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규 (1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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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규
金學奎
前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가총수반 예하
군사행정특보비서관 직무대리
(前 大韓民國 臨時政府 國家總首班 隸下
軍事行政特報秘書官 職務代理)
임기 1940년 1월 31일 ~ 1940년 2월 29일
주석 김구 (대한 임정 주석)
부주석 김규식 (대한 임정 부수반)
전임 이상정
후임 김인
前 대한 임정 예하 광복군 제3지대장
(前 大韓 臨政 隸下 光復軍 第3支隊長)
임기 1940년 2월 29일 ~ 1946년 6월 1일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장관 지청천 (대한광복군 총사령관)
차관 이범석 (대한광복군 사령관)
신상정보
출생일 1900년 11월 24일
출생지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원군
사망일 1967년 9월 20일(1967-09-20) (66세)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마포구에서 병사
본관 안동(安東)
학력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지린 성 지린 원후이(문회) 고급중학교 졸업
신흥무관학교
대한민국 국방대학교(1963년)
경력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및 군인 겸 정치가
한국독립당 중화민국 둥베이 지방 특별위원회 위원장
한국독립당 당수
한국독립당 최고위원
한국독립당 전임고문
한국독립당 총재
정당 한국독립당(총재·전임고문·최고위원)
부모 김기섭(부), 선우 순(모)
배우자 김봉수(사별), 오광심(재혼)
자녀 김일현(장자)
김일진(혼외 출생 차남)
김탄실(장녀)
김은순(차녀)
친인척 김성범(이부 형)
별명 호(號)는 백파(白坡)
종교 기독교
군사 경력
복무기간 1919년 ~ 1946년 6월
최종계급 대한광복군 중장
지휘 대한광복군 제3지대
근무 대한광복군 제3지대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김학규(金學奎, 1900년 11월 24일 ~ 1967년 9월 20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일제 강점기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였다. 광복군 제3지대장 등을 역임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귀국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 1948년남북 협상에 반대하여 임정 인사들을 설득하려다가 실패하고, 단정을 지지, 협상에 불참하였다. 이후 김구(金九)와 갈등하던 중 안두희를 김구에게 소개해 주었다가 1949년 김구가 암살되자 암살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다가 1961년 5·16 군사 정변 이후 석방되었다.

생애[편집]

생애 초기[편집]

1900년 안동 김씨 김기섭과 김순욱의 미망인인 선우순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선우순은 전남편 김순욱(1898년 사망)과의 사이에서 얻은 이부 형 김성범과 딸을 데리고 김기섭과 재혼하였다.

중국 망명[편집]

1919년 봉천(奉天)성 류하(柳河)현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1] 그 뒤 문회고급중학교(文會高級中學敎)에 입학하였다.[2] 1927년 문회고급중학교를 졸업하였다.[2] 곧 만주 류하현 삼원포(三源浦)의 동명(東明)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1][2] 동시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제1지대본부 견습사관으로서 삼원보 일대에서 활동하였다.[2]

독립운동[편집]

한국독립당과 광복군 참여[편집]

1936년 남경에서 현익철·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 비상대회를 열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이 분리되어 나가자 조선민족혁명당이라 개칭하였다.[2] 민족주의 계열인 조선혁명당 중앙위원과 조선혁명군 참모장을 지내다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건너왔다. 1939년 쓰촨성 기강에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데 참여하였다.[2]

1940년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었을 때 광복군 제3지대장에 임명되었다.[3]

만주 파견 활동[편집]

1946년 가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의 지시를 받고 한국독립당 동북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만주지역으로 파견되었다.[3]

만주에서 옛 조선혁명당계열 한국인들을 재결집한 김학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동북대표부를 한국독립당 동북특별위원회와 연계해 만주지방의 한인 교민들을 규합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3] 장연민주자위군(長延民主自衛軍)을 조직해 활동하게 된다.[3]

1949년 김학규와 장연민주자위군은 중국국공내전에서 장제스(蔣介石)의 중국 국민정부와 중앙군(국민정부군)과 연합하여 반공주의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하면서 김학규와 박찬익(朴贊翊)을 비롯한 주동 인물들은 한국으로 피신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동북대표부와 장연민주자위군은 해체되었다.[3] 그 참가자들은 반혁명분자로 몰리게 된다.[3]

정치 활동과 투옥[편집]

남북협상 불참과 단정 승인[편집]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론으로 노선을 바꾸자 김학규는 반대하였다.[4]

당시 중국에서 돌아온 임정에서는 앞으로 수립될 통일정부 요인의 자격 규정으로서 대통령은 30년 이상, 국무총리는 20년 이상, 그리고 장관은 10년 이상 독립운동을 유일한 천직으로 하여 계속 투쟁한 인사에 한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5]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측의 이러한 주장에 너무 터무니없는 주장이라고 공개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김준연은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는 그래도 좋겠지만 장관까지 그런 규정을 둔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이러한 규정대로 한다면 자기가 속해 있는 한민당은 정부 요직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인사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 때문[5] 이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은 김성수 등을 임정 국무위원(장관급)으로 입각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만 그는 임정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해서 김준연은 임정을 반대하는 선봉에 섰고, 임정 요인이 일부 중심이 된 좌우 합작이나 남북협상을 신랄하게 비난해왔다.

김준연김구를 정점으로 하는 남북협상파와 김규식을 정점으로 하는 좌우합작파를 모두 공산주의 노선과 비슷할 뿐 아니라 정부 수립에 크나큰 방해인물들로 단정했다.[5] 그래서 (남북협상 당시) 공산당김구에게 정치자금을 조달한다는 설이 있자 곧 《동아일보》 지상을 통해 다음과 같은 규탄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5] 이때 김준연이 발표한 성명서에 그는 크게 분노한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5·10 총선거는 우리 5천년 역사에 길이 빛날 광명의 전환점입니다. ...(이하 중략)... 그러나 침략주의 외세 소련은 '약소민족 해방'이라는 허울 좋은 탈을 쓰고 우리 민족을 다시 자기들의 노예로 만들려는 음모를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소련의 주장을 지지하고 토지의 국유화를 원칙으로 한 공산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시도하는 무리들이 이 땅에 있다는 것은 통탄해 마지 않을 일입니다.

이들은 민족의 숙원인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소위 남북협상이라는 빛 좋은 통일방안을 앞세웠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소위 남북협상에서 얻[5] 어온 것이 무엇입니까.[6]

우리 민족을 노예화하겠다는 소련의 궤도에 맹종한 것 외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러면 김구, 김규식 등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겠습니까? 동포 여러분은 매우 이상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은 결코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김규식은 한때 공산당 당원이었고[7] 김구는 토지의 국유화를 주장했으니만큼 김구 역시 공산당 노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아직까지 민족적 입장을 저버리고 계속 공산당과 손을 잡고 다시 남북협상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동포 여러분-나는 이들을 동포의 이름으로 규탄하거니와 동포 여러분은 이에 새로운 인식과 각오가 있어야 하겠습니다.[6]

                        한국민주당 김준연

며칠 후 한민당도 당의 이름으로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김구김규식을 신랄히 비난했다. 너무나 신랄하고 공격적인 이 성명은 곧 한국 정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김준연과 한민당의 성명을 보고 누구보다도 치를 떤 것은 한독당의 김학규였다.[6]

각주 선생님, 이걸 좀 보십시오. 한민당김준연이란 자가 우리를 아주 공산당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세상에 이런 죽일 놈이 있습니까.[6]

김학규에게서 신문을 받아든 김구는 돋보기로 김준연의 성명을 읽었다.

음 내 머지않아 이런 성명이 나올 줄 알았지. 나보다 김규식 박사가 더 안됐군![6]

  

극도로 흥분한 김학규를 진정시키는 김구의 눈에도 분노와 울분이[6] 서려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앉아 있던 김구는 책상 위에 놓인 붓을 들었다. '小人閑居爲不善'-김구는 말없이 이런 글귀를 써내려갔다.[8]

김구, 김규식을 위시한 남북협상파를 정면으로 공격한 김준연과 한민당의 폭탄 성명은 독촉 등 정부수립파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8]

김학규는 남북협상이 불가능하다며 임정 인사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승만 암살 미수와 김구 암살[편집]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되자, 암살범 안두희한국독립당 입당을 주선한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받고 복역하였다.[4] 김구가 경교장에서 암살되던 날 그는 경교장에 모인 측근에게 혈서를 하나 보여주었다.

사건 직후 경교장에서 보좌진을 부른 그는 자신이 소지하던 손수건 두 장 크기의 하얀 천을 한장 보였다. 천에는 "나는 미국제국주의의 주구 이승만을 타도한다"는 혈서가 쓰여 있었다.[9] 보좌진들이 누가 쓴 것이냐 라고 묻자 김학규는 "안두희가 백범 선생 앞에서 쓴 것"이라며 믿었던 안두희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분해하며 부르르 떨었다.[9]

이 사건 직후 김학규는 안두희의 혈서를 그대로 불에 태웠다.[9] 그러나 김학규가 안두희김구에게 소개해서 이승만 암살을 도우려 했다는 정보가 이승만 정권의 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는 애매한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게 된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방치하면 살해될 것을 염려한 군내 광복군 출신의 배려로 정부가 내려갈 때 함께 대전과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휴전후 서울로 와서 다시 복역한다. 이후 제1공화국 기간 중 내내 투옥된다.

석방과 만년[편집]

1961년 복권이 되어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1967년 9월 20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망원동 자택에서 별세하자,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4]

가계[편집]

  • 아버지 : 김기섭(金起燮, 본관은 안동)
  • 어머니 : 선우 순(鮮于 順)
    • 본처 : 김봉수
      • 장남 : 김일현(金日鉉)
      • 차남 : 김일진(金日鎭)- 오광심 호적 입적
      • 장녀 : 김탄실
      • 차녀 : 김은순
    • 후처 : 오광심

논란[편집]

'해방 후 광복군'과 박정희 비밀공작원설[편집]

광복군은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한국인 병력의 귀순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일본군 포로로 중국군 포로수용소에 잡혀있던 한인 출신 포로들이 광복 직후 임시정부에 무더기로 인계되고, 이들이 광복군으로 편입돼 임정과 같이 귀국하면서 인원이 부정확해졌다는 분석이 많다. 가짜 광복군 논란은 이들(토교대)을 비롯, 비호대와 3지대 등에서 주로 불거지고 있다.[10]

해방 직후 북경에는 광복군 출신, 학도병 출신 등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집결하였다. 그 숫자가 대략 400여 명에 달했는데 만주군 대위 출신은 신현준과 중위 출신의 박정희 전 대통령도 있었다. 임시정부는 동북반사처(辦事處) 최용덕 처장을 보내 이들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러고는 이들을 임시로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 휘하로 편입시켰다. 이때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경력을 인정받아 3지대 1대대 2중대장을 맡았다. 이들은 모두 '해방 후 광복군'이다. [11]

박정희가 소속된 광복군 부대는 아마도 북평잠편지대일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 증언에는 제3지대 주평진대대(駐平津大隊)라고도 한다. 평진이란 북평과 천진에서 따온 말이다. 이 부대의 대대장은 박정희와 같이 근무한 신현준이었고 신현준은 광복군의 존재를 해방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 부대는 실제 광복군 부대라기보다 해방이라는 급격한 상황 변화에 따라 광복군이 세불리기 차원에서 부대 명칭을 부여한 것으로, 사실상 일종의 포로수용부대였다. 이들 부대를 관리한 중국쪽 기관이 부로관리처(俘虜管理處)인 것도 이를 증명한다. [12]

이게 박정희가 일제 패망 이전에 광복군 비밀요원이었다는 식으로 기술한 소설 <광복군>(저자 박영만)의 근거로 활용됐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증언자는 이용(李龍), 해방 전엔 이집용(李集龍)이었다. 간도특설대에 대해 제대로 증언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박정희·신현준이 광복군 김학규 장군에게서 “적당한 시기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1945년 7월에 베이징에서 다시 철석부대로 돌아오는 등 비밀광복군이었다는 얘기는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13]

소설광복군에 근거하여 많은 가짜 정보들이 유통되었다. 육군본부가 발간한 '창군전사', 장창국이 출간한 '육사 졸업생'에도 등장한다.

‘만주에 있던 장교들은 그들대로의 지하조직이 있었다. 박정희, 신현준, 이주일 등은 광복군 제3지대의 비밀 광복군으로서 거사 직전에 해방을 맞이했다.’ (육군본부 발간 ‘창군전사’ 265쪽)

창군전사 말고도 박정희를 비밀 광복군으로 묘사한 책은 더 있다. 박정희 정권에서 합참의장, 국회의원을 지낸 장창국(전 합참의장, 작고)씨가 1984년 <육사졸업생>이란 책에서 '광복군 비밀요원설'을 주장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당시 장씨는 책에서 "신태양악극단이 '철석부대'로 위문갔을 때 이 악극단의 잡역부로 위장한 비밀광복군 이용기가 박정희와 접촉, 그를 비밀광복군으로 만들었다"고 썼다.

그러나 이는 모두 날조된 것이다. 부대장의 이름을 따 일명 '철석부대'로 불린 이 부대는 1939년 명월구에서 조선인 독립대대로 출발한 부대로 박정희는 이 부대에 간 적이 없다. 철석부대 출신인 박창암(육군 준장 예편, 작고)씨, 송석하(육군 소장 예편, 작고)씨 등은 생전에 "박정희는 철석부대 문전에도 가본 적이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 '신태양 악극단' 단장을 지낸 작곡가 손목인(작고)씨는 생전에 "더러 군대 위문도 갔지만 철석부대는 들어본 일이 없고, 이용기라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또 단원이었던 가수 신카나리아씨와 영화배우 황해씨 등도 지난 97년 "이용기라는 이름은 기억에 없다"고 증언한 바 있다. [14]

광복군 출신인 장준하는 1967년 대선에 맞추어 나온 소설 광복군(저자 박영만)에 격분한다. 친일파 박정희 대통령을 비밀광복군으로 둔갑시켰기 때문이었다. 1967년도 당시에 야당 대통령 후보 윤보선을 지지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줄기차게 비판한다. 고상만의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책에도 그 이야기가 언급돼 있다. ‘지금 현재 일각에서 박정희 후보가 광복군이라고 하면서 써놓은 책이 있는데 이것은 전부 다 거짓말이다. 내가 광복군이기 때문에 정확히 안다. 그는 당시에 만주에서 일본군 장교로 있었다.’ 이같은 언급에 대해서 당시 중앙정보부가 중요상황 보고로 장준하의 발언을 일일이 기록했다.[15]

또 당시 정황을 비교적 잘 아는 김승곤 전 광복회장은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16]

소설 광복군이 출간될 당시 중앙정보부에 근무한 이종찬 전 국회의원의 증언이다.“이건 내가 실제로 겪은 것으로 1967~68년 중앙정보부에 ‘<광복군>(저자 박영박) 책을 모두 거둬들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어렵게 책을 수거해 봤더니 ‘박정희가 광복군 활동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박 대통령이 그것을 읽고 ‘이런 거짓말을 해선 안된다. 해방 후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이 만주에 있던 한국 국적 군인을 모았다. 그때 잠시 구대장으로 사병을 모아 훈련시킨 적이 있다. 이것은 해방 이후로 내가 장준하나 김준엽처럼 일제때 독립군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래서 책을 거두어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17]

김학규와 김희선의 관계 논란[편집]

본관이 '의성'인 열린우리당 의원 김희선은 2004년 자신의 본관을 '의성김씨'로 소개하면서 작은 할아버지를 광복군 3지대장을 지낸 김학규(안동김씨) 장군이라고 말했다. 월간조선은 양가 족보를 대조해 김희선 의원이 장군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18] 고 주장하였다. 월간조선김희선의 가계를 조사해 부친이 창씨개명 후 만주국 경무과 특무계에서 근무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19]

김희선이 안동김씨라고 주장한 김학규는 의성김씨나 안동김씨 족보에 올라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4] 동아일보가 안동김씨 종친회 측에 문의한 결과 김학규 장군이 안두희(安斗熙)를 김구(金九) 선생에게 소개한 분이라는 얘기가 있어, 족보 전체를 꼼꼼히 살펴봤으나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찾을 수 없었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4] 한편 안동김씨 측은 김학규 장군 연배의 '안동 김씨' 돌림자 항렬은 규(圭)ㆍ진(鎭)ㆍ한(漢)ㆍ동(東)으로, 김옥균(金玉均)이 갑신정변 때 역적으로 몰리면서 고종이 25세손 항렬자인 '균(均)'을 '규(圭)'로 대체해 사용하도록 했다고 설명하였으며, 김학규 장군의 '규(奎)'는 '별 규'자로 '안동 김씨' 문중에서 쓰는 항렬자가 아니라고 답변하였다는 것이다.[4] 한편 1969년 방국진과 결혼한 김희선1970년의 호적에 '의성김씨'로 등재되어 있다.[4]

김학규의 유족 측은 김희선이 김학규의 친손녀가 아니라 김학규 이부형의 손녀라고 증언하였다.[20] 김학규의 딸 김은순은 2004년 9월 24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학규가 의성김씨가 아니라고 발표하였으며, 그의 어머니가 안동 김씨 집안으로 재가해 새로 낳은 아들로, 김희선이 주장하듯 의성김씨 집안 자손이 아니라고 발표하였다.[20] 김은순의 증언에 의하면 증조모(선우순)가 낳은 아들은 모두 3명,딸은 1명으로 의성김씨 전 남편과 사이에서는 김성범과 딸을 하나 낳았고,안동 김씨 집안에 재가한 뒤 낳은 첫아들은 어릴 때 죽었고 둘째아들이 김학규라고 증언하였다고 조선일보가 보도하였다.[20]

김학규는 1900년생으로 1936년 발간된 '의성 김씨 태천공파' 파보(派譜)와 1992년 제작된 '의성 김씨 대동보'에 따르면, 김희선의 증조부 김순옥은 1897년 사망했고 1900년생인 김학규 장군은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다.[21] 김학규의 맏며느리 전봉애는 증언에서 선우순이, 김성범을 데리고 의사인 안동김씨 김기섭한테 시집가서 김학규 장군을 낳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전봉애는 시할머니(선우순)가 우리 시어머니(김봉수 여사·김학규의 처)에게 '남편이 죽고 혼자 되니 살 수가 없어 아들 하나를 데리고 안동 김씨 집안으로 시집왔다'고 늘 말했다는 얘기를 시어머니에게서 들었다 하며 두 사람(김성범과 김학규)은 친형제가 아니라고 증언했다고 월간조선 2004년 10월호가 보도하였다.[21]

이같은 월간조선의 보도에 대한 반박도 나왔다. 독립유공자 김은석은 “김일련와 함께 한독당에서 활동했다”고 밝히고 “해방 후 동북 주화대표단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찾아온 김일련에 대해 김학규 장군 비서였던 이시찬이 ‘김학규 장군의 조카이고 같은 당 동지니까 기탄 없이 잘 협조해 일하라’고 소개시켰다”고 한다. 또 월간조선과 인터뷰했던 김학규 장군의 큰며느리 전봉애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김일련경찰이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고 월간조선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친척인 이경실은 “김일련은 집에 있는 소까지 팔아 독립투사들 밑천을 댔다”고 말했다.[22]

2006년 1월 27일 서울고법 형사1부는 판결문에서 “김희선 의원은 김학규의 종손녀인데 단순히 ‘손녀’라고 표시했다는 점만으로는 허위사실이라고 보기 힘들고, 친할아버지인 김성범씨가 홍보물에 나온 대로 ‘독립군 자금책’이라고 볼 만한 증거는 없지만 독립운동을 했을 개연성은 있어 보인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 “아버지 김일련씨의 경우, 한 월간지에서 만주국 경찰서에서 특무직을 맡아 독립운동가를 색출했다고 보도한 바 있으나 강한 의혹 제기 차원에 머물러 있다”며 “기사가 사실이라도 김 의원이 그 내용을 미리 알고서 의도적으로 허위사실을 공표했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23]

김희선은 국회의원 시절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 결성을 주도했고 2004년 친일진상규명법 제정에도 앞장섰다. 법 제정 1년 뒤 대통령 직속으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가 설치됐다. 규명위는 4년 활동 끝에 김성수 〈동아일보〉 창업주,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주 등이 포함된 반민족행위자 명단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김희선은 조선일보와 월간조선, 동아일보 등 보수언론의 마녀사냥식 공세를 견뎌야 했다. 그게 본관.손녀.출생연도 논란이다.[24]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은 김희선을 ‘가짜손녀’라고 보도해 논란이 됐다. 족보가 다르다는 것이다. 김희선 측이 밝힌 전후 사정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김희선의 증조할머니가 의성 김씨와 결혼했다가 남편이 죽자 자녀를 데리고 안동 김씨로 재가를 하면서 빚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족보와 호적을 둘러싼 논란은 결국 법정까지 가 2006년 ‘김희선과 김학규는 법적으로 혈연관계가 존재한다’는 판결을 받았다.[25]

김학규를 연기한 배우[편집]

각주[편집]

  1. 김학규 장군 38주기 추모식 연합뉴스 2005년 09월 20일자
  2. “독립유공자 공훈록 - 김학규”. 2016년 3월 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10일에 확인함. 
  3. "김학규, 해방 직후 만주서 활발한 활동" :: 네이버 뉴스
  4. 김희선 의원, 의성김씨 본관 찾다 실패 동아일보 2004-08-17일자
  5. 송건호, 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387페이지
  6. 송건호, 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388페이지
  7. 1921년 모스크바의 극동인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전력이 있다. 김준연도 한때 국내의 조선공산당 당원으로 있었다.
  8. 송건호, 송건호 전집 13 (한길사, 2002) 389페이지
  9. 동아일보 1992.04.15, 6면 정치면
  10. 가짜 독립운동가 판친다? 광복군 1지대원 김득명씨 “가짜 광복군 많다” 폭로 민중의 소리 2005-07-04 09
  11. “[정정당담]잘못된 독립유공 포상 사례 셋”. 경남도민일보. 2018년 10월 22일. 
  12. “기회주의 청년 박정희!”. 한겨레21. 2002.10.23. 
  13. "조선인부대 말만 믿고 입대…민간인 학살說은 사실무근". 세계일보. 2006.08.08. 
  14. “중위 진급 한달 뒤 일제패망에 낙담 해방 이듬해 패잔병 몰골 귀국선 타”. 오마이뉴스. 2004.08.24. 
  15. "박정희 비밀광복군?…허무맹랑한 소설 이야기". 노컷뉴스. 2015.10.23. 
  16. “만주군 중위 박정희, '비밀광복군' 둔갑”. 세계일보. 2006.08.10. 
  17. “[원희복의 인물탐구]임정기념관건립위원장 이종찬 “이승만부터 김원봉까지 다 아우르겠다””. 경향신문. 2018.03.18. 
  18. '광복군 제3지대장의 손녀' 혹은 '만주국 특무의 딸' 김희선의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 월간조선. 2019.04.16. 
  19. “「金希宣 의원의 아버지 金山英一(창씨개명)은 日帝下 만주국 유하경찰서에서 特務로 근무했다」”. 월간조선 2004년 11월호. 
  20. (뉴스플러스) "김학규장군 의성김씨 아니다" 서울신문 2004-09-20, 23면
  21. "김희선의원 부친 만주국 경찰" 보도 논란
  22. 김호경기자 (김희선의원 親日반박 기자회견) 김학규장군 큰며느리 ″만주국 경찰 증언 안했다″ 국민일보 2004-09-17
  23. “법원, 김희선 의원 ‘독립운동가 후손 논란’ 기각”. 한겨레. 2006.01.27. 
  24. ““여성 독립운동가 활약상 뒤늦게 알고 부끄러워 나섰어요””. 한겨레. 2018.10.04. 
  25. “[원희복의 인물탐구]외면당한 여성독립운동가 발굴하는 전 국회의원···김희선 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 경향신문. 2017.08.06. 

참고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