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
이관술 李觀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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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앨범 속 이관술 | |
출생 | 1902년 4월 25일![]() (現 대한민국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 |
사망 | 1950년 7월 3일![]() (現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 (48세)
성별 | 남성 ![]() |
국적 | ![]() |
학력 | 입신학교(폐교) 울산간이농업학교 졸업 중동고등보통학교(現 중동고등학교) 졸업 동경고등사범학교(現 쓰쿠바대학) 지리교육과 학사 |
직업 |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교육자, 정치인 |
경력 |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現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사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준비위원회 지도부 경성재건그룹(경성트로이카 2기) 지도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경성트로이카 3기) 지도부 경성콤그룹 지도자 조선공산당 중앙검열위원 조선인민공화국[1] 선전부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
이관술(李觀述, 1902년 4월 25일 - 1950년 7월 3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노동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자 고문 조작 사건의 피해자, 학살 피해자이다. 그는 반제동맹을 지도하며 독립운동가를 양성하였고, 이재유와 함께 항일 노동운동을 지도했으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최후 집결체 경성콤그룹의 창건자이자 지도자였다.
민족주의자 교사였는데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제자들이 일제에 연행되고 폭행당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을 따라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이후 반제동맹, 이재유 그룹, 경성콤그룹에서 광복 순간까지 휴식기 없이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그는 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대중투쟁과 무장투쟁, 혁명을 수행할 비밀결사 조직에 주력했다. 일제의 폭압이 가장 극심했던 1930 -1940년대 끝까지 저항한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이다.
광복 후 ‘선구’에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여운형·이승만·김구·박헌영에 이어 5위의 인기를 누리던 대중적 정치인이었다. 박헌영파와 반박헌영파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던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였으며,[2] 조선인민공화국[3] 선전부장,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조작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대전형무소에 투옥되었고 대한민국 국군에 의한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다.[4] 2015년 대한민국 사법부는 이관술에 대한 대한민국 국군의 학살이 불법임을 인정하며 유족에게 국가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민족주의자로서 민족계몽운동에 종사한 기간까지 합치면 20년,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종사한 기간만 본다면 15년간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나 광복 후 정치인으로서 활동한 기간은 8개월에 불과하다. 광복 후에도 반곡초등학교 건물을 신축할 때 1791.74㎡의 땅을 기부하는 등 사회에 기여했다. 이관술은 월북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죽었으며,[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았으며, 대한민국 정부를 부정하거나 국가보안법을 어긴 사실도 없음에도 미서훈 독립운동가로 남아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6] 호(號)는 학암(鶴巖)이다. 평전 작가 안재성은 이관술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한때는 민족의 자존심이었고
한때는 지도자였으며
지금은 잊혀진 식민지 조선의 혁명가— 안재성 작가가 쓴 《이관술 1902-1950》 표지 문구
유년기·청소년기[편집]
이관술의 고향은 대한제국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 평천동(現 대한민국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이다. 아버지 이종락(李宗洛)은 울산군 범서면 입암리의 유서 깊은 양반 가문의 장자였다. 집안 어른인 이우락은 한주학파 유학자로 김창숙, 손후익과 동도이다. 이관술은 가족이 잠시 울산을 떠나 울릉도에 거주할 때인 1902년 태어나 1905년쯤 울산으로 돌아와 성장했다. 따라서 이관술은 기본적으로 경상도 사투리로 말했다.[7] 1909년 어머니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지만 아버지와 조부모, 삼촌과 고모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관술은 일찍부터 천재라고 불렸다.
이성락에 의해 남겨진 이야기에 따르면, 불과 여섯 살 난 아이임에도 이관술은 다른 학생들과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한문을 깨우쳤다고 한다. 남들이 하루 종일 배우는 한문을 반나절이면 깨우치고 오후에는 달아나 동네 아이들과 들녘에 나가 놀았다. 다음날 배울 것은 해거름에 학당으로 돌아와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낭독 소리를 귀동냥해서 모두 익혀 버렸다. 장난이 심하고 놀기를 좋아하면서도 한번 배운 것은 잊어버리지 않고 먼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문장의 뜻을 해석해내는 그는 일찍부터 신동으로 불렸다.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성격은 친척과 친구들에 따르면 자신감이 넘치고 장난을 좋아했다고 한다. 친척은 이관술이 잔머리를 잘 굴린다고 "꾀돌이"라고 표현했는데,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기지가 넘쳤다.[8] 제자들과 하급당원에 따르면 차분하고 침착하며 유순했다고 한다. 공통된 증언은 끊임없이 농담을 하는 재미있는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에 따르면 농담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 때에도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고 한다. 또 언제나 여유롭고 태연했으며 두려움을 몰랐다. 따라서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 일제에 검거되어 고문을 당하는 도중에도 웃거나, 지명수배자 신분이면서 변장하고 경찰서 바로 앞에서 경찰의 동태를 살피거나, 고문당하고 갇혀있는 신세면서도 '오히려 검사를 동정한다'는 말을 하거나, 무기징역형이 선고되어 다른 피고인들이 통곡할 때도 혼자 태연하거나,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인다.[9]
몇 장 없는 이관술의 어렸을 적 사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자신감 넘치는, 두려움을 모르는 듯한 눈빛이다. 공부를 잘했다는 것 외에 친인척들의 기억 속에 남은 이관술은 두려움을 모르는 소년이었다. (중략) 어느 해 여름 밤만 되면 선바위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 마을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사건이 생겼다. 이관술은 그러나 겁을 먹지 않고 귀신을 잡겠다며 혼자서 몽둥이를 챙겨들고 원두막으로 나갔다. (중략) 겁 없이 달려든 것이 어린아이임을 알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동네 사람들은 그를 귀신 잡는 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소년 이관술은 선바위에 얽힌 또 다른 전설이 된 것이다. 이관술의 담이 크다는 것을 안 마을사람들은 어린 그에게 새로운 일을 맡겼다. 선바위 동굴에 사는 귀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일이었다. (중략) 낮에도 건너기 두려운 물길을 깜깜한 밤중에 건너가 어두운 동굴에서 돼지머리를 꺼내오는 그의 담력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다른 특징으로는 독서를 매우 좋아해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호기심이 많았다.[10] 글씨체가 예뻐서 각종 출판물의 글씨를 직접 썼다.[11] 꼼꼼하고 성실해서 노트정리를 할 수 있던 학생, 교사, 정치인 시절에는 노트정리를 열심히 해서 지리 수업준비 노트, 영어공부 노트 등을 남겼다. 그리고 태연하게 연기를 잘해서 이후 일제를 여러 번 속인다.
“ | 아주 재미있는 분입니다. 나갔다 오면 꼭 자기가 먼저 나한테 밥 묵었나 인사하고. 농담 잘하지요. 인정도 많아요. 내가 본래 공부를 하려고 서울에 갔었기 때문에 잔심부름만 하면서 세월을 보내는 게 싫어서 이듬해 봄에 돈을 벌라꼬 서대문에서 사진관 일을 하니까네 그 바쁜 사람이 찾아와 가꼬 이리 살면 안 된다고, 공부를 다시 하라 카데요. 공부를 해서 교사가 됐지요. 그 분 덕에 내가 교사가 됐다 아입니까? 그 분도 책읽기를 참 좋아했어요. 나하고 있을 때는 영어공부도 많이 했지요. | ” |
— 이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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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이전까지는 이관술이 근대교육 대신 마을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깨우쳤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울산교육청이 2019년 울산교육 독립운동 TF팀을 꾸려 연구조사를 하다 이관술이 입신학교에 다녔다는 사료를 발견했다. 입신학교는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1년, 사립학교규칙이 제정되면서 전국 2000여 개 사립학교가 잇달아 폐교할 때 폐교했다. 일제 당국이 사립학교가 공립학교를 대신해 민족계몽에 힘쓰는 근대교육을 펼치자 통제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입신학교가 폐교하자 이관술은 울산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해 1917년 졸업했다. 하지만 상급학교인 고등보통학교 입학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집안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아버지 이종락의 반대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종락은 진학보다 결혼을 서둘렀다. 그래서 1921년 경주 외동에서 태어난 박가야와 부부의 연을 맺고 난 뒤에 당시 경성부 종로 수성동에 있었던 중동고등보통학교(현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12]
중동고등보통학교에서 이관술은 독보적인 전교 1등이었다. 그런데 이관술의 아버지가 대학교 진학을 반대했다. 이관술은 "일본에서 제일 진학이 어려운 학교가 어디냐? 내가 그 학교에 입학하면 우리 아버지도 진학을 막지는 못하실 거다"라고 자주 친구들 앞에서 말했다고 한다. 동경제국대학(현 도쿄대학)이 최대 명문이었으나 이 당시 그보다 더 들어가기 어려운 곳으로 알려진 곳이 동경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대학)였다. 졸업만 하면 평생 교사직이 보장되어 일본과 조선은 물론 중국에서까지 수재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이관술은 몰래 일본으로 가 시험을 본다. 이관술의 아버지는 이관술의 동경고등사범학교 합격 소식을 중동고에서 보내온 전보를 통해서 처음 접했다. 이관술은 1925년 3월 중동고를 수석 졸업하였다.[13]
청년기의 민족계몽 활동[편집]
이관술은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사회주의를 접한 적도 있으나 1929년 전까지는 사회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민족주의자였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유학 시절 방학 때마다 조선으로 돌아와 교육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민족계몽 활동을 했다.[14]
나는 본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고등사범에 들어간 것도 청년교육을 통하여 민족을 각성시켜보자는 이상에서 들어갔고 또 이민족과 접촉해가는 동안에 얻은 정신적 영향도 역시 민족주의 강화였다. 말하자면 일종의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 때 나의 생각은 우리 민족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경중대소를 막론하고 그 일에 열성을 바치자는 일념뿐이었다. 내가 맑스주의에 접근해간 것도 약소민족 청년의 독자적인 경지에서 그리한 것이요, 그것을 연구하여 우리 민족 현실에 알맞은 길을 발견하자는 것이 진정한 목적이었다.
—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당시 북경에 머물던 심산 김창숙이 만주에서 무장독립군을 양성하는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다. 김창숙은 이후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이 된다. 그런데 김창숙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이 발생해 손후익이 수십 리 밖까지 마중 나가 입암으로 업어서 데려왔다. 손후익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딸이 독립운동가들의 비밀편지를 전달한 숨겨진 독립운동가이자 나중에 김창숙의 며느리가 되는 손응교였다.[15]
김창숙이 돌아간 직후 일제 경찰의 검거가 시작됐다. 일경은 특별조사반을 구성해 수사했고 전국에서 약 50명을 체포했는데 입암마을에서 손진인, 손후익, 이우락, 이재락이 체포됐다. 2차 ‘유림단 사건’의 시작이다.[16]
유림단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이관술이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와 보니 마을 전체가 유림단 검거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김창숙과 연관돼 손응교의 집에서 두 명이나 체포되자 마을 사람들 인심이 흉흉해졌다. 그런데 이관술이 적극 변호하고 나섰다.[17]
손응교가 자필로 쓴 회고록을 보면 “우리 집을 무슨 범죄의 온상처럼 보는 사람이 얄밉기만 했는데 이관술 씨가 우리 집은 훌륭한 가문이고 우국지사의 집이라고 칭찬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적고 있다. 이관술은 움츠려 있는 손응교 형제들을 위로했고, 범서보통학교 입학까지 소개해줬다. 손응교는 그 전까지 일본식 교육을 받으면 안 된다는 집안 어른들 입장 때문에 처음 학교에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색다른 경험은 조부 손진인이 출소하면서 다시 끝나게 된다.[18]
이관술이 이듬해 방학 때 돌아오자 손응교는 마을 아이들과 함께 배움을 청했다. 손응교의 회고록에서 이관술을 통해 “신학문도 배우고 독립사상도 지도해주기에 무척 따랐고 잡지 개벽, 시집, 소설 등을 탐독하며 이상과 꿈을 키워 왔다”고 기억했다.[19] 이후로도 김창숙, 손응교와의 인연은 계속된다.
이관술은 1929년 3월 동경고등사범학교 지리역사과를 졸업하였다.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편집]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29년 서울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관술은 조선어 교사였던 이윤재와 특히 친했다. 이후 조선어 교사는 신명균으로 바뀐다. 이관술은 역사와 지리 과목을 맡았다. 체벌을 비롯한 군국주의 교육 방식에 익숙한 다른 일제강점기 교사들과는 달리 어떤 상황에도 체벌하지 않는 진보적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던 이관술은 동덕여고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최고의 인기교사가 되었다.[20]
이관술은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수업준비도 열심히 했다. 이관술 생가 다락에서 손바닥만한 수첩이 발견되었는데 경동지괴니 리아스식 해안이니 하는 지리 용어와 그림으로 된 해설이 정성스레 적혀 있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장난기 어린 농담을 끊임없이 했다. 동덕여고보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학생들이 이관술의 수업시간인 지리와 역사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21]
동덕여고보 출신 독립운동가 이효정(2006년 건국포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효정은 이육사의 친척이기도 하다.
“ | 이관술 선생은 재미있는 분이어서 귤을 껍질도 까지 않고 베어 먹었어요. 우리가 왜 그렇게 드시냐고 물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원래 이렇게 먹는 거라고 하셨어요. 우리들은 깔깔 웃으면서 놀렸죠. 선생님은 겉만 프롤레타리아트고 속은 부르주아라고요.
그땐 왜 그렇게 웃음이 많았는지 몰라요. 잘생긴 남학생만 지나 가도 까르르 웃고, 낙엽만 떨어져도 까르르 웃어댔어요. 어느 날은 이관술 선생님이 양복 바지 뒤에 고춧가루 하나가 묻은 것도 모르고 수업을 하시는 거예요. 우리들이 까르르 거리자 선생님은 무슨 일인지 몰라 거울을 쳐다보고 어리둥절해 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더 난리가 나서 웃어댔지요. 선생님은 그제야 고춧가루 묻은 것을 발견하시고는 점심시간에 먹으려고 붙여 왔다고 하시잖아요? 우리는 숨이 넘어가게 웃어댔지요. 매일 매일 배가 아파서 웃지도 못할 만큼 웃어댔어요. |
” |
— 이효정[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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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였으나 제자들이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연행되고 폭행당하는 상황에서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학생들의 운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자 실망해서 박진홍, 이효정 등 제자들을 따라 사회주의자가 된다.
동덕여고보가 참여한 경성 여학생 운동을 지도한 근우회는 사회주의 계열이 속속 연행돼 구속됐고, 민족주의 계열은 이들의 항일투쟁을 과격하다고 비판했다. 민족계몽을 명분으로 학교를 운영해왔던 인사들은 만세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휴교를 하거나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동덕도 학생 만세운동이 진행될 때 동맹휴업이 계속될 것을 우려해 겨울방학을 앞당겨 실시하면서 휴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월 중순으로 예정된 개학 시기를 늦췄다. 학생들은 학교재단이 겁을 먹고 굴종한다는 분노로 일렁거렸다.[23]
광주학생 사건이 일어나서 경향이 불 끓듯 하고 학생 가운데서는 계속 희생자가 나오며 그래도 뒤를 이어 운동은 요원의 불처럼 확대되어 갈 때 나에게는 두 가지 깊이 감명된 바가 있었다. 첫째는 학생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하여 불같이들 열렬한 데 비하여 교사들은 일반으로 냉담하고 비겁하다는 것. 둘째는 그 때 학교 내나 사회를 막론하고 소위 민족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도무지 반일 투쟁적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반일적이 아닌 민족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깨닫게 했으며 또 대부분 일제와 타협해야만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산자 층이 반일적이지 못하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찍이 내가 전공하던 역사 연구의 한 방법론에 지나지 않던 유물사관이 조선에 있어서는 민족해방 투쟁에 있어서 유일한 지침으로 내 앞에 실천노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관술이 "경향이 불 끓듯" 하다고 표현한 당시 식민지 조선의 혁명 열기는 다음 글에서 엿볼 수 있다.
대중투쟁의 고양은 1929년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서 시작되었다. 광주라는 한 지역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은 곧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일제타도와 민족해방이라는 구호 아래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광주학생운동에서 촉발된 대중 투쟁의 열기는 급속하게 공장으로 농촌으로 광산으로 확대되었다. 광주학생운동 이후, 몇 년 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노동자와 농민의 대규모 투쟁이 계속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보기로 1930년 1월의 부산 조선방직 파업, 1930년 5월과 6월의 신흥 장풍탄광 파업, 1930년 8월의 평양 고무공장 동맹 파업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파업 투쟁, 1929년 가을부터 다음 해 7월까지 계속된 용천 불이농장 소작쟁의, 1930년 3월의 정평농민동맹 집회 해금 투쟁, 1930년 7월의 단천 삼림조합 반대 투쟁, 1931년 5월의 홍원 호세(戶稅) 연납 진정 시위 투쟁, 1931년 11월의 삼척 도로공사비 불납 시위 투쟁, 1932년 3월의 양산농민조합 폭동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농민 폭동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대중 투쟁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의 노력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음과 동시에 사회주의자들로 하여금 조선 혁명의 가능성이 더욱 성숙해진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운동 방침의 전환을 모색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일제 타도와 민족 해방 전취(戰取)라는 대중의 요구가 폭발하는 상황을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의 시기가 임박한 것으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 이준식, 조선공산당 재건운동[24]
식민지 조선의 혁명 열기를 보며 이관술은 조선 독립은 혁명으로 쟁취할 수 있으며 가장 효과적인 독립운동 방법은 대중투쟁이라고 믿게 되고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박진홍, 이효정 등 학생들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독서회를 만들기 위해 교사인 이관술의 이름을 빌리려 했는데 이미 이관술은 민족계몽운동가가 아닌 혁명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힌 상태라 학생들의 활동을 활발히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제자들과는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을 함께하며 가장 가까운 동지가 된다.[25]
제자들의 독서회 모임과 이를 기반으로 한 '경성 여학생 만세운동'은 그의 끓는 피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관술의 이복동생 이순금도 1930년 3월에 동덕에 편입한 뒤 이효정, 박진홍과 함께 어울렸고 독서회에 참여했다. 이들이 광주학생운동 1주년에 맞춰 펼친 백지동맹을 주도했다.[26]
이관술은 해마다 벌어지는 동덕여고의 학생시위를 적극 지지하고 격려, 지원한다. 제자들이 동맹휴학을 선동하면 다른 교사들은 학생들이 밖에 못 나가도록 교실문을 막았는데 이관술은 먼저 수업을 중단하고 밖에 나가도록 안내했다.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제공하고 학교 측의 징계와 경찰의 연행에 반대해 앞장서 학생들을 보호한다.[27]
독립운동을 하던 학생들이 퇴학 처분을 받자 학생들을 지키려고 동료교사 신명균 등과 함께 교사들의 동반사직을 주동한다.[28]
일제의 모욕적인 창씨개명에 반항하여 자살해버린 신명균 선생이 있었다. 그는 일생을 양심적 민족주의자로서 마쳤거니와 또 내가 안 단 하나의 철저한 반일적 민족주의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맹휴투쟁에 있어 신 선생은 사상의 차이를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진정한 협동자이었고 열렬한 반일투쟁의 지도자이었다.
—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관술은 교사로 있던 시기 여자인데다 돈이 없어 학교를 못 가고 있던 손응교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손응교는 이관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감사를 표한 바 있다.[29]
“ | 그때 이관술 씨는 일본 동경고등사범을 나와서 서울 동덕여중 선생을 하고 있었어. 그 고향집이 울산 이사 가서 사는 우리 이웃이라. 그 사람 말이 사람은 학교를 가야 된다고 그래요. 당시 할아버지가 집에 계시는데 공부할라 칸다 카니까 어림이나 있습니까? 더구나 여잔데. 그래 학교를 못 가고 있었지. 그래 이관술 씨가 나서서 '서울 가자. 가면 우리 집도 있고 하니 이래 똑똑한 아를 촌에 두면 안 된다' 해서 신식공부를 할려고 관술 씨 따라 서울로 도망을 친기라. 서울 창신동 이관술 씨 집에 얹혀 있으면서 동덕여중 청강생으로 공부를 했네.
이관술 씨는 서울서 선생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가 공산당인지 알지 못했어. 나는 지금도 이관술 선생이 공산당 했기나 말기나 좋아해. 나한테 공부하도록 해주었으니까. 참 사람이 좋았어. 조선공산당의 유명한 이재유 알죠. 그 사람 잽히고 나서 이관술이는 고물쟁이도 하고 솥도 때우며 피해 다녔어. 사람들이 이관술이 행방을 몰라 죽었나 살았나 캤어. 해방되고 나서 이관술씨는 서울서 활동을 했어요. 내 시집오니까 우리 집에도 심산 선생 찾아 자주 왔지요. |
” |
— 손응교[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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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정의 아들 박진수는 “어머니가 울산에 가실 때는 이관술 선생님이 직접 차표를 사서 배웅하셨다고 해요”라고 증언했다.
“ | 아 은혜로운 이관술 선생님.
돌이켜 보면 제가 20세가 되도록 어머니 품안에서 어리광쟁이 고집쟁이로 자라온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취직시켜 주신다고 손수 차표를 사서 부산행 기차에 태워 주시고 울산 도착하면 사람이 나와 안내해줄테니 겁먹지 말고 그 사람을 따라가라고 자세히 타일러주시던 선생님. |
” |
— 이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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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제동맹 활동[편집]
1932년 11월 중순 이관술은 이순근, 조정래와 '조선반제동맹 경성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이 날 결정된 반제동맹의 활동 구호는 식민지 노예교육의 반대, 수업료 감면, 학교 내 경찰 침입 반대, 입학에 대한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 반대, 졸업생 취직에 대한 학교의 책임 부담, 여자 교육에 대한 남존여비적 교육에 반대 등 6개 조항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각 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한다. 이 결의 이전부터 이미 이관술은 독서회를 운영하고 있었다.[31]
반제동맹은 수차례 회합을 가지고 1932년 ‘조선자주독립선언 10개조’를 발표했다. 이 조선자주독립선언 10개조를 이관술이 기초했다.
1. 조선의 절대적인 완전독립
2. 중국에 파견하기로 한 일본 함대를 즉각 철수할 것
3. 조선어 본위의 교육을 실시할 것
4.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5. 수업료 감면
6. 임야를 인민들에게 나눠줄 것
7. 전국에 만든 수리조합 운영을 농민들에게 맡길 것
8. 조선에 주둔한 일본 헌병은 모두 철수할 것
9. 조선 독립운동을 하다가 구속된 정치범을 완전 석방할 것
10. 치안유지법을 철회할 것
— 조선자주독립선언 10개조
반제동맹 산하 독서회는 보성고보,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경성부기학관, 경성기독청년학관으로 확대되었다. 이관술은 동덕여고보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두 개의 독서회를 직접 지도했다. 교내 독서회는 이경선[32], 임순득, 김영원, 박인순을 중심으로 사회과학 도서를 공부했다. 그리고 동덕여고보를 졸업한 여동생 이순금과 윤금자, 김길순이 가두독서회로 참가했다.[33]
경성반제동맹은 1932년 11월 하순, 12월에 동경에서 열릴 예정인 ‘태평양연안제국 반제국주의민족대표자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이들은 조선에서도 반제국주의에 앞장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34][35]
반제동맹은 1933년 초 일제에 발각된다. 세포 조직 수가 13개에 이르고 체포된 숫자 미상의 인원 중 경성지방법원으로 송치된 연루자만 43명에 달하는 큰 사건이었다.[36]
이관술은 1933년 1월 29일 임순득, 이경선, 김영원, 임택재와 함께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들에게 체포된다.[37] 이관술은 주모자였기 때문에 지독한 고문을 당하게 된다. 고문은 서대문형무소에 넘어가서도 계속되었다. 일제는 예심제도를 두어 정식 재판에 회부되기 전에 무한정 시간을 두고 조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 특히 사회안전법 관련자들은 예심 기간만 1~2년이 걸렸다. 예심 기간에 끊임없이 검찰과 경찰에게 재조사를 받아야 했는데 형무소에 넘어간 후에는 형무소 지하에 있는 보안과에서 고문이 행해졌다.

취조 과정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고문이 뒤따랐다.[38] 고문대에 눕혀서 묶고 입에 수건으로 재갈을 물린 뒤 물을 붓는 방식의 물고문, 전화기의 전선을 젖은 몸에 감고 하는 전기고문, 불에 달군 인두로 몸을 지지는 단근질이 주로 행해졌다.[39] 관이나 상자에 집어넣어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수일 간 방치해 고통을 주거나, 손톱 밑에 바늘을 끼워넣어 고통을 주는 방식도 있었다. 이 때 이관술은 고문기술자 노덕술과 처음 만나게 되고, 노덕술에게 이관술은 심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하게 된다. 노덕술은 이관술에게 고춧가루를 탄 물을 주전자로 붓는 방식의 물고문도 가했다.[40] 물고문 후유증으로 이관술은 평생 폐병에 시달린다. 이관술은 구속 16개월 만인 1934년 4월 9일 폐병 때문에 병보석으로 가석방된다. 재판이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병보석으로 풀려난 것이다.[41]
1933년 4월 26일 신문 기사를 보면 이관술이 동덕여고보 교사직을 ‘사임하게 됐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재유 그룹 활동[편집]
이재유를 중심으로 한 ‘경성트로이카’(1933. 8.)-‘경성재건그룹’(1934. 11.)-‘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1936. 10.)은 국제공산당과 그 산하의 국제적 지도기관에서 파견된 공작원들이 국내의 다른 그룹들에 대해 배타적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갈등과 대립을 야기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재유는 당을 즉각적으로 건설하려는 방식을 반대하고, 생산현장에서의 대중 활동과 대중투쟁의 확대 · 강화를 통해 당재건의 인적 · 물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재유는 ‘트로이카운동’을 제안했다. 즉 몇몇 지도부가 당을 먼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 마리 말이 자유롭게 마차를 이끌듯이 회원 모두 저마다 자유롭게 활동하여 널리 동지를 획득하고, 때가 되면 조직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2014
이관술이 석방된 지 4일 후인 4월 13일 이재유가 서대문경찰서를 탈출했다. 이재유의 탈주 소식에 막 석방된 이관술은 설렜고 당장이라도 운동선상에 복귀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이관술은 폐병으로 건강이 몹시 나빴다. 그는 당시 기분을 회상기에 써놓았다.[43]
내가 나온 지 3, 4일 후에 이재유 동무가 탈주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나에게는 큰 충동을 준 사실로 나는 한시라도 빨리 도로 운동선상으로 들어가겠다, 그렇지 않으면 동지들이 있는 감옥에라도 다시 들어가고 싶은 일종 형용할 수 없는 초조한 심정이었다. 나와서 보니 내가 검거될 때 잔류해서 활동하던 동지들은 그간에 전부 잡혀 들어갔고 새로 활동하던 동지들 역시 이재유 사건으로 일망에 타진된 형세라 경성 중심의 운동은 전부 파괴되고 적막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동지가 그립고 일본놈들의 박해가 분하고 조직이 파괴된 것이 원통하고 참말 그때 격한 심정은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었다.
—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요양하던 이관술은 결국 이재유를 찾으러 1934년 8월 하순 경성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1934년 9월 중순 박진홍과 이순금의 노력으로 이재유와 접촉한다. 이관술과 이재유는 장충단공원 뒤 <앵구> 약수터에서 암호에 의해서 서로 알아보고 손을 잡았다.[44]
재유 동무와 나와의 평생 잊을 수 없는 전우의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재유 동무의 첫인상은 논리가 명철한 것 매사에 구체적이고 자세한 것 그러고 대단히 사무적인 것이 특색이었다.
—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재유와 만난 첫날 이관술은 지식인으로서의 약점을 극복하기 노동자가 되어 공장에서 일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재유의 생각은 달랐다. 이재유는 이미 이관술에게 몇몇 학교의 독서회 조직을 맡기려 계획하고 있었으며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적당한 부서에서 당장 활동을 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45]
이관술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의 문제도 이재유와 상의한다. 병보석으로 풀려난 이관술의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관술은 상의 결과 재판에 출석하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는다.[46]
이관술이 활동한 경성트로이카 2기 조직의 정식명칭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재건그룹'이다. 이관술은 학생부문을 맡았다. 이재유는 출판, 이관술은 학생운동, 박영출[47]은 노동운동 분야를 총괄했으니 이관술은 이재유와 나란히 경성재건그룹의 핵심 인물이 된 것이다. 이관술은 이 때 이미 거물급 노동운동가가 되어 이재유와 함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진행해나갔다. 정책적 대안 마련을 위해 '노동조건조사표'를 작성해 공장의 노동조건을 조사하기도 했다.
경성재건그룹의 목표는 연말연시를 기해 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경성의 또다른 노동운동 조직인 권영태 그룹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일을 이관술이 맡았다. 이관술은 연말의 총파업을 준비하자는 내용의 팸플릿 등 경성재건그룹 문건을 가지고 권영태 그룹과 접촉한다. 권영태는 자신이 프로핀테른의 지시를 받아 파견되어 왔으므로 이재유 그룹은 자신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권영태는 이관술의 제안을 일축했고 경성 지역 양대 조직의 통합은 실패한다.[48]
경성재건그룹은 학교와 공장에 독서회를 만들어 지도하고 여러 종류의 팸플릿을 발간해 경성과 인천 지역에 배포한다. 석 달 만에 조직원이 오십 명을 넘어서며 상당한 조직적 성과를 거두는 중이었다. 그러나 석 달 만인 1935년 1월 검거 선풍을 맞는다. 이인행과 박진홍이 체포되었다. 조직원들은 돌아올 시간을 정하고 돌아올 시간이 10분 이상 늦으면 몸을 피해 주변에 숨고 한 시간 이상 돌아오지 않으면 완전히 체포된 것으로 간주해 도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붙잡힌 조직원은 24시간 동안 고문에 버티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재유는 이관술의 은신처로 피신했지만 수십 명이 연행되었다. 이관술과 이재유는 비밀 서류들을 땅에 묻어 두고 목적지를 정하지도 못한 채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49]
이관술의 회상기에 따르면 경기도 경계를 넘은 두 사람은 강원도 수성을 지나 홍천과 춘천까지 도보로 배회한다. 두 사람은 새로운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곳에 맞는 복장으로 변장하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구실을 짜냈다. 이 때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변장법을 알려주었다. 여관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자고 식당에서는 뭐라고 말하고 밥을 사먹는가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지침을 알려주었다. 이관술은 이때의 배움을 밑천 삼아 변장술의 귀재라 불릴 정도의 도피술을 터득, 해방이 되기까지 왜경을 농락한다.[50]
나는 재유 동무로부터 그의 독특한 여러 가지 자세한 변장법과 생활구실(生活口實) 즉 여관에 들어가서는 어떻게 자고 주막에 가서는 무슨 핑계를 하고 자고 밥집에 가서는 무엇이라 하고 사먹고 하는 등 지하생활에 필요한 각종의 기술을 배웠다.
—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관술과 이재유는 두 달 간 강원도를 배회한다. 이관술은 친척들에게 이 당시 이재유와 겪었던 일화를 이야기해주곤 했다. 폭설이 산야를 뒤덮은 산중에 갇힌 이관술과 이재유는 꼼짝 못하고 눈 속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1월의 한파 속에 노숙을 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두 사람은 옷을 몽땅 벗어 바닥에 깔고 알몸으로 서로를 부둥켜안은 상태에서 서로의 온 몸을 손으로 문질러 열을 냈다고 한다. 알몸으로 부비기 사흘 만에야 마을을 만나 살아날 수 있었다고 한다.[51]
두 사람은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 신주막동 비석골, 지금의 서울 창동 부근으로 와 수해민 형제로 위장한다. 이관술은 김대성, 이재유는 김소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버려진 임야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집을 지어 살았다. 나중에 이 곳을 방문한 기자에 따르면 그 좁은 방에서 어떻게 장정 둘이 지냈을까 놀랄 만큼 협착했다고 한다.[52]
이재유는 경성에 드나들며 조직 재건을 담당하고 이관술은 각종 팸플릿과 기관지의 제작을 책임진다. 기관지 <적기>는 상당히 두꺼운 분량으로 이관술은 거의 모든 시간을 <적기>의 제작에 쏟았다.[53]
한편 이관술과 이재유는 김희성의 '콩그룹'[54]과 연대하려 했는데 거부당한다. 이후 이관술과 이재유는 조직 명칭을 '경성재건그룹'으로부터 '경성준비그룹'으로 바꾼다. 적기 제1호가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 기관지부 명의로 1936년 10월 20일에 발행되었다. 안재성의 평에 따르면 "상당한 명문장으로 이루어졌다".[55]
적기의 슬로건은 다음과 같다.
① 민족적 계급적 정치적 투쟁의 자유
② 파업 농민의 행동에 대한 경찰 군대의 탄압 반대, 파업 농민투쟁의 자유, 노조 농조 기타 모든 근로자 조직에 대한 무제한의 자유, 지주에 대한 노동자 농민 투쟁에 조정제도를 적용하는 것과 관헌 재판소 경찰 등이 간섭하는 것 반대.
③ 모든 사형제도의 철폐.
특히 정치범에 대한 사형 절대반대.
경찰횡포에 의한 모든 희생자와 정치범의 즉각 석방.
치안유지법, 출판법, 제령 제7호, 폭력행위취체법 철폐.④ 근로자의 출판집회언론 등의 무제한의 자유.
정치적 대중집회와 데모의 완전자유, 모든 경영내에서 경영위원회를 창립할 자유, 경영위원회의 승인. 프롤레타리아 자위단의 창설.⑤ 소작료 지불의 거절, 지주에 의한 농민수탈반대. 지주 고리대금업자 은행 크러스트 금융조합에 대한 농민의 모든 차금의 전멸. 잡세 지불거부, 수리조합비 지불거부.
⑥ 노동자 농민을 탄압하는 모든 법령의 철폐.
형평사에 대한 진정한 동정, 부인의 완전한 평등권, 모든 민족적 차별의 철폐.⑦ 반노예적 농노조건 반대.
기숙사제적 속박 반대[56].
노동자 및 청년에 대한 년기계약제의 반대[57]. 부인, 청년의 이중착취반대.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부인아동의 매매제에 대한 형벌⑧ 부르조아적 산업합리화 반대
성인에 대한 하루 7시간 노동제
16세 미만의 소년에 대한 4시간 노동제
18세 미만의 청년에 대한 6시간 노동제
유년노동금지
1주 40시간제
1주 1회의 임금 전액 지불의 휴일과 1년 1회의 임금 지불의 2주간 휴가⑨ 임금의 전반적 인상
아내가 있는 노동자의 최저생활비 기준에 의한 최저임금 확립
임금에서 공제 선취의 금지
임금지불의 지체에 대한 형벌⑩ 부르조아 부담의 실업 질병 재해 노약 사망의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
— 이관술과 이재유가 만든《적기》의 슬로건[58]
그리고 최저임금 확립, 실업보험·의료보험·재해보험·노약자보험·사망보험 등 국가보험의 즉각 실시를 주장했다. 안재성의 평에 따르면 "오늘날까지도 다 이루지 못한 선진적인 구호들을 담고 있다".[59]
식민지 조선의 노동환경은 다음과 같이 매우 열악했다.
처음 1~2년은 식사만 제공받을 뿐 무보수로 18~19시간 혹사당하며 (중략) 기숙사에 기거하면서 한달에 한번밖에 외출할 수 없고 외출할 때는 감독자가 따라 나간다. (중략) 그녀들은 언제나 80도 이상의 더운 곳에서 일하며 바람이 통할 구멍조차도 없는 곳에서 혹사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알기 힘들지만 나의 경험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알고 있었던 5년 이상의 직공 8명 중에서 지금은 단지 2명밖에 있지 않고 6명은 모두 죽었던 것이다! 내가 일찍이 죽어야 할 사람만을 알았던가?
— 이재유가 묘사한 일제강점기 여성 노동자의 노동환경
국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하는 독립운동일 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빈민운동이기도 했다. 이 운동은 식민지의 노동자, 농민에 대한 헌신이라는 대의를 표방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다.[60]
- <적기>를 소지한 채 경찰에 체포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일단 받으면 이전에 읽은 사람의 지문을 지우기 위해 손바닥으로 모든 면을 쓸어 자기 지문만 찍어놓을 것
- 읽은 후에는 반드시 소각하고 적기를 들고 타인을 방문하거나 배회, 산책하지 않도록 할 것
— <적기>의 보안 수칙
이들은 적기 제2호를 11월, 제3호를 12월에 완성했고 모두 두꺼운 분량이었다. 적기는 여러 운동가와 신문기자와 학생들에게 널리 배포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왔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이관술은 1936년 12월 24일까지 적기 인쇄를 계속했다.[61]
1936년 12월 25일 성탄절 이재유는 집을 나서며 돌아오지 못할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이관술에게 굳은 악수를 청했다. 이재유가 집을 나선 건 조직원 최호극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재유와 이관술은 몰랐지만 최호극은 이미 경찰에 잡혀 이재유와의 약속을 경찰에 말한 상태였다. 이재유는 이관술에게 두 시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체포된 것으로 알고 달아나라고 재차 확인한다. 그리고 이재유는 체포되고, 고함을 치며 이관술이 자신의 체포 사실을 소문으로라도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이관술은 오후 2시가 넘어가자 집을 나서 강원도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재유의 체포와 이관술의 도주 소식은 철저히 보도가 금지되었다가 4개월이 지난 1937년 4월 30일 이후 대대적으로 보도된다. 체포 당시 철저히 비밀로 붙이며 보도를 통제한 것은 이관술을 비롯한 남은 세력을 모두 잡고자 하는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경성 트로이카의 마지막 핵심 지도자가 되어버린 이관술은 잡을 수 없었다.
이관술은 후일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줬던 동지와 통탄의 작별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이관술은 해방 후 일제강점기 항일 혁명운동가 중 가장 으뜸으로 이재유를 꼽았다. 이관술과 이재유는 동거한 기간만 2년이 넘는다.
강원도로 빠져나간 이관술은 산중의 외딴집에서 새끼를 꼬아 망태와 멍석 만드는 일을 하며 겨울을 나는데 그를 좋게 본 주인이 데릴사위로 삼으려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 집을 나왔노라고 나중에 가족들에게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62]
이관술이 서울에 돌아온 것은 이재유가 체포된 지 반년이 지난 1937년 6월 말이었다. 일급 수배자인 이관술이 다시 서울에 돌아오는 데는 대범함 이상의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지도부는 수배자 명단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관술이 영등포 공업지역에 돌아온 것은 달리 설명이 필요 없는, 그야말로 대단한 용기였다.
—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2015
동료들이 대부분 운동을 포기하거나 아직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1937년 6월 이관술은 조직 재건에 착수한다. 이 때 박진홍이 석방되어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관술은 박진홍과 1937년 7월 1일 접선한다. 보통 접선은 반시간에서 한시간 정도인데 선생과 제자 사이었던 이관술과 박진홍은 너무 반가워서 7월 더위에도 하루 종일 걸어다녔다.[63]
박진홍은 이관술의 모습에 놀랐다고 한다. 이관술은 동덕여고보 교사 시설에는 언제나 깔끔하게 양복을 입고 다녔는데 궤짝을 메고 있는 방물장수로 변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관술은 궤짝에서 잡화품을 꺼내 박진홍에게 선물로 줬다고 한다. 박진홍은 그런 이관술을 기억하며 ‘명랑한 혁명가’라는 칭호를 붙여 줬다.[64]
박진홍과의 논의 내용에 따라 당시 활동중이던 콩그룹이라는 활동가들과 접촉한다. 이관술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직이 형성되게 된다. 경성트로이카 출신과 콩그룹 출신이 모인 조직이다. 그런데 이 조직은 이순금과 박진홍이 검거되어 금방 와해된다.[65]
이관술 회상기에 따르면 그 후 이관술은 대구에서 반찬가게 주인 등으로 위장하고 반전반제적인 소그룹 다수 지도했다. 대구에서 전에 동덕여고보 청강생으로 넣어 공부를 도와주었던 손응교를 만나지만 쫓기는 몸이라 눈으로만 반가움을 표시한다.[66]
이 때 이관술은 대담하게도 변장하고 대구경찰서 앞에서 일경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고 한다. 변장하고 경찰서 앞에서 일경의 동태를 살피는 것은 이관술이 자주 하던 행동으로, 이관술은 1940년에도 구두닦이로 변장해 서대문서 앞을 정찰한 바 있다.[67]
손응교는 이후 시내 이층집에 불이 나서 불을 끄다 보니 다다미 밑에 많은 책이 숨겨져 있었는데 이 책이 이관술의 책으로 드러났다는 소문을 듣는다. 이관술이 여러 개의 독서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고 추측된다.[68]
경성콤그룹 활동[편집]
이재유가 검거된 이후 당시의 한 신문은 이관술이 "원래부터 실천투사는 아니고 이재유의 심파(sympathizer의 약칭, 동조자, 동정자를 뜻함-인용자)적 존재로서 끌려들어간 것으로 이재유가 없는 이후에는 전혀 자멸할 수밖에 없고 종래와 같은 투쟁은 상상할 수 없으며 ... 이로써 반도 공산당 운동은 사실상 완전히 궤멸, 종식하기에 이르렀다"(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경성콩그룹에서의 운동까지 포함하여 이후 그의 활동은 이러한 평가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 김경일, 이재유 연구, 1993
동생 이순금이 석방되자 이관술은 이순금과 1939년 1월 초 김삼룡과 이옥숙 부부를 찾아가 새로운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이 때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태창직물 소그룹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6개의 공장 세포와 10개의 가두세포(조직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는 조직)를 형성한다. 이들이 활동을 재개하자 이현상과 권오직이 합류한다. 1939년 4월경 경성 콤그룹의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1939년 5월에는 석방된 박진홍과 정태식도 가담한다.[69]
1938년 가을에 순금이 출옥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원 화홍문 앞에서 순금을 만난 다음 재회를 약속하고 다시 대구로 갔다가 39년 정월에 충북 충주로 가서 김삼룡 동무와 처음 만나 경성서 만나기로 상약(相約)을 하고 그길로 상경하였다. 상경 후에는 지금 삼룡 동무의 부인인 옥숙 동무를 통하여 이문정(里文町) 대창직물공장에 ‘콩그룹’을 만들기에 성공하여 5-6개의 공장세포 근 10개의 가두세포를 형성해가던 중(후략)
—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이관술은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로서 노동자 모임 교재 『노동자 리플렛』을 집필하고 '메이데이 투쟁방침서', '8.1 캄파니아 투쟁지침서'를 만든다. 이관술은 이론적 지도와 기관지 책임도 맡았다. 이관술은 1939년 9월에 기관지 『공산주의자』를 월간으로 창간해서 20부를 발간했다. 기관지는 1940년 3월호까지 이관술이 편집했다. 경성콤그룹의 기관지는 전국에 배포되어 읽히게 된다. 이관술은 「경성형무소의 반항사건을 보라」, 「남해제사의 동요사건」, 「염전인부 40명의 단결」, 「조선제강 양성직공의 단결」, 「예방구금령에 대하여」 등 기사를 직접 쓰면서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해나간다. 이관술은 특기인 변장을 하고 돌아다녔는데 고생이 심해 지방에 다녀오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70]
기관지는 이관술이 직접 남선 일대와 청진, 함흥 등 북선 일대에 정밀한 배포망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에게 배부하였다. 아래 '월간 출판물'이 경성콤그룹의 기관지를 말한다.[71]
오빠는 이 월간 출판물의 책임자로서 이 비밀 출판물을 남선 일대와 청진, 함흥 등 북선 일대에 정밀한 배포망을 조직하여 노동자, 농민에게 배부하였다. 이 당시 오빠는 기술문제와 여비문제로 고물장수로 가장하여 고물 속에 출판물을 넣어가지고 자전거로 각지에 배부한 일이 많았었다. 한번 지방을 다녀오면 의복은 말 못할 만큼 누추하고 심히 궁하였다. 참말로 오빠는 열과 성의 화신이라고 나는 항상 감동하였다.
— 이순금
이관술이 헌신을 다해 만들고 지킨 경성콤그룹은 일제강점기 말기 가장 대표적인 항일운동 조직으로 위상이 높아졌다.[72] 경성콤그룹은 일제강점기 국내의 마지막 저항운동 조직으로서 일제에 꺾이지 않고 버틴 활동가들이 대부분 합류한다. 또한 이관술과 김삼룡은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데 있어 당 재건을 조급하게 서두르기보다 노동자를 중심에 둔 조직 확장에 무게를 두는 것에 동의했다. 그 결과 실제로 주력의 상당수가 노동자가 되었다. 경성콤그룹은 노동운동을 근간으로 했다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73]
경성콤그룹은 조직 보위에 매우 신경을 썼다.
예전에는 평소 친분관계가 있는 인간적 동지를 획득했으며, 한 사람이 체포되면 모든 조직이 무너졌다. 적당한 인물을 찾아내면 그와 전혀 관계가 없는 제3자가 내사한다.
— 경성서대문경찰서, <이관술 외 15명 신문조서>, 1941[74]
중앙부 예하에 각종 책임부서를 정해서 각부에 책임자를 두지 말아야 한다. 현재와 같은 과도기에 그런 조직체를 결성할 필요가 없다. 예전의 운동방법을 고쳐서 이른바 사다리식이라고 부르는 조직구성을 해야 한다. 사다리식이란 양쪽의 봉을 비합법선으로 구성하고 합법과 횡적 중간을 띄어놓아 비합법자는 횡선을 맡고 합법자 1인 또는 몇 사람을 획득하여 지도 교양한다. 합법선이 검거되어도 비합법선이 살아있고, 하나의 비합법선이 검거되어도 다른 비합법선이 살아있게 하는 조직체계이다.
— 경성서대문경찰서, <이관술 외 15명 신문조서>, 1941[75]
일제 경찰에 따르면 이는 '신전술'이었다. 사다리식 조직체계는 이재유 그룹의 트로이카 방식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76]
한편 당시 박헌영은 1939년 9월에 출소해 있었다. 이관술은 박헌영과 일면식도 없었는데 김삼룡과 이현상을 통해 박헌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현상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박헌영과 관계를 맺었다. 김삼룡은 이관술에게 ‘역사도 오래되고 운동 코스도 올바른 공산주의자가 지하에 잠복’하고 있다며 박헌영에 대한 접촉을 제안한다.[77]
박헌영이 경성콤그룹에 들어간 경위는 일제의 이현상 피의자신문조서에 나온다. 이현상 피의자신문조서에 따르면 경성콤그룹의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이현상을 보내 출옥한 박헌영이 변절하지 않았는지, 항일운동을 계속할 생각이 있는지 수차례에 걸쳐 시험했다. 이관술은 1939년 12월 12일에 박헌영을 만나고 경성콤그룹에 영입하기로 결정한다. 이관술과 박헌영은 이 때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이관술, 김삼룡, 이순금, 이현상, 정태식, 박진홍 등은 이재유 그룹 출신이고 박헌영, 권오직 등은 화요계, 서중석 등은 상해파였다. 경성콤그룹은 계파를 불문하고 모든 운동가를 결합한 조직이었다.[78]
경성콤그룹은 이관술의 동료교사인 신명균과 교류하며 조선어학회와의 연대도 모색했다.[79]
이관술은 그 후 함경도로 가서 지도부를 구성하고 광산 노동자 조직, 흥남비료공장 노동자 조직 등에 착수하고 노조를 개편하고 기관지 출판과 편집책임자가 되었다. 이관술은 함경도에서도 변장과 도피의 귀재답게 활동한다. 이관술은 광부들을 조직하여 자신이 쓴 팸플릿으로 학습을 지도한다. 많은 광부들이 조직되어 조선혁명계림탄광노동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른다.[80]
경성콤그룹은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다. 게릴라전에 대비해 전기배선도를 확보해 놓기도 했다.[81]
이관술은 노동자들과 산중에 동굴을 파고 은거하며 항일무장투쟁을 기획한다. 주을광업소 광산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도모한 일이었다.[82]
1939년 5월에 청진에 도착하여 장순명 김형관 등 동지들과 함께 광산 조직에 착수하고 일방 흥남공장의 조직화에 손을 대이면서 나는 산중 토굴을 파고 <붉은 길>이란 출판물을 간행하기 시작했으며 그곳 산중에 숨어있는 동무들과 더불어 무장 ‘빨치산’대(隊) 조직준비를 계획하였으나 그 일은 여러 가지 관계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예의 서대문서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사건의 수습을 위하여 김태준 동무의 집에 갔다가 숨어있던 형사대에게 잡히고 말았다.
—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서대문경찰서가 주도하여 서대문사건이라고 불리는 경성콤그룹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으로 김삼룡과 이현상이 체포되자 이관술은 이를 수습하고 인력을 재배치하기 위해 경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때 이관술은 대담하게도 구두닦이를 가장해 서대문경찰서 근처에서 구두를 닦으며 동정을 살폈다.[83]
이관술은 김태준 집에 갔다가 잠복한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만다. 1941년 1월 7일이었다.
일제 경찰은 수배 6년만에 붙잡은 이관술에게 기록적으로 잔혹한 고문을 가하는데, 이관술은 경성재건그룹(경성트로이카) 지도부였고 경성콤그룹의 창건자이자 지도자로 다른 조직원이 모르는 정보도 이관술은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긴 기간 수많은 고문기술자에게 고문을 당한다.[84]
항일혁명운동가 이관술이 지닌 위상은 매우 컸다. 이재유와 함께 지도부로 나섰던 경성트로이카(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와 박헌영과 함께 활동한 경성콤그룹은 모두 일제 경찰의 검거대상 중 맨 첫머리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이관술은 일제 검찰이 법정에 제출한 조직도에서 맨 꼭대기에 놓였던 이 아닌가.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2021

이관술을 고문한 고문기술자 중 가장 악명높은 고문기술자는 노덕술이다. 노덕술은 일제 고문 기술의 70%를 개발했다고 알려져 있다. 대못상자 고문 등을 사용했다.[85] 노덕술은 독립운동 수배자 중 최상급에 속하는 이관술에게 그가 갖고 있는 고문기술을 총동원했다.[86]
이례적으로 요시오카 사다지로 경부가 지휘하며 노덕술을 비롯한 수많은 고문기술자들이 동원된 6개월간의 이관술 고문 취조 현장은 어찌나 치열했는지 김삼룡, 이현상과 같은 경성콤그룹 간부보다도 두세 배 많은 27회의 피의자신문조서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격렬한 고문을 당하며 엄청난 양의 피의자신문조서가 나올 정도로 온갖 문제를 추궁받으면서도 이관술은 조직의 정보를 누설하지 않았다. 동시에 이미 소련에서 죽어 경성콤그룹에 전혀 가담한 바 없는 김단야가 상급자라며 허위 정보를 흘려 수사에 혼선을 줬다.[87]
이관술은 ‘서대문서 사건’의 주역이었다. 서대문경찰서장 명의로 작성된 ‘검찰 송치서’에 따르면, 이관술은 관련 범죄자 42명 가운데 첫자리에 놓인 수괴였다. 범죄의 비중에 따라 나열된 피의자 명단의 첫자리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1. 이관술 2. 김삼룡 3. 이현상 등의 순서로 작성됐다.
경찰 취조도 이관술에게 집중됐다. 취조 결과를 담은 ‘피의자 이관술 신문조서’는 서대문경찰서에서 작성된 것만도 도합 27회에 이른다. 다른 피의자들보다 두세 배 더 많았다. 이 신문조서는 체포된 뒤 이관술이 1941년 1월7일부터 7월20일까지 6개월 남짓 기간에 경찰에게 어떻게 취조받았는지 보여주는 더할 나위 없는 자료가 된다.
7년이나 추적한 거물 수배자를 체포한 경찰에도 이관술 취조는 여간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입을 열어야 지하운동의 비밀을 파악할 터였다.
이관술은 내심 두 가지 진술 전략을 세웠던 것 같다. 첫째, 경찰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안은 철저히 은폐한다는 전략이다. 아직 체포되지 않은 동지의 소재에 관한 문제나 아직 드러나지 않은 조직 내 비밀에는 그렇게 대응했다. 버티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 같다. 뒷날 이관술이 만신창이가 되어 병보석으로 출감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제의 야만적 살인적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동지 한 사람도 대지 않았”다. 그의 투쟁사를 빛나게 하는 영웅적 행위였다. 하지만 대가가 있었다. “감옥투쟁에서 거의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놈들도 송장 치르기 싫어 결국 보석”을 허용했다. 감옥 밖으로 나온 이관술의 모습은 처참했다.
단지 버티기만 했던 것 같지는 않다. 개연성 있는 허위 진술을 병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국내에 존재하지 않는 제3자를 마치 있는 양 허위로 진술하는 방안을 택했다. 경성콤그룹에 관한 초창기 연구[88] 성과도 이 허위 정보를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 임경석, 6년 9개월만에 체포된 이관술이 일제에 털어놓은 것은[89]
독립운동가가 일제를 속인 이야기는 통쾌함을 준다.[90] 기지 있고 태연하게 연기를 잘하는 이관술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관술이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것에 비해 허위 진술로 덮을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였으며 조직원에 대한 진실된 정보는 전혀 발설하지 않았기에, 이관술은 계속 고문실에 묶여 전문적인 고문기술을 받아내며 극한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서대문경찰서에서의 6개월 간의 고문 취조와 재판 후 서대문형무소의 독방에 감금되었는데 당시 독방은 매우 좁고 열악해서 경찰이 제일 싫어하는 사상범을 학대하는 곳이었다.[91] 그래도 독방에 있을 때는 보고싶은 딸들과 편지를 하는 기쁜 순간도 있었지만, 국내 지하운동의 정보를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한 이관술은 다른 국내 항일운동가들이 잡힐 때마다 같이 고문당하며 투옥 기간 내내 고문실과 의무실을 전전해야 했다.
이관술은 경성콤그룹의 창건자로 투옥 기간 내내 다른 연루자들이 드러날 때마다 혹독한 고문을 당했는데 노덕술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하게 버텼다. 이 때 1941년 검거되어 1943년 병보석으로 풀려날 때까지 3년 가까이 극한의 고통을 안겨주는 고문을 무수히 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해졌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잔혹한 고문을 끝까지 이겨낸 이들에게 일제 경찰은 고문강자라는 ‘명예’를 붙여 주었는데 최고의 영예를 이관술이 안았다고 한다.[92]
노의 고문에 한번 걸려들면 전부다 고백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든지,두가지 길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관술만은 고백하지도,죽지도 않았다.이관술이 두번째 체포되어 또 노의 모진 고문을 받아야 했다. 노는 자기의 고문기술 기록을 이관술이 깼다고 두번째에는 바로 죽도록 고문했다. 그러나 이관술은 끝까지 버텨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그래서 고문마 노덕술에게 이긴 이관술이라 하여 이관술의 이름은 독립운동자들 가운데는 불사조와 같이 전파됐었다.
(중략) 그때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일제때 고문왕으로 악명 높았던 노덕술이었다. 장택상의 진의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노덕술이 필사적으로 이관술을 체포했다. 얼굴은 권오직이 더 노출되어 있었는데도 권오직은 체포되지 않았다. 이관술과 노덕술과의 만남은 이번이 세번째였다. 이관술과 노덕술은 다 같은 울산 사람이었다. 노는 해방되면서 일제고등계 경찰에서 미군정 경찰로 옮겼고 도리어 영전됐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관술이 살아있으면 자기의 전죄가 언젠가는 폭로될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이관술은) 조국독립 이외에는 세속지사에는 아무 흥미가 없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 나서 독립운동한다고 몇번 경찰에 잡혀 죽을 고문만 당하고 6ㆍ25때 교도소 안에서 죽은 사람이다.
— 박갑동
1941년 붙잡혔는데 1943년 병보석으로 석방될 때 이관술은 고문실에 있었다. 고문실에서 고문으로 얻은 폐병으로 피를 토해서 병보석되었는데, 이관술은 장난기 많고 농담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이관술 인터뷰를 보면 고문실에서 커피를 물고 있다 뱉었다 등 대수롭지 않게 농담을 했는데 이웃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피를 자주 토했고 사촌여동생 이차선에 따르면 피가 쏟아져 수건을 붉게 적실 정도로 피를 많이 토했다고 한다.[95]
서대문사건을 시작으로 박진홍 등 중간 지도자들이 검거되어 조직은 급속히 마비되었다. 검거된 조직원은 150명이 넘었다.[96]
한편 이관술의 할아버지는 이관술이 공덕리에 숨어살 때 세상을 뜨고 계모는 수배 중일 때 사망했으며 아버지 이종락은 이관술이 체포된 이듬해인 1942년 2월 6일 사망한다. 이관술은 그 어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다.[97]
체포된 지 3년 만인 1943년 12월 말 오랜 고문에 따른 고문 후유증으로 피를 토하는 일이 잦자 석 달 간 치료를 위해 가석방된다. 감옥 안에서는 더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진 것이다. 일제의 일급 요시찰 대상이었다.[98]
그는 항상 말하였다. "정의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죽음은 가장 옳은 죽음이며 죽음을 각오한 때에는 고난도 쓰라림도 무서운 총칼도 다 극복되는 것이며 용감한 행동을 행할 수 있다." 과연 그렇게 투쟁하였으며 그 행동은 말과 조금치도 틀림없이 일치하였다.
1941년 정월에 오빠는 드디어 놈들의 손에 검거되었다. 일제의 야만과 살인적 고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밀을 지키고 동지 한 사람도 대주지 않은 것은 그와의 관계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그러나 감옥 투쟁 속에서 거의 죽게 되자 놈들도 송장 치르기 싫어 결국 보석되었다.
그의 건강은 참으로 위독하였다. 누가 보든지 절망적이었다. 그는 결심하였다. 어떻게든지 살려고, 조선민족해방 투쟁에 좀 더 도움이 되지 못하고 지금 죽는다는 것은 죄악이다. 우리 민족을 위하여 살아야겠다. 건강이 조금 회복되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그는 또다시 지하활동에 들어갔다.
이때는 전시 계엄령 상황으로서 지하생활이 가장 곤란한 어마어마한 때였다. 솥땜장이, 남의 잔심부름꾼! 이런 가지가지의 고생을 하면서 혁명운동을 여전히 계속하였다. 이러한 사투 속에서 8.15 해방이 닥쳐왔다.
— 이순금
이 때 이관술은 이순금에 따르면 만신창이가 되어 생명이 위태로웠으며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울산의 명의 안효식이 이관술을 정성껏 치료해주고 간호해줬다.[99]
그런데 이관술은 병보석 받고 고문 후유증으로 사경을 헤멘 후에도 몸이 조금 회복되자 가족이나 동네 사람들에게 그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이재유와 공덕리에서 생활했던 이야기나 경찰서 앞에서 구두닦이를 하며 거꾸로 경찰을 감시했다는 등의 일화들을 들려줬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 방문한 손님들에게는 입을 깨물어 피를 냈다는 식으로 재미있게 이야기해서 실제로 피를 많이 토했다는 사실은 집에 오래 있었던 손님들만 알았다고 한다.[100]
1944년 3월 31일 병보석 기간이 만료되었으니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하라는 명령이 내려온다. 이관술은 독립운동을 계속하려 잠적하는데 이관술 딸 이정환이 그녀의 외동딸에게 그날 밤의 기억을 말해준 바 있다.[101]
큰딸 정환은 이미 전날 저녁 아버지가 집을 떠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밤이 깊었을 때 이관술은 아내와 딸들이 잠든 방에 들렀다. 불이 꺼져 깜깜한 가운데 조용히 들어온 그는 어둠 속에서 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린 딸들은 잠들어 있었으나 박가야와 정환은 깨어 있었다. 두 사람은 다른 딸들이 깨지 않도록 잠든 듯 가만히 누운 채 어둠 속에서 이관술을 지켜보았다. 이관술은 한참이나 정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뒷문을 열고 조용히 빠져 나갔다.
남편이 뒷마당 장독대 주위에 가득한 대나무 숲으로 사라져버린 후에야 박가야는 자리에 누운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저리 나가시면 이제 영영 몬 들어 오실기다."
정환도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흐느껴 울었다. 정환은 유난히 대나무 숲이 울던 그날 밤을 평생 잊지 못했다.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이관술이 사라졌다는 것은 알자 경찰은 이관술 가족과 친척, 이웃을 연행해갔다. 가족들은 물론 입암에서만 아홉 명이 연행되어 고문당했고 고모가 사는 망성 마을 사람들까지 경찰서에 끌려갔으며 삼촌은 마침 출타 중이었는데 붙잡혀 고문당할까 두려워 그 길로 도주해버렸다. 심지어 부산 사는 사촌여동생은 임신중인 몸으로 모질게 고문을 당했다. 또 이관술이 사라진 지 오래인데도 매일 집에 찾아와 군화발로 온 방안을 휘젓고 다니며 물건들을 흩어놓았다. 이관술의 사진과 편지를 모조리 압수해갔고 서가의 책도 불온서적이라고 뽑아갔다. 가족들은 그 와중에도 이관술의 동경고등사범 졸업앨범과 이순금의 동덕여고 졸업앨범을 마루 밑을 파서 깊숙이 묻어놓아 보존했다.[102]
이관술은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여서 멀리 달아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한동안 사일마을의 사일 서 씨 집안에 숨어 있었다. 회상기에 따르면 그 뒤 솥땜장이의 심부름꾼이 되어 전라도 산중으로 촌사람들의 솥을 때워주며 다녔다.[103]
이 때는 일제 말기로 전향공작이 극심했던 시기라 이재유를 비롯한 이관술의 동지들은 줄줄이 고문 후유증으로 죽어나간다.
이관술이 폐병에 걸린 채 거지나 다름없이 남부지역을 떠돌고 있는 사이 이재유는 감옥에서 사망한다. 박영출은 이미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지 오래였다. 한때 재건그룹의 상부 트로이카를 이뤘던 세 명 중 두 명이 사망한 것이다. 경성콤그룹을 함께했던 김덕연과 김재병도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다. 동덕여고에서 함께 교사생활을 했던 이윤재와 신명균도 죽는다.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고도 일제에 순응한다는 것은 스스로 죽느니만도 못한 일이었으리라. 이관술은 동지들의 죽음을 비수처럼 가슴에 꽂은 채 울분과 통한의 유랑생활 16개월 만에 대전에서 넝마주이로 해방을 맞는다.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이관술은 1943년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탈출한 뒤 다시 비합법운동을 했다. 이현상도 병보석 뒤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운동을 계속했다.
— 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104]
이현상도 옥중 단식투쟁으로 손수레에 실려 나왔다가 도피에 성공하여 덕유산으로 올라가 경상도 쪽에서 도피 활동을 했다. 이렇게 탈출한 조직원들은 박헌영을 찾으려 했지만 박헌영은 광주에 은거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숨어 있었다. 그래서 조직원들은 박헌영이 해외로 탈출하지 않았나 추측하기까지 했다. 박헌영이 광주에만 있던 것과 달리 경성콤그룹 재건의 주된 장소는 대전이었다.[105] 경성콤그룹의 첫 지도자였던 이관술은 박헌영 영입 후 최고지도자 자리를 넘겼었으나 결국 끝까지 경성콤그룹을 이끈 지도자는 이관술이었다.
이관술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대전을 중심으로 엿장수나 고물장수로 변장해 가며 조직을 재건하기 시작했다.[106]
“ |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 ” |
— 김태준, 연안행
|
경찰이 대전의 이층집을 습격하자 활동가들이 불을 지르고 달아났는데 이념서적이 한가득 발견된 사건이 있었는데 안재성은 이것이 경성콤그룹 조직원의 거처라고 추측한다. 대규모 검거 이후에도 경성콤그룹 세력의 조직원 숫자가 상당했음을 의미한다.[107]
1944년 말~1945년 초에 이르러 조선건국동맹·공산주의자협의회·자유와독립그룹·경성콤그룹 세력 등이 무장투쟁을 위해 비밀연락·연대를 활발히 벌였다.
— 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108]
광복의 순간에도 이관술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대담하게도 대전 경찰서 앞에서 신기료장수로 변장해 경찰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109]
즉 이관술은 일제의 고문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위험한 국내에서 해방의 날까지 일제에 저항했다. 이런 독립운동가는 극소수이다.[110]
“ | 대전을 중심으로 솥때움질을 하면서 전남 지방을 왕래하면서 주로 반전운동을 지도하다 8·15 해방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 ” |
—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6일자 이관술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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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되지 않은 거물’이라고 불렀다. 이관술은 지하운동의 천재였다. 이관술은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최장기간 비합법 지하운동에 종사한 혁명가로 손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임경석, 15년간 일본 수배망 뚫은 ‘신출귀몰’ 혁명가 이관술[111]
광복 후 정치인으로서의 활동[편집]
일제강점기 잠행 시기의 이관술의 행적은 거의 전설에 가까웠다. 그는 고물 장수 외에도 구두닦이, 깨진 솥을 수선하는 솥땜장이 등으로 위장해 일제 경찰의 눈을 속였다.[112]
이관술의 신출귀몰한 행보는 일제강점기 신문에 항상 보도되었으며 민중은 그의 행보에서 독립의 희망을 보았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평가한다.[113]
광복 후 2개월이 지난 1945년 10월에 중도우익성향의 잡지 <선구>에서 진행한 최초 정치여론조사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가장 양심적이고 역량 있는 정치지도자' 5위에 선정될 만큼 현대사 속 중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114] 이관술은 전시체제였던 1930~40년대 일제에 끝까지 저항한 몇 안 되는 독립운동가였다. 이러한 사실을 국민들이 잘 알고 있었으며, 이러한 것이 여론조사에 반영된 것이다.[115]
조선을 이끌어갈 지도자 - 선구 여론조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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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 이름 | 득표율 |
1위 | 여운형 | 33% |
2위 | 이승만 | 21% |
3위 | 김구 | 18% |
4위 | 박헌영 | 16% |
5위 | 이관술 | 12% |
6위 | 김일성 | 9% |
7위 | 최현배 | 7% |
8위 | 김규식 | 6% |
9위 | 서재필 | 5% |
10위 | 홍남표 | 5% |
백분율의 합이 100%를 넘는 것은 복수 응답이 있었기 때문임. |
“ |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관술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던 것을 보면 이관술이라는 인물이 줬던 메시지가 있을 겁니다. 조선에서 식민 지배하에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관술을 통해 용기를 얻었다든지. 혹은 이관술의 활동으로부터 언젠가 독립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 |
— 정계향 울산대학교 역사학과 교수[116]
|
광복 직후 조선공산당 최고위직을 맡은 이관술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1945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이 정식 재건된다. 이관술은 서완석, 김형선, 최원택과 함께 중앙검열위원으로 선출된다. 4명으로 이루어진 중앙검열위원은 당의 모든 분야를 감사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기구였으며 이관술은 중앙검열위원 서열 1위였다. 또한 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총무와 재정을 담당했다.[117] 독립운동가가 된 후 처음 맞이하는 화려한 나날이었다. 가족들과도 재회한다.[118]
이석도는 짧은 그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 서울 가보니까 유명하더만요. 굉장한 사람들이 다 찾아와. 김창숙씨 알죠? 초대 성균관대학교 총장 아닙니까? 그 집에 날 데리고 갔는데, 대우를 굉장히 잘 받더만요. 여운형 씨 쪽에서도 만나자고 요청이 오고, 관술 씨하고 일을 해보겠다고 여기저기 지방에서도 올라오고. | ” |
— 이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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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설립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관술은 전국인민위원 명단에 다섯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이관술 앞에 있는 이는 이승만, 여운형, 허헌, 김규식이었다.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119]
김오성이 1946년 9월 쓴 <지도자 군상>에 따르면 "이관술이 중앙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한번도 그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무슨 권세의 자리처럼 자기의 실력도 없으면서도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해 애쓰건만, 이관술은 시종일관 사양"했다고 한다.[120] 조선공산당에서도 이관술은 가장 실세 자리 중 하나인 조직부장에도 추천되었지만 사양하고 김삼룡 등에게 양보했다.[121]
이관술이 고향 울산에 방문하자 지역 인민위원회 주요 인사들이 모두 환영했다. 이관술은 경성에 나가 있는 울산 출신 인사 중 가장 고위급 인물이었다. 1943년 병보석으로 풀려나 입암마을에서 요양하다 탈출한 뒤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상전벽해로 상황이 바뀌었다. 이관술이 고향 울산에 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울산에서는 대대적인 환영 잔치가 벌어지는데 이관술은 이 때 "지나치게 좌익적인 구호나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적대적인 행동으로 민심을 이반시키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이순금도 전국부녀총동맹 회의에서 "회의 분위기가 너무 극좌로 흐른 것은 앞으로 극복이 되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라고 말했다.[122]
조선공산당 내부에서는 파벌대립이 심했다. 이관술은 박헌영파와 반박헌영파 사이에서 박헌영에게 불만을 지닌 당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하는 조선공산당의 지도자였다.[123]
조선공산당 중앙은 이관술까지 보내 이들(반박헌영파)을 설득하지만 오히려 자신들의 지방 파견을 결정한 김삼룡과 이주하를 제명하라고 요구했다. 이들의 제명 요구에서 이현상이 빠진 것은 의외일 수 있었다.
(중략)
이관술 같은 경우는 소탈하고 사람 좋은 성격인데다 매우 실무적이고도 실용주의적인 성격이어서 중재자 역할을 부탁받곤 했다.
—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
8시간이 넘게 계속된 이날 회의[124]에서 이관술이 어떤 발언을 했는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그는 한 마디 발언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영등포 등 내분이 일어난 지구당의 반대파들이 이관술을 중재자로 요청했다는 발언으로 보아 이관술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지 않았던 듯하다. 이관술의 조정 역할이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날의 연석회의가 끝난 후 박헌영은 반대파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그들 중 일부를 중앙당 간부로 영입하고 얼마 후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해 진보세력의 통합을 꾀한다.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박헌영 지지자들은 물론 박헌영을 맹렬히 비판했던 이들까지도 이관술을 존중했다.
—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2015
박헌영에 적대적인 사람들도 이관술을 존중했다. 박헌영에 대항해 박헌영의 정적 김철수 중심 공산당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김철수의 동생 김광수는 이관술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관술 선생은 오랜 생애를 일제와의 투쟁에 일관해 왔거니와 그 인간적인 면에서도 참으로 진실하고 양심적이었으니 선생을 위험에 빠뜨린 적의 무리들도 그를 위대한 군자라고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박헌영 반대파는 박헌영, 이현상과 공산당 연석회의에서 서로 인격적 모독까지 할 정도로 사이가 나쁘고 이주하, 김삼룡을 제명시키라고 주장했는데, 그런 박헌영 반대파가 이관술을 중재자로 지명했다. 이관술이 박헌영, 이현상, 김삼룡과 같은 경성콤그룹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반대파에게 존중받을 만큼 인품이 훌륭했음을 알 수 있다.[125]
“ | 무척 서민적이었어요. 많이 배우고 그런 표가 하나도 없고 농민들처럼 가마니도 짜고 오만 거 다 하시지.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인자하게 대하고 그러니까 동네 일꾼들도 좋아라 하고 안 좋아 하는 사람이 어딨어? 성격이 좋아요. 사람 층하를 절대 안 가리고 다 좋다고 이래요. 일꾼들? 오빠가 그리하니까 일 더 열심히 해요. 나이 어린 우리도 가면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요. 일제시대라 양식도 어렵고 그래서 우리는 염치도 체면도 없고 그 집 가서 맨날 얻어먹고 있어도 싫은 내색 하나 없고 좋아라 카고. 요새 나이가 먹어서 가만 생각하니 그런 인심도 참 없다 싶어요. | ” |
— 이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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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여러 정치적 행위를 했다.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독촉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1945년 11월 11일 기자 회견에서 이관술은 독촉 참가에 대한 질문에 통일전선을 이루기 위한 참가 결정이라고 밝혔다. 이관술은 기자들에게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완전히 제외한 통일전선”이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통일전선이라는 미명 하에서 일본제국 잔유세력과 친일파, 민족반역자의 도발을 허하는 반민족적, 반인민적 전선”일 뿐이라고 경계했다.[126]
이관술은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127]
“ | 중경 임시정부에 대한 나의 태도는 종래 상식적인 견해에서 아직 더 무슨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국내와 해외의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세력을 규합하여 민족통일정권을 세워야 하는 것은 이미 보편된 정치 상식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경임시정부의 성격을 아직 명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시기라고는 생각되지 않음으로 앞으로의 귀추를 살펴보지 않고 단정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 ” |
— 이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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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은 12월 30일 미군정 사령관 하지를 만났다. 하지 중장이 각 정당 대표들을 군정청으로 불러 3상회의 결과뿐 아니라 신탁통치보다 앞서 만들 임시정부 구성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대담 결과는 이관술이 기자들 앞에서 직접 정리해 밝혔다.[128]
“ | 나는 신탁통치를 절대 반대하며 현재 우리의 노선은 민족통일전선에 있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 ” |
— 이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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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건국 활동에 앞장섰다.
“ | 이관술씨는 그의 피로 쓴 지하운동의 과거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의 과거 생활 중 가장 유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체포되었을 때 박헌영 동지와 동생 순금의 주소를 말하라고 무서운 고문을 당할 때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 기로에 처했는데 나는 죽기로 맹세하고 13일간을 단식하다가 전에 함남 지방에서 일하던 것을 이용하여 허구를 꾸며서 그들을 감쪽같이 속인 일이다. 그리고 3일간을 단식한 후 쓰러진 체하여 의사를 부른 사이에 미리 병에 받아 놓았던 커피를 머금고 있다가 의무실에 가서 각혈을 하는 것같이 토하여 보석을 하게 만든 것 등이다. 나의 쓰라린 경험을 말하면 한 없다. 이재유 동지와 강원도로 낙향하게 되자 양주로 가서 참외막을 만들고 그것을 아지트로 쓰면서 한 해 참외농사를 하여 가며 서울과 연락하다가 이재유 동지가 돌연 체포되었고 나는 피하여 4개월 동안을 엿장수 쓰레기장수 봇짐장수 등으로 몸을 감추고 다녔다. 1937년 12월 대구로 갔을 때는 몸만 감추기도 대단히 곤란한 때라 처음에는 다리 밑을 집으로 삼았고 거기까지 마수가 뻗치게 됨으로 이곳저곳 다리 밑 집을 이사다녔던 것이다." |
” |
—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6일자 이관술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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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은 인터뷰할 때 "여간 쑥스러워 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129] 그런데 그 와중에 농담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관술이 병보석 기간에 실제로 피를 많이 토했다는 사실은 친척들이 증언하고 있을 뿐더러 폭압적인 일제 말기에 거물 사상범이 커피 한 번 뱉어서 의사도 속이고 병보석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고문당하며 여러 번 심하게 피를 토해서 겨우 병보석을 받았음이 분명하다.[130] 아니면 혹시 이관술이 피를 토하는 걸 의사가 여러 번 본 상태라면 한 번은 커피로 속이는 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이관술이 일경을 번번이 허탕치게 한 기사가 일제강점기 신문에 수차례 대서특필되었음에 더해 이관술이 일제를 속인 일화도 화젯거리였다. 이관술은 고문 취조 과정에서 이미 죽은 김단야가 경성콤그룹 지도자라며 허위 정보를 흘려 일경의 수사에 혼란을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재판에서는 경성콤그룹이라는 비밀결사는 없다고 진술했으며, 다른 피고인은 모두 경성콤그룹이라는 비밀결사가 있다고 진술했다는 예심판사의 말에 "의식정도가 낮고 또 동지를 획득하는 데 무엇이나 비밀 비밀 하면서 어느 정도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다고 본다"고 답변했다. 재판에서는 '이재유가 체포된 것이 서울을 떠나지 않아서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서울에 있기 싫어서' 함북으로 갔다고 했는데, 해방 이후 회고록에서 '함북서 사람이 와서' 함북으로 갔다고 밝혔다. 이렇게 연기력까지 동원해서 정보를 지켜내 동지들에게 "눈부신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관술의 이미지는 인터뷰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일제를 골리고 속여서 식민지 조선 민중에게 통쾌함을 주는 이미지'였다.[131]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올 정도로 잔혹한 고문을 당한 와중에도 고문의 기억을 오히려 유쾌하다고 하는 대담함도 눈길을 끈다.
조작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피해자[편집]
이관술의 전성기는 8개월에 불과하였다. 이관술은 미군정이 주도해 조작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투옥되고 그 결과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당시 학살당하게 된다.
1946년 5월에 다른 피의자들이 체포되었지만 이관술과 권오직은 체포되지 않았다. 월북을 권유받았고 권오직은 월북했지만 이관술은 월북을 거부하고 남한에 남았다. 권오직이 월북한 것을 보면 '지하운동의 천재'라고 불리던 이관술은 더 쉽게 월북할 수 있었을 텐데도 월북을 거부하고 남한에 남았다. '변장의 달인'이라고 불리던 일제강점기 혁명가 시절과는 너무나 다른 여유로운 도피생활이 시작되었다. 낮에만 서점 등으로 피신하고 밤에는 집에서 잤다. 수배령이 내려진 뒤에도 이관술은 당당히 자신의 집에 기거했다.[132][133]
이관술은 1946년 7월 6일 체포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이관술을 수차례 고문했던 노덕술을 비롯해서 이구범, 최난수 등 친일경찰에게 해방된 조국에서 다시 검거되었다. 존경받는 민족 지도자에서 희대의 위조지폐범으로 전락한 이관술은 고문을 당하며 위조지폐 인쇄의 지령을 내렸다는 진술을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구적 일본과 가장 과감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싸워 온 애국투사에게 해방 조선의 영예가 주어져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최대의 영예를 보내야 할 애국투사에게 최대의 모욕과 박해를 가하며 그도 다름 아닌 구적 일본제국주의의 주구들 손에서 가해지고 있다.
1930년 이후는 가장 험난한 시절이다. 일제의 무서운 탄압과 부단한 회유와 유혹으로 인해서 자칭 지사 류가 전락의 길을 밟고 있을 때 조금도 휴식이나 후향을 모르고 그 곤란한 지하 투쟁을 계속하여 왔다는 것은 참으로 용이한 일이 아니다. 이는 조국과 민족 이외에 다른 아무런 사심은 없는 진실한 애국자가 아니고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영웅적인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관술 선생에게 민족적인 영예는 드리지 못할망정 허무한 사건을 날조하여 일제 이상의 박해를 가하고 있음은 조선 인민의 통분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김광수(김철수의 동생)
이관술 씨는 1929년 이래 20년간을 반일제투쟁으로 일관해왔다. 혹은 학생들을 동원하여 일본의 만주 출병을 반대하다가, 혹은 비밀 문서를 간행하여 반일 반전 사상을 고취하다가, 혹은 빨치산 반일군대를 획책하다가, 혹은 공장 또는 가두에서 노동자 및 근로대중을 지하에서 조직하다가 발각하여 오랫동안 무서운 악형 밑에서 영오생활도 하였고 일경 추적을 받으면서 엄동에 23개월씩 산중 은거도 하였고 어떤 때에는 솥땜장이로 아슬아슬한 모험을 해 가면서 가장 무서운 백색테러에 누구보다도 가장 맹렬히 싸워 온 우리 민족해방운동사가 가진 위대한 혁명투사이다.
이러한 혁명투사를 하등 적확한 증거도 없이 검거하여 취조한다는 것은 혁명가와 조선민족해방사에 대한 모독이라 아니할 수 없다.
— 민주주의민족전선
이관술 씨의 20년간 투쟁사는 진실로 혁명가의 사표이며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임을 증명하기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해방 조국의 경찰이 이 지도자를 검거할 수 있을 것인가? 동쪽의 해가 서쪽에 뜨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우리 민족의 지도자 이관술 씨가 지폐 위조 사건에 관련될 수는 없을 것이다.
— 조선공산당 서기국 성명: 애국투사에 이 죄명!
10월 17일 오전 10시, 서울지법 4호 법정에서 열린 이관술에 대한 첫 단독심리 현장은 매우 스산한 풍경이었다. 재판정을 취재한 기자들의 기사를 보면 방청석에 불과 10여 명이 앉아 있어 쓸쓸했다고 적고 있다. 반대로 출석한 이관술의 모습은 매우 침착했다고 전한다. 당시 <동아일보> 취재기자가 쓴 법정 스케치 기사를 보면 ‘이관술은 처음부터 온순한 태도를 유순한 언어로 침착하게 답변을 계속했다’고 적고 있다. 재판장이 보인 일방적인 자세에도 이관술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는 근거들을 조목조목 언급했다.[134]
“ | 나는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피고인들에게 미안함을 금치 못한다. 그들의 가족에게도 미안하다. 그 이유는 이 사건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말하나 결국은 공산당 사건이며, 그 의도하는 바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공산당을 치려고 하던 차에 김창선 사건이 발생하자 이것을 기회로 이런 사건을 허위 구성하였던 것이다. 나는 오히려 막연하고 부당한 논법을 가지고 합리화시켜 어떠한 목적으로 이 사건을 논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된 조 검사의 심정을 동정하여 마지 않는다. 검사는 지금이라도 정의의 길로 나가기를 바란다. | ” |
— 이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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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공판에서 재판장 양원일은 판결 이유를 낭독한 후 검사가 구형했던 것과 똑같은 형량을 선고했다. 짜놓은 틀에 맞춘 것을 보여주는 선고 결과였다. 이관술을 제외한 다른 피고인들은 박낙종을 따라 통곡했다. 피고인 가족들도 함께 대성통곡했다.
그 과정에서 이관술은 무척 침착했다. 다른 이들이 통곡할 때도, 함께 노래할 때도 침묵을 유지했다. 간수들이 소란을 제지하면서 충돌이 벌어졌을 때는 주변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마지막에는 변호인 전체와 감사의 뜻을 담아 악수를 나눈 뒤 퇴장한다.
이관술이 이 같은 상황에서 초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상황이 예정돼 있다는 것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2022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의 피해자[편집]
투옥 초반에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서대문형무소의 경우 이관술은 반제동맹 사건과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모두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기 때문에 세 번째 수감이었다. 이후 이관술이 항일 비밀결사를 만들던 중 광복을 맞았던 대전으로 옮겨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관술은 감격의 해방을 맞았던 대전으로 옮겨져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관술이 남긴 흔적은 많지 않다. 고향의 유품은 일제 경찰이 진즉에 압수하여 파괴하였고, 활동시기엔 위험을 무릅쓰고 <적기> 등의 팸플릿을 만들기도 했으나, 저작자임을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유일하게 남긴 글은 해방 후 현대일보에 연재한 짧은 회상록인데 그 제목이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이다. 48년의 생애 중 20년을 혹독한 고문과 감옥살이, 밑바닥 생활을 하며 활동하고 도피했던 그에게 조국의 인상은 '감옥'이었는가 보다. 더구나 해방된 조국마저 그를 감옥에 보내 최후를 맞게 하였다.— 박현주[135]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폐병을 앓던 이관술은 대전형무소에서 건강이 악화되어 주사를 맞으며 지냈다. 검찰에서나 대전형무소에서의 이관술에 대한 여러 목격담은 항상 '이관술은 상당히 쇠약해 보였다'고 하여 죽는 순간까지 몸을 회복하지 못하고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음을 말해준다.[136]
투옥 중인 1947년 반곡초등학교 건물을 신축할 때 542평(1791.74㎡)의 땅을 기부했다. 원래 대지주 집안 출신이었지만 1947년이면 해방 후 혼란상으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가던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을 기부한 것은 이관술이 원래 서울 동덕여고보 교사 출신으로 독립운동도 제자들이 독립운동 하는 걸 보고 시작했고 내내 제자들과 같이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이관술은 동덕여고보 교사가 되기 전에도 유학 시절 방학 때마다 고향 울산에서 동기들과 함께 강습소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137] 이후 혁명가가 되고 정치가가 되었지만 교육자로서의 정체성은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연구자들은 추정한다.[138]
이관술은 일제강점기에는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한 바 있다.[139]
한국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3일 이관술은 만 4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대전 산내에서 복역중이던 대전형무소 인근 골령골(현.대전시 낭월동)에서 불법적으로 학살당했다.
대전형무소에서 2차로 학살당한 이들의 수는 대략 1800명으로 과거사위원회는 추정한다. 이때 대전교도소 4사동에 수감된 정치‧사상범들은 모두 골령골에서 총살됐다. 맨 앞에 끌려 나와 헌병과 경찰이 호송하는 트럭에 탄 이가 바로 이관술이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형무소 간수들과 경찰들은 이관술을 기억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이중 가장 거물급 인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관술은 험악한 분위기에 고성으로 호명 당한 후에도 담담히 감방문을 나와 트럭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다 각오했다는 듯이.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2022[140]
형무소 간수들은 이관술을 시종 평온한 모습을 유지한 특별한 정치범으로 여겼다. 당시 27살 나이로 형무소 특별경비대장이었던 교도관 이준영은 이관술이 ‘지사’의 면모를 보여주었다고 증언했다. 이관술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정치·사상범 중 가장 거물급 인사였다. 사실 남한에서 수감된 죄수 중 가장 유명한 이가 이관술이었다. 따라서 헌병사령관 송요찬의 지시를 받아 헌병대의 학살명단 맨 앞에 놓인 것도 바로 이관술이었다. 형무소 내의 수형자 인솔을 책임진 이는 이준영 교도관이었다. 그는 특별경비대장으로 형무소에서 학살 현장까지 동행했으며, 국군과 경찰이 총살하는 모습을 모두 목격했다. 그는 학살당한 이 중 이관술의 죽음을 가장 선명하게 떠올렸으며, 2009년 과거사위원회 참고인으로 조사받으면서 그날의 기억을 전달했다.
가장 먼저 총살당한 이는 이관술이었다고 현장을 목격한 이준영은 증언했다. 그 순간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총살 직전 지휘관 심 중위가 이관술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심용현은 이관술의 이름을 거칠게 부르며 시선을 끌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 한마디 할 기회를 준다는 식이었다. 그리고 조롱을 섞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칠 의향이 있냐고 윽박질렀다. 왜냐면 형무소 내에서 탈옥을 시도했던 다른 수형자들이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것을 빗댄 것이다.
이관술은 잠시 생각을 마치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진 못하겠으나 ‘조선 민족 만세’를 부르겠다는 답변이었다. 이 말에 주변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구덩이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린 이관술이 큰 목소리로 “조선 민족 만세”를 외치기 시작하는 순간 심용현의 “사격 개시” 구호가 엇갈렸다. 이관술은 난사된 총탄에 뒤통수를 맞고 바로 쓰려져 구덩이에 몸이 빠졌다.
이관술은 이미 죽음을 예견하고 담담했으나,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은 결국 비운으로 끝을 맺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나서기로 맘을 먹고 민족혁명운동의 맨 앞에서 온갖 고난을 감수하며 해방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해방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던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일제 경찰 대신 미군정 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갇힌 채 보낸 4년. 이관술이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된 조국은 온데간데없이 높은 감옥의 담장을 거쳐 마지막으로 산골짜기에서 머리에 총을 맞고 차디찬 주검이 된 것이다. 더구나 이 학살은 무척이나 잔혹했으며 야만 그 자체였다.
“재소자들을 앉혀서 구덩이 쪽을 바라보게 하고, 재소자 뒤통수에 대고 쏘는 거야. 한 10미터 뒤에서 쏘면, 피와 허연 것이 튀어서 바지가 엉망진창이 돼. 나중에는 군복을 새로 갈아입히고, 바짝 들이대라고 해. 총구를 머리에 바짝 들이대면 안 튀어. 그렇게 한 번 쏘고 나서, 꾸무럭거리고 있으면 권총으로 또 쐈어. (중략) 얼마 안 돼서 구덩이에 시신들이 거꾸로 쑤셔 박혀서 다리가 위로 서고, 별거 다 있었어요. 헌병지휘관이 국민방위군(청년방위대)에게 산 위에서 돌을 굴려와서 시신들을 눌러 버리게 했어요.”-과거사위원회 2010년 상반기 보고서 5권 참고인 김○○ 진술 녹취록(2009.2.11)
골령골에서 벌어진 모든 학살은 그 어떤 것도 적법한 과정을 밟은 것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과 미군 사령관의 결정으로 짐작되는 ‘탑 레벨’에서 내려온 명령이 법적 명분의 전부였다.
이관술이 포함된 7월 3일의 첫 번째 총살이 집행된 후 심용현 중위는 직접 권총을 뽑아 뒤통수에 한 번 더 확인 사살을 했다.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2022[141]
한때 일경에 쫓겨 다니며 조직 활동을 벌이기도 했던 대전의 한 골짜기에서 처형당할 당시 이관술의 나이는 48세로 9년여의 감옥살이와 10년여의 도피생활로 반생을 바친 불우한 인생은 그렇게 끝났다. 울산이 낳은 신동으로, 중동을 빛낸 수재로, 부유한 지주 가문의 장남으로 탄탄하게 열렸던 미래를 접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뛰어들었던, 바위 위의 학처럼 고고하게 살고 싶었던 한 이상주의자는 그렇게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이관술이 아내와 큰딸의 울음소리를 뒤로 한 채 사라져갔던 그 대나무숲이다. 이관술의 친할머니 조정숙은 이관술이 오랜 세월 도피와 감옥생활을 할 때 매일 새벽마다 대밭에 물을 떠놓고 '우리 관술이 잘 되게 해주이소' 하며 빌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이관술이 이미 처형당한 줄 모르는 채 생환해 오기를 빌고 또 빌었다. 할머니의 기도 소리에 응답하듯, 대나무는 매일 울었다.
평소 분파주의의 비판을 받지 않았던 인물이기 때문에 만일 북한으로 넘어갔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항상 가장 위험한 자리를 지키던 그가 개인의 안전을 위해 월북했을 리 없고, 실제로 정판사 사건으로 수배되고도 월북을 거부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지만, 파렴치한 위조지폐범으로 몰림으로써 그는 씻기 어려운 오명을 뒤집어쓴 채 사람들로부터 잊혀져야만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유언의 의미[편집]
이관술의 유언은 "조선 민족 만세"이다. 1950년 이관술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 하나를 고르며 분단을 인정하는 유언을 남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관술 연구자들은 이관술이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을 보여주는 대답이라고 해석한다. 죽음을 눈 앞에 두었음에도 짧은 시간 내에 어느 한 체제 편을 들지 않을 수 있는 답을 찾아낸 것이다.[142]
유족의 고초와 복권 움직임[편집]
이관술의 독립운동 때문에 일제강점기부터 고초를 겪던 이관술의 가족과 친척은 광복 후에는 이관술의 친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으로 학살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이관술은 1934년 제자였던 함흥 출신인 박선숙(朴善淑, 1909~?)과 혼인하였다.[143]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 4명의 딸을, 두 번째 부인과는 1명의 딸을 두었다. 하지만 장녀의 남편은 좌익이 아니었는데도 장인이 이관술이라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전쟁 당시 학살당했다. 이관술의 동생도 같은 이유로 학살당했다. 첫째 부인과 차녀, 3녀 및 둘째 부인과 그 딸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학살 당한 것은 이관술만이 아니었다. 이관술의 사위와 이복동생도 총성에 사라졌다. 1960년 4.19 혁명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그해 여름이었다. 경남 울산군 태화초등학교에는 수천 명의 주민들이 구름떼처럼 모였다. 10년 전인 1950년 8월 경남 울산군 온양면 운화리 대운산 골짜기와 청량면 삼정리 반정고개에서 학살된 이들의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기 위해서다.울산지구 CIC와 울산경찰서 경찰들은 울산지역 보도연맹원 최소 870명을 위 두 곳에서 학살했다. 유가족들은 4.19 후인 1960년 여름 두 곳에서 상당수의 유해를 발굴했다. 가마니 위에 부위별 유해와 보도연맹원들을 묶었던 철사 줄이 대량 발굴되었다. 엄마 손을 잡고 태화국민학교로 간 박경희는 발굴된 유해를 보자 경기를 일으켰다. 엄마 이정환 역시 목 놓아 울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인 수천 명의 유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어떤 것이 누구의 유해인지 구별이 불가능했다. 태화국민학교에서 위령제를 치른 후 백양사 아래에 합동묘를 만들었다. 봉분을 만들고 비석을 세운 후 약 30명의 유족들이 단체사진을 촬영했다. 하지만 봉분을 세운 지 1년도 채 안 되어 묘가 파헤쳐졌다.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동토의 계절이 도래한 것이다. 상부의 명령을 받은 울산경찰서는 비석을 깨부수고 유족들을 호출했다.
"빨갱이들이 묘를 만들었으니, 네놈들이 묘를 파헤쳐"라고 했다. 유가족들에게 파묘를 지시한 것이다. 인륜에 어긋나도 너무나 어긋난 조치였다. 더군다나 경찰들은 파헤친 묘에서 나온 유해를 유족들에게 화장해 버리라고 지시했다.
경남북지역과 제주도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 하지만 유족들에게 파묘를 시키고, 유해를 불태워 버리라고 지시한 곳은 울산이 유일하다. 박경희의 부친 박동철은 이관술의 큰 사위다. 또한 울산에서 학살된 이중에는 이관술의 이복동생 이학술도 포함되었다
— 박만순,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144]
"제가 7살인가? 평생에 우리 아버지를 딱 한 번 보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하였다 해서 범서(면) 입암리 집에는 일본 순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6·25가 터지자 그런 아버지에 대한 영광은 간 곳 없고… 저는 천하의 불쌍한 고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막내딸은 평생 아버지 부재의 삶을 살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위태로운 삶을 지탱해주던 후견자들도 난리를 겪으면서 스러져갔다. 엄마 박가야와 두 언니(성옥, 정성)는 6·25 전란 중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비명횡사했는지 아니면 월북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9살에 시집간 큰언니 이정환은 결혼 2년 만에 보도연맹 학살 탓에 남편을 잃었다. 갓난애 하나를 키우며 50 평생을 가난하고 외로운 과부로 살아야만 했다. 작은아버지 이학술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전쟁 초입에 학살당했다. 오직 막내딸 경환이만 남았다. 그는 청소년기에 접어들 즈음 ‘천하의 불쌍한 고아’ 신세가 되고 말았다.
— 임경석, 일본 경찰 따돌린 아버지도 딸의 얼굴이 궁금하단다[145]
군사정권 시절 정보기관은 이관술의 유가족을 여러 차례 소환하며 조사하는 등 유가족들을 연좌제에 묶어놓고 괴롭혔다. 민주화 이후 그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비석이 울산의 이관술 친척 사유지에 세워졌는데 우익단체와 안기부의 협박으로 땅에 파묻어야 했고 땅에 파묻는 내내 우익단체는 망치로 비석을 훼손했다.[146]
세상은 변했어도 좌익 인사를 대하는 인심은 아직 그대로였다. 비가 선 일년 뒤 울산의 우익 인사들이 학암 선생의 공산당 활동을 앞세워 ‘세워서는 안될 비석’이라는 지탄과 함께 이 비석을 뜯어내는 바람에 유가족들은 다시 한 번 상처를 입었다. 철거된 비석은 현재 입암마을에 묻혀있고 옛날 비석이 있었던 자리는 최근 공원이 조성되면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이런 논란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울산학센터가 지난해 <울산의 인물>이라는 책자를 발간했다. 이 책은 건국 후 울산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학암 선생이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로 독립운동가를 못살게 굴어 ‘고문왕’으로 불리었던 노덕술과 함께 빠졌다. 이때 필자는 학암 선생과 노덕술을 단순비교해 그의 이름을 ‘울산의 인물’에서 빼는 것은 잘못이라는 지적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필자는 선생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 골령골을 방문했다. 골령골에는 당시 비극을 알려주는 간판이 있었지만 선생의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147]
이관술은 2014년 울산의 인물에 뽑혔는데 울산학센터, 울산발전연구원은 이관술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책자 발간 시 제외한다. 그런데 이관술은 대표적 국내파 독립운동가라 학계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독립운동가이다. 예를 들면 박찬승의 <한국독립운동사>와 같은 한국 독립운동을 한 권으로 압축한 개론서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중요한 독립운동가이다.[148][149] 울산학센터, 울산발전연구원이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대표적 국내파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이 사건은 유명해져서, 노덕술을 다루는 <대한민국 악인열전> 같은 책에서도 친일파 노덕술과 노덕술에게 수차례 고문당한 독립운동가 이관술을 대조하면서 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센터가 2014년 한 이 행동을 언급한다. 참고로 임기상의 <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권에서도 노덕술과 엮어서 이관술을 다룬다.[150]
국가는 이관술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지 않고 있지만 국가가 주도하여 편찬해서 무료제공하는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도 이관술의 분량이 상당하다.
이관술은 일제 강점기 조선공산주의운동을 대표하는 거물이었다.
이관술은 울산의 대표적인 미서훈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한 울산 출신의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이 이승만 정권시절 3차례나 무공훈장을 받은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154]
유족은 2012년 국가 상대 소송을 제기해 2015년 승소했다.[155] 대한민국 대법원은 2015년 3월 31일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며 "국가는 유족에게 1억 6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156] 2015년 3월 27일 대법원은 "수감 중인 사람을 전쟁이 발발했다는 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부당하다. 국가는 유족에게 1억 6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이관술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한 국가배상 판결로 이관술은 약간의 명예회복을 했다. 이관술은 가장 유명한 피해자라 모든 골령골 학살 피해자 유족들이 주목했고 축하해 줬다.
“ | 이번 소송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셨던 산내학살유족회 회원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분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저도 다른 분들을 돕고 싶고, 유족회에 힘을 보태고 싶다. | ” |
— 손옥희(이관술 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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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송철호 울산광역시장이 광복절 기념사에서 이관술을 호명했다.
2019년 4월 24일 '이관술기념사업회'가 창립해 평생을 조국과 공익을 위해 헌신한 이관술의 독립유공자 서훈과 이관술 기념관을 추진하기로 했다. 미서훈 독립운동가 이관술의 서훈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학암 이관술 기념사업회는 일제 강점기하에 두 차례에 걸친 4년 6개월 감옥살이와 8년여의 수배생활, 또 모진 고문과 폭력을 이겨내면서 자신의 개인재산까지 바쳐 투쟁한 학암의 공적은 어떤 이유로도 외면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157]
기념사업회는 학암이 대한민국정부를 부정하거나 국가보안법을 어긴 사실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학암이 활동하던 해방 후는 8개월간 조선공산당은 국내 최대의 합법적인 정당이었고, 훗날 반공주의가 남한 이념이 되었지만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까지는 정당하고 합법적이었다고 밝혔다.[158]
"할아버지는, 엄마나 내가 그려온 '좋은 사람'이 틀림없었지요. 그러나 사실이 은폐된 왜곡된 권력의 역사 속에 희생되었던 시간, 한 따위는 후손에게 물려 주고 싶지 않습니다.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면서 땅속에 묻혔던 공적비를 캐내어 다시 세우긴 했는데, 그걸 제자리에 되돌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관술의 막내딸 이경환은 지금 양동마을 인근의 요양원에 있다. 2014년부터 앓기 시작한 치매로 그는 기억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부친이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할 때, 열다섯살이었던 막내딸은 올해 여든여섯(86세)이 됐다. 손옥희는 엷은 미소를 띠며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엄마는 치매로 기억을 잃은 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몰라요.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죽고 헤어지기만 했던 슬픈 가족사는 물론이고 아버지, 공산주의, 빨갱이 같은 고통스러운 기억도 놓아버리는 게 오히려 행복하지 않을까요?"
때로 그들이 지키고자 한 이념에 분단의 귀책을 묻곤 하지만, 그들은 일제에 맞서 타협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웠다. 그리하여 되찾은 해방 공간에서 돌연 동족에게 학살되어 버린 이들에게, 역사란 무엇일까. 나라의 기림은커녕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유족들 세월은 또 무엇인가. 이관술의 삶과 투쟁은, 비어 있는 우리 한국 현대사의 한 갈피를 여전히 아프게 환기하고 있다.
— 장호철, 고물장수 위장해 일제 맞선 교사, 그 딸의 '아버지 찾기'[159]
2019년 김종훈 국회의원은 이관술의 유공자 서훈이 필요하다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 지정은커녕 빨갱이로 낙인 찍혀 후손들까지 피해를 입어왔다”라고 말했다.[160]
2020년 이선호 울산 울주군수가 ‘울주군 독립운동사 조사를 위한 연구용역’ 착수보고회에서 용역 수행사인 ㈜브랜드콘텐츠 측에 “진보든 보수든, 좌든 우든, 가리지 말고 독립운동사를 찾아내야 합니다.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되지만, 제대로 된 독립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꼭 필요합니다. 독립운동 이후의 역사는 다른 측면에서 평가가 이뤄지겠죠.”라고 말했다. 사실상 울주군 출신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이 용역 사업은 그동안 울주군지역에 전무하다시피 한 독립운동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기초적인 학술용역이다. 이에 ㈜브랜드콘텐츠의 박한용 박사는 “울주군 출신으로, 전국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친 중심적인 인물”이라며 “이를 배제하면 역사의 고리가 끊어질 수밖에 없다”고 답했다.[161]
강사 출신 정치인 김찬휘는 이관술을 "1930년대부터 해방 때까지 가장 치열하게 선두에 서서 일제에 싸운 독립운동가"임에도 "조작된 정판사위폐사건으로 해방된 조국에서 또다시 야수적인 고문실에 갇혔다"라고 평했다.
이정호 전 울산교육과학연구원장은 "학암 이관술의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이런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을 빨갱이로 조롱할 권리는 이제 소멸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며,[162][163]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전 울산매일신문 편집국장)은 "필자는 이관술 씨의 열병으로 시달렸던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이관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울산 항토사회의 이관술 설화[편집]
향토사회에 이관술 관련 설화가 전해져 내려와 향토사학자들의 연구대상이다.
이일환에 따르면 이관술은 "선바위가 있는 울산 입압마을 출신의 전설적 인물"이다.[164]
해방 후 울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 중에는 이관술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일정 때 이관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에 백리 길을 달렸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선바위 아래 급류를 헤엄쳐 건너 바위절벽 동굴에 돼지머리를 갖다 두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일경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자유자재로 돌아다닌 이관술의 전설은 축지법을 썼다는 과장 외에는 대개 사실이기도 했다.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배성동 작가가 수집한 퇴역 빨치산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보급투쟁에 나가게 되면 반동 지주들을 건들기 마련인데 이관술 집이 있는 선바위마을은 건들지 않았어요. 물론 같이 간 동지들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관술 하면 물밑 50리를 가고 축지법으로 산을 넘는다는 영웅 아닙니까?"[165]
울산 사람들이 이관술을 기리는 명문을 대곡천 백보반석에 새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현재는 수몰된 상태이다.[166]
그리고 빗자루 설화가 있는데 정봉진 작가의 판화 작품으로 제작되었다.
3개월의 보석기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태연하게 요양하고 있던 이관술이었지만 병보석을 마친 뒤 형무소로 다시 잡혀갈 생각이 없었다. 주변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날을 잡아 도주할 계획을 짜게 된다. 그리고 병보석이 끝나기 직전 결행한다. 달이 뜨지 않아 칠흑처럼 어두운 밤 집 뒤편 대나무 숲을 통해 아주 간단히 짐을 꾸려 탈출을 감행했다.
다음 날 아침 이관술 집 앞에 보초 서듯 지키던 주재소 순사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온 동네에 비상이 걸렸고, 경찰들은 이관술이 도주한 행방을 찾느라 난리가 났다. 그러나 이관술은 도피한 경로도 흔적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감쪽같이 사라졌다. 반대로 어떻게 귀신처럼 도주했는지 여러 소문만 무성했다.
그중 하나가 ‘빗자루 전설’이다. 이관술이 사라진 날 밤에 망성 쪽 태화강 위로 빗자루 같은 것이 떠서 건너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이다. 아니면 선바위 뒤쪽 야산 위로 훌쩍 날듯이 넘어가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도 있었다. 이런 것들이 묶여서 이관술의 탈주는 홍길동 같은 전설처럼 부풀려지기도 했다.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2022
대한민국 유공자 지정 논의[편집]
이관술은 월북을 거부하고 계속 대한민국에만 있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과 관계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국가보훈처는 이관술의 유공자 심사를 보류한다는 결정서에 그 이유를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 이관술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당시 이관술은 정판사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돼 갇혀있던 때였다. 어떤 정치적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상징적으로 선출 명단에 이름이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관술 연구자들은 "보훈처 심의위원들도 이관술이 북한 정권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관술을 국가유공자로 서훈하게 된다면 당시 야당의 정부에 대한 공격이 거세졌을 것이란 게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라며 반발했다.[167] 똑같이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 있던 김철수의 경우 건국훈장을 받은 바 있다. 명단에는 이관술과 마찬가지로 감옥에 있었던 송언필도 있다. 이들은 출마 의사를 표명했을 가능성이 없다.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남한지역의 경우 지하에서 비밀리에 진행했기에 많은 한계가 있었으며, 선거인단은 출마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은 사람들을 임의로 명단에 올리고 뽑았다. 1948년의 좌우대립 상황과 대한민국 형무소 면회 방식을 고려하면 이관술은 선거 출마 의사조차 표명했을 가능성이 없다. 그런데 국가보훈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전혀 관계 없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어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일방적으로 명단에 올려버렸으면 친북으로 간주하겠다고 한다. 납북 인사들에게도 서훈을 주면서 이관술에게는 자기 의지로 하지 않은 일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한다.
이관술이 활동하던 시기 조선공산당은 일본공산당과 같은 합법정당이자 최대 정당이었다. 이관술이 광복 후 한 정치 활동은 당을 대표해서 입장을 발표하고 미군정 인사를 만나는 등의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활동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참여만 하지 않으면 독립운동가에게 서훈을 수여하도록 법이 개정되어 남로당원, 폭동 참여자, 남파간첩 혐의자 등에게 서훈을 수여한 바 있다. 반면 이관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적도 없고 남로당 간부였던 적도 없다.
이관술이 조선공산당에서 높은 지위였던 이유는 이관술이 해방의 날까지 대전에서 항일 비밀결사를 조직했던 끝까지 일제에 저항한 극소수의 독립운동가라 이러한 투쟁경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관술은 해방의 날까지 독립운동을 지속한 투사였으며 자신이 공산주의를 택한 이유는 민족해방 투쟁을 위해서였다고 수기에서 명시적으로 말했으며 월북을 거부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에 어떤 기여도 한 적 없고 최종 국적은 대한민국이었다.
이관술은 향토사회에 전설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역사적 인물인데, 이관술이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해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들이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168]
독립운동가 이관술을 체포하고 고문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이 3차례나 무공훈장을 받은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169]
게다가 이관술의 생가가 있는 울산 울주군 입암마을은 독립운동가 8명을 배출해 ‘독립운동가 마을’로 알려졌지만 입암리 일원 183만4000㎡가 국토교통부 공공택지지구로 공식 지정돼 마을이 없어지게 됐다. 이관술과 이웃 손진인, 손후익, 이우락 등 독립운동가의 집은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이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됐다.[170]
대중매체 및 예술작품[편집]
- 장성운, 인물기행 문화기행, 1995
- 안재성, 경성 트로이카, 2004(소설)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다큐멘터리, 평전)
- 이효정, 가슴으로 울고(시)
- 김성동 (소설가),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2014
- 울산MBC 시사기획 돌직구, 항일과 친일-끝나지 않은 전쟁, 2015(3.1절 특집)
- 박시백, 35년, 2018-2020(만화)
- 황석영, 철도원 삼대, 2020
- EBS 다큐프라임, 후손, 2021(3.1절 특집)
- MBC 다큐프라임, 불굴의 항일투사 학암 이관술, 2021(광복절 특집)
- 팟캐스트 새가 날아든다, 이관술 지사 스토리, 2021
- 울산MBC 울트라, 이관술 VS 노덕술, 2022(3.1절 특집)
- 박선욱, 풍찬노숙: 독립운동가 기림시집, 2022
- 정봉진, 선바위-신출귀몰 이관술, 2022(판화)
행사[편집]
- 이관술 국회세미나 - 항일운동가 이관술 국회세미나 전자자료
참고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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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연재에 들어가며(1)
-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를 지향했던 이관술(2)
- 이관술의 삶을 바꾼 사건, 광주학생독립운동(3)
- 항일·혁명운동가로 성큼…반제국주의동맹에서 경성트로이카까지(4)
- 혁명가 동지 이재유와 경성 트로이카를 함께 이끈 이관술(5)
- 이관술, 비밀 아지트 구축과 이재유 체포까지 20개월(6)
- 홀로 남은 이관술, 새로운 결심으로 경성으로 잠입하다(7)
- 이관술, 전국을 돌며 항일혁명 동지들을 규합하다(8)
- 이관술과 박헌영, 또 운명처럼 새로운 동지를 만나다(9)
- 이관술, 수배 6년만에 체포…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고문당해(10)
- 이관술, 서대문형무소에서 병보석 석방…고향 입암 마을에서 탈출(11)
- 고향에서 탈출한 이관술 그리고 경성콤 항일혁명 동지들(12)
- 1945년 해방을 맞이한 이관술, 서울에서 동지들과 상봉하다(13)
- 해방공간 건국준비위원회 그리고 조선공산당 재건(14)
-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조선인민공화국 선포(15)
- 미군정과 인민위원회의 대립…울산을 방문한 이관술(16)
- 해방공간 정치 변화 속 결성된 전국조직과 통일전선(17)
- 해방공간 가파른 정치세력 변화 그리고 임시정부의 귀환(18)
- 해방 후 첫 정치 여론조사…양심적인 정치 지도자 5위로 뽑혀(19)
- 모스크바 3상회의 후 신탁통치 논란…미군정 하지를 만난 이관술(20)
- 신탁통치 찬반 논란 속에서 심산 김창숙을 만났던 이관술(21)
- 이관술과 손응교의 오래되고 깊은 인연…손응교가 기억해 준 이관술(22)
- ‘신탁통치’ 논쟁으로 갈라지는 정세 속에서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23)
- 미군정 조작사건, 정판사 위조지폐 주범이란 누명을 쓴 이관술(24)
- 조작된 정판사 사건으로 누명 쓰고 체포된 이관술(25)
- 빗발치는 이관술 누명 탄원(26)
- 고문, 허위자백, 증거조작 범벅인 ‘정판사’ 재판. 이관술을 향해 놓인 덫들(27)
- “절대로 현장을 본 적이 없소” 안순규 양심고백 위증재판과 이관술 출석 공판(28)
- 이관술을 사슬에 채운 때 벌어진 9월 총파업과 박헌영 월북(29)
- 10월 항쟁이 무력 진압 되고, 정판사 재판은 검찰의 조작 명백(30)
- 가장 먼저 최후진술, 그러나 짜인 각본대로 무기징역 선고(31)
- 이관술 서울 형무소에서 대전 형무소로 이감, 옥중 생활(32)
- 대전형무소 수감 중 ‘반곡초등학교’ 건립에 땅을 기부한 이관술(33)
- 정판사사건 조작, 여운형 암살, 반민특위 테러를 주도한 ‘악인 노덕술’(34)
- 이관술이 대전형무소에 갇힌 동안 벌어진 남한 단독정부 수립 충돌(35)
- 1948년 4월 30일, 평양에서 남북대표자 연석회의 공동성명 발표(36)
- 남과 북으로 흩어진 이관술의 항일혁명 동지들(37)
- 국가보안법과 보도연맹, 이관술의 고향 입암마을도 비켜 가지 못해(38)
- 1950년 봄, 김삼룡 이주하가 체포되면서 남로당이 붕괴되다(39)
- 남로당 붕괴와 평화공세 그러나 불시에 밀려온 6월 25일 한국전쟁(40)
- 한국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 함락, 김삼룡과 이주하는 개전 다음 날 처형(41)
- 북한군은 서울에서 3일을 멈췄고, 국군의 지연 작전은 대전 아래까지(42)
-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이관술이 수감된 대전형무소에서 포문이 열렸다(43)
- 대전 골령골, “조선 민족 만세” 외치는 순간 사살된 이관술(44)
- 이관술의 동생과 사위 역시 보도연맹 학살, 남겨진 후손들(45)
- 항일혁명운동가 이관술”과 함께 했던 지난 1년을 마무리한다(46)
- 임경석 (2022). 《임경석의 역사극장: 15년간 일본 수배망 뚫은 ‘신출귀몰’ 혁명가 이관술》.
- 임경석 (2023). 《임경석의 역사극장: 6년9개월 만에 체포된 이관술이 일제에 털어놓은 것은》.
- 임경석 (2023). 《임경석의 역사극장: 일본 경찰 따돌린 아버지도 딸의 얼굴이 궁금하단다》.
외부 링크[편집]
- 복원된 정판사 사건의 재판기록은 임성욱 박사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각주[편집]
- ↑ 이에 이문웅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염려했다.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여기서 '조선인민공화국'이란 1948년에 출범한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서울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가들이 해방 후의 혼란한 정국에서 대열을 정비하기 위해서 조직한 '조선인민공화국'이기에 오해 없기 바란다."
- ↑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
- ↑ 이에 이문웅 서울대 인류학과 명예교수는 다음과 같이 염려했다.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여기서 '조선인민공화국'이란 1948년에 출범한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서울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운동가들이 해방 후의 혼란한 정국에서 대열을 정비하기 위해서 조직한 '조선인민공화국'이기에 오해 없기 바란다."
- ↑ 임, 성욱 (2015년 2월). 《미군정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연구》. 학위논문(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대학원 : 한국학과.
- ↑ 안재성,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 ↑ 외면받는 울산의 독립운동가들.. 재조명 절실
- ↑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 ↑ 항일운동가 이관술 국회세미나 전자자료
- ↑ 회고록에서도 편지에서도 무언가가 궁금하다는 말이 많다.
- ↑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2007
- ↑ “[기획]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울산저널.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고물장수 위장해 일제 맞선 교사, 그 딸의 '아버지 찾기'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여성해방의 길을 찾던 혁명가 이순금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이준식,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 ↑ 배문석, 이관술의 삶을 바꾼 사건 광주학생독립운동
- ↑ 박만순의 기억전쟁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 ↑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2015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2021년 건국훈장 애족장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파견한 조정래가 검거된데다가 대회가 연기되어 실패한다.
- ↑ 임경석의 역사극장: 일본 경찰 따돌린 아버지도 딸의 얼굴이 궁금하단다
- ↑ 임경석의 역사극장: 일본 경찰 따돌린 아버지도 딸의 얼굴이 궁금하단다
- ↑ 이준식,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 ↑ 금강산인이 1946년 4월 쓴 이재유 탈출기에서 1930년대 당시 어떤 고문이 자행되었는지에 대한 묘사를 남겨주었다. 이재유와 이관술은 동일한 시기에 각각 경성트로이카 사건과 반제동맹 사건으로 고문당했으므로 거의 비슷한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금강산인은 이 글에서 "이 기록을 쓰자면 이관술 동무와 박진홍 동무의 많은 교시가 있어야 될 것인데 지금 두 동무가 퍽 분망한 중이라 친히 그 지시를 받을 기회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며 앞으로 두 동무의 지시 아래 이재유 동무의 전기가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바이다"라고 이재유와 가장 친한 동지가 이관술과 박진홍임을 말해준다.
- ↑ 임기상, 친일경찰의 대명사 '노덕술'이 '자랑스런 울산인'?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이관술,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194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이 단체는 경성콤그룹이라고도 하는데 이후 이관술이 만드는 경성콤그룹과는 다른 단체이다.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이재유가 묘사한 당시 여성 노동자의 환경 중 기숙사에 속박당하는 처지와 관계된다.
- ↑ 현대의 비정규직 반대와 비슷한 요구이다.
- ↑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 ↑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2015
- ↑ 김경일,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2015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최성룡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최규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 ↑ 최규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 ↑ 최규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최규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박헌영 평전, 2020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임종금, 고문조작의 달인 노덕술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임경석, 6년 9개월만에 체포된 이관술이 일제에 털어놓은 것은
- ↑ 신주백의 논문을 말한다.
- ↑ 6년 9개월만에 체포된 이관술이 일제에 털어놓은 것은
- ↑ 일본 경찰 ‘머리 꼭대기’ 위에…이 독립운동가의 진술 전략
- ↑ 김철수 구술
- ↑ 안재성, 월간 좌파 제5호 2013년 9월호 혁명가 열전
- ↑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 박갑동,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 ↑ 조선인민보 1946년 4월 16일자 이관술 인터뷰와 안재성의 <이관술 1902-1950>을 종합하여 서술했다.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최규진,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
- ↑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
- ↑ 안재성, 이현상 평전, 2007
- ↑ 정병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2008
- ↑ 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 ↑ 박현주,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 ↑ 임경석의 역사극장: 15년간 일본 수배망 뚫은 ‘신출귀몰’ 혁명가 이관술
- ↑ 고물장수 위장해 일제 맞선 교사, 그 딸의 '아버지 찾기'
- ↑ MBC 다큐프라임 불굴의 항일투사 학암 이관술
- ↑ 강양구,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 ↑ MBC 다큐프라임 불굴의 항일투사 학암 이관술
- ↑ MBC 다큐프라임 불굴의 항일투사 학암 이관술
- ↑ 신주백의 책 <1930년대 국내 민족 운동사>에 따르면 본래 실세 자리인 조직부장에 추천되었는데 이관술이 사양하고 그보다는 다소 한직인 재정부장을 하겠다고 했다.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김성동, 끝없는 도주 일생 이관술
- ↑ 출처: 신주백, 1930년대 국내 민족 운동사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안재성의 이관술 1902-1950, 이현상 평전,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 ↑ 공산당 지도부의 연석회의로 중앙파와 반대파가 서로 인격적 모욕까지 하며 난상토론했다.
- ↑ 안재성의 이관술 1902-1950, 이현상 평전,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반병률의 이관술 국회세미나 기조강연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김성동, 끝없는 도주 일생 이관술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 ↑ MBC 다큐프라임 불굴의 항일투사 학암 이관술
- ↑ 안재성,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 ↑ 그럼에도 7월까지 체포되지 않은 이유는 <환상의 터널 그 시작과 끝> 등에서의 박갑동의 증언에 따르면 장택상이 처음에 체포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박현주,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박만순의 기억전쟁]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오마이뉴스. 2019.04.27.
- ↑ 대전형무소 수감 중 ‘반곡초등학교’ 건립에 땅을 기부한 이관술
- ↑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2006
- ↑ “[기획]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이관술이 수감된 대전형무소에서 포문이 열렸다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43)”. 울산저널.
- ↑ “[기획] 대전 골령골, “조선 민족 만세” 외치는 순간 사살된 이관술 -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44)”. 울산저널.
- ↑ 안재성, 잃어버린 한국 현대사, 2015
- ↑ “[현대사 아리랑]‘끝없는 도주’ 일생 이관술”. 주간경향. 2008.12.04.
- ↑ 박만순의 기억전쟁 감옥에서 땅 500평 기부한 독립운동가... 그의 마지막
- ↑ 임경석, 일본 경찰 따돌린 아버지도 딸의 얼굴이 궁금하단다
- ↑ ‘빨갱이 가족’ 낙인찍혀 고통당했던 유족, 지난달 배상 판결
- ↑ ‘빨갱이 가족’ 낙인찍혀 고통당했던 유족, 지난달 배상 판결
- ↑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2014
- ↑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2014
- ↑ 박석철, 이승만이 비호했던 노덕술 유권자가 단죄
- ↑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전후사 이야기
- ↑ 임영태의 다시 보는 해방전후사 이야기
- ↑ 임영태의 한국 현대사, 망각과의 투쟁
- ↑ 외면받는 울산의 독립운동가들.. 재조명 절실
- ↑ “독립운동했는데 '빨갱이' 낙인... "재조명해 유공자로"”. 오마이뉴스. 2019.05.22.
- ↑ “"전쟁 발발이유로 총살한 것은 불법 부당"”.
- ↑ “외면받는 울산의 독립운동가들.. 재조명 절실”. 파이낸셜뉴스. 2019.08.14.
- ↑ 외면받는 울산의 독립운동가들.. 재조명 절실
- ↑ 장호철, 고물장수 위장해 일제 맞선 교사, 그 딸의 '아버지 찾기'
- ↑ 김종훈, “학암 이관술 선생 역사적 재조명 통해 유공자 서훈 검토 필요”
- ↑ 울산 울주군, 좌·우 사상 불문하고 숨겨진 ‘독립운동 역사’ 찾는다
- ↑ 비운의 독립운동가 이관술
- ↑ 불굴의 항일투사 이관술
- ↑ 이관술 국회세미나 전자자료
- ↑ 이관술 국회세미나 전자자료
- ↑ 이관술 국회세미나 전자자료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배문석,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 ↑ 외면받는 울산의 독립운동가들.. 재조명 절실
- ↑ 이보람&조희연, “독립운동가 8명 배출했는데… 개발에 밀려 흔적 사라질 판”