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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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새누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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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김무성
최고위원 서청원
김태호
이인제
김을동
(이상 선출직 득표 순)
이정현
(이상 지명직)
원내대표 원유철
표어 국민이 하나되는 새로운 세상
창당 1997년 11월 21일
병합한 정당 한국미래연합 (2002)
자유민주연합 (2006)
미래희망연대 (2012)
선진통일당 (2012)
선행조직 신한국당, 통합민주당
이전 당명 한나라당(1997년 11월 21일 ~ 2012년 2월 12일)
중앙 당사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70길 18 한양빌딩
정책연구소 여의도연구원
국가 재정 지원
(2010년)
28,980,000,000원
당원  (2013년) 2,596,763명
190,082명
(당비납부 비율 7.3%)
이념/정치노선 보수주의[1][2][3]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우파[4][5][6][7][8] ~ 우익[9]
원내교섭단체 새누리당
국제조직 국제민주연합
아시아-태평양 민주연합
상징색 빨강
파랑[10]
국회의원
159 / 298
광역자치단체장
8 / 17
기초자치단체장
117 / 226
광역자치의원
416 / 789
기초자치의원
1,411 / 2,898
웹사이트
새누리당
중앙당사 모습
대한민국의 시계열적 정당 지도

새누리당대한민국보수주의, 중도우파 정당이다. '새누리'는 새로운 '새'와 세상의 순우리말인 '누리'를 붙인 뜻으로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나라를 뜻한다. 상징색은 빨강이다.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통합민주당 조순 후보의 단일화가 이루어졌고, 이 때 두 정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출범하였다. 이후 잠깐 사실상의 여당 역할을 했으나(김영삼의 탈당으로 신한국당은 명목상 야당이 되었고, 그 상태에서 한나라당이 출범하였으므로 한나라당 역시 명목상으로는 야당이었다), 이회창이 대선에서 낙선함으로써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2002년 대선에서도 패해 야당 생활을 계속 했으며, 노무현 탄핵 소추를 계기로 2004년 총선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2006년 지방 선거에서 압승하였고, 이후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다시 여당이 되었고 2008년 총선때 압승을 거두어 여대야소정국을 형성하였다. 이후 광우병 파동 등 악재가 잇따라 당의 존폐위기에 놓였으나 2012년 총선에서 승리하였고 같은 해 치러진 대선에서도 승리하여 여당의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새누리당은 여러 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신인 민주자유당에서부터 시작된 3개의 계파(민주정의계, 통일민주계, 신민주공화계)가 존재했고, 그 외에도 소장파들이 여러 개 존재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계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대 초반에는 보수 계열과 진보 계열이 있었으나, 이 중 진보 계열은 2003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이어 2008년에는 총선을 앞두고 친 박근혜 계열이 친박연대로, 또한 보수 계열의 의원들이 자유선진당으로 이동하여 분열이 계속되었다. 한편 당의 주요 축이던 친이계, 친박계 간의 갈등이 계속되기도 했으며, 2011년 이후 친이계가 몰락하면서 친박계가 당권을 쥐게 되었다. 이후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선진통일당을 흡수하면서 보수 정당의 분열이 종식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제도권 보수 정당이자 여당이다.

현재 당의 주요 축은 이명박 계열의 친이계와, 박근혜 계열의 친박계가 존재한다. 이 중에는 민주정의당 출신의 민정계, 통일민주당 출신의 민주계, 신민주공화당 출신의 공화계가 섞여 있으며, 그밖에 다양한 계파가 존재한다. 전신인 민주자유당부터 신한국당 시절에 영입된 소장파들도 다양하게 존재하며, 특히 그 중에는 좌익 성향의 민중당 계열도 존재한다. 민정계는 세부적으로 5공 때부터 활동한 세력과, 노태우에 의해 영입된 후신 계열이 존재하며, 민주계는 상도동계 인사들이 주류이나 훗날 3당 합당에 가담하지 않다가 다시 합류한 이들도 섞여있다. 공화계의 경우, 정통 민주공화당 출신과 순수 신민주공화당 출신, 자유민주연합 계열, 자유선진당·선진통일당 계열 등이 존재한다.

목차

역사[편집]

한나라당 출범 이전[편집]

민주자유당 창당에서 민주계의 당권 장악[편집]

새누리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은 1990년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3당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지만,[11] 당초 합당을 주도한 민정계(민주정의당 출신)가 당권을 쥐고 있었다. 중도 성향을 띠고 있었던 통일민주당은 합당 전 노태우 정부를 견제하던 야당이었고, 경쟁 상대인 평화민주당과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당시 평화민주당이 운동권 영입을 하면서 통일민주당의 영향력은 감소했고, 충격을 받은 김영삼도 재야 인사 영입에 박차를 가했다.

여야는 물론 야당끼리의 대립도 심화시킬 수 있는 철저한 4당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통일민주당은 평화민주당을 견제하면서도 정부와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과의 경쟁은 계속 되었고, 김영삼 자신의 차기 집권 가능성도 낮았다. 이리하여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목 하에 노태우가 3당 합당을 주도하였고, 드디어 1990년 1월 22일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합당 직후 의석수가 단독 개헌선인 200석을 넘는 초거대 여당이 되어 절대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이후 양심수 및 사회운동에 대한 탄압 및 학교 경찰 투입 등 독재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가 커졌지만,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으며, 여세를 몰아 1991년 30년 만에 부활한 첫 지방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허나 이것은 계파 갈등만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 열릴 대선의 후보자를 두고 노태우 대통령은 박철언을 지명하려 했으나, 김영삼을 축으로 한 민주계(통일민주당 출신)의 반발이 계속되었다. 급기야 김영삼은 투쟁을 선언하였고, 결국 노태우는 김영삼을 차기 대선 후보로 정했다. 이 과정에서, 경선에서 패한 이종찬은 탈당 후 새한국당을 창당하여 독자적으로 출마했고, 한때 우호적이었던 민정계와 공화계(신민주공화당 출신)간의 갈등마저 심해지면서 공화계마저 민주계 지지를 선언한다. 차츰 당권이 민주계로 넘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노태우는 총재로 선출되었지만, 민주계의 계속되는 반발과 '정치적 중립'을 명목으로 탈당한다. 이후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에서 42%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민주자유당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지만, 당권은 이미 민주계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분당에서 한나라당의 출범까지[편집]

당권이 넘어간 후에도 민주자유당은 여전히 민정계, 민주계, 공화계로 분류되었다. 민정계는 여전히 강경보수색을 띄고 있었는데 반해, 민주계와 공화계는 온건보수색을 띄고 있었다. 새로 당권을 쥔 민주계 외에 나머지 두 세력은 군부 세력이었지만, 그래도 공화계는 민주계를 지지했다.

그러나 김영삼을 주도로 한 민주계는 1994년 말부터 '개혁'과 '세계화'를 내세우면서 공화계의 일선 후퇴를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민주계와 공화계간의 갈등이 촉발되었고, 마침내 김종필이 이끄는 공화계가 1995년 2월 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3월 자유민주연합을 독자적으로 창당하면서 분당이 일어났다. 이후 민주자유당은 민정계와 민주계로만 분류되었다. 같은 해 열린 지방 선거에서 탈당파들이 만든 자민련이 바람을 타면서 민주자유당은 참패를 당했다. 게다가 노태우가 비자금에 연루되면서 구속되었고, 이어 과거사 청산이 시작되면서 전두환과 함께 '광주 학살의 원흉'으로 낙인 찍혔다. 이렇게 되면서 민정계마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김영삼은 이에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민정계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은 물론, '민주자유당'은 당권이 넘어가고도 '민정계가 만들었다'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결국 1995년 11월 이름을 가칭 신한국당으로 개명했고, 이후 전면 물갈이를 단행하면서 민주자유당의 해체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박희태 등을 제외한 상당수의 민정계와, 자유민주연합에 가담하지 않고 남아있던 잔류 공화계가 당에서 추방당하면서 민주자유당은 민주계만 남게 되었다. 이후 이회창 전 총리나 김문수, 이재오 등과 같은 민중당 인사 등 자신의 반대파들까지 영입하고 신한국당을 창당했다. 이로써 민주자유당은 5,6년 만에 해체되었다.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는 젊은 피 수혈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확보한 신한국당은 1996년에 치러진 15대 총선에서 139석을 획득하여 원내1당으로 부상했으며, 특히 서울에서는 여당이 야당을 제치고 과반의석을 차지하는 등 대단한 성적을 거두었다. 심지어 약세가 두드러졌던 호남에서조차 1명이 당선되는 등 지역주의를 부분적으로 타파했다. 하지만 1988년, 1992년과 마찬가지로 여소야대 국회가 이어지자 정치공작을 펼쳐 자유민주연합, 통합민주당 국회의원을 영입시키는 수단으로 과반의석을 확보했다.[12][13] 그러나, 이는 오히려 국민들의 지지도를 추락시켰고, 동년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노동법 날치기 사건 등 민주계조차 반민주적 성격을 보이면서 국민과 재야의 지지도는 한 층 더 추락하게 되었다. 게다가, 1997년 김영삼의 친·인척 비리, 기업들의 도산, 외환 위기 등을 겪으면서 김영삼의 지지율이 하락하였다.[14]

이 과정에서 김영삼의 반대파였던 이회창이 차츰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계 입문 2년도 채 되지 않았던 이회창이 바람을 타기 시작하면서 국민과 여당 내의 지지율도 상승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97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야당이 이회창의 아들 병역 기피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하면서 '도덕성'에 큰 타격을 주었고, 경제 위기가 겹치고 신한국당의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이회창의 지지도도 추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경선에서 패한 민주계의 이인제가 독자 출마를 하면서, 이회창과 김영삼 간의 갈등이 촉발되고 말았다. 이 상황에서 민주계 강삼재가 이회창을 지지하기 시작했고, '김영삼이 몰래 이인제를 지원한다'는 식의 소문이 퍼지면서 계파 갈등은 더 심해졌다. 이 상황 속에서도 김영삼은 김대중 비자금 사건 수사를 하루만에 중단 결정을 내려[15] 대선에서 중립을 지켰는데, 이는 오히려 계파 갈등을 더 격화시키는 요인으로 적용했다. 결국 김영삼과 이회창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은 가운데 이회창이 신한국당의 새 총재로 선출되었고, 이후 김영삼을 추방시키려고 했다. 이회창은 차츰 자신의 YS이미지를 지우기 시작했고, 이어 11월 김영삼을 전격 추방시켰다. 결국 민주계마저 사실상 몰락하였고, 이회창은 신한국당의 모든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어 11월 13일 통합민주당 조순 후보와의 단일화 합의를 도출해내 21일 양당 합당을 통한 단일화를 이루었다.[15] 이로써 신한국당은 2년 만에 해체되었고,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 조순을 총재로 한 한나라당이 출범했다.

한나라당 출범에서 실용정부 시절까지[편집]

야당으로의 몰락과 이회창의 활약[편집]

이로써 한나라당이 출범했다. 기존의 신한국당처럼 민주계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총재도 민주당계인 조순(통합민주당 출신)을 총재로 추대했지만 실절적인 당권은 이회창이 쥐고 있었다. 이후 이회창은 15대 대선에서 활약을 보여 이인제를 누르고 2위 자리를 차지했지만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에게 패하여 낙선, 정권 교체로 이어진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석을 보유한 제1당이라는 점을 이용해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와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햇볕정책김종필 총리 임명안 및 각종 정책들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로 일관했다. 그러나 국민들의 여론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고, 급기야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영남과 강원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당하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회창은 단순한 대선 후보 경험자가 아닌, 한나라당의 총재로 부상한다(1998년 8월). 그러자 김대중 대통령의 새정치국민회의와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둘 다 여당)은 세풍, 총풍 사건 등 한나라당의 각종 스캔들을 들춰 한나라당을 압박하였으며, 약 40명에 달하는 의원들이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으로 옮겨갔다. 게다가 김영삼과의 갈등도 심해 민주계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문제를 놓고 김대중김종필의 사이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각종 권력형 비리 사건들이 터지면서 이회창은 다시 기회를 잡는다. 전대 한나라당 총재였던 조순을 비롯해 그의 지지자들의 당내 입지를 좁혀 표하게 만들었으며, 김대중 정부의 여러 가지 부패, 비리 사건을 이용해 집요하게 여당을 공격했다. 이런 이회창의 활발한 활동 덕분에 2000년의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수도권에서는 패배하였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원내 제1당의 지위는 유지하게 된다. 게다가, 공동여당의 의석수를 누르고 과반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여, 대단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민주계를 견제할 목적으로 '젊은 피 수혈'을 내세워, 오세훈 등을 당내에 영입하였다.[16]

대선 패배와 계속되는 야당 생활[편집]

2001년 말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공식 출마를 선언했다. 비록 세풍, 총풍 사건이 있었지만 2002년 대통령 선거 직전에도 이회창의 대쪽같은 이미지, 흔들리는 한나라당을 수호해낸 인물, 할 말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까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천년민주당의 당내 경선에서부터 돌풍을 몰고온 노무현 후보의 등장으로 이회창 후보의 초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민주당 내에서도 무명이었던 노무현의 등장 과정과 달리 이회창은 정계 입문 전부터 유명세를 떨친 것은 물론 1997년 대선 때부터 실질적인 한나라당의 지도자였으며, 사실상 2002년 대통령 선거의 후보로 이미 내정된 상태였다. 당시의 노무현 후보가 노사모의 도움과 국회의원 시절의 독특한 정치행보, 서민 위주의 정책을 통해 서민적인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면, 이회창 후보는 엘리트 코스로만 승승장구하며 달려온 정치가, 지난 30여 년간 집권 세력이었던 한나라당을 거느리고 있는 귀족적인 정치가의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서민적인' 행보를 하던 이회창 후보는 서민적 이미지 만들기에는 실패한다. 사실, 노사모에 비견될만한 팬클럽인 창사랑 역시 노사모 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노무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쌓아온 여러 가지 경력, 신뢰감을 주는 이미지, 김대중 정부 말기의 대형 측근 비리 사건은 이회창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계열과 이인제, 김윤환 계열의 이탈로 리더십에 타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4월 한나라당 내 김용갑 등 당내 보수파가 그에 대한 공개 지지를 천명하는 등 강경 보수 성향의 인사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면서 세력을 만회하는 듯 했다.[17]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새천년민주당의 지지도가 높은 호남, 충청 지방을 제외한 대부분의 곳에서 승리를 거둔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세 아들도 각종 비리 사건으로 구속되고, 9월에는 정몽준이 월드컵 열기를 타고 대선 출마를 결심하는 등 이회창이 노무현의 초반 돌풍을 극복하고 작은 차이나마 꾸준히 앞서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대선 중 이회창과 대립하던 박근혜가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해 분당이 있었으나, 얼마 뒤 다시 한나라당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이회창도 비리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2002년에만 823억 정도를 운반한 것으로 알려진 차떼기[18] 를 비롯하여, 115평 초호화 빌라에 공짜로 거주한 점, 1997년 대선에서 불거졌던 두 아들의 병역비리 혐의(법정에서는 무혐의로 판결) 등으로 이회창은 여당의 악재를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또한 아들 이정연, 이수연의 병역 면제와 관련, 2001년초부터 대선 직후까지 모병담당자였던 김대업, 설훈 등으로부터 병역 면제 의혹이 제기되어 왔고, 병역면제 의혹으로 여론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월드컵 열기를 틈타 발생한 서해교전 때문에 국가 안보를 강조하는 입장인 이회창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뻔했으나,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때문에 전사회적으로 퍼진 반미감정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정몽준과 노무현의 단일화로 인해 11월부터는 노무현이 여론조사 상에서 이회창을 2~3% 앞서는 국면이 계속되었다. 대선 하루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정몽준은 노무현과의 지지를 철회하고, 각종 보수 언론에서 이를 대서특필하였으나, 대세가 바뀌지는 않았다.[19] 결국 이회창은 또다시 낙선하였고, 이후 공식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이회창도 이를 기점으로 모든 당권을 내놓았다.

분당과 총선 패배[편집]

이회창이 은퇴하면서, 그는 더 이상 당권을 쥐지 않게 되었다. 대선 직후 민정계인 박희태가 새 총재로 선출되었으나, 얼마 뒤 같은 민정계인 최병렬이 새 총재로 선출되었다.

참여정부 출범 초기, 국민들에 대한 한나라당의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당은 원내 1당이라는 점을 이용해 노무현의 여러 정책에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노무현의 새천년민주당도 그를 압박하면서 민주당에 대한 이미지도 좋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 7일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 등 5명과 기타 진보/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으로 이동하면서, 분당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2004년에 접어들어, 민주당은 노무현이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며 탄핵안을 제출했다. 이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동조하였고, 실질적인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반발하던 가운데 3월 12일 탄핵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1987년 이후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탄핵이 일어났다. 여기서 국민들은 한나라당에 크게 실망했고, 지지도는 더욱 더 추락했다. 게다가, 차떼기 사건과 관련해 최병렬 대표가 사퇴하기에 이르렀다.

한나라당이 '역풍 위기'에 처했을때, 착실하게 당 내에서 입지를 쌓고 있던 박근혜가 그의 뒤를 이어 3월 23일 당 대표가 되었다.[20] 이로써 그녀는 한나라당 최초로 여성 대표가 되었다. 박근혜는 기존의 다선 의원, 중진 의원, 운동권에서 포섭해 온 세력 등과 다르게 박근혜는 여러 차례 기자 회견을 통해 국민에게 사죄를 표명했다. 그러면서도 '거여 견제론' 등으로 열린우리당을 견제했고, 영남에서 전폭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탄핵'으로 인해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더 이상 오르지 못했다. 결국 제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 위기'에서 박근혜가 한나라당을 구해내기는 했지만 121석을 차지하여, 152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에게 참패했다. 이로써 민주자유당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원내 1당의 지위는 빼앗겼고, 원내 2당으로 내려앉았다.

여당을 향한 압박에서 정권 교체까지[편집]

사실상의 여당 정도로, 명목상 야당이던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입당으로 명실상부한 집권 여당으로 자리잡았다. 이후 4대 개혁 입법으로서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진상 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 개혁법’을 제시하고 힘있게 추진하였으나, 당내의 개혁세력과 실용세력과의 분열과 보수세력의 격렬한 반대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이 정책을 '국론 분열'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이렇게 하여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을 강하게 압박했고, 그들은 결국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2005년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를 당했다. 그러자 열린우리당 정세균 의장은 어수선했던 당내 분위기와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립학교법개정안을 한나라당의 물리적 반대를 뚫고 통과시켰다. 이에 박근혜 대표는 곧바로 장외 투쟁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한나라당 내부에조차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 “한나라당이 무슨 장외 투쟁이냐”는 비아냥도 있었고, 국회 등원에 대한 여론의 압박도 심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장외 투쟁을 계속했고, 결국 여야는 한나라당의 장외 투쟁 3개월 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합의하게 된다. 박근혜 대표는 주변의 반대와 한나라당의 체질이라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사학법 재개정을 이끌어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2004년 17대 총선의 ‘한나라당 천막 당사’ 역시 “쇼 아니냐”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상징물로 기억됐다.[21] 이어 열린우리당의 대연정 제안도 단호히 거부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의 지지도는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어 2006년 4월 7일 자유민주연합(2004년 이후 사실상 국민들에게 잊혀졌다)을 흡수했으며[22], 여세를 몰아 동년 지방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대대적인 압승을 거두었다. 이미 박근혜는 모든 당권을 장악하였고,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오랫동안 총재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잠시 가라앉았던 계파 갈등이 벌어졌다. 서울특별시 시장을 하면서 지지를 얻은 이명박이 거센 바람을 일으키면서 당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어 친이계가 당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고 친박계가 위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계파 갈등이 심화된다. 박근혜는 경선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이명박에게 패했다. 일단 박근혜는 승복했지만,[23] 계파 간의 갈등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이명박이 차츰 당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무명 생활을 하던 이회창이 탈당하고 독자 출마를 강행하여 지지도가 추락했지만, 이미지가 실추된 열린우리당을 제치고 1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대선의 결과가 이미 예상된 상태에서 이명박이 48.7%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10년 만에 정권을 되찾게 된다. 이어 2008년 2월 25일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한나라당은 다시 여당이 되었다.

지지율 추락과 친이계의 몰락[편집]

이명박의 취임으로 한나라당은 1998년 이후 10년 만에 다시 여당이 되었고, 취임 초반부터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국민들의 지지가 높게 적용하면서 2008년 4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53석을 획득하여,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미국산 소고기 등에 관한 논란으로 시위가 터졌고, 이 시위를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 결과 이명박의 지지율은 7.4%까지 추락했고,[24] 한나라당의 지지율도 그에 못지 않게 추락했다. 2008년 7월 3일 전당대회에서 전 대표 박희태가 정몽준을 제치고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지지율 추락의 결과로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당했다. 이어 이듬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도 수도권과 영남 지역 등에서만 승리하였다. 지방 선거 참패로 인해 정몽준 대표가 사임했고, 이후 김무성 비상대책위원장을 거쳐 안상수가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한편 이 시기 친이계와 친박계간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갈등이 심해진 끝에 급기야 분당설까지 나왔다.[25]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전격 회동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였으나, 2011년에 들어서면서 친이계가 급속히 몰락하면서 당 중심이 친박계로 이동하게 되었다.

2011년 7월 4일 전당대회에서 홍준표를 새 대표로 선출했다. 그러나 디도스공격, 야권연대 등으로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했고, 12월 홍준표와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였다. 그리고 박근혜 전 대표가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새누리당으로 개명과 정권 창출[편집]

새누리당으로 개명[편집]

2011년 10.26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하자 한나라당이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박근혜를 중심으로 재편된 지도부는 2012년 2월 13일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으며, 상징색을 파랑색에서 빨강색으로 바꾸었다[26].

총선 승리와 정권 연장[편집]

이명박 정부의 여파로 지지율이 추락하는 등 2012년 총선거에서 패배가 예상되었으나 152석을 얻어 과반 의석 확보에 성공하여 승리하였다. 하지만 문대성 등 당선자 2명이 당에서 출당되었고 강창희 국회의장 선출로 출당되면서 과반이 붕괴되었다. 2012년 11월 선진통일당과 합당함으로써 2000년대 중반 이후 분열되었던 제도권 보수 정당들이 새누리당으로 모두 합당되었다. 이리하여 일단은 보수 정당들의 분열이 사실상 종식되었고, 그래서 지금은 대한민국의 유일한 제도권 보수 정당이자 여당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임기 말 탈당으로 이명박 대통령도 탈당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탈당하지 않음으로서 1987년 이후 대선을 앞두고 당적을 버리지 않은 첫 대통령이 되었다.

새누리당 시절부터 박근혜는 사실상 당권을 쥐게 되었고, 이어 2012년 대선에서 51.6%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새누리당은 정권을 연장하게 되었다.

약력[편집]

역대 지도부[편집]

역대 총재[편집]

대수 역대 대표 직함 임기 비고
1 조순 총재 1997년 11월 21일 ~ 1998년 4월 10일 민주당 대표
2 조순 총재 1998년 4월 10일 ~ 1998년 8월 4일 국회의장 선거 패배로 사퇴
(임시) 이기택 총재권한대행 1998년 8월 5일 ~ 1998년 8월 30일 조순 사퇴로 대행
3 이회창 총재 1998년 8월 31일 ~ 2000년 5월 22일 총재 재출마로 사퇴
(임시) 강창성 총재권한대행 2000년 5월 23일 ~ 2000년 5월 30일 이회창 사퇴로 대행
4 이회창 총재 2000년 5월 31일 ~ 2002년 4월 1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출마로 사퇴
(임시) 박관용 총재권한대행 2002년 4월 2일 ~ 2002년 5월 13일 총재직 폐지

역대 대표[편집]

대수 역대 대표 직함 임기 비고
1 이한동 대표위원 199711월 21일 ~ 1998년 4월 10일 대표직 폐지
2 서청원 대표최고위원 2002년 5월 14일 ~ 2003년 1월 29일 대선패배와 불복 책임지고 사퇴
(임시) 박희태 대표권한대행 2003년 1월 30일 ~ 2003년 5월 12일 서청원 사퇴로 대행
3 박희태 대표최고위원 2003년 5월 13일 ~ 2003년 6월 25일 임시 대표
4 최병렬 대표 2003년 6월 26일 ~ 2004년 3월 22일 서청원 석방 결의안 통과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로 사퇴
5 박근혜 대표 2004년 3월 23일 ~ 2004년 7월 4일 과도기 대표, 대표 재출마로 사퇴
(임시) 김덕룡 대표권한대행 2004년 7월 5일 ~ 2004년 7월 18일 전당대회 기간 임시 대행
6 박근혜 대표최고위원 2004년 7월 19일 ~ 2006년 6월 15일 재선,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출마로 사퇴
7 김영선 대표최고위원 2006년 6월 16일 ~ 2006년 7월 10일 임시 대표
8 강재섭 대표최고위원 2006년 7월 11일 ~ 2008년 7월 2일
9 박희태 대표최고위원 2008년 7월 3일 ~ 2009년 9월 6일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10.28 재보선 출마 위해 사퇴
10 정몽준 대표최고위원 2009년 9월 7일 ~ 2010년 6월 3일 박희태 사퇴로 승계, 대한민국 제5회 지방선거 패배로 사퇴
(임시) 김무성 비상대책위원장 2010년 6월 4일 ~ 2010년 7월 13일 대한민국 제5회 지방선거 패배로 비대위 구성
11 안상수 대표최고위원 2010년 7월 14일 ~ 2011년 5월 8일 4.27 재보선 참패로 사퇴
(임시) 정의화 비상대책위원장 2011년 5월 8일 ~ 2011년 7월 3일 안상수 사퇴로 대행
(임시) 황우여 대표권한대행 2011년 5월 13일 ~ 2011년 7월 3일 안상수 사퇴로 대행
12 홍준표 대표최고위원 2011년 7월 4일 ~ 2011년 12월 9일 10.26 재보선 패배와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으로 사퇴
(임시) 나경원 대표권한대행 2011년 12월 9일 ~ 2011년 12월 11일 안상수 사퇴로 대행, 이틀 만에 사퇴
(임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2011년 12월 19일 ~ 2012년 5월 14일
13 황우여 대표최고위원 2012년 5월 15일 ~ 2014년 5월 14일
(임시) 이완구 비상대책위원장 2014년 5월 15일 ~ 2014년 7월 13일 지도부 임기만료로 대행
14 김무성 대표최고위원 2014년 7월 14일 ~

원내대표[편집]

역대 원내대표 직함 임기
목요상 원내총무 1997년 11월 21일 ~ 1997년 12월 16일
이상득 원내총무 1997년 12월 17일 ~ 1998년 4월 5일
하순봉 원내총무 1998년 4월 6일 ~ 1998년 8월 27일
박희태 원내총무 1998년 8월 28일 ~ 1999년 1월 14일
이부영 원내총무 1999년 1월 15일 ~ 2000년 6월 1일
정창화 원내총무 2000년 6월 2일 ~ 2001년 5월 13일
이재오 원내총무 2001년 5월 14일 ~ 2002년 5월 16일
이규택 원내총무 2002년 5월 17일 ~ 2003년 6월 29일
홍사덕 원내총무 2003년 6월 30일 ~ 2004년 5월 18일
김덕룡 원내대표 2004년 5월 19일 ~ 2005년 3월 4일
강재섭 원내대표 2005년 3월 5일 ~ 2006년 1월 11일
이재오 원내대표 2006년 1월 12일 ~ 2006년 7월 12일
김형오 원내대표 2006년 7월 13일 ~ 2007년 8월 26일
안상수 원내대표 2007년 8월 27일 ~ 2008년 5월 17일
홍준표 원내대표 2008년 5월 18일 ~ 2009년 5월 20일
안상수 원내대표 2009년 5월 21일 ~ 2010년 5월 3일
김무성 원내대표 2010년 5월 4일 ~ 2011년 5월 5일
황우여 원내대표 2011년 5월 6일 ~ 2012년 5월 8일
이한구 원내대표 2012년 5월 9일 ~ 2013년 5월 14일
최경환 원내대표 2013년 5월 15일 ~ 2014년 5월 7일
이완구 원내대표 2014년 5월 8일 ~ 2015년 1월 25일
유승민 원내대표 2015년 2월 2일 ~ 2015년 7월 8일
원유철 원내대표 2015년 7월 14일 ~

최고위원[편집]

새누리당은 집단지도체제의 정당으로서, 대표최고위원과 선출직 최고위원, 지명직 최고위원, 당연직 최고위원(원내대표, 정책위의장)으로 지도부를 구성한다. 대표최고위원과 선출직 최고위원은 전당대회에서 대의원과 당원, 일반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득표순으로 선출되며, 선출된 최고위원들은 최고위원회의에서 지명직 최고위원과 사무총장, 대변인 등의 당직을 임명한다.

  • 박희태 대표는 2009년 10.28 재보선 출마를 위해 2009년 9월 사퇴하였고, 2008년 전당대회에서 2위를 득표한 정몽준 최고위원이 대표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그러나, 2010년 6.2 지방선거가 당의 패배로 끝나자, 정몽준 대표를 비롯한 최고위원 전원이 6월 3일 총사퇴하였으며, 약 1개월 동안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한나라당이 운영되었다.
  • 2010년 7월 14일 한나라당 제11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안상수, 최고위원으로 홍준표·나경원·정두언·서병수 의원이 선출되었으나, 2011년 4.27 재보궐 선거가 패배로 끝나면서,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한 최고위원 전원이 2011년 5월 8일 총사퇴하였고, 약 2개월동안 원내대표 체제로 한나라당이 운영되었다.
  • 2011년 7월 4일 한나라당 제12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전직 지도부 중 1명인 홍준표 의원이 선출되었고, 최고위원으로 유승민·나경원·원희룡·남경필 의원이 선출되었다. 최고위원 당선자 4명 중 나경원·원희룡 의원 역시 전직 지도부였다. 그러나, 2011년 10.26 재보궐선거 서울특별시장 선거에서 한나라당 최고위원인 나경원 후보가 박원순 야권단일후보에게 패하자, 대표최고위원을 비롯한 최고위원 전원이 2011년 12월 9일 총사퇴하였고, 2011년 12월 19일부터 2012년 5월 15일 전당대회까지 약 5개월동안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운영되었다.
  • 2014년 7월 14일 새누리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김무성, 최고위원으로 서청원, 김태호, 이인제, 김을동 의원이 선출되었다. 이후, 지명직(임명직) 최고위원으로 이정현 의원을 임명하였다.

의원 총회[편집]

새누리당 의원 총회는 새누리당의 원내단체로 두 개의 산하 위원회를 두고 있다. 원내대책위원회는 원내대표가 책임을 맡고 있으며 현재 원내대표는 원유철 의원이다. 정책위원회는 당 강령 및 전국규모 선거의 정책공약 등 주요정책을 수립한다. 현재 김정훈 의원이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다.

사무처[편집]

최고위원회의의 하부 기구로 사무처는 당무집행기구, 원내대책위원회 및 정책위원회의 지원의 업무를 수행한다. 사무총장이 관할하는 중앙사무처는 당의 조직관리, 재정, 행정지원, 인사를 총괄하며, 시,도당 사무처를 관장한다. 현재 황진하 의원이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사무처에는 대표최고위원이 통솔하는 전략기획본부가 있어 주요정치현안 및 전략을 관장한다. 홍보기획본부는 당의 이념과 정강, 정책 및 당 활동 등의 홍보를 관장한다.

중앙당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 70길 18 한양빌딩에 있다.

기타[편집]

야당 시절[편집]

이회창 후보의 대통령 선거 낙선으로 야당으로 전락하였으며, 최병렬 대표가 2003년 6·26 전당 대회에서 ‘포스트 이회창’의 첫 대표로 선출되어 전성기를 맞았으나 '차떼기'논란과 탄핵 역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퇴임하였다. 한나라당은 제17대 총선 참패 위기에 처하였으나 박근혜 신임 대표의 활약으로 121석을 확보하여 거대 야당의 영향력을 유지하였다.[27] 박근혜 대표는 16대 대선 이후 불거진 이회창 후보 진영의 800억원대 차떼기 오명을 씻기 위해 천막 당사를 세우고 당을 쇄신하는 ‘청소부’ 역할을 맡았다.[28]2005년 7월 28일 불법 대선 자금과 천안 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였다.[29] 이후 참여정부의 4대 법안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보수 야당의 역할을 하였고,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제안한 대연정을 거부했다. 2003년 11월 30일 최병렬 대표는 '신행정수도 이전' 통과를 약속했고 당론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대표는 2004년 6월 지자체 재보선 승리 뒤,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로 돌아섰고 헌법재판소의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판결이 나오자 열린우리당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을 합의하여 가결시켰다.[30]

친이, 친박계 갈등[편집]

당의 경선중 박근혜 측에서 BBK 의혹을 제기하면서부터 친이(親李, 친이명박) 진영과 친박(親朴, 친박근혜) 진영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박근혜 측은 결과에 승복해 갈등은 사라지는 듯하다가, 본격적으로 갈등이 심화되어 집단탈당사태가 일어난건 공천파동에서였다. 이후 친박연대가 창당되면서 미디어법 등 몇 가지 정책들에서 친이계와 친박계의 미묘한 의견 차이는 있어왔으나, 2010년 1월 이명박 대통령이 세종시 사수안을 번복하고 제안한 세종시 수정안 방침에 대해 친박연대를 비롯한 당의 주요 친박계 의원들이 반발하면서 그 갈등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박근혜는 원안 추진을 재차 강조하여 화합의 가능성이 낮아진 데 이어 심지어 분당 가능성까지 나왔다.[25] 이전에 홍준표는 박근혜의 세종시 원안 추진론 발언에 대해 '탈당' 이야기까지 나온 상황이었고,[31] 정몽준이 당론을 변경해야 한다는 말에 박근혜가 "국민의 신뢰를 잃은 것에 대해 책임지실 문제"라며 정몽준 책임론을 들고 나왔으며, 정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고위직 관계자들까지 박근혜를 압박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32][33] 이러한 갈등 속에서 야당들이 추진했던 정운찬 총리 해임안을 여당 내 친박계 의원들이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친이계 의원들은 "총리 해임안에 찬성하는 것은 분당하자는 것" 이라며 계파간의 대립이 극화되었다.[34] 6월 29일 세종시와 관련해서 친박계 의원들을 비롯하여 야당의원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수정안이 부결되었다. 이 때문에 친이, 친박간의 갈등이 당분간 해소되기 어렵다는 관측들이 나왔다. 하지만 2010년 8월,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가 전격 회동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양측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다가 2011년에 들어서면서 친이계가 급속히 몰락하면서 당 중심이 친박계로 이동하였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주요 선거 기록[편집]

역대 대선 결과[편집]

실시년도 대수 후보자 득 표 득표율 결과 당락
1997년 15대 이회창 9,935,718표
38.7%
2위 낙선
2002년 16대 이회창 11,443,297표
46.6%
2위 낙선
2007년 17대 이명박 11,492,389표
48.7%
1위 The Presidential Standard of South Korea.svg
2012년 18대 박근혜 15,773,128표
51.6%
1위 The Presidential Standard of South Korea.svg

역대 총선 결과[편집]

실시년도 선거 지역구 당선자 현황 비례대표 당선자 현황 국회 정원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득표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2000년 16대 112/227
49.34%
21/46
39.0%
133/273
48.72%
2004년 17대 100/243
41.15%
21/56
35.8%
121/299
40.47%
2008년 18대 131/245
53.47%
22/54
37.48%
153/299
51.17%
2012년 19대 127/246
51.63%
25/54
42.80%
152/300
50.67%

역대 지방 선거 결과[편집]

실시년도 선거 광역자치단체장 당선자 현황 기초자치단체장 당선자 현황 광역자치의회의원 당선자 현황 기초자치의회의원 당선자 현황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당선자 수 당선비율
1998년 2회 6/16
37.5%
74/232
31.9%
224/616
36.36%
2002년 3회 11/16
68.75%
136/227
59.91%
467/682
68.48%
2006년 4회 12/16
75%
155/230
67.39%
557/733
75.99%
1621/2888
56.13%
2010년 5회 6/16
37.5%
82/228
35.96%
287/762
37.66%
1247/2888
43.18%
2014년 6회 8/17
47.06%
117/226
51.77%
416/789
52.72%
1413/2898
48.76%

역대 전당대회[편집]

한나라당 창당대회[편집]

1997년 11월 21일, 신한국당-민주당 합동 전당대회는 양당의 합당과 한나라당의 출범을 의결하고, 9개항의 강령과 62개항의 기본정책을 채택한 뒤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를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겸 명예 총재로, 민주당 조순 총재를 총재로 선출했다. 이어 조순 총재는 신한국당 이한동 대표를 대표위원으로 지명했다.

한나라당 제1차 전당대회[편집]

1998년 4월 1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대표직을 폐지하고 총재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를 채택한 뒤, 조순 총재와 이회창 명예총재를 각각 총재와 명예총재로 재추대했다.

한나라당 제2차 전당대회[편집]

정권교체와 대한민국 제2회 지방 선거 패배 이후 40여명의 의원들이 탈당해 여당으로 향함으로써 한 때 과반을 차지했던 한나라당은 대한민국 제16대 국회 하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패배했고, 조순 총재는 이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이회창 4,083 55.7% 총재
2 이한동 1,554 21.2%
3 김덕룡 1,283 17.5%
4 서청원 392 5.4%
총투표수 7,326

1998년 8월 3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이회창 명예총재를 조순 총재를 대신할 신임 총재로 선출했다.

한나라당 제3차 전당대회[편집]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이회창 4,717 66.3% 총재
2 김덕룡 1,473 20.7%
3 강삼재 663 9.3%
4 손학규 257 3.6%
총투표수 7,110

2000년 5월 31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이회창 총재를 총재로 재선출했다.

한나라당 제4차 전당대회[편집]

이부영 이상희 이회창 최병렬 합 계
인천 201 10 1,111 79
울산 73 31 446 206
제주 48 18 361 65
강원 71 44 891 101
대구,경북 133 54 3,143 427
전북 278 31 505 117
부산,경남 197 103 2,895 934
대전,충남 124 45 1,643 153
광주,전남 512 67 1,112 368
경기 486 81 2461 424
충북 60 15 592 152

2002년 새천년민주당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경선을 전국순회 국민참여경선으로 진행하면서 무명에 가까웠던 노무현 후보가 노풍(盧風)을 일으키는 것에 자극을 받은 한나라당 역시 당원 50%, 국민 50% 총 50000명의 선거인단을 모집해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순회경선을 실시했으나 이회창 후보의 독주로 인해 큰 흥행은 하지 못했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서청원 3,603 33.6%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
2 강창희 3,336 31.1% 최고위원
3 김진재 2,788 26% 최고위원
4 강재섭 2,652 24.7% 최고위원
5 박희태 2,478 23.1% 최고위원
6 하순봉 2,062 19.2% 최고위원
7 김일윤 2,060 19.2%
8 이해구 1,933 18%
9 정형근 1,593 14.8%
10 김부겸 1,448 13.5%
11 김기배 1,415 13.2%
12 안상수 977 9.1%
13 김정숙 936 8.7% 여성 몫 최고위원
14 김호일 883 8.2%
15 홍준표 883 8.2%
16 함종한 844 7.9%
17 강인섭 569 5.3%
총투표수 7,110

5월 10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경선 결과에 따라 이회창 전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한 뒤 그에 따라 최고위원 경선을 실시해 서청원, 강창희, 김진재, 강재섭, 박희태, 하순봉, 김정숙 의원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3일 뒤 제1차 최고위원회의는 최고위원 최다득표자인 서청원 최고위원을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한다.

한나라당 제5차 전당대회[편집]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패배한 한나라당은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재검표를 요구했으나, 재검표 결과 선거 결과에 거의 변동이 없음에 따라 서청원 대표는 대선 패배와 대선 불복에 책임을 지고 박희태 최고위원을 권한대행으로 지명한 뒤 사퇴한다. 그 뒤, 2번의 대선 패배를 겪은 한나라당은 당 정치개혁특위의 개혁안에 따라 당 대표와 지역운영위원 체제를 택하고, 경선을 위해 일반당원 50%, 국민 50%로 구성된 22만 227446명의 선거인단을 구성했다.

득표순위 이름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최병렬 46,074 35.8% 대표
2 서청원 42,965 33.4%
3 강재섭 18,899 14.7%
4 김덕룡 15,680 12.2%
5 이재오 2,697 2.1%
6 김형오 2,406 1.9%
총투표수 128,721

2003년 6월 26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선거인단 투표 결과에 따라 최병렬 전 서울시장을 대표로 선출했다.

한나라당 제6차 전당대회[편집]

2004년 2월 22일, 불법대선자금사건으로 구속된 서청원 전 대표에 대한 석방결의안을 통과시킨 데 대한 역풍으로 퇴진 압박을 받던 최병렬 대표가 퇴진요구를 수용함으로써 조기 전당대회가 열리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로 인한 역풍으로 창당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한나라당은 전당대회를 3월 18일에서 3월 23일로 연기하고, 국민의 관심을 받기 위해 사상 최초로 대표 경선에 여론조사를 도입하기에 이른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선거인단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2 박근혜 1,255(환산) 1,359 2,614 당 대표
49.8 53.9 51.8
2 5 홍사덕 553(환산) 900 1,453
22 35.7 28.8
3 4 김문수 498(환산) 109 607
19.8 4.3 12
4 3 박진 106(환산) 104 210
4.2 4.1 4.2
5 1 권오을 110(환산) 50 160
4.4 2 3.2
합계 -

3월 2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 전 부총재를 과도기 대표로 선출한다.

한나라당 제7차 전당대회[편집]

2004년 5월 19일 한나라당 당선자총회는 최고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집단 지도체제를 도입하고, 대의원 50%, 여론조사 30%, 인터넷 선거인단 20%가 1인2표로 각각 대표,최고위원을 뽑아 1~5위로 최고위원회를 구성하고 1위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득표순위 이름 합산득표수 반영득표율 비고
1 박근혜 8,433 84.2% 대표최고위원
2 원희룡 2,610 26.1% 최고위원
3 김영선 2,249 22.5% 최고위원
4 이강두 2,185 21.8% 최고위원
5 이규택 1,968 19.66% 최고위원
6 정의화 1,525 15.2%
7 곽영훈 1,050 10.4%
총투표수 10010

7월 19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만장일치로 당헌당규를 개정한 뒤 투표에 들어가, 여론조사, 인터넷투표와 합산해 박근혜 전 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한편 소장파인 원희룡 의원과 김영선 의원이 여론조사와 인터넷투표에서의 강세로 중진인 이강두, 이규택 의원을 꺾고 최고위원직에 당선되는 파란을 일으켰다.

한나라당 제8차 전당대회[편집]

박근혜 대표의 임기가 끝나는 2006년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권을 장악하려는 친이계의 이재오 전 원내총무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친박계가 지원한 강재섭 전 원내대표의 대결이 되었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대의원 투표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4 강재섭 954(환산) 4,299 5,254 대표최고위원
30.2 58.4 50
2 3 이재오 1,423(환산) 3,368 4,791 최고위원
45.1 45.7 45.6
3 7 강창희 554(환산) 2,071 2,626 최고위원
17.6 28.1 25
4 5 전여옥 1,161(환산) 833 1,994 최고위원
36.8 11.3 19
5 2 정형근 633(환산) 1,339 1,993 최고위원
20.1 18.2 18.9
6 1 권영세 540(환산) 1,223 1,773
17.1 16.6 16.9
7 8 이규택 809(환산) 847 1,656
25.6 11.5 15.7
8 6 이방호 213 735 949
6.8 10 9
합계 -

7월 11일, 1인 2표제로 대의원 70% 여론조사 30%를 반영한 최고위원 경선 결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강재섭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한나라당 제9차 전당대회[편집]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한나라당 후보자 선출 선거.

한나라당이명박서울시장은 재임 시절 버스체계 개편과, 청계천 복원을 통해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오히려 2년간 대표를 지내며 대한민국 제17대 총선에서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해내고 대한민국 제6회 지방 선거를 압승으로 이끈 박근혜 전 대표가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당에서는 둘의 화합을 중재하려 했으나, 경선 룰은 생각보다 쉽게 정할 수 없었다. 이명박 후보 측은 당의 결정에 따른다는 입장이었는데, 이 경우 자신에게 유리하게 국민 참여폭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박근혜 후보 측은 ‘원칙’을 내세우며 룰 변경을 거부했다.

3월 18일 결정된 경선룰에 따르면 선거인단이 4만 명에서 20만명으로 (일반선거인단은 1만 2천 명에서 6만 명으로) 늘었고, 전당대회는 6월에서 8월로 연기되었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경선룰에 반발해 곧바로 탈당한 뒤, 후에 창당되는 대통합민주신당에 참여하였다.

6월 13일 후보 등록이 완료되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대표, 홍준표 전 클린정치위원장, 원희룡 전 최고위원, 고진화 의원 등이 후보로 등록하였다. 그 중 고진화 후보는 7월 20일 사퇴한다.

여권에는 지지율이 높은 후보도 없었고, 범여권 정당의 지지율은 지리멸렬한 반면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50%를 상회했기 때문에 한나라당 경선은 곧 본선으로 여겨졌고, 달아오른 경선 과정에서 이명박 후보 측에는 BBK 문제가, 박근혜 후보 측에는 정수장학회 문제가 붉어져나왔다.[35]

그 과정에서 친인척 관여 부동산 투기 의혹, 부인의 15차례 위장전입 의혹, BBK 관련 주가조자 의혹, X파일 존재론, 산악회 선거법 위반 논란, 도곡동 땅 문제 등이 붉어지며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을 조금씩 끌어내렸다. 이 상황에서 타 후보들은 1985년 이명박 후보의 처남과 형 이상은 씨가 도곡동 일대의 땅을 잔뜩 매입한 후 지하철 개통으로 차익을 엄청 남기고 1995년 포스코에 되판 사건을 문제 삼았다.

전당대회를 6일 전인 8월 14일 검찰은 형 이상은 씨의 몫 일부가 이명박 후보의 차명계좌라는 중간수사발표가 하면서 이명박 사퇴론이 거세졌다. 그러나 다음날 대검찰청 정동기 차장이 곧바로 “도곡동 땅은 이명박 후보 소유라는 증거가 없다.”라는 말을 던지며 가까스로 수습한다. [35]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선거인단 총 득표 비고
비율 비율 비율
1 1 이명박 16,868 64,216(환산) 81,084 대통령 후보
51.54 49.06 49.56
2 3 박근혜 13,986 64,648(환산) 78,634
42.74 49.39 48.06
3 2 원희룡 1,079 1,319(환산) 2,398
3.30 1.01 1.47
4 4 홍준표 793 710(환산) 1,503
2.42 0.54 0.92
- 5 고진화 - - - 후보 사퇴

8월 20일, 여론조사에서 크게 격차를 벌린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박근혜 전 대표를 누르고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되었다.

한나라당 제10차 전당대회[편집]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대의원 투표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2 박희태 1,865(환산) 4,264 6,129 대표최고위원
60.2 56.4 57.6
2 7 정몽준 2,896(환산) 2,391 5,287 최고위원
92.6 31.7 49.6
3 4 허태열 555(환산) 2,792 3,284 최고위원
19.8 37 30.8
4 3 공성진 283(환산) 2,306 2,589 최고위원
9.6 30.5 24.3
5 6 김성조 209(환산) 2,245 2,454
5.5 29.7 23
6 5 박순자 382(환산) 509 891 여성 몫 최고위원
12.5 6.7 8.4
합계 -

2008년 7월 3일, 친이계의 지원을 받은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은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정몽준 현대중공업 회장과 친박계의 지원을 받는 허태열 전 충북지사를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나라당 제11차 전당대회[편집]

2010년 7월 14일, 한나라당 전당대회는 만장일치로 미래희망연대와의 합당을 추인하고 최고위원 선거에 들어갔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대의원 투표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13 안상수 1,295(환산) 3,021 4,316 대표최고위원
40.6 40.6 40.6
2 3 홍준표 1,482(환산) 2,372 3,854 최고위원
46.4 31.9 36.3
3 10 나경원 1,530(환산) 1,352 2,882 최고위원
47.8 18.2 27.1
4 6 정두언 472(환산) 1,964 2,436 최고위원
14.6 26.4 22.9
5 12 서병수 142(환산) 1,782 1,924 최고위원
4.4 24 18.1
6 5 이성헌 89(환산) 1,301 1,390
2.6 17.5 13.1
7 9 한선교 790(환산) 403 1,193
24.6 5.4 11.2
8 4 이혜훈 144(환산) 1,034 1,178
4.4 13.9 11.1
9 2 김대식 155(환산) 819 974
4.8 11 9.2
10 1 김성식 132(환산) 533 665
4 7.2 6.3
11 8 정미경 147(환산) 299 446
4.6 4 4.2
합계 -

국민 여론조사 30%를 합산한 투표 결과, 안상수 전 원내대표가 홍준표 전 클린정치위원장과 나경원 전 원내부대표를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나라당 제12차 전당대회[편집]

2011년 5월 8일, 안상수 지도부가 4.27 재보선 패배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하면서, 새누리당은 조기 전당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정의화 전 국회부의장이 비상대책위원장을, 황우여 원내대표가 대표 권한대행을 맡도록 했다. 6월 7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지도부 선출 경선에 70% 반영되는 선거인단을 대의원, 당원, 청년선거인단으로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선거인단 투표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3 홍준표 12,356(환산) 29,310 41,666 대표최고위원
50.4 51.3 51
2 6 유승민 4,638(환산) 27,519 32,157 최고위원
18.9 48.1 39.4
3 7 나경원 14,903(환산) 14,819 29,722 최고위원
60.8 25.9 36.4
4 1 원희룡 6,579(환산) 22,507 29,086 최고위원
26.8 39.4 35.6
5 12 남경필 6,036(환산) 8,860 14,896 최고위원
24.6 15.5 18.2
6 5 박진 3,294(환산) 5,662 8,956
12.4 9.9 11
7 2 권영세 1,211(환산) 5,695 6,906
5 10 8.5
합계 -

7월 4일, 경선 결과 친이계의 지원을 받은 홍준표 전 클린정치위원장이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을 지낸 친박계 핵심 유승민 의원을 누르고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나라당 제14차 전국위원회[편집]

2011년 12월 7일, 10.26 재보선 패배와 뒤이은 선거관리위원회 디도스 공격으로 당 지지율이 추락하자, 유승민, 원희룡, 남경필 최고위원이 동반사퇴했고, 이틀 뒤인 12월 9일 버티던 홍준표 대표마저 사퇴하자 지도부가 붕괴되어 조기 전당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지도부 사퇴로 대표 권한대행을 맡았던 나경원 최고위원마저 12월 11일 사퇴하자 12월 19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박근혜 전 대표를 만장일치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했다.

한나라당 제15차 전국위원회[편집]

2012년 2월 13일, 한나라당 전국위는 새누리당으로의 당명개정을 의결했다.

새누리당 제1차 전당대회[편집]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선거인단 투표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2 황우여 8,540(환산) 21,487 30,027 대표최고위원
58.2 62.7 61.3
2 3 이혜훈 3,241(환산) 11,213 14,454 최고위원
22.1 32.7 29.5
3 7 심재철 5,695(환산) 5,805 11,500 최고위원
38.8 16.9 23.5
4 5 정우택 4,305(환산) 6,900 11,205 최고위원
29.3 20.1 22.9
5 4 유기준 2,040(환산) 7,742 9,782 최고위원
13.9 22.6 20
6 6 홍문종 1,704(환산) 6,820 8,524
11.6 19.9 17.4
7 8 원유철 1,587(환산) 3,168 4,755
10.8 9.2 9.7
8 1 김경안 1,008(환산) 2,855 3,863
6.9 8.3 7.9
9 9 김태흠 1,251(환산) 2,541 3,792
8.5 7.4 7.7
합계 -

2012년 5월 15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황우여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새누리당 제2차 전당대회[편집]

순위 기호 이름 선거인단 여론조사 총 득표 비고
비율 비율 비율
1 2 박근혜 71,176 15,413 86,589 대통령 후보
86.18% 74.73% 83.97%
2 5 김문수 5,622 3,333 8,955
6.81% 16.16% 8.68%
3 3 김태호 2,616 682 3,298
3.17% 3.31% 3.20%
4 1 임태희 2,341 335 2,676
2.83% 1.62% 2.60%
5 4 안상수 739 861 1,600
0.89% 4.17% 1.55%

2012년 8월 20일, 새누리당은 경선을 통해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을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선출하였다.

새누리당 제1차 전국위원회[편집]

2012년 11월 6일, 새누리당 전국위는 선진통일당과의 합당을 의결했다.

새누리당 제3차 전당대회[편집]

순위 기호 이름 국민 여론조사 선거인단 투표 총 득표 비고
득표율 득표율 득표율
1 2 김무성 13,153(환산) 39,553 52,706 대표최고위원
49.2 63.4 59.1
2 8 서청원 9,821(환산) 28,472 38,293 최고위원
36.7 45.6 43
3 1 김태호 5,427(환산) 19,903 25,330 최고위원
20.3 31.9 28.4
4 3 이인제 10,524(환산) 10,258 20,782 최고위원
39.4 16.4 23.3
5 6 홍문종 2,472(환산) 14,157 16,629
9.24 22.7 18.9
6 5 김을동 8,751(환산) 5,839 14,590 여성 몫 최고위원
32.7 9.4 16.4
7 9 김상민 1,399(환산) 2,136 3,535
5.2 3.4 4
8 4 박창달 923(환산) 2,370 3,293
3.5 3.8 3.6
9 7 김영우 998(환산) 2,069 3,067
3.7 3.3 3.4
합계 -

2014년 7월 14일, 새누리당 전당대회는 김무성 전 원내대표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하였다.

비판 및 논란[편집]

정체성[편집]

새누리당의 공약이 포퓰리즘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36] 당은 무상급식을 야당의 포퓰리즘적 정책이라며 비난해 왔으나 2010년 6월 2일에 치러질 지방선거를 앞두게되자 제한적 무상급식 확대 방침을 밝혀 포퓰리즘 논란이 일고 있다. 2010년부터 서울시를 중심으로 제기된 무상급식 논란에 대해서 당은 오세훈이 추진하는 무상급식 반대 주민투표를 공식 지원하기로 하였으나[37] 2011년 8월 0세 무상보육 정책을 들고 나오면서 민주당의 복지정책과 무상급식에는 반대하면서 다른 무상정책은 추진하는 정책적 모순점에 대한 지적이 제기됐다.[38][39]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은 "3조원이 필요한 4세까지의 영유아 보육에 대한 무상보육은 세금폭탄이 아니고, 서울시에서 부담해야하는 700억원의 초중학교 무상급식 비용은 세금폭탄으로 돌아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40] 또한 민주당이 내놓은 반값 등록금 정책에 대해서 그동안 반대해왔던 당시 한나라당은 황우여가 원내대표에 당선된 이후로 긍정적인 쪽으로 급격히 정책을 선회한것도 보수주의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있다.[41] 2009년 7월 21일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당시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수정안 내용과 관련, “한나라당은 정책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42]

비리 (소위 차떼기 사건)[편집]

2002년 16대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가 LG로부터 150여억 원가량의 뇌물을 현금으로 트럭째 받은 것을 비롯, 대통령 선거운동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삼성, SK, 현대자동차, 롯데 등의 대기업으로부터 각 100억원씩을 받는 등 총 823억 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43]. 그 때문에 당에 '차떼기정당'이라는 명칭이 씌워졌다. 2006년 지방선거에는 공천 후보들을 대상으로 한 공천 뇌물 파문으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44] 2004년 2월 4일 최병렬 당 대표는 "불법대선자금에 대해서는 한나라당 당사와 천안 연수원 등 당의 재산을 팔아서 국민여러분께 돌려드리겠습니다."라며 사과했다. 2004년 10월 26일에는 국무총리였던 이해찬이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라는 발언을 해 국회 파행이 빚어지기도 하였다.[45] 2010년 지방선거에서도 당의 공천을 둘러싼 시비는 끊이지 않았고,[46],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지도부가 뇌물을 받고 비례대표를 공천해 해당 후보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47]

여론 조작[편집]

당원 공천[편집]

2010년 2월 울산매일신문과 추진했던 울산지역에 대한 여론조사 과정에서 뇌물을 수수하며 자당에 유리하도록 여론조사를 조작하다 적발되었으며 그중 당과 관계된 사람은 9명으로 이들은 모두 현역 단체장으로서 2010년 6월 지방선거에도 출마할 예정이었다.[48] 이전에 이명박은 지방선거에서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은 비리 사실이 폭로된 단체장들을 공천해서 더욱 강한 비판들이 제기되었고,[49] 민주당은 '울산 전 지역 공천을 포기하라'고 공세를 펼쳤다.[48]

인터넷 여론 조작[편집]

2007년 대선후보를 선출하는 당시 한나라당 경선에서 대학생을 고용해 특정 후보에 유리한 댓글을 작성하도록 한 한나라당 당원[50] 이 실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51]

당시 한나라당 측에서 댓글 알바를 고용해 여론을 유리한 쪽으로 조작하려 한다는 비판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 이석현 의원은 "아고라의 일부 IP를 조사해 보니 한나라당이 위촉한 국민소통위원이었다."라고 주장하였다.[52][53] 이들은 아고라에서 욕설댓글을 집단적으로 작성하여 여론을 조작하려 한다고 이 의원은 지적했다.[54] 한나라당과 국민소통위는 "돈을 받고 고용된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알바라고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55][56]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촛불집회에 대한 태도[편집]

재협상한 FTA를 서둘러 통과시킨 새누리당은, 2008년 촛불집회 당시 한나라당은 국민의 민심을 수용한다며 반성한다던 모습에서 2010년에는 촛불 시위를 대국민 사기극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대한 일부 언론들과 누리꾼들의 비판이 거세게 일기도 하였다.[57] 미디어오늘은 "한나라당이 역풍을 자초하였다"고 보도하였다.[58] 노영민 민주당 대변인은 "당시 대통령이 사과하고 정부가 재협정의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정부 또한 촛불시위의 정당성을 인정해놓고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비판했다.[59]

성추행[편집]

2007년 1월,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중앙일간지의 원색적인 연재소설 주인공인 '조철봉'을 언급하며 "조철봉이 요즘 왜 안 해? 하루에 세 번 하더니 한 번은 해 줘야지. 너무 안 하면 철봉이 아니라 낙지야 낙지"라고 한 발언도 논란이 된 바 있으며,[60] 최연희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 이명박의 '마사지걸' 발언, 박계동의 술집 여종업원 성추행,[61]2010년 7월에는 대학생들과의 뒤풀이 모임에서 벌어진 강용석의 성희롱 발언 등 성추행 파문이 끊이지 않았다. 이 사건들은 개인 의원들의 실수이지만, 한나라당에서 이러한 사건이 자꾸 터지면서 '성나라당', '성희롱당'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언급되며 비판이 제기되었다.[62][63]

날치기[편집]

새누리당은 2008년 총선 이후로 원내 과반석을 차지하였으며 이명박의 당선으로 집권여당이 되었다. 원내 과반수의 찬성이 있으면 법안은 통과될 수 있기 때문에 당시 새누리당은 이를 악용해 각종 법안들을 야당과 협의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처리했다. 날치기는 주로 새해 예산안 처리 혹은 서민 생계 등과 관련되어 야당이 반대하였던 법안 등에서 많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예산안의 날치기 처리는 정상적인 검토, 심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부실 예산안이라는 비판도 뒤따른다.[64] 새해 예산안은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로 3년 연속 새누리당이 단독으로 처리하거나, 야당과의 합의 없이 단독으로 통과되었고 미디어법과 재협상한 한미FTA, 최저임금, 4대강 관련 예산안 등도 같은 방법으로 새누리당에 의해 날치기되었다. 이에 대해 야당과 일부 언론들은 새누리당이 날치기로 처리했다고 비판했다.[65][66] 2011년 예산안은 박희태 국회의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하여 국회 경호원들의 호위 속에 처리되었다.[67] 날치기는 물리적 충돌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민들이 국회 전반에 대해 불신을 갖게하는 계기라는 지적도 제기된다.[68] 결국 예산안 처리에서 새누리당이 약속했던 것과 다르게 처리된것이 많았으며 이에 대해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사퇴하기도했다.[69]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란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12월 28일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당들은 집회를 갖고 날치기 7적을 규정하며 사퇴를 요구했다.[70]

돈봉투 사건[편집]

2012년 총선이 다가오자 이명박 정부 지지율 하락으로 위기를 느낀 당시 한나라당이 박근혜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하였으나 전당대회 개최할지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최고위원에 해당하는 비상대책위원들을 선출하는 방식을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투표로 결정할 것인지 아니면 박근혜 위원장에게 전권을 줄 것인지 문제였다. 당시 한나라당 주류였던 친이계는 전당대회 개최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그 와중에서 당시 고승덕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서울경제신문에 고정 칼럼을 쓰고 있던 중 칼럼에서 돈봉투와 줄세우기가 난무하는 전당대회를 개최하지 말고 박근혜 의원에게 당권을 주자는 취지에서 2008년 전당대회 당시 돈봉투가 건네진 사실을 칼럼에서 언급하면서 이런 폐해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71] 그런데 당시 새로 생긴 종편 채널들이 시청률 경쟁을 하면서 한 종편에서 고승덕 의원을 출연시켜 대담을 하는 중에 위 칼럼을 근거로 돈봉투 사건을 흥미위주로 다시 꺼내면서 이를 뉴스로 확대 재생산하여 국가적으로 큰 논란이 생겼다. 위기가 커진 새누리당에서는 전당대회 개최 없이 박근혜 위원장에게 전권을 주게 되었고, 고승덕 의원이 언론에 누가 돈봉투 주었는지를 밝히지 않자 새로 구성된 당 지도부는 논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검찰에 위 사건에 대한 수사의뢰를 하게 되어, 고승덕 의원은 검찰에서 박희태 후보가 돈봉투를 살포한 사실을 진술하게 되었다. 돈봉투는 고승덕 의원 외에도 다른 의원들에게 광범위하게 살포되었으며, 박희태 국회의장 전 비서 고명진씨가 당시 캠프 상황실장인 김효재 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에게 돈봉투를 진술하였다는 논란이 거듭되었다. 논란이 거듭되자 부인하던 박희태 국회의장과 김효재 대통령수석비서관은 국회의장과 대통령수석비서관에서 결국 사퇴하였고, 검찰에 불구속 기소되었다. 검찰수사는 축소되어 고승덕 의원 외에 돈봉투가 건네졌다는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박희태 위원만 벌금을 선고받고 마무리되었다. 이후 고승덕 의원이 친박계를 위하여 그렇게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고승덕은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하였다.[72] 이후 박희태는 이명박에 의하여 특별사면되었다.[73]

이 사건은 고승덕 의원이 당시 관행처럼 행해지던 전당대회 돈봉투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제도개선 차원에서 썼던 칼럼에서 시작했다가 특정인에 대한 흥미 위주 형사사건으로 변질되어 300만원짜리 돈봉투 하나가 건네진 사건으로 축소되어 종결되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제19대 국회에서는 여야가 현실을 반영하기 위하여 법 개정을 하여 전당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오는 차량 등 실비용을 당원협의회나 지역위원회에 공식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일부 개선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처럼 정당이 아닌 전당대회 후보자가 개인적으로 돈봉투를 건네는 행위는 여전히 형사처벌이 가능한 불법행위로 남게 되었다.

불법 선거운동[편집]

2012년 12월에 이뤄진 18대 대선 과정에서 새누리당이 불법 선거운동 사무실을 차려 정직원들을 고용하여 인터넷으로 선거운동을 한 의혹을 받아 KBS와 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수사를 받았다. 선관위는 사무실을 수색한 후 검찰에 수사 의뢰를 하였다. 정세균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이보다 더한 박근혜 후보측의 불법 선거운동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라며 비판하였다.[74]

과거사 인식 논란[편집]

새누리당의 뿌리가 3당 합당에 있는 만큼 군사정권에서의 폐해, 친일파 청산 등 과거사 정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박근혜5.16 쿠데타를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옹호해 비판을 받았으며, 김무성 의원 등 다수의 인사들이 5.16 쿠데타는 군사혁명이라고 발언하여 논란을 빚었다.[75] 박근혜 정부들어 주요 인사청문회 대상 후보자들이 5.16 쿠데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는 것 또한 비판 받는다.[76] 이와 같이 상식에서 벗어난 과거사 인식 문제의 원인이, 군사정권에서 정작 책임을 져야 했던 민정당 인사 대부분이 3당 합당을 거치며 보수 정당에 그대로 흡수되었던 데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문재인은 "군부독재, 권위주의 체제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고 인권을 유린했던 정치세력이 그 과거에 대해서 진정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77]

또한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은 "내가 볼 때 살아있는 노인들 99% 이상이 친일한 사람들”이라며 “을사늑약 이후 일제가 거의 50년간 지속되었는데 거기서 살아남으려면 친일 안 하고 배겼겠는가"라고 발언하여 친일논란을 불렀고,[78] 박정희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과거 친일파의 후손, 재벌과 친인척 관계를 맺어 카르텔을 형성하였고, 기득권 유지를 위해 여론의 종북몰이와 각종 부정부패를 묵과한다는 비판도 있다.[79][80][81][82]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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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Peterson, Mark; Margulies, Phillip (2010), 《A brief history of Korea》, Facts On File, 242쪽 
  4. Manyin, Mark E. (2003), 《South Korean Politics and Rising "Anti-Americanism": Implications for U.S. Policy Toward North Korea》,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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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대선 선거일 직전의 지지철회로 민주노동당 내 민족해방 계열의 표가 노무현에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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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MB·박근혜 ‘세종시’ 문제 왜 타협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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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고승덕, ‘전당대회 돈봉투’ 폭로 파문(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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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김동규 기자 (2013년 9월 9일). “김영란 "'김영란법' 원안서 후퇴…거부세력 있어". 《연합뉴스》. 2015년 3월 31일에 확인함. 
  82. 장순식 지방정치평론가 (2014년 4월 16일). ““우리에게 ‘새 정치’는 있는가?”…평택은 여전히 民主와 公共性에서 컴컴하다”. 《평택시민신문》. 2015년 3월 31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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