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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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의 분할:
1. 수데텐란트가 독일에 병합됨 (1938년 10월)
2. 체코 톄신이 폴란드에 병합됨 (1938년 10월 2일).
3. 헝가리 민족이 거주하는 국경 지역을 헝가리에 병합 (1938년 11월 2일)
4. 카르파티아 산맥의 루테니아인 거주 지역이 헝가리로 흡수됨 (1939년 3월).
5. 1939년 3월 체코의 나머지 영토는 독일의 보호국이 되어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국이 됨
6. 슬로바키아는 독립국으로 존속.

뮌헨 협정 (영어: Munich Agreement ,체코어: Mnichovská dohoda, 슬로바키아어: Mníchovská dohoda, 독일어: Münchner Abkommen, 프랑스어: Accords de Munich)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계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던 수데텐란트 영토 분쟁에 관련된 협정이다. 이 협정은 독일 뮌헨에서 논의되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참석하지 않은채 유럽 열강들만 참석한 채로 체결됐다. 이 회담은 나치 독일에 대한 유화책이었다. 이 협정에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독일이 수데텐란트를 합병하도록 승인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이 회담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는 뮌헨 협정을 뮌헨 늑약(체코어: Mnichovská zrada; 슬로바키아어: Mníchovská zrada)이라고도 불리며 프랑스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동맹이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뮌헨의 배신(체코어: Mnichovská zrada; 슬로바키아어: Mníchovská zrada)이라고도 불린다.

히틀러의 요구[편집]

1938년 3월, 나치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다음은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인 수데텐란트를 합병할 것이라고 예측되었다. 나치 독일의 정치인 콘라트 헨라인이 이끄는 친독일계 정당인 수데텐란트 독일당이 독일인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서 자치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소수 민족인 독일인은 고국 독일에 통합되어야 한다고 선동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히틀러 정권 동안 프랑스 정부에 정치적, 군사적 도움을 요청하여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정부는 전쟁에 대해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프랑스 정부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위기를 해결하려 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비에트 연방이오시프 스탈린과도 체코슬로바키아의 방어를 위해 영국, 프랑스와 협력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었다.

히틀러의 전쟁 계획과 뮌헨 조약[편집]

히틀러는 뮌헨 협정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갖고 있었다. 그는 전쟁을 이끌 수 없었다. 한편 히틀러는 전쟁을 원하지 않던 대중과 언론 사이에 "평화의 수호자"라고 칭송받았다.[1]

뉘른베르크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며칠 전에 히틀러는 다음 말을 했다:

"폴란드와의 전쟁이 곧 혹은 나중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중략) 저는 마지막 순간에 돼지같은 중재안이 나올 까봐 두렵습니다."[2]

1938년 9월, 히틀러는 전쟁을 원하고 있었다. 1945년 2월 마르틴 보어만은 그때 전쟁을 시작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군사적 관점에서, 우리는 1년 일찍 전쟁을 시작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뮌헨에서 우리의 주장을 수용했기 때문입니다."[3]

뮌헨의 위기[편집]

유럽 열강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열강은 독일의 군사 능력을 심각한 수준이라고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군이 독일 국방군 (Wehrmacht)보다 우세했지만 대규모의 재무장을 하고 있는 독일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히틀러는 독일군의 힘을 과장하여 유럽 열강과 전쟁을 했을 때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쟁을 피하자고 설득하였다. 무솔리니와 이탈리아는 전쟁에 대비되지 않았고, 독일의 급성장에 대해 우려하였다. 독일 군부도 독일군의 실상을 알고 있었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이용했다.

영국의 총리인 네빌 체임벌린은 9월 15일에서 16일에 베르히테스가덴에서 히틀러를 만나 히틀러의 양보를 요구했다. 히틀러가 추가적 논의 없이는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기로 하는 한편, 영국은 내각과 프랑스에 수데텐란트 주민들의 주민투표 결과를 인정하도록 설득하기로 했다. 9월 22일 프랑스의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와 외무장관 조르주 보네(Georges Bonnet)는 런던에서 영국 외교관과 만나 수데텐란트의 인구 50% 이상을 독일에 보내는 것을 수용하기로 하는 합동 성명을 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제안을 거부했지만 9월 21일 마지못해 수용하기로 했다. 이 제안은 히틀러의 성에 차지 않았고, 9월 22일 고데스베르크(Godesberg)에서 히틀러를 만났을 때 히틀러는 수데텐란트는 독일에 합병되어야 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9월 28일까지 수데텐란트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에 새로운 제안을 했고, 영국 내각과 프랑스, 체코 정부에서 거부되었다.

9월 23일, 새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얀 시로비는 총동원령을 내렸고[4], 1백만 명 이상의 완전무장된 군사가 독일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9월 24일, 프랑스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부분적 동원령을 내렸다. 전쟁을 피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체임벌린은 4강 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전쟁을 피하려는 체임벌린의 생각에 따라 히틀러, 체임벌린, 달라디에와 무솔리니는 뮌헨에서 회담을 가졌다.

문제의 해결[편집]

협상은 9월 29일에 접점에 다다랐다.[5] 아돌프 히틀러와 네빌 체임벌린, 베니토 무솔리니와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뮌헨 협정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은 고데스베르크에서의 제안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독일군은 10월 10일까지 수데텐란트의 점령을 완료할 예정이었다. 국제 기구는 다른 분쟁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주석[편집]

  1. (독일어) Das Münchner Abkommen
  2. (독일어) Ansprache Adolf Hitlers vor den Oberbefehlshabern auf dem Obersalzberg
  3. Sebastian Haffner: Anmerkungen zu Hitler. 26. Auflage, Fischer Taschenbuch Verlag, Frankfurt am Main 2006 [zuerst München 1978], S. 51.
  4. Records of the Nuremberg trials
  5. Gilbert, Martin and Gott, Richard, The Appeasers (Weidenfeld Goldbacks, Weidenfeld and Nicholson, London, 1967), p. 178.

함께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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