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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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 (李觀述)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사 시절 이관술
출생 1900년 4월 26일(1900-04-26)
대한제국 대한제국 강원도 울도군 울릉도
(현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도)
사망 1950년 7월 3일 (50세)
골령골
국적 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직업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교육자

이관술(李觀述, 1900년 4월 26일 - 1950년 7월 3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사상가, 노동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사회주의 계열 단체에서 활동한 노동운동가이며, 해방 직후에는 조선공산당남조선로동당의 간부였다. 박헌영의 최측근이기도 했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1900년(호적상 1902년) 울릉도 출신이고, 울산에서 성장 후, 일본에 유학하여,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29년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고, 이 학교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하는 것으로 사회 운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동덕여고보에는 이관술의 여동생이자 후에 유명한 여성 공산주의 운동가가 되는 이순금이 재학 중이었다. 이관술은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들을 묶어 조일반제공동투쟁동맹이라는 조직을 건설했다가 체포되어 복역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동안 거물급 노동운동가로서 경성부를 거점으로 활동했다. 1935년엠엘파이재유와 함께 《적기》를 출간하는 등 반제동맹을 재건하려 했으나, 곧 이재유가 검거되었다. 이에 신분을 위장하고 지방을 전전하면서 은거하기도 하였으며, 1937년에는 상경하여 영등포에서 노동 운동을 벌였다.

1939년에 그때까지 체포되지 않고 전향하지도 않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이 김삼룡, 장순명, 권오직, 이현상, 김단야, 이순금 등으로 구성된 경성콤그룹을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해방 이후[편집]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박헌영의 재건파에 합류해 남로당의 전신인 조선공산당 재정부장을 맡고 있던 중,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되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복역하고 있던 골령골(현.대전시 낭월동)에서 즉결처형되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대법원은 2015년 3월 31일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며 "국가는 유족에게 1억 6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1]

같이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