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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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金正日
Kim Jong il Portrait.jpg
Kim Jong-il Signature.svg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제2대 최고지도자
임기 1994년 7월 8일 ~ 2011년 12월 17일
전임: 김일성(제1대)
후임: 김정은(제3대)

신상정보
출생일 1941년 2월 16일(1941-02-16)
출생지 소련의 기 소련 프리모르스키 지방 하바롭스크 (추정)
사망일 2011년 12월 17일 (70세)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거주지 2011년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본관 전주
학력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
정당 조선노동당
부모 아버지 김일성, 어머니 김정숙
배우자 성혜림(사별), 김영숙(재혼), 고용희(재혼), 김옥(재혼)
자녀 아들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딸 김설송, 김춘송, 김여정
종교 무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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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생애 1941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 (70세)
출생지 소련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하바롭스크 뱌츠코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백두산에서 태어났다고 주장)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별명 소련식 이름은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러시아어: 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
배우자 성혜림, 김영숙, 고용희, 김옥
친척 남동생 김남일, 여동생 김경희, 이복 남동생 김평일, 김영일, 김현, 이복 여동생 김경숙, 김경진, 김백연
복무 조선인민군
복무 기간 1991년 12월 24일 ~ 2011년 12월 17일
최종 계급 원수
대원수(사후 추서)
근무 조선인민군
지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원수

김정일[1](金正日, 1941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이다. 본관은 전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이었으며 김일성김정숙 사이의 첫째 아들이다.

2011년 12월 17일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그는[2] 어린 시절 한국 전쟁 당시 평양을 떠나 간도 지역으로 은신하였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귀환했다.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61년 7월 22일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이후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비서 등에 임명되었다. 1970년대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주목되었으며 1980년 제6차 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1994년 김일성 국가 주석의 사망 이후에 권력을 세습해 공화국의 실권을 잡아 통치자가 되었고[3]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1993년부터 6년 동안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재정낭비 등으로 무능력한 지도자로 비판받았다. 김정일의 후계 자리는 그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승계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줄여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로 불렸다. 2012년 4월 11일 조선로동당 당대표자회의에서 조선로동당의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되었으며 2012년 4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5차 회의에서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생애[편집]

출생과 가정 배경[편집]

김정일은 1941년(주체 30년) 2월 16일 김일성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1942년 2월 16일 량강도 삼지연군백두산 밀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고 하나, 생년과 출생지 모두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북한에서 출생년도를 1942년으로 조작한 것은 김일성의 출생년도 1912년과 30년 주기로 맞추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4]

김일성이 하마탄(라즈돌노예)의 남야영 시절인 1941년 3월 1일 아내 김정숙과 함께 찍은 사진.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에 김일성 자필로 1941년 3월 1일 B야영에서 봄을 맞아 찍었다고 적어 놓았다.[5] 김정일 출산 직후의 사진으로 보이며, 당시 김일성부부가 남야영에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흔히들 김정일이 소비에트 연방(현재의 러시아) 하바롭스크 인근 뱌츠코예에서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러시아어: 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 Yuri Irsenovich Kim)이라는 이름으로 출생했다고 하지만 이도 정확하지 않다. 김일성 일가가 뱌츠코예에 88여단이 창설되면서 거기로 이주한 것은 1942년 7월 중순이므로, 뱌츠코예는 김정일의 출생지가 아니라 유년기를 보낸 곳이다. 또 소련군 시절 김일성의 이름은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 아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이었으며, 소련군 문서에는 해방 후 평양에 온 뒤인 1945년 10월 2일부터 김일성(Ким Ир Сен)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6] 따라서 김정일의 소련식 이름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도 평양에 온 이후에나 가능하고, 소련에 있을 당시 이름은 유리 지체노비치 진(Юрий Жичэнович Цзин, Yuri Zhichenovich Jing)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정일의 정확한 출생지를 두고는 논란이 많으나 명백히 밝혀진다. 만주서 일본군의 토벌에 쫓기던 김일성은 김정숙과 함께 부하 몇명을 데리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국경을 불법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한다[7]. 소련으로 망명해온 항일연군들은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 B캠프)과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A캠프) 두 곳에 분산 수용되는데 김일성은 남야영에 들어간다. 김정일은 거기서 1941년 2월 16일 태어났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8] 김정일이 태어난 집은 라즈돌노예 마을길 (Lazo St.) 88번지(2층 빨간벽돌집)로 기차역 부근이며, 지금도 남아있어 연해주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로 되어 있다.

아버지 김일성, 어머니 김정숙과 함께

라즈돌노예 기차역은 스탈린이 1937년 연해주 한인들 17만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실어나르던 출발지로, 고려인들의 한이 맺힌 곳이다. 김일성 가족이 88여단이 창설되면서 뱌츠코예 마을로 이주한 것은 1942년 7월이다.[9]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백두산 근처 밀영(백두산 밀영)에서 1942년 2월 16일 태어난 것으로 선전하고 있으며, 이 밀영은 성역화되어 있다. 하지만 김정일이 그런 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거니와, 김일성이 빨치산 활동 당시 백두산 속에 밀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 그가 한동안 백두산 인근 만주의 창바이 현(長白縣), 푸쑹 현(撫松縣), 안투 현(安圖縣) 등지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식량과 물자 조달이 어렵고, 겨울이면 외부와 단절되어 고립되는 백두산 깊숙한 곳에 밀영을 만들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그런 곳에서 한겨울에 김정일을 낳았을 가능성은 더욱더 없다. 해방 후 김일성을 항일 영웅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이미지를 덧붙이기 위해 지어낸 말이며, 백두혈통이니 하는 말도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다. 레오니드 바신(1915~2006)도 후일 해방 직후 소련 군정 당시 일을 회상하며 김일성이 가짜라는 소문이 퍼지자 "우리는 그가 진짜이고 백두산의 호랑이가 맞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라고 증언하였다.[10] 이를 보아도 백두산의 이미지는 억지로 끌어다 붙여 조작한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러시아어 이름 유리의 애칭인 '유라'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945년 8·15광복 이후 부모를 따라 북한으로 들어온 후로도 한동안 '김유라'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 이후 러시아식 이름을 버리고 김정일(金正一)이라 하였고,[11] 1980년에는 한자 이름을 正日로 개명하였다. 북한 쪽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고 처음부터 김정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정일(正日)이라는 이름은 어머니 김정숙(金正淑)의 '정'(正)과 아버지 김일성(金日成)의 '일'(日)을 합친 이름이다. 조부 김형직이나 조모 강반석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사망했으나, 증조부 김보현과 증조모 이보익은 그가 10대일 때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광복으로 귀국한 후, 김정일은 북한에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12][13] 이후 김정일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자랐다

유년기[편집]

유년기의 어느 날(1947년)

김정일은 1948년 평양 시내의 남산소학교 인민반에 입학했다. 남산소학교 인민반 졸업후 한국 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 후 삼석인민학교로 진학했다.[14]

어머니 김정숙, 여동생 김경희 등과 함께 강원도 화진포에서 (1948년 8월 7일)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어머니 김정숙, 가운뎃 줄 첫 번째가 김정일, 세 번째가 여동생 김경희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던 그는 권좌에 오른 뒤 어머니 김정숙에게 ‘항일의 여성혁명가 백두 여장군’이라는 칭호를 붙이며 영웅화하였고, 북한 여성이 따라야 할 귀감으로 미화시켰다. 김정숙의 출생지인 함경북도 회령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으며, 81년에는 량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지역명을 바꾸기도 했다.[12] 그가 어머니의 우상화에 공을 들인 것은 계모인 김성애와의 권력투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12] 아버지 김일성은 재혼한 김성애와의 사이에 김평일(폴란드 주재 대사)·김영일(사망)·김경진(오스트리아 주재 북한 대사 부인) 등 세 자녀를 뒀는데, 김정일은 후계자 지명 과정에서 이들 및 이들의 후견인격으로 있던 삼촌 김영주와 권력투쟁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12]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김정일은 1950년 9월부터 1960년 8월 사이에 일반 교육 코스를 끝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6·25전쟁 후에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하고[14] 1953년 2월 10일 학급 소년단원들과 함께 <김일성장군님의 략전연구소조>를 조직하였다.[15] 남한 정보에 의하면 1954년 평양 남산고급중학교에 입학하여 1960년 졸업한 것으로 되어 있다.[14] 성적은 썩 우수한 편은 아니었으나 상위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망과 계모와의 관계 등으로 음울한 유년기를 보냈다. 체육이나 활동적인 것보다는 주로 독서와 시, 작문 등에 심취하였다.

청소년기[편집]

김정일은 1954년 9월 평양제1중학교에 입학하여 1957년 8월 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15] 1956년 5월에는 제1차5개년계획의 전망에 대한 사대주의, 교조주의에 물젖은 어느 노동당 간부를 강연에서 논박하기도 했다 한다.[15] 1955년 4월 만경대와 칠골혁명사적지 참관을 조직하고 1956년 6월 5-14일에는 평양제1중학교 혁명전적지들에 대한 답사행군을 하였다. 그 뒤 1957년 9월 1일부터 평양제1중학교 고급반에 진학하여 [15] 1960년 평양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했다[16]. 남산고급중학교 재학 중에 이 학교의 교사로 재직함과 동시에, 교내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14] 1958년 6월 27일에는 종파주의자를 뿌리뽑자는 취지의 학교민청총회를 소집하기도 하였다.[15] 이 시절의 김정일은 감수성이 풍부했고 감정적이었다고 한다.

고급반을 졸업한 1960년 9월부터는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고, 1964년 4월에 졸업하였다. 젊은 시절에 그의 관심거리는 음악, 농업, 그리고 자동차 수리였다. 그는 학술 경쟁과 세미나를 조직하였을 뿐 아니라 야외 연구여행을 도와주기도 했다. 독서에 취미를 붙여 김일성의 고전적 로작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저서들을 탐독하고 기계공학과 농학, 축산학과 같은 전문기술분야의 책들, 사회과학과 문학예술 분야의 책들을 읽기도 했다 한다.

정치 활동[편집]

정계 입문[편집]

청년기[편집]

김정일은 1957년 평양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 1963년에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정치경제학과를 공부한 다음 문학, 교육, 예술, 언론 개혁, 그리고 천리마운동에 대해서 보다 과학적인 방법들을 주장[17] 하였다고[출처 필요] 한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그는 문학과 시에 빠지기도 했고, 다양한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또한 김일성공산주의 사상을 찬양하는 시와 산문을 짓기도 했고, 가곡도 몇 편 작곡하기도 했으며, 직접 영화 대본과 희극 대본을 쓰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 그는 소련폴란드, 동독, 중화인민공화국 등을 두루 여행하였고, 비공식적으로는 미국프랑스의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조선로동당 입당[편집]

김일성종합대학 재학 중이었던 1961년 7월 22일 김정일은 조선로동당에 정식으로 입당하였다. 입당 초기 학생당원의 신분이었으나 그는 아버지인 김일성 당시 내각수상 밑에서 주체사상을 지도하는 데 관여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조선로동당의 평당원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6월 조직지도부 지도원이 되었다. 그 뒤 1973년 9월까지 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과장, 부부장, 부장으로 승진하였다.[17] 이 무렵부터 김일성의 잠재적 후계자로 여겨졌던 숙부 김영주와 이복 형제로서 후계자로 유력시되던 김평일 등과 갈등하기 시작했는데, 결국 1980년대 중반에 숙부 김영주와 이복 동생 김평일을 제치고 후계자지위를 확정짓는다. 그리고 1994년 집권 이후 이들은 사실상 정계에서 축출되어,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떠돌게 되었으며, 계모 김성애 역시 정치적으로 숙청하였다.

정치 활동[편집]

조선로동당 활동[편집]

1969년 9월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부부장 및 선전선동부 부장을 지냈다. 이후 중앙당 문화예술부장, 중앙당 조직 및 선전비서, 정치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72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5차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73년 9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7차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되었다.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전원회의에서는 당 중앙위원회 비서에 유임되고, 겸임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6년 12월 29일 최고인민회의 특별회의에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비서에 유임되었다.

3대 혁명 소조운동 주도[편집]

김정일은 천리마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경제성장 운동에 동참했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 직접 지도하였고 1970년대 말부터 3대 붉은 기 쟁취 운동을 벌여 근로자의 노동 능률을 높이는 데 노력했으며,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후계자로서 지위가 확정되었다. 이 대회에서 김정일은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18] 1980년 10월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당 중앙위원회 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82년 2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이후 최고인민회의 제8기, 제9기, 제10기, 제11기 대의원에 연임되었다.

1984년 5월 18일에는 로작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를 발표하였다.[19]

인민군 지휘관 취임[편집]

이후 조선로동당 조직담당 비서,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거쳐 199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넘겨받는다. 그 뒤 1992년 4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칭호를 받았다. 그는 대원수에 취임하지 않은 대신 다른 원수들과의 구별을 위해 다른 원수들은 조선인민군 원수라 하고 공화국 원수라는 계급을 별도로 신설하여 자칭하였다. 1993년 4월 국가주석과 국방위원회 위원장의 겸임조항을 정령에서 삭제하면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내정되었다.

군권과 함께 잠재적 경쟁자들을 제거한 김정일은 이어 조선로동당의 당권도 장악하였다.

정적 숙청[편집]

1970년대부터 자신의 경쟁자이자 잠재적 후계자였던 숙부 김영주를 실각시킴에 따라 1990년대 이후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행사 석상에서 김영주는 보이지 않게 된다. 김영주는 김정일의 배다른 동생 김평일과 김영일의 후견인이기도 했다.

김일성이 주변에서 후계 논의를 제기할 당시“10년은 더 할 수 있다”며 후계자 낙점에 소극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일성의 부인 김성애가 압력을 넣자 오진우 등 빨치산 세력들이 반발해 김정일이 후계자로 일찍 결정됐다[20] 는 시각도 있다. 김정일의 집권 이후 김성애 역시 공식석상에서 제외되었고,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전임되었다.

2001년에는 김일성과 주석궁 안마사의 사생아인 김현을 전격 처형하기도 했다.

집권 이후[편집]

집권[편집]

김일성 사망 직후[편집]

1994년 아버지인 김일성이 사망하자 3년간의 유훈통치를 발표하였으나 사실상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면서 사실상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명목상의 국가원수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맡게 하되, 김정일 본인은 군사권을 장악한 국방위원장으로 실권을 행사하였으며 2009년 4월 9일에야 헌법을 고쳐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1990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2년 구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한 그는 개방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나진·선봉의 무역지구를 대폭 확대하였고, 개성직할시 내의 개성공단, 함경남도 원산 등의 무역항을 재정비하고 국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했다. 1998년 이후에는 중국경제 특구제를 도입하여, 4개의 경제특구를 지정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최종적인 해석권은 수령과 그 계승자에게 있다는 정치적 특권'을 강조하여, 국가지도자 한 사람에게 불법적인 권력이 집중되는 북한의 현 제도를 이론적으로 확립시켰다.

1997년 6월 김정일은 일꾼들에게 '여운형선생 서거 50돐이 되는 계기에 모란봉극장에서 추모회를 조직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였다.[21]

1997년 10월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선출되었다. 1998년 11월 현대그룹정주영 명예회장과 평양에서 회담을 가졌다. 1999년 1월초에는 신년사에서 새해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의 해'라고 선언하였다.

2000년대 이후[편집]

2003년과 2009년 국방위원장에 다시 재추대되었고,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총비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정치국 위원,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 당 중앙위 위원 등에 선임되었다. 김정일은 2008년 뇌혈관 질환으로 쓰러진 뒤 2009년 전후, 김정은을 '청년대장'으로 소개하였다. 이어 2010년 9월 김정은이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을 맡으며 공개석상에 처음 등장하였는데, 김일성 주석을 빼닮은 외모로 큰 관심을 끌었다.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을 가진 뒤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분단 52년 동안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경제교류 활성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금석이 되었다. 이에 따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북선수들이 동시 입장하였고,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헌 회장을 만나 성사시킨 것이다.

2001년 블라디미르 푸틴과의 회담

2001년에는 여러 번 러시아를 방문하여 당시 대통령인 블라디미르 푸틴 등과 회담하였고, 푸틴이 답방하여 회담을 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10월 2일부터 10월 4일에 걸쳐 노무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결과는 남북간 신뢰 구축, 협력 강화 등의 목표를 담은 10·4 남북 공동선언(정식 명칭은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으로 발표되었다. 김대중의 평양 방문 때 다음번 회담에는 서울에 답방하겠다고 하였으나 방문하지 않았다.

2009년 4월 9일에는 헌법을 고쳐 헌법상의 국가원수에 취임하였다.

기타 활동[편집]

북한의 식량난[편집]
2011년 러시아를 방문한 김정일

2000년 이후 러시아중화인민공화국을 수시로 방문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미국카터, 클린턴 등의 전직 대통령 역시 수시로 평양을 방문하여 외교 활동을 하고 있다. 외교활동의 목적으로 그는 자원 지원을 주로 중점적으로 하였다.

북한은 1993년부터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자연재해와 공산주의권 나라들의 붕괴, 그리고 서방세력의 경제봉쇄 등으로 최악의 경제난 및 식량난을 겪었는데, 이를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약 6년간의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북한은 이제 강성대국으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통계청유엔인구센서스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주민 33만여명이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시기에 굶어 죽었다.[22][23] 2003년에 발표된 국제앰네스티의 리포트에서는 북한 인구의 절반을 넘는 1300만 명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으며 2001년에는 미국, 한국, 일본, 유럽연합 등으로부터 상당량의 식량, 비료 원조를 받기도 하였다.[2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화폐개혁[편집]

김정일은 2010년을 기해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 화폐개혁은 실패했다.[25]

현장 방문[편집]

김정일은 비날론, 주철, 옷감 등 산업현장을 시찰, 방문하여 직접 지도하였다. 1980년대에는 '남포갑문' 개발 사업을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그의 큰 치적으로 본다. 2009년 2월 21일 함경북도 김책제철연합기업소를 시찰하였고 2월 22일 함북의 7월7일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였다.[26]

2010년 3월 14일 북한노동당 황해북도위원회 책임비서 최룡해,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장 김경희, 장성택, 조선로동당 제1부부장 리제강, 리재일을 대동하고 새해영농전투에 진입한 사리원시 3중3대혁명붉은기 미곡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였다.[27] 김정일은 먼저 농장책임일군들의 안내를 받아 새로 개건된 혁명사적관[27] 우렝이양식장[27] 등을 돌아본 뒤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제끼는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농업생산을 늘이는것이라고 하시면서 농장앞에 나서는 강령적인 과업들을 제시하시였다.[27]' 이어 그는 미곡협동농장에서 최근년간 농업생산을 급격히 늘일수 있은 기본요인은 종자혁명방침을 철저히 관철한데 있다고 하면서 일군들과 농업근로자들의 창발성을 적극 발양시켜 농장의 기후풍토에 맞는 우량품종을 도입하기 위한 사업을 계속 힘있게 추진시켜야 한다고 지적하였다.[27]

생애 후반[편집]

건강 이상설[편집]

200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을 맞아 북한의 최대 명절인 9·9절 기념행사에 참가하지 않아 김정일 건강설이 증폭되었다.[28][29][30] 그러다가 김정일의 동정이 묘연해지면서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라는 건강 이상설이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제기되었고, 조사 결과 김정일은 8월 15일 전후로 뇌졸중뇌일혈 증세를 일으킨 것으로 밝혀졌다.[31][32] 그리고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최근 김정일이 입원했다는 것을 전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은 듯이라고 말했다.[33]

그러나 김정일은 80일 만에 은둔생활에서 벗어나면서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34] 일본 언론은 미국 정부가 김정일 건강이 예상보다 악화되었고, 실각 및 사망을 전제로 대책을 세우는 것을 착수했다고 보도했다.[35][36] 2009년 3월 19일에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사진에 김 위원장은 배가 쏙 들어가고 매우 야윈 모습으로 나와서 건강 이상설에 힘을 실었다.[37]

한편 김정일은 2009년 3~4월경 김정은국가안전보위부장에 임명해 자신을 대신해서 엘리트들을 감시하게 하고, 김정일 사후에도 김정은이 엘리트들을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38] 그 과정에서 군사 조직인 국가안전보위부의 우동측 부부장이 김정은의 보위부를 통한 엘리트 장악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38]

사망[편집]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희천발전소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인해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39][40] 사망 사실은 2일 동안 극비에 부쳐졌으며, 12월 19일 정오에 조선중앙방송 리춘히 아나운서를 통하여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고[41], 시신은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되었다.[42]

사후[편집]

김정일의 영결식은 12월 28일 평양직할시에서 거행되었고, 다음 날인 29일에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추모 대회가 열렸고 추모곡이 작곡되었다.[43] 일각에서는 김정일이 열차가 아닌 평양 교외 별장에서 사망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44]

2012년 2월 16일 71회 생일을 기념하여 조선인민군 대원수에 추서되었다.

비판과 평가[편집]

비판[편집]

세계적으로 최악의 지도자 1~2위를 늘 다투는 인물이었다.[1] 자신의 독제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정치범 수용소와 자유와 끔찍한 인권을 탄압을 자행했다. 현대판 봉건주의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최고지도자인 김일성의 후계자 김정일이 대리청정체계로 들어서면서 극단적인 테러리즘이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아웅산 폭파 사건과 최은희 등의 납북과 KAL기 폭파사건을 배후 조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5][46] 북한이 이런 테러의 배후로 밝혀지면서 우방국들마저 외교관계를 기피하기 시작해 외교무대에서는 입지가 좁아졌다. 이후 미국에 의해 테레지원국으로 정해져 적선국 제재를 받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시간이 흘러 냉전이 종식된 후 미국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경제질서에서 완전히 소외가 되는 최악의 결과를 맞게 된다. 사회주회 경제체계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던 1980년대 농업생산력 저하로 고생하는 사회주의 나라들이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해 생상성 향상을 이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체제보장에 해가 될까 두려워 오히려 협동농장을 유지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은 더욱 떨어졌다. 1995년과 1996년 대홍수를 통해 수 많은 아사자가 나왔지만 특별한 자연재해가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모자라는 식량은 50만톤 이상이기 때문에 아사자는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이 됐다.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시절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했다. 1995년 국제사회에 식량원조를 요청하면서 부각된 식량난[47] 을 통해 대외적으로 선전해오던 사실은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들어났다.. 세계적으로 볼 때 독재자라고 하더라도 대체로 자국 국민의 삶의 향상을 위해 노력했던 근거가 보이지만 그는 그런 노력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핵개발을 함으로써 국제적인 경제제재를 받는 것인데 자국민의 삶과 나라 경제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핵개발을 통해 얻는 건 대외적으로 독제체재를 유지를 위한 협상카드이다.

또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과의 상봉을 지키지 않았고, 2002년에 핵 확산 금지 조약의 탈퇴 선언, 중국의 압력에 의한 신의주 경제 특구 계획 실패, 실제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식량난은 1992년 이후 식량절약을 위해 '하루 두끼 먹기 운동'을 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더군다나

천안함, 연평도 사건[편집]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연평도 포격 사건의 명백한 배후이다. 북한은 군의 일반 지휘통제에 더해서 중앙에서 정치장교까지 따로 보내 2중으로 관리 통제하는 군지휘통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통제력이 약한 대한민국 군대에서도 사격 훈련 중 탄피분실이 일어나는 상황이 발생하면 비상이 걸리 것을 대비해 본다면 최고지휘자의 허가를 받지 않고 저런 대규모의 도발을 실행할리 만무하다. 북한은 2009년부터 후계자에게 정권이양하는 과도기 과정이었고 2000년 이후부터 생겨난 장마당경제로 인해서 중앙권력의 약화를 우려해 화폐개혁으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강화하려 했지만 오히려 화폐개혁의 부작용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내부혼란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런 대남도발을 통해 전쟁분위기를 고취시켜 내부단속을 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2010년 대한민국에서는 9월 28일 북한이 김정일의 셋째 아들 김정은에게 인민군 대장 칭호를 부여, 사실상 후계구도를 공식화 한데 대해 입을 모아 "이해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지적했다. 안형환 한나라당 대변인은 이날 구두논평을 통해 "독재권력을 3대에 걸쳐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정부는 확고한 안보태세를 바탕으로 만약의 안보불안 상황에 철저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영택 민주당 대변인 역시 논평을 통해 "민주 국가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으며, 박선영 자유선진당 대변인은 "28살 애송이를 대장으로 추대하는 이상한 나라가 북한"이라며 "정부는 북한 권력층과 군부의 동향은 물론 관련 첩보 입수에 전력을 다해야 하며, 북한의 권력세습 과정에서 야기될 수 있는 급변 사태에 대한 준비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48]

남포갑문, 순천비날론 공장[편집]

1980년대의 남포갑문 개발의 성공이 그의 치적이라는 견해도 있다지만[49] 이건 북한당국의 일반적인 주장을 이해하는 수준의 논리이다. 남포갑문은 북한 남포특별시의 서쪽 15km에 위치한 갑문으로서 위에는 도로가 건설되어 남포와 황해남도를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착공하여 3년 내에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1개 군단의 군 병력과 수만 명의 노동자를 투입하였으나 워낙 난공사였고 북한의 토목공사 기술 수준이 낮아 완공 시기를 두 차례나 연기한 끝에 1986년 겨우 완성하였다. 부실시공으로 방파제에서 물이 새어들어오고 틈이 벌어지고 갑문이 황폐화되는 이러한 현실 속에 유지보수를 위해 1개 건설사단이 보충작업을 위해 이곳에서 항시 대기하고 있다. 문제는 갑문공사로 생긴 간척지가 생겨났지만 오해려 갑문때문에 대동강 유역의 기후가 변하면서 농업생산량과 어업생산량이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었다. 고위층 탈북자인 김덕홍 증언에 따르면 남포갑문은 작동이 제대로 되지 않아 홍수피해를 막는 효과가 없으며 갑문으로 인한 간척지가 주는 편익이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홍수피해를 막기 위함이었다면 지천과 하천정비를 했어야 하지만 이 사업은 소규모 사업이 복수형이여서 정치적 선전에 불리하고 대규모 갑문사업은 정치적 선전에 유리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경제적 편익보다는 정치적인 선전을 우선에 둔 사업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1평안남도 순천에 연간 10만 t 규모로 추가건설되던 비날론 공장이었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이 완공되면 400여 가지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해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이팝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경제논리를 배제하고 정치적 선전이나 사상무장으로 계획된 사업은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하고 석탄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1994년에 이르면 모두 가동이 중지된다. 2007년에는 김정일이 비날론 재건을 지시해 2010년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재가동에 들어갔지만 결국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2]

남포갑문과 순천비날론 공장에 투여한 자본은 150억 달러에 가까운데 북한이 가지고 있던 자본여력 대부분을 산업시설이 아니라 모두 자신의 정치 선전물 건설에 쓴 것이다.

의혹[편집]

비자금 조성 의혹[편집]

스위스와 해외 은행에 비자금을 예치해두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고, 지금 제재가 진행되고 있다.

암살 미수 의혹[편집]

2004년 4월 22일 북한과 중국 국경 지대인 평안북도 룡천역에서 발생한 폭발 사건으로 인해 150여명이 숨지고 1300여명이 부상당했으며, 이 폭발사건은 김정일의 열차 통과 30분 전에 발생해 김정일에 대한 암살기도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북한의 김정일이 지난 2004년 4월 용천역에서 발생한 대형폭발사건은 자신에 대한 암살기도였다고 인정했으며, 암살과 쿠데타를 우려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는 것으로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외교전문을 통해 드러났다. 캐슬린 스티븐스 대사는 지난 2009년 2월 26일 '현대그룹, 인내와 관용제안'이라는 제하의 비밀전문에서 2월 13일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과 조건식 현대아산 사장, 하종선 현대그룹 전략기획본부사장 등과 점심을 함께 하며 나눈 이야기를 17개 항목에 걸쳐 상세하게 보고했다. 이 항목 가운데 '김정일과 인민군'이라는 항목에서 현정은 현대아산 회장은 "지난 2004년 김 위원장을 암살하려 한 열차폭발사건이후 인민군은 김 위원장이 가장 신뢰하는 집단이 됐다"고 보고했다. 또, "김 위원장은 열차 통과 30분 전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휴대폰을 통해 자신이 탑승한 열차의 통과시간이 전해짐으로써 거의 근접한 시간에 폭발시킬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현 회장은 "김 위원장은 이사건이 자신에 대한 암살실패사건으로 믿고 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북한의 휴대폰 도입이 특이할만큼 늦게 진행되는 것 같다"고 밝혔다. 현 회장은 또 "김 위원장이 암살과 쿠데타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고 전했다.[50]

성격[편집]

취미[편집]

김정일은 청소년기부터 문학과 시, 영화, 역사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아버지처럼 시와 노래를 짓는 것도 좋아했지만,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민족과 운명", "조선의 별" 등 영화를 만들기도 했으며, 신상옥 감독을 통해서 "불가사리"를 제작했다. 그는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 연출을 하기도 했으며, 시와 단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김정일은 몇 개의 곡도 작곡하였다. 1952년 8월에는 가요 <조국의 품> 을 작사, 작곡하였다.[51]

그는 《주체사상에 대하여》, 《건축예술론》, 《문화예술론》, 《미술론》, 《김정일저작선집》을 비롯한 200여 편이 넘는 저작들을 집필하였다. 역사학에도 관심이 있던 그는 단군릉을 수시로 살펴보고, 단군릉의 정비를 지시하기도 했다. 기타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특별히 신앙을 가졌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여성 편력[편집]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은 전 김일성종합대학 연구사 리평의 아내였으나 그와 이혼시켜 사실혼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성혜림은 정식 배우자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김정일은 성혜림과의 슬하에 장남 김정남을 두었다.

1966년 혹은 1968년 아버지 김일성이 소개해준 조선로동당 간부의 딸인 김영숙과 정식 결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영숙과의 관계는 소원하여 딸 김설송김춘송만 있을 뿐 별다른 관계는 없다.

재일교포 무용수 출신 고용희와의 사이에서는 김정철, 김정은 형제와 딸 김여정이 있다. 한때 고용희와 김정남 간의 갈등설이 돌았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한 때 비서 출신인 첩 김옥이 그를 수행하며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행했으며, 둘 사이에 자녀가 있다는 설이 있으나 역시 확인된 것은 없다.

국제 사회에 김정일의 가족관계로써 알려진 것은 성혜림(1남, 김정남), 김영숙(2녀, 김설송, 김춘송), 고용희(2남 1녀,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등이다. 대한민국의 일각에서는 그가 변태성욕자이며[52][53] 수시로 여러 여성들과 비정상적인 향락을 즐기는데 5명의 부인을 제외한 다른 여인들과도 관계를 가졌다. 손희림, 우인희, 홍영숙, 정혜순, 윤혜영 이다. 손희림은 김정일에게 강간을 당했고, 김정일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는데, 김정일에게 버림받은 충격으로 건강이 약화되었다. 북한의 공훈배우 우인희 와도 관계가 있었는데, 우인희는 김정일과의 관계를 떠벌리고 다니다 결국 처형 당했다. 그리고 가수 윤혜영과 관계를졌는데 윤혜영은 다른남자를 좋아하였는데 김정일이 분개해 윤혜영을 총살하였다. 2004년에는 그의 통치방식과 사생활, 여성 편력 등을 소재로 한 방송이 방영되기도 했다.[54]

그 밖에 그의 여인들 간의 권력암투가 화제가 되기도 한다.[55] 2010년 8월 공식 후계자로 선언한 김정은은 고용희의 아들로 알려졌으나, 일설에는 고용희가 아닌 김옥의 아들이라는 의혹[56] 도 제기되어 있다.

또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김정일이 여러 여성들을 ‘내연의 처(concubine)’로 삼은 것은 대표적인 권력남용이라고 보도했다. 타임은 “김 위원장의 축첩은 그가 저지른 수많은 잘못 가운데 가장 골치 아픈 문제”라며 “심지어 남한에 특공대를 보내 유명 영화배우 등 여러 여성을 납치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잡지는 또 “이 ‘친애하는 지도자’는 혼인을 거듭하며 자녀 5명을 뒀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론 9명의 사생아가 더 있다”고 보도했다. [57]

기쁨조[편집]

상당수의 여성들을 기쁨조로 두고 있으며 이들에게 안마를 받고 가무를 감상하며 이들을 갖고 이용하고 있다고 전해진다.[출처 필요]

기타[편집]

일본의 조선학교 교실의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
  • 사실 일부 간부층에게는 김정일의 어눌하고 빠른 말투가 이미 알려져 있었다. 간부들 사이에서는 김정일을 '떼떼'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떼떼란 말을 더듬는다는 북한의 은어(隱語)다.[58]
  • 그의 이름을 딴 꽃으로 김정일화(Kimjongilia)가 있다. 그의 아버지인 김일성의 이름을 딴 김일성화도 있다. 1988년 2월 김정일의 46회 생일에 처음 소개되었다. 라틴아메리카가 원산지이며, 일본인 가모 모토데루(加茂元照)가 20년 동안의 품종을 개량한 것이며 김정일에게 처음 선물하였다고 한다.[60]
  • 이복동생 김현을 정적으로 내몰아서 2001년에 조용히 총살시켰다.[61]
  • 최근 구글의 슈미트 회장이 그의 시신에 참배하여 화제가 된 바 있다.[62] 당시 그의 딸인 소피 슈미츠는 김정일이 가장 좋아했던 컴퓨터가 맥북 프로 15인치라고 전언하였다.[63]

학력[편집]

  • 1966년 김일성종합대학교 정치경제학과 학사

명예 박사 학위[편집]

훈·표창장과 수상[편집]

  • 1978년, 1982년, 1992년 김일성훈장 3회 수상
  • 1973년 2월 김일성상 수상
  • 2003년 12월 멕시코 푸에블라 주 이수카르 데 마탐로스 시 명예시민

노작[편집]

저서와 작품[편집]

  • 작품 〈피바다〉·〈꽃 파는 처녀〉·〈한 자위단원의 운명〉
  • 저서 〈영화예술론〉(1973), 《김정일선집》(전14권), 《주체혁명위업의 완성을 위하여》(전10권)

논설[편집]

  •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1984)

문학[편집]

  • 노래 불후의 고전적명작〈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조국의 품〉,〈진달래〉
  • 시 〈우리 교실〉,〈조선아 너를 빛내리〉, 〈대동강의 해맞이〉

대중문화에 나타난 김정일[편집]

가상 출연작[편집]

김정일을 연기한 배우[편집]

가계[편집]

같이 보기[편집]

출처[편집]

  1. 서방 언어권에 알려진 로마자 표기는 Kim Jong-il이며 러시아어 표기는 킴첸이르(러시아어: Ким Чен Ир)이다. 현재 러시아에서도 한국어 김정일 발음에 근거한 표기를 하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에 있던 시절에는 유리 이르세노비치 킴(러시아어: Юрий Ирсенович Ким)이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쓴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北朝鮮の金正日総書記死去 朝鮮中央放送報じる”. 2011년 12월 19일에 보존된 문서. 2011년 12월 19일에 확인함. 
  3. 1998년까지 유훈통치를 하였다.
  4. 말썽꾸러기 김정일은 어떻게 최고통치자 됐나? DailyNK 2011-06-12
  5.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8권 (계승본) 서두에 실린 화보의 이 사진 옆에 김일성 자필로 1941년 3월 1일 B야영에서 봄을 맞으면서 찍은 사진이라고 했고, 본문 제23장 3절에서도 B야영에서 겨울을 보낸 후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6. 소(蘇), 6.25 남침(南侵) 비밀 문건(文件) 공개 동아일보 1992.06.17 일자 2면
  7.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8. 특별기획 김정일 ‘제1편 유라 킴 (Yura Kim)’ : 2011년 12월 22일 밤 10:00 방영
    (황호택 칼럼)유라의 탯줄을 길게 자른 조산원 엘냐 동아닷컴 2015-08-05
    "金正日(김정일) 출생지는 蘇(소)「하마탄」마을" 동아일보 1992.06.13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 부근 위성 사진 : 구글 맵
  9. 소련 극동전선군 제88 독립보병여단 (蘇聯極東戰線軍第八八獨立步兵旅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91年 人民出版社) p.660 : 1942년 7월 19일자에 김일성이 어제 보로실로프에서 하바로프스크로 와서 뱌츠코예 마을 본 숙소에 머문다고 하였다. (七月十九日 金日成同志已于昨日由B城來X城 住B街本寓); B城은 보로실로프(Вороши́лов)로 지금의 우수리스크이고, X城은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 B街는 뱌츠코예(Вя́тское)를 말한다.
  10. Jasper Becker, Rogue Regime :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 p.51
  11. '어두운 구름(雲, 운)' 대신 '빛나는 銀(은)'으로?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12. 네이트 뉴스
  13. 난산이 아니라 병사했다는 설도 있다.
  14. 김정일 - Daum 백과사전
  15. http://www.chongryon.com/k/mc/kim/ryakureki/r-03-1.htm
  16. 평양제1중학교는 1959년 4월에 평양남산고급중학교로 개칭되었다.
  17. http://www.kcckp.net/ko/great/biography.php?2[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18. 이 때를 그가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지정된 시점으로 보는 관측도 있다.
  19.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로작 제111회: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불후의 고전적로작 《남조선인민들의 반미자주화투쟁은 높은 단계의 애국투쟁이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20. 北 김성애 치맛바람에 빨치산파, 김정일을… - 중앙일보 (화제)
  21. 구국전선 Archived 2002년 7월 17일 - 웨이백 머신(대한민국 내에서 접속이 차단된 사이트)
  2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779426 북한주민 기대수명 남한보다 11세 낮아
  2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108780 북한 ‘고난의 행군’ 5년 동안 주민 33만 명 굶어 죽어
  24. “North Korea: Starved of Rights: Human rights and the food crisis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North Korea)”. 2008년 12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2월 10일에 확인함.  다음 글자 무시됨: ‘ Amnesty International ’ (도움말)
  25. [서울신문] 北화폐개혁 실패… 박남기 黨재정부장 해임설
  26. “김정일, 제철기업소 시찰”-중앙일보 Archived 2015년 1월 9일 - 웨이백 머신 2009.02.23자
  27. 새해영농전투에 진입한 사리원시 3중3대혁명붉은기 미곡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시였다《로동신문》 2010년 3월 14일자 기사
  28. 김정일 9.9절 불참...중병설 분분
  29. 3주전부터 이상징후… 정부 “계산된 행보 아닌듯”
  30. 심상찮은 ‘김정일 건강이상설’
  31. 정부 핵심관계자 "김정일 신변이상 확실"(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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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日총리 "김정일 입원 정보…상황 좋지 않은듯"(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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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서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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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radley Martin, Under The Loving Care Of The Fatherly Leader: North Korea And The Kim Dynasty, St. Martins (October, 2004), hardcover, 868 pages, ISBN 0-312-32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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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인숙, 《김정일, 사회주의 위업의 향도자》, (평양출판사, 1993)
  •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한반도 절반의 상속인 김정일》, (중앙일보사, 1994)
  • 탁진·김강일·박홍제, 《김정일지도자 제1부》, (평양출판사, 1994)
  • 김남진 외, 《향도의 태양 김정일장군》, (평양출판사, 1995)
  • 김인숙, 《민족의 운명과 김정일령도자》, (평양출판사, 1995)
  • 평양출판사,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 략력》, (평양출판사, 1996)
  • 김현식·손광주, 《다큐멘터리 김정일》, (천지미디어, 1997)
  • 정창현, 《곁에서 본 김정일》, (토지, 1999)
  • 서대숙, 《현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 (을유문화사, 2000)
  • 이종석,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외부 링크[편집]

Flag of North Korea.svg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Marshal of the DPRK insignia.svg
전 임
김일성
1994년 7월 8일 ~ 2011년 12월 17일 후 임
김정은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전임
김일성
제6~9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1993년 4월 ~ 2011년 12월 17일
후임
폐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전임
김일성
제3대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
1991년 12월 24일 - 2011년 12월 17일
후임
김정은
전임
신설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0년 5월 - 1993년 4월
후임
오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