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헝가리 혁명
1956년 헝가리 혁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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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일부 | |||||||
![]()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혁명군이 정부 깃발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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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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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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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병사 15만 명 탱크 1,000대 | 불명 | ||||||
피해 규모 | |||||||
722명 사망 |
약 2,500명 사망 약 13,000명 부상[2] |
1956년 헝가리 혁명(헝가리어: 1956-os forradalom)은 1956년 10월 23일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자유를 갈구하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시작됐다.
혁명 과정[편집]
노동자·농민·국민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 공포 정치에 반대해 도나우 강변의 바므 광장에서 반(反)정부집회를 열었다.
복수정당제에 의한 총선거, 헝가리 주재 소련군의 철수, 표현과 사상의 자유, 정치범의 석방 등 16개 항목을 요구하며 억압적인 체제에 억눌려왔던 불만을 한꺼번에 폭발시켰다. 시민들은 헝가리 국기에 동그란 구멍을 크게 뚫어 국기에 그려져 있던 국장을 떼어내고 건물 옥상 등에 걸려 있던 공산당의 상징인 붉은 별 등을 떼어내는 한편 도시 곳곳에 있던 스탈린 동상을 파괴하는 등 반정부 자세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저널리스트인 오베르소프스키 쥘러(Obersovszky Gyula)도 다음날인 10월 24일 ‘이가샤그(Igazság, 진실)’라는 제목의 일간지를 발행해 봉기를 한층 고무시켰다. 그는 신문발행으로 나중에 사형이 언도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가 밤이 깊어 총살에 실패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처형이 연기됐는데, 그 날 니키타 흐루쇼프 소비에트 연방 수상이 봉기 관련자의 사형에 대한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의 항의서한을 읽고는 카다르 야노시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당 제1서기에게 적당히 처리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살아났다.
정세는 시민의 개혁 요구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10월 24일 개혁파 인사 너지 임레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너지 임레는 정치범 석방, 비밀경찰 폐지, 소련군의 부다페스트 철수를 발표하고 헝가리의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와 코메콘 탈퇴를 선언했다.
소련은 이 움직임을 ‘소련 간섭으로부터의 이탈’로 판단하고, 11월 4일 헝가리에 탱크 1,000대와 병사 15만 명을 투입해 너지 임레 정권을 힘으로 무너뜨렸다. 그 후 다시금 친소 정권이 세워지고 혁명군 지휘관이던 너지 임레와 팔 말레테르 등은 1958년 부다페스트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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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편집]
전임 할로 커티스 |
제30대 타임 올해의 인물 1956년 |
후임 니키타 흐루쇼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