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선공산당
朝鮮共産黨
약칭 공산당, CPK
상징색 적색
이념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신화적 존재였던 이재유와 그의 동지들. 큰 사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 이관술, 이효정, 이순금, 박진홍.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신화적 존재였던 이재유와 그의 동지들. 큰 사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재유, 김삼룡, 이현상, 이관술, 이효정, 이순금, 박진홍.
역사
창당 1925년 4월 17일(1차 설립)
1928년(1차 해체)
1945년 9월 11일(2차 설립)
1946년 11월 23일(2차 해체)
해산 194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러시아어: Коммунистическая партия Кореи, 영어: Communist Party of Korea)은 1925년 4월 17일 창건된 공산주의 정당이자 독립운동 단체이다. 1928년 일본 제국의 탄압으로 해산되었지만 이재유 그룹, 권영태 그룹, 원산의 이주하 그룹, 그 외 여러 '콩그룹', 그리고 이들을 계승한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최후 집결체 경성콤그룹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으로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조선공산당원 및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활동가들은 6.10 만세 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연장선인 경성 여학생 운동, 원산 총파업 등의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광복 후 1945년 8월 16일8월 20일 각각 장안파와 재건파가 출범하였다. 8월 24일 장안파가 해산되고 9월 8일 열성자대회를 열어 통합문제를 논의하여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정식 재건되었다가 1946년 11월 23일 해산되었다.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 활동 및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독립운동으로 인정하여 조선공산당원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수여하고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조선공산당원에 대한 독립유공자 지정의 역사는 오래되어, 1977년 이재유·이관술과 함께 경성재건그룹 지도부였던 박영출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한 바 있다.

1925년 창당[편집]

공산당 창당[편집]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은 1919년 리다자오, 천두슈, 마오쩌둥 등이 중국 오사 운동에 참여한 이후 조선 유학생들이 일본과 중국 유학 기간 동안 그 운동의 영향을 접하면서 점차 수면으로 나오기 시작하였으며, 구소련의 10월 혁명에 그 영향을 동시에 받은 인사들이 중심축이 되어 조선공산당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엠엘파, 화요파, 서울파 등 파벌들의 난립으로 코민테른에서 서로 자기들이 조선공산당의 주동 세력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심각한 진통을 겪었다.

중국공산당의 역사적 궤적에 따라서 1921년 1월 고려공산당 대회가 중국 상하이에서 열렸고, 1924년 12월 조선공산당 지부를 중국 베이징에 설립하였다. 1925년 4월 17일 서울 시내 식당 아서원에서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에 의해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이 정식으로 창립되었고 초대 책임 비서로 김재봉(金在鳳)을 선출했다. 이어 4월 18일 박헌영의 집에서 당의 외곽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는 데 성공하고, 상하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였던 박헌영을 고려공청회 책임비서로 선임하였다. 이 당은 화요회 출신이 주동이 되어 이 당을 조직하였다고 하여 일명 '화요회당' 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1925년 11월, 김재봉일본 경찰에 의해 구속되면서 해체와 재건을 거듭한다.

공산당 창당 전문[편집]

조선공산당은 국제공산당이 그러함과 마찬가지로 그 한 지부로서 폭력혁명에 의거하여 공산주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조선문제로서는 공산당 지도 아래에 노동자 농민의 결합에 의하여 공동전선을 전개하고, 일본제국의 통치를 변혁하여 그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려는데 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 국가 건설을 위해서는 자본주의들인 일본의 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민족문제의 해결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일부로 된다. 조선에서의 혁명적 의의는 이와 같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민족운동을 원조함은 물론, 전술로서 민족주의적 단체와 제휴하여 이를 이용하는 것은 이미 배우고 있다. 노동운동으로, 소작쟁의로 파고들어간다. 학교의 맹휴도 그 대상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 조직에서는 각 방면의 야체이카를 부식하고, 모든 표현단체에 프락치를 만든다.

제1차 공산당 사건[편집]

1927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 조선공산당 검거와 재판을 다룬 당시 신문기사다. 본래 이 검거사건은 1925년 말에 일어났는데, 일제의 보도 통제로 전혀 보도되지 않다가 1927년에 가서야 처음으로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기사 내용은 책임비서 김재봉을 비롯한 재판을 받은 관계자들의 사진과 조직표가 신문 전면을 채우고 있다.

김재봉과 박헌영은 공산당조직확대와 고려공산청년회원 모스크바파견훈련을 비밀리에 적극 추진하다가 1925년 11월 22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조선총독부 밀정에 의해 그 계획이 탄로되었고, 김재봉, 강달영 등이 체포되었다. 이후 신의주는 물론이고 간도에 있던 조선공산당의 근거지까지 수색, 곧 일제 경찰에 일망타진되었다. 이것이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이다.

제2차 공산당 사건[편집]

6.10 만세 운동 지도자인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권오설
권오설의 동생 권오직은 이관술이 주도한 경성콤그룹의 활동가이다.

1925년 12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극비리에 2차로 재조직되었다. 재조직된 공산당원들은 1차 공산당에 가담했던 인물들로, 당 책임비서에는 강달영(姜達永),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에는 권오설(權五卨)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화요회의 요인이며 제1차 조선공산당의 당원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제2차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재건은 사실상 제1차 당 및 공산청년회의 후속조직이었다. 그러나 '강달영당'으로 부른다. '강달영당'은 민족주의진영과 천도교 중진 등과도 접촉을 시도, 민족적 기반의 좌우연합당을 성취하려 하였다. 1926년 6·10 만세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3·1 운동을 재현하려던 강달영당의 계획은 거사 직전에 밀정에 의해 탄로되어 좌우연합당은 실현되지 못하고, 간부들은 구속되고 강달영당은 강제해산당했다. 이를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이라고 한다.

정우회 선언[편집]

1926년 11월 일본에 있던 사회주의 유학생단체인 일월회(一月會)의 간부인 안광천(安光泉), 하필원(河弼源) 등이 국내에 비밀리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곧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을 무시하거나 경시하여서는 안 되며 종래의 경제투쟁형태를 정치투쟁형태로 바꾸어야 한다며 노선의 전환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을 정우회선언(正友會宣言)이라고 한다. 이 선언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의 협동을 추진하자는 내부의 의견을 결집시켰다.

제3차 공산당 사건(ML당 사건)[편집]

3차 조선공산당 지도자인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김철수. 광복 후에는 반박헌영파, 반중앙파, 대회파에서 좌우합작 운동에 전념했다.
김철수의 동생 김광수
3차 조선공산당원인 독립운동가 박낙종
3차 조선공산당원인 독립운동가 송언필

12월 정우회선언에 따라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었다. 이를 ML(M당이라고 한다. 이 당은 조선공산당사상 이른바 ‘파쟁청산의 통일적 당’이라고 한다. 코민테른은 ML당에 대하여 당조직 운영방침, 단일의 민족혁명전선 조직방침 및 운영방침 등에 대한 11개 조의 지령을 비밀리에 내려보냈으며 특히 단일 민족혁명전선의 운영방침을 명시한 것은 주목할만하다.

그러나 ML당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당책임비서를 김철수·안광천·김준연(金俊淵)·김세연(金世淵) 등으로 수시로 바꾸었지만, 그들은 1928년 2월 일경에 의해 검거되고 말았다. 이 당의 고려공산청년회도 당과 같은 이유로 책임비서로는 양명(梁明)·하필원·김철(金哲) 등으로 자주 바꾸다가 당과 함께 검거당하였다.

춘경원당[편집]

1927년 12월 정통파조선공산당에서 배제된 이영(李英) 등이 서울 춘경원(春景園)에서 ML당의 정통성을 탈취하기 위하여 ML당과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1928년 4월과 6월에 일제경찰에 일망타진되고 말았다. 비정통파 조선공산당 또는 춘경원당(春景園黨)이라고도 한다.

제4차 공산당 사건[편집]

1927년 5월 근우회가 발족되었고, 1928년 2월에 제3차 조선공산당사건(ML당 사건)으로 김준연 등 34명이 구속되었다. 7월에는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170여명이 구속되었고, 9월에는 간도공산당사건이 일어나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다.

제5차 공산당 사건[편집]

1929년 2월에는 원산노동연합회가 총독부의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원산 총파업 투쟁을 벌였다. 이주하 등 원산공산주의자그룹 조직원들은 원산 총파업의 참여자들이다.

그해 6월 제5차 공산당사건으로 인정식 등 50여 명이 구속되었다. 이때 안광천 등은 북경에서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편집]

1930년에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연장선인 경성 여학생 운동으로,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가 혼재된 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사회주의 계열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었다. 근우회의 주요 간부로 허정숙이 있었다. 그리고 박진홍과 이효정을 비롯한 많은 경성 여학생 운동의 참여자가 이후 이재유 그룹의 핵심 활동가가 된다.

당시 반제동맹이라는 반제국주의 운동 단체가 전국적으로 만들어졌다. 경성반제동맹의 경우 이관술, 이순근 등이 활동했다.[1]

경성반제동맹 활동가 이관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코민테른이나 프로핀테른의 지시를 받는 국제선과 코민테른 등과 직접적 연계가 없고 국내파인 비국제선으로 나누어진다. 박헌영, 김형선, 권영태, 김희성 등이 국제선이었고 이재유 그룹이 비국제선이었다.

이재유가 국제선 사람들과 불화를 빚은 것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이미 1933년에 재상해 '콤무니스트' 그룹의 국내 전권위원인 김형선과 미묘한 알력 관계를 보였다. 1934년에는 프로핀테른에서 파견된 권영태와 불화를 빚었다. 1935년에는 김승훈(金承塤), 1936년에는 김희성(金熙星) 등과 같은 국제선 사회주의자들과도 긴장관계에 있었다. 이 때문에 이재유는 국제선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 종파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중략)


이재유는 엠엘파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간주된 듯하다. (중략) 국제선 기관지 '콤무니스트'에 따르면 당재건운동 대열 속에는 과거의 종파적 전통을 부활시키려 노력하는 그룹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4개 그룹이 거론되었다. 계급투쟁 그룹(엠엘파), 볼셰비키(서상파), 불살(재만주 화요파), 레닌주의(재북경 안광천․김원봉 그룹)가 그들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그룹들을 ‘노골적인 종파’와 ‘복면적인 종파’로 구분한 데에 있다. 노골적인 종파라고 낙인찍힌 세력은 엠엘파 하나였다.

— 임경석, 국제선 공산주의 그룹과 박헌영[2]

1930년대부터 광복 순간까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한 핵심세력은 이재유 그룹이다. 이재유 그룹은 코민테른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를 거부하며 국제주의와 국내주의를 균형있게 추구하여 조선의 현실에 맞게 공산주의를 적절히 독립운동에 활용하였다.[3]

이재유 그룹은 전위당 이론을 거부하고 즉각적인 당 건설에 반대하였으며 '트로이카 운동'이라는 독창적인 조직론을 만들어서 대중운동에 기반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끌었다.

이재유를 중심으로 한 ‘경성트로이카’(1933. 8.)-‘경성재건그룹’(1934. 11.)-‘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1936. 10.)은 국제공산당과 그 산하의 국제적 지도기관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국내의 다른 그룹들에 대해 배타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갈등과 대립을 야기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재유는 당을 즉각적으로 건설하려는 방식을 반대하고, 생산현장에서의 대중 활동과 대중투쟁의 확대 · 강화를 통해 당재건의 인적 · 물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재유는 ‘트로이카운동’을 제안했다. 즉 몇몇 지도부가 당을 먼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 마리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이끌듯이 회원 모두 저마다 자유롭게 활동하여 널리 동지를 획득하고, 때가 되면 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2014

이재유 그룹은 트로이카 운동을 통해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1기 트로이카 시절에는 안병춘, 이현상, 변홍대, 김삼룡, 이순금이 노동운동, 이경선, 최소복이 학생운동 조직을 맡았고, 이재유는 이를 총괄하기로 했다. 소화제사, 경성고무, 조선견직, 종연방직 등 여섯 군데 공장에서 파업을 일으키고 동덕여고 등 7개 중등학교의 동맹휴학과 친일교사 배척 등의 운동을 배후조종 하는 등 경성에 항일운동의 바람을 일으켰다.[4] 수많은 조직원이 활동했으나 검거로 한 차례 와해된다.[5]

동덕여고보 졸업앨범. 왼쪽부터 교사 이관술, 학생 이순금, 이종희, 이효정이다.

이후 탈출한 이재유는 이순금과 박진홍의 중재로 이관술을 만났다. 이재유는 이관술, 박영출과 2기 경성트로이카라고 불리는 '경성재건그룹'을 만들었다. 경성재건그룹에서는 이재유는 출판, 이관술은 학생운동, 박영출은 노동운동 분야에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6]

일본 제국 경찰이 그린 경성재건그룹 조직도. 맨 위에 박영출, 이관술, 이재유의 이름이 있다.

박영출과 박진홍을 포함한 주요 조직원이 체포되자 이재유와 이관술은 피신하여 위장 형제로 같이 살며 3기 경성트로이카라고 불리는 '조선공산당 경성준비그룹'을 만들어 트로이카 방식의 운동을 지속했다.[7]

이관술과 이재유가 살았던 노해면(창동) 아지트. <매일신보> 1937.4.30.

이재유는 경성에 드나들며 조직 재건을 담당하고 이관술은 각종 팸플릿과 기관지의 제작을 책임진다. 기관지 <적기>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명의로 발행되었다. 오늘날까지도 다 이루지 못한 선진적인 구호들을 담고 있다.[8]

① 노동자 파업투쟁의 자유, 즉 파업에 대한 경찰과 군대의 탄압 절대 반대

② 노동조합, 그 밖의 모든 노동자 조직의 자유

③ 노동자를 탄압하는 모든 악법 반대. 특히 치안유지법·출판법·폭력행위취체령, 제령 7호 반대

④ 모든 정치범 즉시 석방, 사형제도 반대

⑤ 노동자의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 정치적 집회·데모의 자유

⑥ 일체 경영위원회 창설의 자유, 프롤레타리아 자위단 창설의 자유

⑦ 노동자에 대한 일체의 봉건적·기숙사제적 속박 반대

⑧ 하루 7시간(1주 40시간) 노동제 획득

⑨ 야전적 노동강화, 대우 개악, 임금인하, 시간연장 등 부르주아적 산업합리화 절대 반대

⑩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제 획득

⑪ 부인·아동의 연기계약(年期契約)제와 매매제 절대 반대

⑫ 모든 노동자 조직 안에 좌익 결성

⑬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 강화

⑭ 경성을 아우르는 산업별 노동조합 촉성

⑮ 전국적 산업별 노동조합 촉진

— 이재유와 이관술이 만든《적기》의 슬로건

이재유가 검거된 이후 1939년에는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 이현상경성 트로이카 조직원을 주축으로 경성콤그룹을 결성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이어갔다. 경성콤그룹에는 이후 화요파의 박헌영도 영입되었다.[9]

이재유 체포를 보도한 <경성일보> 기사 "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궤멸되다"
이재유 사건의 거두 이관술 출현설. <매일신보> 1937.7.23.

이재유가 검거된 이후 당시의 한 신문은 이관술이 "원래부터 실천투사는 아니고 이재유의 심파(sympathizer의 약칭, 동조자, 동정자를 뜻함-인용자)적 존재로서 끌려들어간 것으로 이재유가 없는 이후에는 전혀 자멸할 수밖에 없고 종래와 같은 투쟁은 상상할 수 없으며 ... 이로써 반도 공산당 운동은 사실상 완전히 궤멸, 종식하기에 이르렀다"(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경성콩그룹에서의 운동까지 포함하여 이후 그의 활동은 이러한 평가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 김경일, 이재유 연구, 1993

주요 활동가들이 이재유 그룹 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동맹휴학과 파업으로 일제에 맞서 왔으나 경성콤그룹 활동 시기는 전시체제라 동맹휴학과 파업이 불가능하여 대신 경성콤그룹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10]

이관술을 비롯한 경성콤그룹 피고인 명단. 이들은 모두 살인적인 고문 수사를 겪었다.

박헌영은 중간에 경성콤그룹 활동을 그만두고 은거했지만 이관술, 이현상, 김태준 등 경성콤그룹 조직원들은 검거되어 고문당했음에도 경찰로부터 탈출한 뒤 광복 순간까지 항거를 계속했다.

이관술은 1943년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탈출한 뒤 다시 비합법운동을 했다. 이현상도 병보석 뒤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운동을 계속했다.

— 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11]

박헌영은 광주에 은거하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경성콤그룹으로 옥살이를 하고 나와서도 운동을 계속하려는 이들은 하나같이 박헌영을 찾으려 했으나 그는 요지부동 숨어 있었다. 사실상 무책임한 도피라 할 만했다.

—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

1945년 재건[편집]

조선공산당은 이후 1945년 9월 11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재건되었다. 미군정으로부터 합법정당으로 인정받아 온건하게 미군정에 협조하었다. 항일투쟁 공로를 대중에게 인정받기도 했고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으로 전국에 노동자 조직을 만들어놓았던 조선공산당은 최대정당이 되었다.

일제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로 출발하였던 이관술이 민족주의자들의 냉담, 비겁한 것과 일제와의 타협 등을 보고 오직 공산주의만이 계급의 이익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에서 유일한 지침이요 정당한 노선이란 결론을 얻어 공산주의자가 되어버렸다고 술회한 것은 비단 그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시기 공산주의자들의 대다수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차별에서 출발하였으며 그 기저에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사상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이 시기 공산주의 운동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 운동은 식민지의 노동자, 농민에 대한 헌신이라는 대의를 표방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제에 의해 체포, 고문, 학살되었던 것도 이 사상이 일제에 얼마나 위협적이었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중략)

(이재유 조서에 따르면 이재유는)"처음에는 단지 민족의식에서 조선은 독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조선 적화의 수단으로서 조선 독립을 희망한 것이 아니라 조선 독립이 근본 문제라고 생각하여 그 취지에서 활동"하였다.

— 김경일, 이재유 연구, 1993

조선공산당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에 비판적 입장이었다. 1945년말 임정 요인들의 귀국 직전 조선공산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헌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체제하에서 악전고투하며 구사일생해 온 것은 노농대중이고, 이들이 민족해방의 주체라고 주장하였다. 즉, 국내 혁명세력을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에 두고 여운형, 박헌영, 허헌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이 그것을 이어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임정 추대에 반대하였다.[12]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민족통일자주독립촉성 서울시민대회를 열었다. 원래 서울시민대회는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대회였는데, 찬탁으로 입장을 바꾸어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였다.[13]

1946년 5월 미군정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라는 고문 조작 사건을 만들어 조선공산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14] 이에 조선공산당은 신전술이라는 강경 노선을 채택하였고 이에 영향받은 노동자들이 9월 총파업을 벌이던 중 대구 10.1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약화되어 11월 23일 해산한 뒤 다른 좌파 정당과의 합당을 통해 남조선로동당이 되었다.

조선공산당 지도자[편집]

제1차 조선공산당[편집]

제2차 조선공산당[편집]

제3차 조선공산당(속칭 M.L당)[편집]

비정통파 조선공산당[편집]

(속칭 춘경원당(春景園黨))

제4차 조선공산당[편집]

  • 8대 : 차금봉(車今奉, 노동자 출신 최초의 당수), 1928년 3월 ~ 1928년 7월, 7월 일제에 의해 170명 차금봉·김재명 등 고문치사, 170명의 구속·검거로 사실상 조직이 와해됨,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
    •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고광수(高光洙)

조선공산당 재건운동[편집]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지도자는 이재유, 이관술, 이주하, 김삼룡, 이현상 등이 대표적이다.

장안파 조선공산당[편집]

재건파 조선공산당[편집]

역대 당내 관련 사안[편집]

역대 정당 당원[편집]

대한민국 건국훈장 수여와 독립유공자 지정의 역사[편집]

대한민국의 조선공산당원에 대한 독립유공자 지정의 역사는 오래되어,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77년 이재유·이관술과 함께 경성재건그룹 지도부였던 박영출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였다.

대한민국은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3년 조선공산당 기관지를 만드는 활동을 했던 최창식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 1990년 강달영, 1991년 김준연 등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일제하 사회주의운동가에 대해서도 유공자로 인정하겠다고 발표하고 1993년 임원근 등 조선공산당원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16]

노무현 정부는 조선공산당의 활동을 독립운동으로 인정하며 윤자영, 김재봉, 권오설, 김철수, 차금봉, 이재유, 이효정, 김조이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공산당원을 대거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 이후 집권여당의 성향에 관계없이 계속 더 많은 조선공산당원을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공산당의 대부분의 지도자와 수많은 당원이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 시기 대한민국은 독립유공자 지정 기준을 완화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에 기여하지 않았으면 독립유공자로 지정할 수 있게 하여 많은 조선공산당, 남조선로동당 당원을 유공자로 지정하였다. 이에 따라 윤석열 정부에서 김명시 등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 지정 기준이 불명확하여, 이관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과 전혀 관계 없고 국가보안법을 위반하거나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한 적도 없이 합법 정당 활동만 했는데 불명확한 이유로 독립유공자 지정을 받지 못하였다.

독립운동 단체로서의 조선공산당을 다루는 대중매체[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