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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사막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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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사막 전역
북아프리카 전역의 일부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때 엘 알라메인에서 진격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제9보병사단 병사.
날짜1940년 6월 11일 ~ 1943년 2월 4일
장소
결과 연합국 승리
교전국
지휘관

서부 사막 전역 (Western Desert campaign) 또는 사막 전쟁은 이집트 서부와 리비아 전체에서 일어난 2차 대전의 북아프리카 전역의 일부이다. 영국군이 크레타 전투, 그리스 공방전에서 독일군에서 패퇴한 후, 서부 사막 전역은 영국군에게 독일군을 공격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었고 전쟁 효과에서도 중추적인 지역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쟁인 동부 전선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이 전역에서 큰 중요성을 발견하지 못했다. 1940년 이탈리아 군단의 이집트 침공으로 서부 사막 전역은 시작된다. 이탈리아 군단은 리비아에서 이집트를 방어하는 영국군과 충돌했는데, 이탈리아 군단은 보급품 문제로 영국군에 의해 반격당함으로써 이집트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무렵 영국군은 몰타와 알렉산드리아 공항에서 이탈리아를 공습했고, 베니토 무솔리니아돌프 히틀러에게 독일군 기갑사단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에르빈 롬멜이 북아프리카에 파견되었고, 1942년까지 영국군은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에 의해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지속한다. 영국군은 이집트 국경까지 밀려났으나, 버나드 몽고메리의 등장으로 전세는 역전된다. 독일군은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격파당하고, 리비아를 빼앗긴 후 튀니지까지 밀리게 된다.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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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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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군의 L3/33

키레나이카는 이탈리아-투르크 전쟁 이후 이탈리아 왕국의 식민지였다.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의 일부인 튀니지와 서쪽으로 맞닿고 있었으며 동쪽으로는 영국령 이집트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탓에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탈리아군은 북아프리카 최고 사령부를 통해 동서 양 국경을 지키고자 했다. 당시 북아프리카 최고 사령부는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총독이자 공군 장군이었던 이탈로 발보의 지휘 하에 있었다. 최고 사령부는 이탈로 가리볼디가 이끄는 이탈리아 제5군마리오 베르티가 이끄는 이탈리아 제10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1940년대 중반에 이들 군단은 13,000명 정도의 본국 사단 9개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 중 3개는 블랙셔츠 사단이었고, 2개는 이탈리아령 리비아 식민지 사단이었다.[1]

이탈리아 육군 사단은 1930년대 말기에 3개의 여단 각각이 2개의 여단으로 조직되었다. 예비군이 1939년 다시 창설되었으며 이를 통해 징집병의 일반적인 소집이 가능해졌다. 이탈리아 육군은 군사 작전을 최근에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1936년 에티오피아 제국 합병이 바로 그것이다. 이탈리아 해군은 빠르고 잘 건조된, 그리고 잘 무장된 함대 및 잠수함 함대를 출범했는데, 이 함대들의 문제점은 경험과 훈련이 부족했다. 이탈리아 왕립 공군은 1936년부터 전쟁을 준비했으나 1939년까지 발전이 침체되었고 영국군의 공군만큼 작전에서 오랫동안 참여하지 않았다. 8개의 사단을 보유한 이탈리아 제8군은 트리폴리타니아에 기지를 두었다. 한편 6개의 사단을 보유한 제10군은 리비아 동부인 키레나이카를 방어하며 전쟁이 선언되면 제1리비아 사단이 자라버브부터 시디 오마르까지의 국경선을 지키고, 제21군단이 시디 오마르에서 바르디아와 토브룩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제22군단은 토브룩 남서쪽으로 이동해 반격 병력으로 이용될 예정이었다.[2]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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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1882년부터 이집트에 군대를 주둔시켜 왔으나,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의 조건에 따라 그 규모가 크게 축소되었다. 소규모 영국군 및 영연방군은 수에즈 운하와 홍해 항로를 수비했다. 이 운하는 영국의 극동 및 인도양 영토와의 통신에 필수적이었다. 1939년 중반, 아치볼드 웨이벌 중장이 지중해, 중동 및 아프리카 전구를 총괄하는 신설 중동 사령부의 사령관(GOC-in-C)으로 임명되었다. 프랑스-추축국 휴전 이전까지, 튀니지의 프랑스군 사단들은 서부 리비아 국경에서 이탈리아 제5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리비아에는 이탈리아 왕립 육군이 약 215,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집트에는 영국군 약 36,000명과 팔레스타인에서 훈련 중인 27,500명의 병력이 있었다.[3]

영국군에는 퍼시 호바트 소장 휘하의 기동사단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영국에 단 두 개뿐인 기갑 훈련 부대 중 하나였다. 1939년 중반에 기갑사단 으로 개칭되었으며, 1940년 2월 16일에는 제7기갑사단이 되었다. 이집트-리비아 국경은 이집트 국경수비대가 방어하고 있었으며, 1940년 6월 리처드 오코너 소장 휘하의 제6보병사단 사령부가 서부 사막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이들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국경 초소에서 이탈리아군을 몰아내고 배후지를 장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제7기갑사단은 제7기갑여단을 제외하고 메르사마트루에 집결했으며, 엄호 부대로서 제7지원단을 국경 쪽으로 전진시켰고, 영국 공군 역시 대부분의 폭격기를 전진 배치했다. 몰타에 주둔한 부대 역시 증원 부대를 배치했다.[4]

완전하고 충분히 훈련된 부대가 부족했던 제6보병사단 사령부는 6월 17일 서부 사막군으로 개칭되었다. 튀니지의 프랑스군은 제한적인 작전만을 수행할 수 있는 8개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시리아에는 민간인 통제 임무를 수행하는 40,000명 규모의 훈련 부족 및 무장 열세 상태인 3개 사단과 국경수비대가 있었다. 리비아의 이탈리아 육군과 공군은 이집트의 영국군보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으나, 사기가 영국군보다 저하되었고 장비가 영국군의 것보다 열등했다.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에는 130,000명의 이탈리아군 및 아프리카 병력이 400문의 대포, 200대의 경전차, 20,000대의 트럭을 보유하고 있었다.[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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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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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layfair, 1954 pp. 38–39, 92
  2. Playfair, 1954 pp. 38–39, 92
  3. Playfair 2004d, 19, 93쪽.
  4. Playfair 2004d, 32, 93, 97–98, 375쪽.
  5. Playfair 2004d, 32, 93, 97, 100, 3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