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베트남 전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검색
중국-베트남 전쟁
(인도차이나 전쟁냉전의 일부)
중국의 베트남 침공 경로
중국의 베트남 침공 경로
날짜 1979년 2월 17일 - 1979년 3월 17일
장소 중국-베트남 국경 부근 일대
결과 양측 모두 승리 주장
교전국
중화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베트남 베트남

지원국
소련 소련
라오스 라오스

지휘관
중국 덩샤오핑
중국 양더지
중국 쉬시요우
베트남 똔득탕
베트남 레주언
베트남 반티엔덩
병력
총병력 20만 명, (이후 40만 명으로 증가) 광저우 군관구
63형 전차 400대
J-6형 전투기
정규 병력 7만 ~ 10만 명, 민병대 및 국경수비대 15만 명
A-37 공격기 수십기
피해 규모
중국측의 자국 피해
2만 3000명 사상
베트남측의 자국 피해
민간인 1만 명 사망, 20000명 사상

중월 전쟁 또는 중국-베트남 전쟁(베트남어: Chiến tranh biên giới Việt-Trung戰爭邊界越-中?, 영어: Sino-Vietnamese War, 중국어 간체: 中越战争, 정체: 中越戰爭)은 1979년 2월 17일 국경분쟁을 시작으로 일어난 중화인민공화국베트남 사이에 일어난 전쟁으로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한다.

배경[편집]

1975년 북베트남의 베트남 전쟁 승리로 베트남은 공산 통일되었고, 그 여파로 인접국인 캄보디아라오스도 공산화되었다. 베트남 공산당은 전쟁 중에 중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으나, 역사적으로 베트남인들의 대중국 감정이 좋지 않은 데다가 공산 정권이 남베트남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교를 탄압하여 양국관계는 험악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친중국계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관계도 악화되었으며, 급기야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이 발발하였다. 베트남의 이웃 나라 캄보디아는 1975년 4월 론놀의 친미 군사 정권이 전복되었고, 1976년 1월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고 민주 캄푸치아의 성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폴 포트 정권은 대량 학살을 수반하는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고, 통일 베트남과의 대립이 격화되어 1978년 1월에 국경 분쟁으로 국교를 단절하기에 이르렀다.

캄보디아 내의 베트남계 주민에 대한 폴 포트 정권의 박해와 공포 정치가 극에 달하고 캄보디아와의 미확정 국경 문제로 인해 크메르 루주의 국경 침범과 도발이 반복되자, 통일 베트남 정부는 캄보디아에서 망명해 온 크메르 루주군 사령관 헹 삼린 등을 지원하는 형태로 캄보디아를 침공하였고, 1979년 1월에 프놈펜을 점령하여 헹 삼린을 수반으로 하는 친(親)베트남 캄보디아 정권을 세웠다. 이에 중국 정부가 후원했던 폴 포트는 밀림 지대로 도망쳤다.

베트남 공산당이 소련-중국 분쟁에서 소련측을 지지한데다가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캄보디아에서 중국이 지원하던 폴 포트 정권이 붕괴되고 친베트남 정권이 들어서자, 중국 지도부(덩샤오핑화궈펑)는 캄보디아 전선에 머물던 베트남군의 주력을 철수시키기 위해서 베트남의 북부를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전쟁 과정[편집]

1979년 2월 17일 국경 지대인 윈난 성에 집결한 중국군은 베트남과의 국경을 넘어 공세를 시작하였다.[1] 그런데, 베트남 북부는 열대 산악 지형으로 중국군이 대규모 병력을 이동시키는 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당시 베트남군은 주력 부대가 캄보디아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 침공군에 맞선 병력은 민병대와 국경 수비대뿐이었다. 그러나 베트남군은 수십 년 간의 실전 경험이 있었고 현지 지형에 익숙했지만, 중국군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중국을 뒤흔든 문화대혁명 때문에 장비나 통신면에서 근대화가 지체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중국군은 전쟁 중 많은 사상자를 내는 희생을 치렀는데, 그 와중에도 계속 전진하여 3월 6일 국경에서 40 km 정도 떨어진 요충지인 랑선을 점령하였다.

이후 중국은 일방적으로 "징벌적 목적을 달성했으므로 철군한다"고 발표하여 랑선을 철저히 파괴하고 철군하였다.

결과[편집]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주장하며 철군하였으나,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을 철군시키려던 당초의 전쟁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했다.

중국과 베트남은 1980년대 내내 국경선 획정을 두고 산발적인 전투를 계속 벌였다. 1989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로부터 철군하자, 양국 사이에 평화 협상이 시작되어 1999년 중국-베트남 간 육지 국경선을 획정하는 국경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와중에 1980년대 내내 베트남에서는 해상로를 통한 화교들의 탈출이 계속되어 보트피플이 동남아 해상을 떠돌았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중공(中共), 베트남 침공(侵攻)”. 매일경제신문. 1979년 2월 19일. 1쪽. 중공(中共)은 「베트남」 지도층의 「캄보디아」 방문과 때 맞춰 17일 상오 17만대군과 7백대의 항공기 및 다수의 탱크 · 중포(重砲) · 각종 화기(火器)를 동원 1천2백km 전 국경선(全國境線)을 넘어 일제히 「베트남」을 전격침공, 4개 성(省) 12개 시 · 읍을 유린하고 「베트남」 영내 50 km까지 진격하여 19일 현재 수도 「하노이」 공략(攻略)을 목표로 남진을 계속중이며 「베트남」은 중공군(中共軍)이 보급을 기다리고 있는 틈을 타 총반격에 나섬으로써 양국군이 치열하게 접전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바깥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