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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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三黨合黨)은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 여당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과 제2야당 통일민주당(약칭 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약칭 공화당)과 합당해 민주자유당을 출범한 사건을 말한다. 3당 합당에 비판적인 입장에서는 3당 야합이라고도 한다.

배경[편집]

제5공화국의 후신세력인 민주정의당 세력은 6월 항쟁이라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도 집권에 성공했으나, 계속되는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군사정권 청산 요구는 이들에게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국민적 요구에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정의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자, 노태우 정부는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이른바 '보수대연합(4당 합당)'을 비밀리에 추진하여 1990년 내각제 개헌 밀약을 조건으로 '구국의 결단'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3당 합당을 이끌어내 거대여당을 탄생시켰다. 3당합당의 여파로 노태우 대통령이 출범한지 2년 만에 80%에 육박하는 높은 수치의 지지율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각 당의 사정[편집]

민주정의당[편집]

민정당은 1988년 13대 총선을 앞두고 27명의 현역 국회의원을 지역구 공천에서 탈락시키는 강수를 두며 과반수 의석 확보에 전력투구했지만, 5공 청산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열망이 민정당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호남 지역의 전멸을 비롯해 125석(지역구 87석, 전국구 38석)에 그쳤고, 이 후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안 부결 및 국정감사 부활 등 야당에게 정국주도권을 빼앗기면서 고전하고 있었다.

이에 당시 민정당 총재였던 노태우 대통령은 제1 야당인 평화민주당과 합당하여 국회 과반수 의석도 확보하고, 호남 지역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우군으로 만듦으로써 호남 지역의 민심을 얻는 일석이조의 구상을 하였다. 이후 김원기 당시 평민당 원내총무를 통해 5.18 문제 해결에 대한 전권을 주겠다는 구실로 김대중 총재에게 은밀하게 합당을 제의했으나, 김대중 총재가 끝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통일민주당과 보수성향의 신민주공화당에 합당제의를 하게 되었다.

통일민주당[편집]

민주당은 13대 총선에서 득표율 2위(민주당 23.8%, 평민당 19.3%)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59석(지역구 46석, 전국구 13석)에 그쳐 원내 3당(평민당 70석)으로 밀려난다. 김영삼 총재는 평화민주당 (1987년) 김대중 총재에 대해 상당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던데다 현재의 구도대로 간다면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것이라 판단, 민정당과 합당하여 여당의 지위를 얻고 자신의 조직을 총동원하여 차기 대권을 잡는다는 구상을 가졌다.

입장을 정리한 김영삼 총재는 민정당과 비밀리에 합당협상을 펼쳤고, 또한 자신의 측근인 서석재1989년 동해시 보궐선거 당시 무소속 후보를 매수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자 합당의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8명은 3당 합당에 거부,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결성하였다.

신민주공화당[편집]

공화당은 13대 총선에서 35석(지역구 27석, 전국구 8석)을 얻으면서 교섭단체 확보에 성공했지만 표밭이라고 할 수 있는 충청도 지역에서는 27석 중 15석을 획득하는 데 그치는 부진을 보인다. 또한 군부출신의 보수 성향으로 야당임에도 불구하고 민정당에 동조했고, 2차례 보궐선거의 전패와 야당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옛 민주공화당 출신 당원들을 중심으로 김종필 총재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또한 김종필 본인도 이대로는 더 이상 대권에 도전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고 판단하여 내각제 개헌에 대한 기대를 갖고 민정당, 민주당과의 합당에 나서게 된다.

결과[편집]

이로써 민주진영의 주요 인물인 김영삼, 김대중 후보 단일화론이 좌절되었다. 신생 민주자유당은 218석을 보유한 절대다수 정당으로 정국의 주도권을 행사했으나,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는 계파 간의 갈등으로 인해 낙천한 인사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통일국민당 공천을 받으면서 299석 중 149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한다. 그러나 14대 대선 당시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영남민심이 결집되면서 노태우를 경계하며 당내세력을 포섭했던 당의 후보였던 김영삼이 당선되고 이후 야당의원들을 대거 영입하여 다시 국회과반수의 거대 여당이 되었다. 이후 김영삼의 당권이 더욱 커지고 내각제 합의각서 파문과 내각제합의 결렬로 15대 총선을 약 1년 정도 앞두고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을 독자적으로 창당하고 공화계 인사들이 그를 따라 떨어져 나가면서 3당합당 카르텔은 2당의 결집으로 축소되었다. 나아가 민주자유당이 1995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김영삼은 민정계를 축출, 통일민주당만의 형태로 축소되었다.

기타[편집]

  • 1990년 3당 합당 당시, 내각제 개헌 밀약 각서가 공개되었다.
  • 3당합당 후 국회의원 석 또한 모두 합쳐졌는데 그중에 유일하게 합당에 반대하여 나온 사람이 노무현 나온후, 총 8명의 작은 당을 세운다

비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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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진영에서는 "민주진영 분열과 불신을 초래시켰다"라고 비판한다. 진보진영에게는 "기회주의적 거대보수연합"이라 비판받는다. 또한 이것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겨 지역주의 정치와 보스정치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 군사정권과의 야합이라는 비판도 있다. 정당의 성립과 발전에 있어 국민적 의사를 무시한 채, 장기집권을 획책한 '정당쿠데타'라는 비판도 있다. 또한 "3당 합당으로 인하여 호남을 정치적으로 철저하게 고립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가수 정태춘은 5집 수록곡 <아, 대한민국···>의 가사 중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 인사와 함께"로 김영삼을 비판하였다.

3당 합당으로 인해 군사정권 잔재의 해결과 부마항쟁, 광주 민주화 운동 등 정리해야 할 과거사를 제대로 매듭짓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정작 사건의 책임을 추궁당해야 할 인사들이 거대 보수당의 중심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졌기에,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문제해결 노력이 미비하다는 주장이다. 여전히 부마항쟁 피해보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1]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지만원 등 보수 인사들은 정부의 발표와 무관한 북한 개입론을 주장하여 국론을 분열한다는 비판도 있다. 군사정권의 폐해도 문제가 되어, 유신헌법의 무효 선언을 요구하는 학계의 주장[2]5.16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보수언론과 인사들의 발언으로 사회적 논란이 가중되는 등, 이러한 문제들이 3당 합당으로부터 촉발되었다는 비판이다.[3][4][5]

함께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정민규 기자 (2014년 11월 6일). “저조한 부마항쟁 피해보상 신청... 시작부터 '삐끗'. 《오마이뉴스》. 2015년 3월 31일에 확인함. 
  2. 전병역 기자 (2012년 8월 31일). “유신헌법은 무엇이었나… 초헌법적 긴급조치, 삼권분립 부정, 세계사적 ‘헌정 파괴’”. 《경향신문》. 2015년 3월 31일에 확인함. 
  3. 정민규 기자 (2014년 11월 6일). “저조한 부마항쟁 피해보상 신청... 시작부터 '삐끗'. 《오마이뉴스》. 2015년 3월 31일에 확인함. 
  4. 김윤경 기자 (2014년 10월 13일). “대한민국은 왜 ‘부마민주항쟁’을 잊었나”. 《부대신문》. 2015년 3월 31일에 확인함. 
  5. “광주 청문회”. 《5.18기념재단》. 2012년 3월 22일. 2015년 3월 31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