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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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민 박철언
靑民 朴哲彦
기본 정보
국적 대한민국
출생 1942년 8월 5일(1942-08-05) (75세)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종교 불교
본관 밀양
배우자 현경자
자녀 슬하 1남 2녀
경력 제10대 정무제1장관
제1회 체육청소년부 장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제사법위원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자유민주연합 전임고문
군복무 육군대위 전역

의원 선수 3선 의원
의원 대수 13·14·15
정당 무소속
지역구 대구 수성구 갑

박철언(朴哲彦, 1942년 8월 5일 ~ )은 대한민국정치가이다.[1]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호(號)는 청민(靑民)이다.

생애[편집]

박철언은 1942년 8월 5일, 경상북도 성주에서 태어났다. 1961년경북고를 졸업하고 이듬해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였다.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후 검사로 활동하다가, 신군부의 등장 이후 1980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사위원으로 파견 근무하면서 제5공화국 헌법의 기초작업에 참여했다. 그 후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국가안전기획부장 특별보좌관 등을 지내면서 비밀리에 20여 차례 북한을 방문하였다. 박철언은 전두환의 후계자로 지목되던 노태우를 언제나 보좌하였다.

1988년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제13대 전국구 국회의원 되고 '6공의 황태자'로 불리면서 정무제1장관체육청소년부 장관 등을 지냈다. 하지만 박철언은 '6공의 황태자'라는 명칭 자체가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대표에게 해당되는 말이라면서 정작 본인 자신은 그 명칭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으로서 노태우 정부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전두환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노태우를 명실상부한 대통령으로 만든 것도 그였다. 또한 민주정의당의 공천권을 가졌고 7·7 선언의 주역이기도 하였다.

1990년 1월3당합당 직전 합당을 중재하였다. 그는 김영삼3당합당을 의논한 대상이기도 하였으나 후일 차기 후계자 자리를 놓고 김영삼과 다투다가 밀려났고, 결국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합류한 후에는 슬롯머신 사건으로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걸었다.

3당합당 이후 제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김영삼과 충돌하면서 1992년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통일국민당에 입당하여 제14대 대선에 대항하여 출마한 정주영 후보를 지원하였으나 정주영은 3위로 낙마하였다. 1993년슬롯머신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1년 6개월을 복역했다.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는데 이 내용은 자신의 자서전에 서술되어 있다.

민주자유당을 탈당한 김종필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자 그에 합류하여 1996년에 실시된 제15대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는 이른바 DJP연합에 따라 김대중을 지원하였고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2000년에 실시된 제16대 총선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대구 수성구 갑에 출마하였으나 낙마하였고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다. 2005년에 회고록《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을 출간했고 이후 한동안 시인으로도 활동하였다.

내각 책임제 개헌과 김영삼과의 갈등[편집]

박철언은 내각 책임제 개헌을 고수하였다. "전당대회 직전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 김종필 최고위원이 내각 책임제 개헌에 합의하고 각서를 만들었다."는 1990년 10월 25일중앙일보 기사에서는 5달 전 나갔던 동일한 기사의 약점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합의각서의 복사본을 공개한 것이다.[2]

김영삼 측에서는 "합의 문서 공개는 김 대표를 궁지에 몰아넣어 대권을 주지 않으려는 정치공작이다. 국민이 원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못하니 차라리 내각제를 백지화하라."며 저항했다.

한편 박철언은 내각제에 생사를 걸었다. 국회의원을 많이 거느린 사람이 권력을 움켜쥐는 내각제는 그를 위한 제도였다. 그는 다수파인 민정계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에서는 김영삼이 반대하면 실현할 방법이 없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박철언은 내각제가 무너지면 자신도 무너지고 만다 고 보았고,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영삼이 내각제 합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노심초사했다. 김영삼이 그렇게 꺼리던 내각제 합의 문서에 사인을 받는 것이 관건이었다. 박철언은 끊임없이 집착하였고 결국 성공했다.

그러나 종이 한 장으로 김영삼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단단히 오해한 것이었다. 1990년 10월 당시 김영삼은 울며 겨자먹기로 각서에 서명을 했지만, 그 합의를 지킬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대통령직은 실권이 사라진다는 점에 김영삼은 결사적으로 내각제를 반대했다.

1992년 초에 김영삼은 다시 노태우와 박철언을 압박해왔다.

내각제를 백지화하라. 그렇지 않으면 탈당하겠다. 나, 김영삼 아니면 누가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겠느냐?

노태우와 박철언은 김영삼이 없는 정권재창출의 묘책을 찾아야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3]노태우와 박철언은 전두환이 한때 후계자의 한 사람으로 고려했던 노재봉을 영입하였다. 노재봉 내각을 내세운 박철언의 공세는 마지막 발악이었을 뿐이었다. 김영삼은 박철언에게 후계자를 주면 즉시 반정부 투쟁을 하겠다고 압박해왔고, 결국 노태우는 굴복했다. 1991년 4월 6일에 박철언은 노태우의 명으로 그의 지지 기반이던 월계수회의 고문직을 사임한다. 김영삼에 맞서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자가 되려고 했던 박태준이종찬의 운명도 박철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92년 5월 19일에 마침내 김영삼은 드디어 민주자유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된다. "호랑이굴에 들어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것이다."라고 김영삼을 조롱했던 민정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학력[편집]

저서[편집]

  •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5공, 6공, 3김 시대의 정치 비사》전2권 (랜덤하우스중앙, 2005)
  • 《4077 면회 왔습니다》(행림출판, 1995)
  • 《변화를 두려워하는 자는 창조할 수 없다》(고려원, 1992)
  • 《작은 등불 하나》(시집,행림출판, 2004)

역대 선거 결과[편집]

선거명 직책명 대수 정당 득표율 득표수 결과 당락
제13대 총선 국회의원(전국구) 13대 민주정의당 34.0% 6,670,494표 전국구 17번 전국구 국회의원 당선
제14대 총선 국회의원(대구 수성구 갑) 14대 민주자유당 58.81% 51,756표 1위 대구 수성구 국회의원 당선
제15대 총선 국회의원(대구 수성구 갑) 15대 자유민주연합 53.34% 49,735표 1위 대구 수성구 국회의원 당선
제16대 총선 국회의원(대구 수성구 갑) 16대 자유민주연합 24.04% 22,487표 2위 낙선

박철언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각주[편집]

  1. 문민 황태자 ‘정치적 환생’. 한겨레21. 2002년 1월 30일.
  2. 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 287페이지
  3. 김진국, 《WWW.한국현대사.COM》 (민연, 2000) 289페이지

외부 링크[편집]

전임
정종택
제10대 정무제1장관
1989년 7월 19일 ~ 1990년 4월 18일
후임
김윤환
전임
(체육부 장관)정동성
제1대 체육청소년부 장관
1990년 12월 27일 ~ 1991년 12월 18일
후임
이진삼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수성구)이치호
제14대 국회의원(대구 수성구 갑)
1992년 5월 30일 ~ 1994년 6월 28일
민주자유당새한국당통일국민당
(수성구 을)윤영탁
후 임
(재보선)현경자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Emblem of the National Assembly of Korea.svg 전 임
현경자
제15대 국회의원(대구 수성구 갑)
1996년 5월 30일 ~ 2000년 5월 29일
자유민주연합
(수성구 을)박구일
후 임
(수성구 갑)김만제
(수성구 을)윤영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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