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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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zi Swastika.svg
대독일국
대독일국
Großdeutsches Reich
Deutsches Reich (1943년 이전 국명)
1933년1945년
Flag of the German Reich (1935–1945).svg Reichsadler der Deutsches Reich (1933–1945).svg
국기 국장
표어 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
국가 독일인의 노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German Reich 1942.svg
수도 베를린 북위 52° 41′ 동경 13° 24′  / 북위 52.683° 동경 13.400° / 52.683; 13.400
정치
공용어 독일어
정부 형태 일당제 전체주의 독재국가
총통 아돌프 히틀러 (1933~1945)
역사
 • 건국
 • 패망
1933년 2월 27일
1945년 5월 2일
지리
1939년 어림 면적 633,786km²
내수면 비율 2.416%
인구
1937년 어림 69,314,000명
인구 밀도 109.4명/km²
기타
통화 라이히스마르크 (RM)
이전 국가
다음 국가
바이마르 공화국
자르 (국제 연맹)
오스트리아 연방국
체코슬로바키아 제2공화국
단치히 자유시
폴란드 제2공화국
룩셈부르크
플렌스부르크 정부
자르 보호령
체코슬로바키아 제3공화국
룩셈부르크
폴란드 인민공화국
오스트리아
독일의 역사
Geschichte Deutschlands
German Flag Flying aganist a Blue Sky.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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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獨逸, 문화어: 파쑈도이췰란드, 나치스도이췰란드)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 치하의 1933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을 가리킨다. 나치 독일은 일본 제국, 이탈리아 왕국과 동맹을 맺었고 이들 국가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이 된다. 나치 독일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패배하면서 멸망했다. 독일 제3국(獨逸第三國, 독일어: Drittes Reich)으로 부르기도 한다.

국명[편집]

정식 국명은 독일국(도이치국, Deutsches Reich 도이체스 라이히[*], 1933년부터 1943년)과 대독일국(대도이치국, Großdeutsches Reich 그로스도이체스 라이히[*], 1943년부터 1945년)이나 흔히 제3제국(Das Dritte Reich 다스 드리테 라이히[*])을 사용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독일 제1제국)과 독일 제국(독일 제2제국)을 이어받았다는 의미로 제3제국을 선전용으로 사용했다.

  1. 제1제국: 신성 로마 제국 (962~1806),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2. 제2제국: 독일 제국 (1871~1918), Deutsches Kaiserreich.
  3. 제3제국: 나치 독일 (1933~1945), Zeit des Nationalsozialismus

정치[편집]

일당 독재 체제의 구축[편집]

경제 정책[편집]

당시 독일은 천문학적 인플레이션1929년에 일어난 경제 대공황의 여파를 받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실업자로 전락하는 경제 위기에 직면하여, 당시의 정부는 뚜렷한 타개책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나치는 경제 정책을 독일 국립 은행 총재와 경제 장관을 겸임한 히알마르 샤하트에게 위임하였다. 소비재의 수입 제한과 수출 증가를 도모하기 위해 독일 국립 은행은 고액의 융자를 산업계와 개인에게 주었다.

1935년 나치는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였으며, 독일 재군비 선언에 따라 불과 10만 명으로 제한되었던 독일의 병력이 급속히 확장되었다. 또 군수업자 프리츠 토트(Fritz Todt)의 책임 아래 미국뉴딜 정책을 모방하여 대규모 공공 사업을 계획하여 다임러 벤츠(Daimler-Benz)나 크루프(Krupp), 빌리 메서슈미트(Willy Messerschmitt) 등 군수 산업의 확대와 아우토반의 부설 등이 행해졌다.

이러한 정책 덕분에 독일에서는 흘러넘치던 실업자들이 거의 없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공공 사업은 유럽의 도처에 연료 창고, 지하 기지 설비 및 참호의 구축 등으로 행해졌다.

사회 정책[편집]

나치는 인종주의 정책을 펼쳐 아리아 인종의 우월성을 강조하였으며, 인종적·사회적·문화적 청정을 요구하며 사회의 모든 요소에서의 정치적 지배를 실시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유대인집시 등의 소수 민족과 동성애자장애인 등의 불결하다고 여긴 사람들, 즉 살 가치가 없는 생명에 대한 철저한 박해를 통해서 추구하고자 했다.

1933년에 제정된 단종법에 의해 나치는 정신 장애를 포함하여 유전적 결함을 가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집단으로 살해했다. 1940년에는 T-4 작전에 의해 4천 명의 장애인들이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독일의 지배 민족으로서의 청정을 유지한다”라는 나치의 선전으로 기술되었다. T-4 작전1941년 공식적으로 중지 명령이 내려졌지만, 이러한 정책은 이어서 자행된 홀로코스트에 결합되었다.

1935년에 제정된 뉘른베르크 법에 의해 유대인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공직으로부터 추방되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이 시기에 직장을 잃었으며, 그 빈 자리들은 독일인 실업자들로 대거 교체되었다. 1938년 11월 9일 나치는 유대인 상점의 파괴를 실시했으며, 사건 당시 수많은 유리창이 깨졌다고 해서 수정의 밤 사건으로 불린다. 이 사건으로 1939년 9월까지 20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미국, 남아메리카 등으로 도망쳤으며,[1] 나치는 이들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편집]

나치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빼앗긴 구 독일 제국령에서 프로이센의 반환, 폴란드가 제1차 세계 대전과 관계없이 1921년에 폴란드인들의 반란으로 빼앗아간 서부 폴란드 회랑, 남부 슐레지엔의 반환을 폴란드에게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자 1939년폴란드를 침공하여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라 폴란드를 구 소련과 반씩 분할 점령하였다. 이에 대해 영국프랑스가 선전포고를 함에 따라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나치 독일은 베저위붕 작전으로 덴마크,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낫질 작전으로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를 차례로 점령한 후, 영국 본토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하였다. 그러나 영국 본토 항공전은 실패로 끝났으며(이때문에 나치의 영국 상륙작전인 바다사자 작전이 좌절된다), 나치 독일은 유고슬라비아, 그리스를 점령한 후 1941년소련기습 침공하였다.

소련 침공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쿠르스크 전투에서의 대규모 패배로 좌절되었으며, 1944년 연합군에 의한 노르망디 상륙 작전소련군에 의한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연합군이 서부와 동부에서 진격해오면서 나치 독일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국 1945년 4월 30일에 히틀러가 자살하고, 1945년 5월에 나치 독일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전후[편집]

포츠담 선언에 의해서 독일 본토는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고 독일은 옛 영토의 3분의 1을 잃었다. 대부분은 폴란드 영토로 귀속되었고, 동프로이센의 반은 소련에 병합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에서 오히려 소수 민족이 된 약 1,000만 명의 독일인들은 추방되었다. 미국·영국·프랑스의 서쪽 점령 지역은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되었으며, 소련의 동쪽 점령 지역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히틀러와 요제프 괴벨스, 하인리히 힘러는 패전을 전후로 자살하였으며, 카를 하우스호퍼, 헤르만 괴링, 빌헬름 카이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루돌프 헤스, 카를 되니츠 등의 나머지 수뇌들은 연합군에 의한 전범 재판인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판결을 받고 처형되거나 구금되었다.

그 외에도 히틀러가 고용한 영화 감독으로 알려진 레니 리펜슈탈이나, 나치 고관이었던 애인의 비호 아래 방탕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코코 샤넬, 나치의 적극적 협력한 지휘자 카라얀 등 나치 독일의 범죄 행위에 가담한 예술가나 실업가 등도 전후 국적을 불문하고 죄를 추궁당하여 대거 활동이 금지되었다. 전범 처벌은 유명인사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행해졌으며 프랑스의 경우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전부 잡아다 남자는 총살시키고 여자는 삭발 후 속옷 바람으로 조리돌림을 시킨 후 태형에 처했다.

모든 반파시스트 유럽 국가에서는 나치 및 파시스트의 구성원을 처벌하는 법률이 확립되었으며, 종전 전에 도주한 사람들도 국제 수배자 명단에 오르게 되어 결국은 체포되어 처벌되었다.

과학기술[편집]

나치독일은 군사력과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과학기술에 적극적으로 투자를 했고 유능한 과학자들에 의해 세계최고의 과학기술을 개발, 보유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연합군에 비해서 우위의 과학기술(당시 세계 최초의 순항미사일 V-1 로켓과 세계 최초의 탄도 미사일 V-2 로켓과 그 외에도 여러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였거나 설계하였다. 세계최초의 제트 전투기 Heinkel He280을 개발하였다. 프로토타입이 시험비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세계최초의 양산 제트 전투기인 메서슈미트 Me 262도 있다. 세계최초의 스텔스 항공기 Horten Ho 229 전익기를 개발하였고 세계 최초로 램제트 엔진을 개발하였다. 여러 종류의 제트 전투기들도 개발하거나 계획하였다. 세계최초의 지대공미사일 Fliegerfaust(Luftfaust) Surface-to-Air Unguided Missile, 세계 최초의 공대공 유도 미사일 Ruhrstahl/Kramer X-4, 세계최초로 성공적으로 만들어지고 개발되고 무선으로 조종되며 고체연료를 사용하는 공대공(AAM)미사일 Luftkampfrakete Henschel Hs 298, 최초로 실용화된 공대공 로켓 Brodrakete R4/M "Orkan"(Hurricane, 허리케인), Wgr 21(Wurfgranate 21) 210mm 로켓탄(쉽게 말해 다연장 로켓탄을 전투기에 장착하였다.), Jagerrakete X4(Fighter Rocket X4)를 개발하였다.)을 보유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전시상황과 경제적 한계에 의해 무기를 개발하는데 속도가 느려지기도 했다. 전세가 역전되어 베를린이 함락되면서 많은 과학자들이 연합군에 협력을 하게 되었다. 이후 나치독일의 과학기술은 미국, 구 소련 등에 전파가 되었으며 현대 과학기술에 큰 획을 그었다.

무장 조직[편집]

정규군[편집]

준군사조직[편집]

경찰조직[편집]

정치 결사[편집]

나치 독일이 전시에 사용한 군기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나치 독일이 점령하거나 협조한 국가[편집]

나치 독일에 협력한 국가[편집]

각주[편집]

  1.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가 쓴《안네의 일기》를 보면 1938년 유대인 학살 이후 독일에서 살 수 없게 되자, 외삼촌들은 미국으로, 자신의 가족들은 네덜란드로 이민을 가야 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