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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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출생 189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대한제국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내이리(내이동) 901번지
사망 미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인 미상
국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별칭 호 약산(若山)
별칭 최림(崔林), 김약산, 진국빈(陳國斌), 이충(李冲), 김세량(金世樑), 왕세덕(王世德), 암일(岩一), 왕석(王石), 운봉(雲峰), 김국빈(金國斌), 진충(陳沖), 천세덕(千世德), 김약삼(金若三)
학력 경성 중앙중학교 졸업,신흥무관학교 자퇴,황푸군관학교 졸업
직업 정치인
배우자 최씨, 박차정, 최동선
자녀 2남
상훈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로동훈장(1958년)

김원봉(金元鳳, 1898년 9월 28일 ~ 1958년)은 한국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호는 약산(若山),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1919년 아나키즘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고, 황푸군관학교를 거쳐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경상도 지역구)의원,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으로 활동하고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출됐다.

1946년 2월 민족주의민주전선, 인민공화당, 조선 공산당의 적색테러 단체인 조선민주청년동맹(약칭 조선민청)의 명예회장을 역임했다.[1][2] 1946년 8월 북조선의 합당[3]을 지지하였으며, 1948년 김규식·김구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에 1948년 4월 월북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수립 후 국가검열성상,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남파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54년 1월 25일 대한민국의 경제 혼란 및 선거 방해 목적으로 남파된 간첩단 4명이 체포되었다.[4] 1958년 이후 김일성과의 정치암투에 패배하여 숙청되었다.

생애[편집]

김원봉
김원봉
독립운동가 박차정과의 결혼 사진(1931년)
김규식, 조선민족혁명당의 당수였다.
조선의용대 대장 재직 중
조선의용대 성립기념 사진 (1938년 10월 10일)
1921년 3월 5일자 동아일보 기사. 1920년 12월에 의열단최수봉이 밀양 경찰서에 폭탄 투척 기사.</ref>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해방 후 독립운동가이자 부인 박차정의 유해를 밀양에 안장하는 김원봉.
1946년 2월 민족주의 민주전선 회의장에서 연설하는 약산 김원봉
제1차 미소공위 환영 시민대회 집회에서. 왼쪽부터 김원봉,허헌,박헌영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 김원봉(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선글라스를 낀 사람)

1898년 9월 28일(음력 8월 13일) 경상남도 밀양시 밀양읍 내이리 901번지에서 탄생했고 어머니 이경념은 김원봉이 4살 되던 해 김경봉을 출산하다가 사망했다.아버지 김주익은 영양 천씨와 재혼하여 8남 2녀를 두었고 영양 천씨가 사망하자 박순남과 재혼해서 3명의 이복 남동생이 태어났다.김익봉은 요절했고 계모 천연이가 낳은 이복남동생들 중 김봉철,김봉기,김덕봉,김구봉은 보도연맹원으로 몰려서 한국전쟁 중 처형되었다.

중앙학교 재학 중 김원봉은 김약수(본명 김두전)·이여성(본명 이명건) 등과 교류하였다. 중앙중학교를 먼저 졸업한 김두봉,윤치영과 나중에 졸업하게 된 무정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쌓는다. 1916년경성 중앙중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평안도 출신의 최석진이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하였지만, 본처가 사망하자 동료였던 박차정과 결혼하였다. 1919년 2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졸업은 하지못하고 중퇴하였다.

1919년 11월 9일 길림성에서 양건호, 한봉근, 곽재기, 김옥 등과 회합하여 일본의 침략본거를 파괴할 것을 결의하고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에 취임, 국내의 기관 파괴, 요인암살 등 여러 차례 무정부주의적 항일 투쟁 활동을 벌인다. 단원은 김원봉, 양건호, 곽재, 김옥, 윤세위, 윤치형, 이성우, 강세우, 한봉인,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등 13명이었다.(의열단 참고.) 이어 그는 공약 10조를 발표하였다.

  1. 천하에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하기로 한다.
  2. 조선의 독립과 세계 만인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바쳐 희생하기로 한다.
  3. 충의의 기백과 희생정신이 화고한 자라야 단원이 될수 있다.
  4. 단의를 우선하고 단원의 의를 급히 한다.
  5. 의백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하게 한다.
  6.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매일 1차씩 사정을 보고케 한다.
  7. 어떤 시간, 어떤 곳에서든 초회에는 필히 응한다.
  8. 죽음을 피하지 아니하여 단의에 뜻을 다한다.
  9. 일이 구를 위하여 구가 일을 위하여 헌신한다.
  10. 단의를 배반한 자는 학살한다.

제거해야 할 대상

  1. 조선총독부 총독 이하 고관
  2. 주조선 일본군 주둔군 수뇌
  3. 대만총독부 총독과 대만총독부 고관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의 밀정
  7. 반민족적 귀족 및 대지주

1924년 사회주의운동과 노동대중운동이 급격히 성장하는 추세에 편성하여 의열단 고위 간부 출신으로 국내 서울청년회의 유력한 성원이였다가 상해에 들어와 ¨청년동맹회를 결성한 윤자영(尹滋英)에게 많은 젊은이들이 찾아갔고, 윤자영 등은 그의 노선을 비판하였으며 단원의 이탈과 자금의 부족으로 생활마저 궁핍한 지경에 다달아 의열단의 활동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925년 2월에는 김원봉이 2월 20일과 21일 동아일보를 통해 사회주의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가 일부 문제가 되었다.

이후 의열단의 소수의 의열투쟁에 한계에 도달되자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 4기로 입학하였다. '최림'(崔林)이라는 가명을 쓰고,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1926년 10월 졸업과 동시에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되어 황포군관학교 군관단에 배속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되어 활동을 벌였지만 분열로 해체되었고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창건하고, 최창익이 위원장이 되었다.[5]

1937년 조선총독부의 정보기관 보고에 의하면 김원봉은 자신의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임시정부보다는 장쉐량 일파에게 더 많은 자금을 받고 있었다고 보고하였다.[6] [7] 1937년 7월 10일, 중화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피서지이자 중국 고관들의 회의 장소인 난징 서쪽의 루산(蘆山)에 초대되었다. 루산에는 김구 등이 와 있었다. 초대에서 중국 정부측 대표자는 일본을 상대로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귀환하기 전 중국 정부 대표자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았다.[8]

1942년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7월 중국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이 창설되자, 민족혁명당과 의용대의 대원들 일부는 김원봉의 곁에서 이탈하여 독립동맹으로 건너갔다.[9] 1943년 박차정은 총상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1944년 장준하을 영입하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장준하는 '그가 미인계를 써서 현혹시키려 했다.'고 비판하였다.[10][11] [12] 장준하는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임시정부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이소민 등을 파견하여 인척인 일본군 소위 출신 황용주를 끌어들이려 한다고 보았다.[13] 장준하는 그가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지청천에게 보고하였다.[13]

1945년 1월 민혁당 중앙감찰위원장이었던 우강 최석순의 맏딸 최동옥(崔東玉))과 결혼하였다.아들 김중근(金重根)을 낳았다.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 제2진으로 귀국하였다. 1945년 9월 8일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인민공화국에서 군사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이 단체는 활동은 없다가 곧 해산되었다.[14] 1946년 2월 조선공산당이 좌익단결을 위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는데 그는 2월 14일 민족주의 민주전선 중앙위원에 선출되고 5인의 공동의장에 선출되어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1946년 7월 22일 박헌영이 민전 협의회 석상에서 좌우합작에 반대하며 5개항을 제시했다. 민전 회의에서 좌우합작에 참여 여부는 표결로 결정되었다. 박헌영은 다수결에서 패배하자 5개항을 지지할 경우 합작을 지지하겠다고 제의했다.[15] 그러나 김원봉은 여운형과 함께, 박헌영의 5개항에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5개항 가운데 토지몰수 조항이나 행정권을 인민위원회에 이양하는 조항, 입법기구 수립 반대 조항은 곧 합작반대로 비춰질 수 있으며 우익 측에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며 수정을 요구했다.[15] [16] 그러나 박헌영은 이를 듣지 않고 단독으로 5개항을 발표한다.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했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광명일보', '노력인민' 등 좌익지 7월 25일자에 게재하여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고 호소했다.[17]

1948년 4월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김구, 김규식, 박헌영, 리극로 등과 함께 남한측 정치단체 대표의 한 사람으로 협상에 참여, 4월 19일 참석자 8명의 수행원과 함께 북조선으로 넘어가 협상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약산의 중경시절 비서를 지내고 상해에 살고 있던 사마로(司馬路)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다”는 뜻을 피력하기도 했다.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다시 개최하자 참여, 8월 25일에 북쪽에서도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해 8월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후 내각 국가검열상이 되었다.

1948년 8월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정부수립 이후 국가검열상에 임명되었다(9월 9일).[18]

한국 전쟁의 과정에서 그의 형제 4명과 사촌동생 5명이 보도연맹으로 몰리거나,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총살당하거나 살해되기도 했다. 그 학살의 과정에서 동생 김봉철, 김학봉만이 살아남았다. 그의 아버지 김주인은 외딴 곳에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다.[19]

1952년 5월 내각 노동상, 195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출되어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4년 1월 25일 남파 간첩단 4명이 체포되었는데, 조사결과 이들은 김원봉의 직접 지휘아래 남한의 경제 혼란 및 선거방해 목적으로 남파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남파 활동을 벌였다. [4] 1958년 그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로부터 노동훈장을 수여받았다.[20]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을 맡았으나 1956년 실각했다.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1964년 대한민국으로 탈북한 조선로동당 자강도당선전부장을 지낸 김남식은 김일성 김영주 형제의 반 김일성 숙청에서 김원봉도 이 시기에 학살당했다고 말했다.[21]

그의 월북에 대해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장을 비롯해 진보성향의 인물들은 친일파들 탄압에 못이겨 월북하였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없다. 한편, 상해에서 김원봉과 대면한 황용주 전 MBC 사장은 김원봉의 월북에 대해 "민전이 흐지부지되고 좌우합작이 실패한 데 대한 실망에다 자기를 따르던 단원들이 거의 북쪽으로 돌아서 버린 점에 따른 동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또 약산은 북행하기 전 박헌영을 자주 만나는 눈치였다며 아마 그의 북행에는 박헌영의 끈질긴 권유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22]

숙청[편집]

김일성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김일성 독재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김일성파를 제외한 당시 북조선 체제 내의 마르크스주의, 민족주의 계열 인사 등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5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제234군부대 현지지도 중 <조선인민군은 항일무장투쟁의 계승자이다>라는 연설에서 '항일'의 최종 목표에 대하여 규정하며 김원봉 및 기타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을 반체제적 인사로 규정하였다.


«의병대»라든지, «조선독립군»이라든지, «의열단»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있었지만 이것은 순전히 민족주의적인 군대였으며 지주, 자산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군대였습니다.

[23]

김일성정권은 1955년부터 자신의 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핵심적인 정치 담론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초기 강조되었던 민주주의[24]를 폐기하고 스탈린독재 방식으로 왜곡된 사회주의 담론을 유포시켰다. 북조선이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진해나간다고 규정함으로 인하여 김원봉과 같은 민족주의계열 항일 인사들은 실각되어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김원봉은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에서 해임되었고, 1958년 10월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어 모든 정치적 지위를 상실했다.

인물평[편집]

운암 김성숙은 그를 가리켜 '약산은 좋은 사람이요, 능력은 별로 없는 사람이지만 사람은 굉장히 좋아요. 혁명 지조가 있는 사람이고, 그러나 학식은 없다. 또 그를 가리켜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습니다. 동지들에 대해서도 굉장히 뜨거운 사람이었지요.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복시키고 설득시켜 자기의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모든 정열을 쏟아서 뜻을 이뤘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죽는 곳에 뛰어들기를 겁내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까? 그만큼 남으로 하여금 의욕을 내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김원봉의 가장 큰 능력이었습니다.[25]'라고 평하였다.


상훈[편집]

가계[편집]

남에서 가족들 중 남동생들은 모두 보도연맹 사건으로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김봉철(1918 - 1986)은 당시 생존하였다. 이복동생 김봉철은 4,18생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밀양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에 참여하였다. 옥살이를 하기도했다. 이후 1986년 사망하였고 대법원에서 재심결정 및 무죄를 판결받았다.[26] 현재 김원봉의 여동생 김학봉은 대한민국에서 생존해 있다.

대중문화의 작품[편집]

뮤지컬[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각주[편집]

  1. 조선민주청년동맹 결성대회 서울신문 중앙일보 1946년 04월 26일
  2. 허헌김원봉양씨 러—취장관방문 1947년 5월 22일 경향신문
  3.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 3당합당 지지 서울신문 1946년 8월 4일
  4. 어마어마한간첩단체포 김원봉이직접지휘 1954년 1월 26일 경향신문
  5. 시대의창 편집부, 《중국항일전쟁과 한국독립운동》 (김승일 역, 시대의창, 2005) 149페이지
  6.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1페이지
  7. 사상휘보 제14호(1938.3)(조선총독부고등법원사상부, 1938) 219~222페이지
  8.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 70페이지
  9. 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34페이지
  10. 민족주의자의 길(장준하 저, 세계사, 2002.05.02) 140페이지
  11.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지음, 돌베개 출판사, 2006.11.30) 165 페이지
  12. (26) 파쟁 속의 망명정부
  13. 장준하전집 1 : 돌베개(장준하, 세계사, 2001) 94~95페이지
  1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1권 60쪽
  15.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285쪽.
  16.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김자동 역, 일월서각) 331페이지
  17.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인물과사상사, 2004) 51~52쪽
  18.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948년 9월 11일. 1면. 
  19. 김삼웅, 약산 김원봉 평전 584쪽, 시대의창 2008년
  20. 이우탁《김구, 장보고, 앙드레김》(이우탁, 출판사 동아시아, 2006) 144페이지
  21. 김원봉)등수천명)을학살 1964.01.29 동아일보 7면
  22. 의열단 창설한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1990년 6월 22일 한겨레
  23. 《김일성선집》제5권 (평양:조선로동당출판사, 1960) p.310
  24. 전미영 교수의 분석 결과, '민주주의'가 언급된 담화 횟수가 1947년 31회, 1948년 22회, 1949년 13회였던 데 반해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언급된 담화 횟수는 각각 5회, 7회, 7회에 지나지 않았다. 이 3년간의 연설에서 '공산주의'를 언급한 담화 횟수는 전혀 없다.
  25. 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도서출판 민음사, 2005) 101
  26. 반세기만에 ‘친북 누명’ 벗은 독립투사 동생 2010-07-14 한겨레

참고 자료[편집]

전임
-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검열상
1948년 9월 ~ 1952년
후임
리승엽
전임
허성택
제2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노동상
1952년 5월 ~ 1958년 11월
전임
리승엽
제3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검열상
1953년 8월 ~ 1955년
후임
리효순
전임
홍명희
리극로
제3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57년 9월 ~ 1958년 10월
후임
홍명희
리극로
박금철
전임
홍명희
리극로
제3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국가부수반
1957년 9월 ~ 1958년 10월
후임
홍명희
리극로
박금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