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로드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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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로드 작전
(제2차 세계 대전서부 전선의 일부)
Normandy7.jpg
날짜 1944년 6월 6일~ 1944년 8월 24일
장소 프랑스
결과 연합군의 승리
교전국
미국 미국

영국 영국
프랑스 자유 프랑스 (-1944.8.24)

네덜란드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1]
벨기에 벨기에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뉴질랜드
폴란드 폴란드
노르웨이 노르웨이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캐나다 캐나다
뉴펀들랜드 자치령 뉴펀들랜드
그리스 왕국 그리스 왕국

나치 독일 나치 독일

프랑스 비시 프랑스

지휘관
미국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오마 브래들리
영국 버나드 몽고메리
영국 트래퍼드 리맬러리
영국 베트람 렘세이

나치 독일 에르빈 롬멜

나치 독일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독일 제국 칼 되니츠


오버로드 작전(Operation Overlord)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프랑스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 명칭이다.

상륙과 공격[편집]

노르망디 상륙[편집]

연합군은 1944년 6월 6일 , 예정되어 있었던 디데이 상륙 작전, 즉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시작함으로써 오버로드 작전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공군이 유타 해변과 소드 해변 내륙 쪽에 상륙하였는데 두 지역 모두 치열한 작전 끝에 배후 내륙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연합군 해군도 독일 해군의 출몰의 막기 위해 브르타뉴 반도의 해안가에 기뢰를 매설하였고, 유보트 기지를 습격하였다. 한편, 연합군의 상륙을 쉽게 하기 위해 공군은 윈도우나 폭발 인형과 같은 가짜 낙하산 부대를 투입하였다. 연합군 정보국도 얼트라를 이용해 독일군에게 가짜 메시지를 보내는 한편, 프랑스 레지스탕스들에게 독일군의 교통, 통신 등을 마비시키라는 작전을 전달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상륙을 시작했다. 이들 중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지역은 오마하 해변과 포앵트뒤오크였다. 유타 해변과 골드 해변,소드 해변에서는 연합군이 큰 피해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 특히 영국군은 공수 부대가 성공적으로 캉 운하를 장악함으로써 해변 상륙이 쉽게 이루어졌다. 생메르에글리즈는 미군 공수 부대의 전투 끝에 프랑스에서 최초로 해방된 마을이 되었다. 하지만 연합군은 본디 바이외, 등을 목표로 삼고 있었으나, 독일군의 반격 및 연합군의 진격 속도 저하로 이들을 탈환하지는 못했다.

독일군은 오후 3시경부터 전열을 정비해 캉과 바이외 근처에 기갑사단과 히틀러 유겐트를 파견했지만 연합군을 막기에는 때가 늦었다. 영국군은 독일군 기갑 사단의 마이어 중령의 군단을 격퇴하였으며 유타 해변의 미군은 공수 부대와 만나는데 성공했다. 결국 노르망디 상륙은 연합군이 프랑스에 교두보를 확충하는 계기가 되었다.

카랑탕과 카르피케&112 고지[편집]

연합군은 생로를 탈환하는데 엄청난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센 강 진격[편집]

코탕탱 반도[편집]

팔레즈 협곡[편집]

미 제 3군의 진격[편집]

파리 해방[편집]

자유 프랑스의 유명한 장군 중 하나인 르클라크 장군.

연합군과의 갈등[편집]

연합군의 전략은 라인 강 쪽으로 후퇴하는 독일군의 전력을 파괴시키는데 있었다.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파리를 주요한 목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미군영국군소련군의 공산화 우려로 최대한 빨리 베를린을 함락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파리 침공이 너무 이르다고 판단했다. 아이젠하워는 파리 전투가 소모전이 되기를 원하지는 않아서 독일군에게 도시의 완전한 파괴를 지시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파리가 폐허가 될 경우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너무나 큰 가치의 손실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었다. 포위전이 발발하면 파리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많은식량이 요구될 것이라 추정되었다. 현저한 양의 건물과 인구, 그리고 기술공들 역시 파리 해방 이후에 요구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부활한 프랑스군의 샤를 드 골 장군은 프랑스 제 2부대에게 파리로 진격하라고 명령할 것을 강요했다. 파리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게는 경쟁에 대한 상이었고 파리는 프랑스의 중심지이고 레지스탕스 군은 독일군을 프랑스에서 추방하고 신념 견해가 다른 이과 결합하는 것이었다. 드 골 장군은 그의 임시 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프랑스 외부에 자유 프랑스군을 조직했으나 프랑스 내부에서는 드 골의 지도력에 대항하여 좌파가 형성되고 있었다. 8월 24일, 2부대의 자유 프랑스 장군인 클라라크 장군이 미국 육군 사령관인 레너드 T. 게로 장군의 말을 거부하고 선봉대를 파리에 보냈다. 스페인 내전의 베테랑들로 구성되었던 9 군단은 미국식 M2 반궤도장갑차, M4 셔먼 전차들로 무장했고 레이몬드 드론 장군이 이들을 지휘했다.

전투 개요[편집]

노르망디 상륙연합군이 프랑스 지역을 재빠르게 탈환하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고립되거나 철수를 시작하며 모든 친독일계 경찰들은 거리에서 사라졌다. 몇몇 반독일 시위가 일어났고, 무장한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활발히 일어났다. 사기가 떨어진 독일군은 대응하지 않았다. 이로써 지역적인 중앙적 지시 없이 경찰서, 마을 회관, 공공기관, 신문사, 그리고 드 빌 호텔에서 활동 중이던 프랑스 국내군은 더욱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약 20,000명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파리에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로 표지판을 파괴하고, 독일 병사들의 자동차 바퀴를 구멍냈으며 통신선을 두절했고, 정유소를 폭발시켰으며, 고립된 독일 병사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부적절하게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전쟁을 하기를 두려워했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스웨덴의 라울 노들링에게 독일군 담당자와 파리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디트리히 폰 콜리츠와의 협상을 원했다. 8월 19일 이들은 협상을 계속 이어갔다. 레지스탕스군은 서열이 모호했고, 콜리츠는 파리의 일부분을 레지스탕스 대원에게 넘기기로 협의했다. 레지스탕스 대원은 특정 지역에 독일군이 주둔하는 것을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계가 모호한 상황이었고 독일군과 레지스탕스 대원 둘다 그들의 구역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휴전은 8월 24일에 발족한후 독일군은 대부분 파리에 철수했고 8월 25일경 진격하던 연합군은 파리로 입성 했다.

프랑스 탈환[편집]

주석[편집]

  1. 일부 병사들은 자유 프랑스의 해군으로 참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