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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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1997년 ←
2002년 12월 19일
→ 2007년

투표율 70.8%(감소 9.9%)
  Roh Moo-hyun - cropped headshot, 2004-Oct-26.jpg LEEHAECHANG2010.jpg Kwon Young-Ghil.png
후보 노무현 이회창 권영길
정당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민주노동당
득표수 12,014,277 11,443,297 957,148
득표율 48.9% 46.6% 3.9%

South Korean presidential election 2002.svg

광역시·도별 우세지역
노무현
이회창

Presidential election of South Korea 2002 result by municipal divisions.png


선거전 대통령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당선자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2002년 12월 19일 목요일 한국의 새로운 대통령을 뽑기 위한 선거로 치러졌다. 선거 전까지 각축전을 벌인 유력한 후보는 15대 대통령 선거에 나와 김대중에게 패배한 제1야당 한나라당의 대표 '이회창'과 여당 새천년민주당에서 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가 된 '노무현'이었다. 대선 재수생인 이회창 후보는 경험이나 세력 면에서 노무현 후보보다 대권 고지에 좀 더 유리할 것으로 점쳐졌으나, 그 점이 오히려 발목잡기가 된 측면이 있는지 이전 대선부터 불거진 두 아들의 병역기피 논란, 노사모로 대표되는 네티즌의 영향력, 월드컵 4강 바람을 타고 선거 몇 달 전 갑자기 대권주자로 떠오른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쟁취 등의 영향으로 노무현 후보가 최종 승리하게 된다.

선거 정보[편집]

(이 문단은 2002년을 기준으로 함)

선거권[편집]

만 2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선거권을 갖는다. 1982년 12월 19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투표를 할 자격이 있다.

피선거권[편집]

만 4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은 피선거권을 갖는다. 1962년 12월 19일 이전에 태어난 사람은 대통령 선거의 후보자가 될 자격이 있다.

선거 개요[편집]

이 선거는 지난 대선들과는 여러 차이점이 있다. 기존의 선거가 4인(1987년), 3인(1992년, 1997년) 구조도를 형성하였다면, 이번 선거는 2인 및 양당 구조도를 형성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기존 대선에 빠지지 않았으며 그 동안 차기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되던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시대가 종식되고 새로운 시대를 연 선거이기도 했다.

선거 전 상황[편집]

김영삼의 퇴임, 김대중의 취임, 그리고 김종필의 불출마로 한국은 3김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지난 15대 대선에서 2위로 패한 이회창은 이미 한나라당의 후보자로 사실상 내정된 상태였고, 그가 후보로 선출된 이후에는 그의 집권이 유력시되었다. 그러나 이회창은 또다시 아들 병역기피 의혹에 시달리고 그 사이 노무현이 '노풍'을 일으키며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면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또한 노무현이 월드컵 바람을 타고 출마한 정몽준과 단일화를 함으로써 그의 지지도가 이회창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후보 선출[편집]

새천년민주당[편집]

새천년민주당 국민경선[편집]

일명 16부작 정치 드라마로 불렸던 국민 경선제는 2002년 3월 9일부터 제주를 필두로 전국 16개 시도를 돌면서 당원(대의원 20%ㅡ 일반당원 30%)들과 국민(50%)들이 직접 투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3만5000명을 추첨으로 뽑는 국민 선거인단 모집에는 190만여 명이 신청했다. 국민 경선제에는 노무현을 비롯해 김근태, 김중권, 유종근,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하였다.

국민 경선이 도입되기 이전에 민주당 부동의 1위는 이인제였고, 노무현은 지지율이 10%도 채 안 되는 군소 후보였다. 경선 국면이 시작되면서 노무현은 “영남 후보론” 및 이인제 후보를 겨냥한 “정체성 시비”로 20%대 지지율에 진입하기 시작했다.[1]

  • 경선결과
김중권 노무현 정동영 김근태 이인제 한화갑 유종근 합 계
제주 55 125 110 16 172 175 18
울산 281 298 65 10 222 116 20
광주 148 595 54 사퇴 491 280 사퇴
대전 81 219 54 894 77
충남 196 277 39 1,432 사퇴
강원 159 630 71 623
경남 사퇴 1,713 191 468
전북 756 738 710
대구 1,137 181 506
인천 1,022 131 816
경북 1,246 183 668
충북 387 83 734
전남 1,297 340 454
부산 1,328 796 사퇴
경기 1,191 1,426
인터넷 1,423 327
서울 3,924 2,305
총합 사퇴 16,568 6,767 사퇴 사퇴 사퇴 사퇴

첫 번째 지역이었던 제주에서 한화갑 후보가 의외의 1위를 차지했고, 노무현은 득표 3위를 기록했다. 두 번째 울산에서는 인상적인 연설을 한 노무현이 예상대로 1위를 차지했다.

한편 여론조사에서는 대선 판도에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3월 13일 문화일보SBS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노무현과 이회창이 양자 대결을 벌일 경우 노무현이 41.7%로 40.6% 지지율을 기록한 이회창을 앞서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 조사에서 이회창이 민주당 후보에 뒤처지는 결과가 나온 것은 대선 구도가 형성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2]

관건은 3월 16일에 실시한 광주 경선이었다. 무엇보다도 광주는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자 새천년민주당의 근거지로서 이곳의 결과가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를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최대의 승부처였다. 결과는 노무현의 승리였다.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라는 여론 조사 결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3]

이후 노무현은 단숨에 지지율이 급상승하며 ‘노풍’의 주인공이 되었다. 광주 경선 직후 이인제의 지역 기반인 대전·충청권에서 일격을 당해 노풍이 꺾이는 듯싶었지만 대구광역시 경선 결과, 종합 1위가 확정되었다. 이후 노무현은 강원도와 전남, 전북, 경남, 대구를 비롯한 거의 전 지역을 석권해 나갔고, 2002년 4월 26일, 서울 경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경선이 끝난 4월 말 노무현의 지지율은 당시 역대 대통령 후보 가운데 사상 최고치라는 60%를 기록했다.[1]

한나라당[편집]

한나라당2002년 4월 13일부터 5월 9일까지 경선을 통해 이회창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이부영 이상희 이회창 최병렬 합 계
인천 201 10 1,111 79
울산 73 31 446 206
제주 48 18 361 65
강원 71 44 891 101
대구,경북 133 54 3,143 427
전북 278 31 505 117
부산,경남 197 103 2,895 934
대전,충남 124 45 1,643 153
광주,전남 512 67 1,112 368
경기 486 81 2461 424
충북 60 15 592 152
서울 743 109 2,321 1,668
총합 2,926 608 17,481 4,694

민주노동당[편집]

민주노동당은 권영길을 후보로 선출했다(그는 지난 15대 대선에 출마한 적이 있다).

사회당[편집]

기타 정당들[편집]

국민의 정부 시절 총리를 지낸 이한동은 하나로국민연합을 창당하여 출마하였고, 전두환 정권의 주요 인사였던 장세동은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지방선거와 민주당 후보 재신임[편집]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함과 더불어, 노무현의 지지율도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노무현은 6.13 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말했다.[4]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지방 선거에서 호남과 제주의 광역단체장만 당선되며 참패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 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5] 이에 대해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 개혁 포럼은 불복하고 ‘후보, 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6]

단일화[편집]

정몽준 출마와 민주당 내분 사태[편집]

2002년 한일 월드컵 바람을 타고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이 거센 돌풍을 일으키자 노무현은 지지율도 토막이 나고 당내 의원들로부터도 배척받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10월 들어서는 아예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고 정몽준 지지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7]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8]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9]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했다.[10]

이런 상황에서 정몽준의 국민통합21에 입당하기 위한 김민석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의 탈당은 노무현에게 악재가 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있었으나,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 액수도 크게 늘었다.[1]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편집]

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있었는데,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이 중 협상 담판은 정몽준의 후보의 주장으로 11월 1일에 정식 제안했고, 국민 경선안은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의 민주당 안을 노무현 후보가 11월 3일 정식 제안했다. 여론 조사안은 단일화 여론 조사를 실시했을 때 우위를 점하는 정몽준 후보가 유리한 안으로 정몽준 후보가 선호하는 안이었다.[11][12]

국민통합21은 노무현 진영 측의 제안을 반대하며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판세는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의 구도로 바뀌고 있던 차였다. 국민통합21도 더는 단일화 방안을 놓고 입씨름을 벌일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 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제의하였고, 단일화 재협상에서도 마지막 쟁점인 ‘무효화 조항’을 전격 수용하면서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설문 내용 변경도 단일화를 위해 수용했다. 이로 인해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는 더욱 반등하기 시작했다.[13][14]

텔레비전 토론을 거쳐 2002년 11월 24일 노무현 후보는 극적으로 단일화 여론 조사에서 승리했다. 24일 실시된 2군데 여론 조사 중 리서치 앤드 리서치 경쟁력 조사에서 46.8%를 얻어 42.2%를 얻은 정 후보를 제쳤고, 월드 리서치 조사에서는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조사 유효화 조건인 31.1%에 미치지 못한 28.7%가 되어 무효가 되긴 했지만, 38.8%를 얻어 37%를 얻은 정몽준 후보를 앞섰다.[15] 그렇게 노무현으로 단일화가 최종 결정된다.

이인제와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편집]

단일화 이후 노무현 후보는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역전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인제가 민주당을 탈당한 뒤 자유민주연합에 입당, 이후 이회창을 지지하는 선언을 하게 된다. 이어 15대 대선 당시의 경선 불복에 대한 사과까지 한다.

게다가 정몽준은 대선 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했다. 지지 철회 발표문에 따르면,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라는 표현을 했는데, 국민통합21은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우방이고, 미국이 북한과 싸울 이유가 없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 발언을 문제 삼았다.[16] 그 외 차기 주자로 자신을 띄워주지 않았던 섭섭함도 어느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노무현 후보는 설득을 위해 심야에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노무현 후보는 정대철 선대위원장 등과 함께 자택 앞에서 기자들에 둘러싸여 기다렸으나 정몽준 대표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고, 심야 회동은 결렬되었다.[17] 하지만 이 여파로 당시 진보 진영이 민노당 권영길 후보 대신 민주당 노무현 후보한테 표를 몰아주는 의외의 효과가 일어났다는 분석도 있었다.

여론 조사[편집]

날짜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이인제 박근혜 권영길 이한동 비고
2001년 12월 11일[* 1] 24.4 8.9 19.6
2002년 1월 1일[* 2] 31.7 8.2 16.8 8.3
2월 11일[* 3] 34.5 5.8 6.7 18.5 8.8 민주당 국민경선 도입
4월 2일[* 4] 27.4 28.3 7.9 13.6 6.4 민주당 국민경선 중
5월 2일[* 5] 32.9 43 여야 후보확정
5월 13일[* 6] 34.7 35.3 12.9 최규선게이트, 미래연합 창당
6월 16일[* 7] 39.6 25.6 8.7 6.13 지방선거
7월 2일[* 8] 34.7 22.2 17.6 6.5 월드컵 폐막
8월 11일[* 9] 30.8 20.8 27.4 8.8 재보선
9월 5일[* 10] 30.2 17.6 29.6 1.7
10월 8일[* 11] 31 14.7 27.1 1.6 0.9 정몽준 출마선언
11월 6일[* 12] 36 16.8 22.4 2.6 0.2 민주당 내분
11월 26일[* 13] 35.2 42.2 2.7 0.4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12월 15일[* 14] 35.2 41.3 4.5
  1. 김정일 서울 와도 대선판도 안 변한다, 동아일보-러시처앤리서치
  2. ,한국일보-미디어리서치.
  3. 이회창·이인제, 격차 줄었다, 시사저널-미디어리서치.
  4. 노무현 45.3% : 이회창 34.6%…본보조사, 동아일보-코리아리서치센터.
  5. 노무현 후보, 이회창 전 총재에 10.1% 앞서, 동아일보-코리아리서치센터.
  6. 이회창-노무현 지지도 오차범위내 접근, YTN-문화일보.
  7. 이회창 41.4% 노무현 26.8% …본보-코리아리서치 조사, 동아일보-코리아리서치센터.
  8. 의원 지지도 급상승, MBC-코리아리서치센터.
  9. 3자대결때 이회창-정몽준-노무현順, 동아일보-코리아리서치센터.
  10. 민주 통합신당 대선후보 선호도 鄭42.1%-盧29.5%, 동아일보-코리아리서치센터.
  11. 신동아 대선후보 지지율…李 31.0%, 鄭 27.1%,盧 14.7%, 신동아-코리아리서치센터.
  12. 李 36 %, 鄭 22%, 盧 17% , 동아일보-코리아리서치센터.
  13. 盧 42.2% 李 35.2% 본보-KRC 단일화직후, 동아일보-코리아리서치센터.
  14. 수도 충청이전 반대 42% 찬성 31%, 동아일보-리서치센터.

KBS 출구조사[편집]

출구조사 노무현(새천년민주당) 이회창(한나라당) 권영길(민주노동당) 이한동(하나로국민연합) 김영규(사회당) 김길수(호국당)
전국(%) 49.1 46.8 3.5 0.3 0.1 0.2
서울 49.4 47.2 3.1 0.1 0.1 0.1
부산 30.4 65.9 3.5 0.1 0.0 0.1
대구 19.2 77.2 3.3 0.1 0.0 0.2
인천 51.7 43.3 4.7 0.1 0.1 0.1
광주 95.9 2.9 1.0 0.1 0.0 0.1
대전 55.5 39.7 4.6 0.2 0.0 0.0
울산 38.7 47.7 13.1 0.3 0.2 0.0
경기 52.1 42.4 4.8 0.5 0.1 0.1
강원 40.8 53.2 5.3 0.5 0.1 0.1
충남 52.5 43.2 4.0 0.2 0.0 0.1
충북 49.3 44.9 5.1 0.3 0.2 0.2
전남 95.3 3.4 0.9 0.3 0.1 0.0
전북 92.8 5.5 1.5 0.2 0.0 0.0
경남 30.6 62.7 6.2 0.2 0.1 0.2
경북 23.5 70.9 5.2 0.3 0.0 0.1
제주 57.5 38.9 3.1 0.1 0.0 0.4

통계[편집]

  • 선거인수 34,991,529명
  • 총투표자수 24,784,963명
  • 무효 투표자수 223,047명
  • 투표율 70.8%

선거 결과[편집]

득표순위 기호 이름 정당 득표율 득표수 비고
1 2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48.9% 12,014,277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 당선당선
2 1 이회창 한나라당 46.6% 11,443,297
3 4 권영길 민주노동당 3.9% 957,148
4 3 이한동 하나로국민연합 0.3% 74,027
5 6 김길수 국태민안호국당 0.2% 51,104
6 5 김영규 사회당 0.1% 22,063
7 7 장세동 무소속 - - 기권
합계 24,784,963표
  • 득표율은 총투표수 대비 백분율을 가리킨다.
  •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수도권, 호남, 충청, 제주 지역에서 승리했고, 반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영남, 강원 지역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가 승리한 영남에서도 부울경 지역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득표율을 끌어올렸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 표차까지 합하면 민주진보진영이 과반을 넘은 곳이 굉장히 많았다. 심지어 여촌야도라는 공식을 깨고 농촌지역에서도 승리했다. 또한 노무현 후보와 권영길 후보의 표차를 더하면 울산의 공단지역에서도 승리했다. 그리고 민주진보진영의 후보들은 서울에서는 동북권, 서북권, 서남권, 도심권에서 승리한 것은 물론, 보수강세지역인 용산구도 휩쓸었고 동남권에 속하는 송파구와 강동구도 휩쓸었다. 이회창 후보가 앞선 소득이 높고 부유층이 많이 살고 있는 서초구, 강남구도 민주진보진영 후보들이 40%를 뛰어넘었다. 인천에서도 구도심인 중구와 섬지역이자 안보 이슈에 제일 민감하고 있는 전방에 속하는 옹진군, 강화군을 제외하면 그 외의 구도심과 부촌인 연수구, 인천 부평권에서 과반수를 넘었다. 그리고 중구에서도 접전이었고, 옹진군과 강화군에서도 무려 40%에 근접하는 득표를 올렸다. 경기도에서도 대도시권은 물론, 보수 강세 지역 및 근접지역과 부촌지역, 외곽지역 대다수와 전방지역 등을 휩쓴 것은 물론, 충청권에서도 대전 구도심, 신도심과 예산군을 제외한 충남 전 지역, 충북 전 지역을 민주진보진영이 과반수 이상 득표를 했고 심지어 농촌지역 대다수를 휩쓸었다. 강원도에서도 춘천을 제외한 영서 대부분 지역에서 승리한 것은 물론, 영동권 서부 지역에서는 민주진보진영의 후보들이 접전 과반이거나 접전 열세인 곳이 있었다. 그리고 영남권에서는 울산 공단지역만 민주진보진영이 과반수를 넘었다. 반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강원도 영동권과 춘천, 그리고 경기도 부촌지역과 최외곽지역 일부, 충남 예산군, 인천 구도심인 중구와 섬지역인 옹진군, 강화군, 영남권 전역과 울산 구도심에서만 과반수 이상 득표를 했다.

지역별 득표수[편집]

광역시·도별 대선 투표결과 우세지역
초록색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우세지역,
파란색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우세지역이다.
이회창 노무현 이한동 권영길 김영규 김길수 합계
서울 2,447,376 45.0% 2,792,957 51.3% 12,724 179,790 4,706 6,437 5,443,990
인천 547,205 44.6% 611,786 49.8% 3,600 61,655 1,612 1,978 1,227,816
경기 2,120,191 44.2% 2,430,193 50.7% 26,072 209,346 4,119 8,085 4,798,006
강원 400,405 52.5% 316,722 41.5% 3,406 38,722 969 2,713 762,937
대전 266,760 39.8% 369,046 55.1% 1,157 29,728 747 1,408 669,846
충남 375,110 41.2% 474,531 52.2% 4,973 49,579 1,303 4,322 909,818
충북 311,044 42.9% 365,623 50.4% 3,205 41,731 949 2,610 725,162
광주 26,869 3.6% 715,181 95.2% 803 7,243 305 1,014 751,416
전남 53,074 4.6% 1,070,506 93.4% 2,830 12,215 988 6,707 1,146,320
전북 65,334 6.2% 966,053 91.6% 2,505 14,904 817 5,187 1,054,800
부산 1,314,274 66.7% 587,946 29.9% 2,148 61,281 1,380 2,064 1,969,073
울산 267,737 52.9% 178,584 35.3% 997 57,786 502 716 506,322
경남 1,083,564 67.5% 434,642 27.1% 2,832 79,853 1,224 2,629 1,604,744
대구 1,002,164 77.8% 240,745 18.7% 1,699 42,174 810 1,317 1,288,909
경북 1,056,446 73.5% 311,358 21.7% 3,332 62,522 1,344 2,936 1,437,938
제주 105,744 39.9% 148,423 56.1% 744 8,619 288 981 268,227

선거 이후[편집]

이 선거는 본격적인 세대론의 대두와 함께 노사모의 등장 등 인터넷 정치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는 점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회창 후보는 선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으나, 2007년 전격적으로 정계에 복귀하여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고, 다시 낙선하고 만다.

노무현 후보의 당선으로 새천년민주당은 정권 연장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한 신주류 소장파와 구주류파가 중심인 민주당의 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결국 임기 중이던 2003년 9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함으로써 민주당은 야당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새천년민주당은 2004년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시키지만, 오히려 민심의 역풍을 맞고 총선에서 참패하며 몰락하고 만다.

각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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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김현재 (2002년 3월 13일). “선호도 노무현 41.7 이회창 40.6%”. 연합뉴스. 2010년 4월 22일에 확인함. 
  3. 신종수 (2002년 3월 16일). “[민주 ‘光州 경선’ 의미] 노무현 대안론 ‘대세’잡나”. 국민일보. 2010년 4월 22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4. 김현재 (2002년 6월 12일). “노무현 "후보 재신임 받을것". 연합뉴스. 2010년 4월 22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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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김현재 (2002년 11월 5일). “후보단일화 방법론과 전망”. 연합뉴스. 2010년 4월 22일에 확인함. 
  13. 김현재 (2002년 11월 22일). “盧 단일화 `승부수" 안팎”. 연합뉴스. 2010년 4월 22일에 확인함. 
  14. 김의겸, 이용호 (2002년 12월 5일). “승부사 노무현 마침내 해냈다”. 《한겨레21》 436. 2010년 4월 22일에 확인함. 
  15. 김현재 (2002년 11월 25일). “피말린 접전 盧승리 결말”. 연합뉴스. 2010년 4월 22일에 확인함. 
  16. “통합21 지지철회 발표문”. 연합뉴스. 2002년 12월 19일. 2010년 4월 22일에 확인함. 
  17. 김종우 (2002년 12월 19일). “심야회동 결렬 안팎(종합)”. 연합뉴스. 2010년 4월 22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