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자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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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民主自由黨
약칭 민자당
DLP(영문)
상징색 파랑
이념 반공주의
보수주의
스펙트럼 중도우파~우익[1][2]
역사
창당 1990년 1월 22일
해산 1995년 12월 6일
선행조직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후계정당 신한국당
예하 부문
중앙당사 대한민국
의석
국회의원 (1992년)
149 / 299
민주자유당 역대 선거결과 (1991–1995)[3]
40%
30%
20%
10%
0%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약칭 민자당)은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존재하였던 대한민국중도우파 정당이다.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과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신민주공화당(新民主共和黨)의 3당합당(三黨合黨)으로 만들어졌다. 1995년 신한국당(新韓國黨)이 출범하면서 사라졌다.

역사[편집]

창당 배경[편집]

제5공화국(第五共和國)의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1987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盧泰愚)를 대통령으로 당선시켰으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1988년 13대 총선(十三代總選)에서는 과반수(150석)에 훨씬 못 미치는 125석 획득에 그쳐 여소야대(與小野大)구도에 몰리게 된다. 그들은 원내 1당의 지위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는 등 난관에 부딪혔다. 또한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었던 6월 항쟁(六月抗爭)이후에 날로 고조된 국민들의 민주화와 군사정권 청산 요구는 제5공화국 후신세력인 민정당 세력에게 위협이 되고 있었다.

창당[편집]

이러한 상황에서 민정당 세력인 노태우 정부가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이른바 "보수대연합"이 비밀리에 추진하고자 했다. 비슷한 시기 통일민주당의 김영삼(金泳三),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金鍾泌) 역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선거에서 2위를 기록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원내 3당으로 밀려나게 된다. 평소 노태우를 멀리하던 김영삼은 "만약에 이대로 있다가는 대통령을 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 여당의 지위를 얻고자 했고, 얼마 뒤 자신의 측근인 서석재가 무소속 후보를 매수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합당을 결심하게 된다. 한편 신민주공화당 역시 교섭단체 확보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 김종필에 대한 불만이 쏟아져 나온것은 물론이요, 김종필 자신조차도 정권을 잡기 위해 합당을 결심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민주세력이었던 김영삼이 합당을 한다고 하자 민주당은 분열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당시 '청문회스타'라고 불린 노무현은 김영삼에게 협조적이었으나, 합당을 한다고 하자 결별을 선언한다. 이후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8인이 3당 합당을 거부하며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민주진영의 주요 인물인 김영삼, 김대중(金大中)후보 단일화론이 좌절되었다. 1990년 1월 21일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은 한자리에 모여 합당하기로 합의하였고,[4] 이튿날 3당 체제(물론 이는 전당 대회 전까지 행해졌다[5])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5]

강압적 통치와 몰락[편집]

그러나 신생 민주자유당은 개헌선을 훨씬 초과한 218석을 차지하는 등 절대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날치기 통과 강행, 반대파 억압, 사회운동 탄압 등의 독재정치를 펼치게 된다. 이에 자연히 민주인사들의 반발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1992년 총선에서는 의석을 많이 잃어 밀려나게 된다(물론 이는 정주영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여야의 낙천자들을 영입한 결과도 있다).

노태우의 탈당[편집]

노태우는 후계자로 박철언을 내정하고 있었으나 민주계의 김영삼의 반발로 취소하였다. 이후 민주자유당의 당권을 놓고 김영삼과 갈등이 있었고 후계자로는 박철언 등을 내정하기도 했다. 이에 김영삼은 그에게 항의하며 집단탈당과 반정부 투쟁까지도 고려하였다.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대권과 당권을 넘긴뒤, 1992년 8월 28일 노태우는 민자당 총재직을 사퇴하였다. 같은 날 김영삼이 민주자유당의 총재로 취임하면서 노태우는 민자당 명예총재에 선출되었으나, 9월 18일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된다는 이유로 모든 당직을 내놓고 민자당을 탈당하였다.[6]

1992년 9월 18일 노태우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선언,[6] 이에 따라 10월 9일 사상 첫 여당이 없는 중립내각이 출범하였다.[7]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대선 직전에 대통령이 탈당하는 선례를 만들기도 했다.

재집권과 해체[편집]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 당선되어, 정권을 연장하는 데 성공한다. 대신에 5·16 군사정변 이후 첫 민간정부를 출범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김영삼은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여 정경유착을 해소하고자 했다. 또한 과거사 청산을 통해서 5·18 관련자들을 구속 수감하는 가 하면 조선총독부를 철거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이후 5공의 색채가 강한 민자당을 없애고 신한국당을 창당하였다. 결국 민자당은 해체되었다.

기타[편집]

노태우, 김영삼 갈등[편집]

민자당 대선후보였던 김영삼 후보가 노태우대통령의 사돈인 SK그룹에 대한 이동통신사업 허가 문제, 한준수 당시 연기군수가 폭로한 `관권선거 의혹사건`에 대한 중립 선거관리내각 구성을 위한 부분 개각 요구로 노태우대통령과 충돌했고, 1992년 9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이 민자당을 탈당했다.

지역감정 조장 논란[편집]

3당합당으로 비춰진 `영남패권주의 논란`이나 초원복집사건과 공천,유세등을 통해 지역감정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다.[8]

공화계 탈당[편집]

내각제 개헌 약속 위반과 지역감정 논란등으로 계파갈등이 빚어져 김종필을 비롯한 공화계인사들이 탈당하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역대 지도부[편집]

총재[편집]

대수 역대 총재 임기
1 노태우 1990년 5월 9일 ~ 1992년 5월 18일
2 노태우 1992년 5월 19일 ~ 1992년 8월 27일
3 김영삼 1992년 8월 28일 ~ 1995년 2월 6일
4 김영삼 1995년 2월 7일 ~ 1995년 12월 6일

대표최고위원[편집]

대수 역대 대표 임기
1 김영삼 1990년 5월 9일 ~ 1992년 8월 27일
2 김종필 1992년 8월 28일 ~ 1995년 1월 20일
3 이춘구 1995년 2월 7일 ~ 1995년 8월 20일
4 김윤환 1995년 8월 21일 ~ 1995년 12월 6일

역대 선거 결과[편집]

역대 대선 결과[편집]

실시년도 대수 후보자 득표 득표율 결과 당락
1992년 14대 김영삼 9,977,332표
41.96%
1위 Flag of the President of South Korea.svg

역대 총선 결과[편집]

실시년도 선거 지역구 비례대표 정원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득표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1992년 14대[* 1] 116 / 237
48.95%
33 / 62
38.5%
149/299
49.83%
  1. 14대 총선에서 54명의 전국구 후보 중 33명이 당선되었다. 그런데 14대 임기 중 전국구 의원의 의원직 상실이 많아서 후순위의 예비 후보까지 모두 승계되는 보기 드문 현상이 있었다. 선거 때 당선되지 못한 23명의 예비후보 중 4명이 승계 전 탈당하여 17명이 남아 있었지만 그보다 3명이 많은 20명이 의원직 상실되어 전국구 의원의 의석 수가 3석 감소하였다.
    의원직 상실 사유로는 탈당이 13명(자민련 입당 10명 포함)이었으며, 사직이 6명, 사망이 1명이었다.

역대 지방 선거 결과[편집]

실시년도 선거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1991년 - 564/866
65.13%
1995년 제1회 5/15
33.33%
70/230
30.43%
333/970
34.33%

역대 전당대회[편집]

민주자유당 제1차 전당대회[편집]

1990년 5월 9일, 창당 후 처음 열린 민자당 전당대회는 최고위원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단일성 집단지도체제 당헌을 채택하고 내각제 추진 의사를 포함하는 강령을 채택한 뒤,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민주정의당 대표를 최고위원으로 호천했다. 총재에는 김영삼 최고위원의 제청에 따라 노태우 대통령을 추대했고, 노태우 총재는 김영삼 최고위원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지명했다.

민주자유당 제2차 전당대회[편집]

1992년 5월 19일, 민자당 전당대회는 노태우 총재, 김영삼 대표, 김종필, 박태준 최고위원 등 지도부를 재선출한 뒤,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후보 선출에 들어갔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김영삼 4,418 66.3% 당선
2 이종찬 2,214 33.2% 사퇴
총투표수 6,660

당시 경선 구도는 민주계의 김영삼 대표와 민정계의 이종찬 의원 중심으로 흘러갔는데, 경선 막판 이종찬 후보가 전당대회 무효를 주장하며 경선을 거부했고, 이에 따라 사실상 김영삼 대표에 대한 찬반투표로 치러진 표결에서 공화계의 지원까지 받은 김영삼 대표는 66.3%를 득표하며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1992년 8월 28일 민주자유당 상무위원회[편집]

1992년 8월 28일, 민자당 상무위는 사퇴한 노태우 총재를 명예 총재로 추대하고, 김영삼 대표를 총재로 선출했다. 김영삼 총재는 김종필 최고위원을 대표로 지명했다.

1993년 4월 9일 민주자유당 상무위원회[편집]

1993년 4월 9일, 민자당 상무위는 최고위원제를 폐지하고 대표위원제를 신설하는 단일지도체제 당헌개정안을 의결했다.

민주자유당 제3차 전당대회[편집]

1995년 2월 7일, 민자당 전당대회는 김영삼 대통령을 총재로 재선출했고, 김영삼 총재는 김종필 대표의 사퇴로 공석이 된 대표최고위원에 이춘구 국회부의장을 지명했다.

1995년 12월 6일 민주자유당 당무회의[편집]

1995년 12월 6일, 민자당 당무회의는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변경할 것을 의결했다.

각주[편집]

  1. https://books.google.co.kr/books?id=EvfQpUoH5Z0C&pg=PA62&dq=%22Democratic+Liberal+Party%22+centre+right&hl=ko&sa=X&ei=vJKUVcExxbvyBfPOq6gI&redir_esc=y#v=onepage&q=%22Democratic%20Liberal%20Party%22%20centre%20right&f=false
  2. https://books.google.co.kr/books?id=9-HsAAAAMAAJ&q=%22Democratic+Liberal+Party%22+South+Korea+centre+right&dq=%22Democratic+Liberal+Party%22+South+Korea+centre+right&hl=ko&sa=X&ei=OpOUVa6AF8vs8AXDr7r4Bw&redir_esc=y (The centre-right New Korea Party (NKP), formerly known as the Democratic Liberal Party (DLP) lost its grip on ...)
  3. 지방선거는 광역의원 선거 결과를 표시
  4. MBC뉴스데스크 (1990년 1월 21일). “민정,민주,공화당의 보수 신당 창당 윤곽[구본홍]”. 2013년 4월 15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5. MBC뉴스데스크 (1990년 1월 22일). “민정, 민주, 공화당 합당 통한 신당 창당 공시[김성수]”. 2013년 12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4월 15일에 확인함. 
  6. MBC뉴스데스크 (1992년 9월 18일). “노태우대통령, 민자당 탈당 및 선거관리 내각 결정[김용철]”. 2013년 3월 18일에 확인함. 
  7. MBC뉴스데스크 (1992년 10월 9일). “개편된 중립 내각 출범[김용철]”. 2013년 3월 18일에 확인함. 
  8. “<대선(大選)현장> 유세장 지역감정 조장 빈발”. 연합뉴스. 1997년 12월 12일. 2010년 4월 21일에 확인함. 

역대 정당 당원[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