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혁명군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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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은 1929년 5월 만주 길림시 우마행호동(牛馬行胡洞) 거리의 국민부(國民府) 사무소에서 항일투쟁의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남만주일대의 유일혁명군정부인 국민부의 정규군으로 편성되었다.

이후 국민부를 지지, 육성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혁명당 산하로 이관되었다.

1934년 11월 조선혁명당이 유명무실화되자, 행정조직인 국민부(國民府)와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통합하여 조선혁명군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1930년에서 1934년 사이 북만주에서는 한국독립당 예하의 한국독립군이 활동하였다.[1]

조선혁명군 성립[편집]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은 처음에는 국민부(國民府) 산하의 독립군이었다.

1929년 9월 국민부 중앙의회에서 독립군을 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 소속으로 이관키로 결정함에 따라 지휘부가 변경되었다.

그해 12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으로 개편되어 독립군은 그에 소속되었는데, 조선혁명당은 산하 독립군을 ‘조선혁명군’으로 독립시켰다.

조선혁명군 편성[편집]

혁명군의 모체는 정의부(正義府) 소속 의용군 6개 부대였으며, 여기에 새로이 20개 부대를 증편한 것이다. 처음에는 10개대로 편성하여 각 지방에 주둔시켰다.

  • 제1대장 이동훈(李東勳) 관동(寬東), 관서(寬西) 지방
  • 제2대장 장철호(張喆鎬) 화남(化南), 화동(化東) 지방
  • 제3대장 유광흘(柳光屹) 집동(輯東), 집서(輯西) 지방
  • 제4대장 이윤환(李允煥) 환인(桓仁), 무본(撫本), 흥경(興京) 지방
  • 제5대장 양세봉(梁世奉) 집서의 일부 통남(通南) 지방
  • 제6대장 김문거(金文據) 유하(柳河), 해원(海原) 지방
  • 제7대장 조웅걸(趙雄杰) 화전(樺甸), 무송(撫松), 반석(磐石) 지방
  • 제8대장 권영조(權永祚) 길액(吉額), 오상(五常), 안도(安圖) 지방
  • 제9대장 안붕(安鵬) 길림(吉林), 길서(吉西), 회덕(懷德) 지방 : 후임 이종락(李鍾洛)
  • 제10대장 김경근(金敬勤) 장백(長白), 임강(臨江) 지방

1929년 12월 조선혁명군으로 독립되었을 때, 혁명군의 지도기관으로 각 대에서 대표자를 선출하여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군사위원회는 총사령관에 이진탁(李振卓), 부사령관에 양세봉, 참모장에 이웅(李雄)을 선임하였고, 기존의 10개대를 7개대로 편성하였다. 1930년 8월 8일 중앙집행위원회는 조선혁명군을 중대제(中隊制)로 개편하였다.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길흑별동대(吉黑別動隊)[편집]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 내부에 사회주의자가 많이 침투해 있었는데, 사회주의자들은 1930년 8월 조선혁명당 대표회의 때 탈퇴하였으며, 특히 조선혁명군의 제5중대장 이종락도 이들에 동조, 이탈하여 길림과 흑룡강(黑龍江) 지방을 근거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 吉江指揮部)’를 설치하여 공산주의 혁명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되자 국민부는 흑룡강과 길림지방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1930년 8월 당지에 길흑특별위원회(吉黑特別委員會)를 설치하고,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길흑별동대(吉黑別動隊)를 파견하였다. 별동대장 문학빈(文學彬)은 동년 9월 5일 흥경(興京)으로부터 길림에 왔다.[2]

(1) 국민부 길흑특별위원회

  • 집행위원장 김이대(金履大)
  • 위원 김동원(金東園), 김구(金球), 김영일(金永一), 이종대(李鍾岱), 박일파(朴一波), 김강포(金剛包)

(2) 조선혁명군 길흑별동대

조선혁명군 활동[편집]

한중연합작전 추진[편집]

북만주에서 한국독립군이 중국군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는 동안 남만주에서는 조선혁명당 예하의 조선혁명군이 별도로 한·중연합으로 작전을 수립하고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가 9·18사변을 일으키자 조선혁명당은 한·중연합전선을 구축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학규(金學奎)·김이대(金履大)를 당대표로 하여 중국 당국과 협의하였다.

양인은 심양(瀋陽)으로 가서 중국국민외교협회(中國國民外交協會) 및 중국 민간지도자들과 접촉하여 협의하였다. 주로 논의된 사항은 재만한인의 국적문제와 함께 한·중 양민족의 연합항일문제였다.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玄益哲)이 이 논의를 구체화, 「동성한교정세(東省韓僑情勢)」와 「중한양민족합작의견서(中韓兩民族合作意見書)」를 만들어 중국당국에 보내었는데, 이에 대하여 중국 측은 열렬히 찬동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작전이 구체화되기 전에 현익철이 일경에 체포됨으로써 협의는 중단되었다. 더우기 1931년 12월 조선혁명당과 혁명군 간부들이 신빈현(新賓縣)에서 간부회의를 개최할 때 일군경의 기습을 받아 회의장에 있던 30여 명의 간부 중 이호원(李浩源), 김관웅(金寬雄), 이종건(李鍾建), 장세용(張世湧), 박치화(朴致化), 이규성(李奎星) 등 중요간부 10여 명이 체포되는 치명적 타격을 받아 연합작전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양기하(梁基假), 양세봉(梁世鳳), 고이허(高而虛) 등 중견간부들은 동요하지 않고 대원들을 규합하여 혈전태세를 유지하였다.

1932년 2월 관전현(寬甸縣)에 주둔 중이던 조선혁명군 양기하부대가 평북 초산(楚山)의 일본경찰대와 만주군 연합부대의 기습을 받아 양기하는 격전 끝에 전사하였다. 이후 혁명군 총사령관에는 양세봉이 선임되어 부대를 지휘하였다.

한중연합작전의 성립[편집]

1932년 영릉가 전투[편집]

1932년 3월 11일 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은 참모장 김학규와 중대장 조화선(趙化善), 최윤구(崔允龜), 정봉길(鄭鳳吉)이 지휘하는 3개 중대병력을 거느리고 중국의용군(中國義勇軍) 왕동헌(王彤軒), 양석복(梁錫福)부대와 합세하여 신빈 왕청문에서 무순(撫順) 천금채(千金寨)로 향하여 진군하다가 12일 신빈 남쪽의 두령지(陡嶺地)에 도착, 야영하였다. 이때 이 정보를 탐지한 신빈현성을 수비하던 일본군이 중무기로 무장하고 주변 고지를 점령한 후 혁명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박격포 기관총 등으로 맹공을 하였다. 주변지리에 익숙한 혁명군은 교전 1시간 만에 일본군이 장악했던 주변고지를 탈환하고 맹공격을 가함으로써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돌격전을 감행하는 혁명군의 기세에 일본군이 퇴각하자 혁명군은 계속 일군을 추격하여 30여 리에 위치한 신빈성 서쪽에 영릉가성(永陵街城)을 점령하였고, 다시 추격전을 감행하여 상협하(上夾河)를 점령하였다. 5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은 무수한 사상자와 말·무기를 버리고 패퇴하였다.

첫 한·중연합전투에서 연합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고, 유대가 한층 공고해졌다.

요녕구국회와의 합작[편집]

1932년 4월 20일 중국의용군 당취오(唐聚五), 왕육문(王育文), 손수암(孫秀岩), 장종주(張宗周), 이춘윤(李春潤), 왕봉각(王鳳閣), 서대산(徐大山) 등이 항인성에 청천백일기(青天白日旗)를 높이 들고 요녕구국회(遼寧救國會)를 결성하여 항일전을 계획하였다. 동 구국회도 정치·군사 양 위원회를 두고 상무위원회 위원장 겸 정치위원회 위원장은 왕육문이, 군사위원회 위원장 겸 요녕 민중자위군 총사령에는 당취오가 선임되었다.

반만항일무장군인 요녕민중자위군은 총사령부 아래 52개로 사령부를 두어 환인, 통화(通化), 신빈, 즙안(輯安), 임강, 유하, 본계(本溪), 휘남(輝南), 해룡(海龍), 동풍(東豊), 서풍(西豊), 안동(安東), 봉성(鳳城), 청원(淸原), 동강(蒙江), 장백, 안도, 금천(錦泉), 반석, 서안(西安), 관전, 개원(開原) 등 20여 현을 관장하며 20만 대군을 거느리는 재만 제1의 항일군단이었다.

조선혁명당에서는 이들과 연합전선 구축을 계획하고 당·군대표에 김학규를 선임하여 구국회에 파견하였다. 김학규는 환인성으로 가서 왕육문·당취오와 협상하여 한·중연합전선을 결성[3]하는 데 합의하였다.

이 합의에 따라 자위군 내에 특수임무를 담당하는 특무대사령부와 선전임무를 담당하는 선전대대를 설치하고, 이 두 가지를 조선혁명군이 담당하였다. 특무대사령부를 통화성(通化城)에 두고 양세봉이 사령관에 선임되었으며, 김광옥(金光玉)이 선전대대장이 되었다. 또한 구국회 선전부 내에 한인선전과를 두어 한글간행물과 신문 『합작(合作)』을 발간하였다.

특무대사령부는 8개 특무대를 두고 만주 각지와 국내에 특무공작을 전개하였으며, 전투에서는 선봉부대로 활동하였다.

대원의 충원을 위하여 통화 강전자(江甸子)에 조선혁명군속성군관학교(朝鮮革命軍速成軍官學校)를 설치 운영하였는데, 2천 명이 교육을 받았다. 각 특무대 소관 지역 내에 노농강습소(勞農講習所)를 개설하여 한국의 농촌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약 5만 명이 수강한 강습소생은 혁명군의 후비병력(後備兵力)이었으며, 2천 명의 군관학교 수료생은 혁명군의 후보군관이있다.

1933년 영릉가 전투[편집]

1933년 5월 8일 일본군과 만주군 1천 5백 명이 다시 영릉가를 공략해오자 연합군은 이를 역습하여 2일간의 격전 끝에 이를 격퇴시켰으나 연합군의 각 부대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부득이 후퇴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다시 임강, 환인, 신빈, 유하, 휘남 지방을 공격하였으며, 중국군의 본거지인 통화로도 진격해 왔다. 중국군은 무기의 부족과 훈련의 미숙으로 일본군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격전 수 일 만에 통화를 버리고 몽강의 산림지대로 후퇴하고 말았다. 수차에 걸쳐 승리한 일본군은 6월 15일 대부대를 동원하여 양대령(楊臺嶺)을 넘어서 흥경, 청원 등지로 공격해왔다. 이에 혁명군 1천 명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청원에서 수비하고, 중국군은 1만의 병력으로 흥경을 사수하도록 작전을 세웠다. 혁명군은 일본군에 기습 돌격작전을 감행하여 적군을 대량 소탕하였으나 일본군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격을 하는 데는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이해천(李海天), 김일룡(金一龍), 박석원(朴錫源) 등 30여 명이 전사하였으며, 수백 명의 비전투원이 희생되었다. 흥경을 사수하던 중국군마저 패전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은 부득이 남산성(南山城)으로 후퇴하였다.

석인구 전투[편집]

7월 7일 일본군은 또 다시 영릉가 석인구(石人溝)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공격해왔다. 혁명군은 양세봉 총사령관의 영웅적 독전과 제3로군 조화선부대의 응원으로 일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중포 1문, 경기관총 3정, 소총 80여 정을 노획하였다. 7월 중순에는 한중연합군이 무순현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 1개 연대를 공격하였다. 2일간에 걸친 격전으로 일본군을 제압하였다.

한중연합작전의 한계[편집]

통화현 전투[편집]

그 후 일본군 1개 대대가 통화현에 주둔하고 있던 제4로군의 최윤구부대를 습격하자 제4로군은 제3로군의 응원으로 적을 격퇴했는데, 적은 80여 명의 희생자를 내고 도주하였다. 그러나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지닌 일본군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끊임없이 아군을 공격하였으며, 더욱이 항공기의 공격은 아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한중연합군의 병력은 일당백의 사기와 전투 경력을 지녔지만 화력의 열세와 항공기를 지니지 못한 약점으로 적을 제압하기 어려웠다. 사방으로 포위망을 압축하며 집요하게 공격하는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점차 열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연합군의 사기는 저하되기만 했다.

양세봉의 피살[편집]

1934년 9월 일본군의 밀정으로 있는 박창해(朴昌海)라는 자가 평소 양세봉 총사령관과 친분이 있던 중국인 왕씨라는 자를 매수하여 중국군 사령관이 양세봉을 만나 군사문제를 협의하기를 요청한다고 유인하게 하였다. 양세봉 총사령관은 왕씨의 전갈을 받고 자 부관 김광욱(金光旭)과 김성해(金星海), 최창해(崔蒼海), 김추상(金秋霜) 등 4명의 대원을 데리고 왕씨를 따라갔다. 일행이 대랍자구(大拉子溝)로 가는 도중 돌연 좌우 수수밭에서 위장한 수십 명의 일본군이 뛰어 나와 일행을 포위하였다. 이때 왕씨는 태도를 일변하여 양세봉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나는 지난 날의 왕모가 아니다. 이 총알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일본군에 항복하라”고 소리쳤다. 양세봉 총사령관은 만사가 마지막이라 각오하고 왕씨의 행동을 꾸짖었고, 일본군은 양세봉과 그 일행을 사살하였다. 이때가 1934. 9월 19일 밤이었다.

조선혁명군정부로 전환[편집]

양세봉 총사령관의 피살 이후 김호석(金浩石)이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후임되어 1934년 11월 11일 조선혁명군을 조선혁명군정부(朝鮮革命軍政府)라는 군사정부로 바꾸었다. 군사정부는 법무, 민사, 재무, 외교, 교양, 특무, 군사 등 7개 부서를 두었으며, 지방을 9개 군구로 나누었다. 군사부는 총사령 김호석이 부장을 겸임하였다.

김호석 총사령관 당시 병력은 양세봉 총사령관 때보다 훨씬 줄었다. 1935년 일본군의 추계 대토벌 작전이 시작되자 9월 조선혁명군 제1사 사령 한검추는 중국자위대 사령관 왕봉각과 집안현에서 회담을 갖고 한중항일동맹회(韓中抗日同盟會)를 조직하였다. 동맹회의 구성은 정치위원회 위원장에 고이허, 그리고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왕봉각, 군대 총사령에는 한검추가 선임되였다.

조선혁명군의 일부는 1938년까지 만주에 잔류하면서 항일전투를 계속하였다.

함께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한민족독립운동사 4권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3. 한중연합군의 항일전과 독립군의 수난 > 1)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편성 (국사편찬위원회, 1988년 12월 30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 독립운동사자료집 10 : 독립군전투사자료집 /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관한 문서 속보의 건 / 대정 8년 4월 25일 / 불령선인의 행동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6) pp.599~600 : 공훈전자사료관
  3. 합의사항:중국과 한국 양국의 군민은 절실히 연합하여 일치항전하고, 인력과 물력(物力)은 서로 통용하며, 합작의 원칙 하에 국적에 관계없이 그 능력에 따라 항일공작을 나누어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