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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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金日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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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제5,6,7,8,9대 국가원수
임기 1972년 12월 28일 ~ 1994년 7월 8일
총리 김일(1972 ~ 1976)
박성철(1976 ~ 1977)
리종옥(1977 ~ 1982)
리종옥(1982 ~ 1984)
강성산(1984 ~ 1986)
리근모(1986 ~ 1988)
연형묵(1988 ~ 1992)
강성산(1992 ~ 1998)
후임: 김영남(제10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1대 최고 지도자
임기 1948년 9월 9일 ~ 1994년 7월 8일
총리 김일(1972 ~ 1976)
박성철(1976 ~ 1977)
리종옥(1977 ~ 1982)
리종옥(1982 ~ 1984)
강성산(1984 ~ 1986)
리근모(1986 ~ 1988)
연형묵(1988 ~ 1992)
강성산(1992 ~ 1998)
전임: -
후임: 김정일(제2대)

신상정보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생일 1912년 4월 15일(1912-04-15)
출생지 일본 제국 조선 평안남도 평양부 용산면 하동 칠골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사망일 1994년 7월 8일 (82세)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특각
정당 조선노동당
학력 중학교 중퇴
종교 장로교무종교(무신론)
배우자 한성희, 김정숙, 홍영숙[1][2], 김성애
자녀 4남 4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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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김성주)
생애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 (83세)
출생지 일본 제국 조선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
(現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
사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특각
배우자 한성희, 김정숙(사별), 홍영숙[1][2], 김성애(재혼)
자녀 슬하 4남 4녀
장남 김정일(金正日)
친척 남동생 김영주(金英柱)
손자 김정은(金正恩)
복무 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군
복무 기간 1942년 ~ 1945년 10월 14일 (소련군)
1950년 ~ 1994년 7월 8일 (조선인민군)
최종 계급 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 육군 대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원수
근무 소비에트 연방 붉은 군대 극동군 제88국제여단 제1대대 대대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주요 참전 보천보 전투
6·25 전쟁
기타 이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수상(1948~197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1972~1994)

김일성(金日成, 1912년 4월 15일 ~ 1994년 7월 8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본관전주. 1948년 9월부터 1972년 12월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 수상을 지냈고 1972년 12월 15일부터 1994년 7월 8일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주석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 때 반일인민유격대에 가입했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북조선로동당소비에트 연방 대리자로 활동하였고, 남북조선의 노동당 통합 이후 조선로동당의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그해 9월 내각 총리가 되었다.

1950년 소련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을 설득해 그의 승인으로 한국 전쟁을 일으켰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국군UN군이 협력하여 반격하자 중국공산당 지원군의 도움으로 휴전을 하고 한반도 북쪽을 지배하게 되었다. 전후 노동력 총동원(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1952년에는 허가이를 숙청, 1953년 박헌영, 리승엽 등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고, 1956년에는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을, 1958년에는 중국김원봉 계열을, 1961년에는 김두봉 일파를 숙청했으며, 1972년에는 사회주의헌법을 제정,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공식적인 국가원수가 되어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였다.

1960년 이후 김일성은 주체 이념을 기조로 한 주체사상을 발표했다.[3] 1972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아들 김정일이 세습했다. 1994년 그가 죽고, 1998년에 개정된 김일성헌법에서 정한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일성을 호칭할 때에는 그 이름 앞에 최상의 수식어, 최상의 경어를 붙여야 하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 "어버이 수령님", "아버지 장군님"으로 호칭한다. 영국 인명사전에서 세계 10대 독재자로 선정되었다.

원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4][5] 또는 金聖柱[6][7])이고, 만주 빨치산 시절인 1938년 무렵부터 이후 소련군 시절 8.15 해방때까지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쓴 것이 확인된다.[8]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름을 김일성 아닌 중국 발음 진지첸(진르청, Jīn Rìchéng)으로 읽었으며, 러시아어로 된 소련군 문서에도 이름이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혀 있다.[9][10][11] 해방 직후 평양에 온 초기에는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을 쓰다가,[12] 10월 14일 대중 앞에 김일성(金日成) 장군의 이름으로 처음 나섰다.

한편 한국 전쟁, 전쟁 범죄, 한국 전쟁 장본인[13] 의혹과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해서 논란을 받고 있다. 개신교 가계 출신인 그는 원래 개신교 신자였으나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무신론자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목차

국가주석이 되기 이전의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아버지 김형직
김일성의 생가
김일성의 생가2
어머니 강반석

김일성(초명: 김성주)은 1912년 4월 15일에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용산면(龍山面) 하리(下里) 칠골의 외가[14]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 1894년 7월 10일~1926년)과 어머니 강반석[15] [16], 1892년~1932년)의 삼형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오늘날 그의 생가로 알려진 평양 만경대 고향집은 그의 조부모가 살던 집이다.[17] 김일성의 전주 김씨 12대조 김계상이 전라북도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하였으며,[14][18]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김형직은 할아버지 이래로 지주 리평택(李平澤) 집안의 묘지기였으며,[19]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소작농으로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1917년 조선국민회를 결성한 독립운동가였다.[20] 아버지 김형직에게는 동생 김형록과 동생 김형권이 있는데 김형권은 만주의 항일 빨치산 게릴라였다 한다.

어머니 강반석기독교 장로교 신도였고, 외할아버지 강돈욱[19] 은 교육자이자 칠골교회의 장로[21] 였다.[22] 김일성의 외가는 큰 외삼촌 강진석(康晋錫)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항일 민족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강돈욱은 평생을 교육사업에 헌신한 기독교인이었다.[19] 그의 외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의 어머니 이름 반석은 베드로의 고사에서 딴 이름이라 한다. 외할아버지 강돈욱, 외삼촌 강진석, 외종조부 강량욱이 모두 기독교 목사였다. 아버지 김형직 또는 할아버지 김보현이 기둥이 되라는 뜻에서 그의 이름을 성주(成柱)라[23] 지었다고 한다. 그의 생가로 알려진 조부모가 살던 집은 만경대 고향집이라는 이름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어린 시절과 소학교[편집]

소년 시절
외할아버지 강돈욱 목사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소한 김형직은 만주 지린 성(吉林省) 푸쑹 현(撫松縣)으로 이사했다. 1919년 여덟 살이었던 김일성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창바이현 바다오거우에서 팔도구 소학교를 다녔다.[24] 1919년 8세 때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온 그는 어린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 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한 김형직의 결심에 따라 혼자 평양으로 돌아와[25] 생활하였다.

1923년 초부터 1925년 초까지 그는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下里) 칠골에 있는 외가에서 머물면서 창덕소학교에 다녔다.[19] 창덕학교는 1907년 하리 장로교회가 중심이 되어 세운 5년제 학교인데,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도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한때 창덕학교교감교장을 맡기도 했다. 아버지 김형직의 "혁명을 하자면 자기 나라를 알아야 한다"라는 권고로부터 1923년 3월 중국 바다오거우(八道溝)로부터 만경대까지 배움의 천리길을 걸어 통학하며 외가집이 있는 칠골 창덕학교에서 공부하였다는 것이다. 칠골 창덕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 외할아버지 강돈욱, 외삼촌 강진석, 외재종조부 강량욱 등도 교사로 있었다. 이 중 외종조부 강량욱은 그의 담임 선생이었다고도 한다.

또한 아버지 김형직의 권고로 중국인 소학교에서 수학하여 중국어의 자유로운 구사가 가능했다 [20]. 그러나 아버지 김형직이 1926년 그의 나이 15세 때에 죽게 되면서 그는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청년기와 항일운동 시기[편집]

중학교 재학 중[편집]

길림 육문중학교 1학년 때
육문중학교 시절 김일성

김일성은 열네 살 때(1925년) 아버지의 병세 때문에 다시 만주로 건너가 푸쑹 소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중국 지린 성 지린으로 가서 중국인 학교인 지린성 유원중학교(육문중학교, 毓文中學校)에 다니다가 중퇴하였고다.[20][26] 중학교 재학 중 그는 성적이 우수하였다. 1929년 이 중학에 샹위에(尙鉞, ?-1982)[27]라는 루쉰(魯迅)의 제자인 맑스주의자 선생을 통해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공부했고, 김성주는 여러 조직에 가담했다.

공산주의 단체 조직 활동[편집]

길림 육문중학교 재학 시절

1929년 가을 반일(反日)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중국 군벌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수개월간 감옥살이를 했고 수감중 그는 유원중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25] 1929년 그는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을 하였는데 이 단체는 단속을 받았고 그도 체포당해 투옥되었다. 지린 제5 중학교 학생으로서 처음으로 조선혁명군 사건으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지린 감옥에서 복역하고 1930년 5월 초에 출옥했다.[6][28][29] 당시 그는 이종락의 부하로 활약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이를 부인한다.[6] 와다 하루끼는 김일성이 출옥 후에 이퉁, 화이떠 현 등의 농촌지역에서 활동 할때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나 공산주의 성향의 청년들과 교제를 하다가 리종락의 조선혁명군에 참가했다고 한다.[30][31]

감옥에서 나와 국민부 산하의 청년 조직에 가입, 국민부에서 일할 무렵(1929년에서 1931년 사이) 이름을 김일성으로 개명한다.[14] 이어 조선공산청년회에도 가담하는데, 조선총독부 관헌이 작성한 1929년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의 주요 인물로 기록되었다.[25] 1930년 화성의숙을 졸업하고 만주의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한다.


항일 무장 투쟁[편집]

그의 부친 김형직이나 삼촌 김형권정의부(正義府) 소속이었기 때문에 정의부에서는 그가 육문중학(毓文中學)을 다닐 때 장학금도 대어주었다 한다.[32] 육문중학을 퇴학 당한 그는 한동안 방황하다가 이종락(李鍾洛, 1907~1940)의 부하가 되었다. 정의부가 다른 단체와 통합하여 만들어진 국민부(國民府) 산하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좌파에 속했던 이종락이 1930년에 1개 중대를 이끌고 이탈하여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길강지휘부(吉江指揮部)를 만들자 김일성은 그 대원이 되었다.[33] 이종락이 1931년 1월말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되자[34] 의지할 데를 잃은 그는 장아청(張亞靑, 1913~1937) 등 또래들을 모아 불량배 짓을 하고 다녔다. 이런 일로 중국인들 사이에 조선인들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조선혁명군 측에 제압을 요청하자 총사령 양세봉(梁世奉, 1896~1934)은 이 패거리들을 제압하러 1932년 2월 중순 고동뢰(高東雷) 소대장이하 10명을 무송(撫松)으로 파견한다. 무송에 당도한 일행이 피곤해서 잠든 사이에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은 이들 10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도망친다.[35] 김일성은 또한 조선혁명군 심용준(沈龍俊, 1896~1949) 중대의 무기를 빼앗아 달아나기도 했다.[36]

북한에서는 그가 1932년 4월 25일 안도현(安圖縣)에서 무장 유격대인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했는데, 이것이 조선 인민군의 모태라고 주장하나, 조선혁명군의 이름을 모방한 가공의 군대일 뿐이고, 김일성과 그 상관이었던 이종락은 조선혁명군에 막대한 피해만 끼쳤다. 그는 1932년 초여름에 또래들 몇명을 데리고 조선혁명군 양세봉 장군을 찾아와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살해한데 대한 용서를 빌며 대원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한다. 양세봉은 용서는 했으나, 공산주의자가 된 그를 신임하지 않아 원하는 직책을 맡겨 주지 않았으므로 다시 떠나게 된다.[32][37] 그후 그가 어디서 무얼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32년 7월 31일에 모친 강반석이 사망하므로 유격대 투신은 그 이후가 될 것이다.

1932년 말에 그가 안도현 유격대를 찾아와 처음으로 대원이 되었다는 증언이 있다.[38] 이후 그는 중국인들이 주도하는 무장단체와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는데, 모두 중공당 만주성위와 소련의 코민테른의 지시 감독을 받았으므로 비록 일본 군경과 싸우는 항일투쟁을 했다고 하더라도 조선독립운동이라고 보기에는 무리이다. 궁극적으로는 소련의 목적에 맞는 활동을 한 것이고, 일본군에 쫓겨 도망간 곳도 소련이며, 거기서는 항일투쟁이 아니라 소련의 목적에 따른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인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과 만주의 각지에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개별적 혹은 연합으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였다.[25] 그가 속해 있던 동만(東滿:당시 간도지방)의 항일유격대가 확대·발전하여 1934년 3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조선인민혁명군)으로 재편성되자 1934년 가을에 김일성은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으로 배속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 정치위원에 선임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이름이 바뀌자 그는 계속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배속되어 활동했다.

김일성(김성주)의 항일 운동에 대한 논란[편집]

김일성(김성주)이 사회주의자(엄밀히,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된 후, 항일 운동을 한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존재한다. 김일성(김성주)이 남의 이름을 사칭한 사람이라는 주장부터, 항일 게릴라의 주역이라는 주장까지 다양하며, 모두 어느 정도의 근거가 있다. 참고로, 사실, 이것은 해외에서 더 활발히 논쟁 중인 사안이며, 오히려, 한국 내에서는 "김일성 가짜설"이 천박한 이야기로 취급되기도 한다.[39]

레닌그라드 대학을 졸업했고, 김일성 대학을 잠깐 다니기도 했던, 구 소련 출신의 역사학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그의 2002년 논문에서 김일성(김성주)이 원래 김일성의 이름을 본 따서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을 가능성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몇몇 증인들이, 김일성(김성주)이 소련에 있을 당시 그를 알았다고 하며, 동북항일연군에서 그의 상관이었던 쭈 바오쫑(주보중)은 그의 일기에서, 두번째 김일성 주장을 일축했다.[40]:55

한국 전쟁에 대한 수정주의적 해석으로(특히, 남한의 북한 남침 유도설로) 유명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김일성(김성주)을 사칭하는 자로 보는 것은 그가 단독으로 일본군을 무찔렀다는 과도한 선전을 믿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커밍스는 김일성이 게릴라 리더로서 유명했다는 관동군 장교들의 증언에 주목했다.[41]:160–161

하지만, 영국의 저명한 작가/기자이자 아시아 정치의 전문가로, CNN 과 BBC 에서 아시아 정치관련 해설자로 활동했던 재스퍼 베커(Jasper Becker)는 2005년 저서 《악당 체제》(Rogue Regime)에서 "가짜 김일성"설을 주장하였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몇몇 증거가 김일성이란 이름은, 한국 저항군의 유명한 초기 리더였던 김경천이 사용하던 이름이라는 것을 시사한다고 한다.[42]:44

소련의 공보 비서관(언론 담당자)으로 1945년 김일성(김성주)을 돕기 위해 북한으로 파견되었던, 그리고리 메클러(Grigory Mekler)도 이와 동일한 증언을 했다. 그가 북한으로 가기 전인 1944년에 하바로프스크에서 김일성(김성주)을 만났는데, 김성주는 당시 한국 게릴라들 사이에서 매우 존경받던 (당시 이미 사망한) 김일성이란 이름을 빌려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메클러에 따르면 키릴 메레츠코프 소련군 원수가 김성주에게 김일성으로서 살아가며 일을 하라고 지시 했다고 하며, 메클러는 1945년 이 후 북한 방방곡곡에 김성주를 데리고 다니며, 그를 선전했다.[43]

한편, 한국에서도 메클러와 비슷한 증언이 나왔다. 소련군 태평양함대 소속으로 한반도 상륙 작전에 참전한 뒤 해방 후 김일성(김성주)을 직접 마중했던 정상진은, 나중에 소련군 정치부에 보고하면서 비로소 본인을 김성주라고 소개했던 그가 김일성임을 알았으며, 김일성이 최초 소개되었던 1945년 10월 14일에 열렸던 소련군 환영대회는 소련의 각본이었다고 증언하였다.[44]

어쨌든, 북한에 의한 공식적 버전의 김일성(김성주)의 게릴라 업적이, 김일성(김성주) 개인 숭배 작업의 한 부분으로, 매우 미화되어 신봉된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특히, 14세 때, 소년 공모자로 저항(독립) 조직에 참여 했다는 부분이나, 19세 때 전투 가능한 부대를 만들었다는 부분에서 그러하다.[42][쪽 번호 필요]

1990년대에 펴낸 조작 투성이인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와는 달리 김일성이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한 후인 1942년에 직접 지은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를 보면 그들의 항일투쟁이란 것은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만주 실지 회복을 위해 한 것이므로 중국공산당사의 일부일 뿐이고, 조선인민혁명군도 나오지 않고 조선독립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다. 뿐더러 그들의 투쟁이 최종적으로 패배로 귀결되었다고 자백하고 있다.[45] 당시는 그가 북한 지도자가 되리라고는 꿈도 못 꾸고, 만주의 안도현장(安圖縣長) 자리나 소련군 장교로서의 출세를 바라고 있을 때이므로[46][47][48] 자신들이 한 일에 대해 크게 조작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비교적 솔직하게 쓴 것으로 보인다.

동북항일연군 지휘관[편집]

만주 항일 유격대 시절
(아내 김정숙과 함께)
만주 항일 유격대 시절
(아내 김정숙과 함께)
보천보 전투 보도 기사

1936년 3월 항일독립운동 단체들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의 일환으로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통합, 재조직되면서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6년 7월 다시 동북항일연군이 편제가 개편되자 그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배속, 제1로군 6사 사장이 되었다. 1936년 5월 항일 독립운동단체들의 통일전선을 위해 조국광복회를 결성하자 그도 광복회 결성에 가담하였다.

1937년 6월 4일에 있었던 보천보 전투(보천보 습격)에서 일본인 7명 사망, 7명 중상의 피해를 입혔다는 설이 존재한다.

당시 동아일보의 보도(1937년 6월 7일)에 따르면 보천보 습격 자체로는 민간인 2명(성인, 일본 순사부장의 자녀 2세 여아)이 사망했을 뿐이며, 다음 날 (1937년 6월 5일) 이어진 30명의 일본 경찰 추격대와의 충돌에서 동북항일연군의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 일본 경찰추격대 30명 중 7명 사망, 14명의 부상자가 났으며, 전소한 총피해액은 50.000원이라고 한다.[49]

북한과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보천보 전투(보천보 습격)는 일제강점기 36년 이래 유일하게 독립군의 손으로 잠시나마 영토를 탈환했던 사건으로, 무장독립세력이 거의 사라졌다고 민중들이 생각할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한다. 보통 약 100명 정도를 거느리고 무장투쟁을 했다고 전해져, 그런 유격전으로 김일성의 이름이 퍼지게 되었고, 그의 항일투쟁은 조선의 신문에 자주 소개되었다. 당시 동북항일연군의 정치위원장이었던 위증민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던 데 비해 김일성의 현상금은 1만 으로 오르게 되었다.[50]

그러나 이런 말은 사실이 아니다. 보천보 사건은 규모가 좀 컸다는 것 외에는 1920~30년대에 만주 무장단체들이 조선국경을 침입하여 벌인 무수히 많았던 약탈 사건들[51] 중의 하나일 뿐이므로 곧 잊혀졌고, 이 때문에 김일성 이름이 유명해진 적도 없으며, 해방당시 이 사건을 거론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1935년 2월에 이홍광(李紅光,1910∼1935)이 일으킨 동흥(東興) 습격 사건[52] 보천보 사건보다 더 큰 충격을 주었고, 매일신보나 동아일보는 보천보 사건을 제2 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이라고 보도할 정도였지만[53], 이 때문에 이홍광이 항일영웅으로 부각된 적도 없으며, 오늘날 동흥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전문연구자 외에는 거의 없다. 이를 보아도 보천보 사건이 실제로는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질만한지 알 수 있고, 김일성의 중요한 항일투쟁 업적이라는 북한의 대대적 선전 때문에 터무니없이 부풀려져 알려진 것이다. 북한은 보천보 사건보다 더 컸던 이홍광의 동흥습격사건을 숨기기 위해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이란 지명도 없애고 양강도 김형직군 후주고읍(厚州古邑)으로 바꾸어 버렸다.[54]

보천보 전투(보천보 습격)의 전과는 북한에 의해 부풀려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의 진보성향인 와다 하루키 교수는 일본은 민간인 2명(일본 요릿집 주인과 순사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한 반면, 동북항일연군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고 말했다.[55]

1937년 6월 4일 일어난 보천보 사건을 크게 보도한 동아일보는 같은 해 11월 18일 그 사건의 주역 6사장 김일성이 피살되었다고 보도했다. 같은 날 조선일보,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 주요 언론들이 모두 김일성의 전사를 보도했다.

그러나 보천보 사건의 항일연군 2군 6사장 김일성은 다른 인물로 1937년 11월 13일 전사한 것이 확실시 된다. 1938년 11월에 항일연군 1로군 제2방면군장(第二方面軍長)이 된 김일성이 있는데 이 사람이 바로 북한 김일성이다.[56] 일제는 1931년 체포되어 6년 징역 후에 풀려나 전향한 김일성의 왕년의 상관 이종락을 중재인으로 투입하여 김일성 귀순 공작을 벌인다.[8] 김일성도 한때 귀순을 결심하고 협상에 응하였으나 안전보장 등과 관련하여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우는 바람에 협상이 지연되는 동안 상관 1로군 총사령(總司令) 양정우(楊靖宇, 1905~1940.2.23)에게 보고가 들어간다. 1940년 1월 부하를 이끌고 김일성 부대에 들이닥친 양정우는 협상차들어와 있던 이종락을 체포하여 사살하였고, 김일성도 귀순을 포기한다. 총사령 양정우 본인도 한달여 후인 2월 23일 전사한다.

일제의 토벌이 계속되는 중에도 김일성은 1940년 3월 25일 훙치허 전투를 지휘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북한에서는 이 전투에서 김일성(조선인민혁명군)이 일본인 140명을 사살하고, 30여 명을 생포했으며, 탄약과 양곡을 노획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훙치허(홍기하) 전투에 대한 정설은 중국공산당 반일무장조직의 일부 소부대가 일본군을 공격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마적대의 공격으로 보도할 정도로 미미한 사건이었다.[57]

일제의 토벌에 쫓기던 김일성은 양정우 전사후 총사령 대행을 맡은 상관 위증민 (魏拯民, 1909 ~ 1941.03.08)의 허락도 받지 않고 1940년 10월 23일에 부하 몇명을 이끌고 소만(蘇滿) 국경을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한다.[58] 12월 8일에 제3방면군장 진한장(陳翰章, 1913~1940)이 전사하고 이듬해 1941년 3월 8일 총사령 대행 위증민마저 전사하여 항일연군 1로군은 완전히 궤멸된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6년 7월 ~ 1938년 6월)

총사령부(總司令部) 군장(軍長) 사장(師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부사령 왕덕태(王德泰, 1907~1936)
1군 군장 양정우 1사장 정빈(程斌, 1911~1951)
1938년 6월말 투항
2사장 조국안(曹國安, 1900~1937)
1937년 가을 전사
3사장 왕인재(王仁齋, 1906~1937)
1937년 가을 전사
2군 군장 왕덕태
1936년 10월 말 전사
4사장 안봉학(安鳳學, 1909~1937)
1936.09.30 투항
5사장 사충항(史忠恒, 1906~1936)
1936년 10월 전사
6사장 김일성(金日成, 1901~1937)
1937.11.13 전사


2군의 4, 5, 6사(師)는 원래 1, 2, 3사(師)였으나 1군과 함께 1로군으로 편성되면서 개칭한 것이다. 일본 관동군(関東軍)은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3년간 '만주국 치안숙정 3개년 계획(満洲国治安粛正三箇年計画)'을 수립하고 이에 따른 항일연군에 대한 집중적인 토벌로[59] 위 표에서와 같이 1로군 전기 편제의 지휘관들은 총사령 양정우만 살아 남고, 부사령 왕덕태와 휘하 6개사의 사장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해버렸다. 6사장 김일성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가 전사하자 김성주가 전사한 김일성의 이름을 쓰며 자신이 6사장이었던 것처럼 행세하여 보천보 전공을 가로챈 것이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 (1938년 7월 ~ 1941년 3월)

총사령부(總司令部) 방면군장(方面軍長)

총사령 양정우(楊靖宇, 1905~1940)
1940.02.23 전사

부사령 위증민(魏拯民, 1909~1941)
1941.03.08 전사

제1방면군장 조아범(曹亞範, 1911~1940)
1940.04.08 내분으로 피살
제2방면군장 김일성(金日成, 1912~1994.07.08)

1940.10.23 소련으로 월경 도주[58]

제3방면군장 진한장(陳翰章, 1913~1940)
1940.12.08 전사
경위려(警衛旅) 여장(旅長) 박득범(朴得範, 1908~?)
1940.09.30 투항[60]


일제의 집중적 토벌로 대다수 지휘관과 수많은 병력을 잃은 1로군은 1938년 7월에 위 표와 같이 편제를 축소 개편한다. 이 후기 편제의 지휘관들은 간신히 살아남았던 총사령 양정우까지 모두 전사하거나 투항하고, 제2방면군장이었던 북한 김일성만 결사 항전 중인 상관과 동료, 부하들을 버리고 몰래 소련으로 도주하여 살아남았다.[58]

소련 극동군 제88 국제여단 (1940~1945)[편집]

일본 관동군 노조에 쇼도쿠(野副昌德) 소장이 이끈 노조에(野副) 토벌대의 대대적 토벌로 항일연군 1로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전사하고, 투항자들이 속출하여 1로군이 궤멸 위기에 빠지자 김일성은 상관인 위증민(魏拯民, 1909~1941)의 허락도 없이 부하 몇명을 데리고 1940년 10월 23일 소만(蘇滿) 국경을 불법 월경하여 소련으로 도주한다.[58] 국경수비대에 체포된 김일성은 한동안 투옥되어 조사를 받다가 2로군 총사령이었던 주보중(周保中, 1902~1964)의 신원보증으로 감옥에서 풀려난다.[61]

김일성과 함께 입소했던 서순옥의 증언

김일성 부대는 1940년 8월부터 소련으로 이동을 시작하여 10월 23일 경 월경하였다. 김일성과 소련 월경을 동행하였던 서순옥의 월경 전후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940년 8월에 김일성, 강위룡 등 우리 16명은 소련으로 향하여 떠났다. 소련 땅에 들어서기 전에 훈춘의 어느 산곡대기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혼례를 하였는데 혁명가를 부르며 오락을 진행하였다. 김일성, 강위룡 등 우리 16명 유격대 전사들은 소련땅에 들어선 다음 김일성 동지가 강위룡과 다른 한 동무를 파견하여 소련 변방 전사들에게 체포당하라고 지시하였다. 체포된 다음에 정황을 소련 당조직에 알리자는 계획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체포되어 땅굴 감옥에 감금되었다.”[62]


주보중(周保中)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40년 12월 11일자:

김일성이 16인을 데리고 훈춘(琿春)을 경유하여 들어왔다. [金日成 帶十六人 由琿春歸][63]

소련으로 망명해온 항일연군들은 보로쉴로프(오늘날의 우수리스크) 근처의 남야영(南野營)과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70km 가량 떨어진 아무르 강변 뱌츠코예(Vyatskoye, Вятское) 마을의 북야영(北野營) 두 곳에 분산 수용되는데 김일성은 남야영에 들어간다. 남야영과 북야영은 각각 B 캠프와 A 캠프로도 불리는데, 보로쉴로프(Вороши́лов)와 아무르(Амур)강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남야영에서 1941년 2월 16일 장남 김정일이 태어난다. 남야영은 보로쉴로프 근처 조그만 기차역이 있는 하마탄이란 마을에 있었다고 하는데,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중간쯤에 있는 오늘날의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이다.[64] 김정일이 태어난 집은 라즈돌노예 마을길 88번지(2층 빨간벽돌집)로 기차역 부근이며, 지금도 남아있어 연해주 관광객들의 관광 코스로 되어 있다. 라즈돌노예 기차역은 스탈린이 1937년 연해주 한인들 17만여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실어나르던 출발지로, 고려인들의 한이 맺힌 곳이다.

소련에서의 김일성은 상관의 허락없이 도망쳐온 탓에 주보중등 중국인 상관들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고,[58] 불법 월경으로 소련측에 의해서도 어려움에 처한다. 이런 난관을 타개하는 묘책으로 소련측에 포섭되어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보고하는 NKVD 비밀 요원이 된 것으로 보인다.[65]

1942년 7월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하바로프스크 인근 뱌츠코예 마을의 북야영에 항일연군 망명자들을 수용하는 88여단이 창설되면서 그도 거기로 이주하여[66] 대위 계급으로 1대대 대대장(營長)이 되어 8.15 해방 때까지 교육과 훈련을 받는다.[67] 88여단을 중국인 대원들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東北抗日聯軍教導旅)라 불렀다.

1945년 8월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일본 제국의 패망이 임박하자 동북항일연군교도려 내에 있던 조선인들은 '조선공작단'(단장 : 최용건)을 결성하고 조국의 해방과 새로운 국가건설에 대비하였다. 이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단 조선공작단 정치군사 책임자였다.[6] 뒤에 소련군 소좌로 승진했다. 조선공작단 대원 가운데 일부는 1945년 8월 8일 소련군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에 참석했으며, 나머지 조선인들은 9월 19일 원산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왔다.[6] 기차로 평양에 도착한 9월 22일경부터 김일성은 비밀리에 정치활동을 시작,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동북항일연군 조선인들의 투쟁의 성격[편집]

항일연군의 조선인들은 만주서 태어났거나, 어릴 때 만주로가서 중국에 동화되어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미약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교육 정도도 김일성의 중학 중퇴가 가장 높은 학력에 속했고, 평균 초등학교 3학년 정도의 학력에 지나지 않았으며,[68] 문맹자도 많았다. 조선에서 성장하지도 않았고 조선에 대해 배운 적도 없어 조선 독립에 대한 간절함 같은 것이 있을 만한 사람들이 못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인들만의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조선독립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 조직에 들어가 그들과 유사한 목적의 활동을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조선인들에 대한 지독한 차별 행위인 반민생단 투쟁을 거치며 수백명이 처형 당하고서도 중국인들로부터 독립해 나갈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 조직내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만 썼을 뿐이다. 항일연군은 중공당 만주성위와 코민테른 극동지부의 지휘 감독을 받는 조직이었고, 조선 독립의 목적을 명시적으로 표방한 적도 거의 없었으며, 소련과 중공당의 목적에 맞게 일본과 투쟁하는 조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다못해 보천보 사건에 관련되었던 재만한인조국광복회라는 조직도 조선인들이 조선 독립을 위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 아니라 코민테른의 지시로 만들어 졌다.

김일성 등 동북항일연군의 일부 조선인들이 1940년말 소련으로 도피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5년간 아무런 항일투쟁도 하지않고, 소련의 목적에 맞는 교육과 훈련을 받으며 편하게 지낸 것도 그들이 조선 독립과는 아무 관계없는 집단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소련이야 말로 해외의 조선독립운동을 가장 가혹하게 탄압한 국가이다. 1921년의 자유시 사변으로 수백명의 항일투사들이 참변을 당하면서 만주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에 크나큰 타격을 주었다. 1937년에는 2천명 이상의 연해주 한인 지도자급 인사들을 처형하고, 17만명의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켜 연해주에서의 조선 독립운동은 완전히 맥이 끊어졌다.[69] 김일성 등은 이런 소련으로 도망가서 소련군에 입대하여 조선 독립이 아니라 소련의 목적을 위한 교육과 훈련을 충실히 받은 덕택에 소련군 무력의 도움으로 북한의 핵심 권력을 장악하는 행운을 누린다.

항일연군의 조선인들 대다수가 해방 후 조선으로 오지 않고, 중국의 조선족이 되었다는 것도 그들에게 조선 독립의 목적 의식이 별로 없었다는 증거이다. 동북항일연군 내의 조선인들의 활동은 조선독립운동이라기 보다 중국인인 조선족의 항일투쟁에 가깝고, 조선인들의 역사라기 보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이다. 김일성 등 소련으로 피신했던 일부는 소련이 그들에게 북한의 최고 권력을 쥐어주지 않았더라면 중국의 조선족이나 소련의 고려인이 되었을 사람들이다.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에 지인도 거의 없고, 아무 기반도 없었으니 돌아올 이유도 별로 없었다. 북한 내에 아무 기반도 없었던 만주 빨치산 출신자들이 북한의 최고 권력을 잡는 바람에 항일연군 조선인들의 투쟁이 중국 조선족의 역사를 넘어 북한의 역사로 만들어졌고, 남한에서도 그들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항일연군 사람들의 투쟁방식도 보급투쟁이라는 명분하에 양민에 대한 약탈, 납치, 살인, 방화 등을 자행하여 항일투쟁으로 정당화시키기 어려운 면이 많다.[70] 혁명을 위해서는 무슨 일을 해도 정당하다는 전형적인 공산주의자들의 투쟁방식이지만,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보면 여느 마적단과 구분하기 힘들었다.

광복 이후[편집]

스탈린이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발탁한 배경[편집]

해방후 북한을 공산화시키고, 김일성을 지도자로 선정한 것은 국민의 뜻과는 무관한 스탈린의 결정이었다. 당시 김일성이 소속되었던 소련군 88여단은 만주서 일본군 토벌에 쫓겨서 넘어온 빨치산들을 수용한 부대로,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전선군[71]의 통제를 받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국경 경비대 성격의 NKVD(KGB 전신) 산하부대였다. 여기서 김일성은 표면적으로는 1대대 대대장이었지만, 동시에 NKVD (KGB) 비밀 정보원으로[65]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상관인 극동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과[72] 극동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Maksim Purkayev, 1894-1953) 대장에게 보고하는 일을 했다. 이러한 비밀 역할로 상관들의 신임을 얻어 그들의 추천을 받은 것이 별다른 특출한 학력이나 경력도 없는 그가 북한 지도자로 발탁된 배경[73]이라고 당시 88여단 소르킨 소장 밑에서 정보 업무를 담당했던 전 인민군 총참모부 정찰국장 최원(崔元)이 증언했다.

소르킨 소장은 NKVD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Lavrentiy Beria, 1899-1953)의 심복이었는데, 1941년 3월초 극동군으로 부임해 와서 왕신림(王新林)이란 중국식 암호명을 가지고 만주 빨치산들의 소련군 수용 문제를 다루었고, 88여단의 창설과 운영 및 해체까지 직접 관장하였다. 주보중(周保中)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에 상당히 자주 나오는 왕신림(王新林)이 바로 소르킨이다.[74] 김일성은 만주에서 소련으로 월경한 초기에 소르킨의 비밀 정보원으로 포섭되었다고 하며, 두 사람은 특별히 친했다고 한다. 극동군 사령부에서 북한 지도자 후보로 김일성을 불러 면접 심사할 때 면접관은 푸르카예프 대장이었다.[10] 모스크바에서 NKVD와 극동군 사령부가 올린 보고서를 받아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스탈린에게 강력히 추천한 사람도 NKVD 수장 베리야로 알려져 있다.[75] 보고서를 검토한 스탈린은 1945년 9월 초 88여단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면접 시험을 본 후 그자리에서 북한 지도자로 내정하였다.[76] 스탈린은 위성국가의 지도자를 고를 때 토착 공산주의자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소련의 말을 잘 들을 만한 사람을 골랐는데, 이것도 박헌영 같은 사람은 배제되고, 5년간 소련군에 소속되어 훈련을 받은 김일성이 선택된 이유이다. 결국 김일성이 북한 권력을 잡은 내막은 흔히 주장하는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소련군 88여단에서 KGB 비밀 요원이 되어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련군 상관에게 밀고한 공로로 신임을 얻은 때문이다.

88여단 시절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한 KGB 장교는 북한 지도자 선발 과정에 대해 "당시 모스크바는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누구든지 좋았다. 두뇌는 소련고문단이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후일 증언했는데, 바로 이 능력과는 상관없이 소련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만한 인물로 김일성이 선택된 것이다.[77]

이후 지도자 선택에서 밀린 박헌영 측의 집요한 이의 제기로 1946년 7월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다시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보는 형식을 취하지만 이는 박헌영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고, 스탈린은 김일성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78]

흔히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에 극동군 총사령부와 연해주군관구 및 북한을 점령한 25군의 군사평의회에 “북조선에 민주정당과 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반을 둔 부르조아 민주정권을 창설하라”고 비밀 지령문을 내려보낸 것이 남북 분단의 시발점이라고 하나[79], 9월 초에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내정한 때에 이미 북한을 분할 지배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남북 분단의 원흉은 스탈린이고, 김일성은 그 실행을 위해 선택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

해방 당시 김일성의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준비 정도[편집]

김일성은 일제시대에 태어나 어릴 때 만주로 이주하여 중국사람들틈에서 그들과 어울리며 성장했다. 국내에서 교육을 받은 것은 1923~1925년 사이 2년이 채 못되는 기간 외가에서 창덕학교를 다닌 것이 전부이다. 조선과 그 역사에 대해 배운 적도 거의 없어 조선 민족에 대한 애착도 가지기 어려운 중국에 반쯤 동화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가 항일연군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다고 하지만 그것이 조선독립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어서라기 보다, 당시 만주에서 혈기 왕성한 젊은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귀국길에 오른 김일성 등 88여단의 조선인들이 자기들끼리 있을 때도 중국어로 이야기했다는 이기건(李奇建, 1919년 ~ ?)의 증언이 있다.[80] 소련군에서 그의 이름도 중국식의 진지첸으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희박했다.

항일연군시절 김일성의 수하였던 여영준(呂英俊)은 당시 김일성이 해방이 되면 중국 공산당이 안도현장(安圖縣長) 정도를 시켜주길 원했다고 증언하였다.[46] 이런 말은 결국 당시 김일성은 혈통만 조선인일 뿐 사실상 중국에 동화된 공산당원으로 일본이 패망해도 만주에서 행세하기를 원한 중국인이었고, 그의 항일투쟁이란 것도 중국을 위한 것이었을 뿐 조선독립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증거이다. 여영준 본인은 북한으로도 가지 않고 중국인인 만주의 조선족이 되었다. 일본군에 쫓겨 소련으로 도망가서는 또 중국보다 앞선 소련의 군인으로 출세하기를 원했다. 빨치산 시절 김일성의 전령병이었던 이을설(李乙雪, 1921-2015)도 김일성이 죽고 난 다음부터 강연 다닐 때 소련 시절의 김일성은 소련서 살고 싶어 했고, 국내로 돌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하였다.[47] 당시 그는 조선 독립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소련군 내에서 출세하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한다.[48]

김일성은 중국말은 능하나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렸다는 증언도 많다. 소련의 고려인으로 해방 직후 평양에서 김일성에게 마르크스-레닌 사상을 가르친 박일(朴一) 전 김일성대 부총장은 "김일성이 주로 중국에서 빨치산활동을 한 탓인지 사물을 판단하는 데 우선 중국어로 궁리하는 습관이 있어 교육에 애로가 많았으며 1백여편의 그의 연설문을 작성할 때 金(김)의 지적능력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81] 박씨는 『김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고 그의 한국말은 형편없이 서툴러 그가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면서 김이 어렸을 때부터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랐다고 설명했다.[82] 김일성이 평양의 대중 앞에 처음 등장한 1945년 10월 14일의 집회에 참석했던 김재순(金在淳, 1923~2016) 전 국회의장도 당시 노장군을 기대했던 평양시민들이 새파란 젊은 김일성을 보고 가짜라고 실망했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했다고 증언한다.[83] KGB장교였던 레오니드 바신은 제1차 조선공산당대회를 앞두고 김일성의 연설문을 만들어주는 일을 했는데, 조선인 출신 소련군장교들은 金의 중국어는 꽤 잘 하지만, 조선어 지식이 매우 부족해서 상황에 적절한 연설문 작성에 애를 먹었다고 하였다.[84]

해방 당시 김일성은 일국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학력이나 경력이 턱없이 못미치고, 외국서 성장하여 조선의 국내 사정에도 어둡고, 조선말도 심하게 더듬거렸다. 스탈린에 의해 지도자로 발탁되어 평양으로 온 김일성은 경력을 꾸미고자 소련군정 정치 사령관 레베데프 (Nikolai Lebedev, 1901~1992) 소장을 찾아 자신의 빨치산 부대도 일본과의 해방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레베데프는 절대로 역사를 바꿀 수 없다면서 거절했다.[85]

대중들은 그가 어디서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알지도 못했고, 당연히 국내 지지세력도 전무했다. 이런 그를 실제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평양의 소련군정 인사들은 여러 가지 정치공작을 진행하면서, 그가 정치적인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정치 교육도 시켰다.[86] 소련군정의 정치장교 그리고리 메클러(Grigory Mekler, 1909~2006)나 KGB 장교 레오니드 바신(Leonid Vassin, 1915~?)은 1945년 8월말 소련군이 처음 평양에 진주했을 당시 평양은 조만식의 판이었다고 증언한다.[87][88]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무명의 소련군 진지첸 대위(김일성)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켜야 했고, 이렇다할 내세울만한 항일 공적도 없는 그를 전설적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게 했다.[89] 김일성은 소련이 무력과 정치공작을 동원하여 인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조만식을 제거하고, 자신들 목적에 맞게 만들어낸 꼭두각시 지도자였을 뿐이다.

"그가 권좌를 향한 첫발을 내디딜 무렵에는 우리의 조언을 듣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When he was taking his first steps towards power, he didn't do anything without taking our advice.)"는 그리고리 메클러의 회고나,[86] "우리는 지도자 김일성을 무에서 만들어 내었다. (We created him from zero.)"고 말한 KGB 장교 레오니드 바신의 후일 증언은[88] 결코 과장이 아니다.

김일성 가짜설이 나오고, 항일투쟁 경력의 엄청난 과장과 조작이 이루어져 논란이 빚어진 것도 해방 당시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미비하고 인민의 지지도 전무했던 인물이 소련군의 도움으로 무리하게 지도자가 된 때문이다. 이후의 북한이 개혁개방을 못하는 이유도 인민들이 역사의 진실을 알면 체제를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광복과 귀국 (1945 ~ 1946)[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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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가을 '붉은 군대 환영 평양시민대회'에 참석해 모습을 드러낸 김일성

1945년 9월 19일, 김일성 등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이 원산항을 통해 귀국, 사흘 뒤인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이때 김일성은 소련군 육군대위의 자격으로 귀국했다. 이후 평양에서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벌였으며 곧 소련군 육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가 맡은 첫 직책은 평양지구위수사령부(平壤地區衛戍司令部) 부사령관(副司令官)이었다.[90] 북한 각 지역의 위수사령관은 소련군이 맡고, 부사령관은 김일성과 함께 귀국한 88여단 출신자들이 임명되었다.

당시 소련 군정에 의해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이 스티코프 사령관과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장 조만식의 소개로 '김일성 장군'으로 평양 시민들에게 소개되면서 공개적인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1920년 무렵부터 퍼져 있던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에 대해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시민들은 고령의 노 장군을 생각하고 모였지만, 젊디 젊은 청년이 김일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나이가 맞지 않으므로 군중들 사이에 김일성의 실체를 의심하여 가짜라는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단상으로 몰려들어 항의하는 군중들을 몽둥이를 휘둘러 쫓는 등 소란도 있었으나 큰 충돌은 없었다. 당시 총소리도 들렸다는 증언도 있다. 소련군은 가짜라는 소문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집회 후 많은 사람들을 만경대 마을로 데려가 김일성이 귀국 후 처음으로 조부모와 친척들을 만나는 장면을 연출해 보여주기도 했다.[91]

부인 김정숙. 아들 김정일, 딸 김경희 등과 함께 강원도 화진포에서 (1948년 8월 7일)
맨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정숙, 가운뎃 줄 첫 번째가 아들 김정일, 세 번째가 딸 김경희

1945년 10월 8일과 10월 9일에 김일성은 38도선 개성에서 박헌영과 회담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38도선 이북에도 당본부를 설치한다는 그의 주장에 박헌영은 당의 중앙은 한 곳이어야 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박헌영은 그의 주장을 끝내 동의해주지 않았고 분국 형식으로 당을 조직하게 됐다.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조직위원회를 조직하고 당창건 목적을 발표하였다.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초대 책임비서에는 김용범이 선출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소련의 홍보 지원 등에 힘입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내에서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1945년 11월 5일 서울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조직되자 축사를 보냈고, 11월 6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명예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3차 확대집행위에서 김일성은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12월 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대 책임비서에 취임했다.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시절 (1946 ~ 1948)[편집]

1946년 당시의 김일성
김일성 가족

김일성은 해방 후의 군정기 조선에서 정치 기반이 전혀 없었으나 소련 군정의 지도를 받아 1946년 2월 8일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켜 북한에서 사실상의 단독 정부로 기능케 했다.[92]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김두봉, 서기장에는 강양욱이 각각 선출되었다. 2월 8일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로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당을 장악한 동시에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행정부를 장악하게 된다.[92]

공산당내의 주도권을 장악한 김일성은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으로 반씩 구성하여 출범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에 가담하였다. 이후 처음에는 민족주의 진영의 인사와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의 인사가 동등한 합작전략을 사용하였으나, 그러나 후에 점차 공산주의사회주의 진영 인사들의 가입으로 공산주의사회주의 수를 늘려 결국 그는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장악하고 이후 38선 이북 조선 다른 지역의 인민정치위원회들 역시 장악하였다.

초기에는 3·1 만세 운동부르주아들만의 투쟁으로 보았으나 3·1 만세 운동을 인민봉기로 재평가하기도 했다. 1946년 3월 1일 평양에서는 김일성 주관하에 《3. 1 인민봉기 27돐 경축대회》가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를 파탄시키려는 테러리스트들에 의하여 주석단 가까이에서 수류탄이 터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93] 그러나 김일성은 재빨리 단상에서 피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김정숙은 행사가 끝난 후 경위대자동총소대원들에게 경호의 허술함을 지적하였다.[93]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3월부터 북조선공산당으로 개칭되었다.[94][95] 1946년 3월 김일성은 북조선로동당 당수에 취임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서울조선공산당에 보고를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이때부터 남조선로동당과 당대 당의 관계로 대하게 되었다.

북조선 임시정부 수립 준비[편집]

46년 6월 14일 김일성은 민주주의민족전선 북조선 지부 산하 정당, 사회단체 열성자대회를 소집하고 조선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입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이승만, 김구, 한민당은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96] 1946년 11월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가 있었다. 이때 월남했던 반공세력이 일부다시 월북하여 선거방해를 도모하였다.[97] 김일성은 이를 이승만김구가 배후에서 조종한 짓이라고 선언했다. 심지어 이들의 방해로 선전대원 몇 명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선거가 비민주적이다”, “승려들과 목사들은 선거하지 말라”, “공동후보가 아니라 자유경쟁” 등으로 선거에 비판적이었고, 유권자들에게 선거에서 찬성하면 흑함에 넣으라는 흑함운동을 하기도 하였다.[97] 이들에 대하여 김일성은 인민의 원수이며 반동파들에게 매수되어 그들의 간첩배가 된 세력으로 몰았다. 김일성은 선거기간에 생산기관의 방화, 운수부분에서 충돌사건, 주요 인사의 암살미수사건 등이 반동세력의 반대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였고, 나아가서 북한에서 일어난 방화를 이승만김구가 파견한 방화단으로 규정하였다.[97]

38선 이북에 대한 소련의 수탈과 김일성의 협조[편집]

1945년 일본의 항복 뒤 소련군은 38선 이북에 진주하였는데, 소련의 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던 김일성은 소련군의 비행에 대해 방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실제로, 소련군은 북한여성에 대한 유린, 상인들에 대한 수탈을 수차례 자행했으며,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양호단과 같은 자위 단체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소련군은 일본과 치른 전쟁에 대한 배상의 일환으로, 수력 발전소 시설, 공장시설, 쌀 농사의 1/4 를 공출하는 등 심각한 경제 수탈을 저질렀으며, 이에 대한 결과로 38선 이북에서 수만명의 실향민이 월남하기도 하였다. 김일성이 소련군의 불합리한 처사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남북협상 주도[편집]

1948년 4월 방북 직전 38선에서의 김구와 일행
박헌영과 이야기하고 있는 김일성

1948년 1월 김구, 김규식과 남북협상을 제의하였고, 김일성은 이를 수락했다. 1948년 2월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을 정규군인 조선인민군으로 발전시켰다.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에 참여하고 총사령관은 최용건을 추대했지만 실질적인 최고 통수권자는 김일성이었다.

1948년 2월 평양 중앙광장에서 국기를 태극기에서 인공기로 교체하는 교체식에 참석하였다.

4월 김구, 김규식은 수행원들을 동반하고 38선을 넘어 평양에 방문하였다. 최고지도자연석회의를 주관하고 김두봉과 함께 김구, 김규식과 4김회담을 하였다. 김규식은 회의에 불참하려고 5개 조항의 조건을 제시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모두 수락한다고 즉시 답변을 보냈다. 5월 김구김규식은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갔다. 김구, 김규식 등을 만나, 평양직할시 쑥섬(강나도)에서 남북연석회의를 열었고 4김회담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서로의 주장이 상이하여 결국 회의는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김일성이 김구, 김규식에게 남한에서 먼저 정부를 수립하더라도 정부 수립은 하지 않겠음을 다짐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48년 2월 이미 인민군을 창건하여 사실상 정부수립 의사를 굳힌 뒤였다. 이후 1948년 9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김구, 김규식에게 2차 남북협상과 최고지도자회의를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박헌영, 홍명희 등과 별도로 2차 최고지도자회의를 개최했다.

1994년에 소련군정의 군사정치위원이었던 레베데프 (Nikolai Lebedev, 1901 – 1992) 소장이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이 공개되면서 1948년의 남북정치협상은 스티코프와 레베데프등 소련군정 핵심인사들이 주도한 치밀한 정치공작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98]

연석회의에 참석한 남측 인사 226명 중 홍명희등 70여 명이 평양에 잔류했다는 사실은 연석회의 참석자의 약 3분의 1이 북한의 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하기 위해 남북협상을 주장한 자들이었음을 시사한다.[99] 방북한 김구와 김규식은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편집]

인민공화국 내각 총리 시절[편집]

사회주의 정부 수립[편집]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김일성 (맨 앞줄 가운데), 좌우로 최용건, 박헌영홍명희가 서 있고, 뒷줄 오른쪽 두 번째에는 김원봉이 서 있다.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내각 수상에 선출되었고, 부수상 박헌영 등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100][101] 국가강령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강령'을 발표한다. 이 강령의 내용은 남녀평등과 선거권 실시, 무상교육제도 실시와 무상의료제도 실시, 친일파·지주 청산과 토지개혁 실시, 자원의 공동 생산과 공동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1949년 3월 박헌영소련을 방문, 소련 최고인민회의를 참관하고 돌아왔다. 3월 5일, 스탈린과 회담하여, 김일성은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대한민국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대한민국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102] 1949년 남북 조선로동당을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을 결성하여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49년 6월 3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들의 합동전원회의를 소집하고, 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선거되었다. 8월 12일, 스티코프 북조선 주재 소련대사를 면담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북조선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조선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103]

공화국 정부 수립시 친일파 등용 논란[편집]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친일파를 강력하게 숙청하였음을 공언하였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에서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친일파 청산이 훨씬 더 잘 이루어졌지만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김일성은 민족적 양심세력이거나 과거를 뉘우친 자들은 설령 반공주의자라고 해도 동포애로 포용하려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에서 기용한 친일인사로는 그의 동생 김영주관동군에서 통역으로 복무하였고, 장헌근 사법부장은 일제 중추원 참의, 강량욱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은 일제하 도의원, 남로당 2인자 리승엽은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정국은 문화선전성 부부상은 일제의 밀정, 김정제 민족보위성 부상은 일제 시대 관료, 조일명 문화선전성 부상의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경력 등을 친일인사[104] 로 지적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친일 논란 인사들에 대한 지위가 너무나 보잘것없고, 그 친일 행적중 대화숙의 경우에는 변절자도 포함되었지만, 반일 명단을 분류해놓은 상태이기도 하기때문에 명확한 친일이라고 행하기도 힘든것도 사실이다. 더군다나 글의 근거가 정말 신빙성이 없는 조갑제만의 뜬금없는 글에서 링크 된것이기 때문에 이 친일파 등용 논란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 부분에 대해 동아일보 [주성하] 기자는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105]

북한은 오늘날에도 최고 권력자의 말 한 마디로 고위 관료에 대한 공개 총살이 일상적으로 진행되는 나라로 혼란기였던 해방 당시에 정상적인 입법과 법집행으로 친일청산이 이루어졌다고 믿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다. 김일성은 소련군 무력을 등에 업고 공식적인 정부 수립이전 1945년 해방 직후부터 최고 권력자 행세를 하며 정치적 필요에 의해 여러 세력들을 자의적으로 처단하면서 친일 청산이란 명분을 가져다 붙였을 뿐이다. 반면에 남한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야 친일청산 문제를 다룰 수 있었지만, 행위 자체가 국가가 생기기도 이전에 발생한 것으로 소급입법으로 처벌한다는 것이 법적으로도 논란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반민특위 법안이 국회에 통과되자 법무장관이 대통령에게 위헌을 문제삼아 거부권 행사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하여 미흡하나마 정상적인 입법과 수사 및 재판을 거쳐 다소간의 청산이 이루어 졌다.

북한이 자랑하는 철저한 친일청산의 내막은 전혀 다르다.

북한을 대표하는 작가 양성기관인 김형직사범대 출신으로 1999년 월남한 탈북 작가 최진이는 북한의 친일청산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해방이후 전 국민의 숙원인 이 주제를 어떻게 다루어 내는가 하는 문제는 정치가로서의 승패가 달린 관건적 안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떠오르던 많은 정치인사들 중 누구보다 정치 감각이 탁월했던 김일성은 이를 자기 권력기반 형성에 완벽하게 이용하였다. 그 대표적 방법이 인구 70 %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업사회에서 일제시기 땅마지기나 가지고 있던 자들을 우선 처벌하는 일이었다. 3천 평 이상 소유한 자는 지주, 천오백 평부터는 부농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땅을 무상 몰수하는 것과 동시에 본인들은 전부 타고장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의 개인적 사정을 알 바 없는 낯선 고장 사람들은 국가가 ‘친일주구’ ‘역적’이란 딱지를 붙여놓은 추방자들을 심판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 심판대에 오른 사람들은 피비린내를 맡기 전에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군중 히스테리의 제물로 고스란히 바쳐졌다. 군중의 열기가 고조되면 될수록 김일성의 정치적 카리스마는 급상승하였다. 김일성은 북한인들을 ‘적대계급’ 증오사상으로 자극시킬 때 그것이 가져올 반사작용의 효과를 알았다. 농민들에게 땅을 무상으로 분배해 준 자신에 대한 숭배열이었다. 김일성이 무상 분배한 땅은 ‘국가’의 이름하에 곧 압수될 정치 미끼일 뿐이었다. 농민들은 얼마안가 나라에 땅을 몰수당하고 ‘사회주의’의 미명하에 지주의 머슴에서 수령의 노예로 신분이동을 하였다.”

북한의 철저한 친일청산이란 소비에트(soviet)화를 합리화시키고 나아가서 북한을 공산주의 체제로 재편하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가혹한 전체주의 공산혁명에 다름 아니었다.[106]

북한 전문가인 브라이언 마이어스 부산 동서대 교수는 독일의 튀빙겐 대학에서 북한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김일성 치하의 문화에 대한 개척적인 연구라 할 만한 『한설야와 북한문학(Han Sorya and North Korean Literature)』을 출간한 바 있는데, 북한의 친일 청산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북한에 친일파가 없었다고 남한 좌파와 미국의 역사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해방 후 평양으로 이주한 거의 모든 지식인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일제와 협력한 사람들이었다. 소설가 김사량(金史良, 1914~1950)처럼 특히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몇몇 인물들은 사실상 서울에서 쫓겨났고,[107] 북쪽은 그런 협력자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1981년에 북한에서 발행된 한 역사책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 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테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오랜 인테리들의 혁명성과 애국적 열의를 굳게 믿으시고 그들을 새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 주시었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김일성 형제도 중국에서 일본군의 통역관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08]

“북한은 이념적으로 공산주의 중국이나 동유럽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적대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에 더 가깝다. 북한 정권은 그동안 남한의 이승만 정권을 가리켜 친일파를 숙청하지 않은 친일정권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김일성 치하의 북한문화를 연구하면서 확인했다. 김일성은 친일파를 숙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은 이승만 정권보다 친일 인텔리를 환영했고 그들에게 관대했다. 김일성은 친일 인텔리에게 정부의 고위직을 주고 그들로 하여금 우상화작업을 하게 했다. 일제가 해왔던 것처럼 히로히토와 같은 우상화 작업을 해나갔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상화에 동원한 수사(修辭)를 그대로 빌려왔다.”[109]

북한은 친일파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일본인 기술자들을 산업 시설 가동을 위해 귀국도 못하게 막고 고임금을 주면서 고용하였다. 오원철은 북한 당국이 일본인 기술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생명과 재산을 보장한다는 신분증을 발부하고, 생필품과 주택을 포함해 최고 대우를 해주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렇듯, 북한에서는 ‘친일파’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본인 기술자들도 활용하였다. 해방 후 북한은 거대한 공장을 자체적으로 가동하기에는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일본인 기술자들의 귀국마저 중지시키고 강제로 일을 하게 했다. 그리고 북한 기술자들로 하여금 기술 이전을 받도록 조치했다.

“이로 인해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868명이나 되었고 1947년에는 405명이 되었다. … 일본인 기술자에게는 월 4,500~5,000원을 지급했다.

당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김일성)이 4,000원, 동 인민위원회 과장급이 1,500원, 일반 사무원이 800~1,000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좋은 대우를 해 주었는가. … 흥남공장에서는 일본인 기술자 콘키치(昆吉朗)를 ‘노력영웅’으로 표창까지 했다.”[110]

북한 정권에도 상당수 친일파가 참여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111]

남한에는 반민특위의 법절차에 따른 친일파에 대한 수사와 재판 기록이 남아 있지만[112], 북한은 친일파 청산을 철저히 했다는 말만 무성할 뿐 이에 대한 아무 기록도 없다.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자의적으로 진행된 일들에 대한 기록이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철저한 친일파 청산은 무력을 동원하여 자행된 공산화 과정에서의 숱한 인권유린을 정당화 시키고 남한에 대한 정치 공세를 펼치기 위한 공허한 수사일 뿐이다.

한국전쟁 직전[편집]
한국 전쟁 무렵

1949년 대한민국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김일성은 고심 끝에 무력통일 계획을 세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지시문이 김일성에게 전달되었다.(1949년 9월 24일)[113]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114][115][116] 1월 30일, 스탈린이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117] 3월 20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하였다.[118]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조선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119]

5월 12일, 스티코프가 김일성 및 박헌영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혔다. “소련에서 돌아온 후 이두연 주베이징대사로부터 마오쩌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마오는 ‘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와 면담하기 위해 5월 13일 베이징으로 출발할 것이다. 마오는 내가 대남 군사행동을 곧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마오에게 북한으로 이양되는 중국군 소속의 조선인 사단을 위해 중국이 노획한 일본 및 미국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50년 6월께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 작전이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120]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121] 5월 15일, 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 ·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은 북조선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대한민국쪽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소련은 미국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122] 5월 29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 회담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조선에 도착했음을 통보하였다. 이 통보에서, 또한,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지도부가 승인하였고, 군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북조선 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6월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6월 8~10일께 집결지역으로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이이라고 보고되었으며, 김일성과 면담 뒤 스티코프는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123] 이와 같이, 김일성은 스탈린을 상대로 끈질기게 남침을 허락해달라고 48회나 요구했고 스탈린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거절했다. 스탈린은 48번씩이나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김일성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남침을 허락하고 만다.[124] 이 때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통제관으로 옹립한 것을 후회했다.

1950년 3월에는 박헌영 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와 허가이 조선노동당 책임비서와 함께 소련으로 물자 원조와 무기 공급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했으며,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했다. 전쟁 발발에서 김일성의 주동적인 책임은 고르바초프의 방한을 계기로 공개된 구 소련의 외교문서를 통해 증명되었으며, 국제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125]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3년 동안의 한국 전쟁 시기 교전 일방인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이끌었다.

한국 전쟁 발발[편집]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을 공격하면서 한국전쟁(6.25)이 발발했다. 한국 전쟁 3일만에 조선인민군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6월말에 김일성은 서울에 입성했고 시민들은 그를 맞이하였다.[126] 김일성은 박헌영의 최측근이자 남로당원인 리승엽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가 곧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서울시장직을 겸하게 했다.

조선인민군은 전쟁 1개월 만에 대한민국의 경기도, 강원도충청북도를 점령한 뒤, 대구근처 낙동강 인근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한국군과 유엔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며 북상을 시작하자 인민군은 지속적으로 패배하였고 결국 철수하게 된다.

1950년 9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의 장례식장에서 (왼쪽 뒷편이 김일성, 오른쪽 앞은 최용건)

1950년 9월, 조선 인민군이 패주하고 북쪽으로 밀려나자 김일성과 박헌영은 각각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조선인민군총정치국장의 명의로 인민군에게 현지사수를 명령하였으나, 인민군의 패주는 계속되었다.[127] 인민군의 사기가 저하되면서 인민군의 패주와 탈영은 계속되었다. 1950년 11월 강건전쟁 중 전사하자 김일성은 박헌영 등과 직접 강건의 장례식을 주관하고 시신을 운구하였다.

한국 전쟁 중에도 전쟁에서 후퇴할 때 전쟁의 운용을 놓고 박헌영과 갈등하였다.[128] 10월 8일 전쟁에서 후퇴할 때 '산으로 들어가 유격작전을 하자.'는 김일성의 주장에 박헌영은 철수론을 주장하며 반대하며 다투는 모습이 중국 대사가 모란봉의 지하 집무실에 방문했을 때에도 목격되었다고 한다.[128]

전쟁 시 김일성의 결단과 소련의 지원[편집]
한국 전쟁 기념화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개된 문서와, 흐루쇼프 전 소련 서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소련은 직접적인 대규모의 군사 지원은 보류하기로 하였고, 그 대신 공군 조종사와 교관 등 비교적 간접적인 지원을 하게 되었다.(스탈린은 48회에 이르는 김일성의 요구를 꺾을 수 없어 허락한 것으로 보임[124]) 결정적인 군사 지원은 마오쩌둥이 하게 되었고, 이 약조는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세로 나타나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중화인민공화국의 직간접적 지원을 약속받은 김일성은 빠른 시간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거라 판단, 6월 25일 새벽 대한민국을 공격했지만, 미군과 UN군의 참전으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1950년 10월 12일에 평양에서 철수하면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했다. 김일성은 덕천을 거쳐, 임시수도인 강계까지 밀리는 일이 생겼으나, 중공군의 원조에 힘입어 12월 6일에 평양을 탈환했다. [2]

전전 정적 숙청 작업[편집]

이정 박헌영 (부총리 겸 외무성상인 그는 김일성의 최대의 경쟁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한국 전쟁을 통한 과업성취 실패로 김일성은 궁지에 몰렸으며, 전쟁에 실패한 책임을 부총리인 박헌영에게 전가시켰다.[129] 이후 김일성은 한국 전쟁의 책임을 정적들에게 돌림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자신의 확고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전쟁 이전인 1945년부터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북한 체제 협력을 거부하던 민족주의자 조만식평양시 고려호텔에 감금한 뒤 1950년 10월 처형하였고[130] 1952년 연안파인 김무정은 병사했고, 1953년 같은 소련파의 라이벌이던 허가이는 자살했다. 1951년에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인 허헌이 대동강에서 익사했는데, 그의 사망도 김일성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전후 복구 시기와 전후 정적 숙청 작업[편집]

약산 김원봉 (최고인민회의 상임부위원장이자 노동상, 검열상인 그 역시 김일성의 최대의 경쟁자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1953년 2월 8일 인민군 창건 5주년에 김일성은 공화국 최초의 조선인민군 원수가 되어 칭호는 '김일성 장군'에서 '김일성 원수'로 불리게 되었고, 1953년 7월 28일 공화국 영웅 칭호와 국기훈장 제일급을 수여받았다.[131] 그때부터 박헌영남로당파, 김두봉연안파, 허가이소련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안정시켰다. 1958년 3월에 열린 전국청년공산주의건설자대회에 참관, 청년들은 자기 손으로 밝은 새 시대, 새로운 공산주의시대를 개척해야 한다고 하며 모든 청년들이 자기의 열정과 지혜와 능력을 공산주의건설에 바칠것을 주장하였다.[132]

1958년 11월 약산 김원봉을 차례로 숙청, 살해하였다. 1953년부터는 박헌영의 구 남조선로동당 계열에게 한국 전쟁 패전 누명과 미국 간첩들과 교신했다는 죄목으로 임화·이강국 등을 살해하고 남로당계를 체포, 심문, 고문하였으며 1955년 3월 박헌영을 체포, 반당종파행위 등의 죄목으로 외무상과 부총리 등 공직에서 해임시킨 뒤 수감, 1955년에서 1956년사이에 처형하였다.

박헌영과 남로당 계열의 숙청의 발판을 마련한 조선로동당제5차 전원회의을 계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모든 정치세력이 공식적으로 김일성을 수령으로 부르게 되었다.[133] 이종석은 '결국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비상상황 속에서 1인권력집중이 가속화되면서 당내에서 김일성에 대한 수령 호칭이 일반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133] 그러나 김일성의 권력기반이 강화된 것은 아니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중화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을 견제, 감시했다. 마오쩌둥의 지원을 받는 친중파와 그외 친소파 그룹, 스탈린 사후 스탈린에 비판적이었던 소련의 김일성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거나 소극적으로 하면서 김일성과 다른 정파 사이에 긴장감과 견제가 지속되었다.

1956년 북한을 방문한 동독 외교관들과의 만찬석상에서

한편 전후 김일성을 향한 '경애하는 수령'이라는 호칭은 더욱 일반화되어 조선인민군이나 조선로동당을 넘어서 다른 정당, 종교단체에 이르기까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 전사회적으로 통용되었다.[133] 이와 함께 김일성의 혁명활동에 대한 강연회가 개최되는 등 그에 대한 개인숭배 현상도 계속되었다.[133]

주체사상 확립[편집]

1953년 한국 전쟁 휴전 이후 연안파는 전쟁 책임론을 주장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다. 김일성은 남로당 계열을 숙청한 뒤 연안파소련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 1955년 이후 연안파에 대한 숙청은 서서히 진행되어 1956년 주영하, 내무성 부상 이필규 등이 처형되었고, 문화선전부 부상 정률(정상진) 등은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한편 중국계였던 최창익은 김일성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는데, 이를 8월 종파사건이라 한다. 김일성이 소련을 방문할 무렵인 8월 30일에 열린 노동당 중앙위 8월 전원회의에서 연안파 최창익과 소련파 박창옥 등이 김일성의 독재화를 주장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귀국후 김일성은 1957년 최창익을 반당종파행위로 숙청하였고 김일성의 권력집중화와 일당독재를 비판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두봉은 1964년 숙청당했다.

김정일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1967년 박금철, 이효순 등 빨치산 계열의 갑산파마저 숙청하여, 김일성 권력에 도전할만한 세력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1958년 당시 중국을 방문, 송경령과 오찬중인 김일성

1958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송경령 등과 면담하였다.

1960년대 초반부터 주체사상을 국가이념으로 정착시키며 중화인민공화국·소련에 대한 자주노선을 선언하였다. 한국 전쟁으로 대규모의 산업 시설과 교통 시설, 그리고 복지 시설이 모두 파괴되자 산업 시설들을 복원하기 위해 전후복구사업인 천리마운동을 1957년에 처음으로 실시했으며, 항운교통의 중심인 남포항을 현대적인 시설들을 갖추고, 통제경제를 받아들였다. 그는 제2세계 간 외교에서 크게 벗어나서 제1세계와 제3세계 국가 간의 폭넓은 외교활동을 실시하였으며, 국민들의 계몽을 통한 문맹퇴치운동을 실시, 평양직할시를 공식적인 수도로 지정할 것(실제 지정은 1972년이다. →평양직할시 연혁)을 결정하였다.

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4기 14차전원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선출되었다.

천리마 운동[편집]

1960년 이후 연안파 일부와 국내파 일부를 제외한 정적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김일성은 휴전 이후의 황폐화된 기간산업과 경제 성장을 고심했다. 자본주의(資本主義)의 모순을 지적, 비판하며 자본주의체제는 비인간성과 자체모순에 의해 자멸하고 결국 사회주의(社會主義)로 전환된다는 신념 하에, 인류 역사는 물질과 계급에 의해 진행된다는 이념을 자신의 신념을 확립, 공산주의 체재를 구축하였다. 또한 전후복구 뒤 경제살리기의 목적으로 천리마 운동을 실시하였다. 본래 1956년의 김일성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작된 것으로[134] 김일성의 권력강화에 반대하는 소련파, 연안파 등의 반발과 비판으로 1957년부터 시작될 예정인 경제5개년계획을 앞두고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파를 숙청한 뒤 자본·물자·기술 등이 부족한 정국에서 내부 역량과 인민의 자발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했다고 판단, 이를 위한 집단적 증산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1960년 12월 전원회의 직후 김일성은 강선제강소를 방문하여 생산력 증대를 위해 인민에게 직접 자력갱생의지를 호소하면서, '천리마를 탄 기세로 달리자'는 구호를 선포하여 주민들의 생산 증대의욕을 촉구하면서 확산되었다.[134]

4·19 전후대응과 통일론[편집]

1960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부는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분명히 이승만의 사퇴를 예견하였다.[135] 4월 21일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를 언급하며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을 그 후계자로 예상하였다.[135] 그러나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135] 이어 김일성은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연령상 도저히 안되는 상태인 바, 특히 최근들어 권위를 엄청나게 훼손당하였다고 말했다.[135]

그를 교체해야 한다. 그러나 충분한 권위와 특색을 지닌 인물이 없다. 또 다시 부통령이자 민주당 최고위원인 가톨릭신자 장면도 적합하지 않다. 그나마 권위를 누리고 있었던 조봉암 진보당 당수은 평화적 조국통일이라는 당 강령을 성급하게 공표하는 바람에 이승만의 명령으로 체포돼 지난해 처형되고 말았다. 부르조아 민주당 최고위원인 조병옥1960년 3월 15일 대선후보였으나 선거를 며칠 앞두고 급사했다. 현재로서는 남조선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이다. 그러나 그는 친일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은 그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망설이고 있다.[135]

한편 그는 국제부장 박용국을 시켜 주한미군만 철수되면 평화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며 설득을 하게 하기도 했다.

1960년 여름 연방제통일론을 발표하였으나 장면 내각에 의해 거부당하고 장면내각은 외무부를 통해 반박하였다. 5.16 군사 쿠테타 이후 1963년 비밀리에 대한민국대통령 박정희에게 밀사 황태성을 보냈으나 황태성은 중앙정보부에 의해 살해되었고, 68년 두 번째 밀사로 부총리 박성철을 내려보냈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는 두 번째 밀사에 대한 응답으로 1971년부터 이산가족 명부확인과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되었으며, 박정희이후락을 평양에 파견하여 남북협상을 시도하였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마오쩌둥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당대표 및 북조선의 최용건이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지역 혁명에 대해 논의"에서 대한민국에서 무장 게릴라 봉기를 일으키라고 강요했다.(1965년 3월) 이에 대해서, 김일성은 "남조선에는 해안이 많고, 산이 벌거벗었으며, 교통이 비교적 발달해 있는 데다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서 대중 속에 '비공연(非公然) 조직'을 만들어 대중운동을 전개해야한다. 이러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소모일뿐, 승리는 어렵다"는 의견이었다.[136]

197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루마니아 국가주석 차우셰스쿠를 영접하는 김일성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무장공작원을 대한민국으로 파견했다. 1·21 사태 당시 조선인민군 일부는 휴전선 근방에서 검거되었지만 일부는 서울까지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긴장한 박정희대한민국 국군의 의무복무 기간을 6개월 연장시켰고, 향토 예비군을 강화하였다.

남조선에서 미국 놈들을 몰아내야 하겠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미국놈들과 다시 한 번 꼭 벌여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전쟁 준비를 다그쳐야 합니다. 동무들은 하루빨리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137]

그러나 김일성은 한국 전쟁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68년 11월 과학원 개발팀과의 담화 통일 실패 요인을 미국군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또한, 1968년 자신의 생일인 4월 15일을 북한의 최대 명절로 지정하는 등, 우상화 작업에도 본격적으로 착수를 하였다.[138]

국가주석 추대 이후[편집]

헌법개정과 주석 취임 (1970 ~ 1972)[편집]

주석 취임 초기[편집]

김일성의 초상화.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통해 자주, 자립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1970년에 진행된 조선로동당 제5차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에 재선출되었다. 1971년 8월 6일 캄보디아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환영하는 평양 대규모 집회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집권여당인 민주공화당을 포함한 남조선의 전(全) 정당, 사회단체, 개별인사들과 만날 용의가 있다."라고 천명하였다.

1972년 5월에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원칙을 발표하였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 성명을 통해 남북 문제를 논의하였으며, 1972년 헌법 개정으로 국가 권력 구조를 국가주석 중심 체제로 바꾼 다음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박정희 정권 붕괴 이후에도 껄끄러운 관계 가운데 대한민국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구호물자와 쌀을 지원하기도 했다. 1984년 수해 당시에는 쌀 5만 석(약 7800t), 옷감 50만m, 시멘트 10만t의 대규모 수해 구호물자를 대한민국에 지원하였고, 전두환은 이를 수용하였다.

대한민국과의 통일 교섭[편집]

닉슨독트린이후 찾아온 미·소 간의 데탕트는 조선반도에도 영향을 끼쳤다. 1972년 5월 이후락은 평양의 김일성 집무실에서 한 시간 남짓 비밀회담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1968년 김신조 일당의 1·21 사건과 관련,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다. 그때 나도 몰랐다. 우리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들이 한 짓이다. 보위부 참모장, 정찰국장 다 철직(撤織)시켰다[139] 고 주장했다. 또 6·25 얘기가 나오자 “과거는 과거고…. 다시는 남침 않겠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139]

국가주석 취임 직후 평화통일론을 다시 선언하고, 박정희에게 박성철 등을 파견하였다. 그의 평화통일 제안을 전면 거부하던 이승만, 장면, 윤보선 등과는 달리 박정희가 협상 제안을 일부 수용함에 따라 매년 판문점에서 남북고위급 회담 및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였다.

7.4 남북공동성명의 발표에 일부 지식인들은 환영하였으며, 이후 대한민국 측에서 제의한 주기적인 이산가족 상봉을 승인하기도 했다. 1972년 여름 부산강원도 영월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특별히 구호물자로 쌀 3만석과 약간의 옷감을 보내왔고, 박정희 정권은 이를 받았다. 그러나 박정희대한민국 내부의 민주화 요구, 미국의 인권 문제 제기와 미군철수론, 영국과 프랑스의 유신체제에 대한 반감, 박정희의 핵개발에 대한 외교적 마찰 등의 문제에 시달리면서 남북교섭은 별 진전을 못보고 흐지부지 되었다.

권력기반 강화 (1972 ~ 1980)[편집]

1960년대 말부터 추진하던 박정희의 핵개발 추진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군비를 증강, 본격 핵미사일 개발 사업을 추진한다. 72년 12월 15일에 채택된 새로운 사회주의헌법에 따라 그는 국가수반인 공화국 국가주석국방위원회 위원장(겸임)에 취임하였다. 그와 동시에 매년 남북대화를 진행하였다.

김일성은 국가주석 취임 직후 평화통일론을 주창하고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에게 박성철 등을 사절로 파송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군비를 증강하고 핵미사일 개발 사업을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권 역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려던 카터 정부가 등장하자 군비를 증강하고 자체적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자 김일성은 조문단 파견을 계획하기도 했으나, 대한민국에서의 권력이양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12.12 사태전두환신군부가 집권하자 김일성은 남조선에서 쿠데타를 일어났으니 인민무력부는 신호만 떨어지면 즉각 출동할 수 있도록 24시간 가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대한민국의 신군부는 이를 남침책동으로 규정했다. 당시 미국은 12.12 사태 직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 가능성을 50% 정도로 판단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도 했다. 1980년 10월에 있은 당 제6차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재선되었다.

1980년 ~ 1988년[편집]

1984년 동독을 방문한 김일성
1984년 6월 1일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공개 기자회견중인 김일성
1984년 6월 1일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공개 기자회견중인 김일성
폴란드 방문 중의 김일성

1980년 5월 동유럽 순방을 떠났으며, 유고 대통령 티토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루마니아를 방문하여 5월10일 차우셰스쿠와 회담을 가졌다..

1980년 이후 남북평화통일에 대한 방안 모색을 내각과 인민위원회에 지시했고, 1980년 10월 공식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에 남북통일 방안으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제안했다. 대한민국전두환 대통령은 집권 초기 정권 안정을 위해 1982년 북한과 ‘잠정협정’을 맺고 비정치적, 비군사적 교류부터 점진적으로 하자는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의했다.[140]

1984년 9월초 남쪽에 발생한 홍수로 전국에서 190여명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도 1천300억원이 넘는 수재가 발생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9월8일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7천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을 지원했다. 식량지원 이후 남북 양측은 적십자회담 본회담을 가진 데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실현시켰고 남북간 최초의 경제회담도 시작했다.[141]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은 김일성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김일성 역시 같은해 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특파해 전두환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142]

1987년 6월 6월 항쟁이 발생하자 그는 '온 민족이 남조선인민들의 통일애국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하도록 지시하였다.[143] 6월 항쟁으로 대한민국에서 군사정권이 붕괴되고 1988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서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올림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참석 여부 논란이 있었다.

남측 인사들과의 교섭 (1988 ~ 1990)[편집]

1988년 8월 대한민국평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경원이 비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 2박 3일간 국가주석 김일성 및 부총리 허담 등과 회담하고 남하하였다.[144] 홀로 방북해 김일성을 면담한 서경원은 대한민국 안기부로부터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145] 대한민국에서는 박철언을 비밀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파견하였다. 박철언은 그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에서 1988년 11월 방북 당시 김일성을 면담하지 못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는 책에서 '사전에 남북 핫라인을 통해 비밀스러운 방북 사실을 북측에 알렸는데, 미국의 도청 가능성을 우려해 ‘대북 밀사’란 직접적인 말을 쓰지 못해 미스커뮤니케이션이 있었다.[139]' 김일성 주석은 지방출장을 갔었고, 면담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89년 1월 1일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을 제의하며 남쪽의 각 정당 당수와 사회단체 대표, 추기경 김수환, 민중·노동운동백기완, 목사 문익환평양으로 초청했다.[146] 3월 25일 목사 문익환이 방북, 그와 두 차례 회담을 하고 4월 10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공동성명을 발표했다.[146] 6월 21일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임수경일본 도쿄를 거쳐서 방북, 그와 면담하였다. 그러나 문익환과 임수경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방북한 것이었기에,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노태우는 방북하였거나 협상에 참가한 문익환, 임수경 등을 체포, 구속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말기[편집]

국가주석 5선 (1990 ~ 1994)[편집]

김일성은 1990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재선출되었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에도 재추대되었다. 동시에 최고인민회의로부터 의회의장격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수위(首位)에 추대되었다. 1992년 4월 13일 인민군 대원수 칭호를 받았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및 소련, 중국의 정치인들로부터 회고록 집필 제의가 들어왔다. 김일성은 처음에 사양했으나 그 후 마음을 바꿔 회고록 발간을 추진한다. 회고록 편집과 외교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하여, 1992년에 그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출판되어 나온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김일성은 공산주의의 한계를 느끼게 되었고, 자신이 죽기 전에 대한민국과의 통일이 이루어지도록 협상 추진을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부에서는 공산권 국가 붕괴의 파급효과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 위기를 타개하려 했다.

개혁 개방 정책[편집]

1990년대 초부터 김일성은 무역시장을 활성화하려 하였다. 김일성은 중국과의 교역을 대폭 확대시켜켰으며,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통상, 교역을 시도하였다. 1992년무렵부터는 미국일본의 영화와 음악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1992년 개방 의사를 공식 표명하고 미국, 유럽 등과 적극적인 외교협상을 추진한다. 나진,선봉에 무역지구를 열어 일본, 미국과의 무역을 허용하였고, 신의주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몽골, 중앙아시아와의 무역을 공식 허용하였다. 1993년에는 사회주의 헌법의 국가주석의 국방위원장 겸임조항 삭제를 지시하고, 국방위원장직을 김정일에게 이양하였다. 1993년 4월에 평화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의 10대강령을 제시하였다. 이후 김일성은 대한민국김영삼과 회동을 약속하였다. 한편 1990년대 초반 그는 노벨 평화상의 예비 후보로도 언급되기도 했다.

말년[편집]

1994년 초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기도 했고, 심근경색 및 목뒤의 물혹이 심해져서 입원하기도 했다. 김영삼과의 회담은 1994년 초로 예정하였으나 김일성의 병세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1994년 6월 평양에서 전 미국 대통령 카터의 방문을 받고, 핵문제와 관련한 조미협상을 진행하였다.

1994년 7월묘향산으로 휴양을 다녀왔다.

미국의 전 대통령 카터를 면담할 때 남북정상회담을 제안, 회담 준비가 진행되던 가운데 7월 8일 새벽 2시에 평양 집무실에서 83세의 나이로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147] 사망하기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도부에게 유언을 남겼는데, 이 '유언'은 유훈 통치라는 이름으로 지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체제 및 대한민국의 대북정책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공식 사망 장소는 평양 주석집무실이지만, 묘향산 향산초대소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이 제기된 배경에는 김일성이 요양을 하려 향산초대소에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의 아들 김정일이 향산초대소를 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 성사 직전의 상황과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하여 김정일에 의한 암살 내지는 사망 방관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아직도 그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이야기와 함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대남정책문제로 아들인 김정일과 갈등이 빚어서 그 스트레스로 사망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148] 그는 오전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16시간 이상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타고난 체력과 정신력으로 장시간 정무를 강행하였으나, 70대 이후 부터는 체력의 한계를 불러와 감기와 당뇨와 목 뒤의 물혹, 피부병 등의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고, 말년에는 간혹 졸도하기도 했다.

조선중앙방송평양방송 등 주요언론들은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김 주석이 “심장혈관과 동 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겹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 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돼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나운서들은 김일성의 사망 당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일성 동지께서 뜻하지 않게 서거하신 것은 우리 당과 혁명의 최대의 손실이며 온민족의 가장 큰 슬픔"이라 표현하였다.

사후[편집]

김일성 광장
평양 김일성 종합 경기장
평양 김일성 종합 경기장

1994년 7월 8일부터 7월 17일까지 애도기간이 있었고, 7월 19일 국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149] 김일성 사망 다음날인 9일 방송을 통해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김일성동상에 호상(護喪)을 선다는 소식이 보도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각 도, 시, 군들에서 간부들과 대학생들, 보위부와 안전부까지 동원되어 김일성동상 호상사업을 조직하기 시작했다.[15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당국은 처음에 ‘10일장’을 결정했으나, 3일을 연장해 결국 7월 20일에야 장례가 치러졌다. 각급 조직별로, 가족별로 생화를 준비해 김일성 동상을 찾아 애도를 표했으며, 동상이 없는 시골 에서는 김일성연구실에 있는 초상 앞에서라도 애도를 표시했다.[150]

1994년 7월 20일 김정일은 금수산의사당에 안치된 김일성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평양 시내를 한바퀴 돌고 다시 의사당에 안치하도록 조치했다. 이날 아침 평양시민들은 김일성의 영구차를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었다. 영구차가 지날 때마다 길가에 늘어선 군중들은 꿇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수령님, 수령님’하면서 통곡했다. 지방 주민들도 조직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TV시청을 통한 장례식에 참여하였다.[150]

추모 행사[편집]

만수산기념궁전

김일성이 사망한 뒤 평양에서는 대규모 추모 행사가 벌어진다. 이 추모 행사는 5년과 10년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김일성의 사망을 애도하기 위해 1997년평양 모란봉구역에 대형 추모탑을 세워놓고, 지방 도시에 1개씩 세웠다. 그리고 김일성이 태어난 날을 '태양절'이라고 부르도록 했으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강령을 통하여 "김일성 주석이 탄생한 1912년 4월 15일부터 '주체연호'를 사용한다."라고 했다.

김일성 동상

김일성이 생전에 말하기를 "만약 내가 죽는다면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묻히기를 간절히 바란다."라고 하였으나, 그의 유언과는 반대로 돌아갔다. 김일성의 주검은 방부 처리가 되어 금수산기념궁전에 있는 유리관에 안치되어 있다.


성격[편집]

김일성은 포악하고 잔인하여 마음에 안들면 무조건 숙청하였으며 잔혹하게 숙청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그가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동북인민혁명군이 부르던 것을 1993년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와 "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조모인 이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는 《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안북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의 내용은 국제친선전람관에 내부에 전시했다. 그리고 김정일의 50돌의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 시는 한문으로 지어졌고, 량강도 삼지연군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또한 그는 서예 활동에 대해서 적극 참여하였는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황해북도 개성시에 있으며, 주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려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조선의 종합대학중의 하나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특히 김일성은 평소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는 대한민국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읽었다고 한다. 1989년 대한민국의 소설가 황석영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했을 때, 김일성은 황석영이 쓴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을 벌이기도 했었다. 김일성 주석이 좋아했던 책은 역사책과 문학책이다.[151]

주석 재임기간 중[편집]

외교 관계[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루마니아와 짐바브웨 등의 일부 유럽과 아프리카의 독재 국가들과 돈독한 우호관계를 형성했다. 특히 김일성은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등 독재자과 의형제를 맺어 큰형이 되었다. 미국과의 관계는 한국 전쟁 이후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는 미국과도 회담을 하였고, 1992년부터는 개방정책을 추진하려하였다.

상훈[편집]

  • 1953년 7월 2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화국 영웅' 칭호 수여
  • 1953년 7월 2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훈장 제1급
  • '공화국 영웅' 칭호 3번 수상, '공화국 3중 영웅'

주요 저서[편집]

로작 김일성 선집 홍보 포스터

저서, 로작, 주요 로작이라고도 부른다.

  • 《김일성선집》 (1953년) - 상·하권
  • 《김일성저작집》 (1962년) - 전 3권
  • 《진보적민주주의에 대하여》
  • 《김일성저작선집》(1971년)
  • 《세기와 더불어》(1994년) - 전8권
  • 《김일성전집》(2012년) - 전 100권

논란과 의혹[편집]

김일성 진위 논쟁[편집]

그의 이력에 대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다른 나라의 역사관이 첨예하게 대립되는데,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으로서는 그의 이력에 대한 신화화가 주체사상의 수령론의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운동가들 중에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람이 여럿이며, 결코 김성주가 최초가 아니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김일성 가짜설은 대체로 부정되거나 비주류로 남은 상태이다.

미 군정은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이며,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 행세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성주가 1929∼1930년 만주와 조선 국경에서 활동하던 실제 김일성의 유격부대에 합류했으며, 실제 김일성이 55∼60세에 숨지자 명령 때문인지 자발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유명한 전사(戰士.김일성)'로 가장했다고 기술되어 있다.[152]

또 다른 주장은 오영진(吳泳鎭)의 《하나의 증언》, 이명영(李明英)의 《진위 김일성 열전》, 허동찬의 《김일성 평전》, 임은의 《북조선왕조성립비사》 등에 나타나 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해방직후 집회현장에 나타난 김성주가 너무 젊어서 평양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하며, 김일성 가짜설의 주요 근거로 내세운다. 또한 숙청당한 박금철의 증언과 남로당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해방당시 국민들이 귀국을 기다리던 유명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한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 1면 기사. 이날은 평양에 온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날이지만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이날 평양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기대했던 김일성 장군도 이 기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므로 김성주는 데뷔 첫날부터 가짜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이북의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유포한 사람들은 친일파나 일제의 고등계 형사 출신, 또는 한민당과 같은 우익단체의 간부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분단상황에서 이북의 김일성이 식민지 시기의 말기에 민족적 항일영웅으로 존경을 받은 김일성이라면 지극히 곤란한 위치에 처할 만한 사람들이었다.[153] 한홍구에 의하면 특히 가짜 김일성 설의 고전적 문헌인 이북의 <김일성 위조사>나 오영진의 <하나의 증언>이 한국전쟁 시기에 제작, 배포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153]

한홍구는 '가짜 김일성 설'의 유포에 기여한 사람이 박정희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가짜 김일성 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50년대에 이미 널리 퍼졌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좀더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전파되었다. 이승만의 경우 반민특위를 물리적으로 와해시키고 수많은 친일파를 등용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으로 삼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승만 본인을 친일파로 보지는 않았다.[153] 는 것이다. 이어 한홍구는 "그러나 5·16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하고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본이름을 갖고 관동군 중위로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은 박정희로서는 분단상황에서 이북과의 정통성 경쟁이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153]"는 것이다.

성공회대 한홍구 대학교수는 '이젠 '가짜 김일성 설'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어떻게 김일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무엇인지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고 평하였다.[153] ‘가짜 김일성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책에 《만주국군》이란 것이 있다. 이 책에는 1937년 11월 김일성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책을 조금 더 넘겨보면 죽은 줄 알았던 김일성이 다시 나타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니 전에 목을 벤 사람은 김씨 성을 가진 유격대 지도자일 뿐, 김일성은 건재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홍구는 이를 두고 학문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가짜설[153] 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은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유격전쟁은 백마를 탄 노장군이 나오는 세계는 아니었다[153]'고 반박하였다.

반면 김성주가 항일운동을 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는 서대숙(徐大肅) 등의 말에 따르면,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 직후 현상금이 1만 엔으로 오른 일(항일 단체의 위원장급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다.), 그밖에 항일 활동으로 소련으로부터 적기(赤旗) 훈장을 받은 일 등을 근거로 부정한다. 그만한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처우를 받았다고 근거로 보며, 소련 정부가 아직 새파란 나이의 젊은 김성주에게 훈장을 줄 정도면 그것은 소련도 인정할 만큼 그의 활동이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3차 조선공산당 대표였던 김철수(金綴洙)는 김일성이 가짜였다면 독촉(獨促) 회의 당시 내각 구성을 숙의하는 과정에서 그토록 어린 김일성을 군사위원장으로 천거할 수 있었겠느냐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반문했다.

김일성의 10촌으로 1994년 탈북한 강명도종편 채널A 방송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김일성은 김일성 장군의 이름과 업적을 가로챈 가짜라고 주장했다. 근거로 김일성이 해방후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자기 가족도 김성주가 김일성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154]

북한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라는 것은 근래에 발굴된 해방 직후부터 평양에 김일성이 등장하기 전 2개월간 김일성 이름이 나오는 기록들을 근거로 한다. 해방 이튿날인 8월 16일부터 서울과 전국 도처에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 수립되며, 대통령 이승만, 총리대신 김구, 육군대신 김일성(金日成), 외무대신 여운형, 기타 미정" 등의 내용이 든 출처불명의 벽보와 비라가 나돌았다.[155] [156] [157] 9월 6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55명 명단에도 이승만, 김구와 함께 김일성도 들어 있다.[158] 또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0월호에 발표된 대통령과 각료 적임자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군무부장 적임자로 김일성이 최다득표(309표 32%)를 하기도 했다.[159]

북한 김일성이 아직 소련군 88여단에 있거나, 평양에 왔더라도 아직 남한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시기에 이승만, 김구와 나란히 거명되던 이 김일성은 풍문으로 떠돌던 전설적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인 것을 당시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정관해(鄭觀海)의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에는 동진공화국 외무대신이 김일성이라는 소문을 기록하면서 "김일성군은 말타고 하루 500리를 달릴 수 있으며, 그 정예하기가 비할데 없다고 한다.[金日成軍, 一日能驅五百里, 其精銳無比云]"라 했다.[156]

또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는 해외의 독립운동 지사를 소개하는 연재기사에 이승만, 김구에 이어 5번째로 김일성을 소개하면서, 을지문덕, 이순신에 비견되는 유명한 장군이며, 일본군 장교 교육과정(일본 육사)을 이수했으나 독립운동에 나섰고, 그 부하가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조선 총독을 저격한 일도 있다고 하였다.[160] 실제로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저격한 사건이 1924년 5월 19일에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한 일이지만[161], 일반에서는 김일성 장군이 한 일로 소문이 나돌았다.[162] 당시는 1921년의 갑산군 함정포(含井浦) 사건 등 국경 근처에서 일어나는 어지간한 사건은 으례 김일성 장군의 소행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162] 이 기사는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37년 보천보 사건 때부터가 아니라 1920년대 초에도 이미 유명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평양에 온 33세의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했을 때 사람들이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보고 가짜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공개적으로 귀국하여 곧바로 활동을 시작한 이승만, 김구와 달리 김성주가 9월 19일 원산항으로 비밀리에 입북하여 한 달 가까이 잠행하며 민심을 살피다 10월 14일에야 공개석상에 등장한 것도 본인이나 소련군정이 그가 국내에서 사실상 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대중앞에 지도자로 나서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소련군정은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사실상 무명인사였던 김성주를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극구 칭찬했다고 소련군정 정치 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 소장이 후일 증언했다.[89]

북한 김일성은 만주 빨치산 시절 1938년 이후와 소련군에서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쓴 것이 확인되나, 러시아어로는 김일성 아닌 중국발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었다.[9] 해방후 원산항으로 입북할 당시에는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고[44], 또 평양에 온 초기에는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으로 행세했으므로,[12] 국내 사정을 파악한 뒤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본명 대신 김일성 이름을 쓰기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소련군 문서에는 1945년 10월 2일부터 그의 이름을 이전의 진지첸에서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11]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많은 월남민들이 증언한대로 북한 김일성은 누구인지 불분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쳤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김일성 가짜설이 진실이라면, 진짜 김일성 장군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풍문의 내용이 구구하여 실존인물 한 사람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거나,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일본 육사 기병과를 졸업한 김경천(金擎天) 장군이 전설의 원형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1946년경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 에는 그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지은 박상진(朴尙鎭, 1884~1921)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가 나온다.[163]

미화 논란[편집]

문인들은 김일성 찬양에 앞장섰다. 김일성은 46년 위대한 우리나라의 태양으로 예찬되었으며, 김일성을 우리 민족의 양심이고 의지이며 우리 민족의 신념이며 희망으로서, 우리 민족의 샛별로 묘사한 조기천의 약3천여 행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은 47년 북조선 예술축전에서 1등상을 받고 각 학교의 교과교재로 채택, 사용되었다.[164][165]

신형기는 김일성의 과거의 영웅적 풍모를 알리는 일화와 기사, 그리고 문학작품들은 특별한 기획이나 지도의 결과가 아닐 수도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164][166]

경제정책 실패[편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60년대까지 대한민국의 두 배 이상 경제력을 유지해왔으나, 이는 소련의 무상 지원 13억 루블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막대한 지원 덕분이었다.[167] 1970년대 이후로는 소련의 지원이 어려워졌다.

국제환경의 변화도 경제건설의 집중도를 떨어뜨리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김일성은 1950년대 중반의 중,소 분쟁 이후 1960년대 들어 대한민국에서 한일국교가 수립되자 '미국 제국주의, 소련 수정주의, 중국 교조주의, 일본 군국주의에 포위되었다.'고 하면서 '자립경제노선'을 더욱 강조했다. 여기에 줄곧 국민총생산 20~30%에 이르는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며 '4대 군사노선'을 강조했다.

1970년대,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명기한 《사회주의헌법》을 발표한다. 주체사상이 사상변화를 추동할 여지를 극도로 좁히게 만들어 민주화운동과 시민의식을 크게 저하시키는 역할을 했고, 이어 생산력 저하 문제를 극도로 심화시켰다. 이 시기 김일성은 '사상사업'을 강조해 국유화 중심으로 운영하였고, 시장,개인영농이나 상공업의 자율성을 전면 부정했다.[168][169]

이러한 정책들은 김일성이 사망할 무렵 최악에 이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외국의 무상 식량지원 없이는 버틸 수 없게 만든 '외세 의존적 지도자'로 비판받았다.[170]

기타[편집]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편집]

김일성의 생가, 만경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의 '배움의 천리길'을 기념하는데[171], 이는 그가 1923년 만주 바다오거우(팔도구)에서 칠골로 걸어서 유학온 길이다.[19] 1925년 부친이 일경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칠골에서 만주로 돌아간 길은 "광복의 천리길"이라는 이름을 붙여 기념하는 데,[172][14] 배움의 천리길을 거꾸로 돌아가는 길이다.

외국으로부터 받은 훈장, 칭호, 선물[편집]

생전에 70여개 국가와 국제기구들로부터 180여개의 최고훈장과 메달, 30여개도시의 명예시민칭호, 20여개의 이름있는 다른 나라 대학으로부터 명예교수, 명예박사칭호, 169개 나라 당 및 국가, 정부수반들과 진보인사들로부터 16만 5,920 여점의 선물을 받았다.

종교[편집]

김일성은 초기에 부모와 목사 집안이었던 외가의 영향으로 개신교 장로교 예배당에 다녔다. 그의 양친이 장로교 신자였고 외조부 강돈욱과 외삼촌 강진석, 외삼종조부 강량욱은 모두 장로교 목사였다. 유년기에 장로교 신자 생활을 했다는 의견이 있으나 청년기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후 김일성이 신앙활동을 했다거나 신앙적이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신체적 특징[편집]

김일성의 목 뒤에는 야구공과 동일한 크기의 혹이 나 있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외과의사들은 김일성의 혹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김일성이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173]

김일성의 이름으로 수여되는 상훈[편집]

  • 김일성상[174]
  • 김일성훈장
  • 김일성청년영예상
  • 김일성소년영예상
  • 조국통일상

평가와 비판[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이 문단은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0년 11월 18일에 문단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그는 항일 독립 운동에도 참가했고 알려지는데, 1937년보천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비롯해서, 일제 강점기 동안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한홍구는 '이젠 '가짜 김일성 설'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어떻게 김일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무엇인지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였다.[153]

경제 성장[편집]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재건하는데 노력했고 그 결과 김일성은 초토화된 북한 산업 기반을 빠르게 재건할 수 있었다. 특히 흥남비료공장의 경우 예전보다 더 큰 규모로 재건되었다.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산업화 정책은소련의 스탈린의 산업화 정책과 유사한 중공업을 중요시하는 노선이었기 때문에 제철소, 조선소, 화학 공장을 위주로 중공업을 발전시켰다. 게다가 1960년대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초 과학 분야와 최신 산업 기술을 단순히 전수받은 수준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술로 체화하는 과정에 들어서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는 1970년대에서야 과학 기술 인재를 양성하고 198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첨단 과학 기술 개발에 뛰어든 것을 생각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러한 행보는 상당히 빠른 것이다. 이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성장으로 1973년까지는 남한보다 1인당 GNP가 높을 수 있었다. 그래서 70년대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생활 수준에서도 소득분배나 사회보장은 대한민국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한다.

부정적 평가[편집]

그는 박헌영과 더불어 한국 전쟁의 최고 주범이다.[175] 또한 김일성은 인권을 말살하는 스탈린주의를 엄격하게 고수했고, 황장엽의 인간중심 철학에 기초해 제시된 주체사상을 통치이데올로기화 하면서 독재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켰다. .[176] 여기에 더해, 정적 탄압과 독재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한국 전쟁 이후 권력 강화 및 집권을 위해 연안파, 조선 국내파, 중국파를 비롯한 몇몇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을 숙청하는 등 정치탄압을 가한 혐의가 있다.

정적 탄압 및 일당독재화[편집]

김일성은 최초에는 명망높은 공산주의자인 최용건을 앞세워서 독재를 실시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 전쟁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물어 연안파, 조선 국내파, 중국파를 비롯한 몇몇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을 숙청했다. 또한 정치지도원을 적극 활용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감시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아 공산주의와는 동떨어진 세습체제를 구축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경제 파탄[편집]

김일성은 경제적으로 공업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농산물의 값이 폭등하고, 계단식 논밭을 무리하게 개간하여 산림을 파괴시켜 그로 인해 식량생산의 자급률이 떨어지는 등 농업의 쇠퇴를 야기했다. 게다가 경제개발에는 점점 신경을 쓰지 않게 되고 오직 자신의 우상화에만 전력투구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는 1970년대 후반부터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2000년대 무렵에는 거의 국가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1980년대에는 국채를 대량 발행하고 외국에 엄청난 빚을 졌는데 이 때문에 북한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 부채를 갚을 티끌만큼의 노력도 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통일이 되면 대한민국이 이 부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북한이 각국에 진 부채이다.

국가 액수(단위:달러)
중국 69억 8천만
러시아 11억
일본 4억
스웨덴 3억 3천만
이란 3억
독일 3억
프랑스 2억 8천만
태국 2억 6천만
오스트리아 2억 1천만
시리아 1억 4천만
스위스 1억
대만 8천 6백만

연보[편집]

가족 관계[편집]

일화[편집]

김일성 장례에 당시 전체 인민들이 총동원해 매일 생화를 들고 동상을 찾으려니 북한에 꽃이란 꽃은 전부 절판되는 진풍경을 보이기도 했다.[150] 김일성 사망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김일성, 김정일 생일날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다. 이 시기를 이용해 한시적으로 꽃장사에 나서는 주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이 사람들이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150]

평소 북한 돈 5원밖에 하지 않던 생화 한송이는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50원까지 뛰어 올랐다. 그것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그러자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가 김일성 동상앞에 놓여지기도 했다.[150]

김일성이 등장하는 작품[편집]

1990년 KBS 여명의 그날에서 매카시즘으로 인해 금기시되어왔던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이 조명되었다.[183]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참고자료[편집]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의 기관지 《조선신보》.
  • 《조선일보》와 자매지 《월간조선》(2005년 7월).
  • 고등학교 심화선택과정《한국 근·현대사》.
  •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항일혁명편
  • 이종석, 『새로 쓴 현대북한의 이해』, (역사비평사, 2000), pp. 395–439.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김일성 항일투쟁의 진실 (48회 2002년 2월 3일)
  • 김찬정, "빨치산만가, 김일성과 88독립여단," 『신동아』, 1992년 7월, pp. 360–387
  • 바신, 레오니드. "[해방후 평양 첫 진주한 전소련군 장교의 폭로] '날조된 영웅' 김일성," 『신동아』, 1992년 11월호, pp. 486–501
  • 이종석, "현준혁은 김일성이 죽였나?",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 (역사비평사, 1992)
  • 한국일보 편,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 - 유성철·이상조가 밝힌 북한정권의 실체 -』, (한국일보사, 1991)
  • 홍순관, "前 김일성 비서실장 충격고백 / 김일성, 전쟁과 여성편력," 《신동아 1994년 10월》 (동아일보사, 1994) pp. 188–207.
  • Dae Sook Suh,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Kim Il Sung: The North Korean Leader)》, (서주석 역, 청계연구소, 1989)

관련 서적[편집]

  • 조선로동당출판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활동 략력》, (조선로동당출판사, 1981)
  • 이기봉, 《인간 김일성 그의 전부》, (길한문화사, 1989)
  • 전문섭·백학림 외, 《회상기 (중)》, (대동, 1990)
  • 김찬정, 《비극의 항일빨치산》 (동아일보사, 1992)
  •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 조선로동당출판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혁명활동 략력》 (조선로동당출판사, 2000)
  • 서대숙, 《현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과 김정일》, (을유문화사, 2000)
  • 한홍구, 《대한민국사 3: 야스쿠니의 악몽에서 간첩의 추억까지》 (한겨레신문사, 2005)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 역사문제연구소, 《한국현대사의 라이벌》 (역사문제연구소 편, 역사비평사, 2006)
  •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1997)
  • 박명림,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도서출판 나남, 2002)
  •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2 (도서출판 나남, 1996)
  • 김일성, 《김일성저작선집 1~44》 (조선로동당출판사, )
  • 송종환, 북한 협상행태의 이해 (오름, 2002)
  •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김자동 번역, 일월서각, 1986)
  • 신용하 외 편, 《한국현대사회사상》 (지식산업사, 1984)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연합신문(聯合新聞) 1950.01.25
    김일성(金日成)이 재혼(再婚), 홍명희(洪命熹) 맏딸 영숙(永淑)과 자유신문 1950년 01월25일 2면 10단
    김일성(金日成) 재혼(再婚) 한성일보(漢城日報) 1950.01.25
    깨여지는 괴뢰(傀儡)의 백일몽(白日夢) 치열화(熾烈化)한 반소반공운동(反蘇反共運動) 1950.01.25. 경향신문 2면
    History of the North Korean Army U.S. Army Far East Command, July 31, 1952; 원문 pp.90~91 (pdf pp.144~145) : In January 1950, he (KIM Il Sung) is said to have married a daughter of HONG- Myong Hui, a Vice Premier of the North Korean Regime.
  2. 金日成 전속 간호부 趙玉姬, 체포 후 기자회견 부산일보 1951년 03월 01일
  3. 1980년한국의 일부 운동권에서는 그의 주체사상 노선을 받아들인 그룹도 있었다.
  4. 한국브리태니커회사 (2008). "김일성"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ML). 2008년 5월 21일에 확인함. 
  5. 북한연구소 (2008). "김일성(金日成)" (HTML). 2008년 5월 21일에 확인함. 
  6. 신주백 (1993).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다〉.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2》. 역사비평사. 215~222쪽쪽. 
  7. 김학규(金學奎, 1900-1967), 백파 자서전(白波 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11) 부록(附錄) 자료 I(資料 I),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8년 p.7 (589) 지금 북한(北韓)의 괴수(魁首) 김일성(金日成)은 그의 원명(原名)이 김성주(金聖柱)인 바, ..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 94 : 창덕학교(彰德學校) 급우(級友)였던 조의준(趙義俊)과 조사준(趙士俊)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본명이 金聖柱라고 증언(證言)했다고 함. 재건파공산당(再建派共産黨)에서 박헌영(朴憲永)과 함께 일했던 김철수(金綴洙)도 평양(平壤)의 김성주(金聖柱)의 푸락치가 들어와 김성주(金聖柱)의 사진과 경력을 소개하는 책자를 당내(黨內)에 돌렸는데 그 속에 평양(平壤)에 와 있는 김일성의 본명(本名)은 「金聖柱」라 했다 한다.
  8.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一) 중학시대(中學時代)부터 적화(赤化) 滿鮮日報 1940/04/16, 6면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二) 비명(匪名)『김일성(金日成)』을 습명(襲名) 滿鮮日報 1940/04/18, 6면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三) 일단(一旦)은 귀순(歸順)을 결심(決心) 滿鮮日報 1940/04/21, 6면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四) 양정우(楊靖宇)의 포위협위(包圍脅威)로 귀순공작(歸順工作)은 수포화(水泡化) 滿鮮日報 1940/04/23, 6면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五) 하로 속(速)히 마음을 돌려 귀순(歸順)하기만 고대(苦待)! 滿鮮日報 1940/04/24, 6면
    김창영(金昌永, 1890-1967), 김창영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 (반민특위 조사 기록)
  9.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162 ;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제3장 제88정치여단
  10.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18:15 ;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p.179~185
  11. 소(蘇), 6.25 남침(南侵) 비밀 문건(文件) 공개 동아일보 1992.06.17 일자 2면
  12. 한재덕(韓載德), 金日成將軍 凱旋記 : 빗나는 革命家의 집 p.84 - 『문화전선(文化戰線)』, 창간호, 북조선예술총연맹(北朝鮮藝術總聯盟) 1946.7.25 ; 이듬해 간행된 한재덕의 저서 『金日成 將軍 凱旋記』 (平壤, 民主朝鮮出版社, 1947.11.20)의 같은 글에는 김영환이란 가명을 썼다는 말이 삭제됨.
    한재덕(韓載德), 김일성(金日成)을 고발(告発)한다 (27) 1962.06.01 동아일보 2면 [1959년 한국으로 귀순 후 쓴 글]
  13. 6.25「金日成(김일성)의 전쟁」확인 1994년 7월 21일 작성 경향신문
  14. 김창희 (2001년 4월 2일). 〈김일성, 북한의 영원한 지도자〉. 《한국 역사 인물 뒤집어 읽기》 초 2쇄판. 서울: 인물과사상사. 312~344쪽. ISBN 89-88410-37-8-03910.
  15. 주진오 (1993). 〈기독교, 김일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2》. 역사비평사. 217~218쪽쪽. 
  16. 12사도의 대표 격인 베드로(헬라어 페트로스를 음역한 말. 마태 복음서에 따르면, 그리스도교회의 '반석'이라는 뜻으로 예수가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의 이름을 따 '강반석'이라고 지어줄 정도였다.
  17. (문화) 파워인터뷰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21세기는 누가 더 ‘열린 사회’로 가느냐에서 승부” 문화닷컴 2016년 01월 01일 : "만경대가 김일성이 태어나 성장한 곳이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에요. 만경대 옆 동네가 우리 집 송산리, 거기서 6㎞쯤 떨어진 칠골이 김일성이 태어나 자란 곳이에요."
  18. 전주 김씨의 후예라는 설과 선산(善山) 김씨의 후예라는 설도 있으나, 김정일이 전주 김씨의 시조의 묘소가 있다는 말에 "남쪽에 가서 그곳에 갈 수 있으면 시조 묘를 참배하겠다."라고 답하였다. 《한국 역사 인물 뒤집어 읽기》 참조.
  19. 주진오 (1993). 〈기독교, 김일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 역사문제연구소 편. 《바로 잡아야 할 우리 역사 37장면 2》. 역사비평사. 217~218쪽쪽. 
  20. 와다 하루끼, 와다 하루끼(和田春樹)의 북한현대사, 창비, 2014년
  21. 일설에는 목사였다 한다.
  22.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 2쇄판. 서울: 도서출판 풀빛. 238쪽. ISBN 89-7474-870-3. 
  23. [naenara.com 내나라]
  24. 長白縣 檔案館 所藏 韓國史 關聯 檔案資料 槪況 대외 열람이 불가능한 자료이기는 하지만 金日成이 어린 시절 장백에서 학교를 다닐 때 학사기록부가 남아 있다.
  25. 김일성 - Daum 백과사전
  26. 화성의숙에 입학하여 다녔다는 설도 있다. 《한국 역사 인물 뒤집어 읽기》 참조.>
  27. 육문중학(毓文中学) 재직 당시는 사반(謝潘)이란 이름을 썼다.
    金日成主席在吉林毓文中学 《纵横》 尚钺
    「金日成(김일성)가면」다시 벗겨지다 1984.07.11. 동아일보 4면
    중화TV, '김일성 주석의 중국인 스승' 방송 연합뉴스 2007.10.05
  28. “朝鮮○○軍 男女三名被捉”. 동아일보. 1931년 3월 26일. 3면. 
  29.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 2쇄판. 서울: 도서출판 풀빛. 238쪽. ISBN 89-7474-870-3. 
  30. 와다 하루끼의 북한현대사 25쪽, 창비, 2014년
  31.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 2쇄판. 서울: 도서출판 풀빛. 238쪽. ISBN 89-7474-870-3. 
  32. 김학규(金學奎, 1900-1967), 백파 자서전(白波 自敍傳)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집 (1988. 11) 부록(附錄) 자료 I(資料 I),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p.7 (589)
  33. 外事警察報 第124号 : 外國事情 / 滿洲國 / 在滿朝鮮人民族主義運動의 沿革과 現狀 昭和7년(1932년) 11월 p.46
  34. 朝革軍 首領(조혁군 수령) 李鍾洛 檢擧(이종낙 검거) 1931.01.31 동아일보 2면
    李鍾洛等 活動 徑路(이종낙등 활동 경로) : 多數 部下 (다수 부하)를 派遣(파견) 領警(영경)과 交火(교화)도 數次(수차) 동아일보 1931.02.03 2면
  35. 國史館論叢 第4輯 > 《조선전사》 現代篇의 分析·批判(許東粲) > Ⅱ. 抗日武裝闘爭史(16〜22권)批判 > 4. 抗日遊擊隊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이명영(李命英, 1928-2000), "김일성 열전(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143~145
  36. 匪首, 金日成의 生長記 (二) 匪名『金日成』을 襲名 滿鮮日報 1940/04/18, 6면
  37. 이명영, 진위 김일성 열전 (13) 양세봉의 관용을 저버린 김성주 중앙일보 1974.04.24 종합 3면
  38. 秘話(비화) 金日成(김일성)과 北韓(북한) 前(전) 北韓軍(북한군) 師團(사단)정치위원呂政(여정) 手記(수기) <1> 1990.04.22 동아일보, 이국진(李國鎭) 前 국가최고검찰장의 증언 : 1932년 초겨울 安圖(안도) 유격대에 金成柱(김성주)라는 학생옷차림의 청년이 참가했는데 그는 원래 3년제 소학교에서 글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소. 이 사람이 바로 金日成(김일성) 동지요.
  39.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 진짜인가 가짜인가? 노컷뉴스
  40. Lankov, Andrei (2002). 《From Stalin to Kim Il Sung: The Formation of North Korea 1945–1960》. Rutgers University Press. ISBN 0813531179. 
  41. Cumings, Bruce (2005년 9월 17일).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Updated)》. New York: W W Norton & Co. ISBN 978-0-393-32702-1. 
  42. Jasper Becker (2005년 5월 1일). Rogue Regime :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803810-8. 
  43. Staff writer. “Soviets groomed Kim Il 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2013년 10월 1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44. "나도 북침인 줄 알고 6·25 참전했어" 2009년 6월 20일 조선일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 1992년) 상권 pp.72~74
  45. 金日成, 抗联第一路军略史 (抗聯第一路軍略史), 东北抗日联军 史料(下), 东北抗日联军 史料 编写组, 中国共産党史 资料出版社, 1987, pp.665~679
    자료발굴 1942년에 김일성이 육필로 쓴 항일연군 제1로군 약사 (번역) 역사비평 1992년 여름호(통권 19호), 1992.5, pp.403-414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7) 東北항일聯군 활동기 金日成 자필 보고서 중앙일보 1995.02.20 종합 8면
  46. 유순호, 김일성 평전 (상) (지원출판사 2017.01.25) p.224
    해방되면 안도현장이 꿈이던 김일성 자유아시아 방송 (RFA) 2017-04-14
  47. 해방전 김일성은 소련에서 살고 싶어했다는 김씨 일가의 호위총사 리을설의 증언 자유아시아방송 (RFA) 2016-11-01 : 김일성은 낙후한 북한에 돌아오기보다 그나마 자본주의를 거친 소련에 남아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국 연안파들을 견제하고 북한을 세력권 안에 넣으려는 소련군의 요구로 조국이 해방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귀국했다는 것입니다.
  48. 김충석, 소련 극동군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북한 정치에서 제88여단파의 기원과 형성 역사연구 제30호, 2016.6, p.45
    가브릴 코로트코프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권1, 권2 (동아일보사, 1993) [권1 p.175~176]
    金日成-한국전 관련 舊蘇비밀문건 요지 연합뉴스 1992-06-16 : 45년 9월 모스크바는 승전의 축제분위기속에서 병력을 대폭 축소키로 함에따라 金日成은 아주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 그가 소속된 88특수저격여단이 해체될 운명에 놓여 있는데다 고등교육도 받지 못한 그로서는 다른 부대로의 전출이나 진급을 바라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49. 보천보습격사건피해판명 동아일보 1937년 6월 7일
  50.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 2쇄판. 서울: 도서출판 풀빛. 240~1쪽. ISBN 89-7474-870-3. 
  51. 1920년~1936년간 국경 3도 비적 누년 상황표 (國境三道 匪賊 累年 狀況表) (대정9년 -소화11년) 조선총독부 경무국 경무과 (원문 바로보기)
    국경지방에서의 치안 상황 : 제73회 제국의회(帝國議會) 설명자료 昭和12年(1937년) 조선총독부 경찰청 경무국 : (원문 바로 보기) - p.6 : 1932년~1937년 9월 기간 대안비적 선내침입누년표(對岸匪賊 鮮內侵入 累年表) / p.7 : 압록강·두만강 대안 마비적(馬匪賊) 출몰 누년표 (1932~1937.9)
  52. 平北(평북)에人民革命軍侵入(인민혁명군침입) 民家(민가)에衝火(충화)코掠奪(약탈) 동아일보 1935.02.14
    被襲(피습)된東興邑(동흥읍)의被害(피해) 死傷十三(사상십삼),拉去十名(납거십명) 동아일보 1935.02.16
  53. 함남국경(咸南國境)에 제2동흥사건(第二東興事件) 매일신보(每日申報) 1937년 06월 06일 02면 01단
    장백밀림(長白密林)을 근거(根據)로 국경선(國境線)에 출몰(出沒) 동아일보 1937-06-08 조간 2면 3단
  54. 김형직군(金亨稷郡) 후주고읍(厚州古邑)이 옛 후창군(厚昌郡) 동흥읍(東興邑)이다.
  55. "김일성 보천보전투 신화는 과장" 조선일보 2014-06-07
  56.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B02032043000、満州国政況関係雑纂/治安情況関係/匪賊動静並討伐状況関係 第四巻(A-6-2-0-2_8_1_004)(外務省外交史料館)」昭和15年9月26日から昭和15年11月12日 (1940.09.26~1940.11.12) p.14부터 1940년 10월 23일자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조직표가 나온다. 제2방면군장 김일성, 나이 29세.
  57. 홍기하 전투
  58. 동북항련 제1로군 월경인원 통계표(东北抗联 第一路军 越境人员 统计表), 《동북지구혁명역사문건회집(东北地区革命历史文件汇集) 1942年 - 1945年7月》 甲65卷, p.117 ;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59. 第一、東亜局第二課関係/第六章 満州国治安状況 (1936/12/01)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B02130132300、執務報告 昭和十一年度東亜局第二課及第三課(東亜-21)(外務省外交史料館)」
    '3개년 치안숙정계획(1936년 4월~1939년 3월)' dailynk 2014-06-10
    58. 일제의 황민화정책1 연변일보 2007-10-24
  60. 항일군 3인 왜 일왕에 충성맹세 했나 오마이뉴스 2007.09.13
  61. 《周保中抗日救国文集》 수록 "周保中关于请求同抗联负责人会面问题给王新林的信 (1940年 12月 19日)" 및 "周保中关于解除对季青的误解等问题给王新林的信 (1941年 1月 2日)"
    (다시쓰는한국현대사) 38.만주서 소련으로 金日成의 越境 중앙일보 1995.08.01 / 종합 10면
  62.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06-11 (2006-12-26) pp. 206-207
  63.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544
  64. KBS 특별기획 김정일 ‘제1편 유라 킴 (Yura Kim)’ : 2011년 12월 22일 밤 10:00 방영
    (황호택 칼럼)유라의 탯줄을 길게 자른 조산원 엘냐 동아닷컴 2015-08-05
    "金正日(김정일) 출생지는 蘇(소)「하마탄」마을" 동아일보 1992.06.13
    라즈돌노예(Razdolnoye, Раздольное) 마을 부근 위성 사진 : 구글 맵
  65. 美(미)정보전문 간행물 발표 "金日成(김일성) 항일투쟁은 조작" 1994.06.09 동아일보 5면
    KGB 비밀문서, 金日成 抗日투쟁 경력 일축 연합뉴스 1994-06-08
    김충석, 소련 극동군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북한 정치에서 제88여단파의 기원과 형성 역사연구 제30호, 2016.6, pp.50~55.
    김일성은 소련 비밀경찰(NKVD)의 요원이었다! NewDaily 2015.12.02 ;
    Christopher M. Andrew, ‎Oleg Gordievsky, More Instructions from the Centre: Top Secret Files on KGB Global Operations 1975-1985, (Psychology Press, 1992) pp. 78~79
  66.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1991年 人民出版社) p.660 : 1942년 7월 19일자에 김일성이 어제 보로실로프 경유 하바로프스크로 와서 뱌츠코예 마을 본 숙소에 머문다고 하였다. (七月十九日 金日成同志已于昨日由B城來X城 住B街本寓); B城은 보로실로프(Вороши́лов)로 지금의 우수리스크이고, X城은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 B街는 뱌츠코예(Вя́тское)를 말한다.
  67. 주보중(周保中),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 (人民出版社, 1991年) p.658 : (1942년 7월 16일) 제1로군 인원을 기간으로 하여 교도 제1영을 편성하고, 영장은 김일성, 정치위원은 안길로 한다. [以第一路軍人員爲基干, 編成敎導第一營 營長金日成 政治委員安吉] / p.661 : (1942년 7월 22일) 김일성의 계급은 대위 [金日成, 王效明, 許亨植, 柴世榮 軍稱號大尉 分任各敎導營營長]
    김충석, 소련 극동군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 북한 정치에서 제88여단파의 기원과 형성 역사연구 제30호, 2016.6
    김충석, 제88여단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연구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6. 2)
  68.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아카데미, 2008) pp.61~63
  69. “첫해 7만2000명 고려인 凍土에서 스러져” 동아닷컴 2006-10-24
  70. 金日成 중국에서 약탈, 도둑질 일삼아 : 러시아의 정치 주간지 '노보에.브레미야'(新時代) 연합뉴스 1993-04-19
    이런 일들에 대한 당시 신문 보도나 일제의 기록은 엄청나게 많다.
  71. 극동전선군(Far Eastern Front) Wikipedia ; 소련은 1945년 8월 초 대일전을 위해 극동전선군의 편제를 대폭 개편하고, 8월 9일 만주와 조선 침공을 단행한다. Soviet invasion of Manchuria Wikipedia
  72. Naum Semenovich Sorkin (1899 – 1980) Generals.dk
    Соркин, Наум Семёнович / 영어 번역
  73. 金日成, 그는 누구인가, 연합뉴스 1991.03.21 중국.소련등지로 망명한 北韓의 일부 고위간부들은 그가 KGB요원이었으며 蘇聯에 있을때 동료한인들의 言行을 蘇聯당국에 고해바쳐 소련인들의 신임을 얻었다고 전하고 있다.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 북한군(前 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呂政) 수기(手記) (1) 동아일보 1990.04.22
    비화(秘話) 김일성(金日成)과 북한(北韓) : 전 북한군(前 北韓軍) 사단(師團) 정치위원 여정(呂政) 수기(手記) (2) 동아일보 1990.04.29
    「붉게 물든 대동강」: 呂政(여정) 저, (동아일보사 1991.07.01)
    여정(呂政)의 본명은 강수봉이며, 인민군 소장으로 있다 숙청당해 10년간 투옥된 후 석방되자 중국으로 탈출한 사람이다. 감방 동료였던 강수봉에게 88여단 시절 김일성에 대해 증언해준 군사과학국장 최원(崔元) 소장은 소련의 고려인으로, 소르킨 소장 밑에서 88여단의 정보 관련 일을 했으므로 당시 김일성의 비밀 역할에 대해 잘 알던 사람이다. 해방후 북한으로 와서 인민군 정찰국장이 되었으며 6.25 때 서울에도 내려 왔다.
  74.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8권 "제23장 국제반제력량과 련합하여"에는 초대 왕신림은 극동군 정보부장 류쉔꼬(류쉔코, Lyushenko) 장령, 2대 왕신림은 극동군 정보부장 소르낀(소르킨, Sorkin) 장령으로 나온다.
    沈志华:试论八十八旅与中苏朝三角关系——抗日战争期间国际反法西斯联盟一瞥 莫斯科最后接受了周保中的意见,并改派远东军情报部长索尔金(N.S.Sorkin)为联络人(对外仍称王新林)。
  75. Gavril Korotkov (1925~ ) 저, 어건주 역, 스탈린과 김일성 (동아일보사, 1993) 권1 p.185 ;
    소련 25군 정치부 레베데프 소장의 증언 DailyNK 2013-12-26 ;
    Сделан в СССР (Made in the USSR) "Совершенно секретно", No.9/268, Опубликовано: 1 Сентября 2011
  76.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하권 pp.202~204 ;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 아카데미, 2008) pp.72-73
  77. "「金正日(김정일) 백두산出生(출생)」은 거짓말"/ 日(일)「프라이데이」誌(지)서 폭로 1991.12.26 동아일보 15면
  78.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상, 하 2권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 상권 pp.326~327.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은 서울에 있던 박헌영을 비밀리에 평양으로 데려갔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는 연해주군관구 사령관이었던 메레츠코프(Kirill Meretskov, 1897-1968) 원수가 보로쉴로프(현 우수리스크)에서 비밀리에 비행기로 평양으로 날아와 김일성과 박헌영을 태우고 모스크바로 갔다고 한다.
  79. (제40회 이승만 포럼) 스탈린 지령문 "북한에 소련체제 이식은 이렇게 하라" NewDaily 2014.6.24 ;
    "북한(北韓)에 부르주아 민주정권(民主政權) 수립" 스탈린, 점령(占領) 소련군(蘇聯軍)에 비밀지령 문서 50년만에 공개 1993.02.26. 동아일보 6면
  80.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46> 괴뢰 金日成(김일성)의 登場(등장) (5) 蘇軍(소군)과 金日成(김일성) 1972.01.25 동아일보 4면 : 驛構內(역구내)에 소련군장교 三(삼),四十(사십)명가량이 몰려있어요.가까이갔더니 中國(중국)말로 얘기들을 하고있었는데 그어투로봐서 韓國人(한국인)임이 틀림없었읍니다.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81. 金日成(김일성) 政權(정권)수립앞서「ML 주의」학습 / 당시 김일성大(대) 부총장 朴一(박일)씨가「교육」 동아일보 1991.08.14. 4면
    金日成, 정권수립 앞서 ML주의 교육받아 연합뉴스 1991-08-14
  82. 「김일성의 이념교수 구소거주 한인 폭로 “김은 빨치산 가담만하고 안싸워/항일투쟁 거짓말… 평범한 농부였다”」국민일보 1992-03-11
    김일성, 농민에 불과하며 항일 투사아니다 연합뉴스 1992.03.10
  83. 南北(남북)의 對话(대화) (13) 老革命家(노혁명가)들의 꿈과 좌절 (13) 南北協商(남북협상)과 나 (上) 1971.10.30 동아일보 4면 / "曺圭河, 李庚文, 姜聲才, 남북의 대화 (서울, 고려원 1987), 초간은 (한얼문고, 1972)
  84. 金日成 폭탄투척 극적 목숨건져 연합뉴스 1991-08-14 (레오니드 바신이 시사월간지 ‘소베르센노 세크레트노’(極秘)에 기고한 ‘대위동무’라는 글의 내용)
  85.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한울아카데미, 2008) p.77 : 레베데프와의 인터뷰 (모스크바, 1991. 6. 11)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 김일성 대일 해방전 참가 못했다 중앙일보 1991년 08월 26일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상권 p.77
  86. Soviets Groomed Kim Il-Sung for Leadership Vladivostok News, January 10, 2003 : "I want you[Grigory Mekler] to work on this person," said Meretskov, referring to Kim. "At the moment not many people know him. Travel to every corner of North Korea with him. It will be useful for both of you." Kim Il Sung, who gained the rank of major in the Soviet army, returned to Korea in 1945 with the occupying forces, and Mekler and other Soviet advisers spent a year touring with him, even helping to write his speeches. "When he was taking his first steps towards power, he didn't do anything without taking our advice," recollected the Soviet colonel.
  87. 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상권 p.49
  88. Jasper Becker,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p.50
    바신, 레오니드. "[해방후 평양 첫 진주한 전소련군 장교의 폭로] '날조된 영웅' 김일성," 『신동아』, 1992년 11월호, pp. 486–501
  89. 김일성 외교비사 (박길용, 김국후, 중앙일보사, 1994) pp.24~25 ; 비록(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중앙일보사, 1992) 상권 pp. 88~89
  90. 이상조(李相朝)씨 - 신일철(申一澈)교수 대담(對談) : 8월 종파(宗派)사건 「반김(反金)세력」 제거 조작극(造作劇) 1989.09.18. 동아일보 5면
    김일성 정권의 수립과정: 소련군 첫 입성 자유아시아방송 2013-05-14
  91.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 하 전2책,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편 중앙일보사/1992년) 상권 pp.88~89
    김일성 환영대회(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6) 중앙일보 1991년 09월 05일
  92.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29
  93. http://www.ournation-school.com/OurNation/login_count.php?tb_name=tbllecture&Rel_key=792&fname=../Radio_lecture/h3-20/h3-20.htm
  94.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6) 230
  95. 북한 50년사: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김학준, 동아출판사, 1995) 110
  96. 역사문제연구소 《제주 4.3 연구》 (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21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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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 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 - 蘇 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중앙일보 1994.11.15 종합 1면
    <평양의 4김회담>1. 레베데프 비망록 - 자료적 가치 중앙일보 1994.11.15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2. 金九 올 때까지 대표자회의 연기 중앙일보 1994.11.16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2. <해설> 蘇군정 남한정세 손금보듯 중앙일보 1994.11.16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3. 蘇,김일성에 신문보도 일일이 지시 중앙일보 1994.11.17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4. 白凡 "나는 김일성 만나러 왔을뿐" 중앙일보 1994.11.21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5. 蘇 朴憲永도 빠뜨려선 안된다 중앙일보 1994.11.22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6. 蘇 南대표에 총선후 정부수립 약속 받아라 중앙일보 1994.11.23 종합 8면
    <평양의 4김회담>7. 끝 조만식 南行 白凡 요구에 金日成 침묵 중앙일보 1994.11.24 종합 8면
    손세일 전 국회의원, 김구는 북한 가서 대체 뭘 했나? 조선 Pub 2014-11-07
  99. 양동안, 1948년의 남북협상에 관한 연구 정신문화연구 2010.06 통권119호 p.39
  100. “북한인민공화국 수상에 김일성 씨”. 동아일보. 1948년 9월 10일. 1면.  그러나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간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따르면 국가원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겸하였고, 당시 김두봉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겸 국가수반에 선출되었다. 김일성은 국가 원수가 아닌 내각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101.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948년 9월 11일. 1면. 
  102.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1일. 5면. 
  103.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1>”.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1일. 5면. 
  104. 기자 趙 甲 濟 의 세 계 : Cho Gab-Je The Investigative Reporter's World
  105.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65108#
  106. 류석춘․김광동, 북한 친일(親日)청산론의 허구와 진실 시대정신 2013년 봄호
  107. '김사량은 ... 친일작가이기도 했다'-가와무라 미나토, 문학평론가
  108. B. R. 마이어스,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 -Part 1 북한의 문화사 : 소련 점령, 1945~1948년
  109. (저자 인터뷰) “북한은 인종론에 기초한 극우정권 친일파 우대, 김일성 우상화에 이용했다”/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 저자 B.R. 마이어스 [주간조선 2186호] 2011.12.19
    <김관후의 4·3칼럼> (51) 계엄선포 당시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을 역임한 이범석 제주의 소리 2015년 08월 31일
  110. 오원철, 1999. ‘한국형 경제건설 제7권’Pp. 303-4
  111. 김일성, 정권 잡으려 반대파 가차없이 숙청… 친일파가 득세 /“남로당 출신 등 학살하고 빨치산 동료 35% 박해 문화일보 : 2013년 08월 13일
  112. 반민특위 조사 기록 국사편찬위 한국사 데이타베이스
  113.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138쪽.
  114. 김영호,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 2006) 138쪽.
  115. Kbs News
  116.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5면. 
  117.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5면. 
  118.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5면. 
  119.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5면. 
  120.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2>”.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2일. 5면. 
  121.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5면. 
  122.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5면. 
  123. “러시아 ‘한국전쟁 관련 외교문서’<3>”. 한겨레신문. 1994년 7월 23일. 5면. 
  124. Kathryn Weathersby, “New Findings on the Korean War”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Bulletin, 3 (Fall 1993), p.14 : This was Kim Il Sung’s war; he gained Stalin’s reluctant approval only after persistent appeals (48 telegr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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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 김일성은 1994년 사망하기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수도를 서울특별시로 명시했다.
  127.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이종석 지음 | 역사비평사 | 2006.05.29)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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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0. 조만식의 죽음에 대해서는 1950년 10월 피난가다가 평양 만포진에서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131. 서동만, 〈한국전쟁과 김일성〉《역사비평》제51호(2000년 여름)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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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 천리마운동 - Daum 백과사전
  135. 한국역사연구회 4월항쟁연구반, 《4.19와 남북관계》 (한국역사연구회 4월항쟁연구반 지음, 민연, 2008)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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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7. 6.25 휴화산, '빨치산은 살아 있다' : Save Internet 뉴데일리
  138. [시론 북, 이 난리에 호화 생일잔치냐
  139. <주말 포커스-대북 밀사의 세계> 秘史 남기고 권력과 함께 사라져 문화일보 2007년 8월 11일자
  140. [뉴시스아이즈]이슈진단 '가열되는 통일비용 논란'-역대 정부 통일방안 살펴보니…정국따라 천차만별 :: 네이버 뉴스
  141. <남북관계史와 '쌀'지원 함수> :: 네이버 뉴스
  142. [뉴스테이션/딥포커스] 북한의 ‘도발과 대화’ 이중전술의 비밀<2> :: 네이버 뉴스
  143. http://ndfsk.dyndns.org/100519/5.htm
  144. 서경원이 그린 김일성 손금 사진:경향신문 기자 촬영본
  145. 내가 본 김일성 주석은 반공교육과 달랐다, 서경원 민중의 소리 2007년 12월 24일자
  146. 김형수, 《문익환 평전:역사인물찾기 15》 (실천문학사, 2004) 82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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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8. "호기 있다…김정일 '서울 불바다' 발언 좋아해",《조선일보》, 2009.04.21
  149. 북 고위급 장례식 어떻게 치르나 - 조선닷컴
  150. 김 전 대통령 國葬과 김일성 장례식의 차이 - 데일리NK
  151. 황석영 “방북, 솔직히 후회 조금은 한다”,《뉴스엔》, 2008.11.06
  152. "美, 군정 당시 이미 김일성 가짜로 판단" 연합뉴스 2009-08-13
  153. ‘김일성 가짜설’ 누가 퍼뜨렸나 한겨레 21, 2001년 11월 01일 제381호
  154. [1]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 137회, 2014년 8월 3일
  155. 일인(日人) 모리타(森田)씨가 간추린 「조선종전(朝鮮終戰)의 기록(記錄)」 (上) 1967.08.15 동아일보 4면 ; 모리타 요시오(森田芳夫, 1910~1992), 『朝鮮終戰の記錄 : 米ソ兩軍の進駐と日本人の引揚』 (東京, 巖南堂書店, 1964) p.81
  156. 정관해(鄭觀海, 1873~1949),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 1945년 8월 17일(음력 7월 10일)자 및 8월 26일(음력 7월 19일)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제44집
  157. 주한미군사 1 / Ⅲ. 간주곡 : 1945년 8월 /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현대사 사료총서 2
  158. 건준,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개최, ‘인공’ 임시조직법안 상정 통과 매일신보 1945년 09월 07일
  159. (다시쓰는한국현대사 13) 누가 최고지도자인가 중앙일보 1995-04-03 ; 선구(先驅) 1945년 10월호 (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 pp.45~51 ; 김남식, 이정식, 한홍구, 한국현대사 자료 총서 7권 pp.696~699.
  160. 名士의 片影(其五), 金日成氏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 1면 (아래 "원문보기" 클릭)
  161. 사이토 총독(齋藤 總督) 저격한 백광운(白狂雲) 사망설 동아일보 1924.09.28 일자 2면
  16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p.29~30
  163. 박맹진(朴孟鎭) 편,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 p.3 金擎天氏(日成氏의 初名) ; p.14 金日成이 지은 만시(輓詩)
  16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72쪽
  165. 신형기 《이야기된 역사:남북한 민족 이야기가 그려낸 역사상 비판》(신형기, 삼인, 2005) 222~225쪽
  166. 신형기, 앞의 책 223쪽
  167. 백준기,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접근》,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편, 2001년, p707~714
  168. 정태헌 저.《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역사비평사 p263~p265
  169. 북한은 1946년 소련 군정기 당시 초기에는 '개인 상공업은 생산력 향상과 국영부문의 보완을 위해 보호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익추구가 곧 경제교란행위로 간주되어 통제대상'으로 여겨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정도 일정한 범위내에 허용했었다. 정태헌 저.《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 역사비평사. p256~p259
  170. 《박헌영 평전》,안재성 저. 실천문학사. p 615
  171. '배움의 천리길' 88돌…보름간 김일성 '우상화' 행군 dailynk 2011-03-16
  172. 北, '광복의 천리길' 답사 시작 dailynk 2005-01-23
  173. 네이버 디지털 뉴스 아카이브
  174. 예술가가 수여받았을 경우 김일성상 계관인이라 부른다.
  17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스탈린, 마오쩌둥에게 한국 전쟁 승인을 요청한 글에는 항상 두 사람의 서명이 들어가 있었다.
  176. http://news.donga.com/3/all/20101118/32678104/1
  177. “【逸話】恣意的親日人名辞典”. 《中央日報》. 2009년 11월 6일. 2010년 2월 24일에 확인함. 
  178.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179. donga.com[뉴스]-“北김정일 이복동생 김현 8년전 처형돼” 소식통
  180. 그의 칠골 창덕학교 5학년때 담임선생이기도 했다.
  181. http://www.chongryon.com/k/mc/kim/ryakureki/r-02-1.htm
  182. 2010년 김정일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183. 인터뷰 K-TV「여명의 그날」작가 김교식씨"이젠 「이념갈등」극복해야죠 1990.12.22 경향신문

바깥 고리[편집]

Flag of North Korea.svg 제5,6,7,8,9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지도자 Marshal of the DPRK insignia.svg
전 임
최용건
1972년 12월 28일 - 1994년 7월 8일 후 임
양형섭(권한대행),김영남
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전임
신설
(최용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제1~5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주석
1972년 12월 28일 - 1994년 7월 8일
후임
폐지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의장)
전임
김두봉
(북조선로동당 당수)
제1대 조선로동당 위원장
1949년 6월 30일 ~ 1994년 7월 8일
후임
김정은
전임
신설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6년 2월 8일 - 1948년 9월
후임
김두봉
전임
신설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각 수상
1948년 9월 9일 - 1972년 12월
후임
김일
전임
최용건
(인민군 총사령관)
제2대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1950년 7월 - 1991년 12월 24일
후임
김정일
전임
신설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방위원장
1972년 12월 15일 - 1993년 4월 9일
후임
김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