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준 (19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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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金台俊, 1905년 ~ 1949년)은 일제강점기때 활동한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다. 한문학자이자 국문학자이다. 한국 문학사의 기초를 닦은 연구자였다. 일제강점기말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했다. 호는 '천태산인'(天台山人). 한국 최초로 비교문학적 관점에서 〈조선소설사〉와 〈조선한문학사〉를 썼다.

생애[편집]

평안북도 운산 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국문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20대이던 1931년 ‘조선소설사’와 ‘조선한문학사’를 발표한 그는 경성제대 최초의 조선인 강사로 문학을 가르쳤고 1940년 여름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을 발굴했다. 김태준은 제자 이용준에게서 “우리 집안에 훈민정음이 가보로 내려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입수한 뒤, 간송 전형필에게 해례본 보관 사실을 알렸다. 그동안 훈민정음의 행방을 애타게 기다려온 전형필은 일제의 감시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인수했다. 소유주가 1천 원을 불렀으나 전형필은 10배인 1만 원을 지불했다. 기와집 10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책을 소개한 국문학자 김태준에게는 따로 1천원을 지불했다. 이에 따라 한글 창제원리는 세상에 알려졌고 국보를 보호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이 책은 당당하게 세상에 나왔다. 국보 제70호가 바로 이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전형필 사후 1962년 12월 국보로 지정된 데 이어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1]

그러다 김태준은 사회주의자인 이현상의 소개로 1940년 당대 대표적인 사회주의 단체 경성콤그룹(조선공산당재건경성준비그룹)에 가입했다가 검거돼 1941년부터 43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이 사이 그의 노모와 아내, 아이는 모두 사망하는 아픔도 겪었다. 1943년 여름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태준은 항일 무력운동의 가능성을 탐색하다 사회주의자인 아내 박진홍과 함께 조선의용군이 주둔하던 옌안(延安)으로 떠난다. 1945년 4월 연안에 도착했으나 이후 일제 패망 소식을 듣고 걸어서 11월 하순 서울에 도착하였다.

1947년 조선문학가동맹 기관지 ‘문학’에 실린 그의 마지막 저술 ‘연안행’에서 김태준은 ‘문학연구니 역사연구니 언어연구니 하는 것은 우리 정부가 수립된 후의 일이니 당분간 이 방면의 서적은 상자에 넣어서 봉해두자. 보는 책은 경제학ABC, 인터내셔널, 전기, 레닌 선집 등이었다. 나는 좀더 튼튼한 세계관을 수립하려고 모색하였다. 외계에는 공출, 배급, 징용, 징병에 떨며 울고 있는 수천만 형제자매의 아우성소리 조음(燥音)이 이타(耳朶)를 치는데, 어느 겨를에 조선문학이니 조선역사니 찾고 있을 수가 있을 것인가라고 하였다’며 당시의 심정을 밝혔다.

해방 후 1945년 11월 귀국한 김태준은 12월 경성대학(경성제국대학의 후신) 초대 총장에 선출됐으나 미군정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 문화부장에 임명됐고 남로당 간부로 문화공작과 특수정보 분야 지하활동을 했다. 예술인들이 ‘빨치산’을 지원하는 활동이었다. 1949년 이현상이 이끄는 지리산 빨치산 유격대들을 대상으로 특수문화 공작을 하다가 전북 남원에서 국군토벌대와 경찰에 체포되어 1949년 11월, 서울 수색 근처에서 총살형 당했다.

2007년 ‘김태준 평전-지성과 역사적 상황’을 펴낸 김용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혁명가로서 김태준은 해방 이전까지는 반제투쟁의 투사로 평가하지만 해방 이후 남로당의 ‘극좌모험주의’가 수많은 인명 살상을 몰고 온 만큼 공과가 뚜렷이 갈린다고 봤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는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라면 사상에 관계없이 해방을 맞은 1945년까지 무엇을 했는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며 “일제강점기 김태준 선생의 행적은 명백히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2]

각주[편집]

  1. “[김은주의 시선] 전형필의 문화유산 지키기”. 연합뉴스. 2017.07.27. 
  2. “최고의 한글학자도, 백마 탄 여장군도… 좌익 낙인에 ‘지워진 독립운동’”. 한국일보. 2019.07.17. 

참고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