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바로사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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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 작전(독일어: Unternehmen Barbarossa, 러시아어: Операция «Барбаросса», 영어: Operation Barbarossa)은 제2차 세계 대전동부 전선에서 나치 독일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한 작전명칭이다. 작전 기간은 1941년 6월 22일부터 1941년 12월까지였으며, 작전 이름은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었던 "바르바로사"(붉은 수염)에서 유래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명군으로 불린 전설적 인물로 동방에 관심을 기울였기에 대소련전에 걸맞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일설에는 붉은 수염은 스탈린을 암시하기도 한다고 한다. 또한 독일 육군은 공격작전명에 색깔 이름을 붙이는 전통이 있어, 이것의 발전형이라고도 생각된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원래 목표는 소비에트 연방유럽 부분[1] 의 정복이었으나 실패했다. 이 실패는 아돌프 히틀러의 전체 전쟁 작전에 차질이 생기게 했고 결국은 나치 독일의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배경[편집]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인을 위한 넓은 생존권이 필요하니 이를 위해 동쪽의 영토가 필요하다는 것을 밝혔다. 히틀러는 슬라브인을 열등인종으로 보고 그들을 추방하고 광대한 영토에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 침공 직전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우호관계를 맺었다. 이것은 독일과 소련이 중앙 유럽의 분할지배에 합의하고 상호안전보장조약을 맺은 것이다. 독소불가침조약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절대 손을 잡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양대 적대세력이 손을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일에게 있어 일시적인 보험에 불과했다.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영국을 후방에 두고 소련을 공격하여 2개의 전선을 만드는 것을 염려했지만, 히틀러는 측근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작전개시를 명령했다.

히틀러는 서방전격전의 성공에 힘입어 소련군과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소련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나치 독일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또한 소련군에 대한 신속한 승리가 영국과의 화평을 촉진시키길 기대하고 있었다.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는 3개의 집단군을 각각 소련의 특정지방에 있는 대도시를 공격, 점령목표로 삼아 할당했다. 2개 군(軍)과 제 4기갑집단으로 구성된 빌헬름 폰 레프 원수가 이끄는 북부 집단군은 발트해 연안에 있는 발트 3국을 경유해 북러시아에 침입하여 레닌그라드[2] 의 점령 혹은 파괴를 목표로 했다. 2개 군과 제 2, 제 3기갑집단으로 구성된 페도르 폰 보크 원수의 중부집단군은 현재의 벨라루스를 통과하여 러시아의 중서부를 진군하여 모스크바에 직접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다. 3개군과 제 1기갑집단, 루마니아 2개군으로 편성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남부집단군은 소련의 최대 곡창지대이며, 거대한 공업지대이고, 인구밀도도 높은 우크라이나 지역을 공격하여 키예프를 공략한 후 남러시아의 초원을 넘어 동쪽의 볼가강까지 진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최종적으로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1] 까지 진출할 계획으로 그 때문에 동절기 장비도 준비하였다. 하지만 장비의 수가 부족했고, 또 작전중 병참의 혼란으로 전선부대까지 동절기 장비가 거의 도착하지 못했다.

소련과 독일의 준비[편집]

개전시점 소련은 주요 군사장비 보유량과 공업 생산력에 있어서 독일을 크게 앞섰다. 소련의 공업 생산은 자본주의국가들이 세계대공황에 시달리던 1930년대에 급속히 발전해 이미 1930년대 말에 소련은 미국의 뒤를 이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소련은 중공업, 특히 군수산업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또한 소련의 전차는 독일의 전차에 비해 성능면에서 많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항공기의 발전도 눈부셔 독일 등 서구제 항공기와 성능도 거의 비슷해졌다.

그러나 스탈린은 1930년대 후반부터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공산당과 군내부에 있던 반대파에 대한 대숙청을 감행해 적백내전 등을 통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유능한 육군지휘부를 포함한 수백만 명을 숙청했기 때문에 소련군은 지휘관이 부족하게 되었다.

그외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전격전으로 격파한 후에도 소련은 독일군의 진군 속도를 경시했다. 소련군은 전방의 군이 독일군을 국경근처의 요새선에서 저지하는 사이 주력을 후방에 집결시킨 뒤 공격을 가한다는 작전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9년까지 국경선에 구축된 요새 스탈린선은 같은해 소련이 폴란드의 동쪽을 병합하면서 폐기되었다. 새로운 국경근처의 요새는 구축중에 있었고, 겨우 위치만을 표시하는 존재였다. 새로운 요새선의 구축 완료까지 소련측의 방비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지만 국경부근에 병력을 배치하는 방침은 변경하지 않았다. 정예부대 대부분을 독일 국경과 시베리아의 만주국 국경에 배치했다.

스탈린은 독일의 공격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조약체결까지 소련은 나치즘의 위협을 선전하면서 국내의 숙청의 구실로 삼았으나 조약체결후에는 모습을 바꿔 반 독일적인 논조를 억압했다. 첩보부로부터 독일군이 국경에 집결한다는 보고를 비롯한 독일의 소련 침공에 대한 경고가 여러차례 있었는데도 스탈린은 그 정보를 독소불가침조약을 파기하려는 영국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정부도 군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아, 전선부대의 경고에도 대처를 하지 않았다.

독일 침공에 대한 경고[편집]

1941년 6월 18일 저녁, 독일군이 점령한 폴란드 국경 가까이에 있는 서부 우크라이나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 보병군 사령관 이반 I. 페듀닌스키 대령 사령부의 전화벨이 울렸다. 한 국경경비대 장교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독일군 병사 하나가 방금 우리쪽으로 넘어왔습니다. 그 자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털어놓고 있습니다. 다만 그 자를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어." 페듀닌스키는 이렇게 말한 후, 곧 그 독일병을 잡아놓은 초소로 갔다. 그는 통역에게 "왜 소련쪽으로 넘어왔느냐고 물어보라"고 지시했다. 그 젊은 독일병이 설명을 시작했다. 자기는 술 취해 장교를 구타했기 때문에 군사 재판을 받게 되어 있으며, 자기는 항상 러시아를 좋아했고,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물었다. "목숨만은 살려 주시겠어요?" 그것은 참으로 묘한 질문이었다. 왜 소련정부가 불가침조약을 맺은 지 불과 2년도 되기 전에 우방국의 한 평범한 병사를 죽이기를 원할 것인가? 그들은 이 점을 그에게 물었다. 그 독일 탈주병은 대답했다. "곧 전쟁이 터지기 때문입니다. 독일군이 소련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는 계속했다. 6월 22일 오전 4시를 기해 히틀러 군대가 북극해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총전선 3,200km에 걸쳐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이었다. 페듀닌스키 대령은 그 정보를 "믿을 수 없는"것으로 판단했다. 전쟁이 일어난 것이라는 소문이 서부 우크라이나 일대에 퍼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또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소련 공산당 지배보다는 독일 나치 정치가 한결 편하리라고 생각하여 그 소문을 내심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그러나 불과 4일 전인 6월 14일 소련 공산당은 단정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독일군 공격이 임박했다는 것은 "전연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공산당은 그 소문을 "소련과 독일에 적대적인 세력이 확전을 바라고 지어낸 졸렬한 선전"이라고 매도했다. 다시 말해 미국과 영국이 그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성명은 결론에서 말했다. "독일은 소련과 마찬가지로 불가침조약의 조건을 완벽하게 준수하고 있다."

소련군 페듀닌스키 대령이 독일군 탈주병의 정보를 믿지 않은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독일병은 계속 주장했다. "만약 6월 22일 오전 5시에 독일군이 침공하지 않으면 그때 나를 총살하십시오!" 페듀닌스키는 제5군 사령관 M. I. 포타포프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포타포프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런 도발을 믿어선 안돼. 죽음의 공포에 떠는 독일병이라면 무슨 거짓말인들 못하겠는가." 같은날 크렘린도 거의 비슷한 경고를 접수했다. 스위스에서 활동하던 소련 첩보원 알렉산더 푸테가 독일군 최고사령부가 짜고 있는 "바르바로사" 작전에 관한 보고서를 입수했던 것이다. 그것은 속전속결 작전으로 소련군을 분쇄하여, 히틀러우랄 산맥 서쪽의 소련 국토에 대한 지배자로 만들기 위한 전쟁계획이었다. 그 정보 내용은 너무나도 완벽했기 때문에 푸테가 무전으로 세세한 부분까지 모스크바에 보고하는 데 4일이나 걸렸다. 그 메시지 결론 부분은 6월 18일에서야 수신되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았다. "소련군 점령 지역에 대한 총공격 일시 6월 22일 일요일 새벽 3시 15분"

이러한 보고들은 소련정부가 과거 수개월 사이에 접수한 같은 종류의 정보 수십통 가운데 극히 최근에 얻은 것이었다. 이미 2~3월경 소련 대사관은 독일군의 전쟁물자가 서부전선으로부터 동부로 대거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3월에 미국 정부는 워싱턴 주재 소련 대사 콘스탄틴 A. 오우만스키에게 베를린 주재 미국 대사관 상무관 샘 에디슨 우즈로부터 보내온 히틀러의 침공 계획서 한 권을 넘겨주었다. 우즈는 1934년 이래 베를린에 근무하면서 믿을 만한 반나치분자들과 비밀접촉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의 한 사람으로부터 그 계획서를 받은 것이다. 미국 국무장관 커델 헐에 의하면, 그것을 오우만스키에게 전달한 순간 소련 대사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고 한다. 한달 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최고 기밀 메시지를 모스크바 주재 영국 대사 스태퍼드 크립스에게 보내 직접 스탈린에게 수교(手交)하도록 지시했다. 그 메시지는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의 폴 공(公)에게 6월 30일에 소련을 공격하겠다고 말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크립스 대사는 스탈린은 커녕 외상 몰로토프까지도 만나지 못했다. 겨우 2주일 후 소련 외무부 하급 외교관이 그 메시지를 받아 스탈린에게 보냈다.

뛰어난 소련의 비밀 첩보요원들이 보낸 여러가지 경고 중에서도 가장 신빙성 있는 정보가 일본 도쿄에서 활동하는 소련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로부터 들어왔다. 5월 초, 히틀러는 일본 관리에게 소련 정복 계획을 털어놓았다.(히틀러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독일과 동시에 소련을 공격하기를 원했다.) 조르게가 그 정보를 입수했다. 5월 12일, 조르게는 모스크바에 독일군 약 150개 사단이 6월 20일에 소련을 공격한다고 보고했다. 소련에서도 무언가 큰 일이 터질 듯한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소련 국토 상공을 정찰비행하는 독일 항공기의 수가 점점 더 많아졌다. 5월 중순이 되자 주소(駐蘇) 독일 외교관 가족들이 짐을 꾸려 귀국하기 시작했다. 6월 11일, 스탈린은 독일 대사관에서 직원들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3~4일 후, 해군 인민위원 N. G 쿠즈네초프 제독은 몰로토프에게 독일 선박들이 소련 항구로부터 급히 출항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몰로토프는 대답했다. "우리를 공격하다니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짓이다." 그리고 스탈린도 이러한 경고들을 모두 무시하였고, 결국 독일은 6월 22일 소련을 침공하게 된다.

독일군의 공격이 있기 직전까지도 소련은 거의 방어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공격 전날인 6월 21일 국경지대 비행장에서 소련 공군은 일상적인 야간 훈련을 막 끝마친 참이었다. 당시의 비행사들은 수면 부족이었고, 비행기는 연료부족 상태였다. 또 국경의 중요 도시인 브레스트를 지켜야 할 부대들은 여름 기동훈련에 참가하느라 인근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발트 군관구 사령관 표도르 I. 쿠즈네초프 대장은 중포들을 방어진지에 설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포를 끌고 갈 차량들이 부족했고, 또 정한 위치에 설치된 중포에서는 포탄이 부족했다. 다만 국경선 남쪽을 맡은 키예프 군관구에서만 겨우 준비 비슷한 것이 약간 이루어졌다. 전쟁이 벌어지기 1주일 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M. P. 키르포노스 대장은 모스크바에 대해, 국경 너머에 독일군이 집결중이라고 보고했다. 그리하여 민간인 30만명을 소개시키고 여러 방어거점에 병력을 배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로부터 그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말만 들었다. 그런데 6월 19일, 국방 정치위원 세묜 티모셴코는 키르포노스 대장에게 사령부를 이동해 기습에 대비하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티모셴코는 휘하 부대들에게 경계태세를 취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독일 공격부대의 준비[편집]

독일측에서는 만반의 준비가 완료되었다. 프란츠 할더 대장은 사령부에서 6월 21일 일기 첫 줄에 이렇게 썼다. "암호용어 도르트문트(Dortmund)가 왔다." 독일 루르 지방에 있는 한 도시명인 이 낱말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예정대로 실시한다는 신호였다. 히틀러는 특별 열차를 타고 베를린을 떠나 동프러시아 라슈텐부르크에 위치한 숲의 지휘소로 갔다. 부그강 서안에서 휘하 장갑군과 함께 대기중이던 하인츠 구데리안 대장은 그 날, 강 건너편의 거대한 브레스트 요새를 한동안 관찰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2년 전 폴란드군을 몰아내고 그 요새를 일차 점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1939년의 불가침조약 규정에 따라 그것을 차지한 소련군으로부터 다시 브레스트 요새를 탈환해야 했다. 그날 늦게 국경에서 독일군은 소대 단위로 모여 소대장이 낭독하는 히틀러 메시지를 들었다. "유럽 문명과 문화를 구하기 위해 세계 사상 최대의 군대가 바야흐로 행동을 개시하려 하고 있다"라고 그 메시지는 말했다.(할더 대장은 그 메시지를 "장황한 선언문"이라고 그 일기속에서 평했다.)보병들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무기들을 모포로 감쌌다. 무전통신도 일절 중지되었다. 그러나 탱크, 병력 운반차, 자주포 그리고 보급차 소리를 죽일 도리는 없었다. 국경 저편의 소련군 장교들은 경계심을 돋우며 독일군 진지의 엔진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브레스트 북서쪽에 있는 그로드노로부터, 독일군이 자기들 앞쪽의 철조망을 치워 국경으로 통하는 도로를 터놓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스탈린의 방어 준비 명령[편집]

공격 개시일 바로 전날, 스탈린은 그제서야 겨우 방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오후 2시에 모스크바의 대공 방어시설에 대해 75%의 전투태세로 병력을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I. V. 툴레네프 장군은 스탈린이 화내리라는 것을 각오하고 어쨌든 전군 완전 전투태세 돌입을 명령했다.) 오후 5시, 스탈린은 국방 정치위원 세묜 티모셴코와 회의를 가졌다. 티모셴코는 국경 부대들을 완전 경계태세 하에 두고 전면적 방어계획을 실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제지했다. "이유없이 공황 상태"를 빚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저녁 늦게서야 스탈린은 양보했다. 그는 국경지대 지휘관들에게 전투태세를 취하고 지정된 방어거점에 병력을 배치하도록 명령할 것을 승인했다. 그러나 그것도 그들의 그런 대비를 독일군이 공격의 구실로 삼지 않도록 비밀리에 거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휘관들은 "매우 복잡하고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도발에 절대 응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명령도 받았다. 그와 같은 스탈린 명령 1호는 추가하여 "특별한 명령이 없는 한 다른 조처를 취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 명령은 공격 개시 불과 3시간 전인 6월 22일 일요일 오전 0시 30분에 발송된 것이였다. 명령을 받고 어리둥절해진 소련군 장교들은 더 명확한 명령을 요구했다. R. Ya. 말리노프스키 장군이 보낸 질문은 대표적인 것이었다. "적이 우리 국토를 침범할 때 우리는 발포할 수 있는가?" 모스크바로부터의 대답은 이러했다. "도발에 응하지 말 것이며 발포하지 말 것" 통신시설이 빈약한 지구의 장교들은 그런 질문조차도 던져보지 못했다. 그러한 지시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그들이 전사한 뒤였다.

6월 21일~22일은 1년 중 밤이 가장 짧은 날이다. 온종일 해가 지지 않기 때문에 북부에서는 "백야(白夜)"라고 불리는 기간이 절정을 이루는 때인 것이다. 그날 밤, 국경선 중앙 지역에서는 불과 2~3시간 동안 진짜 어둠이 찾아왔을 뿐이어서, 장교들은 늦게까지 자지 않고 하지(夏至)의 밤을 축제기분으로 보내고 있었다. 서부 군관구 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장군은 민스크의 장교 클럽에서 인기 극작가 알렉산드르 E. 코르네이추크 원작 희곡을 구경하고 있었다. 공연중에 정보장교가 와서 그의 귀에다 대고 무엇인가 속삭였다. "그럴 리가 없다." 고 파블로프는 대답했다. 파블로프가 연극을 보고 있는 동안, 수개월 전부터 그 지역에 잠입해 있던 독일 공작원들은 어둠을 틈타 전화선을 끊고, 보초들을 소리없이 죽였으며, 방치된 소련군 차량을 못쓰게 만들어 놓았다. 또 국경을 흐르는 강 서안에서 독일군은 부교(浮橋)를 만들 부분들을 강물에 밀어넣고 있었다. 6월 22일 오전 3시 드디어 독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격개시[편집]

1941년 6월 22일[3] 독일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작전에는 독일군을 주축으로 한 추축군 총 300여 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 동원되는 역사상 최대 육상작전이었다. 6월 22일 오전 3시를 전후하여 독일군 대포 6,000문이 일제히 포문을 열어 국경선을 따를 모든 소련군 방어거점과 물자 집적소 등을 포격하기 시작하자, 그와 동시에 독일의 공군기 편대들이 떼지어 나타나 집중적으로 비행장과 민간 목표물을 폭격했다. 22일 정오까지 독일 공군은 1,200대의 소련 공군기―800대는 지상에 있던 것―를 격파했다. 그러나 독일측 손실은 불과 10대였다. 부그강의 독일군 공격반은 뛰어서, 혹은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리 위를 돌진했다. 그에 놀란 강 건너편의 소련군 경비대는 미처 다리를 폭파할 겨를도 없었다. 독일군은 부그강의 전략상 중요한 교량들을 거의 저항없이 완전히 확보했다. 남부지역의 소련 국경 경비대는 과감하게 저항했지만, 홍수처럼 밀려드는 독일군을 오래 막고 있을 수 없었다. 불시의 집중 공격은 소련군을 강타했다. 이 혼란 속에 통신이 끊어지고 지휘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여러 사단 전체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게 되었다. 독일 통신병은 필사적으로 통신을 보내는 소련 통신병의 목소리를 도청하고는 신이 났다. "제3군의 사령부가 전멸했다. 장거리 전투기를 보내라." 그리고 되풀이해서 "우리는 공격을 받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하느냐?"라고 외쳐대는 것이었다. 그런 절규에 대해 소련군 사령부로부터 보내는 대답은 "정신이 나갔구나. 왜 통신에 암호를 쓰지 않느냐?"였다.

소련군은 혼란에 빠졌지만, 믿어지지 않는다는 기분이 강했다. 오전 3시 15분 쿠즈네초프 제독은 흑해 함대 사령관으로부터 독일 공군이 세바스토폴을 폭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쿠즈네초프는 스탈린과 연락이 닿지 않아 그 사실을 미심쩍어하는 스탈린의 부관 게오르기 말렌코프에게 전언을 남겼다. 쿠즈네초프는 후에 말렌코프가 직접 세바스토폴에 전화를 걸어 그 보고의 사실 여부를 확인했음을 알았다. 독일군이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안 세묜 티모셴코는 스탈린과 상의한 다음 민스크의 서부 군관구 사령관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우리 승인 없이는 어떤 행동도 독일군에 대해 취해서는 안된다."라고 파블로프의 부사령관 볼딘 장군에게 말했다. "스탈린 동지가 우리 포병의 포격을 금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볼딘은 전화통에다 대고 소리질렀다. "우리 군은 후퇴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그러나 티모셴코는 명령을 지키라고 대답했다.

이때 이미 독일의 3개 집단군(북부집단군, 중부집단군, 남부집단군)은 소련 국토 내로 수km지점까지 들어와 있었다. 독일 공군은 여전히 맹렬한 공격력을 유지하면서 폭격을 가하고 있었다. 소련의 스타리노프 대령은 브레스트 근처 코브린(브레스트 동쪽 약 43km)의 소련 제4군 본부에서 직접 폭격을 경험했다. "폭탄이 귀청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폭발음은 공기를 뒤흔들었고 우리 귀는 멍멍해졌다. 어디선가 '아아'하고 여자의 날카로운 절규가 안타깝게 들려왔다."고 그는 훗날 술회했다. 그 공습이 끝난 직후에 코브린시(市) 대광장에 설치된 라디오의 확성기로부터 모스크바 방송이 흘러나왔다. 거기 모인 군중이 조용해졌다. 오전 6시 뉴스 시간이였다. "코브린 시민들은 숨을 죽이고 모스크바의 발표를 기다렸다."라고 스타리노프는 회상했다. 맨 먼저 여느 때와 같이 농촌과 공장에서 달성한 성과를 나열하는 방송이 나왔다. 다음 대서양의 전쟁 뉴스가 나왔다. 독일 공군이 스코틀랜드를 폭격했다. 이어 일기예보. 그리고 뉴스 방송은 끝났다. 그러나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다음에 꼭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왜 폭격을 당했으며, 소련이 현재 전쟁을 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해 속시원하게 설명하는 특별 방송이 반드시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서는 매일 아침마다 나오는 신체 체조 방송이었다. 모스크바 방송 아나운서는 호령했다. "팔을 앞으로 굽히고! 좋습니다. 팔을 위로, 아래로, 위로, 아래로, 다시! 훨씬 잘 됐습니다."그 방송에 분노한 한 시민이 땅에 침을 뱉었다. 군중은 서서히 흩어졌다. 스타리노프에 의하면, 군중은 독일 공군의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Stuka)에게서보다 이 방송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근대사에서 가장 사상자가 많았던 전쟁―소련 국민 2,000만명이 죽었다―이 터졌다. 그러나 스탈린은 아직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공격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오전 7시 15분에 이르러서야 소련군에게 침략군과 싸울 것을 허용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독일쪽까지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엄격한 제한을 덧붙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소련군이 그 명령을 어기면서 독일 국내로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사실 바르바로사 작전 전까지만 해도, 소련군은 자만에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6월 22일, 소련군은 불시에 자기 나라 안에서 방어전을 펴고 있으며, 그 지휘관과 군대의 결점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소련군 공군 중장 I. I 코페츠는 그날 오후, 적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미 전투기를 모두 상실한 뒤라서 폭격기가 전투기 호위 없이 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폭격기를 출동시켰다. 느림보 일류신 폭격기와 투플레프 폭격기가 용감하게 날아올랐지만 간단히 메서슈미트에 희생되고 말았다. 독일 공군 원수 알베르트 케셀링은 소련기를 격추하는 일은 "아이들 팔 비틀기(infanticide)"만큼이나 쉽다고 말했다. 전쟁 발발 2일째에 코페츠는 폭격기들을 몽땅 잃자 자살하고 말았다. 지상군의 혼란도 그에 못지 않았다. 빌헬름 리터 폰 레브 원수 휘하의 북부집단군 독일 장갑군은 리투아니아의 숲길을 따라 돌진해 왔다. 독일군과 마주친 이곳의 소련군 부대들은 대혼란을 일으키면서 삼림 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다.

크렘린이 내린 불가능한 명령들[편집]

리투아니아의 남쪽에서는 서부 군관구 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장군 휘하의 부대들이 비알리스토크(바르샤바 북동쪽 약 177km, 민스크 서쪽 약 300km)라 불리는 돌출부 멀리까지 배치되어 있었다. 페도르 폰 보크 원수 휘하의 중부집단군 기갑부대가 쐐기형태로 돌출부 남쪽과 북쪽으로부터 소련군 배후를 돌아 이 지역으로 돌입하자, 소련군 3개 군이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민스크의 사령부에 있던 파블로프 장군은 독일군 공격 개시 이래 이 부대들로부터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군은 부사령관 볼딘 장군에게 비행기로 날아가 현지 조사를 하라고 명했다. 비행기로 날아간 그는 비알리스토크 근처 작은 비행장에 착륙했다. 그리고 불과 200~300m쯤 걸어갔을 때, 독일 공군기 9대가 나타나 그가 타고 온 비행기를 포함해 지상의 소련기를 모두 파괴해버렸다. 그는 소련군이 탄 트럭을 불러 세워 제10군 본부로 가도록 명령했다. 병사들은 가는 길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독일 공군기가 지상에서 움직이는 것만 보면 모조리 기총소사를 가하며, 낙하산부대를 내려보낸다는 것이었다. 비알리스토크로 가는 길에서 그는 피난민 대열을 만났다. ZIS-101 대형 리무진을 만났는데, 그 차에는 이 지방의 고위 관료가 고무나무를 비롯한 가재도구를 잔뜩 싣고, 아내와 아들까지 함께 타고 있었다. 볼딘 장군은 그 리무진을 세워 국민이 죽어가는 마당에 정원의 나무까지 싣고 가는 그를 나무랐다. (수분 후 그 리무진은 독일 공군기의 기총소사를 받아 탑승한 사람들이 모두 사망하였다.)

해질 무렵 볼딘 장군은 제10군 전투지휘소에 도착했다. 천막 2개를 치고 나무 테이블 하나와 몇 개의 의자가 있는 지휘소는 비알리스토크로부터 약 13km 떨어진 숲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볼딘은 사령관 K. D. 골루베프 소장에게 왜 서부 군관구 사령부로 보고를 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골루베프는 전화선이 끊어졌고, 아직 무선통신망이 연결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괴로운 사정을 길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탱크와 트럭에 쓸 기름이 없다. 보낸다던 탄약도 감감 무소식이다. 탱크는 "참새를 쏘기에 알맞는" 고물이다. 독일공군이 하늘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동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군은 영웅적으로 싸우고 있소."라고 그는 말했다. 이때 민스크와의 무전 연락이 되었다. 볼딘은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파블로프 장군의 목소리를 들었다. 전선의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세묜 티모셴코가 모스크바로부터 총반격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여기 그 명령이 있소."하고 파블로프 장군은 말했다. "반격으로 적을 분쇄하라. 골루베프에게 오소베츠, 비스나, 벨스크(비알리스토크 남쪽 약 40km 지점) 그리고 클레슈첼리에를 점령토록 하라." 그 도시들은 모두 독일군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모두 오늘 밤 사이에 끝내도록 하시오."라고 파블로프 장군은 덧붙였다. 볼딘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미 지리멸렬된 소련군이 공세를 취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이의를 제기하자 파블로프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일세. 임무를 수행해 주게." 볼딘은 파블로프 장군이 현실로부터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파블로프도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모스크바로부터의 명령에 시비를 걸면 스탈린의 분노가 제 머리 위에 떨어질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숙청을 목격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소련 장군들은 위험하다든가, 우유부단하다든가 불충하다는 비난을 받기보다 차라리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명령을 내리는 쪽을 택했다. 그들은 히틀러 군대보다도 스탈린이나 그의 비밀경찰인 NKVD쪽을 더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M. P. 키르포노스 대장 휘하 키예프군관구 군대가 독일군에 대해 강력한 저항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것은 반가운 소식이다."라고 독일의 프란츠 할더는 일기에 기록했다. 또한 만약 소련군이 후퇴하지 않는다면 그들을 포위할 기회는 더 많아진다고 덧붙여 기록했다. 소련군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에 집중해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소련군도 국경에 배치된 다른 소련군들과 마찬가지로 장비 부족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다. 이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휘하 남부 집단군이 맹렬한 공격을 해 오고 있었다. 전황을 파악하고 있던 키르포노스의 부참모장 I. K. 바그라미안 소장은 6월 22일 저녁, 모스크바의 티모셴코로부터 2일 내에 "적 집단을 포위, 섬멸하고" 국경 너머 독일 지역에 있는 폴란드의 도시 루블린(바르샤바 남동쪽 약 150km지점)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자 어리둥절했다. 바그라미안이 키에프 군관구 참모장 M. A 푸르카예프 중장에게 그 명령문을 소리내어 읽어주자, 푸르카예프는 "설마 그럴리야 있겠느냐"는 표정으로 명령문을 받아 쥐었다. 두 사람은 함께 키르포노스를 만나, 그들의 군대가 이미 관할지역을 거의 방어할 수 없게 된 상태인데 하물며 어찌 전진을 해서 루블린을 점령할 수 있겠느냐고 솔직히 건의했다. 그러나 키르포노스는 잘 길들여진 소련군 지휘관의 본능에 따라 행동했다. 그는 당장 정치위원 니콜라이 V. 바슈긴을 불러오게 했다. 바슈긴은 직업군인을 편들 사람이 아니었다. 푸르카예프 중장이 일단 후퇴를 한 다음 넉넉한 병력을 모아서 반격을 시도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말하자, 바슈긴은 푸르카예프의 충성심을 문제삼기 시작했다. "귀관은 이미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까" 라고 바슈긴은 말했다. "지금은 그것을 수행하면 족한 것입니다." 정치위원의 말 속에 담긴 협박조에 겁을 먹은 키르포노스는 순순히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실제로 반격을 가한 것은 그로부터 2일 후이다. 소련군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감수하면서 독일군의 진격 속도를 약간 늦추는 것으로 끝났을 뿐이었다. 루블린을 향해 진격할 가망은 전혀 없었다.

드빈스크 점령[편집]

전선 지휘관들은 패주 상황을 사실 그대로 보고하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서는 개전 첫날밤에 명령대로 총반격이 진행중일 것이라고들 짐작하고 있었다. 오후 10시, 소련군 참모총장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는 그날 하루의 전황을 평가하여 "소련군이 유리한 상황에 있으며, 적은 격퇴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북쪽에서는 빌헬름 폰 레프 휘하의 북부 집단군이 목표인 레닌그라드와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최대의 장애물 드비나강을 향해 돌진했다. 게오르크 한스 라인하르트 장군 휘하의 제41기갑군단은 6월 23일 밤 리투아니아의 라제이냐이 마을 근처에서 소련군 탱크 300대의 반격을 받았다. 그러나 새로 편성된 이 탱크부대는 전차전에 미숙했다. 이들 소련군은 탱크 185대를 상실했고, 독일 기갑군은 드비나를 향해 계속 진격했다. 라인하르트 우측에서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이 그의 제56기갑군단을 드빈스크(Двинcк,다우가프필스, 민스크 북북서쪽 약 230km)를 향해 질풍노도 같이 휘몰아가자, 소련군은 어지럽게 흩어지며 패주했다. 교량 2개가 있는 드빈스크는 강폭 230m의 드비나강을 건너는 데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다. 26일 새벽까지 만슈타인의 선봉 탱크는 소련 국내로 300km까지 돌진하여, 드빈스크로 통하는 교량 전방 6km지점까지 육박해 갔다. 공격을 계속하게 되면 소련군이 교량을 파괴할 우려가 있어 여기서 독일군은 일단 정지해 교묘한 위장전법을 쓰기로 했다. 소련군 복장을 한 독일군 1개 공병소대가 노획한 소련군 트럭 4대에 분승하여 몰고 갔다. 트럭 3대는 드빈스크의 도로교 쪽으로 돌진했다. 소련병은 그 트럭들이 소련군 부상자를 운반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대로 통과시켰다. 선두 트럭이 다리에 접근하자, 소련군 보초가 나와 차를 세우려고 했다. 독일군은 속도를 늦추었다가 갑자기 돌진하여 그 보초를 깔아뭉개고 다리 건너편까지 달려갔다. 두번째 트럭이 뒤따랐다. 이들이 트럭에서 내려 다리에 장치한 폭약을 뜯어내는 동안 세번째 트럭의 독일병들이 뛰어내려 나머지 보초들을 사살했다. 그러나 곧 더 많은 소련병이 기관총까지 가지고 나와 다리 양쪽 끝에서 나타나 약 20분간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윽고 중무장한 독일군이 도착해 아무 탈 없이 다리를 확보했다. 네번째 트럭은 철교를 향해 갔다. 그러나 그 트럭이 다리목에 도착했을 때, 소련 군복으로 위장한 독일군의 정체가 드러나 다리 저편까지 총격전을 벌이며 건너가야 했다. 소련군은 간신히 폭파장치를 터뜨리긴 했지만 철교의 손상도는 미미했다. 만슈타인 기갑군은 즉각 다리를 건너 드빈스크 시내 거리를 질주하면서 소련군 수비대와 교전했다. 그것은 격전이었지만, 저녁까지는 드빈스크시를 완전 점령했다. 개전 이래 불과 4일 밖에 되지 않았지만, 독일군은 벌써 레닌그라드를 향해 480km지점까지 육박하여 그곳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백러시아(Belorussia) 지방을 진격하는 중부집단군의 성과는 더욱 극적이었다. 헤르만 호트 대장 휘하의 제3기갑군과 그 남쪽의 하인츠 구데리안 대장 휘하의 제2기갑군이 신속하게 소련군의 방어선을 뜷었다. 그들은 다시 동진하여 소련국내 320km지점인 민스크를 덮치려는 거대한 2개의 손톱인양 뻗어나갔다. 이 협공작전이 성공한다면 앞서 말한 비알리스토크 지역의 파블로프 휘하의 소련군 3개 군을 포위하게 되어 있었다.

하인츠 구데리안 대장의 진격은 너무나도 신속했기에 기습당한 소련군은 물론 자기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6월 24일, 그는 자신의 지휘 기갑차에 설치된 기관총을 손수 써서 소련군이 설치한 도로방책을 분쇄했다. 이때 잘못하여 근거리에서 소련군 탱크의 사격을 받게 되었으며, 트럭에서 뛰어내려 반격을 해오는 수많은 소련군 부대 속을 뜷고 지나가야만 하게 되었다. 소련군은 자기들 한복판에 출현한 독일군 장군의 모습을 보고 너무 당황하여 한때 총쏘는 것까지 멈출 정도였다. "소련 신문이 후에 내가 전사했다고 보도한 것을 보니 나를 확인했음이 틀림없다."라고 구데리안은 회고했다.

민스크와 비알리스토크 포위[편집]

6월 26일까지 두 기갑군은 소련 내부로 280km나 들어가, 민스크 남방 100km지점에 도달해 있었다. 구데리안과 호트 두 사람은 모두 동으로 320km를 더 나아가 보다 많은 소련군을 사로잡기 위해 스몰렌스크(모스크바 서쪽 약 360km, 민스크 동쪽 약 306km) 에서 포위망의 매듭을 묶고자 했다. 그러나 히틀러 는 독일군 전선이 너무 길게 뻗어 전선의 두께가 얇아지면 소련군이 그 틈으로 빠져나갈 것을 우려해 민스크에서 일단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한편 2개 독일 기갑군은 국경 부근의 소련군을 포위하기 위해 보다 소규모적인 협공작전을 펴고 있었다. 그들은 남과 북으로부터 비알리스토크와 민스크 중간지점쯤 되는 곳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다. 개전 당일 파블로프의 명령으로 현지 시찰을 위해 이곳에 온 볼딘은 다른 소련군과 함께 급히 형성되는 독일군의 포위망 속에 들어가고 말았다. 6월 24일, 그는 포위망을 뜷기 위해 북동쪽에서 반격에 나섰다. 그는 탱크와 기병부대를 공격에 투입했지만 이들은 독일군에게 격퇴당했다. 이 시점에서 파블로프는 현명하지 못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그는 보다 큰 독일 기갑군의 포위망이 형성중이란 것을 모르고, 스탈린에게 자기의 능력과 공적을 과시하기 위했음인지, 휘하에 남아있던 예비 병력을 민스크로부터 내보내 독일군을 공격하게 했다. 이로 인해 민스크는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호트군이 6월 민스크를 점령하고, 이튿날 구데리안 기갑군이 남으로부터 진입하여 포위망을 완성했다. 6월 28일, 독일군에 의한 보다 작은 포위망이 비알리스토크 서쪽에서 소련군을 물샐 틈 없이 둘러쌌다. 두 포위망 속에 갇힌 소련군은 필사적인 반격을 시도했으나, 대개 희생자만 많이 냈을 뿐 헛수고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는 탈출에 성공했다. 볼딘 장군은 소수의 잔존 부대를 이끌고 8월에 국경선으로부터 650km 떨어진 동쪽 소련군 지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포위된 소련군은 수일 안에 항복하였다. 독일군은 여기서 30만명의 포로, 2,500대의 탱크, 1,500문의 포를 얻게 되었다. 소련의 5개 군―22개 보병사단, 7개 탱크사단, 6개 기갑여단에 해당하는 병력―이 개전 이래 1주일 남짓한 사이 소련군 전열에서 탈락하였다.

파블로프 장군 자신은 본부를 동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모질레프로 이동시켜 포위망을 빠져 나왔다. 참모총장 게오르기 주코프는 의기양양한 독일군 방송을 통해 이 사실을 알고, 6월 30일 파블로프를 모스크바로 소환했다. 여기서 그는 몇몇 참모들과 총살형을 당하게 된다. 같은 날, 독일 육군 총사령부에서는 이날이 하나의 축제날이었다. 그날은 프란츠 할더의 57회 생일이기도 했는데, 축하 인사 속에는 작전의 성공을 축하하는 말도 섞여 있었다. 히틀러 자신도 그때까지의 작전 성공을 인정하는 개인적인 제스처로서 차를 마시러 왔다. 히틀러는 기뻐할 만도 했다. 기갑군은 4일 동안 소련 국내로 약 100km 진입해 들어갔다. 7월 3일 프란츠 할더는 일기에 썼다. "러시아 전투가 불과 2주일 사이에 승리로 끝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겄이다."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이 당면한 문제[편집]

개전 초기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날로 심각해지는 숱한 문제에 직면했다. 첫째, 소련에 대한 정보가 허점 투성이였고, 그들이 가진 소련 지도는 엉망이었다. "지도에 양호한 길이라고 굵직하게 기입된 도로가 실은 좁은 길이었다."라고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는 불만을 터뜨렸다. 때로는 그 위치에 도로가 없는 경우도 있었다. 독일군은 좋은 도로를 "롤바안(차량도로)"으로 지정하고 엄격한 우선순위에 따라 세밀하게 해당부대에 할당했다. 둘째, 도로와 날씨 그리고 지세(地勢) 등 3가지가 겹쳐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었다. 날이 개면 보병의 장화롸 탱크의 캐터필러에 흔들려 일어난 먼지가 비포장도로에서는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먼지는 기갑차량의 엔진속에 들어가 고장을 일으키게 하고, 보병의 숨통을 막았으며, 시계(視界)를 흐리게 했다. 소련 국토의 지리적 형태는 거대한 깔때기 입이 동쪽을 향해 벌어진 꼴이다.(<자 모양) 다시 말해 이것은 독일군이 동진을 하여 깊이 들어갈수록 전선이 벌어진다는 것을 뜻했다. 독일군 진격로 사이의 간격이 점점 더 넓어지면, 뒤에 처진 소련군 부대와 급히 편성된 빨치산(Partisan, 파르티잔) 그룹이 독일군 측면을 공격할 수 있는 여지도 커진다. 셋째, 점점 완강해지는 소련군의 저항에 있었다. 소련군은 조직의 허점을 드러내고 준비 부족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선 여기저기서 예상 이상으로 강인하고 끈질긴 저항을 보였다. 소련병은 기회만 주어지면 자기 수비위치를 버리고 도망치기도 했지만, 일단 오도가도 못할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에 빠지면 필사적으로 덤벼들어 많은 독일군을 죽였다. 브레스트 국경 요새의 전투는 그 중요한 예이기도 했다. 소련 침공 당시 요새는 수시간이내에 점령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련 수비대는 포위당한 요새에서 1개월간 전투를 계속했다. 소련군이 이처럼 단호한 결의를 한 이유에는 히틀러 때문이기도 했다. 포로가 된 정치장교는 처형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은 자주 실천에 옮겨졌다. 따라서 많은 소련병들은 항복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치장교들은 포로가 되면 고문을 당하거나 죽음이 있을 뿐이라는 의식을 일반 군인들의 머릿속에 철저히 주입했던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의 만행[편집]

독일군의 만행에 대한 이야기―많은 것이 진실이었다―는 개전 당초부터 소련군 속에 확 퍼졌다."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 : 임무부대)"이라고 불린 독일 SS의 특별 보안대가 독일 정부 정책에 부응하여 24시간을 쉬지 않고 포로와 소련 민간인을 죽이는 일에 종사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관이었던 오토 올렌도르프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약 500명으로 구성된 자기들 그룹 하나만으로도 개전 초기에 소련 민간인 9만명을 죽였다고 증언했다.

소련군의 필사적인 저항[편집]

소련군은 그들의 지배자들에 대한 공포 때문에 광적으로 전투를 했다. 스탈린이 파블로프 장군을 처형했다는 것은 소련군을 지배하는 잔인성을 나타내는 증거였다. 앞서 언급했던 키르포노스군의 정치위원 바슈긴은 "오늘 저녁까지 두브노를 점령하면 귀관에게 훈장을 수여할 수여할 것이고,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귀관을 처형할 것이다." 라고 양자택일하라는 말로 한 군단장을 독려했다. 물론 그와 같은 무시무시한 위협은 군대의 사기를 꺾기도 했지만, 동시에 절망적인 상황에서 과감한 행동을 일으키게 하는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바슈긴 자신도 남에게 강요한 그런 요구를 기준으로 삼다가 죽었다. 그는 6월 30일, 기갑부대를 지휘해 가다가 잘못해서 늪으로 들어가 모든 탱크를 고스란히 잃었다. 자기가 처한 상황을 잘 아는 그는 당장 자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굳세게 싸우려는 소련인의 의지가 모두 공포 때문에 우러난 것은 아니었다. 군인도 빨치산(파르티잔)도 비전투원도 모두 조국 러시아에 대한 애국심이 강했다. 스탈린은 이 애국심의 힘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고 있었으며, 7월 3일 국민에 대한 연설에서 바로 이 애국심에 호소했다. "동무들이여, 시민들이여, 형제자매들이여, 육해군 전사들이여"라는 말로 그의 연설은 시작되었다. "벗들이여, 나는 당신들에게 호소하는 바입니다. 우리가 피땀으로 가꾼 우리의 대지를 빼앗으려 하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 손으로 일해서 얻은 곡식과 기름을 탈취하려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애국의 전쟁, 모국의 자유를 위한 전쟁"을 하고 있다고 그는 선언했다. 그는 러시아가 어떤 방법으로 나폴레옹을 패주시켰는가를 국민들에게 상기시키면서, 한 치의 땅덩어리도 독일군에게 내놓지 말고 반드시 적을 "초토화하라"고 촉구했다. "적에게 한 대의 자동차도, 한 대의 기차도, 한 톨의 곡식도, 한 방울의 기름도 남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그것을 가지고 나올 수 없다면 부수어버립시다. 모든 곳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합시다. 다리와 도로를 폭파합시다."

애국심에서든 공포심에서든 소련군의 용감성은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심지어 소련인을 멸시하던 히틀러마저도 소련인의 단호한 결의를 마지못해 인정했다. 발악적으로 싸우는 소련군에 관한 이야기는 독일구느 사이에서도 널리 유포되었다. 대전차 미사일을 맞아 불이 난 소련군 탱크 한 대가 맹렬히 사격을 계속하면서 독일군 진지로 돌진해 들어가 그 탱크병은 끝내 죽었다는 이야기라든가, 피격된 소련 전투기의 조종사가 낙하산으로 탈출하지 않고 독일군 트럭 대열 속에 비행기를 몰고 돌입했다는 이야기 등이었다. 러시아 여성과 아이들이 전방에서 싸우고 있다는 말도 퍼졌다. 독일군은 곧 소련군이 전쟁 규칙을 위반하면서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고,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소련군은 죽은 체하고 넘어져 있다가 그들 위를 지나가는 독일군을 쏜다든가, 항복의 백기를 들고 있다가 잡으로 온 독일병을 쏜다는 등 다양한 소문이 퍼졌다. 위장 항복 이야기를 귀담아 들은 많은 독일병은 항복하려는 소련군을 사정없이 쏘아 죽이기도 했다.

키예프 포위전[편집]

키예프 진격은 1941년 8월 25일에 막을 올렸다. 목적은 이미 점령한 키예프 서쪽 및 북쪽의 진지로부터 독일군이 뻗어나와, 키예프를 크게 우회하여 그 동쪽에서 결합함으로써 포위망을 만드는 것이었다. 독일의 북쪽 협공군은 중부 집단군으로부터 임시로 파견된 하인츠 구데리안 휘하의 제2기갑군으로서 폰 바이크스 대장 휘하의 제2군과 협동하여 남하했다. 남쪽 협공군은 발더 폰 라이헤나우 원수의 제6군과 카를 하인리히 폰 스퇼프나겔 대장의 제17군 그리고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대장의 제1기갑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46개 사단 약 36만명으로서 6개 기갑사단, 5개 차량화사단, 35개 보병사단이 투입되었다. 이에 맞서는 소련군은 5개 군 약 35개 사단이었다. 오랫동안 스탈린의 신임을 받아온 세묜 부됸니 원수가 남서전역( 戰域) 총사령관으로서 이 싸움의 총지휘를 맡았다. 선봉을 맡은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은 신속한 진격으로 포체프(키예프 북동쪽 약 340km)와 노브고로트(포체프 남쪽 약 100km), 세베르스키의 소련군 진지를 잇달아 탈취했다. 2주 동안 그들은 400km를 진격하여 키예프 동방 약 210km 지점인 롬니에 도착했다.

한편 남쪽에서는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제1기갑군을 이끌고 드네프르강을 건너서, 키예프 남동쪽 약 260km 지점인 크레멘추크(롬니 남쪽 약 180km)에 위치한 소련 제 38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북을 향해 밀고 나갔다. 소련군은 또 한번 독일군의 의도를 오판했다. 소련군은 독일이 모스크바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브리얀스크(모스크바 남서쪽 약 340km) 전선 사령관 A. I. 예레멘코 대장은 이렇게 생각했다. "적(독일군)은 강력한 기갑부대의 지원을 받은 선견부대를 이용해 위력정찰을 하고 있다." 심지어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예레멘코에 대해 "구데리안의 공격은 브리얀스크 전선의 우익을 겨냥한 것으로서 이는 바로 모스크바를 목표로 한 것이다."라는 경고까지 하였다. 9월 11일, 마침내 세묜 부됸니 원수는 독일군이 두 방면에서 자기를 향해 오고 있다는 알아차리고 스탈린에게 키예프 철수 허가를 신청했다. 스탈린은 분노하며 이를 각하(却下)했다. "일보의 후퇴도 허용할 수 없다. 저항할 수 없다면 죽어라." 스탈린은 이렇게 명했다. 스탈린은 부돈니 원수를 해임하고 대신 M. P. 키로포노스 대장을 새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그런 다음 그는 급히 다른 전선으로부터 28개 사단을 빼내어 키예프 전투에 투입했다. 3일 후인 9월 14일, 키로포노스의 참모장 M. P. 투피코프는 모스크바에 타전하기를, 괴멸적인 패배가 눈앞에 다가왔으며 이것을 이틀 이상 더 지연시킬 수 없다고 보고했다. 그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독일군 협공군은 벌써 서로 50km 지점까지 접근해 있었으며, 소련군 부대 중에는 혼란과 공황에 빠져서 탈출을 시도하는 자도 있었다. 독일군 정찰기는 소련군 탱크사단이 열려 있는 50km 정도의 틈을 통해 긴 3열 종대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구데리안과 클라이스트가 이 빈틈을 막아 버리기 위해 진격속도를 올렸다. 그로부터 2일 후인 9월 16일, 독일 협공군은 키예프 동방 약 200km 지점인 로흐비차에서 포위망을 닫았다. 드디어 독일군은 키예프를 둘러싸는 210km의 거대한 포위망을 완성한 것이다.

9월 17일, 소련군 방어부대는 모스크바로부터 퇴각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포위망 속에 갇힌 소련군은 격렬히 싸웠으나 헛수고일 뿐이었다. 9월 26일 전투가 최종적으로 끝났을 때 소련군의 손실은 엄청난 것이었다. 6개 군이 섬멸되고 전사, 부상, 포로 그리고 행방불명된 자까지 모두 100만 명에 달했다. 독일군은 665,000명을 포로로 잡았고 포 3,718문, 탱크 886대를 노획했다고 발표했다. 히틀러는 이제 환희에 도취되어 자기가 옳았다는 생각으로 자만심에 넘쳐 있었다. 그의 군대는 소련군 방어선에다 320km에 이르는 큰 구멍을 뜷어 놓았다. 우크라이나 전체와 코카서스 지방이 독일군 앞에 활짝 열려 있었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가 이끄는 남부 집단군은 코카서스를 겨냥하여 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10월 24일, 라이헤나우 원수 휘하 제6군은 소련의 탱크 생산지인 공업도시 하르코프를 점령했다. 5일 후에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제11군이 크리미아 반도에 돌입했다. 11월 중순까지 제11군은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전 크리미아 반도를 점령했다. 11월 20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군은 로스토프를 점령했다.


키예프 전투 이후 하인츠 구데리안모스크바로 진격하라는 새 명령을 받았다. "태풍 작전"이라 불린 이 작전은 10월 2일에 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히틀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신속한 완승을 기대했다.

스몰렌스크 포위[편집]

한편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은 민스크에서 200km 정도 떨어진 드네프르강을 도하(渡河)하여 스몰렌스크(민스크 동쪽 약 306km)로 진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를 1주일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더 지체하다가는 소련군의 드네프르강 수비가 보다 강화되어 공격하기가 어려워질 염려한 나머지, 독자적인 결단을 내려 휘하 기갑군에게 드네프르강 도하작전 준비를 명령했다. 그로부터 2일 후, 새로 명명된 제4기갑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구데리안과 호트를 지휘하게 된 귄터 폰 클루게 원수가 구데리안 사령부로 와서 작전중지 명령을 내렸다. 기갑군은 보병부대의 도착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작전 준비는 이미 중지할 수 없을 정도로 진척되어 버렸습니다."라고 구데리안은 클루게 원수에게 말했다. 그는 이미 탱크들이 출격지점에 집결해 있는데, 만약 빨리 이동을 하지 않으면 남아 있는 소련 공군기에 발견되어 공격당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클루게도 그 말을 듣자 마지못해 작전개시 승인을 내렸다. "귀관의 작전은 언제나 위태로운 줄타기로군"하고 클루게는 구데리안에게 핀잔을 주었다.

스몰렌스크 포위 작전은 2중 포위작전이었다. 헤르만 호트 휘하 기갑군이 비테프스크(스몰렌스크 북서쪽 약 123km)를 지나 스몰렌스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 지역의 소련군은 2주 전 민스크 포위에서 입은 타격으로부터 아직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대숙청 때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보병군단장으로 복귀한 고르바토프는 비테프스크 방어임무를 맡은 휘하 부대의 사기가 말이 아닌 것을 보고는 탄식이 나왔다. 독일군이 포문을 열기가 무섭게 그의 선봉 연대원 1,500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도망쳤다. 고르바토프는 몸소 뛰어다니면서 그들을 끌어 모은 다음 참호를 파서 지키도록 명했다. 그러나 수 시간 후에 그 자리에 다시 와 보니 연대원들이 몽땅 떠난 후였다. 그들이 풀을 마구 짓밟고 도망친 바람에 생긴 넓은 길을 따라 간 그는 웅성거리고 있는 연대원들을 발견했다. "나는 그들에게 창피하지도 않느냐고 소리쳤다. 그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명하고, 그들이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 다시 다른 무리들을 잡으로 갔다. 새로 군에 복귀한 나로서는 악몽 같은 과경이었다." 7월 16일, 헤르만 호트 휘하의 기갑부대가 스몰렌스크 포위망의 고리를 닫았다. 소련 2개 군과 민스크 포위망으로부터 탈출한 수많은 낙오부대들이 이 포위망 속에 같혔다. 세묜 티모셴코는 포위망 동쪽과 서쪽으로 맹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8월 초에는 독일 보병부대까지 도착하여 포위전을 마무리지었다. 이 스몰렌스크 포위망에서 독일군은 포로 10만, 탱크 200대, 포 1,900문을 노획하였다.

개전 이래 2개월 동안 소련군은 준비 부족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거의 100만 명이 포로로 잡히고, 사상자가 70만명이나 되었다. 독일군은 소련 국내로 800km나 들어왔다. 발트해 지역에서는 독일군이 레닌그라드로부터 불과 150km 떨어진 루가 일대에 구축된 방어선을 압박하고 있었다. 남쪽에서는 독일군이 곡창 우크라이나의 절반을 장악했다. 그리고 중앙부에서는 독일군이 모스크바로부터 320km쯤 떨어진 곳까지 진출했는데, 그들 앞에는 콘크리트로 포장된 하이웨이가 뻗어 있었다. 독일군의 다음 목표를 모스크바로 확신한 소련군은 전국에 걸쳐 급히 신병을 모집하고, 이들을 독일군이 곧 진격해 올 것으로 예상되는 스몰렌스크-모스크바 간 도로에 투입했다. 대부분의 독일군 장군들은 확실히 소련의 예상대로 행동하기를 원했다. 구데리안은 부하들이 "모스크바로!"라고 페인트로 쓴 도로표지 수십개를 바라보며 흐뭇해 했다. 하인츠 구데리안 역시 프란츠 할더헤르만 호트, 그리고 기타 다른 독일군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당장 진격만 하면 전면적인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7월 하순에 보병부대의 모스크바 진격을 허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호트에게는 탱크를 북쪽으로 전출(轉出)시켜 레닌그라드 전투를 지원하도록 명했고, 구데리안에게는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나가도록 명했다. 구데리안은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기록했다. "이 명령은 우리 기갑군을 남서방면으로 보내라는 것으로서, 독일로 가라는 것과 같다." 프란츠 할더는 히틀러가 명령을 철회하도록 설득했으나 히틀러는 듣지 않았다. 히틀러의 관심은 오로지 레닌그라드에 집중되어 있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편집]

이로 인해 모스크바에 대한 공격은 늦어지게 되었다. 독일군이 뒤늦게 모스크바로 진출하고자 했을 때는 가을비에 의해 땅이 진흙탕이 되었고, 뒤이어 겨울의 한기로 인해 진군이 정지되었다. 소련군이 보유하고 있던 KV-1 중(重)전차와 T-34 중(中)전차는 독일의 당시 전차보다도 우수했기 때문에, 전차전술에서 자타가 공인하던 독일군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 대책으로 독일군은 급히 신형전차(티거1 급의 전차)의 배치와 기존전차의 개량을 추진하게 되었다.

발트해지역과 레닌그라드 점령이 목표였던 북부집단군은 1941년 8월까지 레닌그라드 남부 주변까지 진군했으나, 맹렬한 소련군의 저항에 저지당했다. 독일군은 기갑부대가 레닌그라드에서 시가전에 휘말리는 것을 두려워해 제 4기갑집단을 모스크바공격을 위해 중부집단군으로 전속시켜 레닌그라드에는 포위와 봉쇄에 의한 보급단절을 결정했다. 그러나 1944년 전반 소련군이 레닌그라드를 독일군의 포위에서 해방시킬 때까지 레닌그라드는 점령되지 않았다. 레닌그라드는 영웅도시의 칭호를 받은 최초의 소련 도시가 되었다.

키예프 공략 후,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이 지휘하는 제2기갑군[4] 은 중부집단군에 복귀해, 최후 최대의 목표였던 모스크바 공략을 위한 태풍 작전이 개시되었다. 뱌지마, 브랸스크의 2중포위전에서 소련군은 다시 50만 병력을 잃었다. 그러나 이후 가을의 장대비가 찾아오면서 도로면이 진흙탕이 되면서 독일군의 전진은 정지되고 그 사이 소련군은 모스크바 정면에 방위체제를 재구축했다. 찬 기운의 도래와 함께 땅이 얼자 다시 독일군은 전진을 재개했지만 추위가 심해지면서 독일군의 전진속도가 떨어지고, 시베리아 방면에서 도착한 정예부대의 증원을 받은 소련군의 저항도 있어 12월 초순에 이르러 정지되었다. 만족스런 동계전용 장비도 없고, 보급도 충분하지 못해 각 전선에서 정지한 독일군에 대해 소련군의 동계반격이 개시되었고, 그 반격의 대부분은 모스크바에 접근한 중앙집단군에 집중되었다. 모스크바는 이후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았다.

초기 소련의 패배원인과 소련군의 문제[편집]

소련군의 개전초기의 대패의 원인은 단순하다. 소련군의 전력 대부분이 독소국경에 집결하였던 것이다. 국토는 조금이라도 넘겨주지 않는다라는 경직된 사고때문에 전투 개시 수시간만에 거의 대부분이 격파되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독일이 만들어낸 전격전에 대해 유효한 방어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전격전에 대해 역효과라고 생각되는 전술때문에 막대한 인원과 자원을 소모했다. 1941년 6월 22일 소련군이 당면하고 있던 준비부족은 방어거점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든가, 동력이 없어서 포를 움직이지 못했다든가 하는 피상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병력 약 500만을 보유하는 세계 최대 육군이기는 했으나, 장비의 빈약과 비능률에 휩싸인 군대였다. 또 주로 스탈린의 손에 의해 지난 20년간 격변에 시달린 끝에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는 전력약화, 사기저하, 최고 지휘관의 해임 등 여러 가지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당한 인구 및 생산설비, 농지 등을 잃은 후에도 소련이 독일을 격파한 사실은 소련이 결코 약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때까지 나치 독일이 싸운 군대와 비교하여 소련군은 '끈질김'에 있어서 전혀 다른 군대였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전멸할 때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은 소련군에 의해 전격전의 효력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리고 후반의 랜드리스의 공헌까지 탄력을 받은 소련은 나치 독일을 분쇄하기에 이른다.

근년에 이르러 '스탈린이 독일을 자극해 선제공격을 하게 만들었다.'라는 설이 러시아의 역사가들에게서 나와 논쟁이 되었다. 이 설에 의하면 소련군의 독일-소련 국경배치도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허나 초반 소련 주력의 대부분이 기습에 의해 궤멸되었다는 점과 독소전 사망자가 2천5백만명이 넘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신빙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결과[편집]

단기결전이 가능한 목표로 보고 시작한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수도 모스크바 공략을 통해 소련을 굴복시키려 했던 태풍작전은 그동안의 모스크바 방면의 방위강화로 인해 실패하게 되었다. 소련군에 의한 동계반격에 의해 독일군 모든 전선에서 공황적인 패주, 붕괴가 일어났으나 히틀러의 사수명령과 각 부대의 분전에 의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단기결전을 예상하고 전투를 벌였던 독일군은 러시아의 주요 도시는 점령하지 못했고 예상하지 못한 소모전을 벌여야 했다. 또한 히틀러의 퇴각 불가명령에 따르지 않은 장군의 대량경질은 국방군내에 커다란 불평을 일으켰다.

바르바로사 작전 실패의 최대 이유는 러시아의 땅이 생각보다 광대하여 독일군의 보급이 이를 쫓아가지 못하고, 소련의 전쟁수행능력이 독일측의 예상보다 높았던 것이다. 또한 독일에 적대한 여타 군대와는 달리, 소련군은 전선이 내륙부까지 진행되었는데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최초의 일격에 소련군 전체가 붕괴되었다고 보았던 히틀러의 생각은 너무나 낙관적이었다. 러시아는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남부의 자원지대 등으로 전략적 목표가 분산되어 있어 독일군은 어느 한곳에 중점을 두지 않고 모든 곳에 대해 병력을 3개로 나눴다. 이것은 병력의 분산을 초래했고, 모든 주요목표의 공략에 실패로 끝나는 동시에 보급의 곤란을 불렀다. 또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에 있던 반 나치정권의 전복에 간섭하고, 무솔리니가 독단적으로 침공한 그리스 침공작전이 대실패로 끝나 그리스군에게 역습을 당한 것이 있다. 그것에 기갑부대의 투입을 승인하는 것으로 인해, '실제 작전 개시 시점' 인 5월 15일에서 1개월 이상 연기된 것과, 같은해 겨울이 다른해에 비해 매우 빨리 찾아온 것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 해(1942년), 독일군은 다시 크게 승리했고 소련의 주요 유전이 집중된 코카서스 지방의 제압을 목표로 한 청색 작전을 발동하였다. 더군다나 케르치 해협을 낀 카프카스지방에 인접한 크리미아 반도의 제압이 난항을 거듭하고 세바스토폴 전투가 청색 작전 발동 전후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독소 전쟁의 흐름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참고 문헌[편집]

  • '라이프 2차 세계대전', <독·소의 격전>
  • Beevor, Anthony (2004). 안종석 옮김, 편집.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서해문집. ISBN 978-89-7483-211-7.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각주[편집]

  1. AA선;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2.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3. 기묘하게도 이날은 나폴레옹러시아를 침공한 날과 같은 날이기도 했다.
  4. 기갑집단에서 개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