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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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 북위 41° 31′ 31.2″ 동경 128° 18′ 17.7″ / 북위 41.525333° 동경 128.304917°  / 41.525333; 128.304917

보천보 습격 사건
교전국
동북항일연군, 조국광복회 일본 제국의 기 일본 제국
지휘관
최현, 김일성, 박달, 박금철
병력
200여명 경찰 5명(당일)
경찰추격대 30명(6월 5일)
피해 규모
6월 5일 30명의 일제 경찰추격대와 충돌, 25명 사망, 30명 부상[1][2] 6월 4일 보천보 사건 당시 민간인 2명 사망(성인, 순사의 딸 2세 여아)
6월 5일 동북항일연군 부대와 충돌한 30명의 경찰추격대 중 7명 사망. 14명 부상[1][2]

보천보 습격사건(普天堡 襲擊事件)은 1937년 6월 4일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최현, 김일성 부대와 박달, 박금철의 조국광복회 등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전리(량강도 보천군 보천읍)를 일시적으로 습격하고 퇴각한 사건이다. 한국의 일부 지역이 일제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개요[편집]

1937년 6월 5일자 동아일보 호외

동북항일연군 제1군 제6사는 백두산지구 유격구를 건설하고, 박달·박금철 등이 이끄는 갑산군 내 ‘조국광복회’소속 조직원들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km 떨어진 보천보에 습격하여 경찰주재소·면사무소·우체국 등의 관공서와 산림보호구 등을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하였다.[3][4]

1937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6월 4일 보천보 습격 당시 민간인 2명(성인, 일본 순사부장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했으며, 6월 5일 파견된 30명의 경찰추격대와 충돌하여 동북항일연군의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 일본 경찰추격대 30명 중 7명 사망, 14명의 부상자가 났으며, 전소한 총피해액은 50.000원이라고 밝혔다.[5]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이상조는 중공군으로부터 김일성 부대를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그를 찾지못했다고 하며 북한 매체가 일본 관동군이 김일성을 잡기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김일성을 신격화하기 위한 북한 1인체제를 위한 날조라고 말했다.[6]

일본의 진보성향인 와다 하루키 교수는 일본은 민간인 2명(일본 요릿집 주인과 순사의 딸 2세 여아)이 사망한 반면 조국광복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739명이 검거되고, 188명이 기소돼 조직이 궤멸되는 위기를 맞았다고 말했다.[7][8][9]

각주[편집]

  1. 보천보 피습 사건 속보(普天堡 被襲事件 續報) : 추격경관(追擊警官)과 충돌(衝突), 양방 사상 70여 (兩方死傷 七十餘) 1937년 6월 6일 동아일보 조간 2면
    함남(咸南) 보천보(普天堡)를 습격(襲擊), 우편소(郵便所), 면소(面所)에 충화(衝火) 동아일보 1937.06.05 호외(號外)
    보천보 습격 속보(普天堡 襲擊 續報) 1937.06.05 동아일보 호외(號外) 제2
  2. 공비 최현 및 김일성 일당의 선내 침입사건 :1937년 경찰청 경무국 제73회 제국의회 설명자료 (조선총독부 기록물) : 원문 바로 보기 : 맨 뒤에 양측 피해 상황이 나옴.
  3. 재습의 공포에 떠는 주민 남부여대 피란 동아일보 1937년 6월 9일
  4. 함남국경에 제2동흥사건咸南國境에 第二東興事件) Archived 2017년 7월 30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7.06.06, 02면
    襲來한 崔賢一味를 警務當局絶滅企圖 事態를 重視하고 第一線督勵 普天堡事件續報 Archived 2017년 8월 26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7.06.06, 03면
    普天堡賊禍犧牲者 七名은 署葬을 擧行 Archived 2017년 8월 26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7.06.07, 02면
    惠山鎭『今村』部隊와 만주국군이 연합 추격(滿洲國軍이 聯合追擊) : 보천보 사건 속보(普天堡事件續報) Archived 2017년 8월 26일 - 웨이백 머신 매일신보 1937.06.08, 02면
  5. 보천보습격사건피해판명 동아일보 1937년 6월 7일
  6. "北韓(북한)은 金日成(김일성)의 개인兵營(병영) 경향신문 1989년 09월 12일 3면"
  7. 함경남도 국경지대 사상정화공작 개황(咸鏡南道國境地帶思想淨化工作槪況) 사상휘보(思想彙報) 제20호 p.10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1939.09.01)
  8. 김일성 보천보전투 신화는 과장 조선일보 2014-06-07
  9. 서재진,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신화화 연구 Archived 2017년 4월 19일 - 웨이백 머신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06-11 / 2006-12-26) pp.202~203 : 사실은 보천보 전투가 국내진공이라 는 선전효과는 거두었지만 전투의 실질적 결과는 매우 파괴적이다. 동북항일연군이 궤멸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천보 전투 이후 일본 관헌측은 필사적으로 토벌을 전개하였다. 장백현의 조국광복회 조직은 739명이 체포되어 거의 궤멸되었고, 김일성부대는 일본군의 집요한 추격을 당하여 ‘고난의 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광서, 1940년대 전반 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내 김일성 그룹의 동향, 역사와현실 28, 1998.6, 254-291 (38 pages) p.258 : 739명이 검거되면서 조국광복회 조직은 와해되고 말았다.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