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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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

1981년 ←
1987년 12월 16일
→ 1992년

투표율 89.2%
  Roh Tae-woo - cropped, 1989-Mar-13.jpg Kim Young Sam 1996.png Kim Dae-jung (Cropped).png
후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당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득표수 8,282,738 6,337,581 6,113,375
득표율 36.6% 28.0% 27.0%

  Kim Jong-pil 1999.png
후보 김종필
정당 신민주공화당
득표수 1,823,067
득표율 8.1%

13대 대선.png

시,군 별 우세지역 (당시 행정구역은 아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선거전 대통령

전두환
민주정의당

대통령 당선자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6월 항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현행 헌법에 따라 1987년 12월 16일 수요일에 직선제로 실시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최초로 치러진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거였다.

12·12 군사 반란의 주역 중 하나인 노태우와 대표적인 민주 인사인 양김(김영삼, 김대중) 및 5·16 군사정변의 주역 중 하나인 김종필의 대결이었으나, 선거 결과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국민 직선을 통해 당선된 대통령 중 가장 낮은 득표율이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이 선거를 통해 신군부 정권이 연장된 이유로는 양김의 단일화 실패 등 야권의 분열과 KAL기 폭파사건 등 선거일 직전 터진 중대사고 등이 지적된다.

실질적으로 야권 진영의 두 후보였던 김영삼 후보, 김대중 후보의 표가 분열하면서 표가 갈라졌으며 노태우 후보가 당선됨에 따라 사실상 5년간 군사 정부가 연장된 상황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5년 후에야 민주 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개요[편집]

  • 선거 일시 : 1987년 12월 16일(수) 오전 6시 ~ 오후 6시
  • 선거 대상 : 만 20세 이상(1967년 12월 16일 이전 출생자)

대통령 직선 개헌[편집]

제5공화국 신군부 정권은 집권계승 시나리오에 의해 12·12 군사 반란의 동지 노태우를 차기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또 다시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해 형식적인 간접선거를 치르기에는 6월 항쟁으로 표출된 국민의 저항이 매우 거셌다. 이에 전두환과 노태우는 국민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결국 받아들였고, 노태우가 특별 선언을 통해 야당과 협의하여 헌법개정안을 만들겠다고 발표하였다. 새로운 헌법 가운데 핵심은 민주화투쟁의 최대과제였던 대통령 직선제 규정이었다. 1987년 10월 29일 확정·공포된 헌법(현행 헌법)은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고 국민에 의한 직접선거의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선거 직전 상황[편집]

선거 전 김대중은 출마와 불출마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취하다가 결국 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가 김대중을 조기 사면한 것은 노태우의 당선에 유리한 구도를 만들기 위해 야권 분열을 노리고 한 조치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에 대해 재야인사, 운동권은 물론 일반시민들까지도 후보단일화를 주장하지만, 양김의 의견대립으로 단일화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거기에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등 중대사고가 잇따라 터지면서, 대선은 불안한 결과를 향해 치닫게 되었다.

후보 선출[편집]

민주정의당[편집]

민주정의당은 1987년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민주정의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개회를 열여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1]

통일민주당[편집]

통일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유력했던 김영삼 총재와 김대중 고문은 후보 선출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었고, 결국 김대중이 탈당함으로써 김영삼이 후보로 선출되었다.

평화민주당[편집]

통일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을 앞두고 김영삼과 대립하던 김대중이 동교동계와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하였고, 평화민주당은 김대중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신민주공화당[편집]

신민주공화당은 1987년 10월 30일 서울 동숭동 흥사단 강당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겸한 중앙당 창당대회를 열어 김종필 창당준비위원장을 당 총재와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2]

기타[편집]

사회민주당은 1987년 11월 11일 서울 천도교수운회관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홍숙자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3] 한주의통일한국당은 한얼교 창시자이자 한얼 사상의 창시자인 신정일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고,[4] 일체민주당은 김선적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시인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사자 백기완은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이들 군소 후보중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사민당 홍숙자, 일체민주당의 김선적, 무소속 백기완은 중도 사퇴하였고 한주의통일한국당 신정일만이 끝까지 선거를 완주했다.

단일화[편집]

양김[편집]

김영삼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서 서로 갈등을 빚었다. 1987년 8월 11일,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김영삼의 조기 후보 단일화 주장과 김대중의 개헌 협상 후 단일화 주장이 맞서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 후 한달 뒤인 9월 14일의 양김 회동에서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36개 미창당 지구당 결성을 요청했지만, 당내에서 세력 우위를 선점하고 있던 김영삼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총선에서의 조직책 선정이나 다름없는 36개 지구당을 창당하는 것은 적전 분열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김대중의 주장을 배척하였다.

양김은 9월 29일에 다시 만나 후보단일화 회담을 하였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다. 다음 날인 9월 30일에도 후보단일화 협상이 이어졌지만, 양자 간의 시각차이만 확인하고 협상은 결렬되었다.[5] 야당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던 재야인사들은 이를 '적전분열'이라며 강도높게 질타하였다. 10월 10일 김영삼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자, 당내 경선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었던 김대중은 10월 18일통일민주당을 탈당하였다.[6] 김대중은 11월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본격적으로 대선에 뛰어들었다.

민주세력 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은 28%의 득표율로 2위를, 김대중은 27%의 득표율로 3위를 했고, 36.6%의 득표를 한 민주정의당노태우에게 패배하였다.

기타 후보들[편집]

사회민주당 홍숙자 후보는 1987년 12월 5일 김영삼에 대한 지지를 표하며 사퇴했다.[7] 무소속 백기완 후보 역시 사퇴했다.

선거 운동 기간[편집]

헌정 이후에 치러진 첫 선거이고, 1971년 이후 16년만에 치러지는 직선제 형태였다는 의의를 담고 있다. 그만큼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대통령 선거 당시 차별화 된 선거 공약을 내세우며 자신을 코미디 소재로 다뤄도 좋다고 하기도 하였다.[8] 이후 대머리, 주걱턱 등 연예계의 금기용어가 해금되었다고 한다.[8] 그는 정권 중간평가와 경인운하 건설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에도 불구하고 광주직할시 지역 유세 당시 '광주 학살의 원흉' 또는 '방조자의 한 사람'이라는 항의 시위대가 나타나서 달걀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 김영삼 후보는 후보측이 12·12 군사 반란 당시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면서 강제로 전역당했던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을 영입하면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40%를 넘어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단일화 실패의 결과로 국민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게다가, 선거를 불과 며칠 앞두고 일어난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과 선거일 바로 전날 용의자 김현희가 서울로 압송되면서 야당의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에게는 치명타로 작용했고, 선거국면은 민정당 노태우 후보에게 크게 유리해졌다.

선거 통계[편집]

1987년 12월 16일 선거가 치러졌다. 민정당 노태우는 36.6%의 최다득표율로 당선되었는데, 연고지인 대구직할시경상북도에서 68.1%를 득표했다. 민주당 김영삼은 연고지인 부산직할시경상남도에서 53.7%의 득표를 보였다. 평민당 김대중은 연고지인 전라남도광주직할시에서 90% 이상의 몰표를 받았으며, 전라북도에서도 압도적인 표를 받았다. 반면에, 공화당 김종필은 연고지인 충청남도에서 최다득표하긴 했으나 절반에 못미쳤고, 충청북도에서는 노태우, 김영삼에게 득표율에서 한참 밀렸다. 수도권에서는 서울특별시에서 평민당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고 특히 서울특별시에서 평민당 김대중은 서울 서북권,동북권,서남권에서 민주당 김영삼은 서울 동남권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경기도인천직할시에는 노태우가 승리했다. 그리고 강원도, 제주도에서도 노태우에게 선택했다.

평가[편집]

1971년 이후 16년만에 치러진 직접 선거였지만, 국가기관의 선거 공작이 난무하는 가운데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논란[편집]

개표 논란[편집]

개표 초반부터 결과가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독주로 나타나자 제일 먼저 개표되는 부재자 투표함 개표에 조작 의혹이 제기되었고, 구로구 갑구 개표소인 구로구청에서는 부재자 투표함이 봉인되어있지 않다며 학생과 시민들의 항의가 빗발쳐 개표가 지연되다가 학생과 시민들에게 구청이 점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9]

부정 선거 논란[편집]

1971년 대통령 선거 이후 16년만에 직선제로 치루어진 선거이지만, 다수 국민들의 바람과는 달리 12.12 군사반란의 주역 중 하나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야권의 분열 등이 원인으로 판단되지만, 한편으로는 부정 선거 의혹을 받고 있다.

선거가 끝난 직후,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이 선거는 부정선거이며, 무효임을 규정, 투쟁하겠다'고 발표했다.[10]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역시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내가 이겼을 것'이라며, '투쟁하겠다'고 발표했다.[11]

선거 결과[편집]

득표순위 기호 이름 정당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1 노태우 민주정의당 8,282,738 36.6% 대한민국 제 13대 대통령 당선 당선
2 2 김영삼 통일민주당 6,337,581 28.0%
3 3 김대중 평화민주당 6,113,375 27.0%
4 4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1,823,067 8.1%
5 7 신정일 한주의통일한국당 46,650 0.2%
- 5 홍숙자 사회민주당 - - 기권
- 6 김선적 일체민주당 - - 기권
- 8 백기완 무소속 - - 기권
선거인 수 25,127,158
총투표수 23,066,419
투표율 89.2%
  • 득표율은 총투표수 대비 백분율을 가리킨다.

지역별 득표수[편집]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신정일 합계
서울 1,682,824 30.0% 1,637,347 29.1% 1,833,010 32.6% 460,988 8.2% 4,560 5,618,729
인천 326,186 39.4% 248,604 30.0% 176,611 21.3% 76,333 9.2% 1,126 828,860
경기 1,204,235 41.4% 800,274 27.5% 647,934 22.3% 247,259 8.5% 5,621 2,905,323
강원 546,569 59.3% 240,585 26.1% 81,478 8.8% 46,954 5.4% 2,628 921,214
충남 402,491 26.2% 246,527 16.1% 190,772 12.4% 691,214 45.0% 3,902 1,534,906
충북 355,222 46.9% 213,851 28.2% 83,132 11.0% 102,456 13.5% 2,796 757,457
광주 22,943 4.8% 2,471 0.5% 449,554 94.4% 1,111 0.2% 74 476,153
전남 119,229 8.2% 16,826 1.2% 1,317,990 90.3% 4,831 0.3% 994 1,459,870
전북 160,760 14.1% 17,130 1.5% 948,955 83.5% 8,629 0.8% 1,501 1,136,975
부산 640,622 32.1% 1,117,011 56.0% 182,409 9.1% 51,663 2.6% 3,612 1,995,317
경남 792,757 41.2% 987,042 51.3% 86,804 4.5% 51,242 2.7% 7,567 1,925,412
대구 800,363 70.7% 274,880 24.3% 29,831 2.6% 23,230 2.1% 3,774 1,132,078
경북 1,108,035 66.4% 470,189 28.2% 39,756 2.4% 43,227 2.6% 7,812 1,669,019
제주 120,502 49.8% 64,844 26.8% 45,139 18.6% 10,930 4.5% 683 242,098

각주[편집]

  1. MBC뉴스데스크 (1987년 6월 10일). “[6.10 민정당전당대회]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강성구)”. 2013년 10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5월 3일에 확인함. 
  2. MBC뉴스데스크 (1987년 10월 30일). “[13대 대선]신민주공화당 중앙당 창당 대회(김형민)”. 2013년 10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5월 3일에 확인함. 
  3. “社民黨 대통령후보 洪淑子씨 선출”. 동아일보. 1987년 11월 11일. 
  4. 이상명 기자 (1987년 11월 27일). “신정일 한주의통일한국당 후보, 강화.김포 첫 유세”. MBC뉴스. 2014년 3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5. KBS 영상실록 20051030 방송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6. 우정이 있는 민주공화국 (김성호 지음|사군자|2007-11-16) 97페이지
  7. “社民, 洪淑子후보제명”. 매일경제. 1987년 12월 5일. 
  8. 최양락 “노태우 前대통령 덕분에 시사풍자 개그 가능”
  9. “구로구청 점거농성 1천5백명 연행조사”. 매일경제. 1987년 12월 18일. 11면면. 2010년 6월 10일에 확인함. 
  10. MBC뉴스데스크 (1987년 12월 17일). “김영삼 민주당 총재 내외신 기자회견”. 2013년 10월 2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6월 21일에 확인함. 
  11. MBC뉴스데스크 (1987년 12월 17일). “김대중 평민당 총재 기자회견”. 2013년 9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6월 2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