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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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
(태평양 전쟁의 일부)
전투를 치르는 미군들
전투를 치르는 미군들
날짜 1945년 4월 1일 ~ 6월 23일
장소 일본 오키나와
결과 미군의 승리, 일본의 패망 촉진
교전국
미국 미국
영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뉴질랜드
캐나다 캐나다
일본 제국 일본제국
지휘관
미국 사이먼 B. 버크너
미국 로이 가이거
미국 조지프 스틸웰
미국 체스터 W. 니미츠
미국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영국 브루스 프레이저
일본 제국 우시지마 미쓰루
일본 제국 조 이사무
일본 제국 야하라 히로미치
일본 제국 이토 세이이치
일본 제국 오타 미노루
일본 제국 고무라 게이조
병력
전투 부대
미국 미국 5 함대
58 임무대
57 임무대
51 임무대
54 임무대
52 임무대
수송선 158척 및 LST 184척, LSM 89척
전함 18척
항공모함 40척
구축함 200척
함선 1300척
상륙 부대
미국 10 군
24 군단
3 상륙 군단
예비대
77 보병 사단
총병력 18만 3000명
일본 제국 32군
24 사단
62 사단
44 독립 혼성 여
27 전차 연대
육군 6만 7000명
해군 9000명
오키나와 주민 방위대 2만 명
총병력 12만 명
피해 규모
일본측 추산
미국 전사 4만 7000명
미군측 추산
전사 1만 1933명
미군측 추산
일본 제국 전사 6만 5000명
일본측 추산
전사 10만 2000명, 주민 12만 명 사망


오키나와 전투(일본어: 沖縄 (おきなわ) (たたか)い, 영어: Battle of Okinawa) 또는 코드네임 아이스버그 작전(영어: Operation Iceberg)는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이던 1945년 4월 1일부터 6월 23일까지 83일에 걸쳐 치른 전투로 이오지마 전투에 이어 최초로 일본 영토 내에서 벌어진 미군과 일본군의 전면전으로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은 최초로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커다란 피해를 냈으며, 일본 측은 사령관, 군인 뿐만 아니라 그곳 주민들까지 전원 옥쇄해 가족끼리 서로를 죽이거나 수류탄으로 자결하는 등의 비극이 일어났다.

배경[편집]

미군은 이오지마 점령 후에 일본 영토 내로 쳐들어가기 위해 미군 탈환 지역에서 가장 가깝고 일본 규슈 지역을 폭격할 수 있는 오키나와 섬을 골랐는데 미군은 사이먼 B. 버크너 중장의 지휘 아래에 18만 3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상륙 준비를 했다.

그리고 상륙 지역에 일본군을 공격해 많은 피해가 나지 않도록 상륙 전 한 달 동안 3만 발에 달하는 포탄을 상륙 지역에 쏟아부었다.

일본군은 이에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과 조 이사무 소장 등을 보내 방어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전투 과정[편집]

미군은 상륙 당일인 1945년 4월 1일 오전에 주력 4개 사단이 오키나와 가데나 만으로 순조롭게 상륙하였다. 미군은 일본군의 아무 저항 없이 광대한 오키나와 북부 지역을 장악했고 상륙 며칠 동안은 일본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군들은 주로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4월 5일부터는 미군이 방심을 한 사이에 일본군의 사령부 슈리 성에서 무수한 동굴 진지가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수류탄과 화염발사기로 동굴 진지를 하나 하나 제거했고 제거하는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4월 7일에는 이토 세이이치 함장이 이끄는 7척의 남은 연합 함대와 그 당시 가장 큰 전함 야마토오키나와 보우노사키 해협에서 미군 전투기들과 급강하폭격기로 격침 당했다. 일본군은 미군이 방어선을 뚫을때가지 싸우고, 뚫으면 다음 방어선 으로 후퇴를 했다. 즉 미군은 하나씩 점령을 해야 했다. 미국은 남쪽을 점령하기가 너무 어려워지자 섬의 남쪽에도 상륙을 했다.

미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 처참한 전투 끝에 5월 29일 미군이 슈리 성을 함락시켰고 5월 31일에 일본군은 전력의 85%를 잃었다.

일본군 사령부는 섬 남쪽 지역의 마부니 고지 동굴로 퇴각했고, 옥쇄 준비를 했다. 6월 11일오로쿠 지구에서는 일본 해군 사령관 오타 미노루와 군대 전원이 옥쇄했고 6월 15일에 일본군의 남은 병력 6천 명이 미군의 화력에 견디지 못하고 붕괴했다.

6월 18일 지휘관이던 사이먼 B. 버크너 중장이 일본군의 포격으로 급작스럽게 전사하지만 전세는 되돌려지지 않았다. 6월 19일에는 일본군 사령부 참모까지 전사했으며,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과 조 이사무 소장이 6월 23일 오후 4시 30분에 할복 자살함으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

가미카제 특공대에 의해 공격당한 USS 벙커힐(CV-17)

결과 및 영향[편집]

이 전투에서 일본 제국군은 군인, 사령관뿐만 아니라 그곳 주민들에게도 할복 자결을 명해 수많은 주민들이 수류탄으로 자결하거나 가족끼리 서로 목졸라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고 주민 사망자는 대략 12만 명으로 추산된다.

미군은 많은 피해를 내면서도 오키나와를 점령하면서 가까운 규슈 지역 등을 폭격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의 패망을 앞당겼다.

출처[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