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천 (1888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경천

김경천
본명 김현충(金顯忠), 김광서(金光瑞)로 개명
출생 1888년 6월 5일
조선의 기 조선 함경남도 북청
사망 1942년 1월 2일 (53세)
소련의 기 소련
사인 고문으로 인한 병사
거주지 조선의 기 조선,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중화민국의 기 중화민국, 소련의 기 소련
국적 조선의 기 조선,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소련의 기 소련
별칭 김경천(金擎天), 김응천(金應天)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직업 독립운동가, 군인
종교 유교(성리학) →정교회
부모 부: 김정우(金鼎禹), 모: 윤옥연(尹玉蓮)
자녀 부인1명, 자녀 2남5녀

김경천(金擎天, 1888년 6월 5일 ~ 1942년 1월 2일)은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서 해외로 망명하여 일제 강점기에 무장 독립 운동을 벌인 독립 운동가이다. 초명은 김현충(金顯忠)[1][2][3]이고, 일본 육사 졸업 후 김광서(金光瑞)로 개명하였다. 독립운동을 시작하면서 김경천(金擎天), 김응천(金應天) 등 여러 이름을 썼다. 별칭은 ‘조선의 나폴레옹’[4], 만주연해주 일대에서는 백마 탄 김장군으로 더 유명했다.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5] 본관은 시흥 김씨[6][7] 이다.

생애[편집]

함경남도 북청에서 무관 가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김현충(金顯忠)[1][2][3]이고, 일본군에 근무할 때 김광서(金光瑞)로 개명하여 호적에 올라 있다.[6] 후에 신팔균(신동천), 지청천과 함께 '하늘 천(天)'자를 넣어 지은 김경천(金擎天, 金警天 또는 金敬天), 김응천(金應天)은 별명이다.

아버지인 김정우(金鼎禹, 1857~1908)[8]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구한국 육군의 엘리트 인사였다. 김정우가 만학의 나이에 큰 아들 성은과 함께 일본에 유학하여 김정우는 동경공업학교를, 김성은은 일본육사를 졸업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고급장교가 되었다. 김경천은 군인인 아버지 및 형들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군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한성부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1908년 8월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에 입학한다.[1] 아버지와 형은 공업을 배우라고 권했지만 ‘나폴레옹’ 책을 탐독하던 그는 결국 군인의 길을 선택한다. 유년학교를 마친 후 1909년 12월 1일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2][3]

1908년 3월 17일자 황성신문에 난 김경천 장군 부친 김정우 장례식 기사[9]

일본 유학을 떠나기 앞서 1908년 3월 중 아버지 김정우가 작고하였다.[9] 유학을 떠나기 직전인 1908년 7월말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자신의 재산인 전답, 가옥, 산판(山坂)을 나열하고, 자신이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문권(文券)을 다 가지고 가니, 내외국인은 사기 당하지 말라는 광고를 두 차례 내었다. 당시 재산 목록을 보아 부친 사후 상당한 재산을 상속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10]

그가 일본 유학중인 1910년 초에 아버지의 별실(別室) 화순(和順)집이 부친 소유 동대문 등지의 채전(菜田)을 전군부대신(前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에 위탁하여 상당 금액을 받고 매각하여, 김정우의 며느리(李召史)가 윤씨에게 진정서를 내었다는 기사가 황성신문에 난 것으로 보아 부친의 유산을 두고 집안에 다툼이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11] 부친 김정우는 군부대신 윤웅렬의 부관을 지냈다고 한다.[12]

1909년 5월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를 졸업(8기)하였다. 이어 1911년 5월 27일 일본 육사 기병과를 최우등으로 졸업(제23기)하고 도쿄에서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3] 일본육사를 졸업하면 바로 소위로 임관하는 것이 통례였으나 그는 소위 임관을 처음에 거부하여 말썽이 되었다. 결국 경성부로 소환되어 조선총독 테라우치 마다사케와 면담하였다. 테라우치한테 임관 권고를 받은 김경천은 아버지와 형의 죽음으로 가정 생계도 꾸려나가야 했고, '독립전쟁을 벌이려면 육사 졸업한 것 갖고는 안 된다. 일본군 장교 생활을 하여 일본 군사기밀을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그 권고를 받아들였다.

이후 기병 장교로 근무하였는데, 수 년간 기회를 엿보다가 1919년 2·8 독립 선언을 계기로 탈출을 결심하고 귀국했다. 그해 6월 초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총재 안병찬)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간도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1919년에 3.1 만세 운동이 발발하자 김경천은 육사 삼 년 후배 이청천과 함께 만주 삼원포에 위치해 있는, 독립운동가 이회영, 이상룡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놓은 신흥무관학교에 갔다. 일본육사출신 김경천, 이청천이 그 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들어가자 3.1운동 이후 독립군이 되려던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삼원포로 갔다. 이에 크게 당황한 일제의 온갖 수단을 강구한 김경천 매장 공작과 중국인과의 외부적 문제, 한국인끼리의 내부적 문제로 인해, 신흥무관학교를 주도하던 중 그는 신흥무관학교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이후 1919년 연말 경에 김경천은 만주 삼원포를 떠나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13] 그는 이곳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으며,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의 단장 김규면(金圭冕, 1880-1969)[14]에 이어 총사령관을 맡아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15] 1921년에는 수청(水淸)의병대의 지도자가 되었고[16] 러시아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 공민(公民) 나경석(羅景錫, 1890∼1959)이 1922년 1월 동아일보에 연재한 "노령견문기(露領見聞記)" 5회와 6회에 당시 그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다.[17]

동아일보 1922년 1월 23 일자에 실린 공민(公民) 나경석(羅景錫, 1890∼1959)의 "노령견문기(露領見聞記)" 5회 중의 경천(擎天) 김장군(金將軍)[17] (노령견문기 6회분)
동아일보 1923-07-29 일자에 실린 김경천 장군 회견기 : 빙설(氷雪) 싸힌 서백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紅白戰爭)한 실지경험담(實地經驗談), 아령조선군인(俄領朝鮮軍人) 김경천(金擎天)[18]

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였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10월 고려혁명군(총재 이중집(李仲執))이 조직되었고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이후 정세 변화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노령(露領) 무장 독립 운동의 선도격이던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1923년 상해에서 상해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때 군사담당 위원으로 내정되었다. 김경천은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1923년 이후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1923년 7월 29일자 동아일보는 그를 인터뷰한 기사를 싣고 끝에 그가 지은 시 "시비리야벌!"을 소개하고 있다.[18]

1925년 6월에 부인 유정(柳貞, 1892-1971)이 딸 셋을 데리고 사라져 종로서에서 수색중이라고 시대일보가 보도하였으므로 이때 연해주로 가서 가족들이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19] 장남 수범은 이듬해 1926년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났다.

1936년 소련 당국의 한인 인텔리 피검정책과 관련하여 체포되었고, 9월 29일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체포 원인으로는 2가지 추측이 있다. 첫째, 연해주 한인 지도자는 이르쿠르츠파, 상해파 둘로 나뉘었는데 당시 상해파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되는 과정 중 상해파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았을 수 있다. 김경천은 파당을 좋아하지 않아 어느 파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둘째, 그는 소련식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이는 2012년 12월 06일자 KBS 역사스페셜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 에서도 밝혀진다.[20])

1937년 연해주 거주 전체 한인에게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이주 정책이 시작된다. 김경천은 이 당시 2년 반을 복역한다.

1939년 2월 석방되어 카자흐스탄 까라간다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독일인 농장 잡부로 일했으나 4월 5일 재차 체포되어 까라간다 정치범수용소에서 복역했다. 6월 25일 모스크바로 이송되었고 간첩죄가 적용되어 강제노동수감소 8년형을 언도 받았고, 러시아 북부철도수용소로 이송되어 매일 철도건설 공사장에 동원되었다.

1942년 1월 14일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고, 시신은 수용소 근처에 묻혔다고 하나 정확한 장소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말년 소식은 1990년대 중반 이전에는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자유신문은 망명지사 가족 탐방 기사를 연재하는데, 그의 가족은 당시 국내에 없었으므로 5번째 기사로 그가 살던 종로구 사직동을 찾아 동네 노인을 만나 그에 대한 옛 이야기를 듣고 보도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21]

사후[편집]

북한 김일성의 명의 도용 논란[편집]

일본 육사를 졸업한 장교로서 보장된 앞길을 버리고 홀연히 망명한 뒤 만주, 연해주 일대에서 '백마 탄 김장군'으로 불리며 유명했던 그는 흰 말을 타고 만주와 시베리아를 누비는 전설적인 항일 영웅으로서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특히 김경천은 여러 가명을 사용했고 일찍부터 '장군'으로 불린 인물이기에, 김일성이 그의 이러한 명성과 항일 투쟁 경력, 전설적인 이미지 등을 도용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북한 김일성이 가짜로 알려지면서 진짜 김일성 장군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다. 풍문의 내용이 구구하여 실존인물 한 사람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거나,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많은 것으로 보아[22][23][24] 일본 육사 기병과를 졸업한 김광서(金光瑞, 1888-1942) 장군이 전설의 원형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대한광복회 총사령이었던 고헌(固軒) 박상진(朴尙鎭, 1884~1921) 의사의 행적을 기록한 1946년경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에 김경천(金擎天)은 김일성(金日成)의 초명(初名)이라 하였고, 그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지은 박상진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가 나온다.[25]

p.3 : 滿洲 牧丹江省 北便 深山애 (大德山中) 朝鮮士官學校를 一九一八애 設立하야 武士를 養成식히엿난대 其 責任을 安重吉氏의계 任命하여 왓다가 後復 金擎天氏(日成氏의 初名)의계 任命하얏다 (重吉은 安重根氏의 親族)
p.14 : 子死非眞死 吾生亦謂生 家傳光字史 於此子眞生 右 金日成[25]

위의 김일성 이름으로 지은 만시(輓詩)는 박상진 의사가 1921년 순국한 직후에 박의사의 부친에게 지어보낸 것으로 보이며, 김광서 장군이 1921년에 김일성(金日成)이란 이름을 썼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1945년 12월에 간행된 김종범(金鍾範), 김동운(金東雲) 공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조선진상(朝鮮眞相)』에도 북한 김일성은 김광서(金光瑞, 金擎天) 장군의 명의를 상속중이라 한다고 했다.[26]

그의 일본육사 3년 후배인 김준원(金埈元, 1888~1969)은 1918~1922년간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シベリア出兵) 때 일본군 중위로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는데, 당시 김경천이 김일성 장군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27]

윤치영(尹致暎, 1898~1996)도 북한 김일성은 가짜이고, 진짜 김일성은 일본 육사 나온 김광서(金光瑞, 1888-1942)라고 하였다.[12] 김광서는 일본 육사 선배로 친하게 지내던 그의 형 윤치성(尹致晟, 1875~1936)을 자주 찾아왔기 때문에 윤치영도 어릴 때 그를 자주 보았다. 윤치성은 김광서가 독립운동하러 조선을 탈출할 때 재정 지원도 하였다고 한다. 김광서의 부친 김정우(金鼎禹, 1857~1908)는 육군 공병 참령(工兵 參領)으로, 윤치영의 백부인 군부대신(軍部大臣)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의 부관(副官)을 지냈다고 하므로 집안끼리도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윤치영의 증언은 믿을만한 것이다. 윤웅렬의 아들이자 윤치영의 4촌형인 윤치호(尹致昊, 1864~1945)의 영문 일기 1920년 1월 22일자에는 김광서(金光瑞) 군이 몇 달 전 북부지역으로 떠났다고 하면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28]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7(한국사료총서 번역서7) > 1920년(경신년) > 1월 > 22일 《목요일》 흐리고 추움.
YMCA에서 업무를 보았다. 저녁 8시에 에이비슨(Avison) 박사 댁을 방문했다. 에이비슨 박사와 그의 매력적인 부인은 YMCA 직원들에게 가정식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오늘 김 목사가 한 말에 따르면, 김광서(金光瑞) 군이 몇 달 전 가족 생계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북부지방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아내와 세 아이들이 몹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많은 선동가들이 몇 달 안에 조선의 독립이 실현되리라고 상상하거나 믿는 것처럼, 김광서 대위도 그렇게 상상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세계사에 상당히 무지한 사람이다.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은 "김일성 열전 (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에서 처음으로 김광서 장군이 진짜 김일성이라 주장하였고, 그의 책에는 이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증언도 나온다.[29]

복권과 서훈 및 기념 사업[편집]

  • 1936년 김경천이 3년형을 언도받은 사건은 1956년 재심되어 무죄선고가 내려졌다.
  • 1939년 체포되어 8년형을 받은 사건은 1959년 모스크바 군사재판소에서 재심하여 무죄를 선언하고 다음날 17일에 사후복권 시켰다.
  • 1993년 카자흐스탄에서는 '정치적 탄압에 의한 희생자의 명예회복' 관련 법률에 의해 그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 2003년 보훈처는 2003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김경천을 선정하였다.[31]
  • 2015년 구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후손 일부가 한국으로 특별귀화하였다.[32]
  • 2015년 외증손녀 김올가의 요청으로 우당 장학회와 서울시는 종로구 사직동 그의 옛 집터에 표지석을 세웠다.[33]
  • 2016년 전쟁 기념관은 1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로 독립운동가 김경천(金擎天)을 선정하였다.[34]

저서 및 참고 기록[편집]

  • 《경천아 일록(擎天兒 日錄)》[35][36]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김정우(金鼎禹,1857-1908)[8][9]
  • 어머니 : 윤옥연(尹玉蓮,?)
  • 배우자 : 유정화(호적명 柳貞, 1892-1971, 柳桂俊의 딸)[6]
    • 智利(1915-1982, 일본 千葉縣 千葉郡출생) : 김경천 자녀 사진[30]
      • 자녀 이브게니(1942-), 아나톨리(1949-1997), 겐나지(1946-), 딸 리지야(1944-), 류두밀라(1950-)
    • 智慧(1917-1936, 일본 千葉縣 千葉郡출생)
    • 智蘭(1919-1995, 서울 사직동 166번지 출생,러시아명은 니나)
      • 알베르트(1937-). 수범(러시아 출생, 러시아명 발로쟈)
    • 김수범(1926-1995, 블라디보스톡 출생)
    • 김지희(1928-?, 수청 다우지미 출생, 카자흐스탄 카라간다 거주)
      • 알렉산드르(1956-), 가리(1961-), 딸:나탈릴야(1951-)
    • 김기범(1932-?, 하바로브스크 출생, 러시아 노브고로드시 거주)[30]
      • 딸:알료나(1961-), 딸:갈리나(1963-)
  • 여동생 : 김옥진(金玉振, 1908~?)[6]

기타[편집]

본관 문제[편집]

경천아 일록에서 김경천은 본인의 본관을 김해 김씨라 밝히고 있다. 1916년 10월 10일에 자신의 본관을 시흥(始興) 김씨로 정정하였다.[6][37] 시흥 김씨 연원에는 김지(金智)가 평안도 대동군(大同郡) 추울미(秋蔚美)에 살면서 세계를 계승하였다.

일부에서는 김경천이 본관을 시흥으로 정정한 것이 독립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나, 한국의 독립과 김경천의 본관은 상관관계가 없고 본관의 정정은 오류가 없는 경우에는 이루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1908년 상속 재산 내역[편집]

일본 유학을 떠나기 직전인 1908년 7월말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자신의 재산인 전답, 가옥, 산판(山坂)을 나열하고, 자신이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문권(文券)을 다 가지고 가니, 내외국인은 사기 당하지 말라는 광고를 두 차례 내었다. 당시 재산 목록을 보아 부친 사후 상당한 재산을 상속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10]

>
本人이 日本에 留學오무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07월 24일/25일 광고(廣告)][10]

本人이 日本에 留學오무로 左開田답家屋山坂文券을 持徃日本하오니 或有放賣之件와도 內外國人은 切勿見欺시
永登浦九老里所在田畓山坂舍家
壹 水原大皇橋沓水春침
壹 果川梧木坪沓
壹 남大門外巡동在家屋菜田
壹 西門外菜田
壹 廣州草月面亭子洞田沓

남大門外巡동居 日本東京留在軍人故副領 金鼎禹子 顯忠 告白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07월 24일 광고(廣告)에난 김경천 장군의 재산 목록[10]

1934년 '용의 조선인 명부' 김광서 (金光瑞) 기록[편집]

일제가 1934년 작성한 용의조선인명부(容疑朝鮮人名簿)에는 김광서 (金光瑞)에 대해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38]

  • 이명 : 김경천(金敬天), 김응천(金應天)
  • 생년월일 : 1888-06-05
  • 출신지 : 경성부 사직동(京城府 社稷洞) 166 (본적)
  • 현주소 : 블라디보스톡 신한촌(新韓村)
  • 학력 : 육군사관학교 졸업
  • 경력및활동 : 일본 모(某) 연대의 기병중위였으나 1925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밀항함.
  • 인물평외모 : 공산주의에 공명하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官費留學生 황성신문(皇城新聞) 1908년 8월 6일 2면 5~6단 : 陸軍中央幼年學校에 金顯忠 / 官費留學生 한국사데이타베이스
  2. 清国韓国陸軍学生士官学校へ入校の件 (1909/11/29) 「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6084800500、明治42年乾「貳大日記11月」(防衛省防衛研究所)」: 12월 1일 사관학교 입교 청국 학생 53명 + 한국 육군학생 1명 / p.8 韓国陸軍学生 騎兵第一聯隊 金顕忠
    韓国学生金顕忠所要経費に関する件 明治43年1月28日(1910/01/28)「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6084922400、明治43年 乾 「貳大日記 3月」(防衛省防衛研究所)」
    朝鮮学生金顕忠に対する手当金増給の件 明治44年6月~明治44年7月(1911/06/01 - 1911/07/31)「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2031411100、大日記乙輯 明治44年(防衛省防衛研究所)」
  3. 陸軍士官学校・騎兵 23期卒業:朝鮮學生 金顯忠 【官報. 1911年05月31日】明治44年 p.6/18 (일본 국회 도서관)
    “初代”金日成は旧陸軍士官学校出身 卒業名簿に本名記載、伝説的抗日運動家、政権が名声利用 産経新聞 2016.10.30
    '초대 김일성' 김현충의 일본 육사 기록 발견 동아닷컴 2016-10-31 : 도쿄(東京)에 사는 육사 관계자의 자손의 집에서 발견된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学校) 본과 제8기 졸업생도 인명표(1909년)'에서 '조선학생 김현충(金顯忠) 22세'라고 명기된 기록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발견된 2년 후 육군사관학교 제23기 생도졸업인명에는 '기병(騎兵)' 명단 맨 끝에 '조선학생 김현충'이 기재돼 있다.
  4. Ⅲ러시아편-2. 노령지역 무장투쟁가 김규면
  5. 독립유공자 공훈록 김경천(金擎天) 대통령장 (1998) 국가보훈처
  6. 김광서(金光瑞) 호적 : 東アジア問題研究会編 / 編著者 代表 李命英, 「アルバム・謎の金日成 - 写真で捉えたその正体」 (成甲書房, 1978년) pp.140~141
  7. 네이버 김경천
  8. 김정우(金鼎禹, 1857~1908) : 대한제국관원이력서 1906년까지 경력이 나옴.
    日 유학생, 공금 빼돌려 미국으로 간 이유는… 프레시안 2010-10-21
  9. 파병호장(派兵護葬) 황성신문(皇城新聞) 1908-03-17 / 02면 03단 ●派兵護葬 前副領 金鼎禹氏가 因病長逝야 去十四日에 葬禮를 舉行 軍部에셔 兵丁一小隊를 泒送護葬얏다더라
  10. 本人이 日本에 留學오무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07월 24일 광고(廣告) 03면 4단
    本人이 日本에 留學오무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8년 07월 25일 광고(廣告) 03면 7단
  11. 李召史情愿 황성신문(皇城新聞) 1910-02-03 雜報 03면 03단 / ●李召史情愿 故副領金鼎禹氏의 所有菜田이 東門外等地에 在더니 金氏死後에 其別室和順집이 該田을 前軍部大臣尹雄烈氏에게 委托야 金貨四萬▣에 放賣 故로 金氏의 子婦李召史가 右金을 推尋次로 尹氏에게 情願書를 致送얏 其辭意가 令人落淚다더라.
  12. 윤치영 (尹致暎) : 나의 이력서 (55) 북괴의 김일성은 가짜...진짜 김일성은 일육사 나와 (한국일보 1981年 9月 25日字 6면) 한국언론진흥재단 BIG KINDS
    《동산회고록(東山回顧錄) : 윤치영(尹致映)의 20세기(世紀)》 (삼성출판사, 1991년 3월)
  13.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5) 國外情報 : 不逞鮮人의 行動 : 포조(浦潮) 파견원 보고 (派遣員 報告) (1920-01-23 공훈전자사료관) p.1 하얼빈(哈爾濱) 거주 김경천이 포조(浦潮, 블라디보스톡)에 왔다고 함./ 密第102号 其688 不逞鮮人之の行動 大正9年1月23日(1920/01/23)「JACAR(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Ref.C06031147600、大正8年乃至同10年共7冊其5朝鮮騒擾事件関係書類(密受第102号情報其他3内其2)陸軍省(防衛省防衛研究所)」
  14. 김규면(金圭冕. 1880. 3.12 ~ 1969. 2. 2) 건국훈장 (2002)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김규면(1880~1969) 묘소 독립운동유적지 국외, 독립기념관
    김규면(金圭冕. 1880-196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5.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3) 國外情報 : 露領의 不逞鮮人 狀況 (1921-01-19 공훈전자사료관) p.22 : 창해청년단 단장(滄海靑年團 團長) 김규면(金圭冕, 1880-1969), 참모장(參謀長) 정재관(鄭在寬), 총지휘관(總指揮官) 김경천(金敬天)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5) 國外情報 : 露領의 不逞鮮人 狀況 (1921-01-19, 공훈전자사료관) p.22
  16. 오늘날의 연해주 파르티잔스크 원래 명칭은 스찬이며 수청(水淸, 水靑), 소성(蘇城)으로도 불렸다. 빨치산스크라고도 한다.
  17. 노령견문기(露領見聞記) (五) : 8. 경천 김장군(八. 警天 金將軍) 1922.01.23 동아일보 1면
    노령견문기(露領見聞記) (六) : 8. 경천 김장군(八. 警天 金將軍) 속(續) 1922.01.24 동아일보 1면
  18. 빙설(氷雪) 싸힌 서백리아(西伯利亞)에서 홍백전쟁(紅白戰爭)한 실지경험담(實地經驗談) 아령조선군인(俄領朝鮮軍人) 김경천(金擎天) 1923.07.29. 동아일보 6면
  19. 김경천(金擎天) 부인(夫人) 거처(去處)? 종로서(鍾路署) 팔방(八方) 수색중(搜索中) 시대일보(時代日報) 1925-06-27 02면 04단
  20. KBS 역사스페셜 125회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 방송 : 2012. 12. 6. 22:20~23:10 (KBS 1TV)
  21. 망명지사들 가족방문기 (5) : 휘하에 10만의 대병, 말 없는 26년 전 舊址, 소련서 활약하는 金光瑞 장군 자유신문 1945년 10월11일
  22. 이명영(李命英, 1928-2000), "金日成列傳 (新文化社, 1974)" p.21 第一章 옛「김일성 장군」의 傳說과 正體
  23. 정관해(鄭觀海, 1873~1949),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제44집 : , 1945년 8월 17일(음력 7월 10일)자 "朝鮮爲獨立國, 國號東振共和國 年號永世, 大統領 安某, 安某 卽前日安重根之子, 內大 呂運亨, 外大 金日成云" 및 8월 26일(음력 7월 19일)자 "金日成軍, 一日能驅五百里, 其精銳無比云"
  24. 名士의 片影(其五), 金日成氏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 1면 (아래 "원문보기" 클릭)
  25. 박맹진(朴孟鎭) 편,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 p.3 金擎天氏(日成氏의 初名) ; p.14 金日成이 지은 만시(輓詩)
  26. 김종범(金鍾範), 김동운(金東雲) 공저, 『해방전후(解放前後)의 조선진상(朝鮮眞相)』, (서울, 朝鮮政經硏究社, 1945. 12. 25); 복간본 『해방전후의 조선진상』 : 제2집 독립운동과 정당 급(及) 인물 (서울, 돌베개, 1983) p.190.
  27. 김광서가 즉 김일성 장군이다. 중앙일보 1975.06.20 종합 6면
  28.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7 > 1920년(경신년) > 1월 > 22일 《목요일》 흐리고 추움. (한국사료총서 번역서7)
    尹致昊日記 八 > 1920년 > JANUARY, 1920 > 22nd. Thursday. Cloudy. Chilly. (한국사료총서 제19집)
  29. 이명영(李命英, 1928-2000)은 "김일성 열전 (金日成 列傳, 新文化社, 1974) pp.73~79 : 第一章 옛 「김일성장군」의 傳說과 正體 / 第三節 日本陸士 출신 金日成 장군
  30. 시베리아—만주 호령하던'백마탄 항일영웅' 김경천장군 56년만에'햇빛' 1998.08.13 동아일보 14면
    독립군 김경천 장군 15일 훈장 추서. 아들 김기범 귀국 MBC 1998-08-13
  31. 2003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경천 - 국가보훈처
  32. '진짜 김일성' 김경천 장군 후손 등 11명 특별귀화 연합뉴스 2015/08/05
  33. '진짜 김일성' 김경천장군 종로구 집터에 표지석 설치 연합뉴스 2015/10/04
  34. “전쟁 기념관 2016년 1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 독립운동가 김경천(金擎天)”. 2017년 3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3월 25일에 확인함. 
  35. 김경천. 《경천아 일록》. 학고방. ISBN 9788960712386. 
  36. 김경천 친필 ‘경천아 일록(擎天兒 日錄)’ 공개
  37. 김경천연구
  38. 김광서 (金光瑞, 金敬天, 金應天) : 용의조선인 명부 (1934) (國外ニ於ケル容疑朝鮮人名簿 (1934))

참고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