로 되어 있었던 복도와 불당 등이 점차 벽돌, 돌, 기와 등으로 조금씩 바꾸어나가기 시작했고, 이가 현재에 이르른 것이다.

몽골 건축은 크게 몽골, 티베트, 중국식으로 나누어진다. 몽골에 지어진 첫 사각형 모양의 건물은 1654년 경 자나바자르가 지은 사찰이다. 한편 앞서 말한 게르 양식의 대표적 건물은 울란바타르에 있는 다시-촐링 사원이다. 그 외에도 18세기에 지어진 라브린 사원은 티베트 양식으로 지어졌으며,[45] 1904년에 지어진 라민 수메 사원은 중국식으로 지어졌다. 울란바타르의 촉친 사원은 몽골과 중국 양식을 혼합해서 지은 것이다.

마두금을 연주하는 몽골 전통 음악가

음악[편집]

몽골 음악은 샤머니즘,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유목민족답게 굉장히 자연친화적인 성격을 띤다. 또한 전통 악기들도 굉장히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 현악기인 마두금 등이 있다. 또한 창법들 중에는 전통 민요이자 장가(長歌)인 우르딘 두가 있으며, 목청으로 내는 창법인 쿠메이 등이 있다. 또한 라마승들이 제사를 지낼 때에 추던 전통 춤인 ‘참’이 전통 춤으로 유명하다.

몽골의 첫 락 밴드는 1960년대에 결성된 ‘소욜 에르덴’이다. 당시 세계를 휩쓸던 비틀스와 유사한 느낌의 곡들을 연달아 발표했는데, 사회적으로 불건전하다고 하여 사회주의 정부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뒤를 이어 수많은 사회비판적인 음악가들이 등장하여 여러 곡들을 발표했다. 또한 헤비 락 음악의 선구자들 중에는 ‘무군훌리’와 ‘하랑가’ 등이 있는데, 하랑가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인기의 정점을 찍었다.

하랑가의 리더이자 유명한 기타리스트인 엔-만라이는 그의 뒤를 이어 몽골 음악계를 대표할 락커들을 양성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하랑가의 후계 음악가로 꼽히는 사람들 중에는 밴드 후르드가 있다. 또한 1990년대 초에는 그룹 하르-초노가 몽골 전통 음악을 재발견하여 널리 퍼뜨렸으며, 몽골의 장가(長歌)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에 일조했다. 몽골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유입되자, 사회에도 자유주의적 바람이 불었고 이후 몽골에서도 랩, 테크노 음악, 힙합, 보이밴드 등 여러 음악 장르들이 활발하게 발달하고 있다.

언론[편집]

몽골의 언론은 1920년대에 처음으로 창간되기 시작하였는데, 대중 선동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소련 정부가 몽골 사회주의 정권에게 선동용 언론을 만들라고 조언한 것이다. 이 때 소련의 프라우다와 유사한 우넨(몽골어로 ‘진실’이라는 뜻)이 창간되었으며, 1990년대 사회주의가 무너지기 전까지 최고 권위의 언론으로 군림하였다. 또한 사회주의 정권은 모든 언론사들을 검열하였으며, 정부와 독립적인 언론은 아예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이후 소련이 붕괴하고 민주주의가 들어오자, 언론의 자유가 인정되었고 수많은 민영 언론사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98년 8월에 국제 NGO들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언론법이 도입되었으며, 1999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46] 현재 몽골에는 300여 개에 달하는 일간지들과 방송사들이 존재한다. 2006년 이래 몽골 정부가 ‘정보의 자유’ 법을 발표한 이래 몽골의 언론 환경은 점차 개선되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으며, 이전에 비해서 몽골 정부가 언론에 개입하는 건수도 훨씬 줄어들었다. 또한 급격한 민영화로 인하여 언론 시장의 규모 자체가 늘어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언론 관련 직종에 종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2013년에 국경없는 기자회는 몽골의 언론환경을 전체 179개국들 가운데에 98위로 선정하였으며, 2016년에는 180개국들 가운데에 60위를 선정하며 이전보다 더 나아진 수치를 보였다. 아시아 개발은행의 2014년 조사에 의하면, 몽골인들의 80%가 텔레비전으로 주요 정보를 얻는다고 한다.[47]

나담 축제에서 승마를 즐기는 몽골인들

스포츠[편집]

몽골의 가장 대표적인 축제는 나담이라고 한다. 나담은 몇 백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전통 축제이며, 보통 여름에 약 3일 정도 열린다. 몽골의 3가지 전통 국기(國技)인 양궁, 승마, 보흐가 주된 종목이다. 현대 몽골에서는 민주화 혁명과 몽골의 건국을 기념하기 위하여 보통 여름인 7월 11일에 시작하여 13일에 축제가 끝난다.

몽골인들이 좋아하는 놀이들 중에는 ‘샤가’라고 부르는 놀이도 있는데, 양 뼈로 만든 구슬을 던져 멀리 떨어져 있는 뼈 조각들을 맞추어 쓰러뜨리는 놀이이다. 이 놀이도 나담 때에 함께 열리는데, 샤가는 보통 나이가 있는 노년층들이 더 선호하는 편이다.

몽골에서는 승마가 굉장히 대중적이며, 특히 나담 축제 때에 가장 인기가 많은 종목이기도 하다. 수 백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승마 경기에 참가하며, 각종 기술들을 선보이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한다. 몽골의 군사 영웅인 담딘 수흐바타르와 관련된 승마 설화도 있는데, 그는 말을 타면서 땅에 동전을 뿌린 다음 말에서 내리지 않은 상태로 그 동전을 다시 주워 담는 것도 가능했다고 한다.

승마 외에도 농구, 역도, 축구, 테니스, 주짓수, 가라테, 킥복싱, 무술 등이 점차 몽골에서 유명해지고 있으며, 특히 몽골 테니스 선수들이 점차 국제사회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또한 프리스타일 레슬링도 1958년에 전래된 이래 인기를 끌고 있으며, 올림픽 경기에서 몽골에게 가장 많은 수의 메달을 가져다준 종목이기도 하다.[48] 아마추어 복싱은 1948년 이래 몽골에서 인기를 끌었으며, 1960년에는 복싱 국가대표팀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회주의 정권은 1964년부터 1967년까지 풍기 문란을 이유로 잠시 동안 복싱을 금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풀어주었다. 한편 프로 복싱은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몽골에서는 프로 축구도 나름 인기가 있는데, 몽골 축구 국가대표팀은 1990년대부터 국제전에서 뛰기 시작하였으나 아직까지는 타 국가들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여 본격적인 경기에는 출전한 바가 없다. 러시아 하키라고도 불리는 밴디가 그나마 몽골이 뛰어난 성적을 거두는 종목들 중 하나인데, 몽골은 아시아 동계 게임에서 밴디 종목으로 3위 이상의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49] 2011년에 몽골이 밴디 종목에서 은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2017년 밴디 세계 챔피언십에서 B조의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울란바토르에서는 매년 6월에 마라톤 경기를 열며,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시작한다. 외국인과 내국인 모두가 참여가 가능하다.[50]

그 외에도 이색적인 전통 축제에는 ‘황금 독수리 축제’가 있는데, 독수리를 데리고 있는 약 400여 명의 사냥꾼들이 말을 타고 사냥 경쟁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얼음 축제와 낙타 축제도 나름대로 유명하다.

대외 관계[편집]

같이 보기[편집]

출처[편집]

  1. 당신이 상상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초원. 프레시안. 2014년 5월 12일.
  2. www.1212.mn. 《"Renewed 2015–2045 population proj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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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ichael Jerryson (2007년). 《Mongolian Buddhism: The Rise and Fall of the Sangha》. Chiang Mai: Silkworm Books.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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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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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편집]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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