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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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라틴어: Communismus, 독일어: Kommunismus, 러시아어: Коммунизм, 영어: Communism, 共産主義)는 생산수단의 공공 소유에 기반을 둔 경제, 사회, 정치 공동체 형성에 관한 사상 또는 이러한 사회 형성을 목표로 삼는 형식적·실질적 정치 운동에 관한 사상이다.

또한 플라톤(Platon)의 『국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본래 공산주의적 사고는 전근대 사회에도 존재했으며, 이후 유럽의 로마 가톨릭 사회에서 등장한 유토피아주의자의 만민 평등 사상 및 지상천국 운동을 뜻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오늘날에 통용되는 공산주의라는 의미는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 전반에 관한 것을 뜻하며, 변증법·역사주의·유물론이 핵심 사고로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이 사상이 현실 정치에서 본격적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시점은 19세기 유럽의 산업화 시기와 겹친다. 이 당시 유럽은 급속한 산업 발전에 따른 갖가지 사회병리현상을 겪고 있었는데, 공산주의는 이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주창되었다.

이후 수많은 사회주의 이론과 병립하여 공산주의는 거대한 종합 사상으로 성장하였다. 1871년 파리에서 코뮌 봉기의 형태로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가 성립했으나, 존속 기간은 상당히 짧았다. 1917년에는 러시아의 공산주의자에 의해 10월 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 발발한 내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여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성립되었다. 이후 공산주의 운동은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대표하는 운동으로 인식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경로를 통하여 동구권 및 아시아의 공산주의권이 성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한 이후부터 공산주의이후 수많은 사회주의 이론과 병립하여 공산주의는 거대한 종합 사상으로 성장하였다. 1871년 파리에서 코뮌 봉기의 형태로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가 성립했으나, 존속 기간은 상당히 짧았다. 1917년에는 러시아의 공산주의자에 의해 10월 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 발발한 내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여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성립되었다. 이후 공산주의 운동은 주로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대표하는 운동으로 인식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의 경로를 통하여 동구권 및 아시아의 공산주의권이 성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한 이후부터 공산주의 운동은 사실상 쇠퇴의 일로를 맞고 있다. 운동은 사실상 쇠퇴의 일로를 맞고 있다.

어원[편집]

Communisme라는 프랑스어로부터 비롯되었으며, Communisme는 라틴어로 '공동체', '공유'(共有), 공공(公共) 등을 뜻하는 Commúnis에서 나왔다. 실제 문헌에서 등장하는 첫 사례는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Victor d'Hupay가 프랑스 소설가인 레티프 드 라 브르통느(Nicolas-Edme Rétif)에게 보내는 서한의 내용이다. 그는 여기서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묘사하고 있다.[1]

Communisme에 기초한 용어 사용은 영국과 독일 등을 시작으로 하여 전(全) 유럽에 퍼졌다. 19세기 초반까지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인간이 갖고 있는 형이상학적 도덕성 발현 및 로고스(Logos)의 실천적 구현을 통하여 지상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일종의 인본주의(Humanism) 정치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본래 국가의 소멸을 주장하는 사상과는 무관하였다. 플라톤, 모어, 캄파넬라, 바뵈프 등 19세기 초반 이전에 존재한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은 다음 열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고아, 독거노신, 장애가 심한 사람 등 경제적으로 활동하기 힘든 자의 삶은 모두 국가가 책임지며 의무를 적게 부여한다.
  2. 국가가 자녀를 양육한다. 자녀 교육은 국가가 일률적으로 실시하며, 생산할 수 있는 인구의 양은 국가가 정한다.
  3. 국가는 모든 인민이 경제, 문화, 지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4. 국민개병제에 입각하여 모든 인민이 의무적으로 일정 기간 동안 군대에 복무하게 한다.
  5. 남성과 여성에게 똑같은 권리와 의무를 부여한다.
  6.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 모두가 동등하게 법의 혜택은 물론, 구속력도 받게 한다.
  7. 식량, 주거, 의료를 국가가 최대한 제공한다.
  8. 일요일을 제외한 나머지 요일에 대한 일 4-5시간 노동을 의무화한다. 노동은 각자의 개성과 능력에 맞추며, 아동·청소년과 노인은 노동 의무에서 제외한다.
  9. 일주일에 한 번씩 서로를 비판하게 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마음에 얽혀져 있는 불만을 없앤다.
  10. 일체의 신분세습제와 노예제를 폐지하고, 능력에 따라 등용한다. (또는 능력에 따라 계급이 정해진다)
  11. 토지를 포함하여 모든 생산 시설을 국가가 소유하며, 징세제도를 폐지한다.
  12. 현상 이면의 법칙을 통찰하는 데에 능한 현자가 통치한다. 현자는 국가 경영을 제외하고는 정해진 곳에서만 머물 수 있으며, 급여를 받지 않고, 자녀와 재산을 가질 수 없다.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갖는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일찍부터 유럽 내에서는 공산주의 사상이 기독교에 대항하는 피조물의 사상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이에 따라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서구권에서 상당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실제 공산주의와 무관한 요소를 공산주의라고 여기는 일련의 오해를 불러왔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는 부모와 처자를 공유한다.”, “공산주의는 옷도, 화장실도, 공유한다.”, “공산주의는 화폐를 포함한 모든 재산을 다 강제로 빼앗아서 똑같이 분배한다.” 등이 그것이다. 부모와 처자 공유와 비슷한 주장은 플라톤이 『국가』에서 주장한 바 있으나, 그것은 부모와 처자를 공유하는 것이 아닌, 자녀를 국가가 전적으로 양육한다는 것이었으며, 양육된 자녀를 한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이 짝으로 이루어진 수호자 계급이 택하여 키울 수 있다는 주장이기에 해당 주장과는 다르다. 나머지 내용도 역시 공산주의와 무관하다. 1840년대부터는 공산주의라는 용어가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사회운동가들은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였다. 이 당시에도 공산주의는 위와 같은 정의를 포함하여 경제적인 영역을 넘어서 모든 사회 조직을 평등하게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치 운동으로 이해되었다. 이와 달리 사회주의는 경제 영역에서만의 평등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으로 받아들여졌다.[2] 공산주의가 다시 정치 용어로 전면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회주의를 낡은 용어라고 규정한 후 볼셰비키당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한 이후부터이다. 이 시기부터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와 확실히 다른 개념이자, 동시에 유물론과 계급 투쟁에 기초한 진일보한 혁명 사상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었다.[3]

레닌이 공산주의를 사회주의와 확실히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선언한 이후부터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에서 사회주의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를 의미하는 용어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등치됐다. 유럽 내 비(非)마르크스주의 집단 사이에서 공산주의는 주로 계급 투쟁, 무신론, 유물론에 기초한 반신론(反神論)적 폭력 혁명 사상으로 여겨졌다. 유럽 내에서의 이러한 규정은 당시 유럽 사회가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다.[4]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사회주의는 대륙에서 존중받았으나, 공산주의를 그렇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샤를 푸리에나 로버트 오웬과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종교 진영 내에서도 존경받는 운동가로 인식되었으나 공산주의자에 대한 종교인들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5]

국제사[편집]

18세기 말엽 당시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을 통하여 정치 영역에서 최초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흐름이 일어났다. 프랑스 대혁명은 개혁적 귀족, 부르주아와 도시 빈민 사이의 혁명적 연합을 통하여 발현된 사건이었지만, 당시 프랑스 혁명의 지도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자코뱅 좌익(몽테뉴파)에서 공산주의적 사고가 시발(始發)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몽테뉴파는 지리멸렬하여 극소수의 정파만 남게 되었다. 이후 테르미도르파 정권에 저항한 공산주의자 그라쿠스 바뵈프(Gracchus Babeuf)의 단두대형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몇 차례 일어났다.

공산주의자동맹 성립(1847)[편집]

벨기에의 청년헤겔주의 조직인 브뤼셀 공산주의자 연락위원회(Communist Correspondence Committee of Brussels)와 영국의 기독교 공산주의 단체인 정의자동맹(League of the Just)이 1847년 6월에 합당하여 '공산주의자동맹'(Communist League)이 성립하였다. 공산주의자동맹 창당 시기에 쓰여진 선언문이 바로 『공산당 선언』(독일어: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이다.

공산주의자동맹의 맹원들은 급진적 공화주의자들이 요구하던 기초적 요구와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비인간성을 비판하였고, 자본주의 사회보다 질적으로 더 높은 사회 단계를 이룰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정의자동맹의 지도자였던 빌헬름 바이틀링과 연락위원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칼 마르크스의 노선 차이로 인해 내부 맹원들이 서로 수시로 다퉜고 결국 1852년에 동맹을 해산하게 된다.[6]

제1인터내셔널 성립(1864)[편집]

정식 명칭은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이다. 1864년 9월 28일 카를 마르크스과 프리드리히 엥겔스 주도로 런던에서 성립되었다. 당대 유럽 사회를 자본주의 단계라고 분석하였으며, 자본주의 사회가 갖고 있는 온갖 병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는 계급 투쟁이 국제적으로 벌여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카를 마르크스가 작성한 국제노동자협회 발기문 및 임시 규약문에서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7]

제1인터내셔널은 공산주의자 외에도 유토피아주의자, 급진적 공화주의자, 아나키스트, 국가사회주의자 등 수많은 진보적 운동가들이 참여한 국제 노동운동 단체였기에 내부 노선 투쟁이 상당히 가열차게 진행됐다. 마르크스는 1872년 제1인터내셔널 헤이그 대회에서 프루동파의 주택 문제 해결 방법[8]이 급진적 부르주아가 구상하는 일반적인 방법론과 다를 게 없다고 하였다. 당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투기성을 극복하지 않는 한 국가 주도의 주택 공급이든, 사회적 기금 형태의 주택 공급이든 모두 최종적 실패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으며, 결과적으로 투기성은 자본주의의 본질이기에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투기를 없앨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타파해야지만 토지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1875년에는 『고타 강령 초안 비판』를 작성하여 페르디난트 라살레 주도 국가사회주의의 소부르주아성과 이들과 타협한 전(全)독일노동자동맹(독일 사회민주당의 전신)을 비판하였다.[9]

파리 코뮌 붕괴 이후 각국의 노동운동 탄압이 심해지고 일련의 투항주의 경향이 잇따라 일어나자 제1인터내셔널 내 이론적 논쟁은 더욱 심화되었고, 내부 계파는 더욱 많은 수로 증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76년 해산하게 된다.

파리 코뮌의 형성(1871)[편집]

1870년 9월 2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후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총리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항복하였다. 이 소식이 파리 군중에게 전해지자 분노한 군중은 거리로 나와 항쟁하였고 프랑스 제2제정 정부는 빠르게 무너져갔다. 이후 제2제정을 구성했던 일부 대의원이 프랑스 임시정부를 세웠으나 혼란을 멈추지 않았다.

프랑스는 국민의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1871년 2월 8일에 총선거를 치루었다. 이 선거에서 왕당파가 60% 이상 넘는 득표율을 얻었으나, 파리 지역만은 공화파가 더 높은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1871년 2월 12일에는 국민의회가 구성하였던 프랑스 임시정부가 프로이센에게 유리한 조건인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 임시정부는 기존의 체제를 다시 공고히하기 위하여 파리 지역도 복고화하려고 했으나 파리 대중은 이에 불만을 느꼈다. 임시정부의 수반인 아돌프 티에르가 파리 지역의 수비대를 해산하려고 하자 같은 해 3월 26일 파리 대중이 봉기하여 파리 코뮌이 성립되었다.[10]

이 시기 공화파는 크게 두 가지 계파로 이루어졌었는데, 급진자코뱅의 경우는 공산주의적 신념을 갖고 있었으며, 이 중에서 폭력혁명을 긍정한 계파는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지도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집산주의에 기초한 자율적 사회주의를 추구한 프루동도 공화파로 분류되었다. 이 시기 공화파는 특정 작업소의 야간 노동 금지, 교육의 세속화와 무상교육 실시, 공창(公娼)제 폐지, 노동자를 향한 고용주의 독단적인 행동 저지, 토지 분배 등의 정책을 실현하였다. 1871년 5월 21일 마크 마옹이 이끄는 진압군이 파리에 진입하여 코뮌을 파괴하였고, 코뮌에 동조하였던 공화파는 학살당하였다.

냉전과 공산주의[편집]

자본주의 국가들은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전파를 막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는데 이 중 미국을 대표로 정치경제학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필리핀, 대한민국, 중화민국, 베트남 공화국 등지에는 미국의 전면적 후원을 등에 업은 강력한 국가주의 정부가 들어서 반공산주의 교육을 강화하며 국내 진보사회운동 세력들을 공권력으로 탄압하며 정치계에서는 극단적인 반공주의로 불리는 매카시즘 등으로 진보 진영 분열을 꾀했다. (자세한 것은 코인텔프로를 참고하라.)

이러한 반공주의는 미국에서도 극심하였다. 1950~60년대이후 미국의 공산주의 탄압은 겉으로는 공산주의자간첩 추방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뉴딜정책 관련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힘없게 하려는 미국 공화당의 정치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미국정부는 지적 반공주의 그러니까 반공주의 지식인들의 활동을 CIA에서 거액보조금으로 키우는 방법으로 정치외교문제에 대해 자유주의 견해를 주장하는 미국내 자유주의자들의 수를 급감시키기도 했다. 매카시 광풍이 1954년 막을 내린 이후에도 미국 내 공산주의 탄압은 계속되어 미국 지식인 사회는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는 미국 지식인사회에서 활약하던 진보주의자들은 물론, 공산주의자들과 지지자들이 탄압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 출판계도 마찬가지여서 미국 출판사 편집자들은 논란의 소지가 있는 진보적 작가들의 책을 내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출판인들은 유럽 출판계와 협동하거나, 다른 출판사에서 외면받은 작가들과 계약하는 등 공산주의 탄압으로 침체된 미국 지식인 사회를 회복시키고자 하였다.그 실례로 미국 랜덤하우스 계열사였던 판테온 출판사는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P. 톰슨의《영국노동계급의 형성》(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es), 에릭 홉스봄, E. H. 카 등의 저서, 미국 노예제도를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해석한 《노예제도의 정치경제학》(The Political Economy of Slavery, 유진 제노비스 저) 등을 출판하였다.[11]

사상사[편집]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근대에 들어서 생성되었으나, 공산주의와 유사한 사상은 이미 전근대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고대 공산주의[편집]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n)은 자신의 저서 『국가』에서 생산자, 수호자, 철인이라는 세 계급으로 구성되는 공공(公共)의 국가를 구상하였다. 플라톤은 『국가』 제5권과 제8권에서 민주주의 정치는 개인의 억견(Doxa)에 기반한 정치이기에 필연적으로 부정의를 낳을 수밖에 없으며 결국엔 잘못된 자에 의해 이끌어지는 참주정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적 능력이 뛰어난 자를 선별하여 이들을 수호자 계급으로 하고, 최정점에 선 자를 철인으로 정하여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5권에서 유동 재산, 주거, 토지에 관한 완전한 국가 소유 및 이에 기초한 공유를 주장한 동시에, 자녀도 국가가 책임을 지고 양육(養育)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사고를 내보이고 있다.[12]

유토피아주의[편집]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톰마소 캄파넬라(Tommaso Campanella)는 『형이상학』(Metaphysica)에서 전하는 선의 이데아가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세계를 선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하였는데 그 결실이 바로 그의 저작인 『태양의 나라』(La città del Sole)이다.

그는 본래 로마 가톨릭의 교육을 받고 자랐으나, 사상은 인본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는 선의 이데아는 부동의 일자(一者)라고 하였으며, 이것은 어떠한 인격신의 모습을 취하지도 않으며, 동시에 만유 그 자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자의 합일성은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충분히 이질적이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당시 로마 가톨릭 사회에서 금기시되는 합리주의적 사고였기에 그는 여러 번 투옥을 겪어야 했다.

그는 『태양의 나라』에서 선의 이데아는 하강화(Prohodos)를 통하여 스스로의 선함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는데, 그 선함은 본래의 선한 의도라고 할 수 있는 선의 이데아와 동질이라고 할 수 없으나, 인류에게 충분히 선한 작용을 하며, 하강화의 본래 특성에 따라 감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형태라고 하였다. 그 주요한 형태의 첫 번째 대원칙은 모든 토지, 주거의 공공 소유이다. 두 번째는 교육, 의료의 전적인 무상이다. 여기서 그는 자녀의 교육은 모두 국가가 맡아야 하며, 자손증식은 오로지 국가가 정해놓은 규정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세 번째로는 모든 인민이 노동권을 보장받아 적절한 노동을 하며, 노동 시간은 일요일을 제외한 일 4시간이라는 것이다.[13]

마르크스주의[편집]

카를 마르크스는 이전에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칭하였던 관념적 사회주의와 스스로의 사상을 구분하였으며, 이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하였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이 역사 발전의 본질적인 원동력이라는 그의 사적 유물론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통하여 노동(Arbeit)이 갖는 의식적 성격을 규명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이전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현상계와 절대계를 나누고 있으며, 존재론적 함의를 버리지 않고 있으나, 현상이 없이 절대가 없으며, 절대가 없이 현상이 없다라는 실천주의 논지를 바탕으로 이전의 교조적 형이상학과 자신의 철학을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본질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의식적 실천을 노동이라고 한 것이다. 노동은 생물체 중 가장 고등한 인간의 추상성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전위적인 의식 활동으로, 인간이 진정 인간다울 수 있게 하는 해방성을 갖추게 하는 능동적 창조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자유로운 의미에서의 노동은 생산력의 한계를 통하여 구축된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로 인해 온전히 발현되지 못 한다.[14]

마르크스는 노예제 사회에서 노동은 노예노동으로 되며, 봉건제에서 노동은 소생산 행위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노동력(Arbeitcraft) 산출로 열화된다고 하였다. 그는 인간이 진정 자유로운 의식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은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이 사라진 공산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15] 그리고 인류는 모순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투쟁하여 사회를 발전해왔는데 그것을 계급 투쟁이라고 하였다.

계급 투쟁은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여 더 높은 수준의 생산력을 수용할 수 있는 생산 관계를 구축한 사회를 만드는 혁명 실천이다.[16] 마르크스는 여기서 인간의 의식성은 생산 관계와 생산력 사이의 모순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는데, 당시 시대적 상황은 자본주의 사회로, 노동력 산출이 노동의 열화된 형태로서 기능하는 사회라고 분석했다.

레닌주의[편집]

1920년 당시 파벨 쥬코프(Pavel Zhukov)가 찍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진이다. 그는 정통마르크스주의의 비판했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현실에 맞게 발전시켰다.

카를 마르크스1845년 자신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Die Deutsche Ideologie)에서 이전 청년헤겔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허구성을 비판하고 생산관계에 의해 발전되는 미래 사회에 대해 논했다. 그리고 그것을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라고 칭하였다. 이 이후부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지에서 일반적으로 공산주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극복된 사회를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상대는 프리드리히 헤겔(Friedrich Hegel, 1770 - 1831)이 주장한 절대정신(absoluter Geist)과 같은 이상적 상태이며, 그것은 현재적 의미에서 논해질 때 하나의 실현 가능성으로서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청산하는 시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기간을 상정하였고, 이 기간을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에 대해 투쟁하는 최상의 열기가 존재하며, 동시에 그 싸움이 프롤레타리아의 승리로 확정되는 과도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가 취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논하지 않았으며, 결국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혁명 과정에 대한 해석에서 수많은 후대 공산주의자들의 논쟁을 촉발하게 된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논쟁에 참가하여 자본주의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가져야 할 자세와 이들이 과도기적 단계에서 만들어나가야 할 사회를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카를 카우츠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치열한 경쟁을 하였고[17], 이 과정에서 정립된 이론과 테제는 훗날 레닌주의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레닌주의의 기반 위에서 1917년 혁명 이후 보완해야 할 점을 추가하여 최종적으로 스탈린에 의해 계승된 것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동시에 블라디미르 레닌의 인식론 저서인 『유물론과 경험비판론』(러시아어: Материализм и эмпириокритицизм. Критические заметки об одной реакционной философии)을 정리하였다. 이 저서는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자이자 물리학자인 에른스트 마하의 속류유물론적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동시에, 동시대 경험주의적 유물론, 기계적 유물론을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인 유물론을 정립하려고 했던 레닌의 의도로부터 쓰여진 것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레닌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계승하여 DIAMAT 교조를 수립하였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일체의 유심주의, 기계주의, 기회주의 해석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현실 정치 측면에서도 수많은 족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우드로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탄생한 블라디미르 레닌의 민족자결론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세계 민족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이다.[18] 또한 사회주의국가에서 노동자·농민·병사 위원회인 소비에트의 독재의 필요성을 서술했다. 이것은 현대 정치에서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 그리고 혁명적 독재라는 세 가지 요소를 모두 갖는 사회주의정치라는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더 나아가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종교 문제에도 급진적으로 개입하여, 국가 무신론을 주장했으며,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장한 인민의 지도자 또는 수령의 독점적인 역할을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에서 강조한 만큼 국민주권(Popular sovereignty), 대의제(Representative democracy), 법치주의(Nomocracy)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에 필적하는 대표적 사상이었다.

혁명에 대한 입장은 소위 '정통마르크스주의자'(Orthodox Marxist)라고 불리던 집단과 달랐다. 기존의 정통마르크스주의자 ― 소위, 칼 카우츠키를 신봉하는 ― 들의 경우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그 공황으로 인해 자본가는 최후의 선택을 하며, 자본주의 사회에 존재하는 노동자들과 계급대립이 정점에 이르면서, '자발적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레닌주의자들은 이미 유럽의 자본주의 공황은 끝에 다다랐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이미 러시아에 영향을 준다고 봤다. 자본의 팽창에 따른 공황, 그리고 그 공황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은 국경 단위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세계 단위로 이루어진다. 그 근거를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태동했던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자본주의 공황으로 인한 주위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혼란 조성을 예로 들었으며, 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그저 노동자 세력이 와해되거나, 유산계급에 헌신하는 국가의 무차별적 탄압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19] 동시에 카를 마르크스가 깊게 조명하지 못 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체적인 제도화를 계획했다. 이러한 면에서 레닌주의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으로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려고 했다. 또한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러한 레닌주의를 그대로 계승했다.[20]

마르크스-레닌주의[편집]

마르크스-레닌주의(러시아어: Марксизм-ленинизм, 문화어: 맑스-레닌주의, 중국어 정체자: 馬克思列寧主義, 영어: Marxism–Leninism)는 이오시프 스탈린(러시아어: Ио́сиф Ста́лин, 1879 - 1953) 주도하에 정립된 레닌주의 경제·사회·정치·철학 이론을 종합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이며,[21] 근대 제국주의 시대와 냉전 시대의 보편적인 공산주의 사상이다.

1920년대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러시아어: Развитие капитализма в России)을 비롯한 블라디미르 레닌(러시아어: Влади́мир Ле́нин, 1870 - 1924)의 각종 저서의 내용을 통일·정립하였으며, 카를 마르크스(독일어: Karl Marx, 1818 - 1883)·프리드리히 엥겔스(독일어: Friedrich Engels, 1820 - 1895)의 이론을 레닌주의와 연계하여 소련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정설을 세웠고, 그 결론으로 얻은 종합적 견해를 『레닌주의의 기초와 레닌주의의 제문제』(러시아어: Об основах ленинизма)라는 강연을 통해 드러냈다.[22][23] 그후 1935년 10월부터 이오시프 스탈린은 다른 고위 볼셰비키들과 공동 저술을 통해 공산주의 이론 종합 작업을 간명화(簡明化)하였는데, 그 결과로 저작된 책자가 바로 1938년 10월 1일에 출판된 『볼셰비키당사』(러시아어: История Всесоюзной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ой Партии: Краткий курс)이다. 이 책자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용어를 보편화시킨 동시에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한 세계관 및 역사 해석을 공산주의적 세계관 해석의 통일적인 해석론으로 규정한다.[24] 이 용어는 오늘날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이오시프 스탈린 집권기 시기에 행해진 세부적인 정책, 그리고 그의 레닌주의 해석법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소련의 정치가이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측근이었던 라자리 카가노비치(Ла́зарь Кагано́вич, 1893 - 1991)는 이 의미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러시아어: Сталинизм, 영어: Stalinism)와 같다고 하였으며, 스스로를 스탈린주의자라고 하였다.
  2. (1)의 의미에 기반하여,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에 이어진 수정주의 흐름[25]까지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이 의미에 따르면, 마르크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라는 용어와 구별될 수 있으며, 오늘날 제일 많이 쓰이고 있는 용례라고 할 수 있다.
  3. 이오시프 스탈린이 시도한 레닌주의 왜곡이라는 의미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마르크스-레닌주의스탈린주의는 같은 사상이며, 주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레닌주의 해석을 비판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의해 선호된다.[26]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독일어: Revolutionärer Marxismus)의 연장선상에 속하며, 정통마르크스주의(독일어: Orthodoxer Marxismus)의 교조성, 비현실성을 극복한 사상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인해 소련 내에서 수정주의 기조를 거치게 되었지만[27],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는 각각 호자주의(Hoxhaizmi, Hoxhaism), 마오쩌둥 사상(毛澤東思想, Maoism), 주체사상(主體思想, Juche)의 형태로 반수정주의화(反修正主義化)되었다.[28]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냉전 시대에 존재했던 수많은 사회주의국가가 국가 이념으로 채택했던 이념이며, 제3세계의 국가 정책 및 경제발전 이론에 영향을 주었다. 현재도 반제국주의(反帝國主義)와 폭력혁명(暴力革命)를 동반한 대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사상 체계이다.

트로츠키주의[편집]

트로츠키주의는 레프 트로츠키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에 대항하여 레닌주의세계 혁명 쪽으로 발전시켜 만든 공산주의의 분파 사상이다. 트로츠키주의는 공산주의의 하부 이론인 세계혁명론영구혁명론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국제 노동자 운동에 중점을 두어야한다고 주장하였고 그 때문에 트로츠키주의는 국제 공산주의의 시초라고도 불린다.[29]

이러한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주의자들에게 큰 반발심을 주기도 했지만, 제일 큰 반발심을 표출한 쪽은 바로 남미 쪽의 친미 정부였다. 당시 남아메리카의 기타 정부는 친미 정부하에 극단적 반공주의 체제를 실행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곳은 항상 반미-공산주의 투쟁이 심한 지역이었는데, 트로츠키주의는 이러한 공산주의 운동을 적극 지원해준다는 이론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론을 가진 트로츠키주의가 소련 사회를 휘어잡을 시, 남미의 친미 정부는 극심한 공산주의자들의 맹공을 받아야하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과의 권력 다툼에 밀려 소련에서 추방당한 이후 일생을 스탈린주의에 대항하며 살았는데 그에 관한 대표적인 저서로는 《스탈린주의 날조학》이라는 저서가 있다.

룩셈부르크주의[편집]

블라디미르 레닌의 라이벌 공산주의자인 로자 룩셈부르크레닌마르크스주의에서 제일 중요한 민주성이 보장된 사회를 저버렸고, 부르주아적 공산주의자 내지는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이 때문에 레닌주의가 주장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독재로 변질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룩셈부르크주의에서 구현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는 의회공산주의를 기초로하며, 완벽한 삼권분립을 주창한다.

유럽공산주의[편집]

1970년대 초반부터 프랑스 공산당 등의 서구의 공산당들은 유로코뮤니즘(Eurocommunism)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소련 특히, 스탈린주의에 대한 무비판적이며 무조건적인 지지의 전통에서 분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정당들은 프랑스, 스페인이탈리아 등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일본도 비슷한 노선을 걸었다. 프랑스 공산당의 경우 1970년대 프랑스 사회당과 함께 70% 이상의 득표율을 얻기도 했었으나, 1990년대 소련의 해체와 소련의 위성 국가들의 붕괴 이후 의석 수가 줄어들며 위상이 급격히 떨어졌다.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편집]

  • 부르주아 경제학으로부터의 비판 : 공산주의는 유토피아적 체제로서, 사람들의 근본적인 '욕구'를 무시한 체제이다. 개인의 동기부여가 되지 않음으로 인해 공산주의 체제는 낮은 생산성과 개인의 불행이 만연한 체제가 되었다. 한편, 자유주의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공산주의자는 자신의 의지와 사회의 의지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완벽한 독재자"라는 언급으로 공산주의의 내적 결함을 지적한 바 있다.
  • 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의 비판 : 공산주의는 존재론을 근대화한 것에 관한 최종적 산물이며, 역사적 단계론도 역시 이러한 근대주의적 사고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 무정부주의(아나키즘)자들로부터의 비판 : 공산주의 이론은 레닌주의에서부터 잘못되었다. 본래 마르크스주의에서 '국가'라는 것은 영구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없어져야 할 권위체임에도 불구하고, 레닌주의는 국가를 절대화시켰다.

공산주의에 대한 오해[편집]

공산주의에 관한 오해는 크게 다음 두 가지로 나눠진다.

  1. 공산주의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제도로 독재 정치를 옹호한다.
  2. 공산주의는 모든 재산을 평등하게 나누며, 노동의 대가도 일한 것과 무관하게 똑같이 받는다.

(1)은 냉전 시기 공산국가라 칭해지던 소비에트 연방과 동구사회주의권의 정치 현실에 착안하여 널리 통용되는 오해이다. 카를 마르크스 이론의 적통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의 공산주의를 말할 때, 공산주의가 민주주의에 대하여 후진적인 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이후 논의되는 문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대다수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사회주의의 아래 단계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경제 영역에서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내적 모순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 한 상태에서는 사회주의보다 열화된 민주주의적 정치가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과도기의 한 부분에 불과하며, 사회주의보다 열등한 사회 체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가령, 현재 공산주의 집단 사이에서 격렬하게 논의되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나, 사회주의 혁명이냐?”라는 주제는 공산주의자들의 위와 같은 입장을 잘 드러내고 있다.

(2)은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규정하는 노동(Arbeit)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 했을 경우 오해하는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에 대하여 “인간의 경제 행위가 노동(arbeit) 그 자체로서 발현될 수 있는 완전히 해방된 사회”라고 하였다. 이것은 노동이 생산 수단을 점유한 특정 계급에 의해 열화되는 것이 아닌, 인간이 자율적인 사고하에서 그 자체로 표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 사회에서 유·무형 재산은 물론이고, 노동의 대가는 이에 맞춰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를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으며, 능력에 따라 노동하는 사회”라고 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사례[편집]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는 경제, 정치, 철학적이고 학술적인 공산주의의 의미가 아니라 왜곡되고 적대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한국 전쟁의 경험에서 기인한 것으로, 한국 전쟁 발생 20년 전후로 출생한 사람들이 남북한 대립의 상황으로 인해 공산주의라는 단어 자체를 꺼내는 것을 금기시하거나 적대적인 것과 관련있다.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는 철학적 이념, 정치·경제 체제가 아닌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통치 체제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축소돼 이해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 경제 권력이 김일성, 김정일 일가에 독점되는 특유의 시스템과 결함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권들을 거치면서 공산주의는 기성세대들에 의해 민주주의의 반의어인 것처럼 쓰였다는 점에서 더욱 본질적인 원인을 찾아낼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군인 대통령 시대를 지나 사회가 선진국식 민주화와 전지구적 시장경제로 점차 진행되고 냉전이 종료된 뒤는 공산주의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분위기는 상당히 없어졌다. 하지만 대한민국 내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은 지지정당과 관계없이 부족한 편이다.[30]

대표적인 공산주의자[편집]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Grandjonc, Jacques (1983). “Quelques dates à propos des termes communiste et communisme”. 《Mots》 (French) 7 (1): 143–148. doi:10.3406/mots.1983.1122. 
  2. Steele, David (1992). 《From Marx to Mises: Post-Capitalist Society and the Challenge of Economic Calculation》. Open Court Publishing Company. 43쪽. ISBN 978-0-87548-449-5. One widespread distinction was that socialism socialised production only while communism socialised production and consumption. 
  3. Steele, David (1992). 《From Marx to Mises: Post-Capitalist Society and the Challenge of Economic Calculation》. Open Court Publishing Company. 44–45쪽. ISBN 978-0-87548-449-5. By 1888, the term 'socialism' was in general use among Marxists, who had dropped 'communism', now considered an old fashioned term meaning the same as 'socialism'. [...] At the turn of the century, Marxists called themselves socialists. [...] The definition of socialism and communism as successive stages was introduced into Marxist theory by Lenin in 1917 [...], the new distinction was helpful to Lenin in defending his party against the traditional Marxist criticism that Russia was too backward for a socialist revolution. 
  4. Williams, Raymond (1985) [1976]. 〈Socialism〉. 《Keywords: A Vocabulary of Culture and Society》 revis판.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52-0469-8. 
  5. Engels, Friedrich (2002) [1888]. Preface to the 1888 English Edition of the Communist Manifesto. Penguin. p. 202.
  6. David Fernbach, "Introduction" to Karl Marx, The Revolutions of 1848. New York: Random House, 1973; pg. 23.
  7.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III(2005). pp. 4-5, 15-16
  8. 당시 프루동은 주택 건설 및 보증금, 입주금 지원을 위한 사회적 기금을 구성하여 해당 기금을 통해 주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였다.
  9.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IV(2005). pp. 242-243, 363-364
  10. Milza, 2009b, p. 421
  11. 《책들의 사업》(The Business of Books)-판테온의 제2시대/앙드레 쉬프랭 지음/류영훈 옮김/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p. 61-65
  12. Plation. 조우현 역. 2012년. 국가. 올재. pp. 222-223, 250-251
  13. 『태양의 나라』 본문
  14.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I(2005). pp. 193-194
  15.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I(2005). pp. 419-420
  16.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I(2005). pp. 402-403
  17. 이 항목은 1999년에 저작된《The New Fontana Dictionary of Modern Thought Third Edition》을 참조하라.[쪽 번호 필요]
  18. 이 항목은 1953년에 저작된《The Impact of Russian Culture on Soviet Communism》을 참조하라.[쪽 번호 필요]
  19. 이 항목은 1991년에 저작된《The New Penguin Dictionary of Modern History》을 참조하라.[쪽 번호 필요]
  20. 이 항목은 1969년에 마쉬 로윈이 저작한《Lenin’s Last Struggle》을 참조하라.[쪽 번호 필요]
  21. Dictionary of Historical Terms (1998) Second Edition, Chris Cook, Ed., pp. 221–222, p. 305.
  22. The New Fontana Dictionary of Modern Thought (1479) Third Edition, Allan Bullock and Stephen Trombley, Eds., p. 506.
  23. Lisischkin, G. (Г. Лисичкин), Novy Mir (Мифы и реальность, Новый мир), 1989, № 3, p. 59 (러시아어).
  24. "Marxism" entry in the Soviet Encyclopedic Dictionary.
  25. 니키타 흐루쇼프(Ники́та Хрущёв) 이후의 소련, 덩샤오핑(鄧小平) 이후의 중화인민공화국 등
  26. Лев Троцкий (Lev Trotsky), Сталинская школа фальсификаций, М. 1990, pp. 7–8 (in Russian)
  27. The Cold War: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1917–1991, by Ronald E. Powaski.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28. The New Fontana Dictionary of Modern Thought, Third Edition (1999), Allan Bullock and Stephen Trombley, Eds., p. 501.
  29.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8549
  30. “대한민국은 이제 반공주의를 버려야 한다”. 《데일리 NK》. 2010년 10월 4일. 2020년 3월 25일에 확인함. 

참고 문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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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rl Marx, Friedrich Engels, 박종철출판사 역, 2005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III』, 박종철출판사
  • Karl Marx, Friedrich Engels, 박종철출판사 역, 2005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IV』, 박종철출판사
  • Karl Marx, Friedrich Engels, 박종철출판사 역, 2005년,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V』, 박종철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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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