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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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Kim Won-bong 1.jpg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부수반
임기 1957년 9월 ~ 1958년 10월
주석 김일성
신상정보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생일 1898년 9월 28일
출생지 대한제국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내이리(내이동) 901번지
사망일 1958년 11월 00일 (60세)
학력 경성 중앙중학교 졸업
신흥무관학교 자퇴
황푸군관학교 졸업
경력 조선로동당 대표최고전임위원
호 약산(若山)
별칭 최림(崔林),
김약산,
진국빈(陳國斌),
이충(李冲),
김세량(金世樑),
왕세덕(王世德),
암일(岩一),
왕석(王石),
운봉(雲峰),
김국빈(金國斌),
진충(陳沖),
천세덕(千世德),
김약삼(金若三)
정당 조선로동당
배우자 최씨 부인(사별)
박차정(재혼)
최동선(삼혼)
자녀 슬하 2남
서훈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로동훈장(1958년)

김원봉(金元鳳, 1898년 9월 28일 (음력 8월 13일) ~ 1958년)은 일제 강점기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호는 약산(若山),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919년 아나키즘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고, 황푸군관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하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주전선, 인민공화당, 조선 공산당의 적색테러 단체인 조선민주청년동맹(약칭 조선민청)의 명예회장을 역임했다.[1][2] 1946년 8월 북조선의 합당[3]을 지지하였으며, 1948년 김규식·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에 1948년 4월 월북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수립 후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남파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54년 1월 25일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및 선거 방해 목적으로 남파된 간첩단 4명이 체포되었다.[4] 김일성과의 정치 암투에서 패배하였고 1958년 11월 김일성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연안파 제거 작업 때 숙청되었다. 그의 사망의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정치범수용소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5]

생애[편집]

어린 시절의 김원봉
조선의용대 선전 영상에 등장한 김원봉
독립운동가 박차정과의 결혼 사진(1931년)
조선의용대 대장 재직 중
조선의용대 성립기념 사진 (1938년 10월 10일)
1946년 2월 민족주의 민주전선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약산 김원봉
1921년 3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 1920년 12월에 의열단최수봉이 밀양 경찰서에 폭탄 투척 기사.</ref>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해방 후 독립운동가이자 부인 박차정의 유해를 밀양에 안장하는 김원봉.
김원봉 등 수천명이 학살되었다는 동아일보 1964년 1월 29일자 보도. 조소앙(趙素昻), 엄항섭(嚴恒燮), 청우당(靑友黨) 당수 김달현(金達鉉) 등도 학살되었다고 하였다.
제1차 미소공위 환영 시민대회 집회에서. 왼쪽부터 김원봉,허헌,박헌영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김원봉(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선글라스를 낀 사람)

1898년 9월 28일 경상남도 밀양시 밀양읍 내이리 901번지에서 탄생했고 어머니 이경념은 김원봉이 4살 되던 해 김경봉을 출산하다가 사망했다. 아버지 김주익은 영양 천씨와 재혼하여 8남 2녀를 두었고, 영양 천씨가 사망하자 박순남과 재혼해서 3명의 이복 남동생이 태어났다. 김익봉은 요절했고 계모 천연이가 낳은 이복남동생들 중 김봉철,김봉기,김덕봉,김구봉은 보도연맹원으로 몰려서 한국전쟁 중 처형되었다.

중앙학교 재학 중 김원봉은 김약수(본명 김두전)·이여성(본명 이명건) 등과 교류하였다. 중앙중학교를 먼저 졸업한 김두봉,윤치영과 나중에 졸업하게 된 무정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쌓는다. 1916년경성 중앙중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평안도 출신의 최석진이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하였다.[6] 첫 번째 배우자가 사망한 후 독립운동가 박차정과 결혼하였다.[6]

1919년 11월 9일 길림성에서 양건호, 한봉근, 곽재기, 김옥 등과 회합하여 일본의 침략본거를 파괴할 것을 결의하고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에 취임, 국내의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여러 차례 무정부주의적 항일 투쟁 활동을 벌인다. 단원은 김원봉, 양건호, 곽재, 김옥, 윤세위, 윤치형, 이성우, 강세우, 한봉인,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등 13명이었다.(의열단 참고.) 이어 그는 공약 10조를 발표하였다.

  1.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 만인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희생하기로 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정신이 화고한 자라야 단원이 될 수 있다.
  4. 단의를 우선하고 단원의 의를 급히 한다.
  5. 의백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6.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매일 1차씩 사정을 보고케 한다.
  7.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초회에는 필히 응한다.
  8. 죽음을 피하지 아니하여 단의에 뜻을 다한다.
  9. 일이 구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한다.
  10. 단의를 배반한 자는 학살한다.

제거해야 할 대상

  1. 조선총독부 총독 이하 고관
  2. 주조선 일본군 주둔군 수뇌
  3. 대만총독부 총독과 대만총독부 고관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1924년 사회주의운동과 노동대중운동이 급격히 성장하는 추세에 편성하여 의열단 고위 간부 출신으로 국내 서울청년회의 유력한 성원이였다가 상해에 들어와 ¨청년동맹회를 결성한 윤자영(尹滋英)에게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갔고, 윤자영 등은 그의 노선을 비판하였으며 단원의 이탈과 자금의 부족으로 생활마저 궁핍한 지경에 다달아 의열단의 활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925년 2월에는 김원봉이 2월 20일과 21일 동아일보를 통해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가 일부 문제가 되었다.

이후 의열단의 소수의 의열투쟁에 한계에 도달되자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 4기로 입학하였다. '최림'(崔林)이라는 가명을 쓰고,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1926)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1926년 10월 졸업과 동시에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되어 황포군관학교 군관단에 배속되었다. 민족혁명당(1935.7)을 조직하여 활동을 벌였지만 분열되었다. 민족혁명당의 노선과 당수 김원봉(金元鳳)에 반대하는 공산주의자 최창익(최창석)은 조선청년전위동맹(1938.6.10)을 창건하였다.[7]

1937년 조선총독부의 정보기관 보고에 의하면 김원봉은 자신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임시정부보다는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8][9]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 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루산에는 김구 등이 와 있었다. 초대에서 중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10]

1942년 김원봉은 한국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7월 중국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창설되자, 민족혁명당과 의용대의 대원들 일부는 김원봉의 곁에서 이탈하여 독립동맹으로 건너갔다.[11] 1943년 박차정은 총상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1944년 장준하을 영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장준하는 '그가 미인계를 써서 현혹시키려 했다.'고 비판하였다.[12][13][14] 장준하는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이소민 등을 파견하여 인척인 일본군 소위 출신 황용주를 끌어들이려 한다고 보았다.[15] 장준하는 그가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지청천에게 보고하였다.[15]

장준하에 의하면 "탈영하여 노하구까지 왔던 이들이 충칭으로 떠나려 하자 제1지대의 한 중대장을 통해 이들의 이탈을 막으려 노력했다. 설득의 내용은 '노하구에 계속 머물러서 제1지대를 보강하자는 것이었다.[16]' 그러나 장준하 등은 거절했다. 장준하는 이를 두고 '청년동지 50명을 결속시켜 노하구의 기반을 확고히 하겠다는 야심인데, 이것은 실상 임정의 김약산의 속셈이었다. 이 대장이라는 사람을 통해 김약산은 그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 구축해 보려고 공작을 편 것이다.[16] 라고 했다. 일행의 포섭이 어려워지자 미인계까지 쓰기도[17] 하였다.장준하는 그가 충칭까지 비행기편을 주선해준다는 약속 조차 의심했다. '우리에게 애호와 지나친 친절을 베풀고, 헛된 약속으로 비행기편까지 알선해주겠다는 허풍은 전부 그들의 수작.[16]'"이라 했다.

한편 그는 의용대를 탈퇴하고 연안으로 떠난 동지들과도 꾸준히 연락하였다. 이범석은 '김약산 일파는 자기세력 확충에 혈안이 되어 옌안(延安)과 내통을 하고 있[18]'다고 하였다.

1945년 1월 민혁당 중앙감찰위원장이었던 우강 최석순의 맏딸 최동옥(崔東玉))과 결혼하였다.아들 김중근(金重根)을 낳았다.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 제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5년 9월 8일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인민공화국에서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활동은 없다가 곧 해산되었다.[19]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이 좌익단결을 위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는데 그는 2월 14일 민족주의 민주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고 5인의 공동의장에 선출되어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1946년 7월 19일 김원봉은 좌우합작을 지지하며 여운형을 도왔다. 1946년 7월 22일 박헌영이 민전 협의회 석상에서 좌우합작에 반대하며 5개항을 제시했다. 민전 회의에서 좌우합작에 참여 여부는 표결로 결정되었다. 박헌영은 다수결에서 패배하자 5개항을 지지할 경우 합작을 지지하겠다고 제의했다.[20] 그러나 김원봉은 여운형과 함께, 박헌영의 5개항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5개항 가운데 토지몰수 조항이나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는 조항, 입법기구 수립 반대 조항은 곧 합작반대로 비춰질 수 있으며 우익 측에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며 수정을 요구했다.[20][21] 그러나 박헌영은 이를 듣지 않고 단독으로 5개항을 발표한다.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광명일보', '노력인민' 등 좌익지 7월 25일자에 게재하여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고 호소했다.[22]

1948년 4월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김구, 김규식, 박헌영, 리극로 등과 함께 남한측 정치단체 대표의 한 사람으로 협상에 참여, 4월 19일 참석자 8명의 수행원과 함께 북조선으로 넘어가 협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약산의 중경시절 비서를 지내고 상해에 살고 있던 사마로(司馬路)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는 뜻을 피력하기도 했다.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다시 개최하자 참여, 8월 25일에 북쪽에서도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해 8월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후 내각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1948년 8월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정부수립 이후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다(9월 9일).[23]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키겠다고 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전쟁을 반대하였다. 남침하여 두달의 빠른시간안에 점령할 병력이 충분치 않아 미군이 참전할것이고 남북이 서로 이득없이 수많은사람이 희생당할것이라고 조언을했으나 김일성은 듣지않았다. 한국 전쟁의 과정에서 그의 형제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보도연맹으로 몰리거나,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총살당하거나 살해되기도 했다. 그 학살의 과정에서 동생 김봉철, 김학봉만이 살아남았다. 그의 아버지 김주인은 외딴 곳에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다.[24]

1952년 5월 내각 노동상, 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출되어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4년 1월 25일 남파 간첩단 4명이 체포되었는데, 조사결과 이들은 김원봉의 직접 지휘아래 남한의 경제 혼란 및 선거방해 목적으로 남파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남파 활동을 벌였다.[4] 1958년 그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로부터 노동훈장을 수여받았다.[25]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을 맡았으나 1956년 실각했다.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64년 대한민국으로 탈북한 조선로동당 자강도당선전부장을 지낸 김남식은 김일성 김영주 형제의 반 김일성 숙청에서 김원봉도 이 시기에 학살당했다고 말했다.[26]

그의 월북에 대해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장을 비롯해 진보성향의 인물들은 친일파들 탄압에 못이겨 월북하였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없다. 한편, 상해에서 김원봉과 대면한 황용주 전 MBC 사장은 김원봉의 월북에 대해 "민전이 흐지부지되고 좌우합작이 실패한 데 대한 실망에다 자기를 따르던 단원들이 거의 북쪽으로 돌아서 버린 점에 따른 동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또 약산은 북행하기 전 박헌영을 자주 만나는 눈치였다며 아마 그의 북행에는 박헌영의 끈질긴 권유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27]

숙청[편집]

김일성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 독재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김일성파를 제외한 당시 북조선 체제 내의 마르크스주의, 민족주의 계열 인사 등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5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제234군부대 현지지도 중 <조선인민군은 항일무장투쟁의 계승자이다>라는 연설에서 '항일'의 최종 목표에 대하여 규정하며 김원봉 및 기타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을 반체제적 인사로 규정하였다.


«의병대»라든지, «조선독립군»이라든지, «의열단»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순전히 민족주의적인 군대였으며 지주, 자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군대였습니다.

[28]

김일성정권은 1955년부터 자신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핵심적인 정치 담론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강조되었던 민주주의[29]를 폐기하고 스탈린독재 방식으로 왜곡된 사회주의 담론을 유포시켰다. 북조선이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진해나간다고 규정함으로 인하여 김원봉과 같은 민족주의계열 항일 인사들은 실각되어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김원봉은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에서 해임되었고,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어 모든 정치적 지위를 상실했다.

1958년 김원봉은 공포정치와 제멋대로인 김일성에 대한 혐오감을 느껴 탈북을 시도하고 타이완으로 도주하려했지만 도망가기전에 붙잡혀 숙청당해 자살하였다.

인물평[편집]

운암 김성숙은 그를 가리켜 '약산은 좋은 사람이요, 능력은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은 굉장히 좋아요. 혁명 지조가 있는 사람이고, 그러나 학식은 없다. 또 그를 가리켜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습니다. 동지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복시키고 설득시켜 자기의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모든 정열을 쏟아서 뜻을 이뤘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죽는 곳에 뛰어들기를 겁내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까? 그만큼 남으로 하여금 의욕을 내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김원봉의 가장 큰 능력이었습니다.[30]'라고 평하였다.

김원봉은 베이징텐진, 상하이를 오가며 의열단 등의 활동을 지도, 지휘하였다. 그는 냉정한 성격이었고, 개인주의적이었다. 아리랑김산에 의하면 '그는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였으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잘 어울려 다녔지만 청년기 이후의 김원봉은 김약수, 이여성, 김두봉 등 소수를 제외하고는 별로 친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의열단의 동지였던 김성숙조선의용대김학철, 최재 등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고 동지들에 대해서는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라 한다. 그는 말을 할 때 목청을 높이지 않고 차분하게 말하였으며, 낯을 붉히거나 음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듣는 사람에게 와닿는 말을 하였고, 담담한 가운데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열정을 느끼게 했다 한다.

논란과 의혹[편집]

부인의 성병 사망 논란[편집]

그는 언제나 조용히 지냈고 운동에도 잘 참여하지 않았으며 주로 혼자 사색하였다. 김산이나 김성숙 등에 의하면 그는 대부분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주로 독서를 하거나 홀로 사색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미남형인데다가 깔끔한 외모를 가졌기 때문에 여러 아가씨들이 그를 좋아하였지만 그는 아가씨들을 멀리하였다.

그가 화류계에 자주 출입했다는 증언도 있다. 정화암은 그가 화류계에 출입했고 이때 얻은 병 때문에 첫 번째 아내 최씨와 두 번째 아내 박차정이 죽었다고 증언하였다.

정화암에 의하면 '영웅호색이라고, 김원봉이가 원래 호색을 했거든요. 그래서 화류병에 만신창이였지요. 그래서 그 부인(첫 번째 아내)이 완전히 성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6] 김두봉의 조카딸(박차정)도 마찬가지입니다.[6]'라고 증언하였다. 장준하는 그가 젊은이들에게 술을 사서 먹이거나 미인계를 쓰기도[17] 했다고 하였다.

공산주의자 논란[편집]

장준하는 '그를 판에 박힌 공산분자의 한 사람이었다[16]'고 지적했고, 평소 김원봉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던 민필호는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31] 김원봉은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있었다.[32] 그러나 민필호장준하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지목했다.

또한 장준하는 '김원봉은 그때 이미 공산당 노선을 취하고 있었으며, 지금은 이북에 있다.[33]'고 했다. 그가 광복군 제1지대 시절 이미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다는 것이다.

일본군 출신 이간질 논란[편집]

일본군을 처음 탈출한 장준하 일행이 그의 포섭 노력을 거절하자 그는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장준하는 그가 동지들을 이간질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계속 사람을 보내 이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탈영병, 학도병 무리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했다고 한다. 장준하는 '김약산의 부하로 파견된 분견대장의 설득공작이 실패한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곧 우리에게 이간공작을 시작했다.[16] 는 것이다.

또한 장준하1945년 광복 직후에도 그가 이간질을 획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광복군 대원들의 무지와 행패가 계속될 때 그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출신 부대로 하여금 임정이나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면서 그 어부지리를 노리는 김원봉의 계산이었다[34]'고 했다. 광복군 편입을 거절하고 버티던 일본군 출신 부대의 책임자 격으로 있던 황모에게 김원봉이 직접 이소민을 파견, 광복군 제1지대로 끌어들일 공작을 했다[34] 는 것이다.

또한 장준하는 '김원봉이 열심히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34]'고 진술했다.

암살과 강등 의혹[편집]

그의 최후에 관해서 여러 가지 설은 있다. 일본인 학자 가지무라 히데키(梶村秀樹)는 '명예로운 은퇴를 했다'고 했고, 다른 설에 의하면 1958년 11월에 총살당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 간첩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 전향한 소정자 등은 '강등되어 지방에 배치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1958년 11월 임정 파벌과 중국계열, 소련파 숙청의 틈바구니에서 '국제간첩' 혐의로 투옥후 처형 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의용대원 출신 김학철은 자살설을 제기했다. 그에 의하면 김원봉에게 국제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은 사실이며, 혹자는 약산이 대동강에 투신하였다고도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기로는 체포된 뒤 감옥에서 자살하였다고 한다.

황포탄 오발 사고[편집]

1922년말 새로운 구상을 하고 있던 김원봉은 우연히 일본 제국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상하이에 올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냥 넘어갈 사항이 아니라고 판단한 김원봉은 즉시 상하이에 머물고 있는 동지들을 소집하여 다나카를 암살할 방안을 구하였다. 동시에 의열단의 활동에 있어 자금 부족과 단원들의 생계 문제와 무기 구매 문제를 논의했다. 다나까 암살 작전에 김익상, 오성륜(吳成崙), 이종암은 서로 자신이 가겠다고 자원했고 그는 오성륜을 보내려고 했으나 다른 두 명이 양보하지 않아 모두 보냈다. 내심적으로는 오성륜을 보내고 싶었으나 이종암과 김익상 두 동지가 절대로 양보를 하지 않겠다고 하니 약산은 마침내 세 동지 모두를 이번 거사에 내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김익상 동지와 이종암 동지는 이미 국내에서 활약이 컸소. 그러니 이번일은 오성륜 동지가 선두에 서면 어떠하겠는가 생각하는데. ...(이하 중략) ... 첫 번째로 오성륜 동지는 상해에서, 두 번째로 김익상 동지는 남경에서, 세 번째로 이종암 동지가 천진에서 결행을 한다면 그놈이 무슨 재주로 우리들의 총구를 빠져나가겠소"라고 약산이 말했다. 그의 제안이 그럴 듯 하였으나 김익상과 이종암이 서로 먼저 상해를 맡겠다고 우기는 통에 한동안 왈가왈부 하다가 결국엔 약산의 안을 따르기로 하고 사용할 무기와 복장 등을 점검하며 거사 일자만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일정이 변경되었다는 신문기사를 접했다. 다나카가 상하이에 오기는 오는데 당초 예정된 대로 3월 28일 오후 3시 30분에 왔다가 남경과 천진, 북경은 들르지 않고 바로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다시 동지들을 모아 논란 끝에 순서는 그대로 하되 거사 장소만 바꾸었다. 오성륜은 배에서 내려 부두로 걸어 나올 때, 김익상은 부두에서 나와 자동차에 오르려 할 때, 그리고 이종암은 격려의 의미로 따라 갔다가 적당한 기회에 거사하기로 했다. 그러나 3월 28일 오전 뉴스에서 다나카의 방문계획이 약간 변경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부두로 오지 않고 배가 상해 황포탄 세관앞 공공마두로 온다는 것이다.

1922년 3월 28일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 세 사람은 저마다 정해둔 자리에 은신, 배가 도착하여 부두 사이에 잔교(棧橋)가 걸쳐지고 승객들이 차례로 상륙했다. 이들은 잔교를 내려오고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지켜보던 이들 중 오성륜은 군중들 틈에 끼여 서서 군복을 입은 다나카를 찾아 권총 세 발을 쏘았으나 뒤에서 빨리 뛰어나오던 브라질계 미국인 부인이 맞고 절명했다. [35] 오발 사고 직후 김익상은 맞지 않았다고 소리쳤으나 오성륜은 흥분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익상은 뛰어가는 다나카를 저격했으나 모자에 구멍이 났고, 수류탄을 던졌으나 안전핀을 뽑지 않고 던져서 맞추지 못했다. 폭탄은 배 카리슬 호의 승무원이 몽둥이로 쳐서 바다로 밀어넣었다. 이들은 한구로 방향으로 도망치던 중 교차로를 건널 때 누군가를 향해 한 발을 발사했다. 이들은 규강로를 질주하다가 다시 한구로로 도망쳤는데 사천로에서 군중들이 추적하자 다시 남쪽으로 달아나던 중 영국 경찰 시크인의 추적을 받았다.

상훈[편집]

가계[편집]

남에서 가족들 중 남동생들은 모두 보도연맹 사건으로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김봉철(1918 - 1986)은 당시 생존하였다. 이복동생 김봉철은 4,18생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밀양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옥살이를 하기도했다. 이후 1986년 사망하였고 대법원에서 재심결정 및 무죄를 판결받았다.[36] 현재 김원봉의 여동생 김학봉은 대한민국에서 생존해 있다.

기타[편집]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평을 내리기도 했다. 그는 반탁운동에 대해서도 이것을 흥선대원군의 쇄국양이에 비기고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격퇴시킨 병인양요(1868년)와 신미양요(1871년)는 그 나름대로 민족적, 국수주의적 견지에서 통쾌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세계 저세에서 살펴보면 민족의 장래를 그르치게 한 어리석은 짓이었다.[37]"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원봉 자신도 1945년 말에는 적극적으로 반탁을 주장하다[38] 1월 초 다른 좌익들과 함께 찬탁으로 태도를 표변한 사람이므로, 그의 주장도 자신의 변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다지 관계도 없는 사례를 끌어와 둘러댄 말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문화의 작품[편집]

뮤지컬[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각주[편집]

  1. 조선민주청년동맹 결성대회 서울신문 중앙일보 1946년 04월 26일
  2. 허헌김원봉양씨 러—취장관방문 1947년 5월 22일 경향신문
  3.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 3당합당 지지 서울신문 1946년 8월 4일
  4. 어마어마한간첩단체포 김원봉이직접지휘 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
  5. 박일훈 (2014년 4월 21일). '빨갱이 두목' 김원봉, 왜 청산가리를 먹었나”. 《오마이뉴스. 2018년 4월 8일에 확인함. 
  6.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도서출판 민음사, 2005) 244
  7. 시대의창 편집부,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김승일 역, 시대의창, 2005) 149페이지
  8.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1페이지
  9. 사상휘보 제14호(1938.3)(조선총독부고등법원사상부, 1938) 219~222페이지
  10.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0페이지
  11.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34페이지
  12. 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저, 세계사, 2002.05.02) 140페이지
  13.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지음, 돌베개 출판사, 2006.11.30) 165 페이지
  14. (26) 파쟁 속의 망명정부
  15. 장준하전집 1 : 돌베개(장준하, 세계사, 2001) 94~95페이지
  16. 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205페이지
  17. 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254페이지
  18. 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291페이지
  19.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60쪽
  20.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85쪽.
  21.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김자동 역, 일월서각) 331페이지
  22.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51~52쪽
  23.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948년 9월 11일. 1면. 
  24.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584쪽, 시대의창 2008년
  25.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4페이지
  26. 김원봉)등수천명)을학살 1964.01.29 동아일보 7면
  27. 의열단 창설한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1990년 6월 22일 한겨레
  28. 《김일성선집》제5권 (평양:조선로동당출판사, 1960) p.310
  29. 전미영 교수의 분석 결과, '민주주의'가 언급된 담화 횟수가 1947년 31회, 1948년 22회, 1949년 13회였던 데 반해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언급된 담화 횟수는 각각 5회, 7회, 7회에 지나지 않았다. 이 3년간의 연설에서 '공산주의'를 언급한 담화 횟수는 전혀 없다.
  30.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도서출판 민음사, 2005) 101
  31.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2페이지
  32. 조성일. "약산은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오마이뉴스. 2005년 8월 27일.
  33. 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201페이지
  34. 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328페이지
  35. "田中大將에게 爆彈; 이십팔일 오후 상해부두에서 조션인이 폭탄으로 암살코자, 犯人二名 現場逮捕", 동아일보 1922년 03월 30일자, 3면 7단
  36. 반세기만에 ‘친북 누명’ 벗은 독립투사 동생 2010-07-14 한겨레
  37. 정경모, 찢겨진 산하 - 김구,여운형,장준하:구름 위의 정담 (기획출판 거름, 1986) 36페이지
  38. 해방조선에 再전개되는 결사적 조국부흥운동, 탁치반대 國民總動員委員會 결성 자유신문 1945년 12월 30일 : 柳林, 崔東旿, 申翼熙, 趙擎韓, 金奎植, 金九, 趙素昻, 金元鳳(金若山), 金朋濬, 嚴恒燮

참고 자료[편집]

전임
-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검열상
1948년 9월 ~ 1952년
후임
리승엽
전임
허성택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노동상
1952년 5월 ~ 1958년 11월
전임
리승엽
제3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검열상
1953년 8월 ~ 1955년
후임
리효순
전임
홍명희
리극로
제3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57년 9월 ~ 1958년 10월
후임
홍명희
리극로
박금철
전임
홍명희
리극로
제3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부수반
1957년 9월 ~ 1958년 10월
후임
홍명희
리극로
박금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