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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브레즈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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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
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1972년의 브레즈네프.
1972년의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서기장
임기 1964년 10월 14일 ~ 1982년 11월 10일
전임 니키타 흐루쇼프
후임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최고평의회 상임간부회 의장
임기 1960년 5월 7일 ~ 1964년 7월 15일
전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후임 아나스타스 미코얀

 소련최고평의회 상임간부회 의장
임기 1977년 6월 16일 ~ 1982년 11월 10일
전임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후임 바실리 쿠즈네초프(권한대행)

신상정보
출생일 1906년 12월 19일(1906-12-19)
출생지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카멘스코예
사망일 1982년 11월 10일(1982-11-10)(75세)
사망지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주 자레체예
소속 붉은 군대소련 육군
정당 전연방 공산당 볼셰비키 (1931년–1952년)
소련 공산당 (1952년–1982년)
배우자 빅토리아 브레즈네바
자녀 갈리나 브레즈네바
유리 브레즈네프
서명
군사 경력
복무  소련
복무기간 1941년 ~ 1982년
최종계급 소비에트 연방원수(1976년 ~ 1982년)
지휘 소련군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상훈 소비에트 연방영웅 소비에트 연방영웅 소비에트 연방영웅 소비에트 연방영웅

레닌 훈장 레닌 훈장 레닌 훈장 레닌 훈장 레닌 훈장 레닌 훈장 레닌 훈장 레닌 훈장 10월 혁명 훈장 10월 혁명 훈장 적기훈장 적기훈장 1급 조국전쟁 훈장 적성훈장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러시아어: 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문화어: 레오니드 일리이츠 브레쥬네브, 1906년 12월 19일 ~ 1982년 11월 10일)는 소련군인, 금속 노동자, 정치인이다. 그는 1964년부터 1982년까지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 1977년부터 1982년까지 소련의 국가원수였다. 그는 두 초강대국의 군사력이 거의 대등해 보였을 당시 냉전의 절정에 소련을 지도했다. 브레즈네프의 정책들은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지배력 공고화를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소련은 그가 맡은 기간 동안 분에 넘치는 과도한 일을 벌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제국"을 위하여 유리한 조건을 설계하는 데 데탕트를 이용했던 동안 그의 승계자들은 공산주의 붕괴에 따른 자유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서방의 지지와 협력을 확실히 얻기 위해 데탕트가 필요했다. 브레즈네프의 군사력 증강은 경제 개발과 성장에 비중 축소로 이끌었다. 군사의 증가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개발도상국들의 다른 부분들로 소련의 확장으로서 공산국가는 브레즈네프 사망의 10년 안에 내부 붕괴의 불씨를 지폈다. 아프가니스탄, 남부 아프리카와 중앙아메리카로 브레즈네프의 도달은 소련의 과도한 확장을 초래할 것이며 이것은 1991년 공산국가의 공산주의 국가가 붕괴하는 토대가 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아마도 냉전의 오랜 상징 중 하나일 것이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서구의 지도자들이 끊임없이 바뀌었으나 브레즈네프는 20년간 지배하였다.

성장 과정과 권력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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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빅토리아와 함께 (1927년)

브레즈네프는 1906년 12월 19일, 러시아 제국 카멘스코예(Каменское, 지금의 우크라이나 카미얀스케)에서 금속 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 일리야 야코블레비치 브레즈네프(Илья Яковлевич Брежнев)와 어머니 나탈리야 데니소브나 마잘로바(Наталья Денисовна Мазалова) 사이에서 태어났다. 결과로서 그는 자신의 전체 일생에 특유의 우크라이나식 발음과 몸짓을 그대로 유지했으며 1952년까지 자신의 민족을 우크라이나인으로 기재했다 (후에 분명히 자신을 러시아인으로 숙고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후의 세월에 많은 근로자 청년들처럼 그는 기술 교육을 맏았으며 처음에 처음에는 토지 관리 분야에서, 그 후에는 야금 분야에서였다. 그는 니프로제르진스크 야금 교육원을 졸업하여 동부 우크라이나에서 제철소 기사가 되었다. 1923년에는 공산당 청년 조직인 콤소몰에 참가하였고, 1930년 카멘스코예로 돌아와 이듬해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5년부터 1936년까지 브레즈네프는 병역 의무를 위하여 징병되었고 탱크 학교에서 과정을 택한 후 그는 탱크 회사에서 정치 장교로 지냈다. 1936년 후반에 드니프로제르진스크 야금 교육원의 교장이 되었다. 그는 193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간부, 몰도바 당 위원회 제1서기, 1939년에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현재의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주 당위원회 서기에 올라중요한 방위 산업을 조직하였다.

브레즈네프는 혁명 전에 러시아에 관한 성인 추억들이 없었고,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망에 이어 공산당에서 리더십 분투에 참여하는 데 너무 젊었던 소련의 공산주의자들의 첫 세대에 속했다. 브레즈네프가 입당한 즈음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지도자였고 브레즈네프와 그와 같은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의심없는 스탈린주의자들로 자라왔다. 1937년-1939년 스탈린의 대숙청을 살아난 자들은 재빠른 진급들을 얻을 수 있었다. 대숙청은 당과 국가의 중·고위급 직급에 많은 공석이 생겼다.

그는 러시아 혁명 전에 성인이 아니었던 소련 공산당원의 첫 세대였고,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의 공산당 주도권 싸움에는 너무 젊었기 때문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 브레즈네프가 공산당에 입당했을 때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절대적인 지도자였으며,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많은 젊은 공산당원이 순수한 스탈린주의자로서 성장하였다. 스탈린의 대숙청을 면한 사람들은 당 및 주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1940년 6월 나치 독일소련을 침공하고 많은 중위급 당의 간부들처럼 브레즈네프는 즉시 징병되었다. 그는 8월 26일 도시가 독일군에게 함락되기 전에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의 산업들을 소련의 동부로 철수시킨느 데 일했고 그러고나서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10월 브레즈네프는 여단 인민 위원으로 승진과 함께 남부 방면 군정치지도부 차장이 되었다.

대조국전쟁 당시 정치 위원이었던 브레즈네프

1942년 우크라이나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브레즈네프는 캅카스 전선의 정치 지도부 차장으로서 캅카스에 파견되었다. 1943년 4월 그는 제18군의 정치 부장이 되었으며 그해 후순에 붉은 군대가 주도권을 회복하고 우크라이나를 통하여 서부로 진격하면서 제18군은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일부가 되었다. 당시 전선군의 상급 정치 위원은 후에 브레즈네프의 중요 후원자가 되는 니키타 흐루쇼프였다. 유럽에서 전쟁의 말기에 브레즈네프는 독일의 항복 후 프라하로 들어간 제4우크라이나 방면 군정치지도부 부장이었다.

1946년 8월 브레즈네프는 소장 계급과 함께 붉은 군대를 떠났다. 그는 군사령관으로서보다 정치 위원으로서 전체의 전쟁을 보냈다. 우크라이나에서 재건 프로젝트에 일한 후, 그는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에서 다시 제1서기가 되었다. 1950년 그는 소련의 최고 입법 기관 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그해 후순에 그는 루마니아에 의하여 병합되고 소련으로 편입된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당의 제1서기로 임명되었다. 1952년 그는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상무위원회의 후보 위원으로서 소개되었다.

브레즈네프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나 몰도바, 그리고 카자흐스탄 등에서의 인맥을 후의 권력 강화에 많이 이용하였는데, 그들 중에선 콘스탄틴 체르넨코, 딘무하메트 코나예프, 니콜라이 티호노프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브레즈네프와 흐루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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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의 브레즈네프

1931년 브레즈네프는 당에 가입한 지 짧은 후에 흐루쇼프를 만났다. 오래지 않아 그는 자신이 계급들을 통하여 자신의 승진을 지속하면서 흐루쇼프의 보호자가 되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하고 상무위원회를 따른 재결성에서 폐지되어 더욱 작은 정치국이 재편되었다. 브레즈네프가 정치국의 일원이 되지 않았어도 그는 중장 계급과 함께 육해군의 소련정치총국장 제1대리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당의 총서기로서 스탈린을 계승한 후원자 흐루쇼프의 새로운 권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1955년 그는 또한 중요한 직위인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당제1서기가 되었다.

1956년 2월 모스크바로 귀환된 브레즈네프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 회원 후보 겸 방위 산업, 우주 프로그램, 중공업 및 수도 건설 지휘의 임무를 맡았다. 이제 그는 흐루쇼프 측근의 고위 인사로 1957년 6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선도한 반당집단 게오르기 말렌코프라자리 카가노비치와 함께 흐루쇼프와으 디아 지도권 싸움에 있어서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반당집단의 패배에 이어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의 정식 일원이 되었다.

1959년 브레즈네프는 소비에트 연방 최고 회의 부의장이 되었고 1960년 5월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의 직위로 승진되어 그를 명목상의 국가 원수로 만들었다. 실제 권력이 당의 제1서기 흐루쇼프에게 있었어도 의장의 지위는 브레즈네프가 해외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그는 서방 국가의 비싼 의복과 자동차들에 대한 흥미를 개발하기 시작하고 이런 취향은 뒤에 유명해졌다.

대략 1962년까지 당의 지도자로서 흐루쇼프의 직위는 안전했다. 하지만 지도자가 나이가 들면서 그는 점점 더 변덕스러워졌고, 그의 성과는 동료 리더들의 신뢰를 떨어뜨렸다. 소련의 쌓여가는 경제 문제들도 또한 흐루쇼프의 리더십에 압력을 증가시켰다. 표면상 브레즈네프는 두드러지게 흐루쇼프에 충성적으로 남아있었으나 1963년 그는 음모에 연루되어 권력으로부터 지도자를 물러나게 하는 데 아나스타스 미코얀에 의하여 선동되었다. 그해 브레즈테프는 중앙위원회의 제1서기로서 흐루쇼프의 제자 프롤 코즐로프를 승계하여 자신을 흐루쇼프의 유력한 승계자로 만들었다. 1964년 10월 14일 흐루쇼프가 휴가를 즐기고 있던 동안 음모자들이 그를 기습하여 직위에서 축출했다. 브레즈네프는 당의 제1서기가 되고, 알렉세이 코시긴이 총리, 그리고 미코얀은 국가 원수가 되었다 (1965년 미코얀은 퇴직하고 니콜라이 포드고르니에 의하여 승계되었다).

공산당의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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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장 자격으로 1968년 콤소몰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연설을 마친 후의 브레즈네프. 그 무렵 그는 이름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그 직책을 최고의 권위로 재정립했다.

흐루쇼프의 세월 동안 브레즈네프는 스탈린의 자의적 규칙에 관한 지도자의 비난, 스탈린의 숙청의 많은 피해자들의 재활과 소련의 지식·문화 정책의 신중한 자유화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지도자가 되자마자 브레즈네프는 이 과정을 되돌리기 시작하고 점점 더 보수적이고 역행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1965년 5월 독일 패전의 20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브레즈네프는 처음으로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언급하였다. 1966년 4월 그는 스탈린의 칭로로 지내왔던 공산당 제1서기의 칭로를 차지하였다. 그해 스탈린의 세월 이래 첫 같은 재판으로 알려졌던 작가들 유리 다니엘안드레이 시냐프스키의 재판은 억압적인 문화 정책으로 되돌아갔음을 보여주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숙청들로 비록 돌아오지 못했음에 불구하고 유리 안드로포프 아래 KGB가 스탈린 아래 즐겨졌던 거의의 권력을 다시 얻었다.

1968년에 일어난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1968년 브레즈네프 정권의 첫 위기는 공산주의 시스템을 자유화하는 데 알렉산데르 둡체크 아래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봄으로 알려짐)에서 공산당 리더십에 의한 노력과 함께 왔다. 7월 브레즈네프는 공개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리더십을 "수정주의자"이자 "반소련 체제"로 비판했으며 7월 그는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둡체크의 리더십 축출을 지휘하였다. 침공은 소련에서 반체제 인사들의 대중 시위로 선도하였다.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이사회주의 수호"를 위해 위성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할 권리와 책임이 있었던 브레즈네프의 역설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56년 흐루쇼프가 헝가리에서 비슷한 조치를 내렸어도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수정주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개입을 상기 정책으로 격상시켰으며, 이 정책은 1988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이르러서야 폐기되었다.

1960년대에 일어난 중소 분쟁에 이어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1965년 저우언라이 총리가 논의를 위하여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1969년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군대는 우수리강에 자신들의 국경을 따라 연속으로 충돌했다.

브레즈네프는 또한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을 위하여 소련의 지지를 지속하였다. 1969년 1월 22일 브레즈네프는 소련의 장교 빅토르 일린이 자신을 암살하려고 시도했을 때 자신의 일생에 공격을 경험하였다.

데탕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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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에서 리처드 닉슨과 회담하는 브레즈네프 (1973년 7월 19일)

1971년에 시작된 중미 관계의 해동이 국제 관계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반소련 체제의 중미 동맹의 형성을 방지하는 데 브레즈네프는 미국과 협상들의 라운드를 시작하였다. 1972년 5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양국 지도자는 전략 무기 제한 협상 (SALT I)을 맺어 "데탕트" 시대의 시작에 특정을 지었다. 1973년 1월 파리 평화 협정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연루를 공식적으로 끝내 미소 관계로 주요 장애물을 없앴다. 그해 5월 브레즈네프는 서독을, 그리고 6월에 미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1974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럴드 포드와 함께

브레즈네프의 "데탕트" 시대의 전성기는 동유럽중유럽에서 전후의 전선들을 인정했던 1975년 헬싱키 협정의 체결이었고 사실상 해당 지역에 대한 소련의 패권을 정당화했다. 그 대가로 소련은 "참가국들이 인종, 성별, 언어 또는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 사상, 양심, 종교 또는 신앙의 자유를 포함한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존중할 것이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서약은 결코 이행되지 않았고 긴장 완화에 대한 낙관적인 수사는 소련이나 그 위성 국가들의 내부 자유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소련의 유대인들을 위하여 이주하는 데 권리의 문제는 미국과 소련의 관계에서 점점 더 거슬리는 존재가 되었다. 1974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브레즈네프와 제럴드 포드 대통령 사이의 정상 회담은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1970년대에 소련은 미국과 관계에서 정치적, 전략적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제1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은 효과적으로 2개의 강대국 사이에 핵무기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헬싱키 협정은 동유럽에 소련의 패권을 정당화했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의 명성을 약하게 했다.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해군 대장 아래 소련은 처음으로 세계 해군력이 되기도 했다. 소련은 중동아프리카에서 그 외교적 그리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시켰으며 그 대리권 쿠바를 통하여 1975년 앙골라 내전과 1977년-78년 오가덴 전쟁에서 성공적으로 군사적 개입을 했다.

1970년대에 브레즈네프는 자신의 국내적 입지를 다졌다. 1977년 6월 그는 포드고르니의 퇴직을 강요하여 다시 한번 소련 최고회의 상임위원회 주석이 되어 이 직책을 집행 사장과 동등한 권한을 갖도록 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코시긴이 1980년 자신의 사망 전까지 총리로서 남아있었어도 브레즈네프는 1977년 이후부터 리더십에서 명확한 우위를 점했다. 1976년 5월 그는 스탈린 시대 이래 첫 "정치 원수"로 자신을 소련의 원수로 만들었다. 브레즈네프가 전혀 군사 지휘권을 맡아본 적이 없던 이래 이 단계는 직업 군인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그들의 권력과 브레즈네프 정권 아래 명성은 그들의 지속된 지지를 확실히 했다. 그것은 또한 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이 무렵이었다.

정권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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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으로 소련의 권력과 국내적으로 브레즈네프의 권력은 둘다 하지만 정체되기 시작한 소련 경제에 기초하고 있어 1970년 경에 느려졌다. 이것을 위하여 2개의 근본적인 원인들이 있었으며 처음에 스탈린의 산업화에 불구하고 소련의 경제는 아직도 농업에 굉장히 의지하고 있었다.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는 효과적으로 국가의 자영농민층을 파괴했으며 농산물 생산은 대량의 국가 투자에 불구하고 낮게 남아있었다. 소련의 농업은 도시 인구에 먹여살리기가 더욱 어려워져 정권이 "성숙한 사회주의"의 결실이자 산업 생산성이 의존하는 기반으로서 약속했던 생활 수준 향상을 제공하기는 커녕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추가적으로 소련의 산업 생산과 소비재 생산은 침체에 빠져 밀려드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러한 요인들은 1970년대의 후반을 통하여 결합되어 서로를 강화했다. 높은 시장 가격으로 식량 곡물을 수입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악화된 우주 프로그램과 같은군대와 과시성 프로젝트에 대한 막대한 지출이 산업 현대화나 생활 수준 향상을 위한 투자 범위를 축소했다. 공공 주택과 주정부의 보건 및 교육 체계가 침체되면서, 도시 인구의 사기와 생산성이 저하되었다. 그 반응은 제한된 소비재와 서비스를 위한 시장을 제공하기 위한 거대한 '비공식 경제'였다. 소련의 기준에서도 더욱 확대한 규모의 부패를 조장했다. 브레즈네프는 외국의 자동차와 의류에서 자신의 남다른 취향과 함께 이것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것은 그의 지배 아래 소련의 어떤이들에 의하여 그가 싫어졌던 이유들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에서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정에 조인하는 카터와 브레즈네프 (1979년 6월 18일)

브레즈네프의 지배의 마지막 세월은 점고하는 개인숭배로 특징지어져 1976년 12월 그의 70세 생일에서 절정에 도달하였다. 그는 훈장들과 함께 자신의 사랑으로 잘 알려졌으며 최종 집계가 114개나 된다. 1976년 자신의 생일을 위하여 소비에트 연방영웅 (소련의 최고 영에로 레닌 훈장과 함께 나오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자신의 일생을 희생했던 영웅들에게 두드러지게 주어짐)이 수여되었다. 브레즈네프는 3개 더 상을 받아 다시 한번 자신의 생일들의 축제에서였다. 그는 또한 1978년 최고 소련 군사 상으로 알려진 승리 훈장을 받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말 후에 훈장을 받은 단 하나의 서훈자가 되었다. 그의 승리 훈장은 1989년에 취소되었다.

스탈린의 사교와 달리 하지만 브레즈네프의 사교는 허울만 좋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을 대중적으로 받았으며 숙청이 없을 때 존경심도 경외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하여 냉담함과 무관심 속에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1979년 6월 지미 카터와 체결한 제2차 전략 무기 제한 협상 같은 국제회담에 자주 전념한 이래와 중요한 국내 문제들을 감시했던 당시 브레즈네프가 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것들은 그의 부하들에게 남겨졌는데, 그들 중 일부는 그의 농무부 장관 미하일 고르바초프 같은이들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브레즈네프를 상대로 리더십에서 음모가 없었고 그는 자신의 건강이 쇠퇴하면서 권력 내에서 점차 나약해지고 고립되도록 방치되었다. 그의 쇠퇴하는 건강은 소련의 신문들에서 언급된 경우가 거의 없으나 그것은 악화되는 정치 및 경제 상황으로 인해 사실상 명백했다.

1979년 12월 브레즈네프는 권력을 잡는 데 미국 후원의 무자헤딘과 다른 외력들과 독재 공산주의 정권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아프가니스탄을 중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정치국이 아닌 브레즈네프의 측근들이 비공식 회의에서 내린 것이었다. 그것은 미국에 의하여 곡물 수출 금지 조치가 시행되면서 데탕트 시대의 갑작스런 종말로 선도하였다.

1980년 즈음에 브레즈네프는 실권은 없었으나 국가의 원수로 남아있었다. 1982년 3월 그는 뇌졸중을 겪었으며 그해 11월 10일 심근 경색으로 사망하여 크렘린 대규모 묘지에 안장되었다. 브레즈네프는 빅토리아 데니소바에게 결혼하여 2명의 자녀를 두고 모스크바의 쿠투조프스키 유망지의 26번지에 살았다.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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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렘린 대규모 묘지에 있는 브레즈네프의 무덤

브레즈네프는 스탈리늘 제외한 아무 남자보다 소련을 더욱 오래 통치했으나 그가 남긴 유산은 유리하지 않다. 이것은 러시아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모두 사실이다. 그는 근본적인 경제 문제들이 무시되고 소련의 정치 체제가 쇠퇴하도록 방치된 "브레즈네프 침체"로 불린 침체의 긴 암흑기를 초래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자신의 경력의 주요 결정들 중의 하나였던 아프가니스탄 중재도 또한 소련의 국제적 위상과 내부 역량 모두를 크게 약화시켰다. 그의 개인적 허영심도 또한 거의 비판을 받았고 그것은 수많은 러시아 유머의 소재가 되었다. 브레즈네프의 방어에서 그의 통치 아래 소련은 전무후무한 수준의 권력과 명성, 그리고 내부적 안정을 누렸다고 말할 수 있으며 자신의 전임자 흐루쇼프와 달리 그는 외교 무대에서 노련한 협상가였던 것이었다. 소련 경제의 결함과 문제점들은 어쩌면 그가 스탈린에게서 물려받은 체제 자체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시스템을 개혁하려는 과제는 결국 그의 후임자 고르바초프에게 맡겨질 것이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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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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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소비에트 연방 최고평의회 상임간부회 의장
1960년 ~ 1964년
후임
아나스타스 미코얀
전임
니키타 흐루쇼프
소비에트 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64년 ~ 1982년
후임
유리 안드로포프
전임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소비에트 연방 최고평의회 상임간부회 의장
1977년 ~ 1982년
후임
바실리 쿠즈네초프 (권한대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