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이동

앙겔라 메르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메르켈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메르켈 (동음이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앙겔라 메르켈
Angela Merkel
메르켈 (2019년)
독일의 연방총리
임기2005년 11월 22일~2021년 12월 7일
전임게르하르트 슈뢰더
후임올라프 숄츠
대통령호르스트 쾰러(2005년~2010년)
크리스티안 불프(2010년~2012년)
요아힘 가우크(2012년~2017년)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2017년~)
부총리
독일 기독교민주연합의 대표
임기2000년 4월 10일 ~ 2018년 12월 7일
전임볼프강 쇼이블레
후임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
이름
본명Angela Dorothea Merkel
신상정보
출생일1954년 7월 17일(1954-07-17)(72세)
출생지서독 함부르크
학력라이프치히 대학교
정당독일 기독교민주연합
배우자울리히 메르켈(1977년~1982년)
요아힘 자우어(1998년~)
종교개신교(루터회)
서명
웹사이트앙겔라 메르켈 - 공식 웹사이트

앙겔라 도로테아 메르켈(독일어: Angela Dorothea Merkel, 독일어 발음: [ˈaŋɡela doʁoˈteːa ˈmɛʁkl̩] ( ), 혼전 성씨: 카스너(독일어: Kasner), 1954년 7월 17일 ~ )은 독일의 정치인이자 과학자로 2005년부터 2021년까지 재임했던 독일의 제8대 연방총리이다. 독일 역사상 최초로 연방총리직에 오른 여성이기도 한 그녀는 공산국가 동독에서 성장한 첫 독일의 지도자이기도 한다. 2007년 메르켈은 또한 유럽 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G8의 의장이었다. 그녀는 리스본 조약과 베를린 선언의 협상에서 중앙적인 역할을 했다. 국내 정책에서 보건 개혁과 미래의 에너지 개발을 걱정한 문제들이 그녀의 재직 기간의 주요 문제들이었다.

동독에서 물리학자로 활동한 후 통일 과정에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헬무트 콜 내각에서 환경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2000년에 독일의 보수 정당인 기독교민주연합의 의장직에 취임한 이후 2005년 총선에서 제1당을 차지했지만 어느 세력도 과반을 점하지 못한 헝 의회가 발생하자, 메르켈은 사회민주당과 대연정을 구성하여 총리직에 올랐다. 2009년 총선에서는 더 보수적인 성향의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했지만, 2013년 총선에서는 다시 헝 의회가 발생하여 대연정을 구성하였다. 총리로 재임하는 동안 그리스 경제 위기와 우크라이나 분쟁, 시리아 난민 사태 등 국제적 현안이 제기되었으며,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메르켈은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또한 2010년을 제외하고, 포브스는 메르켈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에 선정하였으며[1], 2015년 '타임'은 '자유 세계의 총리(Chancellor of the Free World)'이라는 이름으로 '올해의 인물'에 선정하였다.[2]

어린 시절

[편집]
메르켈의 친조부모 (약혼 중). 마르가르테와 할레르 군복 차림의 루드비크 마리안 카지미에르차크

앙겔라 도로테아 카스너(독일어: Angela Dorothea Kasner)란 본명으로 서독 함부르크에서 루터교 목사 호르스트 카스너와 영어와 라틴어 교사인 헤를린트에게 태어났다. 그녀의 모친은 독일 사회민주당 (SPD)의 당원이었다. 그녀의 외가쪽 조부모들은 동프로이센 엘빙에서 살았으며 그들 중 한명은 폴란드 계통이었다. 그녀는 남동생 마르쿠스 (1957년 7월 7일생)와 여동생 이레네 (1964년 8월 19일생)이 있었다.

메르켈의 부친은 하이델베르크에서, 그후에 함부르크에서 신학을 연수하여 1954년 브란덴부르크주 페를레베르크의 퀴초프에 있는 교회에서 목사직을 안수받았고, 가족은 템플린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므로 메르켈은 사회주의 동독에서 베를린의 북부로 80km (50 마일) 떨어진 시골 지역에서 자라왔다. 메르켈의 독일 기독교민주연합의 전직 연장 당원 게르트 랑구트는 가족의 2대의 차량의 소유는 물론 동독에서 서독으로 자유롭게 여행하는 데 가족의 능력이 동독에서 목사를 위한 자유와 임시 수입과 아니면 동독에서 그의 가족이 불가능성을 가질 것 같은 이래 공산주의 정권과 함께 메르켈의 부친이 공감 관계를 가졌던 결론으로 이끌었던 것을 말했다.

동독에서 경력

[편집]
로타어 데메지에르와 메르켈 (1990년)

대부분의 제자들처럼 메르켈은 공식적, 사회주의 선도의 청년 운동 자유독일청년단 (FDJ)의 일원이었다. 이후에 그녀는 선전선동에 있는 과학원에서 그 조직을 위한 구의회 위원과 서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동독에서 공통적이었던 "청소년 의식"의 세속적 도래 안에 참가하지 않고 대신 입증이 되었다.

메르켈은 템플린과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1973년부터 1978년까지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1978년부터 1990년까지 메르켈은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 물리화학 연구소에서 양자화학분야의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녀는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자신의 진보를 위하여 국가 전역의 상 마저 수상하였다. 그 동안 그녀는 자유독일청년회 과학 아카데미에서 지구선도위원, 선전부 의장을 지낸다.

1977년 앙겔라 커스너는 물리학 학생 울리히 메르켈에게 결혼하였으나 결혼 생활은 1982년 이혼으로 끝났다. 그녀의 두번째 남편은 양자화학자이자 교수 요아힘 자우어이다. 그는 여전히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있다. 그녀는 자녀가 없으나 자우어는 2명의 성인 아들을 두었다.

1989년 메르켈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 후, 자라나는 민주화 운동에 연루되어 새로운 정당 민주각성에 입당하였다. 동독에서 처음이자 단 하나의 총선거에 이어 그녀는 로타어 데메지에르 아래 새로운 통일 전의 선거 관리 정부를 위한 부대변인이 되었다.

연방 의원

[편집]
1995년 메르켈의 기독교 민주연합 포스터

1990년 12월 통일 후의 첫 총선에서 메르켈은 슈트랄준트는 물론 노르트포어포메른과 뤼겐의 선거 구역을 포함한 헌법으로부터 독일 연방의회로 선출되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그녀의 선거 구역으로 남아있다. 그녀의 정당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CDU)와 병합되었고 그녀는 헬무트 콜 제3차 내각에서 여성·청소년부 장관이 되었다. 1994년 그녀는 자신의 정치 경력을 쌓는 것에 자신의 더욱 위대한 정치적 명성과 상호작용을 준 환경부 장관으로 만들어졌다. 콜 총리의 문하생들 중의 하나이자 그의 최연소 내각 일원으로서 메르켈은 콜에 의하여 "das Mädchen" (소녀)로서 언급되었다.

야당의 당수

[편집]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과 함께 (2002년 2월 8일)

1998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콜 정부가 꺾이자 메르켈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의 총서기로 임명되었다. 그녀는 두 주요 정당 중 어느 쪽과 함께 이 수용력에서 지내는 데 첫 여성이자 동독 출신이었다. 이 직위에서 메르켈은 1999년 홀로 7개의 주립 선거들 중에 6개에서 자신의 당의 선거 승리들의 일련의 사건들을 감독하여 독일 연방상원에 독일 사회민주당-녹색당 보유를 깼다. 기독교민주연합의 많은 인물들 (콜 총리가 협동적이지 않았던 자신의 특별히 선택된 후임자였던 당시 당의 의장 볼프강 쇼이블레에게 명예로운 약속을 했기 때문에 2백만 마르크의 기증자를 밝히기를 거부했던 가장 두드러지게 콜 자신)을 타협했던 당의 자금조달 스캔들에 이어 메르켈은 자신의 전 조언자 콜을 비판하고 그없이 당을 위하여 깨끗한 시작을 옹호하였다. 그녀는 쇼이블레를 대체하는 데 선출되어 2000년 4월 10일 자신의 정당의 의장을 맡는 데 첫 여성이 되었다. 그녀의 선거는 자신이 선도하는 데 선택되었던 정당으로 자신의 성격이 대조를 이루면서 많은 감시자들을 놀라게 했으며 기독교민주연합이 깊은 가톨릭 뿌리와 함께 남성 중심적인 사회적으로 보수적 정당인 동안 메르켈은 우세하게 개신교 북부 독일로부터 유래한 개신교도이다.

기독교민주연합의 당수로서 메르켈의 선거에 이어 그녀는 독일의 인구 중에 숙고적인 인기를 즐겼으며 2002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도전자가 되는 데 많은 독일인들에 의하여 호의가 선호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정당과 특별히 그 자매 정당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CSU)에서 충분한 지지를 받지 않았으며 그 후에 슈뢰더를 도전하는 것에 편견을 가졌던 기독교민주연합 당수 에드문트 슈토이버에 의하여 전략적으로 밀렸으나 아주 근소한 차이로 선거를 패하는 데 여론 조사에서 큰 선도를 허비했다. 2002년 슈토이버의 패배 후에 기독교민주연합 여성 의장으로서 그녀의 역할에 추가로 메르켈은 독일 연방의회의 하원에서 보수적 야당의 당수가 되었다. 2002년 선거에 대비하여 의회적 지도자의 직위를 보유했던 그녀의 라이벌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메르켈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었다.

메르켈은 독일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시스템을 걱정한 실질적인 개혁 안건을 지지하였고, 자신의 정당보다 친시장적으로 숙고되었으며 독일의 노동법, 특히 늘어나는 허용된 한주에 근무 시간의 수와 해고된 고용주들에게 장벽을 제거하는 것으로 변화들을 옹호하여 비지니스가 느릴 때 당시 회사들이 쉽게 노동비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법률이 국가를 적게 경쟁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메르켈은 독일의 원자력이 슈뢰더 행정부가 계획했던 것보다 더욱 천천히 단계적으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중하였다.

메르켈은 강한 범대서양 파트너십과 독일-미국간 친선 관계를 옹호하였다. 2003년의 봄에 강력한 대중의 반대에 맞선 메르켈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관한 찬성으로 나와 그것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하고 슈뢰더 총리의 반미주의를 비난하였다. 이것은 비평가들이 그녀를 미국의 하인으로서 특징을 짓는 것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유럽 연합으로 튀르키예의 가입을 위한 정부의 지지를 비판하였고, 대신 "특권적 파트너십"에 호의를 가졌다. 그렇게 하면서 그녀는 유럽 연합으로 튀르키예의 회원직을 거절하는 것에 많은 독일인들과 함께 화합한 것으로 보여졌다.

독일의 총리

[편집]

2005년 11월 22일 메르켈은 자신이 2021년 12월 8일까지 4개의 기간들 동안 보유했던 연방총리의 직책을 맡았다.

제1차 기민련-사민당 대연정 (2005년-2009년)

[편집]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과 함께 (2006년 5월 3일)
2007년의 메르켈

사회민주당과 대연정에 결과를 가져온 무승부 선거에 이어 2005년 11월 22일 메르켈은 연방총리에 취임하였다. 대연정 협상은 11월 14일에 당 회의에서 양당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메르켈은 집권 연합의 51명의 일원들이 그녀에게 반대표를 던졌어도 11월 22일 새롭게 모여진 연방의회에서 대표단들의 다수 (297 대 217)에 의하여 총리로 선출되었다.

당시 기자들은 대연정이 야당의 당수와 총리 후보로서 메르켈의 정치적 강령으로부터 어떤 것이 달랐던 다양한 정책을 혼합하여 추진할 것을 암시하였다. 연정의 의지는 부가가치세, 사회 보험 공헌과 소득세의 최고율을 증가시키는 동안 공공 지출을 삭감하는 것이었다.

연정의 협정을 공고했을 때 메르켈은 자신의 정부의 주요 목표는 실업을 줄이고 자신의 정부가 판단될 것에 이 문제였다는 것이었다고 진술하였다.

기민련-자민당 연정 (2009년-2013년)

[편집]
2011년 율리아 티모셴코 우크라이나 총리와 함께

그녀의 정당은 의석의 증가한 수와 함께 2009년 재선되었고 자유민주당 (FDP)와 함께 연정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 조건은 유럽 국가 부채 위기에 의하여 가려졌다. 독일에서 징병제가 폐지되었고 독일 연방방위군이 모병제가 되었다. 실업은 3백만명의 실업자들의 기준선 아래로 떨어졌다.

2013년 9월 선거에서 메르켈은 독일 역사상 가장 결정적 승리들 중의 하나를 거두어 재통일 이래 기민련/기사련을 위한 최고의 결과를 성취하였으며 1957년 이래 연방의회에서 최초의 절대다수의 5개의 의석 안으로 왔다.

제2차 기민련-사민당 대연정 (2013년-2017년)

[편집]
인도를 방문하여 라지가트에 있는 간디의 삼매에 경의를 표하는 메르켈 총리 (2015년 10월 5일)

하지만 기민련/기사련의 가장 좋아했던 연정 파트너 자유민주당이 1949년 이래 처음으로 의회에 들어가는 데 실패하여 그렇게 하는 데 요구되었던 투표의 5 퍼센트의 최소 아래였다. 협정은 대신 연정에 가입하는 데 사회민주당과 함께 도달되었다.

2013년 12월 17일 제3차 메르켈 내각이 선서되었다.

그녀의 두번째 기간을 통하여 중간에 독일에서 메르켈의 찬성이 급락하여 그녀의 당을 위하여 주 선거에서 거대한 패배에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그녀는 유럽 국가 부채 위기를 다루면서 잘 득점을 매겼다. 메르켈의 찬성률은 유럽 난민 위기가 일어난 동안 2015년 10월 다시 떨어졌다.

2017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메르켈은 4번째로 자신의 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기민련/기사련과 사회민주당은 둘다 자신들이 2013년보다 투표의 상당히 낮은 비율을 받으며 자유민주당과 녹색당과 함께 연정을 형성하려고 했다. 이 협상의 결렬은 무승부로 이끌었다.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그들의 단호한 입장을 바꾸고 기민련/기사련과 제3차 대연정으로 동의하는 데 성공적으로 즉시 호소하였다.

제3차 기민련-사민당 대연정 (2018년-2021년)

[편집]
아제르바이잔 방문시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과 기자 회견에서 (2018년 8월 25일)
유엔 본부에서 열린 오찬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2019년 9월 24일)

2018년 3월 14일 제4차 메르켈 내각이 선서되었다. 사회민주당과 대연정 협정으로 이끈 협상들은 전쟁 이후의 독일 역사상 장기적이며 거의 6개월간 지속되었다.

2018년 10월 메르켈은 자신이 2021년 독일 연방의회 선거에서 재선을 위하여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을 공고하였다.

2021년 9월 그녀는 "16년 후에 하나는 자동으로 하지 않으며 ... 총리직으로 돌아오는 것은 기민련과 기사련에서 모두에게 분명했다"고 말하면서 다가오는 선거에 관하여 집전이었던 여론조사 결과를 설명하였다. 논평들은 최근의 여론조사에서 사회민주당이 그녀의 보수주의자들을 차지하면서 왔다.

그해 9월 26일 사회민주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얻었어도 선거는 결론이 나지 않은 것을 증명하였다. 이것은 정부를 형성하는 데 다양한 정당들 중에 장기적 협상들을 필요했다. 11월 23일 올라프 숄츠가 메르켈을 승계하는 데 후보로 지명되면서 새로운 연정이 발표되었다. 12월 8일 숄츠가 취임했을 때까지 메르켈은 관리인 자격으로 지속적으로 총리를 지냈다.

정치적 입장

[편집]

국내 정책

[편집]

이민, 난민과 이주

[편집]
독일의 이주민들 (2015년)

2010년 10월 메르켈은 포츠담에서 자신의 보수적 기독교민주연합의 젊은 당원들의 회의에서 독일에서 다민족 사회를 건설하는 시도들이 "완전히 실패"하여 행복하게 "나란히 살", 이른바 "다문화주의"가 안되었고 이민자들은 독일어를 배우는 것을 포함하여 더욱 합류해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

메르켈은 유럽 난민 위기로 장기적 해결의 일부로서 이탈리아와 그리스로부터 망명 신청자들을 다른 유럽 연합 회원국들로 이전을 위하여 "필수적인 연대 매커니즘"에 호의를 가졌다.

2015년 유럽 난민 위기

[편집]

2015년 8월 후순 유럽 난민 위기가 한창일 때 메르켈의 정부는 망명 신청자들이 도착한 첫 유럽 연합 회원국에서 그들이 망명을 추구해야 할 것을 규정한 유럽의 조항을 정지시켰다. 대신 메르켈은 만약 시리아의 난민들이 다른 유럽 연합의 국가들을 통하여 독일에 온다면 독일이 그들로부터 망명 신청서를 처리할 것을 공고하였다. 동년에 1천 1백만명의 망명 신청자들이 독일로 입국하였다.

메르켈은 독일이 이주자들의 유입과 함께 극복하는 데 경제력을 가졌고 독일이 택할 수 있었던 이주자들의 수에 법적인 최대 한도가 없었던 것을 되풀이하였다.

코로나19 범유행

[편집]
브뤼셀에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와 함께 (2021년 6월 24일)

2020년 4월 6일 메르켈은 "내가 보기에는 ... 유럽 연합이 그 창립이래 가장 큰 시험을 향하고 있으며 회원국들은 범유행에 의하여 해방된 경제적 위기로부터 더욱 강하게 나타나는 데 거대한 연대를 보영 한다"고 발표하였다. 메르켈은 독일에서 코로나19 범유행을 자신이 다룬 것으로 국제적 칭송을 받았다.

외교 정책

[편집]

메르켈의 외교 정책은 유럽의 협력과 국제 무역 협정들을 강화시키는 것에 전념하였다. 메르켈은 총리로서 자신의 재직 기간을 통하여 유럽 연합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넓게 묘사되었다.

2015년 스티븐 하퍼 캐나다 총리가 빠지면서 메르켈은 2008년 처음 이래 모든 G20 회의에 참석하는 데 단 하나의 지도자가 되어 15개의 정상 회의에 출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녀는 2017년 함부르크에서 열린 제12회 G20 회의를 주최하였다.

미국

[편집]
오벌 오피스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회담에서 (2015년 2월 9일)

메르켈의 우선순위 중 하나는 범대서양 경제적 관계를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2007년 4월 30일 그녀는 백악관에서 범대서양 경제 회의를 위한 협정을 맺었다.

메르켈은 미국의 대통령들 - 조지 W. 부시와 버락 오바마와 함께 좋은 관계들을 즐겼다. 오바마는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재직 동안 그녀를 자신의 "가장 가까운 국제적 파트너"로 묘사하였다.

도널드 트럼프의 선거에 메르켈은 "독일과 미국은 민주주의, 자유의 가치와 법률과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존중, 출산, 피부색, 종교, 성별, 성적 지향 혹은 정치적 견해에 상관없이 묶여있다. 난 미국의 다음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에게 이 가치들을 근거로 가까운 협동을 제공한다"는 것을 말했다.

라퀼라에서 열린 G8과 브뤼셀에서 열린 나토 정상 회의에 이어 메르켈은 과거에 유럽과 독일이 의존했던 미국이 더 이상 의지할 수 있는 파트너가 아니었다는 것을 진술하였다. 뮌헨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 그녀는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유럽인으로서 우리의 운명을 위하여 싸워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중화인민공화국

[편집]

2007년 9월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항의 중에 베를린에 있는 총리 관저에서 메르켈은 "사적이고 비공식적 회담"을 위하여 제14대 달라이 라마와 만났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이후에 법무장관 브리기테 치프리스와 회담을 포함한 독일의 공무원들과 별도의 회담들을 취소하였다.

독일의 경제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요성에 관한 인정에서 2014년 즈음에 메르켈은 2005년 총리직을 취한 이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7명의 무역 대표들을 지도하였다. 동년 3월 시진핑 주석이 독일을 방문하였다.

러시아

[편집]
독일을 방문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2011년 11월 8일)

2006년 메르켈은 러시아의 에너지에 과도한 의존에 대한 우려를 표현했으나 베를린에서 다른이들로부터 약간의 지지를 받았다.

2017년 6월 메르켈은 노르트스트림 2 가스 파이프라인을 포함한 유럽-러시아 에네지 프로젝트들에 목표를 둔 러시아에 새로운 미국의 제재안을 비판하였다.

사회복지지출

[편집]

2013년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 경제 포럼에서 그녀는 유럽이 세계 인구의 단 7 퍼센트 만이 있고 세계 국내총생산의 25 퍼센트 만을 생산했으나 세계 사회복지지출의 거의 50 퍼센트를 차지했다는 것을 말했다. 그녀는 유럽이 혁신적이고 그 자신을 최고에 맞서 측정하면서 번영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러 갔다. 그 이래 이 비교는 주요 연설들에서 중앙적 요소가 되었다.

국제적 지위

[편집]

메르켈은 총리로서 자신의 재직 기간을 통하여 유럽 연합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넓게 묘사되었다. 메르켈은 포브스 잡지에 의하여 블라디미르 푸틴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가장 권력적 인물로 두번이나 선정되어 여태까지 여성에 의하여 성취된 최고의 랭킹이었다. 2015년 12월 메르켈은 잡지의 표지에 "자유 세계의 총리"가 되는 데 그녀를 선언하면서 타임 잡지에 의하여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2018년 메르켈은 포브스에 의하여 14번째의 기록으로 세계에서 가장 권력적 여성으로 선정되었다.

논쟁

[편집]

메르켈은 M100 미디어 시상식에서 개인적으로 참석하여 윌란스 포스텐 무함마드 만평 논란을 유발한 덴마크의 만화가 쿠르트 베스테르가르에게 상을 넘긴 것에 비판을 받았다. 다른이들은 메르켈을 칭송하여 표현의 자유의 원인을 위하여 그것을 용감하고 대단한 움직임으로 불렀다.

유럽 국가 부채 위기를 해결하는 그녀의 조치를 설명하는 데 메르켈에 의하여 종종 이용되었던 용어 "alternativlos" (독일어로 "대안 없이")는 언어 학자들의 한 배심원에 의하여 2010년 올해의 아닌 단어 (Un-word)로 선정되었다. 표현은 메르켈의 정치에 아무 논의가 따라서 불필요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될 것이면서 비민주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2013년 7월 메르켈은 미국 국가안보국의 감시 감행을 옹호하고 미국을 "수십년을 통하여 우리의 가장 진실한 동맹국"으로 묘사하였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베를린 방문 동안 메르켈은 2013년 대규모 감시 공개의 맥락에서 "인터넷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미지의 영역이다"고 말했다. 이 진술은 메르켈에 관하여 다양한 인터넷 민과 온라인 조롱으로 이끌었다.

2015년 1월 아흐메트 다부톨루 튀르키예 총리의 국빈 방문 동안 "이슬람교는 독일의 일부"라는 그녀의 진술은 그녀의 당 안에서 비판을 권유하였다. 의회 단체 지도자 폴커 카우더는 이슬람교는 독일의 일부가 아니며 무슬림들은 왜 많은 난폭한 사람들이 쿠란으로 언급하나에 관한 의문에 심의해야 한다는 것을 말했다.

중동으로부터 수십만의 이주자들을 허용하는 메르켈의 정책은 강하게 비판을 받았다. 그녀는 이주자들의 유입과 함께 극복하는 데 독일이 경제력을 가졌다고 주장하고 독일이 가져갈 수 있는 다수의 이주자들에 법적인 최대 한도가 없었다는 것을 되풀이하였다.

메르켈은 중화인민공화국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비판을 향했다. 이 비판은 메르켈이 경제적 협력의 길을 지속하면서 코로나19 범유행과 홍콩의 자유의 축소와 함께 강화하였다 - "그녀의 일부 유럽의 다른 업체와는 달리 그녀의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는 베이징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을 것에 전념하였다. 이를테면 메르켈은 베이징이 공개적으로 항의한 운동인 2019년 9월 베를린에서 홍콩의 반체제 의사 조슈아 웡을 그녀의 외무장관 하이코 마스가 받았을 때 보고적으로 맹렬했다."

비교

[편집]

중도우파의 정당 소속의 여성 정치인, 그리고 과학자로서 메르켈은 많은이들에 의하여 영어로 된 언론에서 마거릿 대처에게 비교가 되었다. 어떤이들은 그녀를 "철의 여인", "철의 소녀" 그리고 "철의 부인"으로 언급하였다. 그것은 여성을 정부의 수뇌로서 선출하는 데 국가가 그 자신을 "조국"으로 묘사한 것은 예를 들어 영국이 대처를 선출했을 때 영국인들을 위하여 연루된 것보다 전통보다 더욱 급격한 단절이었다. 대처가 선출되었을 때 여성이 군주였으며 여왕들은 또한 섬나라들을 다스리기도 했다. 독일은 한번도 여성 군주가 없었다. 정치 시사 해설자들은 그들의 목표가 정확히 어느 정도 유사한가 토론하였다.

독일의 첫 여성 총리이자 전쟁 후 최연소 독일 총리로 지낸 것에 추가로 메르켈은 또한 첫 동독 출신 (함부르크에서 출생했어도), 제2차 세계 대전 후에 처음으로 출생, 그리고 자연 과학의 배경과 함께 처음이었다. 그녀는 물리학을 전공하였으며 전임자들은 법학, 경제학과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영예

[편집]

2007년 메르켈은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명예 박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2008년 유럽의 통합으로 저명한 공로로 카롤루스 대제상을 받았다. 2008년 그녀는 독일연방공화국 공로장 대십자상이 수여되었다. 메르켈은 또한 2008년 6월 라이프치히 대학교, 그리고 9월 브로츠와프 공과 대학교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가 수여되기도 했다.

유산

[편집]

메르켈 같은 여성들이 정치적 명성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어쩌다 관심 분야가 뚜렸고 남성들과 함께 한 자들과 겹치면서 모든 여성들을 시민들로서 보이게 만든다"고 한다. 메르켈이 여성의 문제들에 캠페인을 벌이지 않은 것으로 비판을 받았어도 "이전의 정부 아래 사상 최고로 46 퍼센트가 여성들이었던 것에 관한 약간 부족"했어도 그녀의 아래 장관들의 36 퍼센트는 여성들이었다. 이것은 메르켈이 "어떤 의미에도 여성주의자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일 동안 그녀가 "자신을 주의로 다른 여성들을 신임하고 흥행하는 여성주의 혹은 무능하면서 여성주의에 접촉에 "알레르기가 없었던" 동안 그녀가 자신이 "총리는 독일의 관심들을 가졌다"고 말하면서 캠페인을 벌인 그녀의 선거 동안 여성의 문제들을 옹호하지 않았던 비판들로 응답했어도 마저 책임으로서 여성의 역할을 강화시킨 것으로 메르켈이 자의식적으로 여겨진 것을 암시한다. 그녀는 여성을 비하하고 배제하는 데 남성들이 사용하던 전략을 잘 알고 있었다.

실업과 경제에 메르켈이 자신의 행정부가 심판을 받을 것에 2개의 문제들에 그녀는 2008년의 전세계 붕괴까지 최소한 진보를 이루었다. 포브스는 경제를 향상시키고 실업을 삭감하고 "이후의 퇴직 나이를 통하여" 추진한 것으로 그녀를 인용하였다.

메르켈은 총리로서 자신의 역할로 3개의 독특한 약속을 가져왔다. 처음에 그녀가 유럽이 자유, 평화와 통합으로서 합산될 수 있을 "아이디어"로서 묘사한 그녀의 야속이다. 그녀는 독일의 이익을 가졌을 것이나 독일을 위한 그녀의 전망은 유럽 연합의 회원직 안에서 관고하게 뿌리를 두었다 - "우리, 유럽의 시민들은 호전을 위하여 통합되었다. 우리가 알기 위하여 유럽은 우리의 공동적 미래이다." 메르켈이 말했던 유럽의 거대한 힘은 "자유의 힘이며 그 전체의 발현에 자유"이다.

인권에 그녀는 "분할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스라엘에서 연설에 그녀는 "자유, 평화와 협력의 세계"로 자신의 전망을 넓혔다.

두번째로 그녀는 지속가능에너지로 약속되었다 - "유럽은 또한 신재생에너지, 에너지 능률과 우리의 기후의 보호에서 방향을 선도해야 한다." G8 의장으로서 그녀는 자신이 "유엔 기후 변화 과정을 지속하는 데 확실한 약속"이었다고 주장했던 2050년 즈음에 그린하우스 가스를 둘라 나눌 협정을 타협하였다.

세번째로 존재하는 범대서양 동맹을 따라 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재접근을 위한 그녀의 욕망으로 "우리는 러시아와 범대서양 동맹 둘다와 함께 전략적 파트너십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동유럽과 서유럽 사이에 전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분할이 과거로 "위탁"되었다는 것을 기뻐했다.

첫 동독 출신, 첫 여성, 그리고 재통일 독일의 총리로서 메르켈의 유산은 몇번이나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여성으로서 랭킹에 들어와 확실하다. 아직도 성과 측면에서 그녀의 유산은 섞였다. 그녀는 독일에 경제적 안정을, 그리고 중심으로부터 지도하면서 정치적 현장으로 타협과 협동을 가져왔다. 그녀는 에너지에 조치를 취하고, 원자력 발전소들을 폐업하고 신재생에너지를 위한 지지를 얻었다. 그녀는 또한 난민들을 위하여 개방하고, 독일 뿐만 아닌 유럽 전역에서 인종 혼합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녀의 외교 정책은 일치하지 않았고 인권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보다 재정적 협력을 선택하는 인상을 준 비판, 특히 러시아와 중화인민공화국과 관계에 따라였다.

역대 선거 결과

[편집]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990년 선거하원의원 (스트랄순드-뤼겐-그리멘 선거구)12대독일 기독교민주연합 48.5%-표1위스트랄순드-뤼겐-그리멘 하원의원 당선
1994년 선거하원의원 (스트랄순드-뤼겐-그리멘 선거구)13대독일 기독교민주연합 48.6%-표1위스트랄순드-뤼겐-그리멘 하원의원 당선
1998년 선거하원의원 (스트랄순드-뤼겐-그리멘 선거구)14대독일 기독교민주연합 37.3%-표1위스트랄순드-뤼겐-그리멘 하원의원 당선
2002년 선거하원의원 (스트랄순드-뤼겐-그리멘 선거구)15대독일 기독교민주연합 41.6%-표1위스트랄순드-뤼겐-그리멘 하원의원 당선
2005년 선거하원의원 (슈트랄준트-포어포메른-뤼겐 선거구)16대독일 기독교민주연합 41.31%57,131표1위슈트랄준트-포어포메른-뤼겐 하원의원 당선
2009년 선거하원의원 (슈트랄준트-포어포메른-뤼겐 선거구)17대독일 기독교민주연합 49.33%57,865표1위슈트랄준트-포어포메른-뤼겐 하원의원 당선
2013년 선거하원의원 (포어포메른·뤼겐-포어포메른·그라이프스발트 제1선거구)18대독일 기독교민주연합 56.2%87,142표1위포어포메른·뤼겐-포어포메른·그라이프스발트 하원의원 당선
2017년 선거하원의원 (포어포메른·뤼겐-포어포메른·그라이프스발트 제1선거구)19대독일 기독교민주연합 44.0%73,746표1위포어포메른·뤼겐-포어포메른·그라이프스발트 하원의원 당선

각주

[편집]
  1. ↑ 박태훈 (2015년 5월 27일). “朴 대통령, 포브스선정 '여성파워100인'중 11위…메르켈과 힐러리 1, 2위”. 《세계일보》. 2016년 1월 3일에 확인함.
  2. ↑ 낸시 깁스. “Why Angela Merkel Is TIME's Person of the Year 2015”. 《타임》. 2018년 7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6년 1월 3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편집]
전임
클라우스 토플러
독일연방공화국 연방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 장관
1991년 1월 18일~1994년 11월 17일
후임
위르겐 트리틴
전임
우르줄라 레어
독일연방공화국 환경부 장관
1994년 11월 17일~1998년 10월 26일
후임
클라우디아 노트
전임
볼프강 쇼이블레
제7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대표
2000년 4월 10일~2018년 12월 7일
후임
안네그레트 크람프카렌바우어
전임
프리드리히 메르츠
제11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 원내대표
2002년 9월 22일 ~ 2005년 11월 22일
후임
폴커 카우더
전임
프리드리히 메르츠
제15대 독일 야당 당수
2002년 9월 22일 ~ 2005년 11월 22일
후임
볼프강 게르하르트
전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제8대 독일연방공화국 연방총리
2005년 11월 22일~2009년 9월 27일
2009년 9월 27일~2013년 9월 22일
2013년 9월 22일~2017년 9월 24일
2017년 9월 24일~2021년 12월 7일
후임
올라프 숄츠
전임
에볼라 치료 의료진
제89대 타임 올해의 인물
2015년
후임
도널드 트럼프
전임
블라디미르 푸틴
G8 의장
2007년
후임
후쿠다 야스오
전임
헤르만 반 롬푀이
조제 마누엘 두랑 바호주
G7 의장
2015년
후임
아베 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