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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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냉전의 일부
Eritrean Independence War.gif
교전국

1961-1974
에리트레아 EPF

에리트레아 에리트레아 자유전선

1961-1974
에티오피아 제국의 기 에티오피아 제국
지원국
미국의 기 미국

이스라엘의 기 이스라엘

1974-1991
에리트레아의 기 에리트레아
쿠바 쿠바 (-1975)
지원국
수단 수단
시리아의 기 시리아
이라크의 기 이라크
리비아의 기 리비아 (-1977)
중화인민공화국의 기 중화인민공화국

미국 미국 (1990-)

1974-1991
에티오피아 EDPR
소련 소련 (-1990)
쿠바 쿠바 (1978-89)
지원국
동독의 기 동독 (1978-90)

남예멘의 기 남예멘 (1977-90)

에리트리아 독립전쟁(1961년 9월 1일-1991년 5월 29일)은 에티오피아 정부와 에리트리아 분리주의자들 사이에 일어난 충돌이며, 전쟁 중 에티오피아 내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은 에리트리아가 에티오피아의 자치 하에 있을 때, 군대가 이미 주둔되어 있었으나 일방적으로 주둔이 취소된 상황에서 발생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에리트리아 영토는 이탈리아의 군대가 철수함에 따라 자유로워졌다.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가 그들 영토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에티오피아의 바람은 유엔 총회(UNGA)가 1950년 초, 에리트리아를 에티오피아의 지방으로 연합한 후에 수행되었다. 1974년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쿠데타가 에티오피아에 일어남에 따라 에티오피아의 고대 군주정은 무너졌다. 그 후에 에티오피아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가 모스크바의 외국정책에 영향을 줌에 따라 에티오피아에 지원의 철회를 초래하기 전인 1980년대 후반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받았다.

전쟁은 '에리트리아 인민 자유전선'(EPLF)이 에리트리아에서 에티오피아군을 패배시키고, 에리트리아 수도인 아디스 아바바에서 에티오피아 인민 혁명 민주주의 전선은(EPRDF)은 에리트리아 인민 민주 전선(EPLF)의 도움을 받아 마르크스 레닌주의 인민 민주 에티오피아 공화국(PDRE) 을 밀어내고 정권의 잡아, 1991년까지 30년간 지속되었다. 1993년 4월, 에티오피아 국민들의 지지를 통해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에리트리아 사람들은 대부분 만장일치로 독립을 지지하였다. 에리트리아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인 인지 이후에 에리트리아 군주도 다음 이듬해 이 결정을 따라갔다. 주요 두 정당인 에리트리아 자유 전선(ELF)과 에리트리아 인민 민주 전선(EPLF)은 자유 전쟁 시기 동안 총 2번의 내전을 거쳤다.

배경

1890년 에리트리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1936년,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하고, 이탈리아의 식민지 제국 중 하나로 선포하였다. 이는 당시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1889년 부터 1936년까지 아프리카의 뿔에 존재했던 국가)로 불리었다.

1941년 동맹국가에 의해 정복되어 이탈리아의 동아프리카는 다시 나누어 졌다. 에티오피아는 1941년 이전에 이탈리아가 점유하였던 자신들의 땅을 다시 점유하였다. 1960년까지 이탈리아령 소말릴랜드는 영국령이되어 소말리아 독립국가의 형태로 독립이 인정될 때까지 이탈리아의 지배하에 식민지의 형태가 아닌 유엔의 피보호국으로서 존재하였다.

에리트리아는 제2차세계대전 끝머리부터 1951년까지 영국의 피보호국으로서 존재하였다. 하지만 영국이 떠난 후에 에리트리아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여론이 많이 생성되었다. 영국은 에리트리아가 종교 분단선을 통해 기독교는 에티오피아에 이슬람교는 수단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이는 큰 논란을 야기하였다. 1952년, 유엔은 에리트리아를 에티오피아로 연합하기로 결정하며 에티오피아의 주권요구과 에리트리아의 독립을 위한 열망이 함께 조화롭게 되기를 희망했다. 이로부터 9년 후, 에티오피아의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1891-1975)은 30년 동안 에리트리아에서 유발되던 연방국가와 합병된 에리트리안 문제를 해결했다.

혁명

1960대 에리트리아의 독립투쟁은 에리트리아 자유 전선(ELF)에 의해 주도되었다. 사실 이 독립투쟁은 이탈리아가 이탈리아령 영토를 버리고 떠난 이후 에티오피아에 의해 합병된 에리트리아의 저항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누군가 에티오피아 군주가 에리트리아 정부 내 이슬람교에 대한 행동을 혁명에 공헌하는 요소로 볼 수도 있다. 처음에, 이 단체는 자유를 향한 움직임을 민족적과 지리적인 측면에서 파벌로 나누었다. 초기의 ELF의 4개 지역에 대한 지휘는 모두 무슬림에 의해 저지대에서 이루어졌다. 소수의 기독교인만이 무슬림의 지배를 무서워하며 초기의 단체 구성에 참가하였다. 에티오피아 점령동안 시민권 박탈을 확대한 후, 고지대의 기독교인들은 ELF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으로 이들은 상류층에 속하거나 대학교육을 받은 기독교인들이었다. 기독교 봉사자들의 갑작스런 유입은 다섯 번째다 명령 시작을 촉진했다. ELF 명령 하의 내부 투쟁은 다양한 지역적 단체가 조직을 분리시킨 가운데 종파의 폭력과 연결시켰다. 독립투쟁은 1961년 9월 1일 하미드 어웨이트(Hamid Idris Awate)와 그 동료가 에티오피아의 군대와 경찰을 장악한 것에 대항하여 첫 번째 사격을 발포하며 시작되었다. 1962년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Haile Selassie)는 일방적으로 연합과 에리트리아 의회를 해산시켰고 국가를 연합했다.

전쟁 (1961–1991)

1970년, 조직의 단원들은 탈퇴하였고, 여러 개의 다양한 조직들이 에리트리아 자유전선(ELF)로부터 분리되었다. 이 시기동안 ELF와 후에 참여하게 된 몇몇 조직들은 에리트리아 인민자유 전선(EPLF)을 결성해 함께 잔혹한 내전 전쟁을 벌인다. 그 두 조직은 대중의 바램으로 1974년에 조정 협정을 맺고 에티오피아에 대항하는 공동 작전에 참여한다. 1974년,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는 쿠데타에 의해 쫓겨난다. 에티오피아 임시 군사 평의회(Derg)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독재정부로서 시작되었다. 정부는 에티오피아, 에리트리아, 그리고 소말리아의 일부를 완벽하게 지배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3~4년을 통치했다. 이러한 정부의 변화와 궁극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식으로 인해, 에티오피아는 소비에트 연방(구소련)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위치하게 된다. 에리트리아 자유전선로부터 쪼개진 여러 조직들 중 다수가 1977년 함께 모여 에리트리아 인민 자유전선(EPLF)을 결성했다. 1970년대 후반 에리트리아 인민 자유전선은 에티오피아 정부에 맞서 싸우는 우세한 에리트리아의 무장 조직이 되었다. 통솔 기구의 지도자는 에리트리아 자유전선의 사무총장인 라마단의 마하무드 노어(Mohammed Nour), 사무 차관보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Isaias Afewerki) 였다. 에티오피아와의 전투를 위한 장비들 중 대다수는 에티오피아 군에 의해 빼앗긴 상태였다.

이 시기동안 에티오피아 임시 군사 평의회는 무력으로 인구를 혼자서 통제할 수 없었다. 임시 군사 평의회의 수비대를 보충하기 위해 무력이 공포를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임무를 띄게 되었다. 이 정책의 분명히 보여주는 한 사례는 에리트리아 북부의 바이식 데라(Basik Dera)m이 한 마을이었다. 1970년 11월 17일, 마을 전체는 지역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둘러 싸여져 있었고, 모스크의 문들이 잠겨있엇다. 그 건물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생존자들은 총살당했다. , Elabared, Om Hajer의 마을과She'eb 와 Hirgigo의 마을을 포함해서 비슷한 학살이 주로 에리트리아의 무슬림 지역 쪽에 일어났었고, 학살들이 주로 크리스찬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이 잔인한 시민 학살의 출현은 인종, 종교나 계급에 상관없이 전쟁에 포함되지 않는 에리트리아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망명하거나 최전선으로 가버렸다.

1977년에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PLF)은 에티오피아의 군사 물품을 빨아들이기 위해 소말리아 동부로부터 동시군사공격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에티오피아인들을 에리트레아 밖으로 내쫓을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소말리아 침략은 초기의 성공으로 동쪽의 많은 전문가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 쿠바, 그리고 예멘은 소말리아군이 수도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부원조를 실시하였다.

수도에 대한 수비를 증강하려는 18000명의 쿠바인들, 그리고 2개의 예만 군사 여단의 배치로 인해, 소비에트 연방국 군대의 다량 공수 작전 덕분에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 후, 소말리아 군사작전에서 사용된 엄청난 인력과 군사적 장비의 사용으로 인해, 에티오피아 군대는 초기의 힘을 되찾고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PLF)을 아프리카의 미개간지로 후퇴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바렌투 전투와 마사와 전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이다.

1978년과 1986년 사이에, 에티오피아 임시군사 평의회는 독립운동에 맞서 8개의 주요 공격 체재를 형성하였지만, 모든 게릴라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1988년, Afabet 전투에서,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PLF)은 Afabet와 그 주변을 점령한 뒤 에르베르타의 서쪽 해안에 있는 에티오피아군을 격파하고 에리트라의 서쪽 저지대에서 철수했다. 그리고 나서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PLF)의 전사들은 에리트레아의 두번째 도시인 케렌을 중심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편, 다른 반체제 인사들은 에티오피아 전역에서 진전을 이루고 있었다.

분쟁 전반에 걸쳐 에티오피아는 "대인 간 가스",[39]네이팜탄,[40], 기타 방화 장치를 사용했다.

1980년대 말에 소비에트 연방은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에티오피아의 초대 국가주석이자 군인)에게 그들의 군사 방위 협력 협정을 재개하지 않을 것을 통보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과 물자 공급이 중단되자, 에티오피아 군대의 사기는 곤두박질쳤고,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PLF)은 에티오피아 반군 세력과 함께 에티오피아 군사 진지를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멩기스투와 멩기스투 치하의 마르크스주의자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협력은 주로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PLF)이 1)일부의 에티오피아인 집단과 연합하여 이루어졌다. 1)-일부의 에티오피아인 집단 부가설명-주로 오로모 해방전선과 티그리냐인 행방전선과 같은 부족 단위의 해방 전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에리트레아 자유 전선(ELF)에 대항하는 전투들과 수많은 티그리냐인들이 목숨을 잃었던 에리트레아 내전의 다양한 주요 전투들에 공동으로 출전하였다. 그리고 현재 티그레국민해방전선(TPLF)정권의 집권당인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과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PLF)과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으로서 임시군사행정위원회(Derg)를 구성하며 중요하게 떠오른 마르크스주의자 오로모 인민민주조직(OPDO)이 에티오피아의 월로(Wollo)와 쉐와(Shewa)주를 점령해버렸다.

평화회담

이전의 미국 대통령인 지미 카터는 미국 정부와 UN 임원들의 도움에 힘입어 1989년 9월 조지아주 아틀란타에 위치한 카터 센터에서 주최된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PLF)과의 평화회담에서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평화 타협이 승인된 후 머지않아 적대행위(적에 대한 가해행위)가 다시 시작되었다. Ashagre Yigletu 이글루(에티오피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 그리고 외교관) 또한 에티오피아 정부 대표단에게 1989년 11월과 1990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로마에서 티그레국민해방전선(TPLF)의 지도자 멜레스 제나위(Meles Zenawi Asres)와의 평화 회담을 개최하도록 하였다. 더불어 그는 에티오피아 대표단이 1991년 3월까지 워싱턴 D.C.에서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선(EPLF)과 다시 한 번 평화회담을 진행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인식

냉전이 종식된 후에, 미국은 1991년 5월에 있었던 멩기스투 정권의 몰락으로 인해 워싱턴 DC에서 열린 평화 회담에서 촉진적인 역할을 했다. 5월 중순, 멩기스투는 에티오피아 정부의 수장으로서 물러났고 아디스 아바바에 있는 관리 정부를 떠나 짐바브웨로 망명했다. 고위의 미국 대표단은 1991년 7월에 에티오피아에서 과도기적인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아디스 아바바에 자리 잡았다. 에리트라에서 에티오피아군을 패배시킨 후에 에리트레아인민해방전(EPLF)은 참관인으로서 참석했고 에리트라의 이디오피아와의 관계에 관해 새로운 과도 정부와 대화를 가졌다. 그 회담의 결과는 에티오피아인들이 에리트레아의 독립에 대한 국민 투표를 실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협정이었다. 국민 투표는 1993년 4월에 실시되었고 에리트레아 주민들은 유엔 감시단에 의해 검증된 국민 투표를 통해 비준 동의안을 처리하는 데 거의 만장 일치로 찬성했다. 1993년 5월 28일, 유엔은 공식적으로 에리트레아를 회원국으로 인정했다. 국민 투표 결과는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