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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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책
金策
생애 1903년 8월 14일 ~ 1951년 1월 31일
시대 일제 강점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생지 함경남도 학성군 학성면 수사리(김책시 옥천동) 방평촌 부락
별명 자(字)는 홍계(洪啓), 본명 홍계, 가명 김책, 김락
종교 무신론자
복무 조선인민군
복무 기간 1946년 ~ 1951년
주요 참전 한국전쟁
서훈 내역 국기훈장 1급(1951), 공화국영웅(1968), 조국통일상(1993)
김책

김책(金策, 1903년 8월 14일 ~ 1951년 1월 31일)은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인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산업상 겸 민족보위성 부상(1948년 9월-1951년 1월)과 내각 부수상을 지냈다. 동북항일연군의 창건주역의 한 사람이었다. 해방 후 인민군 초기 최고지도부의 한 사람이었다.[1]

중학교 재학 중 조선공산당 화요파인 동만도지구당 비서 안기성의 권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반체제지하청년단체와 조선공산당 지하기관에 참가했으며 1927년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수감된 이후 만주지역에서 공산당 조직과 항일운동에 가담했다가 여러번 투옥당했다. 1930년대 이후 만주지역에서 항일 무장 투쟁에 참여하였고, 해방 후에는 김일성을 따라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지휘관과 조선로동당 창건 주역으로 참여하였다. 1948년 4월의 제1차 남북협상에도 참여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의 고위 지휘관의 한 사람이었으며 1951년 한국전쟁과로로 전사하였다.

함경북도 성진시학성군은 그의 이름을 따서 김책시, 김책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통합하여 김책시가 되었다. 김일성의 최측근이다. 가명으로는 김책, 김락, 김인식, 김홍인, 김인, 라동현 등의 이름을 사용하였고, 본명은 김홍계(金洪啓), 자(字)는 홍계(洪啓)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소년기[편집]

1903년(조선 광무 7년) 8월 14일 함경북도 학성군 학성면 수사리(김책시 옥천동) 방평촌 부락의 빈농가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홍계였다가 뒤에 김책으로 고쳤다. 김책의 출생년대는 1903년생 설과 1900년생 설, 1905년생 설이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내 통계자료 상 그의 공식 출생년대는 1903년생으로 되어 있다. 형제로는 형 김홍선과 동생들이 있었다. 형 김홍선3.1 만세 운동 때 거리에 나가 독립만세도 부르고, 만주의 독립군부대를 따라다니면서 청산리 전투에도 참가했다가 공산주의운동에도 뛰여들었다. 뒤에 형 김홍선은 룡정 동흥중학교에 교사가 되었는데, 그가 교편을 잡고있던 룡정 동흥중학교에 러시아에서 건너온 학생과 접촉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받아들였다. 형 김홍선은 녕안현일대에서 공산당 구위로 일하다가 모해를 받고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동생 김홍희 역시 3.1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1910년(순종 4년) 10월 가족을 따라 중국 간도 옌지(延吉)의 평강기성촌에 이주하여 거기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옌지에서 성장하다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지주집 목동으로 보내졌다. 지주집 목동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 서적을 입수, 탐독하여 일찍부터 반일 혁명투쟁 활동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야학교에 다녀 글을 배운 뒤, 만주 지린성(吉林省) 룡정촌 동흥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동흥중학교 재학 중 그는 중학교의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나 마적단에 가담하게 되었다.

중학교 퇴학[편집]

동흥중학교 재학 중 마적단에 가입했다가 1926년 겨울 리주화의 소개로 조선공산당 화요파인 만주총국동만도 지구당 책임비서 안기성(安基成)을 찾아갔으며, 안기성과 리주화의 권고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반제지하청년단체에서 활동하였고, 연길현 수신향(守信鄕) 지구 세포원으로 봉천, 길림성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지하조직원들을 검거할 때,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고, 동흥중에서는 퇴교당하였다. 이후 만주 펑톈, 지린 등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풀려나오기를 반복하면서 무장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초기에는 엠엘파와 대립되는 화요파 계열로서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어 요직을 맡았고, 이후 동북항일연군에 가담했다.

1927년 조선공산당 재만총국으로부터 조선공산당 북만도집행위원에 천거되었다.

항일 독립 운동[편집]

조선공산당 조직 운동[편집]

출감 후 북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1930년 7월 27일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공산당 동경성지부 조직간사에 임명되고, 8월 중공 동경성당지부가 중공동경성구위로 되면서 김책은 동경성구위 구위서기를 맡았다. 1930년 10월 영안현에서 조선공산당원들로 조직된 조선 소비에트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만주지역 일본 경찰과 국민당 군대의 대대적 검문검속으로 조선 소비에트 임시정부는 해체되고, 1930년 11월 28일 김책을 비롯한 6명의 공산당원이 중국 국민당 군대에 체포되여 하얼빈 호로군사령부 구류소에 구금되었다. 1931년 9월 길림성 감옥으로 옮겼다가 후에 봉천 심양형무소 감옥으로 넘겨져 7년 도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그해 9월 9.18 사변 때 빨찌산 게릴라들이 심양형무소를 습격하여, 김책은 허형식(리희산) 등과 함께 구출되었고, 그는 곧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도움으로 하얼빈 빈현 특별당지부 당 서기에 임명되었다.1년간 김책은 빈현의 공산당지부에 조선족과 한족 당원 33명을 포섭하고, 4개의 지부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단원과 함께 항일회를 조직하여 군중들속으로 잠입하여 반일선전을 하였다.

1932년 9월 중국공산당 주하중심현위원회(珠河中心縣委員會) 군사위원이 되었다. 그는 오랜 당원 경력으로 주로 당 정치사업과 교육훈련을 맡아보았다.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단 제1독립사 제1단 정치부 주임에 임명됐다. 1933년 1월 중공만주성위에서 그를 주하중심현위 위원 겸 마이하동 당지부 서기로 임명했다. 1933년 가을 김책은 리복림과 함께 마이하동에서 천여명의 주민이 참가한 반일 시위행진을 기획하여 성공했다. 그때 시위에 참가한 량재문에 의하면 당시 천여명 시위자는 포위되여 사흘밤낮간 꼼짝 못했지만 굴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김책은 중국공산당 주하중심현위 비서장, 당 주하주심현지부 서기 등 직무를 력임하였다.

만주 항일 무장 투쟁[편집]

1933년 10월 10일 주하중심현위 서기로 있으면서 김책은 주하항일유격대를 창건했다. 주하항일유격대 설립 당시 대원은 13명밖에 안되였지만 김책은 청년들을 포섭하여 33년 12월 말경 40여명을 추가 모집하여 유격대대로 편성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계속 장정을 모집하여 1934년 6월 29일 무렵 500명의 대원으로 증가하자 그는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로 이름을 바꾸고 3개 종대와 9개 대대로 개편하였다. 9개 대대에는 다시 27개 중대로 나누었다. 김책은 조상지를 사령으로, 리조린을 정위로, 리복림을 당위서기로 임명하고 자신은 제3대대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7월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 지대사령부 군수처장이 되고, 1935년 1월 합동지대는 삼고류에서 청년의용군을 받아들인후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으로 조직을 확대시켰다. 당시 산하에 1개 사단과 3개 퇀대를 두었는데 김책이 제2퇀대 정치부 주임, 1935년 3월 1퇀대 정치부 주임직을 맡았다. 1935년 10월 동북인민혁명군 3군이 3개 퇀대에서 5개 퇀대로 증원, 조직이 커지자 김책은 제4퇀대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는데 퇀대장은 호귀림이고 퇀대의 70여명 병사들은 만주 의란, 벌리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35년 10월 3군 각 퇀대는 사로 개편되였는데 김책은 제4사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1936년 6월 4사는 60여명 전사들을 의란, 벌리에 남겨 투쟁을 견지하는외에 나머지 부대는 김책과 호귀림의 인솔하에 제4군의 리연록부대와 같이 보청현으로 원정하였다. 김책은 원정할 때 4군군부와 같이 행동하면서 4군의 정치 사업을 주관하고, 4사는 군사, 정치 면에서 3군의 모범부대로 되였다. 7월 중순경 김책의 동북인민혁명군 4사는 보청현 란화정자동부를 점령하였다.

1936년 봄 김책은 자신의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을 인솔하여 보청, 밀산 등을 공략하여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했다. 당시 보청현 일대에는 중국 국민당 출신 반일병사들로 구성된 부대 천덕대란 부대를 리명순(별명은 천덕)이 지휘하며 일본군과 민병대를을 몇번 습격하여 일정한 전투성과는 올렸으나 천덕대 대원들은 전투력이 낮고, 규률이 산만하며 명령에 제대로 복종하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있었다. 리명순은 김책의 부대에 호감을 갖고 부관 진유재를 파견하여 김책을 찾도록 하였다. 김책을 찾아온 리명순의 천덕대는 스스로 김책의 제3군에 합류하여 3군4퇀에 편입하였다.

동북항일연군 조직[편집]

1936년 조국광복회를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1936년 8월 1일 그가 이끌던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은 정식으로 동북항일련군 제3군으로 개편되면서 산하에 10개 사단을 두었다. 김책은 동북항일연군 제4사단 정치부 부주임직에 임명되었다. 9월 18일 탕원 모아산 3군 피복공장에서 3, 6군 당위와 주하, 탕원 중심현위 등이 련석회의(주탕련석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중공북만림시성위를 성립하고 풍중운을 서기로 하는 7명 상무위원을 선출하고, 조상지를 집행위원회주석으로 하는 15명 집행위원을 선출했으며, 김책은 15명의 집행위원 중 한 사람으로 당선되였다.

1937년 겨울 제7군과 합동하여 우쑤리강 연안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승리하였다.

1937년-1938년에 이르는 송화강류역에서의 군사활동에 참여하고, 1939년의 흑룡강성 북안진, 풍락진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938년에는 북만주 제3군의 정치부 주임이 되었다. 당시 북만주는 동만주와 달리 유격대원 대다수가 중국인이었는데, 그는 이 불리한 조건을 뚫고 북만유격대의 고위지도자로 성장하였다. 1939년 4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북만당대회에서 그는 중국공산당 북만임시성위원회 서기에 선거되었다. 그는 일본군의 만주지역 공산주의 군벌 대토벌 중에도 만주에 마지막까지 남아 항일유격전을 지휘하여 유명해졌다.

1940년 봄에 있은 수룡현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여 명성을 얻었다. 1940년대 동북항일연군 때 김일성을 만나 같이 행동하였으며 당시 인연으로 공화국 수립후 김일성 주석의 측근이 됐다. 동북항일연군이 소련에 들어와 재편된 소비에트연방 극동군 제88국제여단에도 함께 있었다. 당시 직급은 김일성, 강건, 안길과 동급이었다.

소련군에 입대[편집]

1940년 1월2월에 열린 동만주 항일유격대 지도자들과 소련 공산당, 소련 인민군과의 회의인 제1차 하바로프스크 회의에 참석, 항일유격대의 소련으로의 이동을 결정하였으나 김책은 마지막까지 소련 이동을 거부하였다. 1941년 7월 10일 제3로군 정위에 임명되었다.

1942년 3월 19일 소련군 제3로군 총지휘부에서는 김책이 발에 상처가 있어서 활동이 불편하므로 우천방을 김책의 대리자로 보내고 김책은 쏘련에 돌아와 휴식하도록 하였다. 소비에트 인민군에서도 그의 소련 이동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계속 거부하다가 일본군의 검문, 검속, 토벌로 부대 전력이 극도로 약해지자 1943년 10월부터 만주에서 철수를 시작, 소련으로 넘어갔다. 1944년 1월 쏘련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단에 합류하였다. 이미 소련 인민군은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단을 결성할 때부터 그를 위해서 제3영 정치위원의 자리를 공석으로 비워 놓고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소련 인민군 및 소련 공산당과 빈번하게 연락했고, 항일련군 교도려 야영에서 김책은 중국공산당동북위원회 위원 겸 동북항일련군 교도려 제3영 정치위원으로 사업했다. 1945년 7월 말 조선에서의 해방 사업과 당건설을 목적으로 김일성, 최용건과 함께 교도려에서 조선공작단을 만들고 김일성을 단장으로 선출했다.

해방과 북조선 건국 활동[편집]

해방과 귀국[편집]

광복후 김일성과 함께 귀국한 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위원을 시작으로, 1946년 평양정치군사학원 원장이 되었다. 이후 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1948년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평양학원 초대 원장 등을 지냈다. 김책은 지위는 김일성보다 낮았으나, 나이는 열 살 이상 많은 데다 경력도 뒤지지 않았다.[2] 그러나 리더는 김일성이었고, 최용건과 김책은 김일성에게 절대 충성을 바친다.[2] 이후 그는 조선인민군의 최고 지휘관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45년 9월 19일 김일성과 함께 연해주에서 배편으로 출항, 원산항으로 귀국했다. 그후 조선공산당 준비위원이었던 현준혁이 암살되고 조선공산당의 초대 지도자로 내정된 김용범이 갑자기 죽자, 그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군사 분야에 두루 관여하며 김일성을 북조선 최고지도자로 옹립하는 역할을 하였다.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결성되자 김일성을 도와 사업하였다. 1946년 2월 조선인민군이 창건되자 지휘관의 한 사람이 되고, 같은 2월 북조선 최초의 군간부 양성소인 평양군사학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1946년 8월 북조선공산당이 북조선신민당과 통합하여 북조선로동당으로 결성되자 김책은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북조선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인민위원회 위원에 선출되고 바로 북조선인민위원회 공동 부위원장의 한 사람에 선출되었다.

북조선 정부 수립[편집]

1948년 2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선거되자 초대 인민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고, 인민위원회 민족보위국 초대 국장에 선출, 겸직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고, 6월 남북 로동당이 통합되어 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그는 로동당 정치위원에 선거되었다. 9월 공화국 내각수립후 부수상 겸 산업상을 역임하는 등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그는 광복후 복잡한 정세속에서도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장편 서사시백두산》을 창작완성하였다.[4] 1948년 8월의 제2차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도 참여하였다.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이 설립되자 김책은 내각 부수상 겸 산업상이 되고 민족보위성 부상도 겸무하였다. 1949년 6월 남조선로동당과 북조선로동당이 합당하여 통합 조선로동당이 결성되자 그는 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0년 조선인민군 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한국전쟁과 최후[편집]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한국 전쟁을 맞았으며,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선사령관을 겸하여[5], 군사위원회 위원 및 전선사령관으로 참전했다가, 전쟁 중이던 1951년 1월 31일 최전선에서 과로로 전사했다. 또는 평양에서 과로심근경색 또는 가스 중독으로 급사했다고도 하며 권력 투쟁 중 암살당했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1월 30일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사망 직후 김일성, 최용건이 직접 그의 장례식을 주관했고 최용건은 현장에서 오열하였다. 김일성 수상은 바로 그가 부수상으로 재직하던 당시의 내각집무실 전체를 통째로 옮겨서 평양전승기념사적관에 보관하도록 지시하였다. 그의 시신은 가매장했지만 한국전쟁 중 잃어버려 당창건 30돐을 맞이하는 1975년 대성산의 혁명렬사릉에 그의 가묘를 세우고 반신상을 세웠다.

사후[편집]

사후에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국기훈장 제1급을 추서하였다. 최고인민회의는 그의 사후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고향인 성진을 개명한 김책시, 청진제철소를 개명한 김책제철소평양김책공업종합대학 등 시설물에 그의 이름을 명명한 것이다. 1948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중 공학 계통 학과들을 따로 분리하여 신설한 평양공과대학은 1951년 그의 이름을 따서 김책공대로 이름을 바꾸었다.

함경북도 학성군은 김책군(현재의 김책시)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1951년 2월 함경북도 성진시학성군은 그의 이름을 따서 김책시, 김책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학성면김책읍(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뒤에 시군을 통폐합하여 김책시가 되었다. 유자녀 군사학원은 유자녀 김책군사학원으로, 인민군 제2정치군관학교는 김책군관학교로, 인민군 서울근위 제4사단은 김책 서울근위 제4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68년 8월 29일에는 김책시에 김책동상 제막식을 하였다.[6] 김일성은 이때 직접 참석하였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7]

작품[편집]

가족 관계[편집]

최종 학력[편집]

  • 만주 동흥중학교 중퇴

수상 경력[편집]

평가[편집]

김책은 탁월한 수완가라 한다.[9] 김책동지는 항일투쟁에서나 조국전쟁에서나 경제건설에서나 발군의 조직적 수완을 발휘하며 주어진 과업을 언제나 책임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김책동지가 없는 북만유격대와 전선사령부, 해방직후의 경제건설은 생각할 수 없다는 평가가 있다.[9]

관련 항목[편집]

기타[편집]

김일성 주석의 집무실에는 작은 쇠 금고가 하나 있었다. 조선로동당 간부와 일반인 모두 그 안에는 대단한 보물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그 금고를 개봉하자 금고 안에는 작은 상자가 있고, 그 안에 누렇게 변한 옛날의 김책과 자신이 찍은 사진이 하나 있었다.

허헌과 친분이 있어 가깝게 지냈으며 허헌은 김책이 이름을 김홍계에서 김책으로 바꾼 뒤에도 김홍계 선생이라 불렀다.

김책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참고 자료[편집]

각주[편집]

  1. 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민연,2000) 74페이지
  2. 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민연,2000) 61페이지
  3. “김일성내각 組閣을 완료”. 경향신문. 1948년 9월 11일. 1면. 
  4. 당의 사상과 령도에 끝없이 충실한 김책형의 일군이 되자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주체90(2001)년 1월 31일
  5. 이정훈 기자 (2000년 5월 1일). “[6•25 50주년 특별연재|‘잊혀진 전쟁’의 비록<상>]”. 동아일보사.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6. 한국사학사연구회 북한사학사연구반, 《북한의 역사 만들기》 (푸른역사, 2003) 26페이지
  7. 북한,조국통일상에 임양ㆍ운동권 학생도, 한국일보 1990-08-17자, 02면
  8. 김홍선
  9. 오늘의 김혁, 김책이 되자 통일여명 편집국 통보 (편집국 보도 37호)
전 임
(초대)
북한의 제1대 부수상
(홍명희, 박헌영과 공동)
1948년 9월 ~ 1951년 1월 30일
후 임
박헌영, 홍명희
전 임
-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산업상
1948년 9월 ~ 1951년 1월 30일
전 임
-
제1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민족보위성 부상
1948년 9월 ~ 1951년 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