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조선공산당
朝鮮共産黨 | |
약칭 | 공산당, CPK |
---|---|
상징색 | 적색 |
이념 |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 |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신화적 존재였던 이재유와 그의 동지들. 큰 사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 이관술, 이효정, 이순금, 박진홍. | |
역사
| |
창당 | 1925년 4월 17일(1차 설립) 1928년(1차 해체) 1945년 9월 11일(2차 설립) 1946년 11월 23일(2차 해체) |
해산 | 1946년 11월 23일 |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러시아어: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Кореи, 영어: Communist Party of Korea)은 1925년 4월 17일 창건된 공산주의 정당이자 독립운동 단체이다. 1928년 일본 제국의 탄압으로 해산되었지만 이재유 그룹, 권영태와 김희성 그룹, 원산의 이주하 그룹, 그리고 이들을 계승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최후 집결체 경성콤그룹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조선공산당원 및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활동가들은 6.10 만세 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그 연장선인 경성 여학생 운동 등의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국내 독립운동을 이끌었다.[1] 1930-1940년대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식민지의 노동자, 농민에 대한 헌신이라는 대의를 표방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2]
광복 후 1945년 8월 16일과 8월 20일 각각 장안파와 재건파가 출범하였다. 9월 8일 열성자대회를 열어 통합문제를 논의하여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정식 재건되었다. 독립운동 공로를 대중에게 인정받은 조선공산당은 최대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조작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이미지가 악화되어 1946년 11월 23일 해산되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수십 년간 조선공산당에 대한 이미지 조작에 이용되었으나 임성욱이 박사학위 논문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로 조작된 사건임을 밝혔다.[3]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활동 및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독립운동으로 인정하여 조선공산당원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하고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있다.
1925년 창당[편집]
공산당 창당[편집]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은 1919년 리다자오, 천두슈, 마오쩌둥 등이 중국 오사 운동에 참여한 이후 조선 유학생들이 일본과 중국 유학 기간 동안 그 운동의 영향을 접하면서 점차 수면으로 나오기 시작하였으며, 구소련의 10월 혁명에 그 영향을 동시에 받은 인사들이 중심축이 되어 조선공산당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엠엘파, 화요파, 서울파 등 파벌들의 난립으로 코민테른에서 서로 자기들이 조선공산당의 주동 세력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심각한 진통을 겪었다.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궤적에 따라서 1921년 1월 고려공산당 대회가 중국 상하이에서 열렸고, 1924년 12월 조선공산당 지부를 중국 베이징에 설립하였다. 1925년 4월 17일 서울 시내 식당 아서원에서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에 의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이 정식으로 창립되었고 초대 책임 비서로 김재봉(金在鳳)을 선출했다. 이어 4월 18일 박헌영의 집에서 당의 외곽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는 데 성공하고, 상하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였던 박헌영을 고려공청회 책임비서로 선임하였다. 이 당은 화요회 출신이 주동이 되어 이 당을 조직하였다고 하여 일명 '화요회당' 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1925년 11월, 김재봉이 일본 경찰에 의해 구속되면서 해체와 재건을 거듭한다.
공산당 창당 전문[편집]
조선공산당은 국제공산당이 그러함과 마찬가지로 그 한 지부로서 폭력혁명에 의거하여 공산주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조선문제로서는 공산당 지도 아래에 노동자 농민의 결합에 의하여 공동전선을 전개하고, 일본제국의 통치를 변혁하여 그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려는데 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자본주의들인 일본의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민족문제의 해결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일부로 된다. 조선에서의 혁명적 의의는 이와 같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민족운동을 원조함은 물론, 전술로서 민족주의적 단체와 제휴하여 이를 이용하는 것은 이미 배우고 있다. 노동운동으로, 소작쟁의로 파고들어간다. 학교의 맹휴도 그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조직에서는 각 방면의 야체이카를 부식하고, 모든 표현단체에 프락치를 만든다.
제1차 공산당 사건[편집]

김재봉과 박헌영은 공산당조직확대와 고려공산청년회원 모스크바파견훈련을 비밀리에 적극 추진하다가 1925년 11월 22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조선총독부 밀정에 의해 그 계획이 탄로되었고, 김재봉, 강달영 등이 체포되었다. 이후 신의주는 물론이고 간도에 있던 조선공산당의 근거지까지 수색, 곧 일제 경찰에 일망타진되었다. 이것이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이다.
제2차 공산당 사건[편집]
1925년 12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2차로 재조직되었다. 재조직된 공산당원들은 1차 공산당에 가담했던 인물들로, 당 책임비서에는 강달영(姜達永),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권오설(權五卨)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화요회의 요인이며 제1차 조선공산당의 당원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제2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은 사실상 제1차 당 및 공산청년회의 후속조직이었다. 그러나 '강달영당'으로 부른다. '강달영당'은 민족주의진영과 천도교 중진 등과도 접촉을 시도, 민족적 기반의 좌우연합당을 성취하려 하였다. 1926년 6·10 만세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3·1 운동을 재현하려던 강달영당의 계획은 거사 직전에 밀정에 의해 탄로되어 좌우연합당은 실현되지 못하고, 간부들은 구속되고 강달영당은 강제해산당했다. 이를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고 한다.
①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되, 국가의 최고급 일체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조직한 직접 · 비밀 · 보통 및 평등의 선거로 성립한 입법부에 있을 것
② 직접 · 비밀 · 보통 및 평등의 선거로 광대한 지방자치를 건설할 것
③ 전 국민의 무장을 실시하고 국민경찰을 조직할 것
④ 일본의 군대, 헌병 및 경찰을 조선에서 철폐할 것
⑤ 인민의 신체 혹 가택을 침범하지 못할 것
⑥ 무제한의 양심,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및 동맹파업의 자유를 가질 것
⑦ 문벌을 타파하고 전 인민이 절대평등의 권리를 가질 것
⑧ 여자를 모든 압박에서 해탈할 것
⑨ 공사 각 기관에서 조선어를 국어로 할 것
⑩ 학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무료 의무 및 보통 및 직업교육을 남녀 16세까지 실시할 것. 빈민 학령 자녀의 의식과 교육용품을 국가의 경비로 공급할 것
⑪ 각종 간접세를 폐지하고, 소득세 및 상속세를 누진율로 할 것
⑫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과 우의적 연맹을 체결할 것— 1926년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조선공산당 선언」[4]
정우회 선언[편집]
1926년 11월 일본에 있던 사회주의 유학생단체인 일월회(一月會)의 간부인 안광천(安光泉), 하필원(河弼源) 등이 국내에 비밀리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곧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을 무시하거나 경시하여서는 안 되며 종래의 경제투쟁형태를 정치투쟁형태로 바꾸어야 한다며 노선의 전환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을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이라고 한다. 이 선언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의 협동을 추진하자는 내부의 의견을 결집시켰다.
제3차 공산당 사건(ML당 사건)[편집]
12월 정우회선언에 따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이를 ML(M당이라고 한다. 이 당은 조선공산당사상 이른바 ‘파쟁청산의 통일적 당’이라고 한다. 코민테른은 ML당에 대하여 당조직 운영방침, 단일의 민족혁명전선 조직방침 및 운영방침 등에 대한 11개 조의 지령을 비밀리에 내려보냈으며 특히 단일 민족혁명전선의 운영방침을 명시한 것은 주목할만하다.
그러나 ML당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당책임비서를 김철수·안광천·김준연(金俊淵)·김세연(金世淵) 등으로 수시로 바꾸었지만, 그들은 1928년 2월 일경에 의해 검거되고 말았다. 이 당의 고려공산청년회도 당과 같은 이유로 책임비서로는 양명(梁明)·하필원·김철(金哲) 등으로 자주 바꾸다가 당과 함께 검거당하였다.
춘경원당[편집]
1927년 12월 정통파조선공산당에서 배제된 이영(李英) 등이 서울 춘경원(春景園)에서 ML당의 정통성을 탈취하기 위하여 ML당과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1928년 4월과 6월에 일제경찰에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비정통파 조선공산당 또는 춘경원당(春景園黨)이라고도 한다.
제4차 공산당 사건[편집]
1927년 5월 근우회가 발족되었고, 1928년 2월에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ML당 사건)으로 김준연 등 34명이 구속되었다. 7월에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170여명이 구속되었고, 9월에는 간도공산당사건이 일어나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제5차 공산당 사건[편집]
1929년 2월에는 원산노동연합회가 총독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원산 총파업 투쟁을 벌였다. 이주하 등 원산공산주의자그룹 조직원들은 원산 총파업의 참여자들이다.
그해 6월 제5차 공산당사건으로 인정식 등 50여 명이 구속되었다. 이때 안광천 등은 북경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편집]
대중운동[편집]
1930년에는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그 연장선인 경성 여학생 운동으로,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가 혼재된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의 사회주의 계열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근우회의 주요 간부로 허정숙이 있었다. 그리고 박진홍과 이효정을 비롯한 많은 경성 여학생 운동의 참여자가 이후 이재유 그룹의 핵심 활동가가 된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혁명 열기는 다음 글에서 엿볼 수 있다.
대중투쟁의 고양은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광주라는 한 지역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은 곧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일제타도와 민족해방이라는 구호 아래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광주학생운동에서 촉발된 대중 투쟁의 열기는 급속하게 공장으로 농촌으로 광산으로 확대되었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몇 년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노동자와 농민의 대규모 투쟁이 계속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보기로 1930년 1월의 부산 조선방직 파업, 1930년 5월과 6월의 신흥 장풍탄광 파업, 1930년 8월의 평양 고무공장 동맹 파업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파업 투쟁, 1929년 가을부터 다음 해 7월까지 계속된 용천 불이농장 소작쟁의, 1930년 3월의 정평농민동맹 집회 해금 투쟁, 1930년 7월의 단천 삼림조합 반대 투쟁, 1931년 5월의 홍원 호세(戶稅) 연납 진정 시위 투쟁, 1931년 11월의 삼척 도로공사비 불납 시위 투쟁, 1932년 3월의 양산농민조합 폭동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농민 폭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대중 투쟁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의 노력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음과 동시에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조선 혁명의 가능성이 더욱 성숙해진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운동 방침의 전환을 모색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일제 타도와 민족 해방 전취(戰取)라는 대중의 요구가 폭발하는 상황을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의 시기가 임박한 것으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 이준식, 조선공산당 재건운동[5]
반제동맹[편집]
192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국제반제동맹이 창립된 이후 반제동맹이라는 반제국주의 운동 단체가 전 세계적으로 만들어졌다. 경성반제동맹의 경우 이관술, 이순근, 조정래가 만들었다.[6]
경성트로이카와 1930년대 노동운동[편집]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코민테른이나 프로핀테른의 지시를 받는 국제선과 코민테른 등과 직접적 연계가 없고 국내파인 비국제선으로 나누어진다. 박헌영, 김형선, 김명시, 권영태, 김희성 등이 국제선이었고 이재유 그룹이 비국제선이었다. 김형선은 이재유에게 국제선에 대한 협력을 요구했는데, 이재유는 해외에서 어떻게 국내를 지도하냐고 답했다.
이재유가 국제선 사람들과 불화를 빚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이미 1933년에 재상해 '콤무니스트' 그룹의 국내 전권위원인 김형선과 미묘한 알력 관계를 보였다. 1934년에는 프로핀테른에서 파견된 권영태와 불화를 빚었다. 1935년에는 김승훈(金承塤), 1936년에는 김희성(金熙星) 등과 같은 국제선 사회주의자들과도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 때문에 이재유는 국제선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파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중략)
이재유는 엠엘파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간주된 듯하다. (중략) 국제선 기관지 '콤무니스트'에 따르면 당재건운동 대열 속에는 과거의 종파적 전통을 부활시키려 노력하는 그룹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4개 그룹이 거론되었다. 계급투쟁 그룹(엠엘파), 볼셰비키(서상파), 불살(재만주 화요파), 레닌주의(재북경 안광천․김원봉 그룹)가 그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그룹들을 ‘노골적인 종파’와 ‘복면적인 종파’로 구분한 데에 있다. 노골적인 종파라고 낙인찍힌 세력은 엠엘파 하나였다.
— 임경석, 국제선 공산주의 그룹과 박헌영[7]
코민테른 상해지부의 김단야의 명에 의해 파견되었던 김형선에 대하여도 그(이재유)는 국제선에서 파견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들 조직과의 제휴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1930년대부터 광복 순간까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한 핵심세력은 이재유 그룹이다. 이재유 그룹은 코민테른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를 거부하며 국제주의와 국내주의를 균형있게 추구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공산주의를 적절히 독립운동에 활용하였다.[8]
이재유 그룹은 전위당 이론을 거부하고 즉각적인 당 건설에 반대하였으며 '트로이카 운동'이라는 독창적인 조직론을 만들어서 대중운동에 기반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끌었다.
이재유를 중심으로 한 ‘경성트로이카’(1933. 8.)-‘경성재건그룹’(1934. 11.)-‘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1936. 10.)은 국제공산당과 그 산하의 국제적 지도기관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국내의 다른 그룹들에 대해 배타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갈등과 대립을 야기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재유는 당을 즉각적으로 건설하려는 방식을 반대하고, 생산현장에서의 대중 활동과 대중투쟁의 확대 · 강화를 통해 당재건의 인적 · 물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재유는 김삼룡 · 이성출 · 김형선 · 이순금 · 이현상 · 정태식 · 미야케(三宅鹿之助) 교수 등을 차례로 만나서 경성을 중심으로 한 ‘트로이카운동’을 제안했다. 즉 몇몇 지도부가 당을 먼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 마리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이끌듯이 회원 모두 저마다 자유롭게 활동하여 널리 동지를 획득하고, 때가 되면 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안병춘 · 이현상 · 변홍대는 노동운동, 최소복은 학생운동 조직을 나누어 맡았고, 이재유는 이를 총괄하기로 했다.—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2014
한편 이재유가 다음과 같이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을 묘사한 바 있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독립운동일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빈민운동이기도 했다.
“ | 처음 1~2년은 식사만 제공받을 뿐 무보수로 18~19시간 혹사당하며 (중략)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한달에 한번밖에 외출할 수 없고 외출할 때는 감독자가 따라 나간다. (중략) 그녀들은 언제나 80도 이상의 더운 곳에서 일하며 바람이 통할 구멍조차도 없는 곳에서 혹사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기 힘들지만 나의 경험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알고 있었던 5년 이상의 직공 8명 중에서 지금은 단지 2명밖에 있지 않고 6명은 모두 죽었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죽어야 할 사람만을 알았던가? | ” |
— 이재유가 묘사한 일제강점기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9]
|
이재유 그룹은 트로이카 운동을 통해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1기 트로이카 시절에는 안병춘, 이현상, 변홍대 등이 노동운동, 이경선, 최소복, 박진홍, 변우식, 이인행 등이 학생운동 조직을 맡았고, 이재유는 이를 총괄하기로 했다. 소화제사, 경성고무, 조선견직, 종연방직 등 여섯 군데 공장에서 파업을 일으키고 동덕여고 등 7개 중등학교의 동맹휴학과 친일교사 배척 등의 운동을 배후조종 하는 등 경성에 항일운동의 바람을 일으켰다.[10] 수많은 조직원이 활동했으나 검거로 한 차례 와해된다.[11]
이후 탈출한 이재유는 이순금과 박진홍의 중재로 이관술을 만났다.
“ | 재유 동무와 나와의 평생 잊을 수 없는 전우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중략) 나는 재유 동무로부터 그의 독특한 여러 가지 자세한 변장법과 생활구실(生活口實) 즉 여관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자고 주막에 가서는 무슨 핑계를 하고 자고 밥집에 가서는 무엇이라 하고 사먹고 하는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각종의 기술을 배웠다. | ” |
—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
이재유는 이관술, 박영출과 2기 경성트로이카라고 불리는 '경성재건그룹'을 만들었다. 경성재건그룹에서는 이재유는 출판, 이관술은 학생운동, 박영출은 노동운동 분야에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12]
박영출과 박진홍을 포함한 주요 조직원이 체포되자 이재유와 이관술은 피신하여 위장 형제로 같이 살며 3기 경성트로이카라고 불리는 '조선공산당 경성준비그룹'을 만들어 트로이카 방식의 운동을 지속했다.[13]
이재유는 경성에 드나들며 조직 재건을 담당하고 이관술은 각종 팸플릿과 기관지의 제작을 책임진다. 기관지 <적기>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명의로 발행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다 이루지 못한 선진적인 구호들을 담고 있다.[14]
① 민족적 계급적 정치적 투쟁의 자유
② 파업 농민의 행동에 대한 경찰 군대의 탄압 반대, 파업 농민투쟁의 자유, 노조 농조 기타 모든 근로자 조직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 부르조아 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 투쟁에 조정제도를 적용하는 것과 관헌 재판소 경찰 등이 간섭하는 것 반대.
③ 모든 사형제도의 철폐.
특히 정치범에 대한 사형 절대반대.
경찰횡포에 의한 모든 희생자와 정치범의 즉각 석방.
치안유지법, 출판법, 제령 제7호, 폭력행위취체법 철폐.④ 근로자의 출판집회언론 등의 무제한의 자유.
정치적 대중집회와 데모의 완전자유, 모든 경영내에서 경영위원회를 창립할 자유, 경영위원회의 승인.
프롤레타리아 자위단의 창설.⑤ 소작료 지불의 거절, 지주에 의한 농민수탈반대.
지주 고리대금업자 은행 크러스트 금융조합에 대한 농민의 모든 차금의 전멸.
잡세 지불거부, 수리조합비 지불거부.⑥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는 모든 법령의 철폐.
형평사에 대한 진정한 동정, 부인의 완전한 평등권, 모든 민족적 차별의 철폐.⑦ 반노예적 농노조건 반대.
기숙사제적 속박 반대[15].
노동자 및 청년에 대한 노예제도의 낡은 형태인 년기계약제의 반대[16].
부인, 청년의 이중착취반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부인아동의 공연 은묵의 매매제에 대한 형벌⑧ 부르조아적 산업합리화 반대
성인에 대한 하루 7시간 노동제
16세 미만의 소년에 대한 4시간 노동제
18세 미만의 청년에 대한 6시간 노동제
유년노동금지
1주 40시간제
1주 1회의 임금 전액 지불의 휴일과 1년 1회의 임금 지불의 2주간 휴가⑨ 임금의 전반적 인상
아내가 있는 노동자의 최저생활비 기준에 의한 최저임금 확립
임금에서 공제 선취의 금지
임금지불의 지체에 대한 형벌⑩ 부르조아 부담의 실업 질병 재해 노약 사망의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
— 이관술과 이재유가 만든《적기》의 슬로건[17]
이재유가 검거된 이후 1939년에는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 이현상 등 경성 트로이카 조직원을 주축으로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어갔다. 경성콤그룹에는 이후 화요파의 박헌영도 영입되었다.[18]
경성콤그룹과 일제 말 공산주의 조직들[편집]
이재유가 검거된 이후 당시의 한 신문은 이관술이 "원래부터 실천투사는 아니고 이재유의 심파(sympathizer의 약칭, 동조자, 동정자를 뜻함-인용자)적 존재로서 끌려들어간 것으로 이재유가 없는 이후에는 전혀 자멸할 수밖에 없고 종래와 같은 투쟁은 상상할 수 없으며 ... 이로써 반도 공산당 운동은 사실상 완전히 궤멸, 종식하기에 이르렀다"(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경성콩그룹에서의 운동까지 포함하여 이후 그의 활동은 이러한 평가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 김경일, 이재유 연구, 1993
경성트로이카(이재유 그룹)가 경성콤그룹의 주축이다.
경성콤그룹은 이재유 그룹의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 이현상, 정태식이 주축이 되어 조직한 것이다. 일제의 군국주의적 탄압 속에서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투쟁을 벌인 국내 운동의 최후 조직이었다.
— 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19]
주요 활동가들이 이재유 그룹 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동맹휴학과 파업으로 일제에 맞서 왔으나 경성콤그룹 활동 시기는 전시체제라 동맹휴학과 파업이 불가능하여 대신 경성콤그룹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20]
박헌영은 중간에 경성콤그룹 활동을 그만두고 은거했지만 이관술, 이현상, 김태준 등 경성콤그룹 조직원들은 검거되어 고문당했음에도 경찰로부터 탈출한 뒤 광복 순간까지 항거를 계속했다. 경성콤그룹의 첫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박헌영 영입 후 최고지도자 자리를 넘겼었으나 결국 끝까지 경성콤그룹을 이끈 지도자는 이관술이었다.

이관술은 ‘서대문서 사건’의 주역이었다. 서대문경찰서장 명의로 작성된 ‘검찰 송치서’에 따르면, 이관술은 관련 범죄자 42명 가운데 첫자리에 놓인 수괴였다. 범죄의 비중에 따라 나열된 피의자 명단의 첫자리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1. 이관술 2. 김삼룡 3. 이현상 등의 순서로 작성됐다. 경찰 취조도 이관술에게 집중됐다. 취조 결과를 담은 ‘피의자 이관술 신문조서’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작성된 것만도 도합 27회에 이른다. 다른 피의자들보다 두세 배 더 많았다.
이관술은 내심 두 가지 진술 전략을 세웠던 것 같다. 첫째, 경찰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안은 철저히 은폐한다는 전략이다. 아직 체포되지 않은 동지의 소재에 관한 문제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조직 내 비밀에는 그렇게 대응했다. 버티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 같다. 뒷날 이관술이 만신창이가 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의 야만적 살인적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동지 한 사람도 대지 않았”다. 그의 투쟁사를 빛나게 하는 영웅적 행위였다.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감옥투쟁에서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놈들도 송장 치르기 싫어 결국 보석”을 허용했다. 감옥 밖으로 나온 이관술의 모습은 처참했다.
단지 버티기만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개연성 있는 허위 진술을 병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 제3자를 마치 있는 양 허위로 진술하는 방안을 택했다. 바로 김단야[21]였다. 일본 경찰은 이 허위 진술을 날름 수용했다. 그리하여 사건 최종 보고서에 김단야가 마치 이관술의 상급자인 양 묘사했다. 경찰만이 아니었다. 경성콤그룹에 관한 초창기 연구[22] 성과도 이 허위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이런 인식은 일본 고등경찰이 품은 그림일 뿐이지 실제 사실은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이관술의 진술 투쟁이 승리를 거뒀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 임경석, 6년 9개월만에 체포된 이관술이 일제에 털어놓은 것은[23]
이관술은 1943년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탈출한 뒤 다시 비합법운동을 했다. 이현상도 병보석 뒤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운동을 계속했다.— 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24]
“ |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 ” |
— 김태준, 연안행
|
1944년 말~1945년 초에 이르러 조선건국동맹·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경성콤그룹 세력 등이 무장투쟁을 위해 비밀연락·연대를 활발히 벌였다.
— 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25]
원산 공산주의자 그룹[편집]
식민지 조선 북부에는 이주하 중심의 원산 공산주의자 그룹이 있었다.
원산그룹사건은 혜산사건[* 혜산사건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사건이다. 혜산사건은 이후 북한 갑산파가 되는 세력과 관계있다. 일제 경찰은 갑산파보다 이주하 그룹을 훨씬 높게 평가하는 게 흥미로운 부분.]과 달리 코민테른·중국공산당·일본공산당 등과 전연 연락 없이 완전히 사상적 전과자에 의한 일군의 적색노동조합 조직운동을 기초로 했으며, 아래로부터 시작된 점에서 현저한 특색이 있다. 테러 행위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수뇌부의 높은 사회주의 의식 수준, 인민전선전술의 정확한 파악, 그 운동 전개의 교묘한 점, 특히 대중 획득을 위한 적극적인 문서 활동의 전개 등은 혜산사건에 비할 바 아니고, 그 대상이 국경 산악지대의 의식수준이 낮은 농민과 원산 같은 수준 높은 노동자와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현저히 운동이 첨예화되고 있는 것으로 이 점 주목된다. 만약에 원산의 이 운동이 1, 2년 더 지속되었더라면 원산철도 2천 수백여 명의 종업원은 물론이고 원산의 노동자 대부분을 조직원으로 포섭하여 어느 때고 무장봉기에 동원할 준비가 완료되었을 것이다.
— 원산그룹에 대한 일제 경찰의 기록[26]
1945년 재건[편집]
조선공산당 정식 재건 이전 좌익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
---|
중앙인민위원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 이관술, 김구, 김성수, 김원봉, 이요설, 홍남표, 김병로, 신익희, 안재홍, 이주상, 조만식, 김기전, 최용달, 이강국, 김용암, 강진, 이주하, 하필원, 김계림, 박낙종, 김태준, 이만규, 이여성, 김일성, 정백, 김형선, 이정윤, 김점권, 한명찬, 유축운, 이승엽, 강기덕, 조두원, 이기석, 김철수, 김상혁, 정태식, 정종근, 조동호, 서중석, 박문규, 박광희, 김세용, 강병도, 이순근, 무정, 장기욱, 정진태, 이순금, 이상훈 |
후보위원 최창익, 황태성, 홍덕유, 이청원, 최근우, 김준연, 한빈, 양명, 최원택, 안기성, 정재달, 김오성, 권오직, 김두수, 장순명, 이광, 최성환, 이림수, 현준혁, 김덕영 |
고문 오세창, 권동진, 김창숙, 정운영, 이시영, 홍명희, 김항규, 김상은, 장도빈, 김용기, 김관식, 이영 |
조선공산당은 이후 1945년 9월 11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미군정으로부터 합법정당으로 인정받아 온건하게 미군정에 협조하였다. 조선공산당은 지금은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가 아니며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평화혁명론을 채택했다.[27]
해방 후 조선공산당 중앙이 공식 채택한 8월 테제는 무엇보다 사회주의 세력의 전통적 혁명론을 수정하여 평화혁명론, 곧 평화적인 사회주의 이행전략을 구체화하였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일제시기 이래 사회주의 세력의 일반적인 혁명노선은 무장봉기 노선이나 폭력혁명론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주의세력의 전략전술에서 평화혁명론의 가능성은 극히 제한적이거나 부정되어 왔지만,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의 혁명이행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평화혁명론은 기존의 전통적인 무장봉기전략을 철회하고, 평화적인 방식의 국가건설 전망을 도출하는 근거가 되었다.
(중략)
평화혁명론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가권력 장악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선거주의 이행노선에 가까웠다. 실제로 사회주의 세력은 정부수립의 방식으로 선거를 고려하고 있었다. 곧 인공수립이나 미소공위를 통한 정부수립의 마지막 절차도 총선거였다.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2005, p55~57
사회주의혁명의 과업과 성질을 운운하는 것과 같은 극좌적 경향과 싸워야 한다. (중략) 우리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의 중요 과업(완전 독립과 토지 혁명)을 완전 해결은커녕 이제 시초의 첫걸음을 내디디고 있는 처지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후략)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8월 테제
항일투쟁 공로를 대중에게 인정받기도 했고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으로 전국에 노동자 조직을 만들어놓았던 조선공산당은 최대정당이 되었다.
일제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로 출발하였던 이관술이 민족주의자들의 냉담, 비겁한 것과 일제와의 타협 등을 보고 오직 공산주의만이 계급의 이익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에서 유일한 지침이요 정당한 노선이란 결론을 얻어 공산주의자가 되어버렸다고 술회한 것은 비단 그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시기 공산주의자들의 대다수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차별에서 출발하였으며 그 기저에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사상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이 시기 공산주의 운동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 운동은 식민지의 노동자, 농민에 대한 헌신이라는 대의를 표방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제에 의해 체포, 고문, 학살되었던 것도 이 사상이 일제에 얼마나 위협적이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중략)
(이재유 조서에 따르면 이재유는)"처음에는 단지 민족의식에서 조선은 독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조선 적화의 수단으로서 조선 독립을 희망한 것이 아니라 조선 독립이 근본 문제라고 생각하여 그 취지에서 활동"하였다.
— 김경일, 이재유 연구, 1993
조선공산당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에 비판적 입장이었다. 1945년말 임정 요인들의 귀국 직전 조선공산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체제하에서 악전고투하며 구사일생해 온 것은 노농대중이고, 이들이 민족해방의 주체라고 주장하였다. 즉, 국내 혁명세력을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두고 여운형, 박헌영, 허헌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임정 추대에 반대하였다.[28]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민족통일자주독립촉성 서울시민대회를 열었다. 원래 서울시민대회는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대회였는데, 찬탁으로 입장을 바꾸어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였다.[29]
1946년 5월 미군정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라는 고문 조작 사건을 만들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30] 이재유 그룹 출신 조선공산당 지도자 이관술, 6.10 만세 운동 지도자 권오설의 동생 권오직, 3차 조선공산당 출신이자 김철수의 동지 박낙종, 송언필이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관술은 여론조사에서 박헌영과 득표율 차이가 별로 없고 김일성보다 높은 득표를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듯 대중적으로나 좌익 내부에서나 조선공산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다.[31]
조선을 이끌어갈 지도자 - 선구 여론조사 | ||
---|---|---|
순위 | 이름 | 득표율 |
1위 | 여운형 | 33% |
2위 | 이승만 | 21% |
3위 | 김구 | 18% |
4위 | 박헌영 | 16% |
5위 | 이관술 | 12% |
6위 | 김일성 | 9% |
7위 | 최현배 | 7% |
8위 | 김규식 | 6% |
9위 | 서재필 | 5% |
10위 | 홍남표 | 5% |
백분율의 합이 100%를 넘는 것은 복수 응답이 있었기 때문임. |
독립운동가 이관술은 친일파 고문기술자 노덕술과 악연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노덕술은 이관술을 수차례 잔혹하게 고문했는데 해방 후 노덕술은 정판사 사건 조작에 가담했다.
(일제강점기 반제동맹, 경성콤그룹 사건 당시) 노의 고문에 한번 걸려들면 전부다 고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든지,두가지 길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관술만은 고백하지도, 죽지도 않았다. 이관술이 두번째 체포되어 또 노의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노는 자기의 고문기술 기록을 이관술이 깼다고 두번째에는 바로 죽도록 고문했다. 그러나 이관술은 끝까지 버텨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래서 고문마 노덕술에게 이긴 이관술이라 하여 이관술의 이름은 독립운동자들 가운데는 불사조와 같이 전파됐었다.
(중략) (광복 후 정판사 사건 당시) 그때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일제때 고문왕으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이었다. 장택상의 진의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노덕술이 필사적으로 이관술을 체포했다. 얼굴은 권오직이 더 노출되어 있었는데도 권오직은 체포되지 않았다. 이관술과 노덕술과의 만남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이관술과 노덕술은 다 같은 울산 사람이었다. 노는 해방되면서 일제고등계 경찰에서 미군정 경찰로 옮겼고 도리어 영전됐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관술이 살아있으면 자기의 전죄가 언젠가는 폭로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이관술은) 조국독립 이외에는 세속지사에는 아무 흥미가 없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나서 독립운동한다고 몇번 경찰에 잡혀 죽을 고문만 당하고 6ㆍ25때 교도소 안에서 죽은 사람이다.
— 박갑동
이후 이관술, 박낙종, 송언필은 6.25 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국군이 형무소 재소자를 학살할 당시 학살당한다.
정판사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은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대중의 지지를 잃게 된다. 공산당 내부적으로는 이관술은 중앙검열위원 서열 1위였던 공산당 최고위직 실권자로서 박헌영 반대파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조율하는 중재자 역할을 해왔는데 중재역이 사라지게 된다. 예컨대 공산당 연석회의에서 이관술은 반박헌영파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했다.[34]
8시간이 넘게 계속된 이날 회의[35]에서 이관술이 어떤 발언을 했는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그는 한 마디 발언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영등포 등 내분이 일어난 지구당의 반대파들이 이관술을 중재자로 요청했다는 발언으로 보아 이관술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지 않았던 듯하다. 이관술의 조정 역할이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날의 연석회의가 끝난 후 박헌영은 반대파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들 중 일부를 중앙당 간부로 영입하고 얼마 후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해 진보세력의 통합을 꾀한다.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정판사 사건에 대응하여 조선공산당은 신전술이라는 강경 노선을 채택하였다. 조선공산당의 영향을 받는 노조의 노동자들이 9월 총파업을 벌이는 등 조선공산당과 산하 단체는 지금까지 우호적이었던 미군정에 파업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적대적 선전활동이 맥아더 포고령 위반이라며 조선공산당 간부에게 체포령을 내린다.
9월 총파업 도중 경찰이 노동자에게 발포하자 대구 시민이 분노해서 대구 10.1 사건이 일어난다.
파냐 이삭꼬브나 샤브쉬나에 따르면, 대구 10.1 사건 이전에도 좌익에 대한 테러에 시민들이 분노하곤 했다.
사람들이 한 아가씨가 좌익 시위에 참여하라는 호소문을 벽에 붙였다는 이유로 그녀를 두들겨 팼다. 몇몇 여자들이 미국 경찰에게 달려가 이 구타를 중지시켜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것은 조선인들의 내부 문제다. 우리와 상관없다."라는 익히 알고 있는 대답을 들었다. 그때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깡패들의 손아귀에서 피범벅이 된 여학생을 구해내었다. "바로 이렇게 일본 압제자들이 우리를 구타했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두들겨 팼었다. 심지어 아이들조차도 용서하지 않았다." 나이든 농촌 아낙네가 그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큰 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러한 광경이 1946년 서울의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 파냐 이삭꼬브나 샤브쉬나, 1945년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은 대중정당이 되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다른 좌파 정당과의 합당을 추진했다.
조선공산당은 11월 23일 해산하였다. 공산당 대회파(=반박헌영파)는 사회노동당을 결성하였고 같은 시기에 공산당 간부파(=박헌영파)는 남조선로동당을 결성하였다.[36]
조선공산당 지도자[편집]
제1차 조선공산당[편집]
제2차 조선공산당[편집]
- 3대 : 강달영 1926년 2월 -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가담, 실패로 해산(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제3차 조선공산당(속칭 M.L당)[편집]
비정통파 조선공산당[편집]
(속칭 춘경원당(春景園黨))
제4차 조선공산당[편집]
- 8대 : 차금봉(車今奉, 노동자 출신 최초의 당수), 1928년 3월 ~ 1928년 7월, 7월 일제에 의해 170명 차금봉·김재명 등 고문치사, 170명의 구속·검거로 사실상 조직이 와해됨,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
-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고광수(高光洙)
조선공산당 재건운동[편집]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지도자는 이재유, 이관술, 이주하, 김삼룡, 이현상 등이 대표적이다.
장안파 조선공산당[편집]
재건파 조선공산당[편집]
역대 당내 관련 사안[편집]
역대 정당 당원[편집]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여와 독립유공자 지정의 역사[편집]
노무현 정부 이전에도 다수 조선공산당원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으나, 조선공산당 활동 자체로 인해 유공자 지정을 받은 것은 아니고 다른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아서이다.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8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였다. 1977년 이재유·이관술과 함께 경성재건그룹 지도부였던 박영출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였다.
대한민국은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3년 조선공산당 기관지를 만드는 활동을 했던 최창식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 1990년 강달영, 1991년 김준연 등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일제하 사회주의운동가에 대해서도 유공자로 인정하겠다고 발표하고 1993년 임원근 등 조선공산당원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38]
노무현 정부는 조선공산당의 활동을 독립운동으로 인정하며, 김재봉, 권오설, 김철수, 차금봉, 이재유, 이효정, 김조이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공산당원을 대거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 이후 집권여당의 성향에 관계없이 계속 더 많은 조선공산당원을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의 대부분의 지도자와 수많은 당원이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 시기 대한민국은 독립유공자 지정 기준을 완화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기여하지 않았으면 독립유공자로 지정할 수 있게 하여 이경선을 포함한 많은 조선공산당, 남조선로동당 당원을 유공자로 지정하였다. 이에 따라 윤석열 정부에서 김명시 등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 지정 기준이 불명확하여, 이관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과 전혀 관계 없고 국가보안법을 위반하거나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한 적도 없이 합법 정당 활동만 했는데 불명확한 이유로 독립유공자 지정을 받지 못하였다.
"제가 7살인가? 평생에 우리 아버지를 딱 한 번 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였다 해서 범서(면) 입암리 집에는 일본 순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6·25가 터지자 그런 아버지에 대한 영광은 간 곳 없고… 저는 천하의 불쌍한 고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막내딸은 평생 아버지 부재의 삶을 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태로운 삶을 지탱해주던 후견자들도 난리를 겪으면서 스러져갔다. 엄마 박가야와 두 언니(성옥, 정성)는 6·25 전란 중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비명횡사했는지 아니면 월북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9살에 시집간 큰언니 이정환은 결혼 2년 만에 보도연맹 학살 탓에 남편을 잃었다. 갓난애 하나를 키우며 50 평생을 가난하고 외로운 과부로 살아야만 했다. 작은아버지 이학술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전쟁 초입에 학살당했다. 오직 막내딸 경환이만 남았다.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 즈음 ‘천하의 불쌍한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임경석, 일본 경찰 따돌린 아버지도 딸의 얼굴이 궁금하단다[39]
독립운동 단체로서의 조선공산당을 다루는 대중매체[편집]
- 안재성의 소설 <경성 트로이카>는 이재유가 주인공이다. 조연으로 김삼룡, 이현상, 이관술, 이효정, 이순금, 박진홍 등 경성트로이카 독립운동가들이 나온다.
- 김소영의 영화 <SFdrome: 주세죽>은 주세죽이 주인공이다.
- 안재성의 소설 <명시>는 김명시가 주인공이다.
- 황석영의 소설 <철도원 삼대>는 이재유와 박헌영이 나오며, 이관술과 이순금은 이관수와 이금순으로 이름이 바뀌어 나온다.
- 박현주의 소설 <랑월>은 대전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나온다.
같이 보기[편집]
- 6.10 만세 운동
- 광주학생항일운동
- 경성 여학생 운동
- 원산 총파업
- 고려공산당
- 엠엘파
- 화요파
- 경성트로이카
- 경성콤그룹
-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 9월 총파업
- 대구 10.1 사건
- 남조선로동당
외부 링크[편집]
- 임성욱은 박사학위 논문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로 정판사 사건이 조작된 사건임을 밝혔다.
- 복원된 정판사 사건의 재판기록은 임성욱 박사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각주[편집]
- ↑ 이준식,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 ↑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 ↑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 ↑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 ↑ 이준식,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 ↑ 박한용, 일제강점기 조선 반제동맹 연구, 2013
- ↑ 국제선 공산주의그룹과 박헌영
- ↑ 김경일, 이재유 연구, 1993
- ↑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 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 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이재유가 묘사한 당시 여성 노동자의 환경 중 기숙사에 속박당하는 처지와 관계된다.
- ↑ 현대의 비정규직 반대와 비슷한 요구이다.
- ↑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 ↑ 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 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
- ↑ 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 김단야는 경성콤그룹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죽었다.
- ↑ 신주백의 논문 <박헌영과 경성콩그룹>을 말한다.
- ↑ 6년 9개월만에 체포된 이관술이 일제에 털어놓은 것은
- ↑ 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 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
- ↑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제38회 역사에서 사라진 원산그룹
- ↑ 김무용, 해방 후 조선공산당의 노선과 국가건설 운동
-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119쪽.
- ↑ 《우리역사의 수수께끼》/이덕일외 공저/김영사
- ↑ 임성욱,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2015
- ↑ 강양구,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 ↑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공산당 지도부의 연석회의로 중앙파와 반대파가 서로 인격적 모욕까지 하며 난상토론했다.
- ↑ 임영태, 다시 보는 해방전후사 이야기
- ↑ 인터넷 경향신문 - 경향닷컴 | Kyunghyang.com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임경석, 일본 경찰 따돌린 아버지도 딸의 얼굴이 궁금하단다
공산주의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